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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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면, 유독 말수가 적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는 법이 없는 우리 외할머니의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윤이 반질반질하게 나는 이야기라도 하나 있으면 꺼내볼까 싶지만, 그렇고 그런 얘기밖에 없어 구지레하게 느끼기라도 할까 봐 그러실까, 아니면 백날 떠들어봤자 네가 뭘 알겠느냐는 생각인 걸까. 그저 온화한 미소를 띠시며 조용히 뉴스를 보시다가 “배라 처먹을 놈들!!”이라며 한 번씩 욕을 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게 전부다. 자주 뵈러 가지를 못해서 할 말도 없는 주제에, 우리 할머니도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주시면 오죽이나 좋아라며 욕심을 내는 게 양심에 찔린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개코도 모르면서 떠든다고 된통 혼내실 것 같은 매콤함이 느껴지는 박완서 작가님! 때로는 억센 말투와 날카로운 묘사가 불편하게 다가오고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괜히 마음이 힘들고 머릿속이 복잡함으로 꽉 차 있을 때, 아니꼽고 치사스러운 감정까지 막힌 코를 뚫어주듯 속이 다 시원하게 드러내서 머리털 하나 뽑아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그 ‘따꼼함’이 세상 개운할 때가 있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28)

꿈 많은 소녀에게 단념이란 없었다.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던 글쓰기에 결실을 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 증언의 욕구는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쩌면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가 모두 평생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기를 바라시진 않으셨을까? 색깔로 나누어진 삶 속에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자유를 훼손당하며 하룻밤 사이에도 내 식구가 사라지고 땟거리를 위해 남의 집 담을 넘어야 했던, 그래서 가슴팍에 악다구니만 남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심정인지 더는 아무도 알 수 없기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마음이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나목>에서 자신이 우월감과 열등감 덩어리였다고 고백한 것이 기억난다. 사는 것을 재미나게 살고 싶은 그 마음을 꼿꼿한 자존심으로 눌렀던 이십 대 시절,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때로 잠시 가본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행복했던 순간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땐 이보다 더 큰 시련과 비극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가슴을 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텐데, 세월이 흘러 비통하게도 남편을 잃은 같은 해에 어린 자식마저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중요했기에 외아들 하나 지니지 못했나 하는 수군거림이 슬픔보다 더 큰 수치심으로 다가왔다는 속마음 또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대결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 대 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을 질책보다 더 엄혹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35)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갈 거 있으면 다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도 안 할 거구요.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p. 208)

나는 종교도 없을뿐더러, 인간 외의 존재를 떠올리며 살아본 적도 없었지만, 딱 한 번 신을 향해 간절히 요청해 본 적이 있다. 어느 곳을 향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저 딱 한 번만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동안 없던 믿음이 지금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염치도 없고,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급하면 무언가라도 찾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답을 주기를 기다리다가 ‘바뀔 수 없다는 것에 매달려서 무너지지 말자. 그래, 나의 운명적인 소명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라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라는 물음에 현실에 맞는 답이 되고, 위로가 되어 반걸음 나아갔던 기억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끌어내 주었고, 이것도 또 다른 인연의 형태라 여기며 감정을 주고받아 보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알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되는 가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박완서 작가 본인의 진짜 이야기가 미사여구 하나 없이 진실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글이었다. 펑펑 울고 싶었던 누군가가 그동안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감추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잘만 살다가 괜히 삐끗거리며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 걸까?’라며 불쑥 찾아온 냉기로 시려진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그래, 위로가 필요했다면 이걸로 됐지 싶다. 추운 겨울날 마음의 난로가 ‘띡’ 하고 켜진 듯한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기만 해도 충분하지 싶다. 여운이 오래 남았던 이야기 위주로 적다 보니, 사뭇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야기들만 담겨있나 싶겠지만 그렇진 않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동안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한 편과 장편소설 몇 편만 읽어봤는데, 이번 <기나긴 하루>에 수록된 단편 또한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좋았다고 말하는 게 내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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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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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 첫 문장이 가장 강렬했던 책을 꼽자면,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을 하나 잃었다.”

