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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 ㅣ 스토리콜렉터 37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뮌헨의 한 여성이 성당의 오르간에 묶인 상태에서 검정 잉크에 익사한 채 발견된다. 최근 불에 타 죽은 여성과 개에게 물려 죽은 여성 역시 동일범의 소행으로 드러난다. 일련의 사건들이 미궁에 빠진 상태에서 동일범에게 어머니를 잃은 초보 여형사 자비네는 비스바덴 범죄수사국에서 파견된 천재 프로파일러 슈나이더와 함께 수사에 나선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내내 신경전을 벌이지만, 자비네가 중요한 단서를 포착한 것을 계기로 서로를 파트너로 인정하며 수사에 속도를 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슈나이더 & 자비네 시리즈’ 작품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 ‘지옥이 새겨진 소녀’, ‘죽음을 사랑한 소년’, ‘죽음의 론도’인데, 어쩌다 보니 시리즈 첫 작품을 가장 뒤늦게 읽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론 ‘프리퀄 읽기’처럼 돼버렸는데, 덕분에 나름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괴팍하기 짝이 없지만 천재적 재능을 지닌 프로파일러 마르틴 S. 슈나이더와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정의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신참 형사 자비네 네메즈가 어떤 경위로 파트너가 됐는지를 프리퀄처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리즈의 첫 작품인 만큼 꽤나 잔혹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피해 여성들은 하나 같이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는데, 무엇보다 세컨드 주인공인 자비네의 어머니가 희생자 중 한 명이란 점이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성당 오르간에 묶인 채 검정 잉크로 익사당한 어머니의 시신을 직접 본 자비네는 상사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직접 잡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말단 형사인데다 가족이 희생당한 사건이니 자비네의 참여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만 범죄수사국에서 파견된 슈나이더는 금세 자비네의 특별한 능력을 알아보곤 막무가내 식으로 그녀를 수사에 끌어들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되기 전의 슈나이더와 자비네의 좌충우돌 해프닝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약간은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 전개되지만 두 사람의 ‘티격태격 케미’는 언제 봐도 흥미진진해서 전혀 지루하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슈나이더와 자비네가 수사를 벌이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수상쩍은 남자의 지난 몇 달 간의 정신과 치료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을 독자에게 공개함으로써 ‘누가 범인?’보다는 ‘동기’에 초점을 맞춘 채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희생자들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만일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면 왜 지금 이 시점에 연이어 살인을 저지르는가? 왜 이토록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했는가? 이 끔찍한 살인방식은 뭔가를 상징하는 기호인가? 시신들이 하나 같이 교회나 성당 등에서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음의 론도’를 제외한)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 가해자가 가족이기에 더 크고 깊게 자리 잡은 트라우마, 그리고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인 끝에 연쇄살인으로 발현되고 마는 강력한 증오심 등 ‘슈나이더 & 자비네 시리즈’에서 주로 다룬 익숙한 서사를 이 작품에서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폭력과 트라우마와 증오심 등 연쇄살인의 밑거름이 된 장치들은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작위적이거나 지나치게 상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범인의 트라우마의 원천인 몇몇 요소들 – 어릴 적 죽은 누나, 아버지의 폭력, 어머니의 위협, 모순된 시어로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시(詩) - 은 나름 이해 못할 설정들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범인의 동기 자체가 정신적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니 명쾌한 공감은 불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드는 건 다른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의 경험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유명한 동화를 범인의 범행과 연관시킨 설정은 이 작품 외에 다른 ‘슈나이더 & 자비네 시리즈’의 작품에서도 읽은 적 있다는 점인데, 작가가 꽤나 ‘잔혹동화’를 즐기는 것 같아 보여서 살짝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작품 말미에도 인쇄돼있지만 인터넷 서점에선 이 동화의 삽화를 컬러로도 볼 수 있는데, 읽기 전이라면 몰라도 다 읽고 다시 보면 도저히 동화 속 삽화로만 보이진 않습니다.
원래 ‘슈나이더 & 자비네 시리즈’는 세 번째 작품(‘죽음을 사랑한 소년’)에서 끝날 예정이었는데, 작가가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네 번째 작품(‘죽음의 론도’)을 출간한 덕분에 이후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거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꽤 비극적인 결말을 보였던 ‘죽음의 론도’ 이후 슈나이더와 자비네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그들 앞에 또 어떤 끔찍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한 상태입니다. 머잖아 이들의 새 이야기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