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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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의 <도어>가 남긴 배타적인 침묵, 그리고 <아비가일>의 엄격한 기숙사 규율 속에서 집을 그리워하던 소녀의 날 선 긴장감이 여전히 기억에 선하다. 같은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며 내어주어야 했던 땅의 기억 때문인지, 이들이 빚어낸 인물들은 마음의 빗장을 깊게 걸어 잠그고 있다. 흉터가 단단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그제야 삭히고 삭힌 감정들을 토로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탄식과도 같은 고백을 다시 마주하고 싶었던 걸까.

서보 머그더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늘 같은 지점에서 마음이 동요되곤 한다. 인물들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세워둔 벽이 보이기 시작할 때. 아직은 그들이 선택한 방식들을 이해와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숨이 턱 막히다가도 한 꺼풀만 더 들춰보면 그 벽이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쌓아 올린 가장 처절한 흔적이라는 걸.

목사 집안에서 자란 ‘어누슈커’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9년 만에 고향집으로 향한다. 올해 스물아홉 살인 그녀에게 집은 따스한 품이라기보다,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두어 쿰쿰한 먼지가 내려앉은 옛 물건을 억지로 꺼내 보는 일에 가깝다. 종교적 규율에 막힌 숨 가쁜 공기, 단정과 엄숙으로 무장한 집안의 권위주의에 조용한 반항이라도 하듯 그녀는 격식을 갖추지 않은 채 나갈 준비를 마친다. 이런 모습이 집안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내뱉는 한마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보면 되겠지.”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짓눌렀기에 9년 전 그날, 도망치듯 집을 나와야만 했을까.

여기에 ‘프레스코’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덜 마른 벽 위에 그려지는 이 그림은 한 번 스며들면 수정할 수 없어, 잘못 그리면 벽을 아예 깎아내야만 한다고 한다. 이미 굳어버린 벽처럼, 이 소설 속 가족 역시 뒤늦게 고쳐보려 애써도 결코 수정할 수 없는 균열을 품은 걸까. 화가인 어누슈커는 이 단단히 굳은 풍경 위에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힐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지워지지 않을 작은 금 하나를 더 긋는 데 그칠 뿐일지 궁금해진다.

초반에는 인물들의 관계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가계도를 살피듯 읽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일단 관계의 윤곽이 잡히고 나니, 그들 각자의 삶이 지닌 모습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어>의 에메렌츠가 길 잃은 동물을 품에 들이고 손길이 필요한 여성들을 돌봤듯, 이 소설에도 타인의 허기를 제 몸으로 받아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어누슈커보다 열한 살 많은 언니, 연커다. 연커는 과거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마다 동생 어누슈커를 떠올리곤 했다. 엄마가 한 번도 젖을 물리지 않아 늘 차가운 젖병 꼭지에만 의지해야 했던 어린 동생을.

밖에서는 신앙적 권위를 내세우는 목사였으나, 집안에서는 가족의 숨통을 조이는 권력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연커는 ‘어린 식모’처럼 자랐다. 집안에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아 하는 성향이 강한 연커는 모든 갈등을 자기 선에서 조용히 눌러 담으려 애쓰는 사람이다. 더 안타까운 건, 결국 침묵 뒤로 숨어버릴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정작 자신도 행복 근처에 가보지 못했으면서 동생의 허기를 기억해 내는 연커. 그녀가 건넬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은 상황의 해결이 아니라 그저 차마 꺼내 놓지 못한 것들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함께 아파하는 애달픈 연대였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늪처럼 끌어당기는 이야기 위로, 서늘한 바람을 확 불어넣으며 “정신 차리고 이 집안의 진짜 얼굴을 봐!”라고 속삭이는 듯한 인물이 있다. 바로 전쟁고아였던 아르파드다. 아버지가 부모를 잃은 조카를 ‘시혜’하듯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아르파드는 이 가족의 사소한 습성부터 감춰진 진실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당사자들조차 외면하고 싶어 하는 구석들을.

