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2> 중에서...

꼭대기에서 하얀 먼지를 피워올리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언덕이었다. 폭신폭신한 산, 끝내지 못한 여행, 일시적인 천막, 바람에 날려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 되는 고장을 어떻게 지도로 표시할 수 있으랴? 이런 질문 때문에 그의 언어는 너무 추상적이었고, 그의 심상은 너무 유동적이었고, 그의 운율은 너무 불규칙했다. 그래서 그는 키메라 같은 형상들을 창조했고, 사자의머리 염소의몸 뱀의꼬리,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들은 쉴새없이 모습을 바꾸었고, 그래서 고전적 순수성을 간직했던 문장 속에 통속성이 끼어들고 끊임없이 침투하는 우스갯소리가 사랑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아무도 그런 시를 좋아하지 않아, 하고 그는 벌써 천 번이나 했던 생각을 한 번 더 했고, 의식의 끈을 놓치는 순간,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결론을 내렸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없지. 망각은 곧 안전이다. - P121

‘적어도 정신 연령이 십대쯤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기 마련이다: 인생은 결코 익살극이 아니라는 것을, 하다못해 점잖은 희극도 아니고, 정반대로 오히려 본질적 결핍이라는 깊디깊은 비극적 심연에 뿌리내린 채 꽃피우고 열매 맺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정신생활을 영위할 줄 아는 이들은 늑대가 울부짖고 밤의 음탕한 새가 지저귀는 위험한 숲을 물려받는다’ 명심해라, 이 녀석들아. - P160

그는 자기가 증오심을 오래 품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축했다. 역시 증오보다 사랑이 더 지속적인지도 모른다. 비록 사랑이 변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그림자일까, 아무튼 뭔가가 길이길이 남는다. 예를 들자면 파멜라에 대해서도 이제는 지극히 이타적인 애정을 느낄 뿐이다 증오심이란 어쩌면 민감한 영혼의 매끄러운 유리에 남겨진 지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없어지는 손자국 같은 것, 지브릴? 흥! 잊어버렸다. 더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봐라: 적대감을 벗어던지면 자유로워진다. - P175

내 아들은 그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인, 카리브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키프로스인, 중국인-만약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일자리와 존엄성과 자식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저 하늘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입니다.’ - P187

미르자 사이드는 잠들지 못했다. 스리니바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스리니바스는 자기도 머릿속에서는 간디주의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천하기엔 너무 나약해서 탈이오. 부끄럽지만 사실이오. 나는 고통을 견뎌낼 능력이 없소, 선생. 차라리 마누라와 아이들 곁에 남아 있는 편이 좋았을 텐데 쓸데없는 모험병 때문에 이런 꼴이 돼버렸소." 잠 못 이루는 미르자 사이드는 이미 잠든 장난감 상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집안에도 일종의 병이 있어요. 초연함이라는 병, 온갖 만물과 세상사와 감정에 무관심한 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연고 따위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머릿속에서만 살아왔어요. 그러니 현실에 대처하기가 힘겨울 수밖에 없지요. 다시 말해서 그는 지금의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 P300

비록 수많은 질문에 뒤덮인 어렴풋한 미래였지만 어쨌든 미래는 과거에 가려질 수 없다. 죽음이 무대 중앙에 등장하는 시기에도 삶은 여전히 동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 - P342

상여, 꽃을 뿌린, 거대한 아기 요람 같은.
시신, 하얗게 감아놓은, 향기로운 백단향 대팻밥을 여기저기 잔뜩 뿌려놓은.
또 꽃, 쿠란 구절을 금실로 수놓은 초록색 비단 덮개.
구급차, 상여를 실어놓고 미망인들의 출발 허락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
묘지. 상여를 짊어지려고 달려가던 남자 조객들이 살라후딘의 발을밟고, 엄지발톱이 조금 부러지고.
조객 중에는 사이가 멀어졌던 창게즈의 옛친구도 한 명, 양측폐렴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따라왔고, 또 한 명의 노신사가 펑펑 울고, 그역시 바로 이튿날 숨을 거둘 테고,그 밖에도 온갖 사람들, 죽은 자의 일생을 보여주는 걸어다니는 기록들.
무덤. 살라후딘은 그 속으로 들어가 머리맡에 서고 묘지 인부는 발치에 선다. 창게즈 참차왈라가 아래로 내려진다. 아버지의 머리 무게가 내 손에 놓였네. 나는 그것을 내려놓았네. 편히 쉬소서.

누군가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은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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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1> 중에서...

