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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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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동유럽을 여행했습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도착해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잘츠부르크, 할슈타트 등을 방문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원래 동유럽의 의미는 소련에게 지배당하는 공산국가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한 국가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억울하지만, 동유럽 여행 패키지에 오스트리아가 포함됩니다. 


패키지 여행을 하는 동안 방문하는 장소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도시, 궁전, 사냥터, 미술 작품, 건축 등을 구경했습니다. 여행 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책을 읽었다면, 훨씬 여행이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많이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 궁전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베르샤유 궁전에 비견되는 궁전을 갖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성입니다. 당시에 여성이 궁전을 지을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규모가 엄청난 궁전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근친 상혼을 통해 가문의 권력을 유지했지만, 세대가 거듭될 수록 기형적인 외모를 가지고, 결국 후손이 끊긴 가문이라는 정도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합니다. 너무 몰랐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마틴 래디 저자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를 바로 구입했습니다. 이런 책은 대략 500페이지가 넘고, 역사 책을 읽을 때 지도 보면서 궁금한 것을 추가 검색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구나 무슨 욕심인지 역사책과 다른 장르의 책 1~2권을 동시에 읽기 때문에 더 지체되었습니다.  



유럽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합스부르크 가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600년 이상 지속하면서 유럽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가문이 역사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베른 북서쪽에 위치한 호수, 발호에서 시작된 아레 강은 스위스 아리가우 주의 아라우를 지나 북쪽으로 나아가서 라인강과 만납니다. 아레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라인강과 만나기 전에 브루그라는 소도시 근처에 합스부르크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언덕 위에 하비히츠부르크 요새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라트보트라는 사람이 이곳에 요새를 지었는데, 자신의 매를 잃어버려서 찾다가 발견한 장소이기 때문에 매의 성이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아리가우 지역이 스위스 내륙의 산악 지대와 북쪽 평원의 저지대를 이어주는 교차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이 통행료를 내고, 소작인들이 목초지 이용료를 지불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지만, 여러 귀족 가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까지 배출하는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장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자식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둘째, 유력한 귀족 가문에 자식들을 결혼시켰습니다. 



당시에 어느 한 가문이 대가 끊기면, 아내가 속한 가문이 영지를 이어 받고, 세습 재산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왕도 될 수 있었죠. 

프랑크 왕국의 5대 부족 왕국 중 하나인 슈바벤 공국은 독일 남쪽(슈투트가르트 남쪽)에 위치했었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슈바펜 공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 가문의 대가 끊겼고, 과거에 이 가문의 여인과 결혼했던 루돌프의 손자인 루돌프 1세가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독일 중앙으로 진출했고,  제휴들의 지지를 받아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첫번 째 독일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왕, 보헤미아 왕, 스페인 왕, 로마왕 등을 배출하면서 가문의 영지를 계속 확장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현재 독일, 체코, 폴란드, 오스트리아 일부 지역의 왕국, 공국 등의 연합체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7명의 선제후에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7명은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보헤미아 국왕,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라인 팔츠 백작입니다. 보헤미아는 현재의 체코 지역입니다. 당시에 영향력이 매우 큰 왕국이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은 현재 베를린과 그 주변 지역입니다. 향후 프로이센 공국을 합병하면서 독일 제국을 세우는 프로이센 왕국의 근원지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기 시절 그들이 다스리던 영토를 보면 엄청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투르크를 견제하면서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을 획득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 무적 함대를 이끈 장본인이고, 일본 나가사키에 천주교를 전파하고, 멕시코시티와 라마에 종교재판소를 만들고,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물리쳐서 기독교 세계를 지켰습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에스코리알 궁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레오폴트 1세는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한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격파해서 레판토 해전에 이어 신성로마제국과 기독교 세계를 지켰습니다. 



