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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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쓰 유메이는 어느 날 총무성 문화국 문화예술윤리향상위원회라는 수상쩍은 곳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뒤 과거 요양소로 쓰였던 외딴 건물에 감금됩니다. 위원회는 마쓰 유메이는 강간이나 폭력, 범죄를 긍정하는 것처럼 쓰고 있다.”는 독자들의 고발에 근거하여 그녀를 소환했다면서, “자기 작품의 문제점을 확실히 직시해서 인식하고, 훈련을 통해 교정된다면 귀가할 수 있다.”라고 통보합니다. 즉 갱생을 통해 아름답고 착한 이야기만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풀어주겠다는 뜻입니다. 말도 안 되는 위원회의 만행에 마쓰는 격렬히 저항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점과 함께 무한정 늘어나는 감금 기간 통보뿐입니다.

 

마쓰가 감금된 요양소는 말하자면 범죄와 폭력 또는 변태적 성()을 다루거나 차별 조장, 윤리성 결여, 국가에 대한 반역, 반사회적 사상을 구사하는 모든 창작자들을 섬멸하는 곳입니다. 마쓰의 구체적인 혐의는 그녀가 쓴 소설들이 강간, 폭력, 페도필리아(아동성애증), 관음증, 페티시를 장려하듯 그렸다는 점입니다. 수용된 다른 작가들 역시 세상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창작물을 만든 혐의로 감금돼있습니다.

배경이 현대 일본이란 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가상현실과도 같은 설정 때문에 초반부터 놀라움과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작품입니다. 더구나 다른 작가도 아니고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니 해피엔딩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이른 예감에 마쓰의 처지와 미래는 그저 암울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대표작인 그로테스크아웃은 말할 것도 없고 탐정이 주인공인 무라노 미로 시리즈조차 무겁고 암담한 여운을 남겼던 걸 떠올리면 이런 극적인 설정 속에서 마쓰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환하게 웃을 일은 절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밝혀지기 때문에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주인공 마쓰는 성()과 폭력을 그린 죄로 감금됐지만, 읽다 보면 왠지 기리노 나쓰오 자신을 투영한 듯한 인상을 자주 받게 되는데, 만일 작가를 갱생시키고 교정하는 위원회란 곳이 실재한다면 아마도 일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우선 소환대상에 기리노 나쓰오가 포함될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내놓는 작품마다 중독성 강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발산했다는 뜼인데, 아마도 그녀에겐 세상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불온한 시선을 전파한다!”라는 혐의를 씌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자 후기편집자 후기를 보면 기리노 나쓰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두 후기 모두 두 가지 사실 군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일본의 각종 악법과 인터넷의 익명성에 숨어 창작물에 대해 억지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내는 대중들 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가 어떤지 잘 알지는 못해도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 본인의 경향이 워낙 반사회적이라 다른 작가들에 비해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결과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일본의 창작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이런 인식이 확산돼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읽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살인귀가 문득 떠올랐는데, 90년대 초 연쇄살인범의 집에서 발견된 다수의 호러물로 인해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호러 사냥이 자행됐고, 그에 격분한 아야츠지 유키토가 반발심에 연재한 작품이 극도의 연쇄살인 호러물 살인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국에서 필화사건으로 작가가 구속되기까지 했던 즐거운 사라논란도 생각났는데, 아마도 일몰의 저편속 위원회에겐 아야츠지 유키토나 마광수 교수는 주인공 마쓰보다도 훨씬 더 시급하게 섬멸해야 할 창작자로 여겨질 게 분명해 보입니다.

