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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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먼저 읽어볼 생각이었다가 겨울이라서인지 이 책에 먼저 손길이 가길래 몇 장만 읽어보자 싶어 책장을 넘겼다가 완전히 빠져서 읽었다. 하얗고 순수한 눈에서 느껴지는 왜인지 모를 낭만과 함께 가련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에 정말 마음이 확 사로잡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한 남성이 내뿜는 연기와 소리 없이 내쉰 한숨이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국을 떠난 세월도 오래되었고, 사실 대단한 기대를 하고 돌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예전 모습만큼은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십이 년 만에 고향 터키를 방문한 이 남성의 이름은 카(Ka)이다.

이스탄불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지역인 니샨타쉬의 안락하고 세속적인 공화주의 가정에서 자란 카에게 집 너머의 삶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랬던 그가 정치적 망명자가 되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내다가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이스탄불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좌익 성향의 신문사에서 정치면 기사를 쓰는 ‘타네르’라는 청년 시절의 친구를 통해 곧 카르스에서 지방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과 히잡을 착용하는 소녀들이 이상한 자살 증후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무도 취재를 원치 않는 곳에 임시 기자증을 발급받아 카르스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 이유에는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인 아름다운 ‘이펙’이 그곳에 있다는 귀띔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여행이 시작되어 터키에서 가장 가난하고 잊힌 지역인 카르스에 도착한 카는, 과거의 순수를 찾고 싶은 충동이 생겨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친구들과 걸었던 거리를 가본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예전의 고향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버려진 듯 보이는 마을의 작은 빈민가를 지나 텅 빈 도시의 사방을 채우는 것은 일이 없어 카드놀이로 시간을 죽이는 우울한 실업자들뿐이었다.

이슬람주의 쿠르드족들과 마르크스주의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간의 논쟁, 욕설, 구타, 길거리에서의 싸움으로 시작된 불화는 많은 도시에서 칼부림으로 변했고, 최근 몇 달 동안 양쪽 진영 모두가 서로에게 총질을 하거나 납치하여 고문을 동반한 취조를 했으며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p. 109)

카는 5년 전 프랑크푸르트 백화점에서 산 부드러운 회색 털코트를 입고 있다. 나는 방금 내린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카르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 두툼한 코트를 입은 채 숙소 침대에 누워 상상에 빠진 그의 내면을 이해하는 동반자가 되어 본다. 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껴보며 공화국 시기 터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잠시 뒤 대학 시절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카를 당황스럽게 만들게 될 이펙과의 만남에 앞서 들뜬 감정 또한 함께 나눠본다. 가난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명의 이스탄불 출신 서구화된 부르주아들의 만남은 과연 어떤 전개로 이어질까. 일단 카의 멋진 털코트가 빛을 발해야 할 텐데 말이다.

“넌 아주 멋져. 나도 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3년 동안 그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나도 4년 동안 그 누구와도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어.’ 카는 속으로 말했다.

영화 <도둑들>에서 “저 10년 동안 안 했어요.”라는 씹던껌(김해숙)의 대사가 떠올려지는 이 장면에서 난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10년 치 합시다.”라는 첸(임달화)의 박력을 카에게 바랄 수도 없는 것이, 그는 워낙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부끄럼이 많은 타입이다. 카와 이펙, 두 사람의 애정선은 가끔 이렇게 잔잔한 실소를 뿜게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흠, 분위기가 나 때문에 좀 이상하게 빠져버렸다. 이 진지한 소설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싶다. 아니, 그런데 이펙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홀딱 빠진 카는 깜빡이도 안 켜고 냅다 “너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에 왔어.”라고 고백까지 하는 게 아닌가? 카의 급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만남이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론하기에 아직 성급하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서로 변화할 마음가짐이 없는 상태에서 오가는 대화가 영 겉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온함을 찾고 싶었던 카에게 이펙을 향한 감정이 사랑인 건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2권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가벼운 이야기로 착잡함과 무거움을 피해 볼까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겠다. 곧 있을 지방선거에서 복지당의 지구 위원장이 시장이 될 것이 유력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자리 잡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삼은 세속주의 세력의 계몽 연극이 펼쳐지고, 이때 군부 쿠데타가 벌어진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어 혼란스러운 사람들과 똑같이 당황스러움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 묘사가 압권이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온 군중들이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것 같아 올려다본 순간, 그들을 향해 군인들이 총구의 방향을 틀었을 때 무너져 내리는 지금의 심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착잡하다. 숨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겁먹은 움직임과 웅성거림이 비명으로 바뀐 이날의 광경과 발포 명령에 따른 총소리와 처참함을 폭설이 가리고,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TV로 시선을 돌린 시민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 버린다. 이 소설은 자살, 히잡, 테러리스트, 탄압 등의 단어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공포와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예상하게 하지만 자극적인 사건에 비해 이야기는 차분하게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히 내리는지도 모르게 내리는 눈이 어느 순간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사건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해주면서도 소리를 죽인 몰아침과 함께 서서히 쌓이는 서사에 완전히 압도당하게 된다.


