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료시카의 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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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국에 처음 소개돼 호평을 받은 단편집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는 읽지 못했지만 샤센도 유키와 함께 집필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아쓰카와 다쓰미의 단편집입니다.

 

코로나 시국을 배경으로 소재도 서사도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로 주요 무대가 헌책방인 위험한 도박-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 한 대학이 입시 논술시험을 미스터리 지문을 읽고 범인 맞히기로 치르기로 하면서 벌어진 갖가지 소동을 그린 ‘2021년도 입시라는 제목의 추리소설‘, 연이어 상황이 바뀌고 반전이 거듭되는 양파 같은 미스터리 마트료시카의 밤‘, 그리고 한 대학 레슬러가 살해당한 살벌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코믹한 전개와 캐릭터들 덕분에 웰메이드 B급 영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6명의 격앙된 마스크맨등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남은 인상은 이 작가의 천재성을 따라가기엔 내가 너무 역부족이다.”입니다. 읽는 동안 몸과 마음이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몰입해야만 했는데, 한순간만 방심하면 미스터리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눈앞의 활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대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복잡하고 현란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미스터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그 내용이 소개되거나 오마주의 대상이거나 인용의 출처로 거론된 수많은 명작 미스터리의 목록은 아쓰카와 다쓰미의 해박하고 방대한 지식과 독서이력을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부담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뭐랄까, 살짝 짓눌린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무래도 본 내용과 관련 있는 텍스트들이라 더 신경 쓰면서 읽어야만 했는데, 읽어본 작품이거나 낯익은 작가가 아닌 경우에는 꽤나 난감해지곤 했습니다.

 