생각해봐, 스푸노, 그려보라고, 도시락 서른 개 마흔 개를 담은 길쭉한 나무 쟁반을 머리에 이고, 기차가 멈출 때마다 일 분 이내로 다녀오지 못하면 기차를 놓치고, 그때는 트럭 버스 스쿠터 자전거 기타 등등을 요리조리 피하며 전속력으로 하나둘, 하나둘, 도시락이오, 도시락, 자, 도시락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장마철에 기차가 고장나면 철도를 따라 냅다 달리거나 허리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게다가 불량배들이 있어서, 살라드 바바, 정말이야, 조직적인 도시락 도둑패였는데, 워낙 굶주린 도시니까 어쩌겠나, 하지만 우린 놈들을 너끈히 처리했지, 우린 어디든 없는데가 없고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었으니, 어떤 도둑인들 우리 눈과 귀를 피할 수 있었겠나, 경찰을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우리 스스로 동료들을 돌봐줬으니까. - P37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브릴 파리슈타가 살라딘 참차에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려면 우선 죽어야 해. 나야뭐 반쯤 죽었을 뿐이지만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 병원과 비행기에서 말이야, 합산하면 한 번은 죽은 셈이지. 그러니까 스푸노, 친구. 지금 여기 빌라예트의 진짜 런던에서 자네 앞에 서 있는 나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새사람이라고, 스푸노, 이거야말로 기차게 멋진 일이잖아?" - P57

지니가 소리쳤다. "입 닥쳐! 그런 얘기는 뭣하러 해? 안 그래도 이사람은 우리를 무슨 야만인이나 열등한 인종처럼 생각하는데."
한 가게에서는 근처 크리슈나 사원에서 태울 백단향과 함께 분홍색과 흰색 에나멜을 바른, 삼라만상을 볼 수 있다는 ‘크리슈나의 눈’을 팔았다. 부펜이 말했다. "봐야 될 게 너무 많죠.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 P92

보름달이 진 후 동트기 직전의 어둠, 바로 이때가 그들이 나타날 순간이다. 굽이치는 돛, 번뜩이는 노, 기함의 뱃머리에 우뚝 선 정복자, 따개비가 즐비한 나무 방파제와 뒤집어놓은 몇 척의 경주용 보트 사이로 덮쳐오는 함대.-오, 한때는 나도 많은 일을 볼 수 있었지, 옛날부터 그 능력을 가졌으니, 환상을 보는 눈을. 정복자는 코를 덮는 쇠붙이가 달리고 끝이 뾰족한 투구를 쓰고 그녀의 집 앞문으로 들어서고, 케이크 스탠드와 등받이 덮개를 씌운 소파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마치 이 추억과 갈망의 집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러다가 고요해진다. 무덤처럼. - P205

참차는 생각했다. 우리는 높이 오르려고 노력하지만 천성이 우리를 배반한다. 왕관을 얻으려 하는 어릿광대. 벅찬 슬픔이 밀려왔다. 한떄는 나도 더 명랑하고 더 행복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 그러나 이제 내 혈관 속엔 검은 물이 흐른다. - P263

이 임시 고향에서는 밤낮없이 중앙난방을 최고 온도에 맞춰놓고 창문도 꼭꼭 닫아놓는다. 망명객은 데시의 건조한 더위를 잊지 못하므로 이렇게 흉내라도 내야 한다. 마치 갓 구운 차파티에서 버터가 떨어지듯 달빛마저 뜨겁게 뚝뚝 떨어지는 그곳, 과거의 땅 미래의 땅. 그리운 땅이여, 해님과 달님은 남성이되 그들의 뜨겁고 감미로운 빛에는 여성의 이름이 붙는 그곳이여. 밤이 되어 망명객이 커튼을 가르면 낯선 달빛이 방안으로 스며들고 그 차가움은 쇠못처럼 눈을 찌른다. - P320

잔디밭에 떨어진 알라트의 시체는 차츰 오그라들어 이내 검은 얼룩만 남는다. 그리고 데시의 수도인 이 도시의 모든 시계가 일제히 종을 울리는데, 열두 번을 넘어, 스물네 번을 넘어, 천 번하고도 한 번을 넘어, ‘시간’의 종언을 선포하며 때를 알린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각, 돌아온 망명객의 시각, 물이 포도주를 이겨낸 승리의 시각, 이맘의 ‘비非시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각. - P331

그는 오비디우스를 버리고 루크레티우스를 선택했다. 변하기 쉬운 영혼, 만물의 가변성, 자아, 그 모든 것.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살면서 많이 달라져 아예 타자가 될 수도 있다. 역사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 존재가 된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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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중에서...