프라하 궁전에 머물렀던 루돌프 2세 휘하에 점성술사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요하네스 케플러입니다. 그의 관측 결과는 행성이 태양의 중력장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에 관한 최초의 통찰로 이어졌습니다. 칼 세이건 저자의 <코스모스>에서 자세히 소개한 인물입니다.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 딸이 마리아 안토니아인데, 그녀가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아내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스페인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가 죽고, 후손이 없어지면서 이베리아 반도를 둘러싼 가문의 통치권과 아메리카 대륙 및 태평양에서의 지배권은 종말을 맞이합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판도는 유럽 대륙의 영지에 국한되죠. 또한, 중앙유럽을 다스리던 카를 6세의 아들이 유아기에 죽음으로써 가문의 대가 끊기고 맙니다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 후 자식을 낳아 계속 가문의 뒤를 잇게 합니다. 프란츠 슈테판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과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항상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합스부르크 가문도 점차 쇠약의 길로 접어듭니다.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힘이 커지고, 나폴레옹에 의해 가문의 영토는 쪼개지고,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립니다. 이후 프란츠 요제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 연방에서 퇴출되면서 독일 영토에 대한 영향력도 없어집니다.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을 없애고, 독일 제국을 선포합니다. 



프란츠 오제프를 둘러싼 합스부르크 가문의 슬픔은 너무 컸습니다.

1867년 동생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처형됨

1889년 아들 루돌프 자살함

1896년 동생 카를 루트비히 이질로 사망함

1898년 아내 엘리자베트 피살됨

1914년 조카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됨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합니다. 페르디난트는 암살 시도를 피해서 살 수 있었는데, 그의 자만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병원을 방문하는 도중에 잘못된 길로 접어 들고, 운나쁘게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암살범 앞에서 정차합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27만 4889 마리의 동물을 사냥했다고 합니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그의 쾌락을 위해 더 많은 동물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업보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배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가문도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원인이지만, 민족 주의가 대두되면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자들은 유럽의 문화, 예술을 발전시키고, 가톨릭 세계를 지켰으며, 민족을 뛰어넘는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은 초라했지만, 역사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한 가문의 도약기, 성장기, 전성기, 침체기, 쇠락기를 모두 보여준 합스부르크 가문 그 자체가 역사의 일부분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19세기에 합스부르크 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프로이센 제국으로 넘어갑니다. 그들의 역사는 과연 어땠을지 기대가 큽니다. 



 





2026.1.25 Ex. Libris. HJK 



호프부르크 궁전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겨울 궁전이었고, 지금은 빈의 주요 관광 명소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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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전투 - 전5권
시바 료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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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키가하라 전투 1권 ~ 5권을 완독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절판되어서 구매는 할 수 없었고, 주변 도서관에도 없어서 상호 대차를 통해 대여를 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서군, 동군으로 나누어져서 세키가하라 지역에서 전투를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함으로써 에도 막부 시대를 열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을 좋아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 왜란을 반대했고, 조선으로 출병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서군은 임진 왜란에서 살아 돌아간 다이묘들이 참전하고, 동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반대한 다이묘들이 가담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역사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수하로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임진 왜란에서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충성을 다짐했던 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살 아들 히데요리를 버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머리를 수그렸습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명에게만 충성할 뿐이었고, 그에 대한 충성도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60만 석 영지를 거느린 최고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감히 대항을 못하고, 그를 위해 전투에서 싸우면서 자신들의 영지를 보존할 생각만 했습니다.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임진 왜란에 참전했던 다이묘들이 모두 제거되기를 기대했는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걸고 전투를 할 때 주변에서 함께 싸우면서 주군을 지켰던 7명이 있습니다. 

그들을 칠본창이라고 부릅니다. 7명 중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는 동군에 가담해서 선봉 부대로 서군과 싸웁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임진왜란 당시 제5군 사령관이었고, 가토 기요마사는 제2군 사령관이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3대 왜성 중 하나인 울산 왜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물리친 다이묘였습니다. 가토 요시아키는 임진왜란 당시 수군 지휘관이었는데,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에서 승리한 다이묘였습니다. 

영화 한산에서 왜군 총사령관 이었던 와키자카 야스히루도 칠본창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충청도, 전라도 관군을 무찌렀고,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는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서군을 배신하고, 공격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과 동군 군대 규모는 비슷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군단 3만 2천 명은 세키가하라에 도착했지만, 2군단 3만 8천 명은 우에다 성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막혀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을 못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직속 군대가 7천 명 정도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속 군대만 7만 명이었으니, 비교할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그래도 서군에 모리 가문, 시마즈 가문, 고바야카와 가문의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승리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루 만에 끝날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리 히데모토,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투에 참전 안하고, 중립을 지키고, 고바야카와 히데야키가 배신하고, 서군의 측면을 공격함으로써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군대만 싸운 서군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당시 제4군 지휘관이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1군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제8군 지휘관이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영화 노량에서 사천 왜성을 지키다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순천 왜성 앞바다로 공격을 진행한 장수였습니다. 물론, 이순신에게 패배를 합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19만 석 다이묘였습니다. 