 

공포정치 시대를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오싹한 상상이지만 현실의 독자 중엔 이 작품 속 위원회의 결정과 행동에 공감하는 경우도 꽤 있을지도 모릅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정서를 오염시킨다는 확신을 가진 도덕적인 독자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는 해답 없는 이 논쟁을 촉발시키기 위해 가상현실 같지만 결코 비현실적이진 않은 일몰의 저편을 집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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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2 - 역습편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진환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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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인귀 1’(각성편)이 희생자들의 몸이 끔찍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후타바산(双葉山)을 무대로 정체불명의 살인귀가 벌이는 엽기적인 행각을 그렸다면, 후속편인 살인귀 2’(역습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시로 내려온 살인귀가 전편보다 훨씬 더 참혹한 방식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리고 살인귀의 습격으로 식물인간이 된 아빠를 둔 15살 아이카와 9살 마미야 남매가 살인귀와 맞닥뜨리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편에서의 살인귀의 행각은 19금이 아니라 거의 39금에 가까운 수위였지만, ‘역습편의 경우 인용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게 인체를 훼손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튀어나와서 1편은 오히려 애교 수준으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1편이 과연 이토록 끔찍하게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살인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등에 초점이 맞춰져서 호러 미스터리의 성격이 강했다면, ‘역습편은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상을 앞세워 단순한 슬래셔 호러 이상의 심령물의 인상까지 풍겼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상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그런 탓에 이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곤란해진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짧고 애매한 인상비평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워낙 살인 장면 묘사가 높은 수위라 직접 읽어보세요.”라는 말도 쉽게 꺼내기가 난감합니다.

 

작가 스스로 단순히 살인귀가 마구 날뛰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내용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작품에도 스토리에 약간의 복선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밝혔고, 해설 역시 슬래셔 호러로 규정했다간 큰코다친다. 호러와 미스터리가 훌륭히 융합된 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했지만, 개인적으론 1편에선 이런 미덕들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역습편은 말 그대로 엽기적인 살육극 외에 딱히 추켜세울 만한 점이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내세운 약간의 복선은 반전의 감흥을 전혀 끌어내지 못한 채 억지스럽게 보였고,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상은 어떻게 해도 이입하기가 어려워서 속편을 위한 속편이란 반발심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호러 영화의 속편들이 맞이했던 비참한(?) 운명과 별 다를 바 없다고 할까요? ‘어나더’, ‘프릭스’, ‘안구기담등 아야츠지 유키토의 호러물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을 갖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그려진 슬래셔+초자연 호러는 억지를 덮기 위해 더 큰 억지를 부리는 듯한 인상만 받았습니다. 또 잔혹한 살인 장면들의 반복은 초반 한두 사건을 제외하곤 (갈수록 더 엽기성이 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살인귀를 집필하게 된 사회적 배경 90년대 초 연쇄살인범의 집에서 다수의 호러물이 발견되면서 언론에 의해 마녀사냥 당하듯 호러물이 비난받았던 일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고, 1편은 그 대의에 어느 정도 동감할 수 있게끔 잘 짜인 호러 미스터리를 선보였지만, ‘역습편, 좀 심하게 말하면, 안 나오는 게 더 나았을 거란 게 솔직한 제 한 줄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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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1 - 각성편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진환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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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중학생 집단 피살사건 이후 악마의 산으로 불리며 인적이 끊겼던 후타바산(双葉山). 이곳에 자리 잡은 낡은 산장에 ‘TC 멤버스라는 친목단체 회원 8명이 합숙을 옵니다. 첫날 밤, 무서운 괴담놀이를 하던 중 누군가 과거 중학생들을 살해하고 종적을 감춘 후타바산의 살인귀를 언급하자 여대생 아카네는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 살인귀에 대한 이야기는 말해서도, 들어서도 안 될 것만 같았고, 왠지 그 순간 산장 주위가 기묘하고 강력한 힘에 의해 왜곡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산장 인근에서는 온몸이 끔찍하게 해체된 숱한 시체들이 발견됩니다. 하나둘씩 일행들이 종적을 감추는 가운데 아카네와 남은 일행들은 천둥과 번개 속에서 최악의 공포에 빠집니다.

