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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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 생기는 변화가 당연하여 눈도 녹고 꽃들이 꽃눈을 틔우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씨에 눈이 떠져 하루가 시작될 테지만 실은 당연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저자는 폭력이 흘러넘치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아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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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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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저번에 읽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주인공 무어가 시작부터 넉살 좋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잘 풀어내 주며 이끌어줘서 그의 세계로 입장하는 것이 수월해 참 재미있게 읽었다.
<광대 샬리마르>는 광대를 상징하는 듯, 발가락이 밧줄을 단단히 움켜쥔 표지가 인상적이다. 핏줄 선 발등이 주는 강렬함에 압도된 건지 멈칫하게 하여 내심 매콤한 후추향 풍기는 익살스러운 무어를 찾고 싶게 만들었다.

그런데 ‘올가’라는 인물이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자칭 감자 마술을 이용하는 마녀의 후예라고 하는 어딘가 청승맞아 보이기도 한 이 러시아인 여성이,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감자를 손에서 빙빙 돌리며 이런저런 그간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P. 25) “우리는 그런 혼란 속에서 살아남으려니 당연히 생쥐처럼 약삭빨라야 했지요. 그렇잖아요? 물론 남자들은 다른 곳으로 떠날 꿈만 꾸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도 한곳에 머무르지를 않아요. 자기 삶은 자기 것이라는 식이야. 그냥 왔다 가는 거예요. 전쟁은 또 어떻고. 남편을 잃었지요. 슬픈 얘기니까 더 묻지 말아 주세요.”

아무도 물어본 사람은 없지만, 암튼 그녀는 더 묻지 말아달라더니 책 한 페이지 분량을 다 채울 만큼 한숨을 쏟아냈다.
잃어버린 행복과 평화의 나라를 떠올리며 이제는 지는 해가 돼 버린 자신의 속 얘기를 꺼낸 올가의 이기죽거리는 모습 뒤로, 앞으로 펼쳐질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듯하다.


어머니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계 지역인 카슈미르 출신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없는 ‘인디아’는 미국대사 ‘막스 오퓔스’가 쉰일곱에 얻은 늦둥이 딸이다. 호색한인 아버지의 영향인지 인디아도 앙큼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운전사로 들어온 카슈미르 출신인 ‘샬리마르’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거다. 물론, 그 눈빛 안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출신이라는 것이 그녀를 자극한 요인 중 하나일 테지만 인디아의 가슴 속 들끓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까 감자를 손에서 빙빙 돌리던 올가는 인디아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인이다. 얇지 않은 책을 읽을 때, 잠시 부담을 덜어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큰 것 같다. 읽는 재미를 더 해주는 올가가 시작을 잘 열어줬다. 심지어 모성의 향기가 그리울 인디아에게 심적으로 의지가 되어주는 고마운 인물이다. 그런 의미로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녀를 가장 먼저 소개했다.

책장을 더 넘겨보니,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은 인디아의 아버지 막스 오퓔스.

(P. 62) 억누르려고 최대한 애썼음에도 막스의 손에 들린 일정표가 떨리기 시작했다.

핏빛으로 번진 바닥에 나뒹굴어질 자신의 운명을 예상했을까.
하나뿐인 딸이 보는 앞에서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운전사 샬리마르에게 칼에 찔려 숨진다.

어떤 원한이 있었던 걸까.

시간을 거슬러 카슈미르의 계곡마을 파치감으로 가 본다.
각자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 나온 사람들이 자연이 아낌없이 베푸는 은혜를 실컷 누릴 수 있는 이곳에서 쇼, 연극, 희극, 줄타기 등의 공연을 하는 배우로서 요리사로서 터를 잡고 지냈다.

이 마을에 사는 힌두교 집안의 딸 ‘부니’와 무슬림 집안의 아들 ‘노만’은 사랑을 키워나갔다. 파치감에는 모든 게 다 뒤섞여 있는 곳이라 그 어떤 차이도 뛰어넘는 공통의 끈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종교가 방해되어 양측 간 우호 협정이 붕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를 뿐이다.

달을 못 채우고 태어났지만 뭐든지 남보다 앞섰고 운명에 맞서려는 의지가 강했던 부니는, 노만에게 나무 꼭대기까지 데려다 줄 날개와 같은 존재였다. 노만과 부니의 사랑 못지않은 사랑이 또 있다.
보석과도 같은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도 얼마나 절절한지, 이따금 코끝 찡하게 했다.