흑인 여성 ‘다나’가 흑인 노예제도가 있던 과거로 타임슬립 하면서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기만 한 끔찍한 일을 맞닥뜨리는 일상을 너무나도 빨리 원래 살던 곳에서의 삶처럼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모습에 나는 무력한 관찰자가 되어 비통함을 느껴야만 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로 꿀떡꿀떡 읽히도록 해준 이 작품을 경험한 뒤, 평소 SF 소설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도 그녀의 글을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창적인 시각 안에 담긴 가볍지 않은 메시지가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킨>이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마음을 바잡게 만들고, 극강의 공포로 불안에 떠는 주인공과 같은 심정으로 19세기 초 미국 남부 사회를 경험하게 했다면, <블러드 차일드>는 지구를 떠나 또 다른 공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와 접촉하며 살아가거나, 외계 생명체의 번식을 위해 선택된 인간의 몸에 알을 키우는 등 SF적 요소가 훨씬 진하게 느껴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를 드러내어 오히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7편의 단편과 2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소설의 전반적인 주제는 ‘공생’이며, 핵심은 ‘사랑’과 ‘희생’으로 읽힌다.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 파괴된 세상이 등장하는 「말과 소리」는 말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과 읽는 능력을 잃은 사람이 서로의 능력을 시기하며 소통 능력의 한계를 보이고 균형이 무너진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고독감으로 내몰린다. 계속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과 경계를 두고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식 차이, 소통의 구조적 장애 등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도 소통이 어렵고 폭력이 난무하며, 권력을 사용해 지배하고 장악하는 비인간적인 존재를 너무 많이 보았다.

어느 토요일, 사람 많고 냄새나는 버스에 앉아서 사람들이 살 속으로 파고든 내 발톱을 밟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나는 바로 맞은편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남자가 다른 남자가 자기를 쳐다보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원 버스에 끼어 있을 때는 어디로 보아야 할지 알기가 힘든 법인데 말이다. (...) 인류가 어떤 형태로든 주먹을 쓰지 않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익힐 만큼 성장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다. (「말과 소리」, p. 157)

저자는 이 단편을 쓸 당시 인류에 희망도 애정도 없다는 기분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애써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를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이 때론 억지스럽게 느껴지거나 오히려 거부감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증오의 감정에서 더 나아가 성장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던 그녀의 진심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질병, 죽음, 전쟁, 억압, 파괴 등에 대한 관성으로 서서히 두려움마저 잃어가는 동안, 희망 또한 바라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손길이 간절한 사람들을 향해 우울과 슬픔 대신 “괜찮아.”라고 온기와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너진 사회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행복을 찾으려는 생명력마저 잃고, 파괴하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치는 일과 순응하는 일이 본능처럼 익숙해져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세상을 위해 사랑과 구원의 힘을 스스로 끌어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암흑 속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에 갇힌 그 순간, 딱히 방법이 없다는 끔찍함에 허덕이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맞닥뜨려 외면하고 싶은 마음 안에 역겨움과 비통함이 한데 섞여 고뇌에 빠져, 두려움과 혐오스러움이 오가는 사이, 훅하고 들어온 또 다른 감정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면서 이제는 포기하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나약함과 좌절감을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외계 생명체와 이들로부터 보호를 제공받는 대신 특정한 의무를 지닌 인간과의 공생관계를 다룬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는 초반에 호두 한 알을 집어삼키고 소박하게 남아 있는 나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독특함을 따라가야 했다. 이 단편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여러 사람과 공생하며 살아가는 동안 ‘연대의 힘’이 삶을 살아가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는 것과 그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발적 복종이라기보다 사랑을 위한 희생이었으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집단이 연대하여 약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이면마저 담아 현실에 없는 새로운 환경이나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벽을 충분히 허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다른 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탐구하듯 들여다보면서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모습 등 우리의 삶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게 하여 때로는 씁쓸하게, 또 때로는 새로운 희망을 느끼도록 했다.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때는 1957년, 그녀의 나이 열 살 때 처음으로 혼자서 서점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모아둔 5달러를 쥐고 현금 인출기 앞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아이들도 들어가도 되나요?”

