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씽맨
캐서린 라이언 하워드 지음, 안현주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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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퇴직 후 현재 쇼핑센터 보안요원으로 근무 중인 63살의 짐 도일은 어느 날 한 고객이 들고 있는 책 낫씽맨 : 살아남은 자의 진실 탐구를 보곤 충격에 빠집니다. 20여 년 전 아일랜드 코크 시티에서 연쇄강간살인을 저지른 뒤 유유히 사라져버린 미제 사건의 범인 낫씽맨이 바로 짐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책을 쓴 사람이 그의 마지막 범행인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당시 12살 소녀 이브 블랙이란 점 때문에, 또 그녀가 책을 통해 선언한 나는 낫씽맨에게서 살아남은 그 여자애였다. 이제 나는 낫씽맨을 잡을 그 여자다.”라는 일성 때문에 짐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매체의 리뷰 가운데 영리한 스릴러라는 문구가 여러 번 눈에 뜨입니다. 낫씽맨에게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온 이브가 쓴 책 내용이 책속의 책으로 전개되고, 그 책을 읽으며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는 완전범죄 연쇄살인마 짐 도일의 심리적 동요가 교차로 전개되는데, 사실 과거의 사건들은 거의 기록수준으로 묘사돼서 큰 긴장감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고, 심신이 노쇠한 초라한 60대 짐 도일은 중후반부까지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독자를 들었다 놓았다 할 만한 사건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의 완급을 영리하게조절함으로써 심리스릴러와 연쇄살인스릴러의 미덕을 잘 살려놓았습니다.

 

범죄로 가족을 잃은 이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가 피부에 와 닿게 그려지고,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고통스런 글쓰기를 감행한 그녀의 절실함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툭툭 끊겨 불완전할 뿐인 본인의 기억과 함께 당시 피해자나 관련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방대한 수사자료에 의지하여 완성한 이브의 책은 대체로 기록 수준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쓰인 범죄 다큐멘터리로서의 탄탄함과 진정성이 잘 녹아있어서 흥미로우면서도 아프고 간절하게 읽힙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인데,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재미있게도 이 작품의 제목인 낫씽맨입니다. 애초 짐은 물적 증거는 물론 지문이나 모발 등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아서 낫씽맨이란 별명을 얻었던 건데, 작가는 이브와 그녀의 파트너인 형사 에드의 입을 통해 오히려 잡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Nothing) 남자일 것이라는, 즉 연쇄살인마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악마적 존재 같은 게 아니라 주차 딱지 때문에 체포된 희대의 살인마 샘의 아들처럼 실은 별 것 아닌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피력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듯 진짜 아무 것도 아닌 남자짐 도일의 과거와 현재, 또 이브의 책을 읽으면서 겪는 그의 공포가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피해자인 이브는 물론 연쇄살인마 짐 도일에게까지 감정이입이 가능했던 건 아마도 이런 흥미로운 설정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브가 쓴 책속의 책은 긴장감 넘치는 범죄기록이긴 하지만 너무 정직하고 디테일한데다 속도감도 조금 떨어졌고, 그걸 읽는 짐 도일의 심리묘사도 다소 장황하거나 간혹 동어반복처럼 읽힌 경우가 있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읽는 도중 살짝 느슨함이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밀도나 긴장감 등 전체적인 완성도는 무척 높은 작품입니다. 특히 막판에 연이어 터지는 중형급 반전들은 이 작품의 영리함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목들이라 그 앞까지의 느슨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올해 읽은 스릴러 가운데 꽤 기억에 남을 작품일 것 같은데, 캐서린 라이언 하워드가 낫씽맨이전에 발표한 세 작품 모두 나름 성공을 거뒀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면 조만간 그녀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난해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문장들 속에 촘촘하게 설계된 그녀의 스릴러를 꼭 한 번은 다시 만나보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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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소녀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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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차 신부인 재클린 브룩스(이하 잭)는 노팅엄의 담당 교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탓에 징계성 발령을 받곤 15살 딸 플로와 함께 채플 크로프트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합니다. 교회와 사택은 모두 심하게 낡았고 마을 사람들은 여성 신부라는 낯선 존재에 호기심과 경계심을 함께 드러냅니다. 하지만 잭과 플로 모녀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이사 첫날부터 연이어 들이닥친 기묘한 사건들입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소녀가 나타나고, 500년 전 화형당한 어린 소녀들을 본 따 만든 나무인형이 교회 앞에 놓여있는가 하면 익명의 인물이 보낸 피 묻은 구마(驅魔)의식 세트에는 잭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습니다. 더구나 30년 전 이 마을에서 두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과 전임 신부가 자살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자 잭은 혼란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됩니다.

