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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평점 :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라고. 각자의 양심? 바로 집단의 양심이 아니라고 못을 박고 있다. 그렇다. 인간 개인은 정말 이성적이고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다수가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이성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인간 개인의 윤리와 양심, 도덕은 어딘가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 '집단의 광기'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도 거기에 휩쓸리면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고 비난을 하고 분노를 터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노예, 중세시대의 계급, 백인 우월주의, 유대인들의 탄압, 히틀러의 파시즘,,, 지금의 외국인 혐오증이나 성차별적인 요소 등은 우리의 역사에서 언제나 '차별과 탄압'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나 <파수꾼>은 미국 흑인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회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앵무새 죽이기>라는 한 권의 소설로 흑인 인권 해방 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하퍼 리는 50년이 지나서 이 책을 출간한다. 그것도 전 세계 14개 국가에서 동시에 출간한 대단한 기록을 남기면서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앵무새 죽이기>를 보았다. 하퍼 리가 원래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 때 <파수꾼>을 보냈다고 했는데, 그냥 제목만 <파수꾼>을 <앵무새 죽이기>로 바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원래 하퍼 리가 출판사에 보낸 원고가 <파수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수꾼>의 내용이 너무나 직접적이라 우려를 표명했다. 그래서 하퍼 리는 <파수꾼>을 기반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집필했다. 이 <앵무새 죽이기>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성공을 거두자 하퍼 리는 그 부담감으로 은둔 생활에 들어가고 더 이상 책을 출판하지 않았다.
즉, <파수꾼>은 원래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창작된 것이다. 하지만 <앵무새 죽이기>가 먼저 출판되었고 이야기 전개상 스카웃이라는 여자 주인공의 어렸을 때를 다루고 있으므로,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이자 후속작이라는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퍼 리가 그 동안 내내 침묵하다가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왜 <파수꾼>을 출간할 결심을 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다시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는 비판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쨌든 하퍼 리는 <파수꾼>이 출간되는 영향력을 간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수꾼>은 많은 부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핵심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정의의 대명사였던 애티커스 변호사가 흑인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월이 흘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생각이 변했던 것일까? 애티커스 변호사는 딸 스카웃과의 논쟁에서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적절한 제지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피력했다. 지금의, 아니, 앞으로 세계가 변화할 속도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애티커스 변호사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 만큼 인간의 도덕과 윤리 등의 정신적인 측면은 성장이 더딜 것이라는 애티커스 변호사의 생각은 현대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종 간의 정신적인 발달 문제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에 정의의 대명사였던 애티커스 변호사에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한 것이다.
손을 잡아 이끌어 주고, 매 정시마다 보이는 것을 공표해 주는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한다고, 가운데 줄을 긋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255쪽)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똑똑하고 이성적이라 믿는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느니 자신의 생각과 반대인 사람과는 인연을 끊고 상종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그런데 역시 애티커스 변호사다운 면이 그 다음에 나온다. 자신을 우상처럼 우러르며 따랐던 딸 스카웃이 자신만의 생각과 사고를 아버지 앞에서 주장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부모의 입장이라면 자녀가 자신의 말을 신뢰하고 따라주기를 바랄 텐데,,, 애티커스 변호사는 오히려 딸이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논리를 펼치기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파수꾼>의 의미가 담겨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했던 옛날 경구가 떠오른다. 정신적인 성숙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는 너만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딘가에서 그 양심을 따개비처럼 네 아버지에게 붙여 놓았던 거야. 자라나면서, 또 어른이 되고도, 너 자신도 전혀 모르게 너는 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야. 인간의 심장을 가진, 인간의 결점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지. 그것을 깨닫는 게 쉽지 않았으리란 것은 내가 인정한다. 형은 실수를 범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형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실수를 하기는 해. 너는 정서적 불구자였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항상 네 답이 곧 아버지의 답일 거라 가정하고 답을 구해왔지.」(372쪽)
「......너는 그야말로 견딜 수 없었던 거야. 육체적으로 아팠던 것이지. 네 인생은 생지옥이 되었고. 너는 너 자신을 죽여야만 했는데, 네 아버지가 너를 독립된 실체로서 살아가게 하려고 너를 죽여야만 했던 거야.」(373쪽)
집단 이성은 모든 사람의 사고를 하나로 묶어 버린다. 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은 사고는 절대로 똑같아 질 수 없다. 단지 어떤 의견에 공감할 수 있을 뿐이고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이나 입장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러한 다양한 생각과 사고는 당연한 것이다. 그 의견을 피력하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공감하게 만들면서 조금씩 사회의 모습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물질만을 추구하며 경제 논리에 휩쓸려 단기적인 목표만 가지고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려고 무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핀치 박사는 그렇기 때문에 스카웃에게 뉴욕에서 이곳으로 돌아와 오랜 시간을 들여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충고한 것이다. 스카웃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집단의 비이성적 사고를 깨기 위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한 사람씩 만나서 설득하여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하퍼 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아직도 변한 것은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의 비이성적인 사고를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이 책은 옛날에 쓰여졌어도, 현재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이성에 의한 차별적 요소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개인적인 양심을 위한 파수꾼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메시지에 공감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단지, 1960년 대를 전후한 미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많이 등장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앵무새 죽이기>와의 내용 상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을 찾기도 하고, <앵무새 죽이기> 이후에 이 공간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기도 하는 등의 소소한 재미가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 열린책들 서평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