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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평점 :
2015년에 찬호께이를 처음 알게 된 ‘13.67’을 읽었을 때만 해도 요코야마 히데오에 필적하는 중화권 경찰소설의 대가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그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앞섰지만, 이후 출간된 작품들은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기대했던 경찰소설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찬호께이의 장르적 한계는 어디인가?”라는 감탄을 동시에 느끼곤 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이라는 미묘한 정신의 영역을 끌어들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네트워크가 지배한 세상에서 악의가 얼마나 쉽게 싹을 틔우고 사람을 망가뜨리는지를 그린 ‘망내인’, 초능력을 지닌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인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풍선인간’, 그리고 도시괴담, 환상특급, SF 등 여러 장르를 한데 맛볼 수 있는 단편집 ‘디오게네스 변주곡’ 등 그야말로 종횡무진 장르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을 선보여온 찬호께이의 이번 작품 ‘마술 피리’는 세 편의 익숙한 서양동화를 모티브로 삼은 고전적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찬호께이의 초창기 작품들이라 더 궁금했는데, 작가후기에 따르면,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창작해 공모전에 응모한, 작가로서의 원점과도 같은 작품”으로 2008년 6회 대만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에 진출했으며. ‘푸른 수염의 밀실’은 이듬해 같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찬호께이의 공식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하멜른의 마술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앞선 두 작품의 주인공들을 내세운 시리즈물로 스케일이나 미스터리 서사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29살의 영국 귀족이자 법학박사인 라일 호프만과 그의 하인 한스입니다. 귀족생활에 환멸을 느낀 호프만은 작가로 더 왕성히 활동하며 신화와 전설에 각별한 관심을 갖습니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기담과 괴담 수집에 열을 올리는 그는 특히 사건성이 엿보일 때면 탐정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데, 재미있는 건 그에게서 셜록 홈즈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는 점입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만나면 어떻게든, 너무도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엄청난 재난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수단을 동원해서까지 바로잡으려”(p31) 하는 면모라든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위법 행위 정도는 우습게 저지르는 대범함과 악인을 만났을 때 보이는 시니컬한 성격과 신랄한 말솜씨”는 여지없이 홈즈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호프만의 하인인 한스 역시 홈즈의 파트너 왓슨을 연상시키는 인물인데, 나름 자신만의 추리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호프만의 비약적인 추리를 따라가지 못해 쩔쩔 맨다든가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실수를 반복하는 허당 캐릭터느 왓슨과 꼭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왓슨이 의술을 지닌 박사라면 한스는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춘 호위무사란 점입니다. (덧붙여 호프만의 런던 고향집 집사 이름이 홈즈의 하숙집 주인과 같은 허드슨 부인이란 점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 합니다.)
각각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익숙한 서양동화를 모티브로 한 세 편의 미스터리는 원작의 내용을 최대한 살린 상태에서 찬호께이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개입된 고전 미스터리입니다.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이 (원작에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훔친 소년이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면, ‘푸른 수염의 밀실’은 남편의 말을 잘 들었다면 아내는 끔찍한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란 원작 속 여성비하적 시선에 대한 반발에서, 또 ‘하멜른의 마술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원작 자체의 미스터리에 찬호께이의 순수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전혀 새로운 권선징악 스토리로 확장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만의 추리는 다소 비약이 심하기도 하고 결과론적인 설명이 많아서 살짝 ‘끼워 맞추기 식 추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가끔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지나치게 천재적인 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일단 우리가 아는 사실에서 증거를 찾자.”라는 그의 좌우명대로 사소하지만 확실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남들은 보지 못하는, 또는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진실들을 집요하게 밝혀내는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익숙한 동화를 절묘하게 비틀어 미스터리로 변주시킨 방식도 흥미로웠고, 이른바 ‘숨은 동화’라고 찬호께이 스스로 명명한 서브 텍스트들(각각 ‘욕심쟁이 거인’, ‘미녀와 야수’, ‘헨젤과 그레텔’)이 메인 동화들과 결합되어 개성 넘치는 권선징악의 엔딩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홍콩 출신 작가가 서양동화를 모티브 삼아 쓴 미스터리’ 자체보다 찬호께이의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작품들이란 점이 그의 팬들에게 더 큰 호기심을 일으킬 것 같은데, 셜록 홈즈를 연상시키는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더해진 덕분에 호기심 이상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전히 그의 경찰소설을 고대하는 1인이다 보니 ‘13.67’의 뒤를 잇는 대하급 경찰소설의 출간을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간절한 게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