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 아름다운 밤에
아마네 료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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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모리에서 신원미상의 노숙자 중년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엽기 살인사건이 연이어 두 건이나 벌어지자 언론은 범인에게 플레임(Flame)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그런데 플레임의 세 번째 희생자가 신원이 확실한 여고생 가렌으로 밝혀지면서 수사진은 혼란에 빠집니다. 가렌의 오빠인 17세 소년 산시로는 범인을 향한 복수심에 사로잡히지만 그보다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때 긴 은색 머리의 신비한 미소녀 탐정 오토미야 미야가 접근해선 플레임 사건을 의뢰받아 수사 중이라며 살해된 가렌에 대해 물어옵니다. 경계심이 앞서던 산시로는 미야가 공감각 능력자란 사실에 더욱 놀라지만 이내 그녀의 조수가 되어 가렌을 살해한 진범을 직접 응징하기로 합니다.

 


공감각 아름다운 밤에2024희망이 죽은 밤에’(일본 출간 2017) 이후 두 번째로 한국에 소개되는 아마네 료의 작품으로 2010년 메피스토상을 수상한 데뷔작이자 공감각 미소녀 탐정 오토미야 미야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희망이 죽은 밤에가 생활안전과 여경인 나카타를 앞세운 사회파 미스터리였던 반면, ‘공감각 아름다운 밤에는 공감각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미소녀 미야가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특수설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선 미야(美夜)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2017년까지 모두 네 편이 출간됐는데, 그만큼 미야의 매력이 독자들에게 어필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감각은 특정한 감각이 또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으로, “글자에서 색을 보거나 소리를 형태로 인식하는등 다양한 경우가 존재하는데, 주인공 미야의 공감각은 청각이 시각을 불러일으켜서 어떤 소리를 들으면 색이나 형태가 보이는, 이른바 색청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하는 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선명한 파란색이, 살인 욕구에 사로잡힌 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강렬한 진홍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공감각 못잖게 미야를 돋보이게 하는 건 독특한 외모입니다. 뛰어난 미모와 은색의 긴 머리카락 덕분에 어딜 가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소리를 색과 형태로 볼 수 있는 능력에다 눈에 띄는 외모까지 갖춘 미야의 캐릭터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에 잘 어울려 보이지만 그녀가 다루는 사건은 잔혹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해서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동생 가렌을 살해한 범인을 응징하기 위해 미야의 조수가 된 산시로, 그리고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엘리트 경찰 야하기가 미야와 함께 플레임 추적에 나섭니다. 작은 단서 하나 남기지 않은 플레임의 완벽한 범행 때문에 수사는 난항을 거듭하는데, 무엇보다 여성 노숙자 사건과 가렌의 사건이 전혀 다른 패턴으로 이뤄져서 동일범에 의한 소행인지, 모방범이 개입한 상황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이 주목한 건 ?”, 즉 범행 동기입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와이더닛 미스터리의 새 지평이란 문구가 있는데, 그만큼 이 작품에선 범인의 정체 자체보다 범행 동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그리고 막판에 드러나는 플레임의 범행 동기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함 그 자체라서 반전 이상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미야의 캐릭터와 공감각 능력도 흥미롭고, 각기 다른 목적으로 플레임 추적에 나선 산시로와 야하기의 미묘한 갈등도 눈길을 끌어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공감각이란 설정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미스터리 서사가 다소 허술해 보였고, 초능력이 아니라 분명히 실존하는 증상인 미야의 공감각이 뒤로 갈수록 판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과대하게 포장돼서 현실감이 떨어진 점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겉으론 발랄한 미소녀로 보이지만 실은 공감각 능력이 초래한 지독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미야의 과거사가 후속작에서 밝혀질 것 같긴 한데, 계속 찾아 읽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론 희망이 죽은 밤에에서 맛본 아마네 료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어서 고른 작품인데, 뜻밖의 재미를 만끽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진하게 남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감각이란 특수한 능력과 본격 미스터리의 조합이 궁금한 독자라면 한번쯤 미야의 신비한 매력에 관심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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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 보이는 살인
테라시마 요우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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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사에코는 토사카 경찰서 형사과 소속이던 3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약혼자를 잃고 자신도 큰 부상과 함께 오른쪽 시력을 잃으며 형사과에서 내쳐졌습니다. 그런데 사고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현장을 찾은 오자키는 충격적인 경험을 합니다. 실명된 오른쪽 눈을 통해 당시 사고의 전말이 생생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살인임을 알게 된 오자키는 서장 코우키와 베테랑 형사 타쿠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이 목격한 범인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처음엔 믿지 못하던 두 사람은 결국 오자키의 특별한 능력을 수긍하게 되는데, 서장 코우키는 사고를 재조사 하겠다면서도 의외의 조건을 내겁니다. 오자키가 곧 신설될 미제사건 특별팀에 들어와서 그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오자키 사에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특별한 능력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3년 전 시점의 상황만 볼 수 있다는 점, 뇌에 걸리는 부하 때문에 몇 시간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점, 원하는 상황을 보려면 직접 그 장소에 가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여러 가지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사이코메트리 못잖게 특별한 능력인 건 분명합니다.