 

잔혹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유명 작가, 노골적인 제목, 엽기적인 표지 등 모든 것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살인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1989년에 발표한 살인귀1권 각성편, 2권 역습편으로 이뤄진 시리즈인데, 19금 딱지를 받을 정도로 잔혹한 묘사가 압도적입니다.

악마의 산으로 불리는 곳에 합숙을 온 친목단체 회원들이 정체불명의 살인귀에게 하나둘씩 살해당하는 장면은 인간의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한계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하고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찌르고, 베고, 잡아 뜯고, 부숴버리고, 터뜨리는 등 그야말로 지옥도 그 자체입니다. 잔혹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백하자면 꿈에 나타날까 겁이 날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에 수시로 한기를 느꼈는데, 동시에 반복되는 살인귀의 무차별 만행에 문득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의 편집자 역시 처음 번역원고를 읽곤 이걸 왜 출판해야 하지?’라는 자괴감과 함께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라는 담당 편집자의 말에 출판을 묻어두기로 했다는 점입니다. 슬래셔 혹은 스플래터 호러의 극단을 치닫는 이 작품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입니다.

 

하지만 독자의 호기심에 영합하려는 신인작가의 치기가 아니라 당시 이미 관 시리즈로 명성을 얻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인 만큼 단순히 피와 살과 뼈가 날아다니는 자극적인 오락물 이상의 미스터리로서의 미덕을 갖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스스로 약간의 장난기로 심어 놓은 미스터리적인 장치가 이 작품의 막판 반전을 장식하고 있는데, 꽤 흥미롭고 놀랍긴 해도 아야츠지 유키토나 시마다 소지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다소 황당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익숙한 저조차도 !!!”라는 냉소가 터져 나온 걸 보면 미스터리로서의 퀄리티는 고만고만해 보인다는 게 솔직한 평가입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은 뒤에도 기괴하고 잔인한 슬래셔 호러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재미있게 읽긴 했으니 애초 가졌던 호기심이 어느 정도 충족된 것 역시 사실인 셈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눈길을 끈 대목은 아야츠지 유키토가 이 작품을 쓴 계기 중 하나로 언급한 80년대 후반의 호러 사냥입니다. 떠들썩한 흉악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범인의 집에 잔혹 호러영화 비디오가 많았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아야츠지 유키토가 발끈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책과 영화를 불문하고 호러물에 대한 마녀사냥이 들끓었는데 그에 대한 반발심이 이 작품을 쓰게 된 원동력이 됐다는 얘깁니다. “아이들을 무균실에서 키우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금지해야 할 건 오히려 국회 중계방송!”이란 그의 일성은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발언입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떡밥은 후속작인 살인귀 2 : 역습편을 위한 것일 텐데,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보면 3년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과연 후속작에서도 피와 살이 난무하는 슬래셔 호러가 이야기를 지배할지 아니면 좀더 고급스런 미스터리가 등장할지 궁금해지는데, 연이어 피비린내를 맡는 건 아무래도 거북한 일이라 일단 말랑말랑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한 편쯤 읽은 뒤에 살인귀 2’를 읽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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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iller's Wife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 살인의 비밀 1
빅터 메토스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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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살의 연방검사 제시카 야들리는 15년 전 프랑케슈타인의 신부로 불리며 파파라치의 표적이 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라스베이거스를 공포로 빠뜨렸던 연쇄 강간살인마가 바로 그녀의 남편 에디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충격과 공포에 빠졌던 야들리는 이후 법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수료했으며 현재는 연방검사로 근무 중입니다. 15살 딸 타라, 동거남 웨스리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일궈오던 그녀에게 어느 날 전 남편 에디의 범행을 모방한 듯한 연쇄살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과거 야들리와 잠시 사귀었던 FBI요원 볼드윈은 그녀의 고통과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일말의 단서라도 잡기 위해 그녀에게 사형수로 복역 중인 에디와 면회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범인은 어떤 식으로든 에디와 소통한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미스터리는 물론 사형수로 복역 중인 연쇄살인마와 그의 전 아내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들 사이의 고도의 심리전, 거기다가 중반 이후 팽팽하게 전개되는 법정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가 