(P. 101) 아버지의 손바닥은 부자의 손처럼 부드럽거나 푹신하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고 노련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아는 손이었고, 앞길에 놓인 고난을 모르고 살도록 무조건 감싸주지는 않는 손이었다. 그러나 억셀 뿐 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귀한 사랑을 받으며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부드러운 성품을 타고난 ‘광대 샬리마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노만이, 도대체 어떤 연유로 몇 해가 지나 암살자가 되어버린 걸까. 착잡해져 온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을 두고 충돌을 벌였다. 이 지역에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계선이 국경선이 아니라 통제선이었다는 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던 것.
역사와 종교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그어버린 선 때문에 충돌은 끊임이 없고, 마을 사람들은 경멸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소문을 주고받으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도시의 생활은 꿈에서조차 꿔본 적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소문 속 강간, 방화, 살인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아비규환이었을 것이다.

한편, 부니는 채워지지 않는 부정한 욕망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늘 충동적이었던 그녀는 굶주린 갈망이 채워지길 바라며 벗어나길 꿈꾼다.
파치감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노만으로부터.

곧 그녀의 허기를 채워줄 한 남자가 등장한다.
특별공연을 하라는 명령과 함께 정부가 파견한 사절이 카슈미르에 왔고, 미국 대사인 막스 오퓔스가 수행단과 잔칫상을 즐기고, 축제를 즐기러 오게 된 것이다.

유부남이었던 막스 오퓔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공연 속 파치감 최고의 무희 부니의 예술적 재능에 감탄하며 그녀의 영혼을 꿰뚫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고, 노만의 아내였던 유부녀 부니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막스 오퓔스의 과거가 참 다채롭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인쇄업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독일이름을 가진 프랑스인으로서 동네에서도 유명한 유대인 집안이었다. 부교수로 일하면서 시간을 쪼개 아버지의 일까지 도왔던 그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과거까지 들여다보니, 어쩌다가 또 이 사람은 미래의 난봉꾼이 되어 잔혹한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 걸까 싶다.

(P. 255) “만사가 다 지랄맞아. 나치 놈들은 보나마나 작업장을 총 만드는 데 써먹으려 할 거야. 개새끼들.”

어둠이 팽팽해지고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던 시기에 부모님을 지켜내지 못했던 막스 오퓔스는 애국주의를 드러내 프랑스를 독일로부터 되살려내고자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종사가 되어 전쟁 영웅이 되고, 반들거리는 광택을 내뿜는 신세계 미국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복수심에 불타 폭파기술을 배우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죽음의 기차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탈출시키고 데려오는 역할까지, 레지스탕스로서의 활동 업적이 많았던 그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쓰러져간 동료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터지는 폭탄과 탄내 풍기는 삶을 거쳐 연합국 스파이였던 영국인 ‘그레이 랫’과 결혼해 미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이어나간다.

시간은 흘러 막스 오퓔스는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끝난 직후 인도의 대사직을 제안받는다.

그는 욕망의 명령에 따르듯 뱀처럼 꿈틀대는 경계선이 그어진 불안정한 중간지대 카슈미르로 향했고, 이 선택이 인도와 미국 간 외교 분쟁 못지않은 해골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부니와의 만남을 성사시킨 것이다.

만약, 막스 오퓔스가 수많은 일을 견디고 살아남은 아내와 균형 잡힌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더라면, 샬리마르 칼의 칼집이 되는 불행을 피하고 막스 오퓔스가 안겨주는 선물 속에 담긴 편의주의에 뱃속 지방만 늘려가며 킬킬대는 부니의 파멸을 막을 수 있었을까.

카슈미르에 그어진 경계선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줄을 당기며 유혹하고 배신하는 동안 단순한 행복의 열망은 그을음만 냈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악몽이었을 비극적인 삶과 끝나지 않은 현실의 불행을 담은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대단치 않은 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나의 소박한 삶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계속 아른거리는 문장이 있다.

(P. 143) 삶은 계속된다. 눈은 녹고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 책 속에서는 부인을 잃은 남편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며 용기 잃지 말고 살아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말이었는데, 나에게는 겸허한 마음을 들게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지만, 자연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채워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생기는 변화가 당연하여 눈도 녹고 꽃들이 꽃눈을 틔우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씨에 눈이 떠져 하루가 시작될 테지만 실은 당연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삶이 준 시련에 마음마저 염세적으로 변하여 모든 것이 근사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는 말처럼 와 닿지 않고 눈을 씻고 다시 들여다보고, 귀를 씻고 다시 들어봐도 여전히 그 말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 할지라도, 위협과 위험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이가 우리에게 삶은 계속되고 눈은 녹고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어떻게 허투루 들을 수 있을까.