카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써야만 했다.
눈의 정적이 이어지면 쓸 수 있으리라.

카르스에 드리워져 있는 과거의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시를 써야 했다. 따스한 호텔에서 손에 담배를 들고 좋아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 아이처럼 머릿속으로는 사랑하는 이펙과 얼른 이곳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침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분명 카르스의 현실과 조금 빗겨나간 듯 보인다. 무신론자이면서도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카는, 이슬람 세력이 서구화를 종교적으로 비판하고, 세속주의 세력은 군대가 저지른 쿠데타를 통해 세속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양쪽의 대립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비겁하게 보이는가? 세상은 고통스럽고 아픈데 평온함을 찾는 그의 내면이 나는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졌다. 이미 어린 시절 군사 혁명을 경험했던 그가 무너진 마음의 조각을 뚝 떼어놓고 잠시라도 혼란에서 벗어나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시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는,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도 시인은 마음의 일부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시인이라면 현재를 환상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해내기 힘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카는 시를 다 쓴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p. 248)


잠시, 눈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본다.
카르스를 가득 채우는 눈 오는 날, 또 하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정하고 따뜻한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가오는 감정에 오롯이 빠져들어 본다. 언어는 들리지 않지만, 아이들의 동작만큼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털복숭아처럼 오동통한 뺨은 갈수록 붉어지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식식거리며 뛰어노는 모습,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내뿜는 밝음과 희망찬 모습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의 해맑음이 나중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작은 공터에서, 눈 덮인 광장에서, 공공건물과 학교의 정원에서, 비탈길에서, 카르스 강 위에 있는 다리에서,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뛰어다니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코트를 입은 아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교복 윗도리를 걸친 채 목도리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쿠데타를 기쁘게 맞이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으니까. (p. 311)

행복에 빠지면 평범한 사람이자 평범한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시인 카. 그런 카에게 이곳 카르스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모든 것이 정치적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카르스를, 새하얀 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듯,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가슴 깊숙이 쌓여가는 연민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이 그를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은 쓸쓸함이 상당하다. 상실과 체념의 순간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준다. 아직 2권이 남아있어서 앞으로의 전개를 알 수 없고, 지금의 여운 또한 계속 이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오르한 파묵의 <눈>은 앞으로도 매년 눈이 오든 오지 않든 겨울이 되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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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2-29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파묵입니다! 애독자가 많지 않은 책 같아서 참 유감이었는데 곰돌이님이 읽으시니 즐겁기까지 하네요. ㅎㅎㅎ

곰돌이 2025-12-29 08:44   좋아요 1 | URL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듭니다! Falstaff님 서재에서 제 망태기에 담아온 책들이 많아서 덕분에 좋은 작가와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소박하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헤헿
 