이 소설에는 배경으로 치우칠 인물이 단 하나도 없다.
오랜 세월 목사 집안의 그림자로 살았던 하녀, 커티의 삶 또한 그랬다. 그녀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서랍 깊숙이 넣어둔 ‘검은 옷’을 꺼낸다. 그것은 40년 전, 그녀가 첫 월급으로 산 유일한 사치였다. 평생 누더기만 걸치다 죽는 순간까지 남루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그녀에게, 이 빳빳한 검은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온전한 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가장 서글픈 안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읽은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문맥에 딱 들어맞는 ‘정확한 단어’를 찾아냈을 때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는 고백을 봤다. 일개 독자인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에 대한 감상 글을, 공을 들여 써 내려갔을 때, 그 결과물이 제법 만족스러울 때의 천 배의 쾌감일까? 만 배쯤 될까? 나는 그 마음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박완서 작가가 말한 쾌감이 꼭 쓰는 사람만의 쾌감은 아닐 것이다. 작가가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스스로를 들볶았을 고심의 흔적들, 누군가의 생을 앓아본 듯한 문장을 발견할 때면 독자인 나 또한 찌르르한 전율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번 그런 문장을 만났다.

“이 소설은 열세 시간의 기록이다”

이 문구 하나가 내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단순히 열세 시간의 기록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걸 서보 머그더가 들려준다? 고민하고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낯선 땅, 타인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고선 그 속내를 다 안다는 듯 공감하는 일이 때론 스스로도 멋쩍다. 그럼에도 나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오는 열세 시간의 여정부터, ‘이런 얘기쯤은 해도 되겠지’ 싶은 속내를 마음 놓고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는 이들의 미처 다 드러나지 않은 삶까지 짐작해 내고, 그 통증을 함께 앓았다. 누구 하나 특별히 악한 의도를 품은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이들의 삶에는 사랑이 부족했는지. 이 지독한 정서가, 참 쓰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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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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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기대 속에서도 서로의 허기를 알아채는 찰나가 스치듯 남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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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작년의 오늘이 궁금해졌다.
그날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을까, 나조차 잊고 있던 1년 전의 나는 어떤 마음의 밑줄을 긋고 있었을까.

북플에 남아 있던 1년 전 기록을 슬쩍 들여다봤다. 그때의 나는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있었고, 스스로는 제자리에서 반 발자국쯤 나아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몰랐으면 하는 마음, 지나쳐주길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심경으로 지냈던 그때의 나날들이 머릿속에서 휘리릭 지나간다. 사실은 거의 멈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혼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 그 정도만으로도 그때의 나에게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의 나는 또 어떤가 싶어진다.

사소한 엉망 속에서도 나는 웃고, 잠깐 화를 내고, 또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는다. 여전히 미루고 또 미루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얼른 자동차 엔진오일도 갈아야 하는데, 이런 건 왜 이렇게 미루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사는 일은 전혀 귀찮지 않다. 고르고, 주문하고, 박스를 뜯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부지런해진다. 며칠 전엔 언니가 내 방에 들어와 한쪽 입꼬리를 예리하게 씨익 올리더니, 책장을 훑다가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관상용.”

읽은 책보다 ‘읽으려고 했던 책’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다. 어떤 책은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괜히 아껴두고 싶어진다. 지금 읽기엔 아깝고, 나중의 내가 더 잘 읽어줄 것 같은 느낌. 그 ‘나중의 나’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쩔 땐 책을 펼치는 시간보다 책을 고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고르는 기분이 좋은 건가 싶다. 근데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관상용’에 긁히긴 했나 보다.

그럼에도 책을 샀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책은 뻔히 한정되어 있는데, 기어코 또 사버렸다.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면 전부 처음 읽는 작가들이다.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분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박하게나마 ‘땡투’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또 아홉 권을 만나게 됐다. 읽을 예정인 책만 또 늘어난 셈이다.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 앞부분만 조금씩 읽어보는 중이다. 나중에 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 막 나를 스친 이 책들의 첫인상은 이렇다.