믹스된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제시카 야들리는 킬러스 와이프’, 즉 잔혹무도한 연쇄살인마의 전 아내라는 화인(火印)을 간직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 고통의 끝에서 인생의 진로를 바꿔 가정폭력과 성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능한 연방검사가 됐지만 그녀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던 두 번째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전 남편 사건 때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 곁엔 든든한 동거남 웨슬리와 사랑스러운 15살 딸 타라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은 모방범 체포를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명확히 갈리는데, 그만큼 일찌감치 독자가 모방범을 추측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외의 인물이긴 하지만 독자에겐 모방범의 정체보다는 범행동기가 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또 야들리의 전 남편인 사형수 에디와 어떤 식으로 연결됐는지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게 만드는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이 궁금증과 긴장감은 후반부의 치열한 법정 공방전을 통해 더욱 가열되는데, 형사사건 검사와 변호사를 역임한 작가의 이력 덕분에 법정을 직접 지켜보는 듯한 사실감과 함께 색다른 반전의 묘미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중간중간 위기를 맞긴 해도 혜안과 지략을 겸비한 연방검사 야들리의 맹활약은 존 그리샴의 명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반항적인 사춘기 딸을 둔 엄마이자 연쇄살인마의 전 아내로 낙인 찍힌 순탄치 않은 그녀의 개인사 역시 검사로서의 맹활약 못잖게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큰 비중은 아니지만 마초적인 가부장제 조직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흥미로웠는데, “감정을 드러내면 신뢰할 수 없는 감성적인 여인이 되어 버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는 차가운 쌍년이 되는 거고.”라는 야들리의 선배의 조언은 아무리 유능해도 쉽게 뚫을 수 없는 유리천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야들리가 내부의 적과도 치열하게 싸우며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들은 특별한 간식과도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챕터에서의 반전은 무척 놀랍고 신선하긴 해도 독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공들여 복선도 깔아놓았고 합리적인 장치도 준비해놓은 건 분명하지만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고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보일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다 읽고도 풀리지 않은 의문 한 가지가 남아 무척 아쉬웠는데, 의문 자체가 스포일러라 더 이상 언급할 순 없지만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 독자가 꽤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초중반부의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살짝 지루함을 안기긴 했지만(1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점점 속도감도 잘 붙고 긴장감도 팽팽해지는 힘 있는 작품입니다. 약간의 설명 부족과 풀리지 않은 마지막 의문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전체적으론 무척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는데, 호기심에 다시 한 번 출판사의 소개글을 찾아보니 작가의 이력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해서 이 작품이 호응을 얻는다면 조만간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법정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는데 앞으로 뉴 페이스인 빅터 메토스의 이름을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적어도 서평을 올리는 현재까지는) 인터넷 서점에서 킬러스 와이프를 입력하면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습니다. ‘Killer’, ‘Wife’ 또는 부제에 들어간 라스베이거스를 검색해야 되는데, 등록된 공식 제목이 ‘A Killer's Wife : 라스베이거스 연쇄살인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터라 이 사실을 전달했는데, 답변에 따르면 나름 눈에 띄는 특징적인 제목을 짓기 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자칫 아직 출간 안 됐나?”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가 다소 부실하기도 하고 짧게 요약된 줄거리도 문장이 너무 애매모호해서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출판사의 첫 런칭 작품이라 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인데 나중에라도 이런 부분들이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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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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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위와 칼 형제의 아버지 오프가르는 노르웨이 소도시 오스의 아라라트 산 정상부에 자리한 작고 한심한 농장을 킹덤, 우리 가족의 왕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형제의 부모가 끔찍한 자동차 추락사고로 숨진 이후 왕국과 그 일대는 피비린내로 진동했고, 이제 30대 중반이 된 로위와 칼에게 왕국은 잊힌 지 오래된 망령 혹은 추억일 뿐입니다.

