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낙원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방범’ 이후 9년. 르포라이터로서의 삶을 접고 조용히 살아가던 마에하타 시게코는 중년부인 도시코의 방문 이후 또 다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2살에 사고로 죽은 아들 히토시가 사이코메트리였다고 짐작하는 도시코는 시게코에게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부모가 딸을 살해한 뒤 암매장했던 도이자키家 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었지만 시게코는 단지 우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토시의 그림 가운데 ‘모방범’ 사건이 벌어진 산장의 그림과 기표들을 발견한 시게코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어쩌면 히토시는 진짜 사이코메트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게코는 히토시의 사연과 함께 그가 그림으로 남긴 도이자키家 사건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5년도 훌쩍 넘어서 줄거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를 읽다가 “‘낙원’이 초능력자 이야기였다고?”라며 꽤나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도이자키家 사건이 설명되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기억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는데, ‘낙원’ 역시 ‘모방범’ 못잖게 씁쓸하고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는 점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르포라이터로서의 시게코의 경력은 9년 전 ‘모방범’으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범인의 정체를 직접 폭로하여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자괴감과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시게코는 자신이 취재한 것들을 책으로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30대 초였던 시게코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작은 규모의 무가지 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지금도 시게코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당시 시게코가 책을 내지 않은 사실에 놀라고, 그녀가 더는 르포라이터로서 일하지 않고 있음에 더 크게 놀랍니다. 그런 시게코가 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건 그만큼 죽은 소년 히토시가 남긴 그림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이자키 부부는 16년 전 중학생 딸 아카네를 살해한 뒤 마루 밑에 매장을 했고, 최근 화재로 집이 불타버리자 경찰에 찾아가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부부는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종적을 감췄고, 아카네의 동생 세이코는 이혼이라는 후폭풍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시게코는 죽은 소년 히토시가 ‘아카네의 죽음에 연루된 누군가와 접촉한 탓에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발휘됐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는 가정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히토시와 도이자키家의 접점을 설명하는 정보제공자 역할 외에도 사건의 비극성과 그 이면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조연을 맡습니다.
1~2권을 합쳐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낙원’은 주인공 시게코에게나 독자에게나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지독한 탐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토시와 도이자키家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낱낱이 파고드는 시게코의 탐문은 나름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대한 수사일지처럼 읽히기도 해서 ‘모방범’을 통해 시게코의 전력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꽤나 곤혹스러울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불행한 사건에는 360도 어디서 보아도 완벽한 진실은 있을 수 없어요.”라는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많아서 시게코는 물론 독자 역시 그 지독하고 방대한 탐문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낙원’은 참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타고난 사이코메트리 재능 때문에 괴로워했던 12살 소년 히토시도, 딸 아카네의 목을 졸라 죽이고 16년 동안 마루 밑에 방치했던 도이자키 부부도, 부모가 언니를 죽였다는 진상을 알게 된 뒤 격심한 혼란에 빠진 동생 세이코도 ‘낙원’이라는 안락하고 따뜻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그 누구의 낙원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망각한 후에,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성립되는 거라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통해 일반적인 의미의 낙원과는 다른, 그러니까 (인터넷서점의 한 서평처럼) “연인에게는 둘만의 공간이 낙원이지만, 연쇄살인마에게는 살인의 무대가 낙원이다.”라는 식의 좀더 심오한 의미의 낙원을 그려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만의 낙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역사와 감정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그 자신 외에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그리고 나의 낙원은 누군가의 악몽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나의 비극은 누군가의 낙원의 터전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암시한다고 할까요?
‘모방범’ 역시 사건 못잖게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파고든 작품이지만 ‘낙원’은 후자의 비중이 훨씬 더 묵직하고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편하게 읽히지도 않고,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않지만 그만큼 남는 여운은 깊고 무겁습니다. 신문에 연재됐던 작품인데다 지독한 탐문기에 가까워서 다소 늘어지고 지루한 대목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들을 견뎌낸다면 미야베 미유키가 그린 ‘낙원’이 어떤 모양새를 지녔는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깊이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