도요토미 가를 지키겠다고 하면, 많은 다이묘들이 의를 내세워 서군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50만 다이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 다이묘들을 포섭해서 동군으로 참여하거나 중립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권모술수의 대가라고 부릅니다. 의를 생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를 치사한 권모술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물리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쟁 경험도 별로 없는 문관 출신이면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고, 지휘하겠다고 생각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의를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다 가문의 지위를 박탈시킨 장본인 이었으니깐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만 아니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가문이 멸망했다고 해도 조선의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조선인을  죽인 많은 왜군 장수들이 무사히 일본으로 넘어가 서로 편을 나누어서 싸웠습니다. 

에도 막부 말기에 모리 가문의 조슈 번과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번이 합심하여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정한론을 앞세워 다시 한반도로 진출합니다. 



일본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서군 주요 다이묘



  1. 이시다 미쓰나리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5대 부교 중 행정 담당, 19만 석, 오미 사와 산성

  • 임진왜란 때 병력 이동, 군수품 운송 총 책임자

  • 전투 경험 미약하고, 군대 통솔 역량이 부족함. 자신의 신념과 주장에 매몰됨

  • 히데요시가 규슈 지쿠젠 국, 지쿠 국 100만 석 다이묘로 영지를 주려고 했지만, 거절하고 오미 국 시와 산성으로 만족함. 히데요시를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실책이었음. 만약 100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면, 3만 명 직속 군대를 운영할 수 있었음

  • 주요 가신 : 시마 사콘(사망), 가모 사토이에(사망)

  • 병력 6천 명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후일을 기약한다며 도망감

  • 결국, 붙잡혀서 교토에서 처형당함



  1. 모리 데루모토

  •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5대 부로

  • 주코쿠 지방 서쪽(현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120만 석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오사카에서 머무르면서 참전 안함

  • 세키가하라 전투는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가 참전하지만, 중립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음

  •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병력 2만 명



  1. 시마즈 요시히로

  •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4군 지휘관

  • 노량 대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함

  • 조명 연합군으로부터 3대 왜성 중 하나인 사천 왜성 방어

  • 규슈 최남단 사쓰마 국, 오스미 국을 통치하는 다이묘(현 가고시마 현)

  •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서군으로 참전하여 전투를 했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족한 역량에 실망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중립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음

  • 서군의 패배가 확정되자 철군을 시도했고, 많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동군의 포위를 뚫음

  • 시마즈 가문의 군대 규모는 작았지만, 전투 능력이 뛰어났다고 함

  • 시마즈 가문이 규슈 전역을 점령한 적이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함

  • 에도 막부 시대에 사쓰마 번이었고, 모리 가문의 조슈 번과 함께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끔 



  1. 고니시 유키나가

  •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1군 지휘관

  • 한양, 평양성 점령

  • 3대 왜성 중 하나인 순천 왜성 방어하다가 노량 대전 당시 이순신 장군을 피해 도망감

  • 규슈 히고 국 다이묘(현 구마모토 현)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으로 참전하여 적극적인 전투를 한 3대 다이묘 중 하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 병력 6천 명

  •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배신 이후 서군이 무너지고, 도주함

  • 붙잡혀서 교토에서 처형당함



  1. 우키타 히데이에

  •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5대 부로

  •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8군 지휘관

  • 주고쿠 비젠 국, 미미사카 국을 통치하는 다이묘(현 오카야마 현), 57만 석

  • 병력 1만 7천 명

  •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배신 이후 서군이 무너지고, 철수함



  1. 오타니 요시쓰구

  • 이시다 미쓰나리 맹우, 장님

  • 오미 국 다이묘, 5만 석

  •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고, 배신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군대를 막으려고 노력함

  • 전면의 동군과 후면의 배신한 고바야카와 히데야키와 전투를 하는 와중에 와키자카를 비롯한 소다이묘들도 배신함으로써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할복을 통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함



  1. 와키자카 야스히루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칠본창 중 한 명

  • 임진왜란 당시 용인 전투에서 충청도/전라도 관군을 무찌름

  •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함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지만, 배신하고, 서군을 공격함



  1.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양자

  •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6군 지휘관이었고, 5대 부로. 33만 석. 벽제관에서 명나라군을 무찌름. 웅치, 이치 전투와 행주 대첩에서 조선군에게 패배함 

