제3의 선택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3 미치 랩 시리즈 2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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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CIA 국장 스탠스필드가 시한부 진단을 받자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일부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될 인물을 후임자로 앉힐 음모를 꾸민다. CIA 대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는 이들의 음모에 맞서면서 대통령의 명령으로 독일에 급파한 미치 랩의 임무를 지휘한다.

중동 테러리스트와 밀거래중인 독일 기업가를 암살하기 위해 침투한 랩은 왠지 모를 위화감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연인 애너와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임무라는 희망에 차있다. 하지만 작전 도중 랩은 아이린 케네디가 투입한 동료 첩보원에게 배신당하고 적진에 홀로 넘겨지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권력의 이동에 이은 미치 랩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CIA 대테러센터 내 비밀조직인 오리온 팀의 일원이지만 공식적으로는 ‘CIA 사람이 아닌 미치 랩은 오로지 스탠스필드 국장과 아이린 케네디 본부장, 그리고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들에 대한 세 번째 선택, 즉 비밀첩보와 암살을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최고의 킬러이기도 합니다.

 

전작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당한 백악관을 구했던 랩은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지를 얻게 됐고, 덕분에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에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덫에 빠지고 마는데, 이후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랩을 제거하려던 자들의 정체와 목적이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독일에서의 비밀임무에 대해 알게 됐는가를 추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번 임무를 마지막으로 CIA를 떠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랩의 간절한 소망이 산산조각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홀로 고립된 랩의 가장 큰 딜레마는 독일에서의 임무를 아는 자들이 그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뿐이란 점입니다. 대통령, 스탠스필드 국장, 아이린 케네디 본부장이 그들인데, 그들 가운데 자신을 살해하려던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랩을 지독한 혼란에 빠뜨립니다. 특히 이번 임무를 끝으로 CIA를 떠나겠다는 의중을 밝혔던 터라 너무 많은 비밀을 아는 자신이 제거대상으로 선택됐을 수 있다는 추정은 랩에겐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랩의 추적은 눈앞에서 번번이 사라지는 단서와 증인들 때문에 난관에 빠집니다. 특히 애초 범인의 목적이 단순히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모종의 음모라는 걸 서서히 깨달으면서 랩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당혹스런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범인의 정체와 목적이 독자에게 비교적 초반에 공개되기 때문에 특별한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랩을 제거하고 CIA를 장악한 뒤 더 큰 야망을 이루려는 범인의 정치적 음모가 정교하고 치명적인 계획에 의해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누가 범인?” 이상의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여기자 애너 릴리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CIA를 떠나려는 랩의 소망이 이런저런 이유로 발목을 잡히는 가운데, 누군가는 랩의 정체를 파헤치려 하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또 누군가는 그의 연인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리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 랩으로서는 평소 그답지 않게 감정적인 동요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런 탓에 어느 선까지 올라가든 마지막 한 놈까지 모두 처치해버릴 겁니다.”라고 대놓고 선언할 정도로 폭주에 폭주를 거듭하게 됩니다.

 

미드 ‘24’의 속도감과 영화 본 시리즈의 묵직함이 결합한 파워 액션 서스펜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대로 미치 랩의 활약은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든 긴장감과 속도감을 발산합니다. 그야말로 미치 랩은 ‘24’의 주인공 잭 바우어와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을 황금비율로 합쳐놓은 캐릭터라고 할까요?

3의 선택은 다음 이야기를 위한 꽤 큰 떡밥을 남겨놓은 채 마무리가 돼서 이어지는 시리즈 3권력의 분립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놓았는데, 과연 평범한 삶을 꿈꾸던 미치 랩이 워싱턴의 가공할 정치적 음모 속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사뭇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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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온천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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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게 2007년인데, 그해 혹은 그 다음해쯤 읽은 기억이 있으니 10년도 훌쩍 넘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수록된 단편들의 줄거리도, 여운이나 느낌도 그저 가물가물한 상태였는데, 얼마 전 불쑥 일본의 온천 생각이 떠올라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첫사랑 온천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온천은 료칸이라는 숙박시설과 짝을 이루게 되면 좀더 고즈넉하거나 정갈한 분위기를 발산하게 되지만, 동시에 은밀하고 에로틱하고 비밀스러운 이미지를 품게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딱 한 번 일본의 관광지인 유후인의 료칸에서 노천탕이 딸린 방에 며칠 머물렀던 경험 덕분에 그 양면적인 분위기를 수박겉핥기식으로나마 맛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요시다 슈이치의 첫사랑 온천은 제겐 제목만으로도 여전히 가슴 설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0대부터 30대에 이르는 다섯 커플의 다섯 가지 이야기가 다섯 곳의 온천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단편집인데 온천과 커플이라는 소재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의 테마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말랑말랑하고 훈훈한 엔딩으로 포장된 해피 로맨스만 그려지진 않습니다.