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

최근에 읽은 《후리》를 쓴 카멜 다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알제리 작가다. 소개를 읽다 보니 알제리 여성 최초의 고등사범학교 입학 같은 타이틀보다, 알제리 이슬람 학생 총연합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다는 이력이 더 눈에 띈다. 그때부터 본명 대신 ‘아시아 제바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자기 이름까지 지워가며 지키고 싶었던 세계는 대체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런 작가의 이력을 알고 나서인지 “그러니까 바로 오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저자의 실제 삶이 문장 뒤로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다른 아랍 여성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던 그의 이력이 이 소설 속에 어떤 그림자로 스며 있을지 상상해 보면서.

어느 바다든, 어느 바다의 파도든 자신에게 매혹적인 행복의 시간을 되돌려 주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찰싹거리는 그 물결 소리가 더 멀리서, 깊이 파묻혀 있던 과거에서 되살아나 들려오는 듯했다. (p. 20)

파리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고향 알제리로 돌아온 화자 베르칸.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서 오히려 더 마음이 쓰리다. 분명 고향 땅을 밟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 보이는 공기. 오랫동안 써온 프랑스어라는 언어가 마치 남의 옷처럼 느껴지는 그 이물감이 문장 사이사이에서 툭툭 걸린다. 고향에 왔지만 정작 내 언어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는 것 같은 그 막막함.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스스로 결정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프랑스어와 고향의 언어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단호한 기색이 느껴진다.

가장 흥미로운 건 시점의 변화다. 베르칸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그의 삶을 읊어주는 제3자의 시선이 묘하게 교차된다. 처음엔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이 불친절한 전환이 내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색함보다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뒤에 숨어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처럼. 이 묘한 시점의 차이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지, 그리고 낯선 틈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퇴직까지 앞당겨가며 이 낯선 고향으로 기어이 돌아와야만 했을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자면 온전히 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p. 22)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도입부의 몇 줄만으로도 전쟁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냄새와 지독한 허기, 그리고 적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주인공 한스 슈니츨러는 전쟁 끝에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마주한 세상은 뼈대만 남은 건물들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잿빛 도시다.

그는 이제 오로지 생존과 허기로 세상을 본다. 당장 배를 채울 빵 한 조각과 몸을 뉠 안전한 장소가 그에겐 그 어떤 이념보다 절실하다. 버려진 옷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한 담배를 입에 물고서 성냥불을 가진 누군가가 지나가길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의 집을 멍하니 떠올려본다.

돌로 만든 천사의 얼굴은 부드럽고도 고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p. 8)

손에 백합 한 송이를 든 채 침묵하는 천사상. 한스는 그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묘한 희열에 잠긴다. 전쟁이 삼켜버린 도시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다운 얼굴이기 때문이었을까?



안톤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단편의 매력을 처음 알게 해준 건 권여선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서서히 단편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세계문학 단편선을 한 권씩 모으다 보니 결국 안톤 체호프까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편이 모여 있는 구성이다. 이제 막 앞부분에 실린 <굴>과 <아뉴타>그리고 <반카> 까지만 읽어봤는데, 누구는 죽을 것 같은데 누구는 웃고 있고, 누구는 진심인데 누구는 이용만 한다. 인간이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그 지독한 온도 차. 체호프는 그걸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그냥 툭 내놓는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아프게 찌른다.

굳이 비교하자면, 권여선이 뜨겁게 도려낸 자리를 체호프가 그 뜨거운 순간을 식지 않은 채로 냉정하게 응시하는 기분이다.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일 뿐이다.

체호프의 글에 담긴 ‘삶의 민낯’에서 내가 느낀 냉기 외에 남은 이야기들이 또 어떤 다양한 감정을 얻게 해줄지 궁금해진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각기 다른 온도로 놓인 이야기들이 담겨있을까? 읽어봐야 알겠지. 왜인지 서늘한 가을 끝자락에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래야겠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내 기억이 맞다면 희곡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희곡을 좀 읽어본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유일한 한 권이다. ㅋㅋ

여기에 한 권을 더 얹어보려 한다. 일단 제목부터가 좀 압도적인 느낌인데 책장을 펼치자, 아침 햇살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다. 모여 있는 네 가족의 대화가 참 묘하다. 분명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그 말들 속에 가시가 돋쳐 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살결을 가장 아프게 할퀴는 그들의 대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다. 불씨를 덮듯이 아슬아슬하게 애써보지만 이미 뒤편엔 짙은 그림자가 깔린 기분. 닥쳐올 불행이 두려워 날을 세우는 사람들처럼 보여서 어딘가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이들이 통과해야 할 길고 긴 밤을 채우게 되는 것은 무엇일지. 4막 중 1막을 읽었을 뿐인데, 가슴팍이 이렇게도 갑갑할 수가 없다.



