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극장에서만 4번 보고 코믹스, 소설도 구매했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다른 작품도 전부 찾아서 봤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필수적으로 기독교 수업을 하나 들어야 하는데, 내가 들은 수업은 영화 하나를 택해서 그것의 기독교적 의미를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 내가 고른 영화도 <너의 이름은.>이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고 심취해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 하면 떠오르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세카이계 작품,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남녀의 복잡미묘한 사랑, 유려한 감정선, 뉴에이지풍의 피아노 연주곡, 빛의 마술사라 불릴 정도로 빛을 가장 아름답고 사실적으로 활용하는 연출, 감각적인 배경 작화 등. 특히 빛과 배경 작화가 가장 시너지를 내는 부분이 하늘 묘사이다. <너의 이름은.>도 첫 장면부터 숨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하늘 묘사로 시작한다. 하늘 묘사는 신카이 마코토의 최고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복잡미묘한 감정선과 이 감정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배경 작화 덕분에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넋이 나가게 되고 황홀한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날씨의 아이>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대놓고 하늘과 빛이 주요 소재임을 드러내기에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이 예상은 틀리지 않았으나, 그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

그의 하늘과 빛 작화는 역시나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제대로 작심하고 나온 듯, 이전 어느 작품보다도 힘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에서 하늘 작화가 정점에 달한 것 같다. 비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맑은 하늘로 바뀌는 것을 이 사람만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특히 이 영화의 내용상 하이라이트 장면인 구름 고래의 등장 씬은, 코딱지만한 핸드폰 화면으로 봤음에도 전율이 느껴졌다. 신카이 마코토식 작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 영화가 아쉽다. 좋은 작화를 받쳐주지 못하는 스토리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특징들을 앞에서 열거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설정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참 비슷비슷하고 한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쁘게 말하면 감성과 비주얼만으로 스토리나 연출상의 단점을 상쇄한다는 인상도 받는다. 좋게 말하면 장단점이 극과 극을 달리는 감독.

이 영화는 그 정도가 심하다. 우선 전작인 <너의 이름은.>의 서사를 지나치게 답습하고 있다. 조연들의 사용이나 전반적인 연출이 전작과 너무 흡사하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활기차고 리드미컬한 씬인 모리시마 호다카, 아마노 히나, 아마노 나기의 '맑음 소녀' 활동은 <너의 이름은.>에서 미츠하와 타키가 서로 바뀐 몸에 적응하는 과정을 비교하며 보여주는 장면을 지나치게 오마주했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이 들어가는 타이밍, 장면 구성, 플롯까지 너무 똑같다. <너의 이름은.>에서 가장 활기찬 장면이 나온 뒤에는 오노데라와 타키의 도쿄 데이트 씬이라는 앞의 씬과 대조되는 차분한 장면이 뒤따른다. <날씨의 아이>에서도 '맑음 소녀' 활동 뒤에 차분한 장면이 이어진다. 공통적으로, 둘 다 이 장면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작품의 문제가 심화된다. 그 외에도 영화의 클라이막스 씬도 잘 보면 <너의 이름은.>을 연상시키는 연출이 꽤 여럿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이해 가능하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동안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광고처럼 짧은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가진 장편을 만든 것은 <너의 이름은.>이 처음이었고, <날씨의 아이>는 두 번째이다. 그런 그가 전작을 많이 차용한 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렇다고 단점까지 그대로 복붙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더 문제 삼는 것은 영화의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전부터 세카이계 작품을 추구했다. 세카이계란 개인의 행위나 선택이 전 세계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는 작품을 말한다. <날씨의 아이>는 이런 세카이계의 형식을 따와서 다수를 위해 한 명을 희생할 것인가, 세상 누구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인 한 사람을 택할 것인가라는 공리주의적 딜레마를 주제로 삼고 있다.

