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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평점 :
한 작가의 작품을 일곱 편쯤 읽고 나면 “이 작가는 이런 스타일이고, 이런 장르가 전공”이라고 단정할 만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여덟 번째로 읽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딱히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작가인지 단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인 ‘고전부 시리즈’부터 기자의 소명과 보도윤리를 다룬 ‘베루프 시리즈’,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 ‘흑뢰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근대를 배경으로 서늘한 공포와 맛깔난 기담에 마지막 한 줄의 반전 미스터리까지 맛볼 수 있는 ‘덧없는 양들의 축연’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비슷한 톤의 작품을 고르라면 현대물인 ‘야경’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시대적 배경입니다. 시중을 드는 고용인이 등장하고, 지역유지가 권세를 누리는 장면 등으로 미뤄보아 대략 20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됐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한 주인공이 인용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밤 산책’(1949년)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각 수록작마다 배어있는 기담 혹은 괴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고풍스런 옛이야기의 정취가 초반을 장식하지만 이내 느닷없이 기묘한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기담과 괴담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서사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고 순수한 공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만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깔끔한 해법과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수록작도 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이 작품을 ‘감미롭고도 잔혹한 블랙 미스터리’라고 부른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모든 수록작의 공통점은 ‘바벨의 모임’이라는 여대생들의 독서모임입니다. 모임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유수의 명문가의 영애들이며 집에서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탐독하고 그 감상을 서로 나누곤 합니다. 다만,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을 주는 이 모임이 직접 묘사되거나 멤버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멤버 한 명 한 명이 각 수록작의 주인공을 맡고 있고, 때론 제3자로서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 주인공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바벨의 모임’이란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덧없는 자들의 성역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혹은 너무나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모임에 모여들지요.” (p308)
명문가의 영애들이지만 기구하거나 불안하거나 불행한 사연을 지닌 탓에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미스터리를 읽으며 현실에서의 도피 혹은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그녀들의 심리는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간혹 “내가 지금 판타지를 읽는 건지, 현실 기반의 이야기를 읽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반전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제야 앞서 읽은 내용들을 천천히 복기하고 음미하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명문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충심 이상의 마음을 품은 몸종의 비밀을 그린 ‘집안에 변고가 있어서’, 동생에게 가문을 내주고 유폐당한 장남과 그를 감시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맡게 된 이복여동생의 이야기 ‘북관의 죄인’, 외진 곳의 고급 별장을 홀로 관리하던 여성이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뒤 벌어지는 서늘한 이야기 ‘산장비문’,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해지던 아가씨가 동갑의 몸종과 만난 뒤 벌어지는 비극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 그리고 ‘바벨의 모임’이 몰락하게 된 사연을 그린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덧없는 양들의 만찬’ 등 이야기마다 독특한 색채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장르가 혼합된 선물세트를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마냥 미뤄뒀던 작품인데 14년 만에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오래된 밀린 숙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나마 근대와 현대의 경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만끽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인사이트 밀’, ‘추상오단장’ 등 아직 못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이 많은데 기회가 닿는대로 그의 팔색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