내용보다는 작가에 대한 비평같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다만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작품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의 미스터리를 감당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독자라면 앞으로도 내내 찐팬이 되어 그의 천재성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첫 번째 수록작 위험한 도박-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캐릭터, 무대, 미스터리 그리고 짜릿한 반전까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인데, 비록 아쓰카와 다쓰미가 제 취향과 살짝 거리가 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나온다면 꼭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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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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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인 미치오는 결석한 친구 S에게 숙제와 유인물을 전해주러 갔다가 목을 맨 채 죽어있는 S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담임과 경찰이 찾아갔을 때 S의 시신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누군가 현장을 손 댄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1주일 뒤 S는 거미로 환생하여 미치오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죽인 자를 지목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이지만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여동생 미카와 함께 미치오는 S를 살해한 범인의 범행을 입증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S의 어머니, 사건 당일 S를 목격한 노인, 뭔가를 감추는 듯한 담임, 영적 능력을 가진 노파 등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미치오는 S의 이야기를 점점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했던 가장 큰 이유는 (매번 그의 작품에 대한 서평을 쓸 때마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이 작가가 나와 잘 맞는 작가인지통 결론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름 잘 맞는 작품을 읽은 뒤에도 책장에서 꺼내기가 왠지 주저됐고, 그 반대의 경우엔 조금도 읽을 생각이 나지 않아 그대로 방치하곤 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최근 1~2년 사이에 읽은 용서받지 못한 밤’, ‘절벽의 밤’, ‘폭포의 밤에게 연이어 좋은 평점을 주게 된 걸 계기로 드디어 책장에서 구해낼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부조리한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환상소설 같으면서 불편한 감정을 자극하는 일종의 사이코 서스펜스이지만 마지막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본격 미스터리이기도 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어떤 한 가지 장르로 특정하기 어려운 미묘한 작품입니다. 환생이라는 명백히 비현실적 설정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불안정하거나 악의로 가득 찼거나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심리를 발산합니다. 몇몇 인물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캐릭터 때문에 그 정체성 자체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말하자면 독자 입장에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으며 숱한 위화감에 사로잡힌 채 미치오가 이끄는 본격 미스터리 스타일의 진실 찾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좀 억지 같은 비유지만 스티븐 킹과 온다 리쿠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를 펄펄 끓는 열탕 속에 녹여 넣은 이야기 같다고 할까요?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미스터리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더 복잡한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와 동시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지면서 독자의 머릿속을 한없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또 어느 순간부터 광기를 띠기 시작한 미치오의 진실 찾기가 애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면서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게끔 만듭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는 황당한 엔딩이 튀어나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클라이맥스는 궁금증 이상의 불쾌감과 불편함을 일으켰고 마지막 세 페이지의 에필로그마저 ... 그런 건가?”라는, 애매한 여운이라도 느끼려면 두세 번은 되읽어야 할 만큼 짙은 안개 속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도 복잡하고 스포일러가 될 소지도 많아서 내용에 관해 언급하기가 무척 어려운 작품입니다. 안 읽은 독자라면 무슨 얘긴지 전혀 알 수 없는 서평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도 남겠지만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자체가 그런 작품이니 저로서도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습니다. ‘내 이해력이 부족한가?’라며 자책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고, 취향이 너무나도 안 맞아 별 1~2개의 평점만 주곤 다시는 미치오 슈스케를 돌아보지 않을 독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두 경우의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읽은 그의 작품 중에 마음에 들어 호평을 한 작품이 그래도 몇 편쯤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스켈리튼 키에 이어 또다시 그의 작품에 별 3개를 주게 된 건 무척 아쉬울 뿐입니다. 동시에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아직도 책장에 여러 편 방치돼있다는 게 한없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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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파즈 - 무라카미 류 걸작선
무라카미 류 지음, 김지룡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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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은 50여 편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읽은 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한 편뿐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19금 판정이 당연해 보일 정도로 수위가 센 이야기였다는 것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여 페이지의 분량에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토파즈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으로, 지금까지 읽은 성()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묘사 수위에 관한 한 거의 원톱으로 꼽을 만큼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주인공은 가학적인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SM클럽 소속의 여성들입니다.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 속에 담아낸 작품도 있지만 마치 성매매 일지처럼 거칠고 엽기적인 성관계 장면을 디테일하게 서술한 작품도 있습니다. 돈으로 성을 사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야비한 변태로 그려지지만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은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호출할 다음 손님의 전화를 기다리는, 말 그대로 일상적인 업무로 성매매에 나섭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알맹이 없는 SM 포르노그래피로 여길 수도 있고,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고 픽션의 탈을 쓴 다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속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비정상적인 성관계 묘사만 놓고 보면 음지에서나 유통될 법한 SM 포르노그래피로 읽히는 게 당연합니다.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주인공들이 성매매에 빠져들게 된 안타까운 경위라든가 어떻게든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라든가 좀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성매매를 비판하는 이야기 같은 건 거의 없어서 이 작품을 사회파 소설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픽션의 탈을 쓴 다큐’, 즉 뭔가 독자에게 설파하려는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이런 요상한 세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아주 무관한 세상은 아닙니다.”라며 상식이나 도덕이라 불리는 것들과 거리가 먼, 겉으로는 더럽고 추하다고 부정하면서도 속으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그런 세상의 단면을 뚝 잘라 내보인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표제작인 '토파즈'를 비롯해서 간혹 주인공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들어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읽고 나면 왠지 주인공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하고, 손을 내밀어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타인의 관심과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또 누군가의 동정심이나 이해 같은 것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그저 지켜보며 각자의 감정에 빠지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저 파격적인 19금 소설정도가 아니라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구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작품이라 함부로 추천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보고 싶은 독자라면 수록작 한두 편쯤 맛보기로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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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살인사건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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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앞둔 외과의사 미즈키 치하야는 오랫동안 서먹한 채 벽을 쌓고 살아온 아버지 미노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망 직후 자신의 시신을 해부해달라는 미노루의 유언에 크게 놀란 치하야는 동기인 병리의(病理醫) 토야 시오리와 함께 해부를 진행한 결과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암호문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혼란스러운 치하야에게 닥친 결정타는 평생 경비원으로 일했다던 미노루가 실은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으며, 아직까지 미제로 남은 28년 전의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일명 종이학 살인사건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미노루가 사망한 바로 그날, 종이학 살인사건의 범인이 28년 만에 새로운 범행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여성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직 의사이자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치넨 미키토의 매력을 또 한 번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이 본격 미스터리에 치중한 작품이었고, ‘구원자의 손길이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이었다면, ‘종이학 살인사건은 두 장르가 절묘하게 조합된 메디컬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傷痕のメッセージ’(상흔의 메시지)입니다. 치하야의 아버지이자 전직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던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진 암호 메시지가 이 작품의 원제이자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미노루로 하여금 경찰을 그만두게 만들었던 28년 전 연쇄 여아 살해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왜 아버지는 편지가 아닌 기이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겼는가? 만일 종이학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라면 왜 지금까지 경찰에 넘기지 않은 건가? 무엇보다 왜 아버지는 자신에게 전직 경찰임을 알리지 않은 걸까? 자신을 혼란에 빠뜨린 이 무수한 의문들의 해답을 찾기 위해 치하야는 동기 의사인 시오리와 함께 암호 메시지 해독에 나섭니다. 그리고 거기에 28년 전 미노루의 파트너이자 신참 멘티였으며 현재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인 사쿠라이가 가세합니다. 그는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이 28년 만에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여성 교살사건 때문에 수사본부에 합류했고, 미노루의 죽음과 교살사건이 같은 날 벌어진 게 절대 우연이라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치하야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사쿠라이의 태도와 의도에 적잖은 의심을 품습니다.