실은, 흑인 아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했던 거다. 그런데 출납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들어와도 되지.”

마음속 두려움이 가득한 채 처음으로 가 본 서점에서 미소를 지어 준 출납원 덕분에 열 살짜리 소녀는 마음의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을 테고 말이다. 이처럼 저자의 글은 기괴한 설정과 잔인함으로 가슴을 찢는 고통을 주면서도 출납원의 미소와 같은 따뜻함이 공존한다. 쓸모없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내다 버리듯, 투덜거림과 불평에서 스스로 벗어났던 자신감과 다부짐이 멋있는 사람이었던 그녀가 이야기의 힘을 빌려 인류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놓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아챌 수 있길 바라는 듯, 정형화된 좁은 틀에서 미지의 바깥으로 우리를 끌어낸다. 이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과 또 다른 존재인 ‘커뮤니티’가 충돌하는 대신 서로 이해하고 소통을 도와주려는 이야기를 담은 「특사」의 통역사 ‘노아’의 목소리를 통해, 저자가 독자에게 집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난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어요. 인간 정부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을 말해주고 싶어요. 진실을 말함으로써 당신들과 우리 사이의 평화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요. 내 노력이 길게 봤을 때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 해요. (「특사」, p. 179)

이번에 <블러드 차일드>를 읽으면서 이 지구상에 평화만이 존재하고 모든 인간이 불행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소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바라본 세상은 얼마나 암울했기에 마치 인류에게 남은 것이 종말뿐이라고 여긴 사람처럼 인간과 외계 생명체 간의 공존하는 삶을 소설로 담아야만 했을까…. 사실, 이제는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존재와 미지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삶보다 다툼과 불행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런 마음마저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게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상상이 만들어낸 상황 안에 담긴 철학적인 메시지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만의 강렬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번역이 내용의 이해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가끔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일이 없었다면 훨씬 더 즐기며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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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2-20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매우 섬뜩한데...곰돌이님이 저렇게 쓰시니 재미있을것 같기도 하고....(sf 그닥 안 좋아하는 일인이라서...)

곰돌이 2025-12-20 08:06   좋아요 1 | URL
저도 SF 소설을 즐기진 않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은 SF적 요소가 더 진하기 때문에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킨> 먼저 읽으시길 추천해요! 근데, rainbass님이 안 읽으실 것 같습니다!! 풉 ㅋㅋㅋ

rainbass 2025-12-2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또 그렇게 말하시면 청개구리 심보 발동해서 읽을것 같아요. 😂 😆
 
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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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월급도 형편없는 외딴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는 스물여덟 살의 ‘크리스티네’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사소한 일에도 웃음의 물결이 퍼졌던 진정 자유롭던 시절의 행복이 이제는 새삼스러운 기억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전쟁은 그랬다. 늘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습기 찬 다락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어머니를 아프게 만들었고, 행복을 느꼈던 게 언제였는지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도록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 만들었다. 암흑으로 변한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현실 속에서는 사랑조차 설렘이 사라진 연민의 감정일 뿐,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충족하는 다른 여성들의 모습에 거부감이 들 만큼 그녀는 이미 모든 것에서 지쳐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사는 이모의 초청으로 알프스의 최고급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마음 편하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열차는 출발 신호를 알렸다.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낮게 드리운 저녁, 피로에 지친 여자는 객차의 좌석 한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있었다. (p. 57)

여자의 지난 삶을 알고 난 이후에 이 문장을 읽으니, 마음이 꽤 아려왔다. 차창 너머의 세상을 모호한 감정으로 들여다보다가 익숙하지 않은 평화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어느새 스르르 잠에 든 그녀의 지친 나날들이 멈추지 않는 기차 바퀴 소리와 함께 모두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만 싶다.

