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 군함의 살인 - 제33회 아유카와 데쓰야상 수상작
오카모토 요시키 지음, 김은모 옮김 / 톰캣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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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유럽동맹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1795, 임신한 아내를 둔 평범한 영국 남자 네빌 보우트는 납치당하듯 징병되어 범선 군함 헐버트호의 수병이 됩니다.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군사훈련이 시작되고 네빌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가족과의 생이별에 절망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수병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범선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수사를 담당한 장교는 즉각 네빌을 용의자로 지목하는데, 첫 사건 땐 피살자의 바로 옆에 있었고, 두 번째 사건 땐 시신의 첫 발견자가 네빌이었기 때문입니다.

 


1795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선 영국 범선 군함 헐버트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른바 움직이는 밀실이라 할 수 있는 바다 위의 군함을 무대로 한 본격 미스터리인데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범선 군함의 살인으로 제33회 아유카와 데쓰야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오카모토 요시키가 쓴 작품들 모두 빅토리아 시대 런던이나 영국 식민지의 농장 등 과거의 외국을 무대로 삼았다고 하니 무척 특이한 성향의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 위의 군함자체도 거대한 밀실이지만, 헐버트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들은 범행 이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유유히 종적을 감춘 범인의 행각 때문에 밀실 미스터리의 맛을 더 강렬하게 풍깁니다. 범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갑판에서, 또는 온통 어둠뿐인 배 밑바닥에서 기괴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가 하면, 유일한 출구가 수병들에 의해 막힌 밀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수병과 장교들을 더욱 두렵게 만든 건 이른바 프랑스 함장 유령의 저주라는, 헐버트호에 전해 내려오는 괴담입니다. 과거 헐버트호의 영창에 갇혔던 프랑스 함장이 자살한 이래로, 그 영창에 감금됐던 자들이 저주에 휘말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는 괴담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살인사건의 피살자들 역시 영창을 드나들었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메인 서사지만 범선 군함의 살인에는 흥미로운 서브 서사들도 포진해있습니다. 우선 18세기, 그것도 범선 군함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대한 묘사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끕니다. 승조원이 500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헐버트호의 외형도 신기했고, 범선의 항해 원리라든가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 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또한 죽음의 공포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던 네빌이 같은 신세인 수병들 일부와 함께 탈출을 도모하는 이야기는 액션 스릴러의 긴장감과 함께 과연 그들이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시대적 배경이나 사건의 성격상 다분히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빠른 전개와 세련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인데, 사실 고전미나 서사 자체보다 아쉬웠던 건 망망대해의 군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공포심이 기대보다 약했다는 점입니다. 500명에 달하는 승조원 가운데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거나 조금이라도 공포심을 느낀 건 용의자로 지목받은 주인공 네빌과 소수의 수병들, 그리고 수사를 지휘하는 일부 장교뿐이었고, 그래선지 독자 역시 헐버트호를 뒤덮은 살인사건의 공포에 깊게 몰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주인공 네빌은 대체로 수동적이고 유약한 캐릭터로 그려졌고, 탐정 역할을 맡은 장교 버넌은 두 번째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지향점이 모호해서 네빌과의 시너지를 발산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살해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헐버트호를 제대로 강타했더라면, 또 두 주인공이 좀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충돌했더라면 좀더 내실 있는 미스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장르물 독자라면 저절로 눈길이 끌릴 만큼 매력적인 설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범선 군함의 살인18세기 범선 군함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휴먼 드라마의 조합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꽤 흥미로운 텍스트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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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소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3 링컨 라임 시리즈 3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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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범죄학자인 링컨 라임은 채 1%도 안 되는 가능성에 기댄 채 노스캐롤라이나 메디컬 센터에서의 신경세포 수술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파케노크 카운티의 보안관인 짐 벨로부터 강력사건 수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곤충 소년이란 별명을 지닌 16살 개릿 핸런이 살인을 저지른 뒤 두 여성을 납치했는데 그 행적이 묘연한 상태에서 마침 라임의 소식을 들은 짐 벨은 그의 능력을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라임은 거절하려 했지만 색스의 주장에 밀려 사건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소도시 보안관국의 초기 현장조사는 너무나 허술했고, 결국 라임과 색스는 거의 재조사에 가까운 수고를 들여 개릿의 행방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색스의 폭주 때문에 라임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지? 혼란스러운 게 아니야. 죽는다고. 수사관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주변 환경에 대한 무지야.” (p47)