어째서인지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도쿄. 가출 청소년인 호다카는 도쿄로 도망쳐 와 똑같은 가출 청소년인 히나와 만나게 된다. 아마노 히나는 이 비를 멈추게 하고 다시 날씨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히나는 제물로 희생되어야 한다. 히나는 결심을 하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호다카를 떠나지만, 호다카는 그런 히나를 구하기 위해 비가 그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히나와 다시 만나고자 하고, 둘은 끝내 재회한다. 결국 비로 인하여 일본의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고 만다.

사실 호다카가 여기서 무슨 선택을 했든,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공리주의적 딜레마는 애초에 정해진 답이 없으니까. 도쿄가 물에 잠겼더라도 그 무엇보다 귀중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면, 박수칠 일이다. 반대로 히나가 희생되고 재해를 막았다면, 이것도 납득할 만하다. 문제는 감독이 호다카와 히나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장면에서 인물의 내면 묘사와 납득할 만한 설명이 결여한 채 앞서 말한 황홀한 배경음악과 하늘 묘사만으로 영화를 채워, 나로서는 호다카의 선택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스가 케이스케의 일견 혼란스러운 행동도 관람에 방해가 되었다. 이런 낮은 개연성, 부족한 스토리 연출과 내면 묘사는 신카이 마코토가 개선해야 될 점이다.

게다가 영화 결말에서라도 호다카의 선택과 그로 인한 영향을 나름 타당게 정당화하는 내용이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겠건만,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영화 말미에서 한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도쿄는 원래부터 물에 잠겼던 곳인데 개발을 통해 육지가 된 것이니 다시 침수된 것은 원래 자연대로 돌아간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절대 멈추지 않는 비로 인하여 발생했을 수많은 수재민과 인명피해를 '그냥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설명인가? 이런 대사는 오히려 영화의 주제의식을 손상시킬 뿐이다.

중요한 장면마다 전작을 그대로 오마주하여 맥이 빠지는 연출, 낮은 개연성과 부족한 심리 묘사, 부족한 스토리를 비주얼로 극복하려는 듯한 연출, 미숙한 주제의식 등 기대보다는 실망이 컸던 작품이었다. 신카이 감독의 팬으로서 그가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개발하여, 이전의 단점을 또 답습하지 말고, 올해 말에 개봉한다는 새 작품에선 더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22년 4월에 <날씨의 아이>를 보고 썼던 글을 늦게나마 올림)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되어 지난 토요일 티브이 영화채널에서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를 재방해주었더라.

<날씨의 아이>는 전에 한 번 보고 리뷰도 남겼는데, 난 썩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색깔이 강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는 유독 단점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도 비교적 큰 화면에서 <날씨의 아이>를 보고 싶어 시청하여 얻은 수확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이었다. 히나는 아직 초등학생인 남동생 나기와 둘이서만 살며 나기의 보호자 역할까지 한다. 자신이 실질적인 가장이니 온갖 아르바이트에 심지어 밤일까지 하려는 등 도와주는 이 없이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이제 막 중학생인 호다카는 (이유는 끝내 나오지 않으나) 가출을 하여 도쿄로 무작정 상경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도시의 차가움과 삭막함에 이리저리 치이기만 한다.

둘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가장 힘이 없고 연약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사회의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한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더 못살게 군다. 호다카가 처음에 머물던 스가의 사무실도 유쾌하게 연출되어서 그렇지 사실 청소년 노동 착취나 거의 다름없는 짓을 행했다. 이런 세상에서 달리 의지할 곳 없는 호다카와 히나, 나기가 의기투합하여 '맑음 소녀' 사업을 시작한다. 이 모습은 일종의 소외된 자들의 연대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히나와 호다카가 친해지게 된 계기도 호다카가 유흥업소 사람과 같이 있는 히나를 도와주면서부터이다. 둘의 관계는 10대들의 풋풋한 첫사랑이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도와주는 연대의 측면도 있다. 그래서 맑음 소녀 사업 쇼트는 히나의 기도로 떠오르는 햇살처럼 다른 쇼트에서는 볼 수 없던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날씨의 아이>의 사회비판적 측면을 보니, 이 영화에 대한 내 평가도 별점 반 점 정도 상승했다.(2점에서 2.5) 물론 후반부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다.


