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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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현실이야. 우리는 현실 속에서, 바로 여기서 살아야 해. 계속 살아야 한다고”

지브릴은 그토록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고 바랐던 신을 보게 된다. 비록 기대했던 전능한 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신성한 ‘말씀’의 축복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심을 버리고 나니 새로운 결심이 빈자리를 채웠다. 천사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겉모습이 아니라 실체가 보인다. 이 도시를 구하리라. 이 도시, 진짜 런던. 악의 힘이 얼마나 완강한지 실감할 수밖에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도시의 주민들을 바라보며 선을 널리 펼치겠다는 결심을 더 굳혔다. 앞서 1권에서 내출혈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회복과 동시에 ‘믿음’을 잃었던 지브릴.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천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무신론자 영화배우 지브릴 파리슈타가 천사의 역할로 활동했던(?) 꿈에서 더 나아가 현실에서도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환상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고? 대천사 지브릴의 존재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그의 꿰뚫는 시선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개운해지면서 꼭 해야만 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전달받아 대천사 지브릴과 하나됨을 느낀다. 오호! 분명 그럴싸한 변화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앗! 영 기대치에 못 미치는 현실이 이어진다. 게다가 지브릴의 머리 뒤에 환하게 비치던 황금빛 후광마저 꺼져버렸다. 뭐지?

여기 이렇게 천상의 존재가 나타났건만, 눈부신 빛과 선을 뿜어내는, 빅벤보다도 거대한, 템스강 양쪽에 발을 걸칠 수도 있는 거인 같은 대천사가 나타났건만, 저 조그마한 개미들은 여전히 교통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운전자들과 말다툼을 벌일 뿐이었다. ˝나는 지브릴이다.˝ 그의 목소리는 강변에 늘어선 빌딩들을 뒤흔들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흔들리는 건물에서 지진을 피하려고 뛰쳐나오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눈멀고 귀먹고 잠든 자들. (p. 71)

최악의 바람둥이 영화배우 지브릴을 애인으로 둔 알리의 이야기도 조금 해야겠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이라면 자신의 죽은 남편만 떠올려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소중한 딸의 애인이 최악의 바람둥이 영화배우, 그것도 이제는 회까닥 돌아버려 천사라고 말하는 지브릴인 것이 못마땅하다. 지브릴에게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란 힘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니 말이다. 알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찾아보지만, 연속적인 꿈은 여전했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인 아랍어로 된 시를 읊어대는 등 결국 ‘천사’를 또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화계의 슈퍼스타였던 지브릴에게 다시 영화를 찍을 기회가 찾아온다. 인도 라자스탄의 시소디아 왕조에서 따온 이름인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영화감독 ‘시소디아’를 만나게 된 것인데, 시소디아는 지브릴의 요양 기간 동안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상자를 가져와 중국식 사탕옥수수부터 봄베이식 요리까지 골고루 맛보게 해주며 회복을 돕는다. 화려한 제국이면서도 외부의 침략을 많이 받은 라자스탄의 역사처럼 시소디아는 지브릴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영화계에 발을 담그도록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느낌상 평탄하게 잘 굴러가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다. 어쨌든 지금은 알리가 집을 비워야 할 때 지브릴의 곁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의 모습이다. 단지 혀만 짧을 뿐이다.

“괘괜찮아요. 돗돗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잇잇 있을게요. 지지브릴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건 오히려 틋틋 특권이니까.” (p. 80)

이래나저래나 지브릴은 살만한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애처로운 우리의 염소? 악마? 참차는? 머리에 뿔이 달린 털복숭이 악마이지만,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참차의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 본다.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난 뒤, 다시 인간의 모습을 찾은 참차! 지금 그는 자신이 살던 집 골방에 틀어박혀 언젠가 자기 부인과 함께 읽었던 단편 소설을 떠올린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나 구멍 크기만 봐서는 내상이 얼마나 심한지 가늠할 수 없어.”라고 말한 소설 속 인물의 말을 떠올리며 세상의 온갖 눈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다. 나와 당신이 타인의 삶을 헤아려보듯이 말이다. 평범한 삶을 회복하겠다는 소망과 모순되는 현실의 일면들에 주저앉아버린 시간을 갖고 난 뒤에 참차는 분명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진부함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그 모든 일이 날이 갈수록 어쩐지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이를 닦고 무엇이든 진하고 뜨거운 것을 마시고 나면 제아무리 끈질긴 악몽도 저절로 잊히듯이. (p. 174)

참차의 삶을 들여다보는데 결국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동질감과 측은함이 밀려왔다. 나는 실제로 용기가 부족하고 무언가를 바꾸려 한다기보다는 관조하며 인정하는 태도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서 참차의 삶에 더 관심을 두고 읽었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결국엔 원하는 삶에 가까워졌지만, 내 맘처럼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삶이 아니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비행기 사고를 당했고, 또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러나 그 기적이 불행의 씨앗이 되어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던 그의 삶도 참 고단하다. 뿔 달린 악마의 모습을 했을 때, 사람들은 참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편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주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건 ‘순응’이었다.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듯 구태여 숯검정 같은 속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더 짠하다.

예전의 삶을 재창조하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사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이해한 것이다. 참차는 골방에만 틀어박혀 온갖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텔레비전 채널을 마구 돌려본다. 마치 언젠가는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점점 빠르게만 변화하는 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수많은 비극 속에서 영국 땅에 자리 잡았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의 의식적인 노력과 속세에 초연해진 듯한 모습은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뒤 남은 좌절감과 고독함을 더 드러냈다. 그러나 참차는 허무와 패배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그가 세상에 다시 뛰어들게 만든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처한 상황을 타인과 연관 지어 더 깊게 파고들고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것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한다고 생각해서 비우려고 하는 쪽이다 보니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온 참차의 발걸음이 내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었다. 어쩌면 지브릴을 만난 뒤로 겪은 시련으로 인해 그의 존재 자체가 참차에게는 최악의 인연처럼 여겨지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삶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을 얻게 되었을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나는데, 분명한 것은 선택은 내 몫이라는 것이다.