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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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면, 유독 말수가 적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는 법이 없는 우리 외할머니의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윤이 반질반질하게 나는 이야기라도 하나 있으면 꺼내볼까 싶지만, 그렇고 그런 얘기밖에 없어 구지레하게 느끼기라도 할까 봐 그러실까, 아니면 백날 떠들어봤자 네가 뭘 알겠느냐는 생각인 걸까. 그저 온화한 미소를 띠시며 조용히 뉴스를 보시다가 “배라 처먹을 놈들!!”이라며 한 번씩 욕을 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게 전부다. 자주 뵈러 가지를 못해서 할 말도 없는 주제에, 우리 할머니도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주시면 오죽이나 좋아라며 욕심을 내는 게 양심에 찔린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개코도 모르면서 떠든다고 된통 혼내실 것 같은 매콤함이 느껴지는 박완서 작가님! 때로는 억센 말투와 날카로운 묘사가 불편하게 다가오고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괜히 마음이 힘들고 머릿속이 복잡함으로 꽉 차 있을 때, 아니꼽고 치사스러운 감정까지 막힌 코를 뚫어주듯 속이 다 시원하게 드러내서 머리털 하나 뽑아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그 ‘따꼼함’이 세상 개운할 때가 있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28)

꿈 많은 소녀에게 단념이란 없었다.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던 글쓰기에 결실을 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 증언의 욕구는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쩌면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가 모두 평생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기를 바라시진 않으셨을까? 색깔로 나누어진 삶 속에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자유를 훼손당하며 하룻밤 사이에도 내 식구가 사라지고 땟거리를 위해 남의 집 담을 넘어야 했던, 그래서 가슴팍에 악다구니만 남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심정인지 더는 아무도 알 수 없기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마음이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나목>에서 자신이 우월감과 열등감 덩어리였다고 고백한 것이 기억난다. 사는 것을 재미나게 살고 싶은 그 마음을 꼿꼿한 자존심으로 눌렀던 이십 대 시절,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때로 잠시 가본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행복했던 순간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땐 이보다 더 큰 시련과 비극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가슴을 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텐데, 세월이 흘러 비통하게도 남편을 잃은 같은 해에 어린 자식마저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중요했기에 외아들 하나 지니지 못했나 하는 수군거림이 슬픔보다 더 큰 수치심으로 다가왔다는 속마음 또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대결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 대 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을 질책보다 더 엄혹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35)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갈 거 있으면 다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도 안 할 거구요.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p. 208)

나는 종교도 없을뿐더러, 인간 외의 존재를 떠올리며 살아본 적도 없었지만, 딱 한 번 신을 향해 간절히 요청해 본 적이 있다. 어느 곳을 향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저 딱 한 번만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동안 없던 믿음이 지금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염치도 없고,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급하면 무언가라도 찾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답을 주기를 기다리다가 ‘바뀔 수 없다는 것에 매달려서 무너지지 말자. 그래, 나의 운명적인 소명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라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라는 물음에 현실에 맞는 답이 되고, 위로가 되어 반걸음 나아갔던 기억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끌어내 주었고, 이것도 또 다른 인연의 형태라 여기며 감정을 주고받아 보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알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되는 가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박완서 작가 본인의 진짜 이야기가 미사여구 하나 없이 진실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글이었다. 펑펑 울고 싶었던 누군가가 그동안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감추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잘만 살다가 괜히 삐끗거리며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 걸까?’라며 불쑥 찾아온 냉기로 시려진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그래, 위로가 필요했다면 이걸로 됐지 싶다. 추운 겨울날 마음의 난로가 ‘띡’ 하고 켜진 듯한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기만 해도 충분하지 싶다. 여운이 오래 남았던 이야기 위주로 적다 보니, 사뭇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야기들만 담겨있나 싶겠지만 그렇진 않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동안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한 편과 장편소설 몇 편만 읽어봤는데, 이번 <기나긴 하루>에 수록된 단편 또한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좋았다고 말하는 게 내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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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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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 첫 문장이 가장 강렬했던 책을 꼽자면,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을 하나 잃었다.”