 

C. J. 튜더는 영국의 여자 스티븐 킹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독특한 호러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가입니다. 스티븐 킹이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C. J. 튜더의 글도 좋아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니 그녀의 스타일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타는 소녀들은 그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건들을 찬찬히 풀어가는 현실적인 미스터리와 명백히 호러의 영역에 속하는 소재들을 매끄럽게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잭의 새 둥지인 채플 크로프트는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에 걸쳐 끔찍한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500년 전인 16세기 중반엔 신교도 박해로 인해 두 명의 어린 소녀를 포함 여덟 명의 순교자가 화형을 당한 바 있고 지금까지도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30년 전엔 두 명의 15살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으며, 두 달 전 자살한 전임 신부의 죽음은 몇몇 사람에 의해 타살가능성이 제기되는 중입니다.

 

이렇듯 불온한 분위기로 가득 찬 채플 크로프트에서 잭과 플로는 평생 잊지 못할 며칠을 보내게 됩니다. 잭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임 신부의 자살에 의문을 품고 나름 조사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마을과 교회를 지배하는 하퍼 가문과 끊임없는 충돌을 겪습니다. 또 교회 지하실에서 발견된 의문의 유골들 때문에 30년 전 두 소녀의 실종사건에도 휘말리는데, 그런 와중에 딸 플로는 묘지에서 500년 전 화형당한 소녀들의 유령을 봤다며 잭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근육긴장이상증을 겪는 수상쩍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크고 작은 충돌을 유발합니다.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잭은 과거 자신과 끔찍한 악연을 맺었던 남자가 14년 만에 교도소에서 조기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곤 겁에 질리는데, 그야말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운 지경에 처한 셈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종교작은 마을입니다. 동기도 방법도 제각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비극은 종교적 요소들에 의해 잉태됐고, 작은 마을의 폐쇄성은 그 비극들을 더 끔찍하게 만들거나 완벽하게 은폐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탐욕, 욕망, 이기심들이 가세하면서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를 마을 전체에 진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채플 크로프트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잔혹한 범행보다 더 짙고 무거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마도 이런 조합들의 위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꽤 많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어렵게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C. J. 튜더의 작품들(‘초크맨’, ‘디 아더 피플’)이 대체로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독자로서 거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작가가 워낙 이야기를 매끄럽게 잘 풀어낸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호러 미스터리의 매력이 잘 살아있는 작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C. J. 튜더의 호러는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기보다는 카메오처럼 짧고 굵게 활용되는 방식이라 스티븐 킹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합니다.)

막판 반전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설정이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는데, 앞서 뿌려놓은 숱한 단서들을 완벽하게 회수하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흥미진진한 대목이었습니다.

 

2018초크맨이후 1년에 한 편씩 꼬박꼬박 신작을 내온 C. J. 튜더는 후기를 통해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날까요?”라는 인사를 남겼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무슨 이야기를 내놓을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그 전에 아직 유일하게 읽지 못한 애니가 돌아왔다를 먼저 읽어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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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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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찬호께이를 처음 알게 된 ‘13.67’을 읽었을 때만 해도 요코야마 히데오에 필적하는 중화권 경찰소설의 대가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그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앞섰지만, 이후 출간된 작품들은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기대했던 경찰소설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찬호께이의 장르적 한계는 어디인가?”라는 감탄을 동시에 느끼곤 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이라는 미묘한 정신의 영역을 끌어들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네트워크가 지배한 세상에서 악의가 얼마나 쉽게 싹을 틔우고 사람을 망가뜨리는지를 그린 망내인’, 초능력을 지닌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인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풍선인간’, 그리고 도시괴담, 환상특급, SF 등 여러 장르를 한데 맛볼 수 있는 단편집 디오게네스 변주곡등 그야말로 종횡무진 장르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을 선보여온 찬호께이의 이번 작품 마술 피리는 세 편의 익숙한 서양동화를 모티브로 삼은 고전적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찬호께이의 초창기 작품들이라 더 궁금했는데, 작가후기에 따르면,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처음으로 진지하게 창작해 공모전에 응모한, 작가로서의 원점과도 같은 작품으로 20086회 대만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에 진출했으며. ‘푸른 수염의 밀실은 이듬해 같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찬호께이의 공식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하멜른의 마술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앞선 두 작품의 주인공들을 내세운 시리즈물로 스케일이나 미스터리 서사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29살의 영국 귀족이자 법학박사인 라일 호프만과 그의 하인 한스입니다. 귀족생활에 환멸을 느낀 호프만은 작가로 더 왕성히 활동하며 신화와 전설에 각별한 관심을 갖습니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기담과 괴담 수집에 열을 올리는 그는 특히 사건성이 엿보일 때면 탐정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데, 재미있는 건 그에게서 셜록 홈즈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는 점입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만나면 어떻게든, 너무도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엄청난 재난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수단을 동원해서까지 바로잡으려”(p31) 하는 면모라든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위법 행위 정도는 우습게 저지르는 대범함과 악인을 만났을 때 보이는 시니컬한 성격과 신랄한 말솜씨는 여지없이 홈즈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호프만의 하인인 한스 역시 홈즈의 파트너 왓슨을 연상시키는 인물인데, 나름 자신만의 추리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호프만의 비약적인 추리를 따라가지 못해 쩔쩔 맨다든가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실수를 반복하는 허당 캐릭터느 왓슨과 꼭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왓슨이 의술을 지닌 박사라면 한스는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춘 호위무사란 점입니다. (덧붙여 호프만의 런던 고향집 집사 이름이 홈즈의 하숙집 주인과 같은 허드슨 부인이란 점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 합니다.)