막스 프리슈 《호모 파버》

유네스코 소속으로 저개발 지역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 발터 파버는 모든 걸 확률과 통계로만 따지는 뼛속까지 엔지니어다. 소설 시작부터 비행기가 사막에 비상착륙을 하게 되는 난리가 나는데, 이 와중에도 엔진 결함을 숫자로 계산하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세상 모든 일을 계산기로 두드려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그는 엄숙한 분위기도 싫고, 괜히 질척거리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스타일도 아닌 듯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인간미가 영 부족한 남자다. 그런데 읽을수록, 난 이 사람이 은근히 맘에 든다! 실생활에서 때론 이런 지독한 투명함이 더 낫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일지언정, 적어도 계산기 밖의 딴마음은 품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가끔 속에서 끓어대는 ‘단절의 욕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묘하게 정이 간다. 나만 그런가?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군.)

난 내가 지구상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내가 최후의 인간이라고 단순하게 상상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히스테리를 부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p. 33)

하지만 인생은 늘 계산기 밖에서 터지는 법. 그의 견고한 논리를 비웃으며 자꾸만 끼어드는 ‘우연’들이 이 소설에 기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감정 따위는 하나도 안 섞인 차가운 기계 부속품 같은 문장들 끝에 어떤 비극이 그려질 것 같아 자꾸만 어디 한번 보자? 싶은 심보를 자극한다. ㅋㅋ 읽다보니 《슈틸러》도 급 관심이 간다.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2》

최근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찍먹했다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샀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로베르토 볼라뇨에게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2666》이 궁금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가 쉽게 덤빌 두께가 아니라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을 중심으로 시인이 되려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시를 쓰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먼저 펼쳐진다. 이곳은 시에 대한 평가와 각자의 작품 이야기가 오가고, 때로는 서로의 문장을 두고 농담처럼 가볍게 날을 세우기도 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 정체성을 이야기하며 ‘내장 사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째 이름이 영 껄쩍지근하다.

이 소설은 처음 문을 열어주는 화자가 있는데, 어딘가 너무 진지해서 좀 웃기다. 건조한 웃음이랄까? 본인은 꽤 심각하게 시와 문학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옆에서 보면 살짝 과몰입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 와중에 폼은 또 꽤 잡는다. 누구나 ‘어린 패기’가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시절이 있으니까.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는 느낌보다는 몇몇 핵심 인물들 사이로 시선이 계속 이동하는 구조처럼 느껴진다. 초반만 읽어서는 아직 무슨 이야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번갈아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딱 떨어지기보다는 계속 겹치는 말들의 흐름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그 안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초면인지라 처음엔 쭈뼛거리며 접근했건만, 읽다 보니 요거 은근히 빠져든다. 막 써 내려간 듯한 생생함 때문인지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지다 말고 애매한 지점에서 재미가 터지기도 한다. 앉은자리에서 백 쪽 정도를 쭉 읽었다. 실제로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피노체트 쿠데타’가 이들의 대화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데, 단순한 배경이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결도 어딘가 이 사건 이후의 공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추측을 해 본다.

화자가 고백하길, 자신은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나는 ‘충분히’ 자세한 이야기 한가운데에 있다. ㅋㅋㅋ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새로운 인생》

이제 앞으로 겨울이면 더 생각날 오르한 파묵. 작년에 《눈》을 읽고 홀딱 빠졌다는 재탕 삼탕의 말을 또 해야겠다. 너무나 좋았던 첫 만남 덕분에 최근 《내 이름은 빨강》까지 만날 수 있었고, 몇 권 더 품에 들였다.

한동안 나는, 명확하게 들려주는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분명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었을 테지.

