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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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987, 오하이오 주 남부의 소도시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는 행크 미첼은 어느 날 형 제이콥과 형의 친구 루와 함께 눈 덮인 숲에서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합니다. 조종사의 시신 외에 비행기에 남아있던 건 무려 440만 달러가 든 더플백. 무직에 가난하기까지 한 제이콥과 루는 당장 돈을 나눠 갖자고 주장하지만, 행크는 돈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진 그럴 수 없다며 6개월의 유예기간을 제안합니다. 결국 행크가 돈을 보관하다가 6개월 후 나누기로 합의하지만, 간단한 계획은 얼마 못가 균열과 함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합니다.

 

출간 직후인 2009년에 읽었으니 자세한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세 남자가 눈 덮인 숲에서 추락한 경비행기와 돈다발을 발견하는 첫 장면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스릴러의 쾌감보다는 외줄에 올라탄 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긴 기분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서평을 쓰겠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뤄온 이유는 그 조마조마한 심정이 실은 쫄깃한 긴장감을 훌쩍 넘어선 불쾌함, 또는 눈에 빤히 보이는 비극적 결말을 목도하기 위해 페이지를 넘겨야만 하는 기분 나쁜 중압감에 가까웠다는 점 때문입니다.

 

주인공 행크 미첼은 한때 변호사를 꿈꿨지만 지금은 몰락한 소도시에서 평생 회계원으로 늙어갈 게 뻔한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정도로 순둥이 같기도 하고, 아내 사라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범적인 남성이기도 합니다. ‘심플 플랜지금껏 이 책에 견줄 만한 서스펜스는 없었다.”는 스티븐 킹의 극찬대로 거액의 돈을 둘러싼 팽팽한 서스펜스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소시민 행크가 뜻밖의 큰돈을 발견한 뒤로 어떻게 탐욕의 화신이자 연쇄살인마로 변해가는 지를 그려낸 지독한 심리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상당한 분량이 행크의 요동치는 심리를 묘사하는 데 할애되고 있는데, 그 대목들이야말로 심플 플랜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돈을 발견한 세 남자는 6개월의 유예기간에 합의를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들 사이엔 비밀과 거짓말, 탐욕과 적개심, 불신과 배신이 끼어듭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은 그들 사이의 균열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벌려놓았고, 그 균열은 끝내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극을 유발합니다. 하지만 참극이 마무리된 후에도 큰돈을 둘러싼 위기는 그치지 않고, 행크는 돈을 들고 도망칠 수도, 돈을 포기할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고 맙니다. 행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돈에 대한 탐욕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그 탐욕을 구현하기 위해 끔찍한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타일러야 한다. 우리가 한 일은 그럴 법하고 용서될 만한 일이라고. 어쩔 수 없이 휘말린 상황에서 나왔다고. 그래서 우리 잘못은 전혀 없다고. 우리가 저지른 일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뿐이었다.” (p339~340)

 

앞서 긴장감을 넘어선 불쾌함 또는 기분 나쁜 중압감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건 이 작품이 재미없다는 뜻도 아니고, 불쾌감만 남기는 소설이란 뜻도 아닙니다. 다시 읽고 보니 그런 기분을 느꼈던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됐는데, 그건 주인공 행크에게 어떤 결말이 주어지는 게 맞는 건지, 즉 그가 제대로 처벌받기를 바라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어떻게든 계획을 성공시켜 행복한 미래를 거머쥐기를 바라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화신이자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추락했지만 선한 소시민이자 모범적인 남편 행크의 본질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행크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한 이 이중적인 정체성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불쾌함과 중압감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억측에 가까운 역설이지만 어쩌면 이런 감정들에 푹 빠지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평까지 쓰고 나니 미루고 미뤄온 큰 숙제를 마친 기분입니다. 물론 처음 읽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무겁고 씁쓸한 여운에 짓눌리긴 했지만, 왜 스티븐 킹이 이 작품을 극찬했으며 미국에서 전설의 데뷔작이라고 불리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심플 플랜의 여운이 좀 가시고 나면 스콧 스미스가 이 작품 이후 무려 13년 뒤에 내놓은 호러 소설 폐허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단 한 작품으로 서스펜스의 거장 소리를 들은 작가가 긴 공백 끝에 호러 소설로 복귀했다는 사실 때문에 늘 궁금했던 작품인데, 왠지 폐허역시 불쾌함과 기분 나쁜 중압감을 유발할 것 같아 기대감 못잖게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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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오만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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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이 장기가 적출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경시청 수사1과 이누카이 하야토는 과거 담당했던 살인마 잭의 모방범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파트너인 아스카가 소년의 신분(중국인 빈민)을 알아낸 것은 물론 연이어 극빈층 10대 소년들이 비슷한 형태로 살해당하자 이누카이는 조직적인 장기밀매 범죄임을 깨닫곤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수사본부가 무기력해질 무렵, 이누카이의 직감이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을 포착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오히려 이누카이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누카이와 아스카는 그 사태를 실마리 삼아 사건의 진상에 한걸음 다가가게 됩니다.