 

각각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익숙한 서양동화를 모티브로 한 세 편의 미스터리는 원작의 내용을 최대한 살린 상태에서 찬호께이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개입된 고전 미스터리입니다.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원작에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훔친 소년이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면, ‘푸른 수염의 밀실은 남편의 말을 잘 들었다면 아내는 끔찍한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란 원작 속 여성비하적 시선에 대한 반발에서, 하멜른의 마술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원작 자체의 미스터리에 찬호께이의 순수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전혀 새로운 권선징악 스토리로 확장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만의 추리는 다소 비약이 심하기도 하고 결과론적인 설명이 많아서 살짝 끼워 맞추기 식 추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가끔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지나치게 천재적인 탐정미타라이 기요시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일단 우리가 아는 사실에서 증거를 찾자.”라는 그의 좌우명대로 사소하지만 확실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남들은 보지 못하는, 또는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진실들을 집요하게 밝혀내는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익숙한 동화를 절묘하게 비틀어 미스터리로 변주시킨 방식도 흥미로웠고, 이른바 숨은 동화라고 찬호께이 스스로 명명한 서브 텍스트들(각각 욕심쟁이 거인’, ‘미녀와 야수’, ‘헨젤과 그레텔’)이 메인 동화들과 결합되어 개성 넘치는 권선징악의 엔딩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홍콩 출신 작가가 서양동화를 모티브 삼아 쓴 미스터리자체보다 찬호께이의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작품들이란 점이 그의 팬들에게 더 큰 호기심을 일으킬 것 같은데, 셜록 홈즈를 연상시키는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더해진 덕분에 호기심 이상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전히 그의 경찰소설을 고대하는 1인이다 보니 ‘13.67’의 뒤를 잇는 대하급 경찰소설의 출간을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간절한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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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빛나는 강
리즈 무어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시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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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라델피아의 소도시 켄징턴을 담당하고 있는 경력 13년의 순찰경찰 미케일라 피츠패트릭(이하 미키).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밑바닥까지 쇠락한 켄징턴은 마약 굴, 미국의 쓰레기 타운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춘과 마약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그로 인한 폐해는 도시 곳곳에서 쉽게 목격되는 곳입니다. 젊은 여성들이 연이어 교살된 채 발견되자 미키는 매번 그 시신이 사라진 동생 케이시가 아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려서부터 밝고 활달했던 케이시는 마약에 중독된 뒤 급기야 거리의 매춘부가 되고 말았는데, 한 달 전부터 소식이 끊겨 미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합니다. 순찰경찰의 신분임에도 케이시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전직 파트너와 수사를 벌이던 미키는 연이은 여성 교살사건에도 휘말리면서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에 끌린 첫 번째 이유는 뒷표지에 실린 카피 - “마약과 매춘에 물든 필라델피아의 거리. 연쇄살인을 쫓는 한 경관의 고독한 싸움.” -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범죄스릴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는데, 다 읽고 보니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카피는 어느 정도는 저 같은 독자를 겨냥한 미끼에 가까웠습니다. ‘어느 정도라고 단서를 단 이유는 어쨌든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주인공 미키가 그 범인을 쫓는 행적이 그려지고 있으며 나름의 반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비중 순으로 정리하면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두 자매의 오랜 애증 마약이 망가뜨린 사람들과 도시에 대한 애가 연쇄살인을 다룬 범죄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키가 비참하게 살해된 희생자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지는 초반부는 무척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갔지만 이후 미키와 케이시의 어린 시절이라든가 4살 아들을 키우는 싱글워킹맘으로서의 미키의 고된 생활, 그리고 소식이 끊긴 케이시의 행방을 찾기 위한 미키의 분투가 길고 장황하게 묘사되는 지점부터는 다소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마지막까지 소화할 수 있었던 건 범죄스릴러 이상의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이 가늘지만 끈질기게 눈길을 계속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미키와 케이시 자매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짧고 톡톡 튀는 문장들과 군더더기 없는 빠른 템포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적절한 타이밍마다 등장하는 스릴러 코드들 연쇄살인사건, 케이시의 실종, 경찰 내부의 문제 등 은 다소 느슨해진 독자의 긴장감을 다시금 꼿꼿하게 세워주곤 해서 좀처럼 책갈피를 끼울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 마약이 어떻게 사람들과 도시를 황폐하게 망가뜨린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드는지를 그린 디테일한 장면들 역시 내내 씁쓸함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대목들이었습니다.