내게도 차츰차츰 조금씩 변화는 찾아오더라. 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또렷한 문장을 찾기보다, 오래 머무는 문장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의미를 단번에 건네받기보다는, 그 의미 주변을 맴도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보이려나? 후훗. 어쨌든 요즘은 선명한 목소리보다, 눈 내리는 날 창밖처럼 흐릿한 이야기들에 더 오래 시선을 두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딘가에 완전히 발붙이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게 그렇게 내 마음을 붙든다. 이유를 다 말하지 못한 채로, 그저 오래 남는 것들처럼.



작년 오늘, 김연수의 문장을 따라 ‘반 발짝’ 나아갔다고 믿었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도 이 아홉 권의 책들 사이를 헤매며 나만의 보폭으로 기분 좋게 걷는 중이다. 새 책을 만지작거리며 아직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채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 난 이 기분이 참 좋다. 날 선 시선, 서정적인 여운, 예리한 통찰... 이토록 다양한 감정들을 조금씩 느껴볼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시간 역시 참 좋다.

앗! 글을 닫기 전 작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온 메시지 같은 밑줄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이 문장 하나 슬쩍 남겨두고 이제 정말 마무리 지어야겠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온 한 구절이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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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4-15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상용이든 뭐든 저렇게 아름답게 꽂혀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잖아요. 사진 속 책들이 곰돌이님의 글과 함께 특별한 풍경이 되는 시간입니다. 곰돌이님의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저 책들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라고 저는 오늘도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올거기 때문에 언젠가라고 말이죠. ㅎㅎ

곰돌이 2026-04-15 12:53   좋아요 1 | URL
저한테는 마음이 텅 빈 날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든든한 비상약 같은 존재들인데, 독서 하수의 마음에 아주 재를 한웅큼 뿌리고 가더라고요. ㅋㅋ 가지런히 있는 모습만 봐도 그저 좋은데 말이죠! 그래도 바람돌이님이 이렇게 제 소박한 탐닉을 근사하게 긍정해 주시니 금세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

페넬로페 2026-04-1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읽었던 것 같아요.
곰돌이님과 읽은 책을 공유할 수 있어 좋고
이렇게 올려주신 새로운 책이 읽고 싶어지는 설레는 맘도 좋네요.
저도 관상용 책을 저렇게 분위기 있게 만들어 놓으면 잘 읽을 수 있을까요!

곰돌이 2026-04-15 13:26   좋아요 1 | URL
작년에 저는 북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버버‘ 시절이라, 페넬로페님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반갑게 흔적 하나 남길 용기가 없었나 봐요. 지금은 용기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곰이 되어서, 이렇게 책을 사이에 두고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을 만큼 자랐네요. ㅎㅎ
아, 그리고 페넬로페님은 굳이 분위기를 만드실 필요가 없어요. 책을 대하는 페넬로페님의 마음보다 더 근사한 분위기가 어디 있겠어요. 단언컨대, 없습니다!! ㅋㅋ

잉크냄새 2026-04-15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그어진 밑줄이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 같다 라는 글이 좋네요.

곰돌이 2026-04-15 21:02   좋아요 0 | URL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감정을 헤아리다 보니, 제가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했고 또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나만이 느끼는 변화를 알아챌 수 있도록 글을 남긴 게 참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신 부분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지만, 작년의 저와 같은 마음으로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했거든요. 그 온기를 마음으로 느끼셨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잉크냄새님께도 이 구절이 기분 좋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6-04-16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님들의 구입한 책들을 찍는 본인들의 최애 장소들이 있던데 저는 그게 또 참 좋더라구요.
책은 어느 풍경에도 잘 어울려서 그럴까요?
집 안 책상 위나, 뒷배경인 책장들도, 잠깐 비치는 집 안 속 창문 또는 블라인드마저도!
그리고 때론 외출해서 까페 안에서 찍은 읽는 책 풍경사진 마저도 예쁘더군요.
암튼 책들이 어마어마합니다.
또 즐거운 독서시간 만끽하시겠군요.^^