흑인 여성 ‘다나’가 흑인 노예제도가 있던 과거로 타임슬립 하면서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기만 한 끔찍한 일을 맞닥뜨리는 일상을 너무나도 빨리 원래 살던 곳에서의 삶처럼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모습에 나는 무력한 관찰자가 되어 비통함을 느껴야만 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로 꿀떡꿀떡 읽히도록 해준 이 작품을 경험한 뒤, 평소 SF 소설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도 그녀의 글을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창적인 시각 안에 담긴 가볍지 않은 메시지가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킨>이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마음을 바잡게 만들고, 극강의 공포로 불안에 떠는 주인공과 같은 심정으로 19세기 초 미국 남부 사회를 경험하게 했다면, <블러드 차일드>는 지구를 떠나 또 다른 공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와 접촉하며 살아가거나, 외계 생명체의 번식을 위해 선택된 인간의 몸에 알을 키우는 등 SF적 요소가 훨씬 진하게 느껴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를 드러내어 오히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7편의 단편과 2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소설의 전반적인 주제는 ‘공생’이며, 핵심은 ‘사랑’과 ‘희생’으로 읽힌다.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 파괴된 세상이 등장하는 「말과 소리」는 말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과 읽는 능력을 잃은 사람이 서로의 능력을 시기하며 소통 능력의 한계를 보이고 균형이 무너진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고독감으로 내몰린다. 계속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과 경계를 두고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식 차이, 소통의 구조적 장애 등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도 소통이 어렵고 폭력이 난무하며, 권력을 사용해 지배하고 장악하는 비인간적인 존재를 너무 많이 보았다.

어느 토요일, 사람 많고 냄새나는 버스에 앉아서 사람들이 살 속으로 파고든 내 발톱을 밟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나는 바로 맞은편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남자가 다른 남자가 자기를 쳐다보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원 버스에 끼어 있을 때는 어디로 보아야 할지 알기가 힘든 법인데 말이다. (...) 인류가 어떤 형태로든 주먹을 쓰지 않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익힐 만큼 성장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다. (「말과 소리」, p. 157)

저자는 이 단편을 쓸 당시 인류에 희망도 애정도 없다는 기분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애써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를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이 때론 억지스럽게 느껴지거나 오히려 거부감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증오의 감정에서 더 나아가 성장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던 그녀의 진심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질병, 죽음, 전쟁, 억압, 파괴 등에 대한 관성으로 서서히 두려움마저 잃어가는 동안, 희망 또한 바라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손길이 간절한 사람들을 향해 우울과 슬픔 대신 “괜찮아.”라고 온기와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너진 사회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행복을 찾으려는 생명력마저 잃고, 파괴하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치는 일과 순응하는 일이 본능처럼 익숙해져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세상을 위해 사랑과 구원의 힘을 스스로 끌어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암흑 속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에 갇힌 그 순간, 딱히 방법이 없다는 끔찍함에 허덕이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맞닥뜨려 외면하고 싶은 마음 안에 역겨움과 비통함이 한데 섞여 고뇌에 빠져, 두려움과 혐오스러움이 오가는 사이, 훅하고 들어온 또 다른 감정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면서 이제는 포기하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나약함과 좌절감을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외계 생명체와 이들로부터 보호를 제공받는 대신 특정한 의무를 지닌 인간과의 공생관계를 다룬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는 초반에 호두 한 알을 집어삼키고 소박하게 남아 있는 나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독특함을 따라가야 했다. 이 단편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여러 사람과 공생하며 살아가는 동안 ‘연대의 힘’이 삶을 살아가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는 것과 그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발적 복종이라기보다 사랑을 위한 희생이었으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집단이 연대하여 약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이면마저 담아 현실에 없는 새로운 환경이나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벽을 충분히 허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다른 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탐구하듯 들여다보면서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모습 등 우리의 삶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게 하여 때로는 씁쓸하게, 또 때로는 새로운 희망을 느끼도록 했다.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때는 1957년, 그녀의 나이 열 살 때 처음으로 혼자서 서점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모아둔 5달러를 쥐고 현금 인출기 앞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아이들도 들어가도 되나요?”

실은, 흑인 아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했던 거다. 그런데 출납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들어와도 되지.”