 

미노루의 딸인 치하야가 그의 생전 인간관계를 조사하고, 미노루를 해부한 병리의 시오리는 그의 위장에 새겨진 메시지는 물론 시신에 담긴 또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현미경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사는 경시청의 사쿠라이가 담당합니다. 말하자면 치하야가 휴먼, 시오리가 메디컬, 사쿠라이가 미스터리를 담당한 셈인데, 사건 못잖게 이 세 인물의 케미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치하야는 아버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면모에 여러 번 놀라고 눈물을 흘립니다. 시오리는 미노루의 장기를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그의 시신이 전달하려는 또 다른 메시지를 찾는데 전념합니다. 병리의의 의무는 단순히 해부나 관찰에 그치지 않고 시신이 남긴 메시지를 유족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 시오리의 신념은 메디컬 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남다른 감동을 전합니다. 그리고 과거 사수였던 미노루가 그랬듯 사쿠라이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수사를 감행하는 철두철미한 반골입니다. 유족인 치하야와 민간인 의사인 시오리와 비밀리에 협업하는 건 바로 그런 그의 수사 스타일 때문인데, 문제는 그 협업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점입니다.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이후 28년 만에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도 흥미롭고,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치하야의 고통스러운 여정도 긴장과 감동을 번갈아 선사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는 놀라움 그 자체이고, 사쿠라이와 시오리가 알아낸 진실 때문에 자칫 평생을 지옥도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치하야의 위태로운 처지는 막판까지 반전을 거듭하며 어떤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정말 잘 짜인 메디컬 미스터리의 쾌감과 여운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라노벨 계열과 달달해 보이는 미스터리는 읽지 않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정극 미스터리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 읽는 편입니다. 검색해보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집필한 걸로 나오는데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하루라도 빨리 소개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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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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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을 일곱 편쯤 읽고 나면 이 작가는 이런 스타일이고, 이런 장르가 전공이라고 단정할 만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여덟 번째로 읽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딱히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작가인지 단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인 고전부 시리즈부터 기자의 소명과 보도윤리를 다룬 베루프 시리즈’,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 흑뢰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근대를 배경으로 서늘한 공포와 맛깔난 기담에 마지막 한 줄의 반전 미스터리까지 맛볼 수 있는 덧없는 양들의 축연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비슷한 톤의 작품을 고르라면 현대물인 야경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시대적 배경입니다. 시중을 드는 고용인이 등장하고, 지역유지가 권세를 누리는 장면 등으로 미뤄보아 대략 20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됐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한 주인공이 인용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밤 산책’(1949)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각 수록작마다 배어있는 기담 혹은 괴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고풍스런 옛이야기의 정취가 초반을 장식하지만 이내 느닷없이 기묘한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기담과 괴담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서사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고 순수한 공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만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깔끔한 해법과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수록작도 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이 작품을 감미롭고도 잔혹한 블랙 미스터리라고 부른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모든 수록작의 공통점은 바벨의 모임이라는 여대생들의 독서모임입니다. 모임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유수의 명문가의 영애들이며 집에서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탐독하고 그 감상을 서로 나누곤 합니다. 다만,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을 주는 이 모임이 직접 묘사되거나 멤버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멤버 한 명 한 명이 각 수록작의 주인공을 맡고 있고, 때론 제3자로서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 주인공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바벨의 모임이란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덧없는 자들의 성역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혹은 너무나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모임에 모여들지요.” (p308)

 

명문가의 영애들이지만 기구하거나 불안하거나 불행한 사연을 지닌 탓에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미스터리를 읽으며 현실에서의 도피 혹은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그녀들의 심리는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간혹 내가 지금 판타지를 읽는 건지, 현실 기반의 이야기를 읽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반전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제야 앞서 읽은 내용들을 천천히 복기하고 음미하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명문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충심 이상의 마음을 품은 몸종의 비밀을 그린 집안에 변고가 있어서’, 동생에게 가문을 내주고 유폐당한 장남과 그를 감시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맡게 된 이복여동생의 이야기 북관의 죄인’, 외진 곳의 고급 별장을 홀로 관리하던 여성이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뒤 벌어지는 서늘한 이야기 산장비문’,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해지던 아가씨가 동갑의 몸종과 만난 뒤 벌어지는 비극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 그리고 바벨의 모임이 몰락하게 된 사연을 그린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덧없는 양들의 만찬등 이야기마다 독특한 색채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장르가 혼합된 선물세트를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마냥 미뤄뒀던 작품인데 14년 만에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오래된 밀린 숙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나마 근대와 현대의 경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만끽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인사이트 밀’, ‘추상오단장등 아직 못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이 많은데 기회가 닿는대로 그의 팔색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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