 

링컨 라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곤충 소년의 주 무대는 라임과 색스의 홈그라운드인 뉴욕이 아닌, 강과 늪지대로 둘러싸인 불온한 분위기의 남부 소도시 파케노크 카운티입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장에서 발견한 미량 증거물뿐이지만 토양과 식물 등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탓에 라임과 색스는 수사 초반부터 난항을 거듭합니다. 뉴욕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던 두 사람이 물을 벗어난 물고기신세가 된 채 고전하는 초반부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라임과 색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건 카운티 보안관국의 노골적인 반발과 법과학에 대한 무지입니다. 자기 영역을 침입한, 그것도 전신마비의 범죄학자와 빨간 머리의 뉴욕경찰로 이뤄진 북부 양키 콤비가 남부 보안관들에게 냉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너무나 허술하게 이뤄진 초기 현장조사입니다. 법과학에 대한 무지 탓에 현장은 심하게 훼손됐고 미량 증거물 수집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늪지대의 지형지물은 물론 곤충의 생태지식에도 해박한 16살 소년 개릿을 추적하는 일은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 못잖게 관심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부작용과 역효과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전신마비 상태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키기 위해 라임이 선택한 신경세포 수술입니다. 라임과 색스는 이 수술에 대해 서로 다른 속내를 품고 있으면서도 결코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라임은 어떻게든 수술을 강행할 생각이고, 색스는 어떻게든 이 수술을 말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두 사람의 속내는 실은 상대방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 똑같은 모양새라 독자로 하여금 여러 번 안쓰러움을 맛보게 만듭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릴 사건에 가담하고 만 두 사람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과연 라임의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될까요?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법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물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이 극명하게 벌어진 점입니다. 라임은 결코 증인과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물리적인 미량 증거물만이 그의 유일무이한 잣대입니다. 반면 색스는 사람을 다루는 경찰입니다. 모두가 잔혹한 살인마로 지목한 16살 소년 개릿의 말과 행동에서 뭔가를 감지한 색스는 라임의 절대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인간의 가슴 속에서 발견한 증거물이야말로 최고의 증거라고 확신하곤 누구도 예상 못한 충격적인 행동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합니다. (이 급선회 지점은 중반부쯤 전개되는데,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그 내용이 공개돼있지만 제가 볼 땐 꽤 큰 스포일러라서 이 서평에선 생략했습니다)

 

사건의 규모와 잔혹성, 스릴러 서사의 긴장감과 속도감 등 여러 면에서 전작인 코핀 댄서에 비해 다소 느슨하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제프리 디버 특유의 막판 반전이 폭죽처럼 터져준 덕분에 중반부까지의 아쉬움을 단번에 잊을 수 있었습니다. 색스가 벌인 대형사고와 그 후폭풍을 언급하지 못해서 반쪽짜리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막판 반전 쇼의 쾌감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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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방정식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6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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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자원개발 설명회 때문에 바닷가 마을 하리가우라로 가던 유가와 마나부는 방학을 맞아 고모가 운영하는 여관 로쿠간소로 가던 초등학생 교헤이와 소소한 인연을 맺습니다. 그 인연 덕분에 유가와는 로쿠간소에 묵게 됐지만, 다음날 아침 그곳에 투숙했던 쓰카하라라는 남자가 제방에서 추락한 사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경찰 수사에 휘말리고 맙니다. 애초 사고사로 보였지만 감식 결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추락한 게 밝혀졌고, 그가 전직 경시청 형사였다는 점 때문에 결국 하리 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됩니다. 한편 쓰카하라의 옛 부하이자 현직 경시청 관리관의 내밀한 지시를 받고 쓰카하라의 행적을 조사하던 구사나기와 우쓰미는 유가와가 사건 현장인 하리가우라에 있음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갈릴레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한여름의 방정식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전개를 선보입니다. 하나는 매번 마지못해 수사를 돕곤 했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보다 먼저 사건에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뒤틀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유가와와 구사나기가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각자 조사를 벌이며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 전직 형사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비교적 소소한 규모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서사 자체를 굉장히 커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설정인데, 유가와가 사건 현장인 하리가우라에서 트릭과 진범을 찾아내는 반면, 구사나기는 도쿄에서 피살자의 행적을 추적하며 유가와와 정보를 주고받는 입체적인 구도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초반부만 해도 환경보호와 과학의 역할이라는 다분히 계몽적인 이과 미스터리처럼 보였지만, 한 전직 형사의 의문의 죽음이 벌어지고 본의 아니게 유가와가 사건에 휘말리면서 갈릴레오 시리즈특유의 정통 미스터리 서사가 발동됩니다. 피살된 전직 형사가 아무 연고도 없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온 이유도, 일산화탄소 중독과 사체 유기라는 복잡한 행위를 저지른 범인의 의도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본부가 난항을 거듭하는 사이 유가와와 구사나기는 원거리 협력수사를 통해 하나둘씩 단서를 모아갑니다. 그리고 단지 우연처럼 보였던 몇 가지 사실이 실은 과거 속 한 사건이 잉태시킨 필연임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됩니다.