사실 이런 능력자가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게 된 건 과연 그 특별한 능력이 살인사건을 다루는 경찰 미스터리와 어떻게 믹스됐을까, 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오자키가 3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아낸 뒤 미제사건 특별팀에 들어갈 때만 해도 오른쪽 눈의 특별한 능력을 활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연작 단편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나에게만 보이는 살인은 영미권 스릴러에 등장할 법한 잔인무도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장편 미스터리입니다. 특별한 능력자 오자키, 신임 경찰서장이지만 신참 때는 오자키와 함께 훈련받았던 금수저 출신 코우키, 그리고 불량배를 제압하다가 손을 다쳐 총도 쏘지 못하는 애물단지가 됐지만 여전히 베테랑의 품격을 발산하는 중년의 여형사 타쿠미로 이뤄진 미제사건 특별팀3년 전에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을 수사하던 중 범인이 다른 여러 살인사건에도 연루된 점을 포착하곤 갖은 고난을 겪으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애초 호기심을 자극했던 판타지 능력과 경찰 미스터리의 조합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했고, 그 설계 역시 별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성별, 계급, 성격 모두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케미를 뿜어낸 오자키-코우키-타쿠미 3인방의 캐릭터 플레이 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시리즈물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없어 보여서 이들이 이끄는 미제사건 특별팀의 활약을 그린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도 품게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 유일하게 아쉬웠던 건 일가족 살해사건 수사를 시작한 이후 주인공들의 답답하고 지루한 탐문 과정입니다. 막상 미제사건 특별팀이 출범하긴 했지만 범인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탐문은 아무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은 탓에 마치 기승승승전결의 구도로 읽힐 정도로 고구마 같은 전개가 이어집니다.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다시 속도감을 회복하고 단번에 클라이맥스로 치닫긴 하지만 중반부의 이 지루함을 견뎌내는 게 독자에겐 나름 고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떡밥을 남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독자 입장에선 당연히 미제사건 특별팀의 두 번째 사건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2023년 이후 아직 신간 소식은 없습니다. 1958년생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늦깎이 데뷔를 한 테라시마 요우가 언제쯤 미제사건 특별팀의 두 번째 이야기를 선보일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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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 글리코
아오사키 유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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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짧은 치마에 헐렁한 가디건, 실실 웃으면서 촐랑대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고교 1년생 이모리야 마토는 학교 축제 최고의 명당을 놓고 벌이는 가위바위보로 계단 오르기게임에서 난공불락의 학생회 대표를 제압합니다. 이후 마토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러 게임에 휘말리는데, 매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과 대담한 전략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토의 활약이 학생회장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난 20년 동안 학생회가 풀지 못한 엄청난 미션에 게임의 귀재마토를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202412, 아오사키 유고의 지뢰 글리코가 일본의 주요 미스터리 랭킹과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듣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그 많은 랭킹과 상을 독차지했을까,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아오사키 유고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첫 두 편(‘체육관의 살인’, ‘수족관의 살인’)을 읽은 이후 취향이 잘 안 맞는 작가라 여기곤 10년 동안 외면해 온 터라 개인적으론 그가 거둔 대단한 성과에 더욱 관심이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다섯 편의 연작 단편이 수록됐고, 각 수록작마다 주인공 이모리야 마토가 두뇌 배틀과 심리전을 통해 게임 상대를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게임은 한국과 일본 독자 모두에게 익숙한 것들로 가위바위보’, ‘카드 뒤집어 짝 맞추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포커등입니다. 언뜻 보면 이런 단순한 게임들로 어떻게 미스터리를 설계했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아오사키 유고는 각 게임마다 변형 규칙을 삽입하여 뜻밖의 재미와 쾌감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허에 허를 찌르는 반전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사건 하나 없이도 독자의 뒤통수를 연신 내리치는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전개됩니다.

 

지뢰 글리코의 백미는 역시 주인공 이모리야 마토의 캐릭터입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하는 전략을 체득해 온 마토는 게임에 관한 한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단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상대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물론 독심술과 미스디렉션에 능수능란한데다 상대로 하여금 무조건 내가 이긴다!”라는 오판을 갖게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막판에 상대를 완전히 패배시키곤 합니다.