  • 규슈 지쿠젠 국, 지쿠 국 다이묘(현 후쿠오카 현), 52만 석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처조카. 자식이 없어서 히데요시가 양자로 입양하지만, 히데요리가 태어나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양자가 됨. 당연히 히데요리에게 좋은 감정이 없음

  • 지능이 상당히 떨어졌다고 함

  •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자 서군을 배신하고, 공격함

  • 병력 1만 5천 명



  1. 조소카베 모리치카

  • 시코쿠 도사 국 다이묘(현 고치 현)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중립을 지키면서 전투를 하지 않음



  1. 나쓰카 마사이에

  • 도요토미 히데요시 5대 부교 중 재정 담당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중립을 지키면서 전투를 하지 않음




동군 주요 다이묘



  1.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요토미 히데요시 5대 부로, 동군의 수장

  • 간토 8국 다이묘, 256만 석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3만 2천 명을 이끌고 참전함. 주나곤 히데타다 병력까지 포함하면 총 7만 명 병력이었으므로 최대 규모의 군대였음

  • 주요 가신 : 혼다 마사노부,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이이 나오마사



  1. 주나곤 히데타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명령에 따라 3만 8천 명을 이끌고 에도를 출발함

  • 이에야스는 도카이도를 따라서, 히데타다는 나카센도를 따라서 진군함

  • 신슈 우에다 성 사나다 마사유키와 전투를 하느라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 못함



  1. 후쿠시마 마사노리

  • 도요토미 히데요시 칠본창

  •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5군 지휘관

  • 혼슈 주부 오와리 국 다이묘, 24만 석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 선봉 부대로 활약함



  1. 도도 다카토라

  • 이요 국 다이묘, 8만 석

  • 임진왜란 당시 수군 부대 지휘관,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함

  • 명랑 해전에서 왜군 총 사령관이었지만, 가토 요시야키, 와키자카 야스히루,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함께 이순신에게 패배함



  1. 가토 요시아키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 칠본창

  • 임진왜란 당시 수군 부대 지휘관,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함,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무찌름



  1. 구로다 나가마사

  •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 구로다 요시타카는 절음발이로 한산 영화에서 일본군 모사로 나옴

  • 규슈 부젠 국(현 후쿠오카 현 일부, 오이타 현 일부)

  •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3군 지휘관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다이묘 중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적극적으로 동군에 가담함




2026.1.17 Ex. Libris H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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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타유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10년전에도 알라딘 서재와 함께 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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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전투 1 - 히데요시의 죽음
시바 료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이순신의 바다>를 읽고, 한산 : 용의 출현을 보면서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 들어 보았지만, 조선을 침략한 많은 장수들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1598년 임진왜란의 원흉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내분이 발생하고, 동군, 서군으로 나누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도요토미 가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책 <세키가하라 전투>를 고른 이유는 책을 통해서라도 도요토미 가의 멸망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2002년에 출판되었고, 현재 절판된 책이라서 구하기 어려워서 상호 대차 서비스를 통해 도서관에서 대여했습니다. 제가 주로 다니는 도서관에도 해당 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호 대차 서비스를 처음 써봤는데, 만족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는 책의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어찌 감당할 지 모르겠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야스를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요시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화시킨 소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객관화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6살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정권을 잡으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갈등이 불거지는 상황까지 1권을 마무리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으로 출병한 왜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철수합니다. 더 많은 왜군을 죽지 못한 것이 애통하지만, 이것 또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죽은 날부터 분열이 시작됩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명령 하나로 조선으로 가서 죽을 기회를 넘기면서 싸웠는데, 이들이 왜 도요토미 가를 지키지 않았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히데요시와 다이묘들은 이해 관계로 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보다는 힘이 센 놈에게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엎드린 놈의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5대로(다이로)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을 포섭할 때도 "설득하려면 이성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호소해야 한다"를 철저히 따랐습니다. 다이묘들이 자신을 따르면, 좋을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시킨 것입니다.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측실 요도도노가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정실인 기타노만도코로(애칭 오네네)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오네네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국 출신이었고,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히데요시와 함께 목숨을 무릅쓰고 싸웠던 오와리국 출신 장수들과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히데요시의 칠본창 중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와 친했습니다. 오네네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잡역부일 때부터 일생을 함께 했습니다. 