 

단편집인 탐정 갈릴레오’, ‘예지몽’, ‘갈릴레오의 고뇌가 짧은 분량 안에 기발한 이과 미스터리를 담았다면, 장편인 용의자 X의 헌신’, ‘성녀의 구제’, ‘한여름의 방정식은 끔찍한 살인사건 이면에 숨어있는 안타깝고 애틋한 비극, 즉 독자로 하여금 절대 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간절함을 유발시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룹니다. 재미있는 건 진실 찾기의 주인공인 유가와 역시 똑같은 인간적 딜레마를 겪는다는 점입니다. 사건 당사자 혹은 경찰에게 자신이 찾아낸 진실과 진범의 정체를 알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뒤에 벌어질 후폭풍과 더 큰 비극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여름의 방정식은 유가와의 딜레마가 가장 극명하게 묘사된 작품인데, 비록 겉으론 냉정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는 듯 보여도 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뜻밖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곤 합니다. 유가와의 이런 모습에 관한 한 한여름의 방정식은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미스터리 명품으로 손꼽히는 용의자 X의 헌신에 버금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워낙 복잡하게 설계돼서 내용에 관해선 별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초반부터 변곡점들이 연이어 등장하다 보니 그중 하나만 공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나름 조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꽤 중요한 변곡점이 노출돼있는데, 가급적이면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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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2 - 11개의 평면도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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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작가 우케쓰가 주택 평면도를 통해 그 집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은 이상한 집을 출간한 지 2. 그 사이 우케쓰는 전국에 산재하는 이상한 집에 관한 수많은 제보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왠지 접점이 있어 보이는 11개의 집과 평면도를 추려냈고, 인터뷰를 통해 그곳에 얽힌 사연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자료를 갖고 찾아간 사람은 미스터리 마니아이자 건축설계사인 구리하라. ‘이상한 집때와 마찬가지로 구리하라는 11개의 자료를 검토한 뒤 충격적인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자료들이 서로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한 가지 접점이 떠오를 것이다. 꼭 추리하면서 읽어 보기 바란다.” (p7)

 

평면도를 통해 이상한 공간을 찾아내고,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리하여 끝내 끔찍한 진실을 파악해내는 기묘한 미스터리 이상한 집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번에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 앞에 던져진 평면도는 모두 11장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1938년부터 2023년에 걸쳐 있고, 장소 역시 여러 곳으로 분산돼있지만 작가의 오프닝 멘트대로 11개의 평면도는 한 가지 접점을 품고 있습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거나 관련 있더라도 느슨한 수준일 뿐인 11개의 평면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공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비극적으로 얽혀든 하나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작가는 주의 깊게 읽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실은 일부 자료들 사이의 접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만 11개의 자료를 하나로 엮는 결정적인 접점은 후반부에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부쯤 이 접점을 눈치 챌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감춰놓은 큰 그림의 전체 모습까지 파악하긴 쉽지 않습니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다른 복도, 상식적이지 않은 설계로 지어진 수많은 복제 주택, 움직이는 벽, 살인을 위해 설계된 집, 기이한 구조로 지어진 컬트 교단의 성지, 딱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진 방 등 이상한 집 2’에는 전편보다 더욱 난해하고 기괴한 공간들이 등장합니다. 그 공간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데, 단순 변사에서부터 살인, 방화, 자살 등 여러 형태의 죽음과 함께 가족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비극이 하나둘씩 공개됩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는 각각의 공간과 사연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다른 자료 속 공간과 사연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번득이는 추리를 담아 설명합니다.