짧은 치마에 헐렁한 가디건, 실실 웃으면서 촐랑대기만 하는 마토에게 방심했던 상대들은 단순하고 익숙한 게임에 추가된 변형 규칙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를 연이어 던지는 마토의 전략과 전술에 굴복하는데, 덕분에 속임수와 논리와 심리전이 절묘하게 뒤섞인 각 게임의 결말은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그것과는 차원과 결이 전혀 다른 특별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첫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지뢰 글리코를 읽을 때만 해도 신기하긴 해도 골 때리는 캐릭터의 주인공이 펼치는 기술적인 두뇌 배틀 미스터리가 전부인가?” 싶었지만, 뒤로 갈수록 마토의 과거와 현재가 조금씩 공개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볼륨감을 키워가는 것은 물론 청춘소설로서의 미덕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화자이자 마토의 유일한 친구인 고다, 마토를 극강의 두뇌 배틀에 끌어들인 학생회장 사부리, 마토의 첫 희생양이자 학생회 대표인 구누기, 그리고 마토와 고다의 중학교 동창인 미스터리한 인물 우키타 에소라 등 마토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게임만큼이나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게임에서 마토와 상대가 거의 신에 가까운 지나친 괴력(?)을 발휘한 나머지 현실감이 살짝 떨어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점만 빼면 지뢰 글리코는 띠지 카피대로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신감각 두뇌 배틀 소설의 독특한 재미와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장담하건대 그 어느 독자도 마토의 기막힌 속임수와 치밀한 논리와 완벽한 심리전을 이겨낼 수 없을 텐데, 나름 그쪽으로 자신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마토에게 도전해 볼 것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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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마술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5 링컨 라임 시리즈 5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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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교의 여학생, 메이크업 아티스트, 승마를 사랑하는 변호사 등 일련의 인물들이 단 하루만에 동일범에 의해 기괴한 형태로 살해되거나 그에 준하는 위기에 빠집니다.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들을 분석한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는 범인이 마술에 능한 인물임을 확신한 것은 물론 다음 범행 현장까지 예측해내지만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견습 마술사 카라의 도움으로 범인의 윤곽을 포착한 라임과 색스는 3년 전 한 서커스장에서 벌어진 화재 참사를 범행동기로 여기지만, 이후 범인은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여 두 사람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립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다섯 번째 작품의 제목인 사라진 마술사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뒤 마술사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범인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마술계에서 이른바 탈출 마술의 대명사로 불리는 고도의 수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마지막 반전에서 밝혀지는 마술사의 비밀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라진 마술사의 핵심 키워드는 미스디렉션(misdirection)입니다. 의도적으로 관객의 주목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 뒤 그 틈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는 마술사의 필수 덕목으로, 단순히 사물을 이용하는 물리적인 미스디렉션은 물론 관객의 의식까지 장악하고 오도하는 심리적인 미스디렉션도 있습니다.