반면에 요도도노는 오미국 출신이고, 당시에 오미국은 오와리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도도노 역시 오미국 출신들과 친밀한 파벌을 형성했습니다. 오미국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 히데요시 옆에서 집정관 역할을 하던 5부교 중의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입니다. 요도도노는 명문가 아자이 출신으로 어머니는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였습니다. 가문부터 오네네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궁금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대체 다이묘는 뭐고, 칠본창은 뭐고, 오와리국, 오미국은 대체 어디이고, 5부교는 뭔지 답답할 수 있습니다. 왜군 장수인 와키자키 야스히로에게 히데요시의 책략가인 젊음발이 구로다 요시타카가 칠본창 중의 한 명이라고 칭찬을 합니다.이것들을 모르면,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 없습니다. 

마치 예전에 삼국지를 읽으면서 중국 지도를 펼친 것처럼 히데요시 당시의 지도를 먼저 펼쳐서 파악해야 합니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사와 지리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보충 설명은 별도의 페이퍼로 작성할 생각입니다. 제가 일본 역사 책을 읽으면서 계속 참고하기 위함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로 오네네를 통해 오와리국 출신 다이묘들에게 접근하고, 이에야스의 의도를 눈치 챈 이시다 미쓰나리는 정도를 내세우면서 이에야스를 견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1권에서 다룹니다. 



머릿속에서 16세기 조선, 일본이 떠나지 않네요. 김영진의 <임진왜란> 책도 알라딘 보관함에 있는데, 이 책까지 읽으면 16세기 명나라까지 생각날 거 같습니다. 



2025.7.31 Ex. Libris HJK


지금 옛일을 떠올려본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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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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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려 1400 페이지입니다. 너무 두꺼워서 읽기에 불편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선 중의 하나였던 태평양 전쟁을 자세히 서술한 책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일본 제국 패망사를 다룬 책이므로 일본 관점에서 써야 했겠지만,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서 아시아를 독립 시킨다는 이론인 대동아 공영권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동남아 국가들을 독립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제국주의 기반의 식민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영국(버마), 프랑스(인도차이나), 네덜란드(동인도), 미국(필리핀)을 보면서 자신들이 그들을 대체하기를 바랬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중국과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는데 미국이 왜 이렇게 난리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모두 제국주의 국가이고, 자기들도 모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왜 일본은 안되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깐요.



일본의 아시아 국가의 독립이 아니고, 전쟁이 필요한 자원을 식민지에서 조달하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일본이 동남아 국가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아시아의 단결을 도모하자고 하면서 각 국가는 독립국이라고 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미국에게 연패하면서 점차 승세가 기울여져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처음부터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관동군은 중국 화북 지역까지 진출하면서 중국을 점령할 야욕을 내세웁니다. 독일군이 짧은 시간안에 프랑스군을 격파했듯이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연승을 하면서 쉽게 중국을 점령할 줄 알았지만, 중국은 생각보다 너무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패배하고 후퇴해도 다시 군대를 모아서 일본군에게 대항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9년까지 일본은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은 1939년 5월 노몬한 지역에서 소련군과 충돌합니다. 관동군은 군국주의 일본의 대명사이면서 가장 최악의 악질적인 군대 중의 하나입니다. 생체 실험을 일삼던 731부대를 운영했고, 온갖 음모, 공작을 꾸며대면서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를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주코프가 이끄는 제57저격군단에게 박살이 납니다. 이후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세 시 주코프는 공세를 막아내어 소련의 영웅으로 불리웁니다. 모스크바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만약,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 일본이 소련을 침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확실한 것은 소련의 극동군이 독일 방어전에 투입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주코프가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소련에게 엄청난 부담이었겠죠.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너진 후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가 들어섭니다. 이런 정부가 해외 식민지에 관리할 여력이 없었겠죠. 이때 일본은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을 점령합니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할 때 우려섞인 시선을 보냈던 미국은 일본이 중국 화북 지역을 점령하니 일본을 비난하고, 원유 공급을 중단합니다. 