마음속 두려움이 가득한 채 처음으로 가 본 서점에서 미소를 지어 준 출납원 덕분에 열 살짜리 소녀는 마음의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을 테고 말이다. 이처럼 저자의 글은 기괴한 설정과 잔인함으로 가슴을 찢는 고통을 주면서도 출납원의 미소와 같은 따뜻함이 공존한다. 쓸모없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내다 버리듯, 투덜거림과 불평에서 스스로 벗어났던 자신감과 다부짐이 멋있는 사람이었던 그녀가 이야기의 힘을 빌려 인류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놓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아챌 수 있길 바라는 듯, 정형화된 좁은 틀에서 미지의 바깥으로 우리를 끌어낸다. 이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과 또 다른 존재인 ‘커뮤니티’가 충돌하는 대신 서로 이해하고 소통을 도와주려는 이야기를 담은 「특사」의 통역사 ‘노아’의 목소리를 통해, 저자가 독자에게 집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난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어요. 인간 정부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을 말해주고 싶어요. 진실을 말함으로써 당신들과 우리 사이의 평화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요. 내 노력이 길게 봤을 때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 해요. (「특사」, p. 179)

이번에 <블러드 차일드>를 읽으면서 이 지구상에 평화만이 존재하고 모든 인간이 불행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소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바라본 세상은 얼마나 암울했기에 마치 인류에게 남은 것이 종말뿐이라고 여긴 사람처럼 인간과 외계 생명체 간의 공존하는 삶을 소설로 담아야만 했을까…. 사실, 이제는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존재와 미지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삶보다 다툼과 불행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런 마음마저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게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상상이 만들어낸 상황 안에 담긴 철학적인 메시지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만의 강렬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번역이 내용의 이해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가끔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일이 없었다면 훨씬 더 즐기며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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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2-20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매우 섬뜩한데...곰돌이님이 저렇게 쓰시니 재미있을것 같기도 하고....(sf 그닥 안 좋아하는 일인이라서...)

곰돌이 2025-12-20 08:06   좋아요 1 | URL
저도 SF 소설을 즐기진 않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은 SF적 요소가 더 진하기 때문에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킨> 먼저 읽으시길 추천해요! 근데, rainbass님이 안 읽으실 것 같습니다!! 풉 ㅋㅋㅋ

rainbass 2025-12-2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또 그렇게 말하시면 청개구리 심보 발동해서 읽을것 같아요. 😂 😆
 
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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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월급도 형편없는 외딴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는 스물여덟 살의 ‘크리스티네’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사소한 일에도 웃음의 물결이 퍼졌던 진정 자유롭던 시절의 행복이 이제는 새삼스러운 기억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전쟁은 그랬다. 늘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습기 찬 다락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어머니를 아프게 만들었고, 행복을 느꼈던 게 언제였는지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도록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 만들었다. 암흑으로 변한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현실 속에서는 사랑조차 설렘이 사라진 연민의 감정일 뿐,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충족하는 다른 여성들의 모습에 거부감이 들 만큼 그녀는 이미 모든 것에서 지쳐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사는 이모의 초청으로 알프스의 최고급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마음 편하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열차는 출발 신호를 알렸다.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낮게 드리운 저녁, 피로에 지친 여자는 객차의 좌석 한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있었다. (p. 57)

여자의 지난 삶을 알고 난 이후에 이 문장을 읽으니, 마음이 꽤 아려왔다. 차창 너머의 세상을 모호한 감정으로 들여다보다가 익숙하지 않은 평화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어느새 스르르 잠에 든 그녀의 지친 나날들이 멈추지 않는 기차 바퀴 소리와 함께 모두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만 싶다.

희고 깨끗하고 생경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고 날카로워서 여자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라운 광경을 좀더 가까이 보려고 손으로 유리창을 누르자, 창문이 왈칵 열렸다. 찬바람에 날려 객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과 함께 얼음처럼 차고 유리처럼 예리한 공기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여자의 입을 통해 폐까지 들어왔다. 생애 가장 깊고도 깨끗한 호흡이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렸다. 가슴을 부풀리며 들이마신 시원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 정말 대단해!’ (p. 58)