순수하고 원초적인 욕망에 휩싸인 17살 남자의 첫사랑(‘순정 온천’), 결혼을 앞둔 20대 남자가 설국(雪國) 속 온천에서 느끼는 사랑에 대한 소박한 만족과 기쁨(‘흰 눈 온천’), 결혼 2년차에 불륜에 빠진 남자가 겪는 미묘한 심리적 변화(‘망설임의 온천’), 그리고 행복하고 여유있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실은 자기애 혹은 이기심에 다름 아닌 행위들이었기에 결국 그로 인해 사랑을 잃어버리고 마는 남자(‘첫사랑 온천’, ‘바람이 불어오는 온천’) 등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다섯 커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온천 역시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는데, 바닷가, 숲속, 설국, 계곡 등 다채로운 풍경 속에 자리한 온천들은 온몸을 풀어지게 만드는 뜨거운 온천수와 그것이 뿜어내는 김의 향연까지 더해져 사랑 때문에 희로애락을 겪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하거나 심난하게 만들곤 합니다. 인물들도, 이야기도 특별하진 않지만 온천이라는 공간의 고즈넉하면서도 에로틱한 매력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로망 가운데 하나는 눈으로 파묻힌 훗카이도 어디쯤의 료칸에서 방에 딸린 개인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책과 사케만으로 1주일쯤 보내다 오는 것입니다. 그곳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흘러갈 것만 같고, 책과 사케 역시 현실과는 전혀 다른 맛을 풍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사랑이든 증오든 어떤 감정을 품고 갔더라도 설국의 풍경과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조금은 스스로를 정리하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첫사랑 온천의 수록작들이 그런 기대와 느낌을 모두 맛보게 해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이런저런 소소한 즐거움과 망상(?)을 만끽한 건 사실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요시다 슈이치의 온천과 사랑 이야기를 한번쯤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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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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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간격으로 도쿄 시내에서 두 건의 매춘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39살 미혼인 는 두 사건의 피해자와 밀접한 관계입니다. 한 명은 어릴 적부터 괴물 같은 미모로 주위를 압도했던 친동생 유리코이고, 또 한 명은 명문 Q중고교 동창생인 가즈에입니다. 재판이 열리는 법원에서 Q중고교 동창들과 마주친 는 피해자들이 남긴 일기를 전달받곤 20년도 넘은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과 두 피해자를 비롯한 네 명의 여성이 어떻게 괴물로 진화됐는지를 찬찬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이 작품은 1997년에 벌어진 도쿄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집필됐다고 합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대기업 간부가 밤이면 거리에서 몸을 팔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 꽤 충격적인 뉴스였다고 하는데, 기리노 나쓰오는 한 여성의 극단적인 변신을 야기한 동기와 과정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픽션으로 그리기 위해 10대 시절을 기점으로 이야기를 직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 마음속에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제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해진 셈입니다.”라고 밝힙니다.

 