유명 마술사의 이름에서 따온 말레릭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범인은 근접, 환상, 동물, 탈출 등 모든 종류의 마술은 물론 독심술과 복화술에도 능한데다 미스디렉션의 천재로 라임과 색스를 수차례 곤경에 빠뜨리곤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성동격서의 귀재라고 할까요? 라임과 색스는 번번이 그가 쳐놓은 미스디렉션의 함정에 빠져 엉뚱한 곳에서 허우적대다가 큰 위기를 맞이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말레릭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난제인데, 막판에 이르기까지 제프리 디버는 연이은 반전을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극대화시킵니다. 숱한 착오를 겪는 라임과 색스가 그 미스디렉션을 역이용하여 말레릭을 제압할 거란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직접 읽기 전까진 좀처럼 예측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이 미스디렉션이 사라진 마술사에서 가장 아쉬운 설정이기도 한 점입니다. 사실 제프리 디버는 미스터리계의 미스디렉션의 장인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반전과 트릭에 관한 한 1인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뿐 아니라 다른 시리즈나 스탠드얼론에서도 그의 미스디렉션은 매번 독자를 희롱하다가 큰 충격에 빠뜨리곤 합니다. 그런데 사라진 마술사의 미스디렉션은 다소 과도하게 설정된데다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도 많아서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생각입니다. 좀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만일 말레릭이 애초 자신의 목표에만 매진했다면 오히려 완전범죄를 쉽게 이뤄낼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미스디렉션을 복잡하게 이용하는 바람에 모든 걸 망쳐버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되는 반전을 맛보는 쾌감은 짜릿했지만 말레릭의 납득하기 힘든 행동과 범행 때문에 이내 의아해진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말레릭 못잖게 눈길을 끈 인물은 견습 마술사이자 말레릭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선한 마술사카라입니다. 마술이 단순히 오락이나 눈속임이 아닌, 과학과 예술과 심리학의 영역에 닿아있음을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말레릭의 내면과 미스디렉션에 대해 결정적인 조언을 건네기도 합니다. 천하의 라임마저 감동시킨 카라의 마술은 마지막 반전에도 등장하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의 팬이라면 앞선 작품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흥분과 여운까지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스디렉션 얘기만 하느라 정작 내용에 대해선 별로 언급 못했는데, 라임과 색스를 감쪽같이 속인 말레릭의 미스디렉션 자체가 모두 스포일러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매 장면마다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라며 고민하며 마지막 장까지 달려야 하는 건 독자로선 나름 즐거운 고문이라 할 수 있으니, 가급적 줄거리나 다른 분들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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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가 잠긴 방 - 기시 유스케 밀실 사건집
기시 유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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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기시 유스케의 작품 여섯 편을 읽었는데, ‘검은 집악의 교전을 비롯하여 전부 그의 전공인 호러물입니다.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중도 포기한 게 미스터리 클락’(한국 출간 2018)인데, “기시 유스케가 밀실트릭 본격 미스터리를 썼다고?”라는 호기심에 도전했지만 첫 수록작만에 나가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책장에 방치 중인 기시 유스케의 작품 중 한 편을 집어든 게 자물쇠가 잠긴 방인데, 읽으면서 문득문득 미스터리 클락이 떠오르긴 했지만, 두 작품이 같은 주인공이 이끄는 시리즈물이란 건 다 읽고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본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

방범 컨설턴트라지만 왠지 범죄자의 인상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에노모토 케이와, 밀실 사건과 유독 인연이 깊은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 아오토 준코는 네 편의 단편을 통해 누구도 풀어내지 못할 것 같은 복잡하고도 정교한 밀실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회사 사장이 기이한 형태의 사체로 발견된 외진 산장,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던 한 고교생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돼 사망한 공부방, 건축업자가 뒤통수가 깨진 채 발견된 부실하게 지어진 신축 주택, 그리고 연극이 한창 공연 중이던 상황에서 한 배우가 살해당한 무대 뒤편 대기실 등 사건이 벌어진 곳들은 그 누구도 깨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완벽한 밀실입니다. 하지만 에노모토와 아오토는 사건 관련자들의 의뢰를 받고 비공식적인 현장 조사를 벌여 범인이 구축한 완벽한 밀실을 보기 좋게 해체합니다.

변호사 아오토가 계속 헛소리 취급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추리를 주장하며 일견 독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이라면, 방범 컨설턴트 에노모토는 예리한 관찰력과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밀실 트릭의 허점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인물입니다. 사건은 잔혹하고도 복잡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밀당은 마치 만담의 한 장면처럼 웃음을 유발하곤 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합니다. 여러 용의자 가운데 진범을 찾아내는 짜릿한 미스터리 서사가 아니라 오로지 밀실 트릭 그 자체에만 순수하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전혀 생각할 수 없으니 독자 입장에선 범행현장에 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가와 두뇌싸움을 벌여 트릭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빨리 포착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다만, 밀실 트릭의 마니아라면 에노모토가 난공불락 같은 트릭을 깨부수는 과정에 희열을 느끼며 몰입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소 억지스럽고 결과론처럼 읽히는 그의 추리에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특히 복잡한 이과 지식이 동원된 추리라든가 도면을 보고도 이해하기 힘든 범죄현장에 대한 설명, 저렇게까지 트릭을 고안해낼 수 있을까?”라는 위화감은 사건이 모두 해결된 뒤에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찜찜함을 남기곤 했습니다.

 

7년 전, ‘미스터리 클락을 중도 포기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인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선지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매력적이었지만 기시 유스케의 밀실 트릭 미스터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새삼 재확인하게 됐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에노모토 시리즈의 첫 작품인 유리망치가 제 책장에 오랫동안 방치중이라는 점인데, 그래도 일단 제 손 안에 들어온 이상 언제가 됐든 읽긴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자물쇠가 잠긴 방의 아쉬움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질 때까진 기다려야 할 것 같지만 말입니다.

 

- 참고로 에노모토 시리즈’(일본 시리즈 명 방범탐정 에노모토’) 출간순서는 유리망치 도깨비불의 집 자물쇠가 잠긴 방 미스터리 클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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