 

우케쓰가 오컬트 작가 특유의 감으로 조사를 벌여 사연들을 정리하고, 건축설계사 구리하라가 그 자료들과 평면도를 바탕으로 복잡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구도인데, 재미있는 건 이들의 진실 찾기가 초반에는 막연한 추측과 망상으로 시작되지만 이상한 집과 이상한 평면도에 연루된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는 형태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전편의 경우 초반의 추측과 망상이 다소 과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사실인데, ‘이상한 집 2’는 추측과 망상 모두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그럴 듯하게 읽혀서 이야기 시작과 함께 단번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구리하라가 홀로 폭주하듯 미스터리를 밝혀냈던 전편과 달리 이번엔 구리하라의 결론에 위화감을 느낀 우케쓰가 반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아서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1개의 평면도가 단서로 던져지고 거기에 얽힌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서 막판에 접점이 밝혀지는 대목을 읽을 땐 다소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좀 번거롭긴 해도 각 평면도의 특징과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도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두통도 예방할 수 있고 진실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짜릿함도 훨씬 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자아낸 작가의 두뇌와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는데, 그래선지 과연 이상한 집 3’가 나올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면서도,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한번쯤 더 이 독특한 평면도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다는 욕심도 품게 됐습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이상한 그림도 무척 궁금해졌는데, 일단은 이 작품의 여운을 좀더 즐겨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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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게임
박소해 외 지음 / 북오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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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시소게임은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여성작가 네 명의 미스터리 앤솔로지 작품입니다. 검색해보니 이 네 명의 작가는 2022년 산후우울증에 대한 앤솔러지 소설집 네메시스 - 복수하는 여자들’(북오션)을 함께 펴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작품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관심 작가도 있고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도 있는데, “신뢰가 무너졌을 때 결혼은 최고의 스릴러가 된다는 홍보카피처럼 부부를 주제로 한 장르물이라는 서사 자체가 눈길을 끌어서 나름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박소해의 사마귀, 여자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를 둔 형사 차민우는 가정폭력사건 현장에서 만난 기묘한 분위기의 여자 송채윤에게 빠져든 뒤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차민우 주위에서 자살과 살인 등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김재희의 부부, 그 아름다운 세계

성형외과 의사 이수중과 아내 서현경은 이미 부부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된 사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혼을 원하지만 어떻게든 상대에게 귀책사유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이리저리 궁리를 합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귀책사유는 바로 불륜의 덫이었습니다.

 

한수옥의 설계된 죽음

저수지에 빠진 차에서 아내가 사망하고, 신고자인 남편이 범인으로 의심받습니다. 조사결과 남편에겐 불륜 상대가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상 아내를 죽일 동기가 충분해보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형사의 촉은 남편이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쪽으로 향합니다.

 

한새마의 시소게임

아내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낼 계획으로 국제결혼을 시도하는 남자. 한국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국제결혼을 감행하는 베트남 여자. 이 둘의 시소게임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됩니다.

 


수록된 네 작품 가운데 세 편이 중요한 소재로 삼을 정도로 불륜은 부부결혼에게 가장 치명적인 흉기입니다. 순간적인 격정 때문이든 배우자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의도적인 행위든 불륜은 증오와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살의까지 품게 만드는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에서 불륜만큼 매력적인 모티브를 찾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세 편씩이나 주요 소재로 삼은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론 영화 장미의 전쟁같은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풍자 비극이 한 편쯤 들어갔더라면 더 알찬 구성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한새마의 잔혹한 부부 스릴러 시소게임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초반 설정과 뜻밖의 반전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불륜이 등장하지 않은 작품이라 더 돋보였다는 생각입니다.

 

부부, 그 기묘하고도 잔혹한 세계라는 띠지 카피는 보는 사람에 따라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민낯 그대로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미스터리 설정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또는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연출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역시 부부와 결혼은 연인과 사랑이 등장하는 달달한 로맨스와 달리 미스터리나 스릴러 등 장르물에 더 잘 어울리는, 말하자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관계라서 주제 자체만으로도 흡인력이 강했고 매 수록작마다 긴장감을 즐기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막연한 바람이지만 혹시 시소게임 2’가 기획된다면 남성작가들이 쓴 부부와 결혼에 관한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이기를 기대해봅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미묘할 수도, 확연할 수도 있는 차이를 만끽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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