계단에 들어서서 여권을 넘기다가 자기 사진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본 것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개인 서재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사진이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다시 열린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 P7

유리창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버티려고 꽉 잡는 게 아니었고, 이제 안개에 대고 시험 삼아 해보는 말도 망설임이나 복잡함에 대한 불안 없이 평소처럼 물흐르듯 가볍고 경쾌한 기쁨을 드러냈다. 평생 지속됐고, 그에게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큰 행복을 의미했던 가벼움과 기쁨이었다. - P36

사랑하는 사이먼, 너는 늘 강하고 경탄스러운 아이였고, 아무도 모르게 학교와 부모님 집을 떠나서 대도시의 불빛과 그 아래 다니는 기차로 도망친 소년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진기하며 위험한 의지인가! 도박꾼의 의지다! 두려움에 떨 때도 많겠지만 얼마나 큰 자신감이 필요한 일인가! 네가 이렇듯 뜨겁고 정신 나간 의지, 그리고 그 의지의 바탕이 되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불태워서 너 자신의 단어로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펜을 잡길 바란다. - P46

한번은 리비아가 집에 돌아와서, 패트가 음식을 가져다준 후에 구름이 걷히고 별이 나타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전했다. "나는 하늘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다." 레이랜드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나쁜놈. 단테의 <신곡> 지옥편 마지막 장면이잖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나와서 드디어 별들을 다시 볼 때 말이야." 그러고 책을 가지고 와서 소리 내어 읽었다.
"그 사람 안에는 다른 삶이 있어." 언젠가 소피아가 한 말이었다. - P134

"뭔가 다른 의미에서는, 더 깊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에 뭘 해야 하지? 이제 ‘중요한’ 건 뭘까? 번역을 다시 시작하자 약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네. 이 질문에 내포된 절망적인 불안감이 문장을번역할수록 뒤로 물러나고, 차분하고 명확한 감정만 남은 거지.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즐겁게 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올바른 언어를 찾는 일이었네. 이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했다는 뜻은 아닐세.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했다네. 하루 종일 배를 타기도 하고, 폭우가 내리는 바깥으로 나가기도 하고, 더는 읽지 못할 책을 산더미처럼 사들이기도 하고, 중국어도 배우기 시작했지. 하지만 언제나 다시, 특히 밤이 되면 항상 파베세의 책으로 돌아왔네. 아침 여명이면 책상에 앉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언어와 함께 보내리라는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네." - P219

"쉼표가 중요하군. 없애면 유치하게 들리네. 짧고 건조해. 그게 끝이야. 사실 의미가 없지. 잊힌 모든 기억이 어떻게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겠나? 그렇다면 그건 전혀 모르는, 알 수 없는 풍요로움일세. 그게 어떻게 풍요로움이 되겠어? 쉼표는 모든 것을 바꾸네.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생에서 얼마나 큰 부분이 추억인지 우리는 그제야 알게 돼. 그리고 쉼표 뒤에서야 우리가 이 보물을 잊고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기억하지. 또한 쉼표에 내포된 망설임은 잊어버린 이 보물을 추억을 통해 다시 반복하라는 요청으로도 익히네. 그러면 방향을 제시해주는 깊은 문장이지. 진부하고 단순한 문장을 쉼표가 위대한 문장으로 만드네." - P237

타인의 소망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그런 일도 있었다. 타인의 단호함이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므로. - P340

소피아가 구원의 소식을 들고 그의 집으로 달려온지 이틀 후, 레이랜드는 기차를 타고 밀라노로 가서 오랫동안 대성당에 앉아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저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위하고 있었다. 레이랜드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 오르간으로 바흐를 연주했다. 바흐를 이렇게 들어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내면이 울린 적이 있나? - P342

온갖 폭포, 갈등의 다급한 폭포. 나는 이게 어떤 모습이어야할지 알 고 있었고, 모든 것은 이론의 여지 없이 저절로 일어났답니다. 내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닫고 무척 행복했지요. 내 안의 풍경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더라는 뜻이에요. 숨어서 침묵하던 지식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됐어요. 추상적이 아니라 경험으로 들어와서 영향을 끼치는 지식이었어요. 내가 첫 상상력과 문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각성, 멈출 수 없는 각성과도 같았고, 나는 더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 P345

닳은 느낌이엇네. 많은 생각과 감정, 단어들을 너무 많이 찾다가 닳아버린 느낌. 당시에 나는 사십 대였고 이제 곧 예순이네. 내가 그때와 같은 사람인지 그사이에 달라졌는지 묻는 건 의미가 없어. 이런 말은 친숙한 동시에 낯설고, 놀라운 동시에 권태로운 그 중요한 무언가를 다시 느끼게 하지 못하니까. - P363