결국, 일본은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를 차지하기 위해 남방 작전을 계획합니다.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있는 영국,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별로 문제가 아니었지만,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을 상대하지 않고는 동남아 진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진주만 공습을 준비합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에 주둔한 영국군 함대,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 있는 미군 극동항공대, 진주만에 있는 미군 태평양 함대를 동시에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군의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군 연합 함대 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제독도 몇 개월 동안은 미군에 승리할 수 있지만, 장기로 전쟁이 지속된다면 미군에게 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자만심은 엄청났습니다. 미국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면, 일본을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고, 태평양을 포기하거나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에 일본군 항모 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진주만 기지를 폭격합니다. 동시에 말레이 반도에 상륙해서 싱가포르로 남하합니다. 또한, 대만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필리핀 루손섬 중앙부에 위치한 미군 클라크 기지를 폭격합니다. 

일본군은 진주만 폭격 시 실수를 저지릅니다. 18척의 함정을 격침 또는 파손시키고, 항공기 188대를 파괴했지만, 유류 저장 탱크와 잠수함 대피소를 폭파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미군 항공 모함은 진주만 기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주둔했던 영국 극동 함대와 필리핀에 있던 미군 태평양 항공대를 박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동인도 자바섬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 네덜란드, 미국 연합 해군도 무너뜨립니다. 일본의 남방작전은 성공했고, 남은 곳은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에서 도망간 호주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자만심은 하늘 끝까지 도달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에서 미군 항공모함을 부수지 못한 아쉬움을 풀기 위해 미군 대규모 해군 병력을 미드웨이 지역으로 유인해서 격파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이 동남아에서 영국, 네덜란드, 미국 해군을 무찌른 것은 그 지역의 미국 공군 병력을 먼저 제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항모가 아니고, 함대전을 통한 전투에서 승리를 한 것이었죠. 

일본의 계획은 진주만 처럼 미드웨이 지역을 급습하고, 진주만에서 미군 항모 선단이 지원을 오면 급습 부대 뒤에 위치한 일본군 항모 선단이 미군 항모를 격침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일본군 암호 해독을 통해서 일본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합니다. 그리고, 바로 미드웨이 항공 기지를 강화하고, 항공기 배치를 증가시켰습니다. 미군 항모는 일본군 항모에 비해 1대가 적었지만, 진주만 이후 미군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이 된 니미츠 제독은 불침 항모인 지상 항공기 기지를 활용하면, 일본군 항모 선단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일본군은 미군 항모를 2대로 봤지만, 미군은 엄청난 보수 능력을 통해 항모 요크 타운을 수리해서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시킬 수 있었습니다.



1942년 6월 4일 일본군은 계획대로 미드웨이 공군 기지를 폭격하지만, 강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공군 기지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이 일본군 항모를 위협하자 공군 기지에 대한 2차 공격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공군 기지 폭격을 위한 소열탄과 항모를 공격하기 위한 어뢰, 폭탄은 다르기 때문에 항모에서 출격하기 전에 교체를 해야 합니다. 일본군은 미군 항모가 아직 도착할 시간은 안 되었다고 판단해서 항공기들을 항모에 착륙시키고, 다시 소열탄을 장착합니다. 그런데, 일본군 정찰기가 미군 항모 선단을 발견합니다. 일본군은 기겁을 하고, 다시 어뢰를 장착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일본군 항공기들이 모두 항모에 착륙해 있을 때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군 항모를 발견하고, 공격을 합니다.

사실 미군 어뢰기 편대와 급강하 폭격기 편대가 항모에서 동시에 출격했는데, 어뢰기 편대는 일본군 항모 위치로 바로 왔기 때문에 일본군 제로기와 조우했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 미드웨이 해군 기지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제로기들은 계속 방어를 담당했고, 미군 어뢰기 편대까지 공격한 후에 연료와 무기 재보급을 위해 항모에 착륙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단, 몇 분동안 미군 급강하 폭격기 편대는 일본군 항모 4척을 격침시킵니다. 일본군은 방어할 제로기가 없었고, 연료와 무기 재보급을 위해 한 곳에 꺼내서 모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습니다. 미군 폭탄 중량도 무거워서 갑판을 뚫고, 격납고까지 내려가서 폭발을 했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 역량이 떨어지는 일본에게 4척의 항모 손실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전함과 순양함 위주의 해전을 선호했는데, 항모에서 출격하는 항공기에게 치명적으로 약했습니다. 항모 전력이 떨어지므로 일본군은 대규모 선단의 대양 전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일본군 제로기의 성능에 뒤쳐졌던 미군 전투기들의 성능이 개선되면서 미군은 공중에서의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로써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점차 낮아집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략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점령을 한 섬들의 공군 기지를 방어하면서 인근 해안에서의 함대전에서 승리를 해야 했습니다.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나 섬에 공군 기지를 짓기 시작합니다. 미군이 태평양을 못 넘어오도록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섬, 뉴 브리튼 섬의 라바울 기지, 과달카나 섬 기지를 중요 전략 거점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병 부대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기지 건설이 늦어졌고, 미군이 상륙해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핸더슨 공군 기지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항공기들을 발바쁘게 배치하죠. 