워낙에 이야깃거리가 많아 인상 깊었던 것 한두 가지만 더 말해보자면, 이 소설은 막바지에 이르러 1666년 런던 대화재 사건부터 1879년 대영제국과 줄루 왕국 간에 일어난 줄루 전쟁까지 과거의 역사를 연결 지어 현재 런던의 한 카페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이곳에 지블리와 참차가 있다. 사방에서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치솟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이때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런던 대화재 사건은 영국 시민들이 악마의 숫자 666이라 하여 분명 이것은 신이 내린 재앙이라 보고 가톨릭교도를 공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빵집에서 일어난 불이 도시로 번졌던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재앙 속에 인간의 위대함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재건 작업을 위해 시민들이 연대하였고 정치 시스템은 여러 목소리를 수렴하였다. 결국 질서가 무너지고 공포로 가득 찬 분열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듯한 이 장면이 2권의 핵심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온갖 환상과 기괴한 설정에 정신없이 따라가게 만들지만, 결국 헤매며 따라갔던 내 두 발이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니 말이다. 지브릴의 꿈속 이야기 중에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인도 농촌 마을에 사는 소녀 아예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걸어서 메카로 순례를 떠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거부와 수용, 만류와 설득이 오가면서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종교적 신념의 충돌을 담았다. 단순히 신념 차이로만 바라보기에는 종교적 대립이 사회적 요인과 얽히면서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조금은 갑갑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야만 했다. 물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종교 권력의 문제만을 드러냈다기보다는 분열한 세계를 포용하는 손길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으로 읽혔다.


저자의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상이 누군가에게는 자극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지만, 언어의 자유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지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주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루슈디의 다른 소설보다 특정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살아온 삶, 살아가는 삶,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지배에 따라 움직이며 현혹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환상과 종교와 관련한 믿음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 삶에서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삶의 균형이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많지 않은가. 거창한 것뿐 아니라 매스컴 등 사소한 일상과 연결되는 것들에서 너무나 쉽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정신 사나움? 나는 오히려 이런 설정과 역사와 신화가 섞인 복잡한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늘에 헬리콥터들이 몰려오던 모습을 목격했고, 여기저기서 물대포가 사람의 머리를 향하고 있던 모습도 보았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하고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당하는 사람을 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한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의 모습도 함께 보았다. 온통 분노에 휩싸이고 온갖 사건이 줄을 잇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 용기를 내는 것이 점점 갈수록 두려워져만 가는데, 누군가 우리를 향해 전속력을 다해 돌진한다. 목소리를 잃고 가장 힘겹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신해 주는 이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향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를 주시하는 자들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 염려되어 아슬아슬하기만 한대, 그럼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바라보니, 분명 그들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살만 루슈디도 마찬가지다.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위안을 삼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는 그의 용기가 값지다.

나의 지적 수준이 루슈디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눈만 끔벅거리며 읽는 순간도 종종 있었지만,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시대의 설화라든지 그가 영향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에 개인적으로 루슈디의 작품 중 가장 읽기 수월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할 책이었다. 만약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봤더라면 그의 다른 책으로 손이 쉽게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고 나름 팬심을 가진 상태라 평균 이상의 ‘좋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안개 속을 거치면서 끝끝내 밖으로 나오는 수고와 노력을 할 수 있었다. 2권의 후반부로 가면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 마치 상상 속 이야기가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뒤죽박죽 정신을 흔들어 혼란스러움을 겪은 독자의 널뛰는 감정에 ‘죽음’이라는 경건함과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주제가 담긴 서사가 더해지면서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준다. 아주 잘 읽었다. 작품 바깥의 소음에 휩쓸려 소홀히 대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소중한 작품이라는 번역가 김진준 님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삶을 되비추는 거울인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삶의 모든 원망과 다툼, 그리고 질투심을 씻어내려 준다는 것을 경험했던 살만 루슈디. 복수를 용서로 극복했던 사람.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깨달을 때쯤이면 너무 늦는다는 것, 이 가혹함을 경험하지 않길 바라는 그의 진심이 녹아들어 있는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숭고해질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아직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p.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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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7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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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해야 할 일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 거짓을 손가락질하는 일, 어느 한 편에 서서 논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가다듬어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일”

AI가 아직 유머 감각까지는 학습하지 못했다며 창조적인 요소가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답게 일단 재밌다. 뭐랄까, 죽이 척척 맞는 동반자처럼 번역가 김진준 님이 루슈디만의 유머와 감각을 어찌나 맛있게 잘 살리는지 이 소설은 상상력으로 빚은 허구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과 진심이 나의 머릿속을 마구마구 헤집으면서도 따라잡힐세라 동서남북으로 핑퐁하는 통에 쉽게 판단하고 예상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까지 더해져 정말 읽을 맛이 활활 불타오르게 했다. 혀가 어찌나 길고 넓은지 눈치코치도 없이 떠들어대며 정신을 사납게도 만들지만, 이 언어의 자유로움이 주는 경쾌함과 명랑함에 빠지면 (어르신께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루슈디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호불호도 분명 있겠지만 나에게는 완전히 호다! 호호호! 일단, 주인공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부터 해야겠다. 부모를 잃은 고아였지만 워낙 잘생겨서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담가 배우가 된 지브릴 파리슈타! 희대의 바람둥이 돈 조반니 못지않은 최악의 바람둥이다. 어느 날, 이유도 없이 전신에서 내출혈을 일으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회복하게 되는데, 그가 깨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한 가지 변화가 생기고 만다. ‘믿음’을 잃게 된 것!