*23년 3월에 <날씨의 아이>를 다시 보고 썼던 글을 늦게나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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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은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탐구한 역작이다. 저자의 탐구 범위는 주요 행위자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결정과 의사소통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한 상호작용의 연쇄를 다루는 한편, 범위를 내면화하여 이들의 판단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들, 특히 심성구조의 영향, 더 나아가 이 구조가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이어졌는가에 닿아있다. 즉, 이 책은 풍부한 국제정치학적 통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7월위기와 유사한 역사적 사건을 공부할 때 유용한 분석 틀을 제공해준다.

  • 마크 마조워, 이순호 옮김, <발칸의 역사>, 을유문화사

발칸 지역의 발칸화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국제정세를 불안정하게 한 최대 요인이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는 오스만 제국 치하의 발칸 지역을 다루면서, 발칸에 민족국가가 성립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동방문제를 서술하였다. <몽유병자>와 관련된 부분만 읽고 싶다면 제3장 "동방문제"를 읽으면 된다.











  • A.J.P. 테일러,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전간기 유럽의 국제관계를 고찰한 책이다. "이 책은 영웅이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악당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히틀러라는 한 사악한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전후 유럽의 외교정책의 실책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클라크의 관점과 이어지는 부분이다.











  • 로버트 케네디, <Thirteen Days> [<13일>, 박수민 옮김, 열린책들]

쿠바 미사일 위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복잡하고 파국으로 갈 가능성이 컸던 국제정치 사건이다. 클라크도 이 사건을 몇 번 책에서 언급한다. 냉전이라는 구조 속에서 움직였던 행위자인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 각 국가의 의사결정 기구인 엑스콤과 소련 외무부. 이들의 행위는 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상황과 닮은 부분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책은 회고록이다. 비판적 가공을 거치지 않은 1차 문헌에 속한다. 이 사건을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보다 균형있게(저자의 태도가 중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서술한 책으로는 셀던 스턴의 <존 F. 케네디의 13일>이 있다.(현재 절판) E-book으로 읽을 수 있다.(셀던 스턴의 이 책은 <Averting 'the Final Failure>의 축약본이다)










*셀던 스턴의 <존 F 케네디의 13일> 원서 제목은 <The Week the World Stood Still>이다. 이 제목은 1951년에 개봉한 고전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에서 따왔다. 이 영화는 클라투라는 우주경찰이 지구에 와 지구인들에게 분쟁을 중지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우주경찰이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 투퀴디데스, 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는 현대 국제정치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는 국제정치학의 대가이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아테나이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그리고 다른 폴리스들 간의 복잡한 정세와 국제관계를 분석한 역작이다.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방송을 들으며 <몽유병자들>에서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서술과 분석틀이 투퀴디데스를 읽을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이 책까지 함께 거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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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24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유병자들 궁금해서 정보 봤더니 천페이지가 넘네요. 두꺼울 줄 알았지만 정말 두껍네요. 그래도 일단 담아갑니다.

Redman 2023-03-24 19:34   좋아요 0 | URL
아마 각주 빼면 800여쪽일 겁니다 ㅎ
 

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영화는 <너의 이름은.>이다. 이 영화는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재난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점이 통했는지,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은 일본 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하여 그 해 당연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공개한 두 번째 장편 작품인 <날씨의 아이>에서는 기후 재난을 다루었지만 박평식 평론가의 말처럼 "황홀하게 뜬구름 잡"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감독의 개성은 강해졌으나 작품성은 약해졌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전작의 흔적과 단점들은 감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과 비슷하다. 감독의 색깔은 옅어졌지만 대중성이 올라갔고 작품적으로도 전보다는 나아졌다.