"작고 초라한 접수대 뒤에서 나도 일종의 모자이크에 열중했어. 단어들의 모자이크였지. 어두운 예배당의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모자이크를 볼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네. 그 모자이크는, 그러니까 문장과 텍스트는 누가 알아채든 아니든 그냥 ‘옳아야’ 했지. 지금도 번역을 할 때면 나는 어두운 예배당에 있는 것과 같아. 시정으로 가득한, 도드라진 현재의 순간을 경험하네. 그러다가 번역이 출간되어 세상에 공개되면, 예배당의 어둠을 떠나 현란한 빛속으로 나오면 거의 유감이라고 느낄 때도 이따금 있지. 정신 나간소리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야." 디 로시가 대답했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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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위주로 몇 권 구매를 했다. 물론, 처음 읽게 된 작가의 책도 있다. 앞서 읽고 평을 올려주신 분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도움받아 고를 수 있어서 반갑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품에 들였다. 무사히 도착한 책들을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상자 속에서 꺼내 한 권 한 권 만지작거리다가 빳빳한 종이에 지문이라도 남겨 정도 쌓고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볼 겸 앞부분만 가볍게 읽어보았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헤르쉬트 07769>, <죔레가 사라지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부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가시덤불땅에 헝가로셀 패널 오두막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한 남성(직업은 교수)! 창문 밖에는 그의 딸이 지역 TV 방송국 취재진과 신문 기자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서 무언가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낼 때까지 떠나지 않을 기세를 보이며 버티고 있다. 혼외로 얻은 딸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는데 19년이나 지난 뒤에 “이제 빚을 갚으시지.”라는 팻말까지 들고 와서 설쳐대고 있으니, 교수는 모든 것이 적절히 계산되고 의도된 계획 앞에 지금 무진장 심란하다. 아니, 그런데 교수의 대응 방식도 만만치 않다. 냅다 방아쇠를 당겨 사람들을 쫓아내는 게 아닌가! 아직 벵크하임 남작도 못 만났으니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전에 읽은 <사탄탱고>보다는 시작이 덜 무겁게 느껴진다.

자신이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므로 그는 모든 조각을 맞추려고 발작하듯 애썼으나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 아무것도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p. 27)

라슬로의 신작 <헤르쉬트 07769>는 구매 전 책 소개를 읽자마자 개인적인 취향을 자극해 이건 재미가 없을 수가 없겠다 싶어 바로 구매했다. 종말 앞에 선 인간의 정당한 태도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이 내가 느낀 라슬로의 매력 중 하나인데,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음울하고 불안한 심리를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헝가리 유대계 중산층에서 자란 라슬로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쉼 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비극적인 언어라도 현실의 붕괴 그 안으로 진입하려는 시도 자체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의지로써 읽힌다. 긴말이 필요 없다. 상당히 재미있다! 누군가 생사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를 담은 편지를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보내려 한다. 보내는 이 주소를 적는 왼쪽 상단에 헤르쉬트 07769만 적은 이 수상한 편지의 목적은 확실하다. 문제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즉시 안보리를 소집할 것! 편지를 보내려는 이의 정체는 독일 튀링겐 동부 전역에 이름난 담벼락 청소 사업을 하는 독일인 보스 밑에서 일하는 ‘플로리안’이다. 일단, 그의 보스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간략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네오나치 성향인 인물로 플로리안에게 서독의 국가를 부르라고 명령하며, 목소리가 맥이 없으면 너는 유대인이나 뭐 그런 거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독일인은 음악에 분명하고, 멋진 귀를 가지고 있다나 뭐라나…. 암튼, 독일에 ㄷ만 나와도 칭송부터 나오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 눈치는 또 얼마나 빤한지 자기 혼자만 재미있는 농담에 지루함을 느끼는 플로리안을 절대 그냥 못 넘어간다.

다아아앙연히 이 모든 것이 지루하지, 딱 봐도 그래! 보스는 엔진 넘어 고함을 질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플로리안은 목을 한 대, 보스가 농담으로 부르듯이, 찰싹 맞았다, 말 그대로, 난데없이, 한 대 찰싹, 그리고 그걸로 끝, 플로리안이 오랫동안 당연시하던 손찌검으로 막을 내렸다, 보스는 대화에 오른 이런저런 주제는 한 대 때리는 일로 마무리했고,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자신의 운명이 이런 것이려니, 털어버렸다, 보스가 자신의 운명이고 그것은 바꿀 수 없기에, (p. 25)

보스의 위압적인 태도에 입도 벙긋하지 않고 기분 나쁜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다소 순종적인 플로리안은 시민대학 강좌를 진행하는 ‘쾰러’ 선생님에게 물리학 수업을 듣고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선생님이 전하려는 말을 뒤늦게 파악하고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지금 보스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다. 세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주론적 예측에 사로잡혀 있는 플로리안과 그를 진정시키는 쾰러의 대화는 이 소설의 맨 처음 장면인 생사와 직결된 문제를 담은 편지를 플로리안이 왜 써야만 했고, 왜 독일 총리, 그것도 자연과학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보내야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해 준다.