 

뒷표지의 카피에 꽂혀 큰 스케일의 범죄스릴러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지루한 책읽기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스릴러 이상의 매력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이니 중간에 잠시 지치더라도 꼭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길고 빛나는 강은 화끈하고 빠르진 않아도 오래 묵힌 덕분에 깊은 맛을 내는 듯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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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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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던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살해당할 이유 자체가 없는 희생자의 정황 때문에 수사가 난항에 빠진 상태에서 시라이시의 통화 목록에 들어있던 구라키라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며 사건은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는 시라이시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33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 때문이라고 털어놓아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됐던 한 남자가 결백을 주장하다가 유치장에서 자살했고 경찰은 그것으로 사건을 종료시켰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경시청 형사 고다이와 그의 파트너 나카마치는 손쉽게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 됐는데, 문제는 고다이의 마음속에 왠지 떨쳐낼 수 없는 찜찜함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점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사건의 가해자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가 수사결과에 의문을 품은 채 각자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히가시노 게이고다! 왕의 귀환!”이란 일본 독자의 서평에 공감할 정도로 백조와 박쥐는 오랜만에 히가시노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33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을 통해 죄와 벌이라는 정답도 없고 한없이 무겁기만 한 주제를 그린 이 작품은 히가시노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들이 집대성된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옮긴이의 말가운데 이 인상에 대해 거론한 부분을 인용하면,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사적인 판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정의를 위한 분노의 절차는 무엇인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조직의 애환과 한계와 맹점, 공소시효 폐지와 소급 적용을 둘러싼 문제점, 언론의 무신경한 취재경쟁,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쏟아지는 인터넷상의 경박한 재단과 호기심의 배설 등 인간의 죄와 벌을 둘러싼 굵직굵직한 논의들이 한자리에 총망라된다.” (p564)

 

이 작품의 제목 백조와 박쥐는 바로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를 가리킵니다. 생김새도, 색깔도, 분위기도 정반대인 백조와 박쥐처럼 두 사람은 법정에서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악연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 찾기라는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에 빠지고 맙니다.

구라키의 자백으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해졌고 이제 양형을 다투는 재판만 남기고 있는 상태지만 가즈마와 미레이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조금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가즈마는 아버지 구라키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며 자백 곳곳에 허점과 거짓말이 숨어있다고 확신했고, 미레이는 온화하고 올곧은 품성의 아버지 시라이시를 지독하고 인정사정없는 변호사로 둔갑시킨 경찰의 발표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살인과 피살의 동기를 설명해줄 단서들을 뒤쫓으며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한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두 사람의 연대에 대해 관할서 젊은 형사 나카마치는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죠.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라며 곤혹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독자들의 속내를 대변하듯 말입니다.

 

고다이 형사, 가즈마, 미레이 등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33년 전 결백을 주장하다가 자살한 남자의 유족들 딸 오리에, 아내 요코 입니다. 오랫동안 살인자의 가족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그들은 뒤늦게 진범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경찰과 만나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는데, 이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고다이 형사는 물론 가즈마와 미레이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들로 인해 현재의 사건과 33년 전의 사건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미스터리의 심도는 물론 주제의 무게감까지 한껏 더해지게 됩니다.

 

진실 찾기의 주된 주체는 고다이 형사보다는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절대 살인할 리 없는 아버지절대 살해당할 리 없는 아버지’,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내는 게 그들의 미션이다 보니 고다이 형사가 다가갈 수 없는 내밀한 지점까지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알아낸 진실의 충격 역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안타까운 역할도 도맡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낸 진실은 고다이 형사가 밝혀낸 현재 사건의 진상과 합쳐지면서 강력한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높은 히가시노의 미스터리에 비해 백조와 박쥐는 다소 느리고 둔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묵직한 주제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평범한 일반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60여 페이지가 금세 넘어갈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서평 초반에 언급한 일본 독자의 극찬에 대해 이견을 가진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무게감에 있어서만큼은 히가시노 작품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엇비슷하지만 저 역시 한마디 보탠다면 그래, 히가시노는 이런 작품을 써야지!” 정도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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