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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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스릴러 가운데 남녀 콤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경우가 몇몇 있는데, 마르틴 S. 슈나이더와 자비네 네메즈는 (제가 알기론) 경력과 나이에서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입니다. 한쪽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면 한쪽은 새내기의 풋내가 가시지 않은 신참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외적인 면만 아니라 성격에서도 극단적으로 대비됩니다. 슈나이더가 괴팍하고 거만한데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고집쟁이라면 자비네는 다정다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하는 캐릭터입니다. 다만, 둘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절차와 규정 따위는 무시하고 오직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드는 돌직구 같은 경찰이란 점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 연방범죄수사국에 근무하는 슈나이더는 천재와 광인(狂人)을 오가는 사건분석가이자 범죄심리학자입니다. 타고난 반골기질에 오만함과 거만함으로 똘똘 뭉쳤지만 거의 완벽한 프로파일링 능력 덕분에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한 인물입니다. , 극단적인 방법 마리화나에 취한 채 범행 현장에 틀어박혀 범인의 행동과 사고를 유추한다든지 도 마다하지 않는 이해 불가한 일면도 있습니다. “살인자의 뇌에 들어가서 악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대사는 프로파일러로서의 그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에서 슈나이더와 인연을 맺었던 자비네는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서 사제 관계로 슈나이더와 재회합니다. 슈나이더는 여전히 불친절하고 거만했지만, 자비네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아카데미 입학에 그가 적잖은 힘을 써줬음을 눈치 챕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슈나이더와 자비네가 맡은 독일의 살인사건들인데, 처음에는 범행 수법도 다르고 희생자 간의 연관성도 없어 보였지만, 두 사람의 집요한 수사 끝에 연결고리가 드러나면서 충격적인 진상이 드러납니다. 또 하나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이어 발생한 소녀 유괴살해사건으로, 희생자들의 등에서 단테의 신곡지옥 편을 묘사한 끔찍한 문신이 발견된 엽기적인 사건입니다. 빈의 여검사 멜라니 디츠가 노회한 경찰 하우저와 함께 이 사건을 맡습니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은 후반부에 가서야 접점이 드러나게 되고, 슈나이더-자비네 콤비가 멜라니 디츠와 협력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사건의 잔혹함이라든가 심리극을 연상시키는 복잡다단한 묘사 등 유럽 스릴러 특유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슈나이더-자비네 콤비의 캐릭터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도 없고, 또는 물과 불처럼 상극으로만 보이는 두 주인공이 날선 공방과 비아냥, 협조와 동지애를 주고받으며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습은 사건 자체보다 더 큰 재미를 선사합니다. 슈나이더는 자신과 꼭 닮은 자비네에게 무자비한 스승이자 이 세상 최고의 멘토가 돼줍니다. 자비네 역시 슈나이더의 모난 부분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에게도 그와 꼭 닮은 경찰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것은 사건 해결 과정이 다소 구태의연하고 안이하게 설정된 탓이 제일 컸고, 결론을 위해 억지스럽게 그려진 몇몇 인물들 간의 작위적인 관계라든가, 두 사건 사이의 접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느낀 위화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슈나이더-자비네 콤비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5개 이상의 별도 충분한 작품입니다. 물론 주연급 조연으로 소녀 유괴살해사건을 담당한 멜라니 디츠의 공도 컸습니다. 그녀가 앞으로도 슈나이더-자비네와 함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중요한 카메오로 한번쯤은 얼굴을 비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 주조연 캐릭터의 힘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까요? 이런저런 아쉬움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매력적인 슈나이더-자비네 콤비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활약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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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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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사일런트 코너’, ‘위스퍼링 룸에 이은 제인 호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남편 닉의 갑작스런 자살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던 FBI요원 제인은 이후 무장괴한들에게 공격을 당하는가 하면 어린 아들의 목숨까지 협박받기에 이르렀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그녀가 알아낸 악당의 정체는 나노테크놀러지를 이용하여 인간의 뇌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기술을 확보한 테크노 아르카디언이었습니다.

호박색 액체에 담긴 신물질은 인간의 뇌 속에 특별한 네트워크를 설치하는데, 이 네트워크에게 장악된 인간은 특정 메시지에 절대 승복하게끔 개조됩니다. 즉 누군가가 내리는 명령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살인자나 노예가 되거나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뇌를 통제할 대상의 선택 기준은 문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신들이 계획하는 미래에 반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신의 권위를 손에 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밀한 감시카메라와 위치추적 장치, 혁명적인 사물인터넷과 소프트웨어 등 먹잇감을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제인은 숱한 위기를 겪으며 이 전무후무한 악당의 정체를 밝혀낸 것은 물론 최고위직 일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고 무엇보다도 정관계, 정보기관, 언론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라 그 누구에게도 이들의 정체와 범죄를 알릴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이미 간첩행위와 반역, 살인죄로 기소된 제인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특히 테크노 아르카디언이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아들 트래비스를 노린다는 점 때문에 제인의 싸움은 몇 배나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전개됩니다.