하늘을 봐, 저 구름을 봐, 이렇게 들어오는 햇살을 봐, 이것들은 다 만져지는 실제적인 것들이야, 너는 이 모든 진공 문제니 뭐니에 너무 깊이 정신을 팔 필요가 없어, 결국 네가 아예 완전히 잠겨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특히 너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양자물리학의 무력한 실패가 아니라 제한적인 인간 정신의 파탄인 탓이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봐도, 쾰러 선생님, 더 이상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요, 왜냐면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우주가 얼마나 무방비한지 느껴져서 공포에 사로잡혀요, (p. 35)

물리학 지식이라고는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책 정도에 불과한 데다가 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받은 중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있는 플로리안은 이런저런 계기로 쾰러가 멘토가 되어 매주 대화를 이어가며 지내왔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부족하지만, 물리학적 종말론에 대한 플로리안의 고뇌는 굉장히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휴, 그건 그렇고 편지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다!! 감히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젠장”이라고 적어버린 게 아닌가. 흠...



<순수 박물관> 오르한 파묵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눈>을 읽고 그의 책을 좀 더 검색해 보았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내 이름은 빨강> 외에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 박물관>이었다. 곧 약혼하고 결혼할 참인 이스탄불 상류층의 서른 살 케말과 그의 먼 친척이자 가난한 열여덟 살 퓌순의 사랑. 서로를 강하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끌어안으며 희열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퓌순이 내지른 고함과 케말의 행복한 외마디 신음 외에, 극도의 정적에 휩싸인 방 안의 침대 위 두 남녀는 벌거벗은 채 서로를 껴안고 누워 있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흥분과 더없는 기쁨의 감정이 케말에게는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주고받았던 일과 오랜 세월 동안 후회할 말들과 행동일지 몰라도 내 눈엔 불순한 과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시간이 흘러 기억해 내고 꺼내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혹시라도 마음 한구석에 있던 외로움을 들먹거리며 회유하는 어조로 다가오거나 현학적인 말로 교묘히 속아 넘어가게 한다면 비난을 마구 퍼부어주겠다고 다짐하며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비밀과 불안,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 잘 차려입은 손님들 가운데 몇 명에게 이상한 불안과 정신적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 속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한두 잔을 마시면, 우리가 고민했던 것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순간적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p. 62)

무한하고, 어린아이 같은 섹스의 희열 이외에, 나를 그녀에게 매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어떻게 그녀와 그렇게 진심 어린 형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까? 사랑을 낳은 것은 섹스의 희열과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 욕구였을까, 아니면 이 욕구를 낳게 하고 키웠던 다른 것들이었을까? 퓌순과 매일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그 행복한 나날에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저 사탕 가게에 들어간 행복한 아이처럼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게걸스럽게 사탕을 먹곤 했다. (p. 93)

모든 것을 잊고 사랑을 나누었던 그 순간, 창문으로 불어오는 봄바람과 지저귀는 새 소리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물건 하나하나를 추억처럼 떠올리는 케말의 모습을 보자니, 공간과 사물에 대한 기억을 예민하게 끄집어내는 사람인 것 같다. 이것이 퓌순을 그리워해서인지, 퓌순과 사랑을 나눴던 그 때의 나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 어느 것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불안정하게 공존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여전히 폭력과 차별에 시달리는 튀르키예 여성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는 이 소설을, 누군가의 인생이 옳았는가 아닌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시선으로 보려 한다. (아직 이 소설의 끝을 보지도 못했고...) 니샨타쉬의 세속적인 부르주아로 지내면서 그에 걸맞은 여성과의 결혼을 앞둔 케말은 퓌순을 잊겠다며 마음먹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고 이슬람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구화된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퓌순은 현실적인 욕망이나 삶에 대한 주체적인 계산 또한 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 퓌순을 계속 옆에 둘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케말의 모습에서 가난한 이슬람권 여성을 바라보는 평면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케말은 배덕감에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 이었단 말인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퓌순과의 만남에 죄책감과 두려움을 바꿔주는 무언가를 찾으며 지내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한순간, 꿈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의 일부라고 느끼게 해 준 그날을 좀 더 따라가 본다.