‘클라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럽을 벗어나 미국 땅에 정착한 ‘클레르’ 이모는 어머니와는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일찍이 부의 세계로 건너가 살 수 있었다. 그런 이모의 눈에 방금 막 도착한 크리스티네의 모습은 그저 며칠 동안 좋은 옷 한 벌 없이 지내는 오스트리아의 불쌍한 여자아이였다. 추한 블라우스를 집어 던지고 이모가 건네준 깃털처럼 가벼운 옷을 걸친 크리스티네에게 이모가 사는 세계는 달콤하고 꽃향기가 감도는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하루의 일과를 걱정으로 시작했던 자신이 근심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과 거리를 걷고 있다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현란한 색채를 드러냈던 풍경이 푸른빛이 감돌다 어두워지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던 크리스티네도 금세 모든 걸 잊어버렸다. 어색하던 자리와 무서웠던 사람들 사이에서 말도 많아지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이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불안한 마음도 단숨에 무너진 것이다. 더 이상 모든 행동과 말에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 채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알프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던 크리스티네는 이제 최고급 호텔방에서 발코니를 열고 흥분에 들뜬 채 광활한 풍경을 바라본다. 넓은 방이 이제는 비좁게 느껴진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도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p. 111)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흥미를 느끼며 만끽해 보는 것, 모든 것이 재미있고, 친절을 베풀고픈 마음을 품게 만들고 감탄할 줄 알게 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처음으로 느껴보며, 어디를 둘러봐도 모든 게 낯설고 새롭고 신기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순박함과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친절과 관심에 용기를 갖는 모습을 담은 1부는 읽는 동안 동화 속 소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며 표현하는 일에 서툰 고향 사람들과 달리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크리스티네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란 변화가 어렵기도 하면서 동시에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습관과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크리스티네도 새로운 변화에 금세 익숙해지는 걸 보니 말이다. 삶의 아름다움이 만족과 행복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이 순간에도 분명, ‘나’라는 존재보다는 ‘지금의 나’를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작가로 유명하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가슴속에서만 머물던 생각들을 알아채서 명료하게 설명하는 빈틈없는 예리한 시선이 얄미울 정도다. 지루할 새 없이 책장을 넘기게 해줄 만큼 재미가 있는 데다가 그의 사실주의적 디테일까지 더해지니 읽는 동안에도 크리스티네가 살아온 삶과 단 몇십 일 동안의 경험으로 그녀가 갖게 된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은 나의 기쁨과 흥분이기도 했고, 가슴을 훑는 듯한 고통에 내 속 마음 또한 심란해져 그녀와 함께 ‘나만 생각하자, 나만.’을 읊조려 보기도 했다. 츠바이크의 또 다른 소설인 <초조한 마음>에서도 불의의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소녀 ‘에디트’의 민감함과 그런 에디트를 향한 현역 장교 ‘호프밀러’의 연민 사이에서 오가는 복잡한 감정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오면서 읽는 내내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던 그 감정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만큼 각 인물의 감정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도록 세밀하게 담아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츠바이크의 글솜씨에 감탄하며 읽는 게 아닐까?

한낱 과거로 흘러갈 짧은 추억이 진절머리 나는 오늘 하루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만 버리지 못할 아까운 순간들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하는 크리스티네를 바라보며 우리도 같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쳇바퀴 도는 삶을 살면서 더 앞으로 달리고 싶고 더 높이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깃털 같은 옷을 입고 마음마저 가벼워져 발걸음까지 빨라지다가도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라고 스스로 멈추는 모습에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몸과 마음이 맥박처럼 빨리 뛰는 젊음과 생기로 가득 차야 할 이십 대의 여성에게 말이다. 이제서야 육체적 고통에서 조금 벗어나 ‘깨어있음’을 느끼는 크리스티네에게 말이다. 이처럼 츠바이크는 연민의 감정을 잘 다루는 것 같다. 힘든 삶 속에서 우리가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었을 때 먼저 자신을 연민의 감정으로 들여다보고 돌봐야만 타인에게도 같은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층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원치 않는 일을 겪으며 산다. 정신력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태도가 스스로에게 원동력이기보다는 고문이 될 만큼 힘에 부치고 뜻대로 안 되는 상황에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억지로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닐 때가 있다. 단순히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대상이 되어 꼼짝 못 하고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의 소박한 안녕을 원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질 수 있길 욕망하는 것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괴로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젊고, 우리가 버리려고 하는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 (p. 388)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내다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고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감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마음을 괴롭힌다. 앞으로도 창문을 열고 눈을 뜨면 같은 간판에 같은 사람들, 같은 절망과 같은 회의감을 느끼며 감옥 같기만 한 우체국 안에서 원을 그리는 시계처럼 사는 삶이 앞으로 얼마나 변화할지 아닐지, 그것은 모르겠다. 다만, 분명 바뀌지 않은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삶에 묵힌 공기를 환기시키는 날이 올지 또한 모른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츠바이크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결말을, 크리스티네를 향한 내 진심으로 채워보고 싶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우리 함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보자. 살다 보면 어두운 거리가 차츰 희미하게 빛을 내며 그동안 보아온 것과 다른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너무 감상적인 태도인 걸까? 그렇다 해도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계속해서 살아내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알 때까지 계속해서 살아보는 거다.