이 작품에는 네 명의 괴물이 등장합니다. 15살에 숙부와 첫 관계를 가진 유리코는 축복인지 저주일지 모를 괴물 같은 미모와 타고난 님포마니아(색정광, 비정상적 성욕항진증)로 인해 평생 수많은 남자에게 몸을 팔아왔고, 그녀의 친언니인 동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못 생긴 추녀라는 낙인을 오로지 악의라는 방패로 막아내며 평생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고슴도치처럼 살아왔습니다. 또 물려받은 것도 타고난 것도 부족했던 가즈에는 노력으로 그 모든 걸 극복했지만 대기업 입사 후 또 다른 차별과 멸시와 마주친 뒤 자신만의 해방구를 찾기 위해 매춘부가 됐고, 전도유망한 모범생이었던 미쓰루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타인을 파멸시키는 운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괴물이 된 사연은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에 의한 것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악연에 의해 발아되고 증식된 것들입니다. 괴물 같은 미모의 동생 유리코가 없었다면 는 악의로 똘똘 뭉친 괴물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기업 간부와 매춘부라는 이중생활을 영위했던 가즈에는 사립명문 Q중고교에서의 끔찍한 학창생활이 아니었다면 평범하지만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 됐을 인물입니다. , 1등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던 모범생 미쓰루와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타고난 미모를 지녔던 유리코가 자신들의 현실과 재능에 만족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적인 상황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기승전결과는 거리가 먼 나열식 서사를 통해 이들의 악연과 괴물로의 진화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고 꼼꼼하게 그려냅니다. 순수하지만 동시에 사악했던 10대 시절부터 마흔을 코앞에 둔 시기에 맞이한 각자의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마치 일기장을 들여다보듯 네 명의 일생을 지켜본 독자들에겐 그저 씁쓸함만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괴물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들고 싶었다는 기리노 나쓰오의 의도는 완벽하게 성공한 셈인데, 개인적으론 과도한 분량과 작위적인 캐릭터 때문에 좀처럼 이입하기가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네 명의 주인공은 물론 단역에 가까운 조연들까지 극단적으로 일그러지고 비틀린 인물들을 지켜보는 일이 꽤 힘들었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제목이 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이다 보니 외모로 평가받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차별의 희생양이 되거나, 때론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머리 좋은 남성에게 의존하려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출판사 소개글처럼 현대 여성이 처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라든가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괴물적인 본능이나 충동을 깊은 공감대 형성을 통해 치유하는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설정 탓에 혐오감 이상의 공감은 어렵겠다는 생각인데, 어쩌면 제가 여성에 대해 너무 모르는 편협한 남자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네 명의 괴물이 현대 여성을 상징한다거나 여성들의 본능과 충동에 대한 치유를 제공한다는 건 이 작품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홍보성 멘트라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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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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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에서 30대 여성 오기현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실족사나 자살로 보였지만 성()이 다른 언니 윤의현은 담당형사 백규민에게 화원을 운영하는 동생의 의붓아버지가 의심스럽다는 암시를 준다. 백규민은 실제로 화원에서 여러 가지 수상한 정황을 찾아낸다. 한편, 자신이 출강하는 대학에서 교수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윤의현은 전력을 다해 피해학생을 도우려 애쓴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성추행 교수에 대한 응징을 꾀한다.