<모비 딕> 허먼 멜빌

모비 딕은 평소에 읽어보고 싶었으나, 선뜻 고르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허먼 멜빌의 단편을 읽고 난 뒤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구매했다. 분량으로만 치면 바라만 봐도 심사가 고달파지지만, 허먼 멜빌의 글을 안 읽어봤으면 모를까 절대 외면할 수가 없었달까.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불구덩이 같은 가슴 속 열기를 좀 식히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겸 배를 타고 나가 두루 둘러볼 생각인 남자, 이슈메일. 내가 멜빌의 글에 이끌려 모비 딕까지 덥석 들었듯, 이슈메일도 나침반 바늘의 자력에 이끌리듯 모여들게 만드는 바다에 승객으로서가 아닌 (뭐, 주머니 사정이 좋지도 않고...) 선원으로 나갈 생각이다. 시련이나 고생 따위는 딱 질색이라고 말하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처럼 나름 현실에 자신을 맞춰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존심이 박박 긁히는 상황 속에서도 뭐, 별 수 있나. 고달파해야 나만 손해이니 괴로움 따위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바닷물 못지않게 적잖은 짠내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쿨내를 동시에 풍기는 이 남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봤자 먹고 싸고 자고 남다를 게 없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진 비극에 신물이라도 난 걸까. 어찌 됐든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고래잡이 항해에 뛰어들었다. 경이의 세계로 통하는 거대한 수문이 열리고, 나 역시 마치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곧 입장하기 직전에 두근거림처럼 바다에서의 모험에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아, 그런데 출항은커녕 배에 타기까지도 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아직 여행 가방도 안 싸놓은 이슈메일이 멜빌과 닮아 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서 포경업의 비상지이기도 하고,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사체가 해안에 떠밀려 온 곳이라는 낸터컷 섬 얘기도 해야 하고, 지갑이 두둑하지 못하니 날씨도 더 춥게 느껴져 불안한 마음에 주머니도 괜히 일없이 뒤져봐야 하고 그 외 뭐뭐뭐뭐 다 들려줘야 하니 말이다. (헥헥) 입담이 워낙에 좋아 나름 술술 읽히게 해주니 요 맛에 보는 재미도 있다. 별 의도를 갖고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 듯하면서도 내뱉는 말 속에 철학을 품고 있는 멜빌의 글은 역시나 굿이다!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사실적이고, 강렬하며, 날카롭게 적힌 문장이 18세기의 런던과 파리 두 도시의 상대적인 모습을 단숨에 눈앞에서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한다. 단 몇 장만 읽어도!

깊이 생각해볼 놀라운 사실 하나,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심오한 비밀이자 수수께끼라는 것. 밤에 대도시에 들어설 때면 숙연하게 떠오르는 생각 하나, 저기 시커멓게 옹기종기 서 있는 모든 집들이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 모든 집의 모든 방도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곳의 수십만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들도 저마다의 생각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심장에게조차 비밀스러운 존재란 것! 무엇인가 경외로운 것, 심지어 죽음 자체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p. 28)



<흥분이란 무엇인가> 장웨이

기회가 닿으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폴스타프님의 리뷰를 읽고, 주저 없이 모셔 왔다. 옌롄커와 위화 과가 아니라 츠쯔젠에 가깝다는 말씀에 어떤 느낌일지 짐작은 조금 가지만, 뭐든 읽어봐야 알 수 있으니 가장 먼저 실린 「대추나무 지킴이」와 표제작 「흥분이란 무엇인가」부터 읽어봤다. 그런데, 책 제목이 좀... ㅋㅋ 한 장, 두 장 책장은 넘어가고 이내 미소가 지어진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지만, 작년 12월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석에 앉은 전직 대통령이 ‘통닭 계엄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던 기억, 그리고 예능에 나와서 맥주는 통닭이랑 먹어야 탈이 안 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한 것까지 떠올라 사람 참 한결같다며 헛웃음 짓다가, 모진 삶 속에서도 균형을 알고 조화를 이루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야말로 정말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까지 산뜻해지는 것 같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장웨이 탓이다!) 시대적 혼란을 잊게 할 만큼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이 느껴지는 시골 소년 네 명이 나누는 대화에는 실컷 소리 내 따라 읽다가도 마음 한편이 쓰라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인민공사 사원 모임이 시작되었을 때 다전쯔를 비롯해 그녀와 같이 어울려 다니는 처녀 몇 명은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한참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누군가의 제지를 받고서야 겨우 잠잠해졌으나 그것도 잠시, 얼마 안 돼 또 히히 하하 웃음이 터진다. 스웨터 뜨개질을 하며 웃고, 가장자리 레이스 처리를 하면서 웃고, 땅바닥 풀주기를 비틀며 웃고... 손을 가만히 두지 않는 건 물론, 입도 쉬지 않는 그녀들이었다. ( 「대추나무 지킴이」, p. 7)