 

카인의 오만은 시리즈 첫 편인 살인마 잭의 고백에 이어 장기이식 혹은 장기매매 관련 사건을 다룬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특히 카인의 오만은 장기이식과 장기매매 자체의 윤리적 문제라든가 사회적 시스템에 관한 논쟁은 물론 빈곤, 청소년, 복지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어서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외양 외에도 한 편의 강렬한 성명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희생자들이 모두 10대인데다 극빈층 출신이며, 누군가 돈과 인맥을 가진 자가 가난한 자의 장기를 노렸다는 정황이 확실해지자 이누카이와 아스카를 포함하여 수사진 모두가 격분합니다. 평소 10대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아스카가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을 앞세워 수사하는가 하면, 수사결과에만 집착할 뿐 시니컬한 태도를 견지하던 아소 반장마저 상부와 각을 세우며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다만,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받으며 장기이식만 고대하고 있는 딸 사야카를 둔 이누카이로서는 이번 사건이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지만, ‘밀매를 통해서라도 사야카의 장기를 얻을 수 있다면...’이라는 사념 역시 머릿속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락사를 다룬 전작 닥터 데스의 유산에서 사야카가 투병 끝에 극도의 고통에 빠진다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던 형사이자 사야카의 아버지이누카이가 이번에는 장기밀매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카인의 오만은 반전의 쾌감에 관한 한 나카야마 시치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수사는 거의 돌직구처럼 전개되고, 막판 반전의 강도와 충격은 조연급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 남는 여운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강렬합니다.

