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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파괴자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5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김희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베를린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 ‘영혼파괴자’는 젊은 여자들을 각성 혼수상태, 즉, 뇌는 살아있지만 오감은 제거되고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상태로 만듭니다. 구조된 희생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얼마 못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둔 겨울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정신병원 토이펠스 클리닉에 입원해있던 카스파를 비롯한 환자와 의사들이 ‘영혼파괴자’의 습격을 받습니다. 희생자가 등장하고, 의문으로 가득 찬 문구가 적힌 쪽지가 발견됩니다. 밀폐된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추적하지만 ‘영혼파괴자’는 유유히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며 연이어 희생자를 만들어냅니다.
폭설과 혹한 속에 외부와 차단된 토이펠스 클리닉에서 벌어지는 ‘영혼파괴자’와 병원에 갇힌 자들 간의 하룻밤 동안의 사투를 다룬 작품입니다. 범인은 ‘영혼파괴자’라는 별명만큼이나 독특한 범행수법을 이용하여 연쇄살인을 저지르는데, “그들은 강간도 고문도 당하지 않았다.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다. ‘영혼파괴자’는 살아있는 몸속에 그들을 가둬버렸다!”라는 홍보 카피대로 희생자들의 정신을 파괴한 후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기이한 행태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던 ‘영혼파괴자’가 왜 정신병원에 나타나 자신의 패턴과는 상이한 방법으로 무차별 살인에 나서는가, 입니다.
사고로 기억을 잃고 토이펠스 클리닉에 입원한 카스파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데, 그는 조금씩 기억을 되찾으면서 ‘영혼파괴자’의 악행이 자신과 무관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함께 갇힌 사람들 중 일부는 카스파가 ‘영혼파괴자’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영혼파괴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지만 후반부에 드러난 진실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겨 놓습니다.
수십 년만의 폭설과 혹한, 그리고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공포심을 극대화시키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분위기도, 서사도 전혀 다르지만 영화 ‘큐브’를 보며 느꼈던 전율도 맛볼 수 있습니다. 비주얼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서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활자와는 또 다른 공포와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반전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초반에 발견할 수 있겠지만, 설령 눈치 챘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워낙 롤러코스터처럼 업다운이 심해서 책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발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아쉬움이 남았던 이유는 부자연스러운 인공미가 작품 전체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요점만 말하면 “결과를 위해 과정을 무리하게 짜맞췄다.”라고 할 수 있는데, 범행동기도, 수법도, 마지막 반전도 모두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결과를 위해 억지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영혼파괴자’의 정체와 범행동기가 맥을 빠지게 만들었는데, 좀 거칠게 말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요란하게 난리를 쳐야했는가?”라고 할까요?
사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취향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보입니다. 차단된 공간, 기이한 범행수법, 꿈과 기억이 혼재된 몽환적인 서사 등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만한 자극적인 설정이 가득하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서평이라 별 세 개에 그쳤지만, 다섯 개를 준 독자의 서평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이 쓴 서평만으로는 이야기의 몸통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내용들이 워낙 많은데다, 직접 읽지 않고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장치들 역시 많이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