“이게 인삼하고 거의 비슷한 보약이여. 많이 먹어도 안 되고. 울 아부지 말이, 젊은이가 많이 먹으면 코피 난단다.”
“어메— 진짜, 향기 좋네!” 징둥이 더덕을 씹으며 말하자 장유취한도 말했다.
“모름지기 ‘삼(蔘)’자가 들어가는 건 다 천연 보양식이지. 해삼, 인삼, 현삼⋯⋯ 또 ‘당(黨)삼.’ 공산당원이라야 먹을 수 있는 삼.” (「흥분이란 무엇인가」, p. 184)



<후리> 카멜 다우드

알제리 내전 동안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담았다는 것에서 고민 없이 바로 구매한 책이다. 기억을 금지하는 곳의 이야기를 드러내며 기억을 되살리려는 작가 카멜 다우드의 메시지가 담긴 2018년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티 없이 맑고 파란 하늘에 휘날리는 하얀 천을 담은 표지가 온몸을 바람에 맡긴 듯 자유롭게 다가오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스치는 바람에도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추위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온몸이 멍에 들어버린 것처럼 아파진다.

내가 네게 말은 하고 있지만, 네가 듣는 내 목소리는 소리가 아냐. 종잇장을 넘길 때 나는 소리, 겨우 그 정도겠지. 게다가 바다를, 개들을, 한 척의 배를, 야자수들을, 아니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내 얼굴을 정의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니. 정의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잖아. 다 안심하기 위해 필요한 거지. (p. 15)



비탄 없는 완전한 삶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이 때로는 새로운 하루가 저 멀리 내려오는 것처럼, 또 때로는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에 휩싸이듯 했다. 어디에서도 토로할 수 없는 내면의 고뇌를 가진 인물의 삶 속에 내 삶을 비추는 지점들이 분명 있었다. 어떤 경계에 서서, 그 경계선 너머 무언가를 혼자 그려보는 동안 느꼈던 고독은 상황과 환경이 달라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내가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나한테 잘 맞는 재미있는 책 고르는 재주만큼은 있는지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느끼면서 꽤 만족스럽게 있었다. 읽었다? 아니다! 읽었다고 말하기도 뭐할 만큼의 분량만 읽어서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긴, 그럼 뭐 어떤가. 즐겼으면 그만이다. 일상의 고단함에 보상처럼 다급함 없이 안으로 향하는 감각에 평화로움을 느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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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7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으려고 주문했어요. 감사합니다.

곰돌이 2026-01-17 21:2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저도 호시우행님 따라서 잘 읽어 보겠습니다!!

rainbass 2026-01-19 0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들의 앞부분만 읽으신것 맞아용?? 😮😮😮

곰돌이 2026-01-19 06:36   좋아요 1 | URL
넵! 어쩌다 보니 말은 길어졌지만...(풉) rainbass님 덕분에 <두 도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책마저 아주 예뻐서 더 마음에 듭니다.

그레이스 2026-01-19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도시 이야기 지난달 재독했어요.
모비딕도 반갑네요.
헤르쉬트..도요 반갑네요.
막 기대됩니다.
설산의 사랑도 샀어요.
저항의 멜랑콜리 먼저 읽어야해서 조금 지체 될듯합니다 ^^
저렇게 세워놓으니 아름답습니다. ^^

곰돌이 2026-01-19 21:42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저는 안 읽어본 책이 워낙 많아서 홍수가 났습니다. 철철철... 대신에 야금야금 읽어볼 거리가 많아서 좋다고 해야겠지요? 큭! 헤르쉬트 몇 장 읽어봤는데 꽤 재미있었어요.
 

<백년보다 긴 하루> 중에서...