 

구부러진 계단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최정점을 파악하고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려는 제인의 싸움을 그립니다. 그녀의 타깃은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최고위직이자 법무부 고위관료로서 직전 작품인 위스퍼링 룸에서도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던 부스 헨드릭슨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확실한 물리적 단서를 손에 넣으려는 것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큰 줄기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촉망받는 쌍둥이 남매 소설가인 타누자와 산자이 슈클라의 뇌를 통제하려는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집요한 추격전이 그것입니다. 문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인기 소설가는 그들에겐 더없이 위험한 요인인 탓에 동원가능한 모든 시스템을 통해 집요하고 잔혹한 추격전을 펼칩니다.

 

개인적으론 구부러진 계단제인 호크 시리즈의 최종편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최정점과의 마지막 대결은 다음 작품으로 미뤄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웠던 건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제인의 행보는 전편에 비해 그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부스 헨드릭슨을 앞세워 모든 악행의 시발점이 된 구부러진 계단 아래 으스스한 공간에 이르는 제인의 여정은 실은 무척 단선적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가 겪는 위기와 갈등은 숨 가쁘게 그려졌고, 딘 쿤츠의 문장은 여느 스릴러와 달리 깊고 그윽한 맛을 지니고 있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느슨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굳이 결말을 다음으로(이마저도 확실하진 않지만) 미룰 정도로 장황한 분량이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 제인의 이야기와 함께 병행된 쌍둥이 남매 작가 추격전은 나름 임팩트와 스릴을 갖추긴 했어도 이미 이 시리즈의 전작을 읽은 독자에겐 전혀 새롭지 않은 내용들이라 그 많은 분량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통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전작인 위스퍼링 룸에서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을 담당했던 헌신적인 특수아동교사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자동차 테러로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코라 건더슨 사건과 별 차이 없는 내용을 주인공의 이야기에 맞먹는 분량으로 세세히 묘사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딘 쿤츠의 문장은 너무도 매력적이고 유려하고 감칠맛이 돌아서 그 어떤 이야기가 됐든 독자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결말이 다음 작품으로 밀린 점이나 과도하게 부풀려진 조연들의 이야기의 아쉬움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딘 쿤츠의 매력적인 문장들이 많은 부분을 상쇄시켜준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후속작이 나왔을 땐 그 작품이 확실히 제인 호크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만일 그런 정보가 없다면 읽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결말이 미뤄진다면 그땐 아무래도 노작가의 과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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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룸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7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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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룸블랙박스이후 한국에 2년 만에 소개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작이자 17번째 작품입니다. 원작 출간이 2014년이니 무려 7년이 지나서야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된 셈인데, 미국에선(2020년 기준) ‘해리 보슈 시리즈’ 23편이자 미키 할러 시리즈’ 6편인 ‘The Law of Innocence’가 출간됐다고 하니 시리즈 팬 입장에선 아직 읽을 작품이 많이 남았다는 기대감도 들지만 동시에 너무 늦어지고 있는 한국 출간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버닝 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 출발의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시리즈 14나인 드래곤부터 시작됐던 개성 없는 표지들이 사라지고 강렬하고 화려한 표지가 등장한 점입니다. 개인적으론 여전히 나인 드래곤이전의 표지들이 그립지만 그래도 전집류 같은 획일적인 표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내용면에서는 해리 보슈의 새로운 파트너 루시아 소토(이하 루시)가 등장한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멕시코계 미국인, 5년도 안 된 신참, 강력계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 등 그동안의 보슈의 파트너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무장 강도떼와의 총격전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럭키라는 별명처럼 행운을 몰고 다니는 것은 물론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 총명함, 신참임을 무색하게 만드는 노련함 등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형사이기도 합니다. 애초 신경 쓰이는 교육생정도로 루시를 대했던 보슈는 함께 수사를 하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인재인지를 여러 차례 깨닫곤 합니다.