신카이 마코토가 신작에서 택한 주제는 재난, 특히 지진이다.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선택은 아니다. 운석 재해를 등장시킨 <너의 이름은.>의 정신적 밑바탕에도 지진, 더 정확히 말하면 동일본 대지진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은 가상의 재해와 환상적 장치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며, 그때 이후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집단 치료를 시도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거대한 재난을 경험한 인간에 대해 예술은,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중요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 <너의 이름은.>의 정신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지며, 감독은 주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스즈메는 우연히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게 된다. 이 문을 열면 미미즈라는 재앙의 신이 나오는데, 미미즈가 땅에 떨어지면 큰 지진이 발생한다. 스즈메는 이 재앙의 문을 닫기 위해 소타와 여행을 떠난다.(여기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성격을 띤다) 먼저 이 여행의 성격을 규정해보자. 스즈메와 소타의 여행은 거대한 힘에 맞서는 모험 서사이며, 일본 전통 설화에서 유래한 듯한 모티프가 섞여 제의의 성격도 동시에 띤다. 재앙의 문은 규슈, 고베, 에히메, 도쿄 등 일본 전역에 걸쳐 있으며, 문이 있는 장소는 과거 온천으로 유명했던 마을이거나, 산사태로 무너진 학교, 폐쇄된 놀이공원 등 재해로 인하여 더 이상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이곳으로 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지만, 미미즈라는 위험한 존재를 막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문을 닫기 위해서는 어떤 주문을 외우며 열쇠로 문을 잠가야 한다. 소타의 가문은 대대로 이 문을 관리하고 닫는 역할을 담당한 '토지사' 집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여정은 스즈메의 귀향 서사이다. 여행의 최종 종착지는 이와테현으로, 이곳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일본 동복부 연안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즈메는 어머니가 재해로 사망한 곳에 어머니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감독은 이 시점부터 동일본 대지진의 기억을 선명하게 상기시킨다. 당시 너무나 어린 아이였던 스즈메는 사건 당시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스즈메는 현재 일본의 10대, 20대 초반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은 2023년을 기준으로 12년이 지났다. 현 중고등학생은 이 사건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그보다 어린 이들은 아예 이런 사건이 있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폐허가 된 장소들을 반복해서 비춰주면서 재해로 인해 파괴된 일상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비추며 이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이를 생각하면, 왜 감독이 문이라는 소재를 택했는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재난의 문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이 문을 열면 저승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는 '다녀왔습니다'가 되지 못했다. 재난은 생과 사를 너무나 철저하게 갈라놓는다. 스즈메가 문을 닫기 전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그 일상을 파괴하는 재앙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의 이름은.>이 재난을 막고 다시 연결되려는 타키와 미츠하의 간절함에서 영화의 에너지를 형성한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안점은 재난을 막는 것 자체에 있기보다는 재난이 갈라놓은 일상 세계의 회복에 있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스즈메의 여정의 제의적 성격은 내면화되어 스즈메 개인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제의가 되며, 이는 영화 밖으로도 확장되어 커다란 재난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하나의 거대한 의례가 된다. 마지막에는 이런 주문을 외운다.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여. 부디 부탁드리옵니다." 이 대사를 통해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의례가 된 것만 같다.(실제 이동진도 이렇게 평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모든 역경을 뚫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한 소녀의 이 말이 참 아름답다.

어떤 상처로부터 치유된다는 것은 그것을 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그것이 집단적 차원으로 발생하였다면 더욱 그렇다. <너의 이름은.>이 개별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을 지적한 데 이어, 현실의 사건을 직접 호명하여 어느 작품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스즈메의 문단속>은 장소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함을 지적한다. 단순한 기억을 넘어 성장 서사로서의 희망까지 보여준다. 그것이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유난히 서사에 취약한 신카이의 약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며, 그래서 후반부로 가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작보다 서사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는 확실히 좋게 느껴졌으며, 감독의 진정성은 보는 이의 정서를 자극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어느 모로 보나 관객이 신카이 마코토의 이름에 기대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시켜준 작품이다. 한때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포스트 미야자키'로 촉망 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누구도 포스트 미야자키가 아니며 그렇게 되지 못함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신카이 마코토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고 주목할 만한 감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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