아직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나로서는 울림을 주는 메시지를 스치듯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보낼 수가 없다.

평화로운 공존이 환상처럼 여겨질 만큼 비극을 머금은 의구심 드는 현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서도 나는 ‘희망’을 끄집어내고 싶다.
살만 루슈디는 흔적도 남지 않은, 이제는 카슈미르 지도 상에만 존재하는 파치감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며, 폭력이 흘러넘치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아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간 것 같다.

그리고,

끊임없이 종교, 정치, 역사, 예술 등을 다루며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P. 372) “그러지 말고 똑바로 앞을 보려고 노력해보세요. 여기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봐요.”

과거에 매달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파국으로 이끄는 광대 샬리마르를 향한 외침 그 안에는 살만 루슈디의 간절함이 담겼다.

이 외침은 뚜렷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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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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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아갈 수 없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행복과 불행이란 것의 극명한 대비를 느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이 불행한 현실이 앞으로도 자신을 옥죄고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만큼은 안다.
세상과 사람이 그걸 분명하게 알려준다.

나오키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어떻게 배를 채울 수 있을까 생각한다. 구린 냄새를 풍기는 술집 전단지 한 장도 그냥 넘겨볼 수 없다. 그런 나오키를 담임 선생님인 우메무라가 한 식당에 데려가 저녁을 사주며 그 식당에서 일하기를 권한다.

(P. 61) “점장하고 아는 사이야.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만 아르바이트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네가 괜찮다고 해야겠지만.”

생계와 연관된 돈벌이라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을 나오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며, 의사를 물어봐 주는 선생님의 세심함이 감사하다. 스치듯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존중’의 마음을 나오키는 처음 느꼈봤을 것 같아서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오키에게 남은 식구는 형 츠요시 한 명 뿐이다. 형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죽도록 일만 하다가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돌아가시게 된 어머니 대신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대학을 가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이 고스란히 이어받아 동생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모든 게 다 닮아있었다.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이일저일 해 온 게 화근이었던 걸까.
몸이 망가져 츠요시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삿짐센터 일을 하다가 알게 된 온화한 얼굴로 넉넉하게 사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조금 훔친다고 해서 타격을 입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같은 사람을 용서해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오키는 형을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경찰이다.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흐르고, 다음 날 텔레비전에서 낯선 표정을 한 형의 모습 밑으로 ‘홀로 사는 부유층 여성 살해’라는 자막이 보인다.

불행하게도 형의 죄는 연좌제가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만으로도 형벌과 다를 바 없는 나오키의 인생은 누군가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다정하게 불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고, 알 수 없었던 삶의 방향은 불행을 가리켰다.

‘형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다 끔찍하기만 하구나’라는 생각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 되려 고통이었을 나오키는 형 면회 가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나 하나 먹여 살리겠다고 자신의 몸을 혹사시킨 형을 원망하는 것도 어렵다. 그렇게 자신과 형 생각을 하는동안 정작 피해자 생각은 못했다.
그저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다.

나오키에게 행복은, 차츰 열리다가 닫히는 문처럼 말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 같아도 살다 보면 실낱같은 빛줄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남들과 똑같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그 순간만큼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고 보통의 사람으로 사는 기분을 느껴보기도 한다. 그 당연한 일을 즐거운 일로 여긴다는 게 서글플지도 모르지만,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살아가는 자체만으로 나오키는 더 바랄게 없을 거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응원을 받을지도 모른다.
알다가도 모를 일처럼 악인으로 여긴 이가 호인이 되는 상황에 설지도 모른다. 물론 그 또한 누군가에게만 주어지는 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을 나오키에게서 앗아갈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P. 220) 나오키는 자신이 묘한 희망을 품게 되는 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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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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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많은 사람과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마음을 느꼈고, 불분명한 길 위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외로움까지 모두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신념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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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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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만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겐 그게 가장 최선이었다.
다른 세계를 생각해 볼 여력 조차가 없기도 했고.

그런 내가 박솔뫼 작가님 책을 읽으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상상도 마음껏 해 보고,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대로 등장인물과 내 식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가 보는 재미를 느껴보곤 한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은 후에도 애정이 무척 많이 쌓인다.