 

미제사건 전담반 소속의 보슈와 루시는 10년 전 광장 한복판에서 악단 연주자가 피격됐던 사건을 맡습니다. 최근 그 연주자가 사망하면서 몸 안에 박혀있던 총알을 회수할 수 있게 됐고 그 총알을 단서 삼아 범인을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정치적 거물과 그를 후원하는 재력가가 연루돼있는 탓에 두 사람의 수사는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한편 보슈는 루시가 다른 미제사건에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냅니다. 21년 전의 방화사건이 그것인데, 루시는 당시 어린 희생자가 많았던 그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경찰이 된 뒤 언젠가 그 사건을 직접 파헤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슈는 상부에 알리지 않은 채 루시를 돕습니다. 하지만 21년이란 시간은 두 사람에겐 큰 장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리즈 15드롭에서 퇴직유예제도(DROP)를 통해 형사로서의 삶을 39개월 연장받았던 보슈는 이제 퇴직까지 겨우 12개월 남짓한 시간만을 남겨놓은 상태입니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경찰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착잡함을 감출 수 없던 그에게 유능하고 예의바른 신참 루시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줍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자신만의 노하우를 이 똑부러진 후배에게 모두 전수해주고 싶어진 것입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끝물 고참과 쌩쌩 신참의 케미는 지금껏 맛보지 못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선하고 흥미로운 대목이었습니다.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사는 난항과 장벽에 수시로 부딪힙니다. 조기 해결을 강요하면서도 예산에는 인색한 상부,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정치가와 재력가, 하이에나 같은 언론의 관심까지 더해져 보슈와 루시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루시가 연루된 21년 전 방화사건 역시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한 채 답답한 행보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1/3지점까지는 예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고 처진다는 느낌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완만한 신중함이 도드라졌고, 전광석화 같은 속도감보다는 거북이걸음 같은 꼼꼼함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의 디테일이 더 강조됐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문은 조심해야지. 불타는 방의 문을 섣불리 열면 안 되잖아.”(p187)

 

하지만 신참 루시의 캐릭터와 활약 덕분에 이 모든 아쉬움들이 어느 정도 상쇄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장래 경찰을 꿈꾸는 보슈의 17살 딸 매디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더 이입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마이클 코넬리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루시는 다음 작품인 ‘The Crossing’까지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루시가 보슈 곁을 떠나는 상황은 두세 가지 정도로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경찰로서의 삶이 12개월 남짓 남은 보슈가 LA경찰국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활약할 작품은 잘 해야 두 편 정도일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듯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지 않은 버닝 룸의 결말이 잘 해야 두 편 정도일 것 같은 보슈의 남은 경찰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 ‘The Crossing’의 한국 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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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몬스터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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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북클럽과 크로스로드의 공동 이벤트를 통해 받은 가제본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정식 출간된 책에는 시소 몬스터스핀 몬스터등 두 편이 수록돼있는데, 가제본에는 첫 편인 시소 몬스터만 실려 있어서 아래 서평에는 스핀 몬스터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시소 몬스터는 이사카 고타로와 열 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사신 치바외에는 대부분 별 3~4개 정도의 평범한 만족감 또는 아쉬움을 느낀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매번 신작이 나올 때면 저도 모르게 눈길이 끌리곤 해왔습니다.

시소 몬스터는 탄생 과정 자체가 독특한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에 따르면 일본 민간전승인 바다 일족과 산 일족의 대립이라는 규칙에 따라 여러 작가가 원시시대부터 미래까지 각 시대의 이야기를 쓰는 프로젝트 참가작 중 한 편으로, 이른바 충돌과 변화, 화해와 공존이라는 거창하고 무거운 주제가 녹아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특유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이 부담스러운 주제를 잘 믹스시켰습니다.

 