알라시여, 그곳에 계시옵소서, 빌어먹을, 제발 있으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못느껴도 상관없음을 깨달았다. 바로 이 변신의 날부터 병세가 변화를 보였고 회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지금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식당에 우뚝 선 채 돼지고기를 질질 흘려가며 먹어치웠다. (p. 55)

지브릴 파리슈타는 원래 이스마일 나지무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푸나, 제국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영국령 푸나였고 아버지가 봄베이의 발 빠른 도시락 배달원이었기에 열세 살 때부터 이스마일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월은 흘러갔고, 어느 날 한 여성으로부터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생명을 되찾은들 무슨 소용이냐라는 도발적인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런던으로! 지브릴 파리슈타가 아닌 턱수염을 기른 이스마일 나지무딘이라는 옛 이름으로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그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살라딘 참차’(자꾸만 참치로 보인다)를 만나게 된다. 두 번째 주인공 참차의 소개도 간략하게 해야겠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각종 농약과 인조 비료의 전국 최대 생산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참차는 어릴 적부터 땀 냄새가 풀풀 나고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 아닌 검은 물 건너 머나먼 곳을 동경했다. 가슴속 깊은 욕망을 더 이상 누르지 못해 도망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희망 없는 인도 땅이 아닌 파운드화가 잔뜩 쌓인 근사한 이국의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와의 거리를 두어야 하리라! 외침이 너무 컸는지 뜬금없이 아버지가 영국 유학을 제안해 그토록 원하던 런던에 가게 된다. 인도의 현실을 제대로 목격한 적이 없이 자라온 그가 영국식으로 바뀌어버린 인도인이 되었다. 말투를 바꾸는 재능이 있어 더빙 분야에서 큰 몫을 차지하며 영국의 방송 전파를 지배하게 되고, 영국인 여성과의 결혼까지 성공하게 된다. 얼굴은 감추고 목소리만 존재한 유령이라 해도 좋다. 성공과 돈과 아내가 있는데 뭐! 사반세기가 흘러 ‘용서’를 위해 다시 고향 땅 인도 봄베이로 날아온 참차. 용서를 해주려는 것인지 받으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왔다. <한밤의 아이들>에서 피클 국물처럼 들척지근한 향을 풍기는 주인공 ‘살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성 ‘파드마’가 있었다면, 참차에게는 그의 정부 ‘지니’가 있다. 옆에서 비위를 맞추며 부채질을 살살 해 주다가도 단번에 부챗살을 죄다 부러뜨려버릴 것만 같은 여성인 지니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 사는 것으로도 든든한 자산이라 여기는 참차가 여간 밥맛이 아니었는지 냅다 재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 떠나버린다.

“사람들이 당신 곁에 너무 접근하지 못하게 해요, 살라딘 씨. 방어막을 열어주면 그놈들은 곧바로 당신의 심장을 찌를 테니까.” (p. 119)

그래, 다시 떠나자! 단정한 양복과 질서정연하고 만족스러운 런던에서의 삶으로! 그리하여 봄베이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참차와 영화배우 지브릴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한편, 지브릴이 믿음을 잃고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은 후 그날 밤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그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존재였다. 대천사 지브릴. 천사가 된 그에게 온갖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희한하게도 잠들 때마다 중단되었던 부분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똑같은 곳, 똑같은 꿈. 지독한 악몽처럼. (이 소설의 홀수장에서는 지브릴과 참차가 마주한 현실이, 짝수장에는 천사로 변신한 지브릴의 꿈이 교차한다.)

불행하게도 이 비행기는 런던 상공에서 폭파된다. 생존자는 단 두 명이다. 지브릴과 참차! 이들이 떨어져 내려오는 과정은 절대 일반적이지 않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빙글빙글 공중 헤엄을 치며 발버둥 치고 거꾸로 선 채 비명을 지르며 도착한다. 엥? 아니, 어떻게 사람이 하늘에서 폭탄처럼 내리꽂히듯 올 수 있느냐며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 뭐,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듯? 펜을 쥔 손에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까지 쏟아내는 말과 와다다다 시끌벅적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거의 만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부활인 것인가? 3만 피트 상공에서 떨어졌어도 살아남았다니! 낼모레면 구십 대가 되는 노파에게 발견되어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고 영주권이 있다고 믿어달라고 소리치는 참차만 날름 잡아간다. 그럼, 지브릴은? 지브릴도 잡혀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추락과 동시에 두 사람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겠다. 지브릴은 머리 바로 뒤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비치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에 뭔가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들고 비밀을 고백하고 싶게 만드는 천사의 모습이고, 참차는 염소 뿔 한 쌍이 시시각각 길어지는 털북숭이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끌려가는 참차는 도와달라며 악을 쓰며 소리치지만, 지브릴은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그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지브릴의 꿈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자힐리아(이슬람 등장 이전의 무지의 시대)에서 소개되는 인물들과 이야기도 꽤 흥미롭다. 인도 영화계에서 힌두교의 각종 신들을 연기했던 무신론자 배우 지브릴 파리슈타가 아닌 이슬람교의 대천사 지브릴! 지브릴의 시선으로는 이 꿈속에서의 모든 상황과 사람들이 그저 영화 속 한 장면과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여겨질 뿐인데, 난데없이 사람들이 자신을 소환시키는 것이 아닌가? 대천사의 역할과 그 외 여러 배역을 맡은 정말 꿈속에서나 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으니 일단 이 웃기는 상황에서 어리둥절하기만 하고 꿈이 창조한 자아가 느끼는 두려움에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헛일이다. 거기에다가 유일신교냐 단일신교냐 판단해 달라는 데 미칠 지경이다. 자신은 그저 악몽에 시달리는 멍청한 배우일 뿐인데, 뭘 알겠다고 자꾸만 사람들이 답을 원하는 건지 괴롭기만 하다. 환상과 환상을 오가고 신기루가 신기루를 덮쳤다. 여러 영상이 나타나 그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만들어 버리는 통에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가슴에는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지브릴은 현실에서 자신이 믿음을 버린 것을 벌하려고 미치게 만들려는 것인가라는 두려움과 함께 무력함과 무지함을 느낄 뿐이다.