서평을 쓰기 직전에 머릿속에 든 생각은 “‘장기이식이 궁극의 치료법인 현실에서 과연 장기매매는 나쁜 건가?”라는, 법과 상식에 반하는 자문이었습니다. 그런 자문을 떠올리게 만든 건 장기를 판 빈자는 돈을 얻어 좋고, 장기를 얻은 부자는 건강을 되찾아 좋고, 이식 수술이 거듭될수록 의료진의 기술이 향상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좋은 게 아니냐?”는 한 인물의 주장인데, 처음엔 그저 헛소리 같았지만 생각할수록 일견 그럴듯한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법과 시스템은 장기이식 자체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고,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은 중증환자들로 하여금 제때 장기를 기증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사형수의 장기이식과 보상을 제도화한 중국이 오히려 선진적으로 느껴진 건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평점과는 무관하게) 장기이식 또는 장기매매에 관해 거침없이 문제를 제기한 카인의 오만은 존엄사 혹은 안락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닥터 데스의 유산과 함께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어쩌면 형사이자 사야카의 아버지인 이누카이에게 너무나도 큰 혼란과 갈등과 고민을 안겨준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라스푸틴의 정원에서 이누카이가 어떤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작품에선 이누카이가 사야카의 아버지로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앞선 두 작품보다는 조금은 덜 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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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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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1과의 이누카이 하야토와 다카치호 아스카 콤비는 인터넷을 통해 안락사를 의뢰받고 실행에 옮기는 이른바 닥터 데스를 쫓습니다. 안락사한 인물만 12명에 달하지만 그 누구도 닥터 데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이누카이와 아스카의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뭅니다. 세간에선 닥터 데스의 행위에 대해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닥터 데스를 옹호하지만, 반대편에선 그를 쾌락 살인마로 비난하며 안락사 자체를 거부하는 주장을 폅니다. 신부전으로 장기입원 중인 딸 사야카가 겪는 고통 때문에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품게 됩니다. 그래선지 이누카이는 수사1과 동료들과의 협업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수사에 몰두합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는 사회파 메디컬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의료 문제가 얽힌 지독한 사건들을 다뤄왔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살인마 잭의 고백은 장기 이식과 관련된 연쇄살인사건을, ‘하멜른의 유괴마는 자궁경부암 백신과 관련된 연쇄 유괴사건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카야마 시치리가 정면으로 도전한 건 안락사 문제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의뢰를 받아 비밀리에 안락사를 시행하는 닥터 데스를 쫓는 이야기인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적극 찬성’, ‘혼란 속 고민’, ‘적극 반대등 안락사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예민하고도 현실적인 주제를 미스터리 속에 잘 녹여 넣었습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주인공 이누카이의 딸 사야카가 신장이식 외에는 치료법이 없는 신부전으로 고통 받으며 장기입원 중이라는 설정입니다. 즉 다른 사건은 몰라도 의료와 관련된 사건들은 이누카이에게는 남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입니다. 특히 닥터 데스의 행위는 이누카이로 하여금 딸 사야카가 장기이식을 받지 못한 채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곤혹스런 자문을 연이어 던지게 만듭니다. 경찰로서의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를 처벌 받아야 할 살인범으로 여기지만, 아버지로서의 이누카이는 그의 행위에 일정 부분 동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닥터 데스에 의해 안락사한 인물들이 하나 같이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뒀고, 유족들이나 주변 인물들 역시 당사자가 더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가게 됐다며 안도와 위안을 느끼는데,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는 정말 단순한 쾌락살인자일까. 어쩌면 종말기 연명치료의 숨은 선구자는 아닐까?”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답게 나카야마 시치리는 안락사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들을 직격합니다. 눈앞에 닥친 초고령화의 문제라든가 안락사를 회피할 수밖에 없는 의료계의 현실, 죽을 권리를 빼앗긴 채 지독한 통증과 고액의 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종말기 환자들의 고통 등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과감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그래선지 닥터 데스의 유산은 팔색조 스타일의 변화구 같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작들과는 달리 오직 정면만 바라보고 날아가는 돌직구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막판의 큰 반전을 포함하여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재미라는 요소가 잘 살아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안락사 문제를 더는 회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르포 스타일의 미스터리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안락사에 관해 적극적인 찬성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닥터 데스가 실제로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습니다. 특히 닥터 데스의 안락사는 살 권리 못잖게 중요한 죽을 권리를 존중하는 행동으로 보였는데, 전쟁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중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를 단 한 발의 총알로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장면과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화려하고 속도감 넘치는 반전 미스터리와는 살짝 거리가 있지만 공론화와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한 안락사 논쟁을 다루고 있어서 몰입감이나 공감의 폭이 훨씬 더 깊고 넓었던 작품입니다. 안락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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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컨 브리프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2
존 그리샴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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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법원 판사 두 명이 전문 암살범에게 살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튤레인 법대 교수인 캘러헌이 그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이번 사건의 이면에는 대법원을 보수적인 대법관으로 채우려는 백악관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자 스무 살 연하의 연인이자 법대생인 다비 쇼는 순전히 호기심 삼아 사건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성된 일명 펠리컨 브리프가 캘러헌의 절친인 FBI 법률고문을 통해 백악관과 유수의 기관에 배포되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이후 다비의 가상 시나리오가 진실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펠리컨 브리프와 관련된 자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하고 다비 역시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 등 대가들의 작품이 한국에 봇물처럼 쏟아진 건 90년대 초중반의 일입니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까지 붐을 일으킬 정도였는데, 정작 읽은 존 그리샴의 작품은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등 세 편뿐입니다. 셋 다 무척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더 이상 존 그리샴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가 기억나진 않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도 간간이 개정판이나 신간 출간소식이 들리면 잠깐이나마 관심을 가질 정도로 그의 이름과 필력은 제게 깊이 각인돼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읽은 그의 작품들(‘속죄나무’, ‘소송사냥꾼’, ‘잿빛 음모’)은 대체로 실망스러웠고, 그래선지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그의 열정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명품재독이라는 계획을 세우면서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그 첫 번째로 고른 것이 펠리컨 브리프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자신이 작성한 대법관 암살사건에 관한 가상 시나리오 펠리컨 브리프때문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고 본인마저 위기에 빠지자 다비 쇼는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그레이 그랜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 도주극을 벌이면서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한편 패닉에 빠진 백악관과 정보기관들은 서로 다른 속내를 숨긴 채 다비를 쫓는 것은 물론 그녀가 작성한 브리프의 내용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과 정보전을 벌입니다.