일본군은 다시 과달카나를 빼앗기 위해 몇 차례의 상륙전과 인근 바다에서의 해전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참패로 끝납니다. 



미군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맥아더는 뉴기니섬, 뉴브리튼섬을 거쳐 필리핀으로 진격하고,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섬들을 점령하면서 사이판 섬으로 향합니다. 

항모가 부족하니 전함 위주로 가봤자 미군 항모의 급강하 폭격기, 어뢰기에 의해 격침될 것이니 할 수 있는 것은 섬에서 틀어 막혀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용기인지, 객기인지 아니면 무식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 의미없는 반자이를 외치면서 죽어가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한심합니다. 전략적인 후퇴와 재집결을 통해 휴전을 도모하는 것이 일본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었지만, 군부가 장악한 일본 정부는 오로지 결사 항전만 외쳤습니다.



1944년 7월 9일 미군은 사이판 섬을 점령하고, 1944년 12월 15일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1945년 3월 27일 미군은 이오섬 점령을 하면서 점차 일본 본토에 다가섭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이 오키나와 섬을 마주하는데, 전투에서 지면 할복하겠다는 비장함을 드러내는 일본군을 마주합니다. 

죽겠다고 덤비는 적에게 죽이겠다고 덤비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5년 7월 2일 오키나와 섬의 일본군은 무너집니다. 하지만, 3개월을 버티면서 미군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상륙할 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을까 걱정했습니다. 



일본이 할 수 있는 공군 작전은 오로지 가미가제 밖에 없었고, 오키나와를 지원하기 위해 출항한 일본군 전함, 순양함, 구축함들도 미군에게 격침 당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힘이 없었습니다. 일부 군인들은 오로지 깡만 남아서 휴전을 하고자 하는 일본 정부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우둔했습니다.   



미군 폭격기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음대로 일본 영공을 날라다녔기 때문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됩니다. 1945년 8월 8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 폭판이 투하됩니다. 많은 민간들이 방사선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죄인은 일본군 군부였습니다.  

일본이 점령한 한치의 땅도 뺏기지 않겠다는, 아무 의미도 없는 신념에 매몰되어서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본토에 상륙한 미군을 무찌르겠다는 일념을 불살랐던 일본 군부로 인해 일본은 두 번의 원자 폭탄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원자 폭탄 공격이 인도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731대 부대의 생체 실험, 난징 30만 대학살, 100인 연속 머리 자르기 등의 일본군 잔혹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제국이 왜 패망했는지를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국력을 키운 일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들이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우방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우리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 합니다.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동의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의 우방이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행히 여러 지표를 조사해서 발표한 2025년 강대국 순위에서 한국은 전세계 6위에 등극했습니다. 프랑스는 7위, 일본은 8위였습니다. 그리고, 2025년 국방력 순위에서 한국은 전세계 5위에 등극했습니다. 우리보다 강한 국방력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관된 국방력 강화와 정치적 안정이 한국을 지정학적 위기에서 구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의 한 축이었던 태평양 전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일전에 읽었던 <중일 전쟁>과 함께 이 책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일 전쟁>을 쓴 권성욱 작가가 <일본제국 패망사>를 감수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군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존 톨런드는 일본은 패망 후 25년 후 다시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존중과 칭찬받는 국가가 되었다고 저술합니다. 마치 이처럼 위대한 국가가 왜 전쟁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집니다. 일본이 실수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한론,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식민지화, 독도 영토 주장, 역사 왜곡 등 그들의 침략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에 대한 민족적 습성,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을 일삼는 치졸한 행태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제가 존 톨런드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일본과 협력하면서 동북아 안정과 평화를 함께 도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무조건적이고, 처절한 반성을 먼저 해야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다시 마음속에 새깁니다.   




2025.07.29 Ex. Libris HJK


1936년 2월 25일 오후, 도쿄의 하늘은 불길할 만큼 어두컴컴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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