작은 주유소를 경영하며 홀로 집을 지켜온 로위는 미국에서 학위를 딴 뒤 부동산 거부가 됐다는 동생 칼의 15년 만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랍니다. 바베이도스 출신의 아내 섀넌을 동반한 칼은 산 정상부에 호텔을 지어 몰락중인 고향 오스를 살리겠다는 꿈같은 계획을 늘어놓습니다. 오스 전체가 들썩이는 가운데 로위는 복잡한 감정에 빠집니다. 황당무계한 호텔 건설계획은 의심스럽고, 동생의 아내 섀넌이 내뿜는 묘한 매력에 혼란스러워졌으며, 특히 늘 적대적이던 경찰 올센이 칼의 귀국을 기다렸다는 듯 과거 미제사건을 들쑤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킹덤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다른 어느 스탠드얼론과도 완전히 결이 다른 작품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낯익은 스릴러 서사에서 많이 벗어난 독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킹덤10대 시절부터 살인에 관여했고, 부적절하거나 일그러진 사랑에만 전념했으며, 상식을 벗어난 지독한 형제애를 동생에게 투사해온 로위 오프가르라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성장 스토리이자 세상의 모든 악몽을 죄다 뒤집어쓴 한 가족의 파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10대 때 겪은 끔찍한 악몽에 얽매여 있긴 해도 가까스로 소박한 삶을 유지해온 로위는 동생 칼의 귀국 이후 또다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과 함께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사랑에 휘말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동생이 15년 만에 귀국하며 갖고 온 두 개의 폭탄’ - 무모한 호텔 건설계획과 치명적인 매력의 섀넌 은 로위를 완전히 박살내고도 남을 만한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개의 폭탄은 로위 주변뿐 아니라 오스 곳곳에서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임계점을 넘어서버린 로위는 피비린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마땅히 자기 것이어야 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 설사 그것이 아주 망가진 모습이라 해도.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과 내가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 (p704)

 

로위--섀넌의 이야기에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소도시 오스의 다양한 군상들이 로위와 칼 부부 주변을 맴돌며 벌이는 위태롭고 도발적인 행각들입니다. 이 행각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건 탐욕, 욕망, 시기, 질투, 복수 등 하나같이 비뚤어지고 뿌리 깊은 감정들인데,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하는 것은 물론 로위의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적절한 양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킹덤에 비하면 해리 홀레 시리즈는 차라리 희망과 위안을 주는 이야기였다.”라는 북 리뷰를 내놓았는데, 개인적으론 반은 맞고 반은 좀 애매한 평가라는 생각입니다. 훨씬 더 독하고 센 스릴러를 기대했지만 실은 가혹한 운명에 휩싸인 한 남자의 비극에 좀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 네스뵈 특유의 스릴러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느슨하고 장황한 (‘한 남자의 우여곡절 연대기로 보일 수도 있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로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밑받침이자 궁극적으로는 로위--섀넌의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주춧돌이라는 생각입니다. (가령 로위와 칼의 이름에 깃든 의미라든가 로위가 즐겨듣는 음악, 모든 사람들을 새에 빗댄 묘사, 늘 돌 무너지는 소리가 농장 인근의 협곡, 로위를 도발하는 주유소 10대 소녀 등 무수한 상징과 비유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740여 페이지의 분량은 주제나 소재에 비해 살짝 과해 보였고, 요 네스뵈가 문학적 성취(?)라는 과욕을 부린 대목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없어도 무방한 사소한 해프닝들이 종종 끼어든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0.5개가 빠진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통해 요 네스뵈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자칫 이런 스타일의 작가였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기우가 들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요 네스뵈의 대표작들을 한 편이라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요 네스뵈의 다음 한국 출간작은 해리 홀레의 12번째 이야기 ‘Knife’가 될 것 같은데, 요 네스뵈의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새 스탠드얼론의 소식 역시 궁금한 터라 그 반가운 소식을 듣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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