루슈디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아랍과 이슬람 문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장면 하나만 얘기하자면, 지브릴의 꿈속에서 등장한 장면인데, 알라트(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여신)가 번개 창에 맞고 거꾸로 내리꽂히면서 머리가 산산이 터지고 검은 얼룩만 남기며 죽음과 함께 ‘시간’의 종언이 선포된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시대 인물과 이란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인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을 적절하게 섞은 것인데, 이 혁명으로 많은 이민자가 발생했고 불법 이민자로 몰려 체포되어 불법 구금까지 당한 참차의 현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참차는 누가 봐도 사람의 말 대신 “매애애애!” 소리를 내는 양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한 데다가 이민국 요원에게 온갖 추행과 군홧발에 짓밟히는 공포의 세계가 펼쳐진 지금, 이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에 몸마저 부들부들 떨릴 만큼 추운 곳에 감금되어 비참함에 빠져 있다. 이 지독한 모욕과 좌절감이 언제쯤에야 끝날지 도대체 어느 곳이 목적지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어렵사리 탈출에 성공한 그는 낙심천만한 상태에서 이민자의 하숙집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제 완전한 악마의 모습을 갖춘 뿔 달린 염소인간 그 자체였고 사람들은 징그러운 괴물이 눈앞에 나타나면 놀라 자빠지기 일쑤였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 악마가 나타났다고 하겠지만 참차는 그저 억울할 뿐인데, 그런 참차에게 손길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동포들이었다.

운명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이기에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세계가 이렇게 나를 거부하게 만드는가. 이미 오래전에 전령했다고 믿었던 이 도시의 성문에서 이렇게 쫓겨나야 한다니 이 얼마나 허무한 노릇이냐!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내 동포들을 까마득히 멀게만 생각했건만 이제 와서 다시 그들의 품속으로 내던지다니 이 얼마나 비열하고 속 좁은 짓이냐! (p. 392)

하숙집의 높은 다락방에서 지내게 된 참차는 창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밤거리를 순찰하는 공격 준비가 된 민병대, 촛불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미움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주변 곳곳에 있는 공격성을 가진 성난 사람들을 바라보는 동안 참차는 꿈속에서나 봤던 악마의 모습이 따로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향살이하는 이민자들이 뒤죽박죽 변환의 과정에서 얻은 상실감도 보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 고향의 푸른 물길은 사라지고, 느긋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여유조차 없는 귀신 도깨비 나라 같은 곳에서 집안의 문은 죄다 걸어 잠그고 기도나 올리는 것조차 모자라 자식들은 모국어를 쓰지 않으며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진짜 현실을 바라본다. 끝내 참차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한다. “만물은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라고 말한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를 선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분명 탓할 상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악몽에서 깨어나도 근본적인 상황은 똑같았다. 반평생 인도 땅을 벗어나려 애써오며 진짜 현실을 보려 하지 않았던 참차는 이제 꿈과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쓰디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주제 의식이 분명하면서도 무거운 이 소설은 툭 하고 내뱉듯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도 실존 인물과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기에 허투루 읽어내리기가 어렵다. 저자의 익살스러움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의 유머는 절대 가볍지 않다. 끈적한 공기와 열기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질식할 것만 같은 공간에서 깨달음과 동시에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던 이의 심정은 도리어 처연한 가을바람 같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불경스럽게 다뤘다며 작가의 목에 수십억의 현상금이 걸리고, 불태워진 이 책을 비롯해 루슈디가 이 세상에 내보인 소설들은 어느 것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와 악몽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삶 또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쾌함과 동시에 착잡함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지브릴이 꿈속에서 천사들조차 그 너머로 나갈 수 없다고 하는 낙원의 경계에 있는 로테나무의 가지를 끝내 붙잡지 못한 채 꿈속에서 시를 노래하는 것처럼 그는 글을 써 내려갔으리라.

로테나무의 가지를 붙잡으려 하고, 그러나 놓치고, 내리꽂히고, 철퍼덕.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고, 지옥에서 조용한 유혹의 시를 노래했다. (p. 146)

소설 속 인물의 삶이 전부 작가의 삶을 비추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같은 땅을 밟고, 뛰어놀고, 역사를 목격했으며, 분노를 감출 수 없었고, 말해야만 했고, 그렇기에 그 땅을 떠난,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삶을 조용히 비추는 조그마한 공간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읽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 같다. 왜 고향을 등지고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 무언가 잃어버렸지만 찾을 수 없이 헤매야만 하는 이들의 끝도 없는 우울함을 헤아려볼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연민의 감정을 감출 수가 없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떠나 개인적으로 살만 루슈디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명 깊게 다가온 가장 큰 이유를 말해보자면, 그는 온갖 일에 휩쓸리면서 저항할 수 없던 상황을 겪으면서도 분노를 비난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말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였던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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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17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기하게도 저도 자꾸만 참치나 참자로 읽게 되네요.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즐거운 독서 인생 되시길 바랍니다.

곰돌이 2026-02-17 22:32   좋아요 0 | URL
참차로 읽기까지 참치와 참자를 거쳐야 하는 건 아마 저와 잉크냄새님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그쵸? ㅎㅎ 잉크냄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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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땐 세상이 그 어느 것도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만 같다는 억한 심정이 든다. 좁아진 시야 속에서 방황하는 이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괜한 원망을 해 보기도 한다. 이 책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 유독 시리고 아픈 날을 버텨야 했던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특별한 공감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싶다. 삶의 어떤 부분이 지나가고 있음을 진지하게 느끼는 동안 과거의 나를 위로하고, 지금의 나를 응원하며.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저자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작품이다. 필명이다. 똑같이 두툼한 책 두 권이 희한하게 손이 잘 가지 않아 책꽂이에 방치되어 있었다. 작년에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 생일을 핑계 삼아 딱 한 권만 구매한 것이 바로 이 <언어의 무게>인데,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의미에 이끌렸는지 손이 가는 대로 생각 없이 집어 들어 펼쳐봤다. 대단히 긴 시간이 흐른 것만은 아님에도 이 책을 받아봤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그때는 조금은 의미심장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책을 집어삼키면서 괴로움의 시간을 죽이고 또 죽이는 용도로 희생시켰다. 이 책을 집어 든 순간 느꼈다. 늘 비장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든 마음의 무게가 소리도 없이 증발해 버리기라도 했는지, 안개가 걷힌 것처럼 서서히 사람과 사물이 보인다는 것을. 실은 변한 건 없지만 마음이 단단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헛된 수고로만 그친 게 아니라 무언가를 했다는 것, 나의 노력이 드러나는 이 순간에 괜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그래서 익숙하기만 한 소리와 그 울림을 다른 마음가짐으로 듣는 순간, 그동안 이 울림과 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를 깨닫는 ‘레이랜드’의 심정을 다르지만, 같은 마음으로 헤아려본다.