 

법대 교수, 변호사를 꿈꾸는 법대생, 대형 로펌 등 법정 스릴러에 필수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정작 법정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그리샴 특유의 ‘Legal Thriller’의 묘미를 내내 만끽할 수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위기에 빠진 백악관과 유수의 정보기관들이 펼치는 치열하고도 절박한 정치+정보 스릴러, 그리고 다비의 파트너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 그레이 그랜섬이 맹활약하는 저널리즘 스릴러까지 함께 맛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각종 스릴러의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펠리컨은 펠리컨이라는 새를 가리키기도 하고, 속어로 루이지애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펠리컨 브리프는 루이지애나 사람이자 장차 변호사를 꿈꾸는 다비가 멸종위기종인 갈색 펠리컨의 서식지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이익을 도모하려는 세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법을 일삼아 온 정치인 간의 야합을 폭로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다비는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정의의 사도도 아니지만, 루이지애나와 펠리컨을 파괴하려는 자들이 대법관 살해라는 중범죄와 연관 있음을 우연히 포착한 뒤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진실 찾기에 도전합니다.

 

엇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중반부에 살짝 늘어지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존 그리샴의 진짜배기 스릴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의뢰인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고,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 중 못 읽은 작품들도 검색해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톤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도 찾아볼 생각인데, 그 무렵 최전성기를 달렸던 줄리아 로버츠의 풋풋한 법대생 모습도 사뭇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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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의 비극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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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하카마 시의 새 시장은 ‘I(출신지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 프로젝트’, 6년 전 유령 마을이 된 미노이시(蓑石)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지에서 이주자를 모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모집과 관리를 담당할 소생과(蘇生課)라는 전대미문의 부서를 만듭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던 공무원 만간지 구니카즈는 자신이 왜 이런 황당한 부서에 배치됐는지도 이해가 안 됐지만 칼퇴근에만 진심인 니시노 과장과 학생 티를 못 벗은 신입 간잔 유카까지 단 세 명이 미노이시를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2가구를 유치했지만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삐걱거립니다.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무사히 정착하기를 바랐던 이주민들이 한두 명씩 미노이시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은 더 이상 낯선 뉴스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간혹 한국과 일본의 지방 가운데 성공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회복된 곳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의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까요? 대처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할까요? 요네자와 호노부는 미노이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이 어려운 질문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미 6년 전에 소멸된 미노이시에 적잖은 예산을 투자하여 이주자를 정착시키겠다는 프로젝트는 언뜻 바람직하고 진취적인 정책처럼 보이지만, 엘리트 공무원 만간지의 눈에는 기적을 바라는 정치 쇼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이주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관리가 시작되자 본성 자체가 성실한 공무원인 그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후배 간잔과 함께 이주민들을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연이어 사건과 해프닝이 벌어지고,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자 크게 당황합니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하고 6편의 연작단편으로 구성돼있는데, 각 단편은 이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일상 미스터리를 그립니다. 물론 해결사는 만간지를 비롯한 소생과 직원들입니다. 하지만 각 사건의 해결이 해피엔딩, 행복한 미노이시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구한 입주민들을 떠나게 만들거나 소생과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연 ‘I턴 프로젝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현실성이 있는 계획인지, 이런 식으로 부활시킨 유령 마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주인공 만간지는 수시로 딜레마에 빠집니다. 불평을 하면서도 미노이시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바람직한 공무원만간지의 모습이 딜레마의 한쪽이라면, 나머지 한쪽은 개선될 여지가 없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합리주의자만간지의 모습입니다. 즉 구급차나 소방대가 도착하는 데만 40분이 걸리고, 한정된 예산 때문에 마을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 시스템 구축마저 어려운 상황은 만간지를 숱한 고민 속에 몰아넣습니다. 특히 도쿄에 사는 동생이 미노이시의 프로젝트를 깊은 늪이라고 비난했을 때 만간지의 고민은 극에 달하고 맙니다. (다 읽은 뒤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단어도 바로 이 깊은 늪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부터 제목이나 주제에 비해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일상 미스터리가 전개돼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만간지와 소생과 직원들 캐릭터도 어딘가 만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도 진지하게 새 거주지와 삶을 고민하는 모습보다는 왠지 뜨내기나 오타쿠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외의 설정들은 마지막 챕터인 종장에서 뜻밖의 반전과 함께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겁게 전개됐더라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을 이 작품의 주제가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가볍지만 선명한 이야기 덕분에 더욱 생생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관한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무심결에 어떻게 하면 저곳을 되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인데, ‘I의 비극은 그런 저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입니다. 정의감, 동정심, 이상주의 같은 감상적인 태도로 접근할 게 아니라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관점이 필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만간지의 고뇌와 갈등이 고스란히 공감되듯 느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미노이시는 과연 깊은 늪일까요? 아니면 재도전의 가치가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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