희한하다.
힘있게 화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기운 북돋아 주는 이 하나 등장하지 않는데 왠지 기운이 난다. 심지어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그 상상 속 일들을 들려주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를 발견하면 하나도 헤매지 않고, 하나도 외롭지 않고, 하나도 희미하지 않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기억하려고 애쓴다고 뭐라 하는 이 없고, 그저 ‘우리 다 똑같아’라며 곁을 내 주기에 내 마음은 그 무뚝뚝한 다정함을 향한다.

(P. 13) 1월 1일의 새벽 아직 덜 마른 머리를 빳빳한 침대 위에 누이며 모든 멀고 생생한 이들이 잠깐 온양에서 잡힐듯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다소 엉뚱한 상상이라고 해야 될까?

후지산에 있는 주카이숲에 가기로 한 친구들이 전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안 가기로 했다는데, ‘나’는 친구들이 숲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과는 ‘다른’상황에서 사는 모습을, 그것도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말이다.
이 책의 표제작 「우리의 사람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친구들을 향한 애정 섞인 평범한 상상일 뿐인데,
왜 인지 아련함을 느꼈다.
계속 ‘나’를 따라가보면 알 수 있으려나.


‘나’는 새해를 맞이 한 후지노에서 ‘사쿠라이 다이조’라는 텐트 연극을 하는 연출가이자 연극인을 만난다.
극장이 아니라 텐트를 치고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면 텐트를 걷고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극장을 다니며 공연을 보는 시대에 텐트공연을 하는 이유가 뭘까.

1970년대 우치게바(내부 투쟁)로 친구들을 잃은 그가 학생운동의 여파로 버려진 곳 탈락된 곳을 향해 텐트를 치며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떠나기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나아가 광주로 가 한국 역사까지 체험했다고 한다.

사회 격변기에 한 장의 천 조각으로 외부와 내부를 갈라놓고 텐트 극을 열었던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1980년 그날의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남들과는 다르지만 분명한 신념을 지닌 사쿠라이 다이조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모습에 여러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P. 17) 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

저자의 소설에는 잊히고 있는 잊지 말아야 할 사람, 사건, 장소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반복’의 이유가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더 재미있게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한 ‘나’의 모습과 텐트를 치고 공연이 끝나면 원래 없었다는 듯이 텐트를 철거하고 또다시 텐트를 치는 사쿠라이 다이조의 공연까지 어딘가 맞닿아 보였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없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오래도록 많은 사람과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는 마음, 지치지만 지치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외로움까지 모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P. 16) “매번 할 수 있을까? 이걸 왜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한다. 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 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항쟁하다가 희생되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함으로써, ‘기억하는 마음’이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련함을 느꼈나 보다.

‘나’와 사쿠라이 다이조와의 만남은 의미가 컸을 것 같다.
마음의 어지러움이 있어 고민의 길에 서 있을 때, 그런 나를 다시 움직이도록 이끌어주는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힘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 ‘드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땐, 모든 게 불투명할지라도 그 안에 ‘나’의 강한 신념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우리의 사람들」이었다.

(P. 31) 크고 울창한 나무들 너무나 선명한 푸른색들 모두는 정해진 길을 따라 걷지만 저 너머에는 누구도 찾기 힘든 곳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막연히 알 수 있었다.


내겐 모든 말이 자연스러움으로 여겨졌다.
“나 이제부터 기억할 거야. 생각할 거야”라고 선전포고를 하고 기억하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건널목의 말」의 ‘나’가 호텔에서 정리된 침대에 누웠을 때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우리도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중 그 사이사이 ‘작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릿속으로 후지산에도 가고 광주극장도 가고 부산호텔도 가니까 말이다.

생각이 많은 내게 ‘나’의 말이 적당한 안정감을 줬다.

(P. 52) 따라붙는 말에 대한 불안들도 일단은 간단하게나마 나는 이런 것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어. 라고 쓰고 그래도 왜인지 떨치지 못한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을 땅에 묻는 일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에 대해서도 쓴다. (중략) 말을 땅에 묻고 그 말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낙엽이 썩어 사라지듯 그렇게 사라집니다.

지금 현재 나에게 있어 ‘사라지는 말’이 주는 의미는 긍정이다.
사람의 부재가 준 고통이 다른 어느 것보다 크지 않아서인지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말을 머릿속에 채워 이고지고 살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무겁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불안의 말을 땅에 묻고,
내가 좋아하는 그 계절이 오길 기다려본다.