계단에 들어서서 여권을 넘기다가 자기 사진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본 것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개인 서재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사진이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다시 열린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p. 7)

마치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마음을 다 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 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라 여길 만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이제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까지도…. 마음에 끌리는 문장이 많아 방지턱을 넘기 전 속도를 줄이는 자동차처럼 빠져들어 읽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하기를 반복해야만 했고, 그 덕분에 문학적 매력을 느끼면서 느긋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주인공 레이랜드의 삶의 여정은 내가 지금 어디까지 읽었는지 남은 부분의 두께를 종종 체크해 볼 만큼 지루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는 갤러리를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사람의 마음처럼, 매혹적인 문장을 즐기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 만큼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도 있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래도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하여 읽었다. 암흑 속에서 빛을 찾은 그 순간의 안도감과 펑펑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얀 곳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길을 걷는 고요함 속에서 찾은 생의 경이로움과도 같은 감정을 오롯이 담기 위하여 단어 하나에도 공을 들이고 고심하는 이의 마음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가끔 섬세함으로 가득한 책이 불어넣어 주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모든 게 다 씻겨 내려간 것만 같은 이 깨끗함에 정신이 맑아져 그동안 움켜잡고 한 발짝 내딛지 못해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니 말이다. 최소한의 어휘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은 짧은 글에서 얻는 감동과는 또 다른 형태로 마음을 붙잡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레이랜드는 언제나 단어들에만 묻혀 산다. 문학적 요소로 설명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것을 이어받은 단어가 금방이라도 그 순간의 풍경을 눈앞에 그려지게 만들기 위한 멈추지 않는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번역가이자 출판사 사장인 그는 어릴 적 삼촌에게서 들은 아라비아어를 듣고 마법에 걸린 듯 새롭고 아름다운 것에 감동한 눈빛을 보였던 꼬맹이였다. 언어의 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자 특별하고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고 싶은 사람으로 자란 그가 61세에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다. 이 세상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음과 동시에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을 글로 담았고, 그들은 다시 레이랜드의 공간을 채우게 된다. 지나고 나서야 알고 겪고 나서야 아는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새로 시작한다기보다는 정리의 시간에 가까웠을 그에게 또 한 번의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암 진단을 받은 그의 검사 결과가 오진이라는 것. 다시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아진 것이다. 놀라우면서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행복한 감정으로 마치 인생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삶을 사는 듯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이제껏 살아온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자연을 더 경험하고 무더기로 사들인 책은 바닥에 쌓였으며 필사적으로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저항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는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것을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않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타인의 삶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지금 사는 삶이 바라던 삶인지, 상상하던 삶인지를.

이 소설은 뭐라도 적어 보고 싶은 욕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규정 검토를 하는 것이 업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업을 가진 건조한 단어와 더 가까운 사람이기에 과거의 기억을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게 해줄 단어를 생각해 보거나, 아니면 떠올리더라도 뭔가 새로운 단어를 고민하는 경험은 드문 일이다. 그런 나마저도 무엇이든 적어 보고 싶게 만들었다. 언어를 향한 그의 열정은 자극이 되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생각을 나만의 글로 적는다는 것이 어려운 행위로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묘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편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레이랜드가 움켜쥔 펜 끝에서 떨어져 나오는 글자들 속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삶의 회한을 통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마음에서 한 걸음 나아가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심적 여유를 느껴보는 것이다.


이 소설 안에는 바흐의 곡이 많이 등장하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레이랜드의 모습에서 내가 배경음악을 선택해 볼 수 있다면, 루이스 미겔(Luis Miguel)의 Hasta Que Me Olvides(당신이 날 잊을 때까지)를 고르고 싶다. 침착하면서도 공감 능력이 뛰어난 아내였던 리비아. 그녀가 살아있었을 때,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인 트리에스테 집에서 제일 높은 층계에 나란히 앉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언어를 고민하는 두 사람의 열정은 그 자체만으로 낭만적이었고 로맨틱했다.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조금은 빛이 바랜 보석함에서 꺼내보는 그 순간들을 좀 더 깊게,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그에 맞는 단어를 고심하는 레이랜드의 심정을 헤아려보며 옛 시절의 감성이 느껴지는 루이스 미겔의 감미로운 발라드곡을 배경으로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애틋함을 담아. 리비아가 고른 화려한 샹들리에보다도 젊음으로 반짝이던 그 시간을 떠올려보는 동안 자유에 제한받지 않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던 레이랜드가 이제는 번잡하고 혼돈의 세상 속에서 점점 더 많은 현재를 잃어가며 무엇을 느껴야 했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실감했을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찌 보면 용기가 필요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괴롭고 나아질 방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더욱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것들을 철저히 단속하며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알맹이 없이 바깥세상에서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죽여야만 할 테니까. 그러다 보면 나로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지치고 절망도 하게 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결국엔 방향을 틀어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게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살아있음을 느껴보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은데, 잠시라도 개인의 일상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다시금 살아있음을 경험하도록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성과 소멸의 관계를 순리대로 연결해 보며 그간의 여정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조용하지만, 단단한 레이랜드의 침잠하지 않은 감성과 특정한 발음과 말의 울림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 마음에 드는 문장을 생각하는 세심함과 집요함은 그의 내면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나의 내면마저 끄집어 올렸다. 특별한 언어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남들과 다른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은 욕심이라기보다는 그 언어를 나눴던 대상이 특별하였기에 다른 그 무엇과 구별된 언어를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레이랜드의 삶의 순간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라는 중압감에서 한 발짝 물러나 오롯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내면에 이어 바깥으로 방향을 틀게 할 것이며 주변을 둘러보도록 할 것이다.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언어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더 열어 보이고픈 욕심을 품게 할지도 모른다. 드러내 보이는 것에 서툴다면, 서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아무런 말이 없는 침묵으로 평온함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굳이 언어를 통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적당한 말을 떠올리지 못한 안타까움의 표정을 읽는 것으로도 침묵의 공간을 애틋함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으니까! 나와 당신 모두가 발견의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레이랜드의 삶 위주로 적어보았지만, 각자의 언어로 삶을 이야기하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레이랜드는 자기 삶에서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들과의 추억에 푹 빠져본다. 이 모든 게 다 지나갔다는 걸 잊은 듯이. 시간으로 엮인 끈을 더 가까이 잡아당겨본다. 언어와 기억이 서로 얽히면서 증발하지 않고 소소한 행복과 아름다움이 남았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찾은 이 아름다움은 레이랜드에게 현재 주어진 삶을 지탱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아니, 삶을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 삶을 만들어가는 그의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