수사가 답보 상태인 가운데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백규민은 무관해 보이던 사건들이 실은 서로 연결돼있음을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릴 듯한 이 작품은 탐욕에 찌든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고통스런 여정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폭력, 갈취, 갑질, 성폭력, 은폐, 살인 등 온갖 끔찍한 행위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부와 권력과 힘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 뿐인 희생자들은 물리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마저 참혹하게 파괴당하면서도 좀처럼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건 오기현의 죽음, 대학 내 성폭력 사건 이 병행되는데,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이 두 사건의 유일한 공통점은 시간강사 윤의현이라는 인물뿐입니다. 그녀는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백규민 형사를 돕는 한편, 성폭력의 트라우마에 벌벌 떠는 제자를 감싸주며 가해자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려 동분서주하기도 합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백규민은 슈퍼맨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 수사 과정이 조금은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이고 사실감을 갖춘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굳건한 믿음과 집요한 의심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특히 한 번 사람을 믿으면 계속 신뢰하는 그의 인성 덕분에 사건 관련자인 윤의현에게 다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이입은 백규민의 수사를 혼선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미스터리 픽션이다 보니 결국 어떤 식으로든 악()은 응징될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폭력에 휘말려 인생의 일부든 전부든 망가지고 만 희생자들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가해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이 그에 비례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이입이 어느 선 이상을 넘지 못한 것도 사실인데, 개인적으론 작가가 사건들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혹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려 한 탓이란 생각입니다. 이 아쉬움은 결국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극복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특별한 여운이나 인상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분량에 비해 인물과 사건이 많고 이야기 전개도 빨라서 어느 대목을 소개하든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보니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졌고 캐릭터와 구성과 문장 모두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딱 한 가지, 막판 반전 코드 때문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중반부쯤부터 혹시?”라는 예감을 가질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제발 그것만은...”이란 바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코드가 진실을 여는 열쇠로 작동되자 앞서 읽은 이야기들이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한 평이긴 하지만 얼마 전에도 이 코드가 활용된 한국 스릴러를 읽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어서 그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안정감 있는 필력과 문장 덕분에 이선영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출간된 작품들을 살펴보니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소재들이라 당장 찾아 읽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 작품이 출간된다면 반드시 읽을 한국 장르물목록 상단에 올려놓을 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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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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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래 경제 공황과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져온 베네수엘라. 공포정치와 폭력적 독재는 물론 살인률 세계 1위를 기록한 흉흉한 정국 속에서 30대 여성 아델라이다 팔콘이 감내해야 했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그린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아델라이다는 정부의 비호 아래 암거래를 일삼는 보안관일당에게 아파트를 빼앗기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이웃집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가 사망한 걸 발견한 아델라이다는 그녀 앞으로 발급된 스페인 여권을 통해 신분을 훔쳐 지옥과도 같은 베네수엘라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스페인 여자의 딸은 주인공 아델라이다가 아니라 그녀가 신분을 훔치려는 이웃의 죽은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연히 아델라이다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목 자체가 주는 함의와 아이러니가 무척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그저 낯설기만 한 이웃, 그래서 이름보다 더 친숙한 스페인 여자의 딸이란 호칭, 그리고 그녀의 신분을 훔치는 것만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란 설정은 벼랑 끝에 선 아델라이다가 얻은 마지막 희망이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한지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된 아델라이다가 스릴 넘치는 액션을 펼치거나 기민한 첩보물의 주인공이 되어 베네수엘라를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도 아닙니다. 물론 공포정치가 휘두른 폭력의 민낯과 끔찍한 살상의 기록이 간간이 묘사되곤 하지만 그보다는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평범한 30대 여성의 지독한 생존기에 더 가깝습니다. , 어린 시절의 아델라이다가 보낸,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베네수엘라에서의 일상이 지금의 현실과 대비되듯 번갈아 한 챕터씩 배치되어 현재의 그녀의 처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줍니다.

 

어머니를 땅에 묻으면서 언제 무장폭도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거나 시신의 뼈까지 탈취하는 무리들이 어머니의 묘를 파헤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 또 난데없는 습격자들에게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기는가 하면 밤마다 이어지는 약탈과 방화에 불을 끈 채 숨죽여야 하는 상황, 그리고 스페인 여자의 딸로 변신 과정과 탈출 과정에서의 위기일발 등 한 달여에 걸친 아델라이다의 지옥은 어느 장면 할 것 없이 생생하고 강한 인상을 남기지만 무엇보다도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일념 아래 이웃 여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애처롭고 안쓰럽게 그려져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번역가 역시 이 장면을 압권으로 꼽았는데, 이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오랫동안 회자될 명장면이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소 낯선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다 정치적, 역사적 사료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별로 없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거리감 있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몰라도 전혀 지장이 없을뿐더러, 현실의 요소가 그대로 반영되었더라면 오히려 소설 읽기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각주나 부연설명이 부족한 탓에 앞뒤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 몇 번씩 되읽어도 그 의미나 문맥이 잘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문장들이 간혹 있었는데, 대부분 원작자의 글쓰기 성향으로 보였지만 때론 이해 가능한 의역이 필요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소개글만 봤을 땐 탈출 스릴러또는 정치적 성향이 짙은 고발성 스토리를 기대했던 게 사실인데 그런 맥락에서 보면 다소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독자에 따라 휴머니즘과 리얼리티의 매력을 만끽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때론 주장이나 이념보다 생존이 탄탄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의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사도 전개방식도 주인공의 캐릭터도 전혀 다르지만 읽는 동안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그에 의해 자행된 무고한 죽음이라는 공통점 때문일 텐데,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팩션의 힘과 매력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낯선 이국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베네수엘라 여인 아델라이다가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되어 어둠과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에서 깊은 인상과 여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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