사로제끄의 간이역들에서 살아가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파멸한다.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비소(小)하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건 사정이 두루 다 좋건 그런 데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언제까지고 무심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라면 더 행복할 터인데도 다만 운명의 장난으로 거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거대하고 가차 없는 스텝 앞에서 좀 더 진득하게 참질 못하고 의지를 잃는다. 마치 샤이메르젠의 삼륜차 배터리가 전압을 잃어 가듯이, 그 차 주인은 차를 손질하기는 해도 그 차를 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차는 마냥 세워져 있을 뿐이고, 얼마 안 있으면 배터리가 다 닳아 시동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로제끄의 어느 간이역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 P21

그는 자기가 늙은이로 변할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때때로 그 시절의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면 지금 그의 모습은 얼마나 형편없이 달라져 있는가! 그는 반백의 노인으로 변했고 이제는 눈썹까지도 하얗게 세었다. 그의 얼굴 모습 역시 변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체중이 불지는 않았다. 그 기간을 죽 지나오면서 처음엔 그는 구레나룻을 길렀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턱수염을 길렀지만 이제는 말끔히 면도를 해버린 탓에 얼굴이 휑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시절로부터 한 시기의 모든 역사가 다 지나가 버렸다고. - P48

이제 관자놀이의 실핏줄처럼 중동 지방의 거대하고 누런 스텝 한쪽 끝에서 다른 한끝까지를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실과도 같은 그 철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아직은 그 핏줄이 고동을 멈추지 않았고 기차들은 계속 오가고 있었다. - P116

예지게이는 그 자신에게, 그가 이 가족을 대신해서, 마치 그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느끼는 분노와 쓰라림에 놀랐다. 그들이 과연 그에게 누구였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이건 내 일이 아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판단을 내리거나 편을 들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스텝 지방의 사내 -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속이 뒤집혀야 했을까? 어째서 그가 세상일이 옳거나 옳지 못하다는 문제로 그의 양심을 괴롭혀야 했을까? 분명히, 아부딸리쁘의 곤경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부란니 예지게이보다 천배는 더 잘 알 것이다. 그들은 사로제끄에 뚝 떨어져 있는 그보다 사리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이 그의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 P174

만꾸르뜨로 변해 버린 아들을 보고 나이만-아나는 괴로워하며 미칠 듯한슬픔과 절망 속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네 비명이 사막을 가득 채웠을 때, 밤낮으로 애타게 신을 부르고 몸부림치며 헛되이 하늘의 도움을 기다렸을 때, 네 고통받는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가래로 숨길마저 막히고 네 발작으로 뒤틀린 몸의 역겨운 배설물로 더럽혀졌을 때, 그 더러운 오물에 빠져 이성을 잃고 구름같은 파리 떼에게 시달리며 뜯어 먹힐 때 - 그때 네가 어찌 마지막 숨을 몰아 이 버려진 세상에 우리들 모두를 태어나게 한 신을 저주하지 않았겠느냐?

어둠의 그늘이 고통으로 갈가리 찢긴 네 영혼을 영원히 덮어 갈 때, 억지로 부서진 네 기억이 지난날과의 연상을 영원히 잃어 갈 때, 거친 몸부림 속에서 네 어미의 모습과, 네가 어릴 적 뛰어놀던 산중의 개울물 소리를 잊어 갈 때, 네 황폐한 의식 속에서 네 자신의 이름과 네 아버지의 이름을 잊고 네가 둘러싸여 자랐던 사람들의 얼굴이며 네게 얌전히 미소 짓던 처녀의 이름마저 희미해져 갈 때 - 그때 너는 어찌 바닥 모를 망각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고작 이런날을 살게 하려고 너를 자궁 속에 품었다가 신의 빛 속으로 내질렀다며 가장 지독한 욕설로 네 어미를 저주하지 않았겠느냐?」 - P185

그가 통나무로 엮어 만든, 높이가 사람 키만큼이나 되고 튼튼한 쇠사슬로 잠긴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까라나르가 그를 밀쳐 넘어뜨리더니 사납게 울부짖고 으르렁거리며 그 길쭉한 다리를 한껏 뻗어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탄탄하고 검은 혹을 흔들어 대며 쏜살같이 스텝으로 내달았고, 잠시 뒤에는 발굽에 채어 오른 구름 같은 눈에 가려 흐릿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염병할 놈!」 낙타 주인이 뒤에다 대고 욕을 해댔다. 그러나 다음에는 진심 어린 동정이 배어들었다. 「그래, 달려라! 서둘러라, 이 바보야. 안 그러면 너무 늦을 게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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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1-13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의 깝깝한(!) 편집에 처음 중독된 책이기도 하고, 정말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책인데, 표지를 보니 갑자기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이번에는 눈물 한 방울 찔끔하지 않을 것을 목표로...

곰돌이 2026-01-13 17:2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인물들의 이름이 영 입에 붙지 않더라고요. 표정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섬세한 묘사 때문인지 중간에 읽다가 육성으로 탄식이 나오기도 했고요. (훌쩍) 문장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그쵸? 아, 그리고 얄리얄리님, 분명 또 눈물 한 방울 찔끔하신다에 손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