자기 인생의 시간에 대한 질문을 새로 던져야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시간을 마주하려고 이곳에 왔으니까.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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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2-09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꽤나 인상깊게 읽었던지라 이 책을 구입해뒀었어요. 근데 책 두께가 상당하다보니 쉽게 손이 가질 않아 계속 바라만보고 있었어요.
이 책은 특히나 제목부터가 파스칼 메르시어 작가가 어떤 문체로 썼을지 좀 상상이 간달까요? 암튼 곰돌이 님의 리뷰를 읽다 보니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곰돌이 2026-02-09 07:09   좋아요 2 | URL
주인공 레이랜드와 그 외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기가 막히도록 좋더라고요. 일기장으로 가야 할 이야기들이 자꾸만 튀어나오는 바람에 지우고 또 지워야만 했어요. 덕분에 저의 일기장이 오랜만에 주인과 상봉했다는 해피엔딩! 이런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게 이 책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루하게 느껴졌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고요. 대신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꺼운 책에 담긴 긴 이야기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오랜 시간을 들여 읽기까지 하면서 정작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만큼 들어주고, 귀 기울여주지 못했다는 게... 나중에 언어의 무게 속 길고 긴(?) 여정에 책나무님도 탑승하시게 되면 반가운 마음으로 마중 나갈게요! ㅋㅋ
 
화이트 타이거 - 2008년 부커상 수상작
아라빈드 아디가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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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바퀴가 덜그렁덜그렁 구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물소 한 마리가 커다란 달구지를 끌고 길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달구지 위에 채찍을 든 인간은 없었습니다. 물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게죠”

세상을 어깨너머, 백미러 너머,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짐작 치며 살아가는 한 남성은 오늘도 운전대를 붙들고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마냥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발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직업을 운전기사라고 말하기에는 하는 일이 12가지가 넘는다. 날개가 있어도 날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한다. 그렇다. 그는 하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시작과 희망이기보다는 견뎌야 할 하루와 가까운 삶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주인의 비위는 어찌나 잘 맞추는지 샘물이 졸졸졸 내려오듯 하는 발람의 능글맞은 태도에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인도 상인 집단이자 최대 부자 가문 중 하나인 파르시 집안 출신인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는 그의 저서인 <적절한 균형>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존엄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존엄한 삶이라 하면 통제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삶이 먼저 떠올려진다. 주인에게 예속된 발람의 인생살이는 딱 이와 반대의 삶이라 말해야겠다. 식민 지배를 거쳐 인도의 비극적인 현대사에 대해서 대부분 조금씩은 알고 있기에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하다? 그렇다면 발람이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한다. 멋들어진 인생이 뭔지 상상조차 못 하고 사는 사람들이 왜 가림막에 가려지고, 왜 갇혀만 지내고, 언감생심 벽을 부수고 달아날 생각을 못 하는지, 무엇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대신에 내일의 희망을 바랄 만한 일이라든지 고단함에 환기가 되어줄 만한 기분이 삼삼해지는 이야기 따위는 기대하지 말란다. 고래들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소리만 나니 뭘 바라지 않는 게 상책이고 괜한 엄한 일이나 안 생기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이라도 할 판이라며... 그나마 깨알같은 쾌락이라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주인님의 얼굴을 찰싹 때려보는 것?

모든 걸 빨아들이며 살아온 동안 가슴속에서만 문드러져 있던 심정을 담은 말 속에는 가시가 날카롭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 어차피 알려줄 거면 제대로 알려줘야지! 어설픈 건 딱 싫고 가방끈이 길지는 않아 어려운 말은 몰라도 대신에 밥숟가락 들 줄만 알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제대로 까발려주겠다며 다짐이라도 한 듯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는 거친 욕설이 섞인 유머와 함께 한이 서린 울분이 쏟아진다. 그야말로 하얀 거품이 일어날 만큼 콸콸콸! 그가 버텨낸 삶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을 깊은 숙고로 경감시키며 그날의 하루를 맞이하였을 거라는 것이다. 불행에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는 태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발람이 그리 순진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극단적 불균형과 불평등이 낳은 구조적 문제에 인과 관계를 따지며 시간을 죽일 여유가 없는 발람은 그저 하인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도 빛으로 반짝이는 저 높은 곳을 갈망한다.

발람은 주인님의 부름에 따라 목적지로 가기 위해 빵빵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리며 시도 때도 없이 길이 막히는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과 똑같이 가다 멈추다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차 문을 두들기며 구걸하는 사람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도로 위에 돗자리를 깔고 눕기라도 할 것 같은 가냘프고 나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도로의 혼잡과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폐쇄된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며, 유일하게 아들을 학교에 보냈던 아버지와 발람을 생계 수단으로만 여기며 착취를 일삼았던 할머니, 그리고 줄줄이 땟국이 흐르는 가족들까지도.