알 수 없는 내일을 기다리며, 어딘가에 있을 내가 지금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나일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P. 55) 대부분의 꿈들은 기억이 나지 않고 나는 적어도 나는 내가 있었다면 내가 했다면 좋았을것에 대해 그것은 허황된 꿈과 바람이지만은 않고 사실 했을 법하지만 왜인지 아련한 것들에 관해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월이 오면 나는 일을 하고 걷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갑니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은 꿈을 기록하는 것과 늘 연결되게 됩니다.


「농구하는 사람」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하는 농구경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가 등장한다.
그들끼리 아는 경기 중의 예의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늘 운동장에서만 뛰어서 러너의 예의라는 것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에 읽은 최인훈의 「광장」을 떠올린다. 4.19에 관한 생각이 담긴 작가의 말을 읽고 상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눈으로 보고 겪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때를 떠올린다는 것이 어쩌면 아득하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농구의 대해 아는 게 없는 ‘나’가 커다한 농구공을 만져보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지 못한 손으로 그때의 분위기를 더듬거려볼 뿐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생각한다.
그때의 사람들도 지금 우리의 사람들처럼 스치듯 지나간다.

(P. 73) 쉽거나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고받으며 걸었다. (중략) 가끔 뛰고 뛰다보면 농구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고 축구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고 천천히 걷는 사람 맨손 운동을 하는 사람 우리는 모두 잠깐씩 스쳐 지나간다.


「이미 죽은 열두 명의 여자들과」는 끔찍한 현실을 담았다.

다섯명의 여자들을 강간 살해한 김산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미 죽은 여자들과 그와 범행수법이 비슷한 살인자에게 살해당한 일곱 명의 여자들까지, 총 열두 명의 여자들이 그를 다시 죽인다.

그에게 죽음의 고통을 반복하다가 서서히 옅어지는 자신을 느끼며 사라진 여자를 표현한 문장들에 목이 막혔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문이 막힐 만큼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서도 아니고, 죽은 사람이 현실도 아닌 복수를 백번 천 번 한들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도 아니었다.

너무 원해서다. 너무 원해서 목이 막혔다.

어두운 밤거리를 뚫고 집으로 무사히 들어온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운이 좋아서 아무 탈 없이 돌아오게 된 것으로 여겨질 만큼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너무 공감하며 읽었다.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온몸이 굳는 긴장과 극도의 공포감으로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쿵 하고 맥없이 풀려버린 다리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가슴과 함께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던 일을 나도 경험했기에 소설로써만 읽히지 않았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서로서로 목격자가 되어 보호하는 눈빛을 보내도 이제는 신경이 예민해져 눈빛의 의도도 불분명하게 느끼게 돼 버렸다.
그럼에도 보호의 눈빛과 서로의 팔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주는 그 손길이 필요하다.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택시 안과 밤거리에 겁을 먹었다는 ‘나’의 말에 나 역시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내 잘못도, 당신 잘못도 아닌데.

(P. 106) 이미 죽은 자들이 말한 것은 나는 그런 것이 전부 남아 있을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풀과 가지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은 것은 나중에 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것이며 다른 길로 걷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누구를 살릴 수도 있다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숨을 한 번 고르고 마음도 추슬러 보라는 듯이 가붓하고, 즐기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다.
괜히 이곳저곳 다니며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만나고 싶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어지게 만드는 문장을 만나, 생각지 못한 산뜻한 미소도 지어볼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이 책보다 먼저 장편으로 만나 본 「미래 산책 연습」은 내가 무척 애정 하는 작품이라, 또 만나서 반가웠다.

보통의 일상 그 속에서도 발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산책하듯이 세상을 들여다보며 눈에 들어오는 사람, 건물, 풍경 속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기억해주는 따뜻함이 참 좋았다.
다 읽고 나니 장편으로 만났던 <미래 산책 연습>에 ‘수미’도 보고 싶고, ‘나’도 보고 싶고, ‘윤미언니’도 보고 싶어진다.


나는 이른 새벽 혹은 늦은 밤, 작은 조명 하나 켜고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책 속의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게 전부인데, 박솔뫼 작가님 책을 읽을 때면, 이 사람들의 대해 당장에라도 움직이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조금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리뷰가 길어진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얼른 마쳐야겠다.

나는 내 삶 사는 거에만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서 내 가족 아닌 누군가를 떠올리고, 또 그들을 위한 다른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조차 생각도 못 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나마저도 잠시 이들과 함께하는 동안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고, 기분 좋은 뿌듯함을 느껴봤다.

감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만져질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P. 176)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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