곰돌이 2026-04-16 08:30   좋아요 1 | URL
제 사진의 8할은 침대 옆 협탁인데, 예쁘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물티슈로 쌓인 먼지도 한번 슥 닦아냈어요. ㅋㅋ 실은 가장 만만한 공간이라 찍어본 건데, 책나무님 말씀 덕분에 다시 보니 나에게는 그저 익숙하고 사적인 공간도 책과 어우러지면 누군가에겐 좋은 풍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박스 채로 찍은 사진마저 구경하는 재미가 있듯이요.
‘읽을 예정인 책’이 또 한껏 늘어났는데, 찬찬히 야금야금 읽어보겠습니닷! 그나저나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 정말 봇짐 매고 어디 콕 박혀서 책이나 보고 맛있는 거나 먹으면 딱 좋겠는데 말이죠. (흑) 책나무님도 마음만이라도 봇짐 매고 훌쩍 떠나는 기분처럼, 오늘 하루 틈틈이 기분 좋은 순간들 만끽하시길 바랄게요!

rainbass 2026-04-19 0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진오일이 더 급한것 같습니닷!! (여기 왜케 초현실적이죵?? ㅋㅋ )

곰돌이 2026-04-19 08:22   좋아요 1 | URL
CPR 들어가기 전에 교체 완료했습니다ㅋㅋ 이런 건 늘 ‘얼른 하라’는 소리 듣고 나서야 움직이는 타입입니다… 흑흑
 
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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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밀화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16세기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는 서양식 원근법을 몰래 도입하려는 책이 제작되고 있었다. 전통과 새로운 시선 사이에서 흔들리며, 세밀화가들의 내면도 조금씩 드러난다. 처음에는 범인이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이번 리뷰에는 살인사건의 전개보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선택을 보여주는 두 여성, 세큐레와 에스테르, 그리고 마음에 남는 몇 장면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일단 세큐레. 1권에서 등장한 남자 주인공 카라(검정)가 사랑하는 여자. 그녀는 내 마음을 가장 널뛰게 한 인물이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도 애매한 위치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동생 하산과도 얽혀 있다. 그렇다고 카라에 대한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그냥 변덕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럴까 싶고. 그런데 계속 따라가다 보니,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잘라 말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제도의 경계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현실, 거기에 카라의 사랑까지 얽히니, 감정 하나로 정리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될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은 전혀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고 있던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자신도 모르게 둘째 아들의 따귀를 ‘찰싹’ 때리는 장면이 그랬다. 삶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결국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감정이 튀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나쁜 행동이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그 안에 그녀가 느끼는 상태가 고스란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을 옆에서 보고 있는 기분.

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책을 통해 여러 감정을 접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좀 막혔다. 현실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패턴 아닌가. 아이들이 감정의 출구처럼 소비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인간의 모순을, 부모와 어린 자식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니까 불편하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전통과 새로운 시선, 서양과 동양, 예술과 삶의 경계가 흔들리는 틈에서, 세큐레는 당시 여성으로서 얼마나 불안정한 선택의 기로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약간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건드리는 여성도 있었다. 유대인 상인 에스테르.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때로는 속물적이기까지 하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니라서 오히려 덜 답답했다. 그녀는 카라와 세큐레 사이에서 오가는 편지를 배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소식을 전하고 관계를 이어 붙인다. 감정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관계와 정보에는 깊숙이 개입하는 인물이다.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느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이 묘하게 불편하지만, 희한하게 이해가 갔다.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차갑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 정을 쌓기보다는, 필요할 때 닿았다가 떨어지는 관계처럼 존재한다. 딱 그 순간만 같은 편에 서주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사실 가까이 두고 싶은 타입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이 소설의 사건들, 세밀화가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단순히 범인을 찾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서로 다른 화풍으로 그린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어느 세밀화가의 손길인지 맞혀보는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고, 몰입해서 읽은 장면이었다. 이슬람 회화가 서명도 없이 한 작품을 여러 명의 화가가 나눠 그리지만, 그래도 각자의 특징이 자연스레 드러난다는 점을 발견하는 재미 덕분이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아주 작은 디테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어릴 적 나는 그림을 본다는 게 결국 ‘얼마나 실제처럼 그렸는가’를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건 서양의 시선에 너무 기울어진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회화가 원근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붙잡으려 했다면, 이슬람 회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더 중요한 질서와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세밀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지우고 전통을 따르며, 독창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겼다. 자신을 한 걸음 물러놓고, 모든 것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처럼 느껴졌다.