만담꾼처럼 너불너불 털어놓는 말에 초반에는 실소가 터지기도 했지만 점점 갈수록 차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욕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욕망을 누르기 위해 도대체 얼만큼의 자제가 필요했을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몸에서 사리가 나올 지경이지만 눈치 아홉 단 발람은 영리함을 발휘하며 지극정성으로 주인님을 모셨다. 사타구니를 긁던 손으로 요리하는 모습에 마님께서 기겁하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의식 없이 하는 습관도 고치고, 생전 처음으로 치약을 사서 손가락으로 이를 닦는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리고 서서히 발람은 타인(주인님)의 사소한 생활 방식을 습득해 가며 따라 하기 시작한다. 같은 가격이라면 화려한 색감과 디자인이 더 그럴싸해 보였던 자신의 취향 대신 주인님의 취향을 따라 단조로운 디자인을 고르면서 말이다. 타인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단순히 삶의 태도에 변화만 주는 것으로 그칠지 아니면 한순간에 삶을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발람은 치욕적이면서도 악의적인 행위를 참아내고 불합리한 일에 휘말려도 조용히 항변할 생각조차 갖지 않는다. 그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다. 내 아버지가 그랬고 내 식구들이 전부 다 그렇게 살아왔다. 원망하기 보다는 허약한 이들을 바라보며 연민에 압도된 채 살아왔을 것이다. 민감한 촉수를 세워 올려다봐야 하는 이들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기 바빴을 테니 말이다. 그랬던 그가 평등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내린 결정과 그로 인해 벵갈루루에 정착한 북부 인도 출신의 기업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엿보는 동안 생각이 깊어지고 씁쓸함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씁쓸함이 오히려 이야기의 현실성을 단단하게 붙잡아준다. 그럼 나는 왜 씁쓸함을 느꼈는가를 생각해본다. 단순히 측은함을 느껴서였을까? 기회와 자유의 차이일 뿐, 우리 사회에도 자본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본능을 갖게 마련이다. 이런 자기중심적으로 뒤틀린 본성이 스스로 택한 결정에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마다 마을의 모든 남자들은 커다란 무리를 이루어 찻집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버스가 도착하면 그들은 올라탔지요. 버스 안을 가득 채우고, 난간마다 매달리고, 천장까지 기어 올라가, 가야를 향해 떠났습니다. 가야에서 이들은 기차역으로 가, 기차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차 안을 가득 채우고, 난간마다 매달리고, 천장까지 기어 올라가, 일거리를 찾아 델리, 캘커타, 그리고 단바드 등지로 떠났습니다. - P43

제 아버지의 등뼈는 매듭을 지운 로프, 그러니까 마을 우물에서 여인네들이 물을 짓는 데 쓰는 로프였고, 목 주위를 휘감고 있는 쇄골은 마치 개 목걸이마냥 불쑥 튀어나왔으며, 꼭 채찍 맞은 자국처럼 살갗을 뒤덮은 베인 곳, 흠집, 흉터 따위는 가슴과 허리를 거쳐 저아래 엉덩이의 좌골에 이르기까지 뻗쳐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의 인생은 날카로운 펜으로 온몸에 쓰여 있지요. - P44

인간답게 사는 것, 그건 미스터리였지요.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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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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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박완서 작가님의 <기나긴 하루>를 읽으면서 얼마나 삶의 무게와 고민이 깊은 하루이길래 제목마저 기나긴 하루가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번에는 백 년보다 더 긴 하루란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소설은 카자흐스탄의 초원에 있는 간이역에서 성실한 노동자인 ‘예지게이’가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까잔갑’의 장례를 위해 끝없이 펼쳐진 사막 위에 장례 행렬을 인도하며,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이 사는 광대하고 척박한 사막, 사로제끄 마을은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 종착역처럼 머무는 곳이자,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고 여겨질 만큼 고립되어 있으며,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꼭 있어야 할 나무 한 그루, 개울 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고작 네다섯 집만 남은 곳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그리고 공상 과학적 성격을 띤 외계 문명과의 접촉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전통 방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낙타 등에 올라 장지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다른 한 곳에서 벌어지는 외계 행성 자원 탐사 프로젝트, 참 묘하다. 이게 조화가 맞는 거냐는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읽다 보면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고받은 말 한마디에도 좋은 감정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데, 까잔갑과 예지게이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두 사람이 함께 간이역에서 일하게 된 것은 예지게이의 딱한 사정을 알아보고 긴말도 없이 손길을 건넨 까잔갑 덕분이었다. 이제는 삶의 비극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잔갑의 충고가 그 어느 것보다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는 예지게이는 어느 날, 전쟁 포로였던 아부딸리쁘와 그의 가족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까잔갑이 건넨 손길처럼 예지게이도 이들에게 손길을 건넨 것이다. 맘처럼 살아지는 삶이 아니다 보니 아부딸리쁘 가족에게 시련이라도 닥치면 예지게이는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면서 괜히 자기 때문에 외부와 동떨어진 간이역에서 불행을 겪는 것은 아닌지 속은 속대로 상하고 애만 태운다. 뜻 없이 건넨 도움에도 괜한 의구심부터 갖는 그야말로 진심이 가치를 잃었다고 말하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괴리감이 살짝 느껴졌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따뜻한 손길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아는데도 때론 예지게이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기 집이라도 번듯하고 여유가 있는 데다가 속 썩을 일이 없어서 남의 일에 자기 일처럼 괴로워하고 속을 끓여대는 것도 아니고, 거참! 게다가 까잔갑에게 선물로 받아 기르게 된 낙타 ‘까라나르’가 겨울만 되면 발정 난 야수가 되어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날뛰어 초원 끝으로 사라지고 암낙타에 올라타 버리기나 하는 판국이니 말이다. 언제쯤 한시름 놓는 날이 오려나 기다려지는 건 이 집 식구뿐만 아니라 다 마찬가지니 한숨이 나온다만, 내 눈에 보이는 고통과 불편도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로제끄 마을 사람들이다. 지친 낙타들이 서로 길게 뻗어 머리를 낮춘 채 서로에게 몸을 바짝 붙이고 누워 쉬듯이, 다 함께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삶의 시작과 끝,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마음이 평온해지기 위해 예지게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체념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런 모습이 강인함으로 다가오면서도, 실없는 낙관으로 보이기도 해 고단함에 울음을 삼킨 웃음처럼 체념과 바람이 뒤섞인 씁쓸함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제는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어렵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그들을 비웃었다. “어리석은 양반들 같으니라고, 당신네들은 당신의 삶을 망친 겁니다. 그런데 뭘 위해서였죠?” 하지만 분명히 어떤 목적은 있었다. (p. 137)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이라 봤자 전쟁이 끝난 뒤에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는 것 말고는 그저 서로 건강하고 너무 덥지 않으며 또 너무 춥지 않은 계절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특별하다고 붙일 게 거의 없다. 제 식구끼리 투닥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럴 시간이 어딨나! 짐승들을 신경 써서 돌봐야 하고 난롯불 시중도 들어야 하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지쳐 일찍 자는 것이 상책이니 말이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평생을 두고 기억할 만한 것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현기증을 느낄 만큼 숨 막힐 듯한 더위에 죽을 둥 살 둥 기를 쓰고 일을 하던 기억부터, 타는 듯이 가물던 날에 보상처럼 내려지던 빗줄기에 너도나도 아이들과 모두 하나가 되어 줄기차게 쏟아지는 폭우 아래를 냅다 달리고 소리 지르며 가슴이 뿌듯해진 채, 서로의 눈빛이 오갈 때마다 그저 기쁘고 고마워했던 값진 기억처럼 말이다.