거품이 절정에 달한 1980년대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시소 몬스터는 전직 첩보원이자 현재는 전업주부인 미야코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합가 이후 시작된 고부갈등은 심리전에 능했던 전직 첩보원 미야코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릅니다. 그러던 중 사고사인 줄 알았던 시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미야코는 오랫동안 시어머니 주위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발견하곤 더 이상 시어머니를 평범한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잇달아 괴한들에게 공격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미야코는 예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은밀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고부갈등을 다룬 가족드라마에 첩보+액션+고발+사회파가 한데 버무려진 버라이어티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부갈등을 겪는 미야코가 한때 엘리트 첩보원이었다는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거기에다 자신을 위협하는 용의자가 상극과도 같은 시어머니가 아닐까, 의심하면서 이야기는 흥미에 흥미를 더합니다. 막판 액션 시퀀스에서 밝혀지는 반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지만 결과를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흠뻑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또 애초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프로젝트의 취지에 걸맞게 바다 일족과 산 일족의 대립’, ‘충돌과 변화, 화해와 공존이라는 규칙과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판타지에 가까운 신비한 인물(보험회사 직원)이 등장하여 미야코와 시어머니 사이의 충돌과 공존에 대해 선문답 같은 말을 풀어놓는 대목은 다소 낯설고 뜬금없었지만 이사카 고타로만의 독특한 감성을 엿볼 수 있어서 나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다만, 독자에 따라 이 대목이 미야코의 스토리와 잘 섞이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충돌이니 공존이니 하는 심오한 주제를 전직 첩보원이자 현직 전업주부인 미야코의 흥미 위주의 스릴러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이랄까요? 실제로 이사카 고타로가 방점을 찍은 곳이 신비한 보험회사 직원을 통해 강조되는 규칙과 주제였는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에 충실한 미야코의 스토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어려운 주제에 신경 쓰지 말고 미야코의 뒤만 따라가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가제본에 없는 두 번째 수록작 스핀 몬스터2050년을 무대로 한 SF 추격극이라고 합니다. 비밀스럽고 중요한 정보일수록 아날로그 방식으로 처리하는 역설적인 관습이 자리 잡은 가운데 손편지 배달부인 미토가 한 과학자의 비밀편지를 배달하면서 겪게 되는 미래 감시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 따르면 충돌과 공존이라는 주제가 좀더 강하게 깃든 이야기 같은데 사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끄는 설정이라서 (조금은 난해해 보이는 주제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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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분립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4 미치 랩 시리즈 3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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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랩 시리즈세 번째 작품인 권력의 분립은 실은 두 번째 작품인 3의 선택과 한 편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입니다. 상하권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만큼 이야기가 연결돼있어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3의 선택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CIA 대테러센터의 비공식 비밀조직인 오리온 팀의 수석요원이자 최고의 능력을 지닌 암살자 미치 랩은 미드 ‘24’의 잭 바우어와 영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을 합쳐놓은 듯한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권력의 이동에서 백악관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며 대통령을 구해낸 그였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직속상관인 CIA 대테러센터 수장 아이린 케네디 등 몇몇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랩이 작전 수행 중 동료요원에 의해 살해될 뻔한 사건이 전편에서 펼쳐졌고 이 작품에선 랩이 자신을 죽이고 CIA를 파멸로 이끌려 한 배후인물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권력의 분립은 꽤 많은 사건이 동시에 전개되는 복잡한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의해 최초로 여성 CIA 수장으로 지명된 케네디를 낙마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CIA를 수중에 넣은 뒤 궁극적으로는 대권을 거머쥐려는 유력 정치인의 음모가 벌어지는가 하면, 사담 후세인이 곧 핵무기를 손에 넣을 거라는 정보를 접한 헤이즈 대통령이 대규모 공습과 함께 핵무기를 무력화하려는 위험천만한 작전을 전개하는 이야기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거기다가 암살자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연인인 애너 릴리와의 평범한 삶을 꿈꾸던 랩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배후인물의 단서를 쥔 옛 연인이자 모델 출신 청부업자와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애너의 격한 오해를 사는 것은 물론 둘 사이의 관계마저 위태로워지는 안타까운 멜로 에피소드까지 곁들여져서 그야말로 철철 넘칠 정도의 다양한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겨우 시리즈 세 번째 작품까지만 읽은 상태지만 권력의 분립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거의 모든 면에서 빈틈을 찾아보기 힘든 완벽에 가까운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첩보, 전쟁, 액션, 멜로, 정치, 음모 등 적잖은 코드가 뒤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밀도나 퀄리티 면에서 처지지 않는 힘을 발휘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각각의 코드를 잘 살려낸 빈스 플린의 팔색조와 같은 문장들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파국을 맞이한 랩과 애너의 절절한 멜로부터 마치 전장 한복판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준 생생한 군사작전 장면이라든가 비정한 권모술수가 판치는 워싱턴 정가의 긴장감은 어느 챕터를 막론하고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과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다양하고 복잡한 모든 사건들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돼버린 랩의 사정은 말 그대로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자신을 살해하고 CIA를 무력화시키려는 배후인물을 찾는 와중에 랩은 말할 수 없는 비밀 탓에 연인에게 비난받고, 낙마 위기에 처한 직속상관을 염려해야 하고, 급작스런 대규모 공습에 랩이 참전하기를 원하는 대통령의 부탁까지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랩은 때론 현명하게, 때론 냉철하게 이 숱한 위기 상황들을 헤쳐 나가는데,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소설 제목이 떠오를 정도로 점점 더 강하고 단단해지는 랩을 수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애정할 수밖에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거만한 세계의 경찰인 미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은데다 이 시리즈의 큰 서사 중 하나가 미국의 그런 면을 부각시킨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미치 랩이 대책 없는 애국주의자 람보가 아닌 다음에야 픽션으로 충분히 즐겨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간혹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긴 해도 독자가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만큼 흥미로운 스릴러를 굳이 외면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당들이 응징되고 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막판에 다소 급하게 막을 내린 엔딩은 너무 아쉬웠습니다. 100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만 해도 랩이 맡은 미션들 대부분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폭주하더니 그 미션들 대부분이 신속-간략-깔끔하게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50페이지 정도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아마 저만의 느낌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이제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된 랩이 다음 작품인 집행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더불어 랩 주변의 매력적인 조연들도 각각의 스탠스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관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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