내가 가진 생각이 해답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와닿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가치관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면,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사는 똑같이 위태로운 인간인 내가 ‘틀림없이’ 좋은 일과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듣고 읽으려는 마음가짐만은 잃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실은, 그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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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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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이 여러 사람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어버린 퍼즐 블록의 한 자리를 얼른 새로운 블록으로 채워 완성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이기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의 잔인함을 톨스토이는 냉철한 시선으로 담았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였다. 성공과 출세가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주변에는 상류층 사람들만 존재했기에 그토록 원하는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며, 평범한 시민의 시선으로 그의 삶은 분명 꽤 괜찮았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껴 아내에게 등 떠밀려 찾게 된 병원에서 만난 의사에게 법정에서 짓고 있던 자신의 익숙한 표정과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뻔한 절차를 진행하며 뻔한 대답을 요구하는 근엄한 표정 말이다. 처음으로 타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에 이어,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안락한 삶을 살았던 그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이의 입장에 서서 들여다봤다. 죽음이라는 공포감이 만들어낸 암흑세계 안에서 꺼내줄 수 없는 무력함과 절망감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기를 다루듯이 대해야 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예민해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겪어봤거나 겪고 있거나 겪게 될 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로하려 다가간다는 것은 사실 참 힘들다.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면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은 뭐가 이렇게 신이 났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주춤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하면 환자 취급하는 게 서글프고 짜증스럽게 느껴질까 봐 또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그를 세심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 앞에서 그깟 오페라 망원경을 챙겼는지, 그리고 누가 그걸 어디로 치웠는지 따위의 논쟁이나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도 돈과 명예로 해결할 수 없는 병을 얻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삶의 끝자락 혹은 파멸의 경계에 와서야 사소한 것의 소중함,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처럼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만큼 자신의 존재는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긴 했어도 제법 만족스럽게 살아갔던, 적당히 흘러가는 삶 속에서 느낀 행복한 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그를 괴롭히며 생의 연장을 요구했다. 이런 이반 일리치의 심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몸과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존엄을 잃는 그 순간에 내가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깊은 고뇌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별생각을 다 해봤지만, 도무지 어디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가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이런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버리게 된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접했다. 왜인지 그의 이름만으로도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신화 속 인물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과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었고, 현실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완성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들어서 입문작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서사 구조가 간단하지만, 날카로울 만큼 사실적이기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묵직한 뜨거움이 올라오면서 내 목을 괴롭혔고, 책을 핑계 삼아 눈물을 확 쏟아내고 싶을 만큼 비애를 느껴야만 했다.

이 소설은 죽음을 의식으로부터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몇 분, 몇 시간 만이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잠을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단계까지 와버린 이반 일리치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집요하게 자신의 삶에 몰입하는 동안 얻게 된 깨달음을 알려준다. 자신이 떠난 뒤의 세계를 상상하며 존재의 공허가 만들어낸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다가도 오늘은 그럭저럭 덜 아픈 몸 덕분에 마음까지 밝아져 희망을 얻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되뇌고 또 되뇌었던 수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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