삶 속에서 느끼는 무의미함과 허무를 극복해 나가는 대안으로 연대와 다정함을 내세운 이야기가 조금은 진부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고, 방대한 이야기에서 지루함도 살짝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는 뒷심이 있는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요즘 시대 에겐남은 명함도 못 내밀 저자의 섬세함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고 잔잔한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숨을 수놓는 듯한 이 섬세함은 애가 타게 만드는 거듭되는 고난을 들여다보는 독자의 마음을 한없이 지치게 두는 것조차 마음에 쓰이는지, 깜깜한 어둠을 지나 멀리서 동이 트는 경이로운 모습에 어제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힘, 포기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었던 생각을 고쳐먹게 해주는 힘마저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때론, 마음에서 우러난 타인의 고마운 말 한마디조차 아무런 힘이 되지 않을 만큼 깨진 창문 같은 심정일 때가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마음까지 읽어내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이라도 잊지 말라는 듯 소리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위로가 되어주는 인물이 등장하는 점에서, 저자의 연륜이 느껴지고 넉넉한 배려와 두루두루 살피는 섬세함을 느꼈다. 그리고 영화 속 씬스틸러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옛 전설은 독자 스스로 천천히 ‘삶의 가치’를 사유할 시간을 갖는 필요성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이 소설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제때 내려놓지 못하고 버려야 할 때를 놓친 고통에 빠진 예지게이의 모습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내려놓는 것을 ‘잃다’와 ‘버리다’ 그 자체만을 의식해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 주인에게서 벗어나려 엄청난 힘으로 날뛰는 낙타 까라나르가 쏟아지는 채찍질에도 멈추지 않고 눈길을 달리는 통에 개처럼 끌려가는 예지게이가 쥐고 있는 고삐 끈을 풀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얼굴이며 배가 눈에 쓸려 얼얼한데도 놓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고삐를 놓는 예지게이의 모습에 무기력감과 공허감에 빠지게 하는 이 장면을 저자는 어떤 마음으로 써 내려갔을까.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누구나 아픔을 덜어줄 길이 보이지 않고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되지만, 지구는 계속 돌고 기차는 운행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타락한 세상에서 움켜잡고 앞만 보며 달려가지 말고, 뒤도 한번 돌아보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극복이 어려운 나약한 자신을 참을성 있고 끈기 있게 묵묵히 곁을 지켜준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한번 들여다보라고 말이다.

사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 외롭고 삭막해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이 사막이 모든 잡념을 다 털어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위안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삶의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자극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서 잠시 생각을 비워내고 머리를 식혀보는 순간을 가지며 내 삶을 위에서 조망하듯 들여다보는 것이다. 넘을 수 없는 장애물에 가로놓여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나날들, 건너가지 말아야 할 강을 기어코 건너버려 속을 끓이고, 해결책이라고는 내 마음의 단념이면 되는 것을 그게 그 무엇보다도 어려워 혼란스럽고 괴롭기만 했던 나날들을 떠올려본다. 그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더한 시련이 닥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온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밤이 지나 동이 트는 것처럼 내 마음이 환하게 떠오르기도 하는 알 수 없는 삶에 온몸이 후끈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행복감이 밀려오는 모든 순간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자연이란 그런 곳이다. 어느 것에서도 찾지 못한 해답을 말없이 안겨주고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을 맡겨도 언제라도 두 팔 활짝 벌려 안아주는 곳. 예지게이가 어릴 적 파도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그 순간과 마주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 역시 미처 다 맡기지 못한 마음속 잔재를 어디선가 생각지도 못한 바람이 불어와 가져가 버린 그 순간을 떠올려 볼 수 있어 마음이 참 편안했다.

옛날 노래와 옛날이야기, 그리고 옛 기억. 감동을 주고 생각을 채워주는 자신에게 더 친근한 것들을 떠올리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에 익숙한 대로 불편함도 제각각, 좋은 것도 제각각, 생각도 제각각인 채로 공존하며 살아간다. 앞으로의 삶과 미래보다는 지나간 옛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며 삶의 경험이 준 것을 이야기하는 부모님과 이에 반해 새로운 것,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더 이야기하는 나와의 관계가 점점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다른 방향으로만 길을 잘못 들어 휩쓸려버린 것처럼 되어버린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에게 가치 있는 삶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인생살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내 부모 또한 길을 잃고, 앞일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막한 길을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이 망아지 같은 녀석을 어떻게 키우셨나 싶어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기쁨으로 나를 안아 올렸는지 기억도 못 하는 내가 어느새 훌쩍 자라 마음을 굳게 닫은 채 부모님이 애가 타는 마음으로 나를 향해 문을 두드리도록 하였는가를 후회하면서 말이다.

옛날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는지. 노래란 그 하나하나가 온전한 한 페이지의 역삽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상상하고 그들을 보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르죠. 그들처럼 고통을 받고 사랑도 하고…. 그게 바로 그들이 자기네들 스스로를 위해 남긴 일종의 기념비인 겁니다. (p.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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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19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대와 다정함 모두 이 시대의 언어 아닐까요? 시대를 초월한 해결책일듯 합니다.^^

곰돌이 2026-01-19 22:41   좋아요 1 | URL
더워도 너무 더운 사막 한가운데서 어쩌다 내린 비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같이 뛰어다니며 그 순간을 즐기는 장면이 아름답게 보일 만큼 좋더라고요. 어쩌면 제가 주고받는 손길 하나에도 고민이 필요하고 주저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닫혀만 가는 마음에 조금은 공간을 내어주게 해줄 소설이라 아주 좋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