어떤 세밀화가가 말 그림을 설명하며,
“세밀화가는 자신의 분노와 질주를 그리지 않는다네. 가장 완벽한 말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의 풍성함과 그것을 창조한 이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의 빛깔들을 보여줄 뿐이지”라고 했다.

세밀화가는 자신의 시선보다 오래된 방식을 존중하며 작품 속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큐레와 에스테르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삶을 이어갔다. 서로 다른 길이었지만, 자아를 지워가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결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자신을 지울수록 그 삶이 견뎌내야 했던 괴로움만은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기에,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려낸 인생사는 내 마음 한편을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했다.

이슬람 회화와 서양 회화, 두 세계의 충돌뿐 아니라 결국 사람을 그리고, 삶을 다룬 소설이기에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경한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듯 느껴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느껴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 거지 싶다.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따라가는 긴장감 속에서도 유독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장면이 하나 있다. 2권 초반에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딘가에 놓인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이미 생을 마감한 자의 독백 안에서 여러 감정을 헤아려보았다. 물론 이 세계가 실제 존재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읽는 동안 잠시,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베르자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고 공간의 경계도 없다. 그러나 삶이 꽉 끼는 셔츠만 같다는 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진정한 행복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라면, 산 자들의 영토에서 가장 큰 행복은 영혼 없는 육신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죽은 다음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고매한 신을 향해 기도했다. 우리에게 천국에서는 육신 없는 영혼을, 그리고 이승에서는 영혼 없는 육신을 베풀어 주십사고. (p. 57, 베르자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세계. 연옥을 뜻한다)

죽음과 삶의 역설 속에서,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로, 다음을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삶과 그 안의 모순을 굳이 다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 문장에 마음이 더 붙들렸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낯선 세계처럼 느껴지는 16세기 오스만 제국과 그 시대를 살아간 세밀 화가들의 감춰진 감수성까지, 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오르한 파묵은 좁은 골목의 그림자, 집 안의 속삭임,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빛까지 하나하나 살아 숨 쉬는 순간처럼 담아냈기 때문이다. 때론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맞닥뜨려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이 또한 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내면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느낀 조용한 감정의 소통, 그게 이야기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장면은 줄거리 속 중심이 아니어도, 마음속에 오래 남아 우리를 조금 더 섬세하게,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이름은 빨강》은 내 삶과 감정을 비춰보기에 충분했다. 물론, 재미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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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10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 님의 리뷰를 읽으면 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이 책 꼭 읽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게끔 만들어요. 읽었는데도 또 읽고싶게 만드는…^^
그만큼 리뷰를 잘 쓰신다는 결론이겠죠.
한동안 오르한 파묵에 푹 빠져 사셨을 듯한 상상도 해보면서 저도 곧 파묵 세계로 풍덩해야지. 또 지켜지지 않을 결심?을 했어요.ㅋㅋ

곰돌이 2026-04-10 14:40   좋아요 1 | URL
제가 들어도 될 칭찬이 아닌 것 같아요. 구멍 하나 파고 들어가야 할까봐요. 몸이 커서 안 들어가겠지만요 ㅎㅎ
차분함을 느끼셨다는 말씀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어요. 끄적거리는 동안 머릿속 정리하는 시간이 더 많은 편이라, 왠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읽고 써내려갔는지를 책나무님께서 알아봐주신 것 같았거든요. 어떤 지점에서 공감이 닿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기분 좋은 순간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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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쫓다 그 시대를 견딘 이들의 생애에 마음이 기울었다. 16세기 이스탄불, 세밀화가의 붓끝과 여성들의 불안한 현실 사이에서 ‘삶이 왜 꽉 끼는 셔츠 같은지’ 그 이유를 마주한다. 나를 지워야 본질이 보인다는 역설이 오늘날의 내 감정을 비춰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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