희고 깨끗하고 생경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고 날카로워서 여자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라운 광경을 좀더 가까이 보려고 손으로 유리창을 누르자, 창문이 왈칵 열렸다. 찬바람에 날려 객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과 함께 얼음처럼 차고 유리처럼 예리한 공기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여자의 입을 통해 폐까지 들어왔다. 생애 가장 깊고도 깨끗한 호흡이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렸다. 가슴을 부풀리며 들이마신 시원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 정말 대단해!’ (p. 58)

‘클라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럽을 벗어나 미국 땅에 정착한 ‘클레르’ 이모는 어머니와는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일찍이 부의 세계로 건너가 살 수 있었다. 그런 이모의 눈에 방금 막 도착한 크리스티네의 모습은 그저 며칠 동안 좋은 옷 한 벌 없이 지내는 오스트리아의 불쌍한 여자아이였다. 추한 블라우스를 집어 던지고 이모가 건네준 깃털처럼 가벼운 옷을 걸친 크리스티네에게 이모가 사는 세계는 달콤하고 꽃향기가 감도는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하루의 일과를 걱정으로 시작했던 자신이 근심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과 거리를 걷고 있다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현란한 색채를 드러냈던 풍경이 푸른빛이 감돌다 어두워지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던 크리스티네도 금세 모든 걸 잊어버렸다. 어색하던 자리와 무서웠던 사람들 사이에서 말도 많아지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이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불안한 마음도 단숨에 무너진 것이다. 더 이상 모든 행동과 말에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 채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알프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던 크리스티네는 이제 최고급 호텔방에서 발코니를 열고 흥분에 들뜬 채 광활한 풍경을 바라본다. 넓은 방이 이제는 비좁게 느껴진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도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p. 111)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흥미를 느끼며 만끽해 보는 것, 모든 것이 재미있고, 친절을 베풀고픈 마음을 품게 만들고 감탄할 줄 알게 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처음으로 느껴보며, 어디를 둘러봐도 모든 게 낯설고 새롭고 신기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순박함과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친절과 관심에 용기를 갖는 모습을 담은 1부는 읽는 동안 동화 속 소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며 표현하는 일에 서툰 고향 사람들과 달리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크리스티네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란 변화가 어렵기도 하면서 동시에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습관과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크리스티네도 새로운 변화에 금세 익숙해지는 걸 보니 말이다. 삶의 아름다움이 만족과 행복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이 순간에도 분명, ‘나’라는 존재보다는 ‘지금의 나’를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작가로 유명하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가슴속에서만 머물던 생각들을 알아채서 명료하게 설명하는 빈틈없는 예리한 시선이 얄미울 정도다. 지루할 새 없이 책장을 넘기게 해줄 만큼 재미가 있는 데다가 그의 사실주의적 디테일까지 더해지니 읽는 동안에도 크리스티네가 살아온 삶과 단 몇십 일 동안의 경험으로 그녀가 갖게 된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은 나의 기쁨과 흥분이기도 했고, 가슴을 훑는 듯한 고통에 내 속 마음 또한 심란해져 그녀와 함께 ‘나만 생각하자, 나만.’을 읊조려 보기도 했다. 츠바이크의 또 다른 소설인 <초조한 마음>에서도 불의의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소녀 ‘에디트’의 민감함과 그런 에디트를 향한 현역 장교 ‘호프밀러’의 연민 사이에서 오가는 복잡한 감정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오면서 읽는 내내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던 그 감정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만큼 각 인물의 감정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도록 세밀하게 담아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츠바이크의 글솜씨에 감탄하며 읽는 게 아닐까?

한낱 과거로 흘러갈 짧은 추억이 진절머리 나는 오늘 하루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만 버리지 못할 아까운 순간들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하는 크리스티네를 바라보며 우리도 같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쳇바퀴 도는 삶을 살면서 더 앞으로 달리고 싶고 더 높이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깃털 같은 옷을 입고 마음마저 가벼워져 발걸음까지 빨라지다가도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라고 스스로 멈추는 모습에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몸과 마음이 맥박처럼 빨리 뛰는 젊음과 생기로 가득 차야 할 이십 대의 여성에게 말이다. 이제서야 육체적 고통에서 조금 벗어나 ‘깨어있음’을 느끼는 크리스티네에게 말이다. 이처럼 츠바이크는 연민의 감정을 잘 다루는 것 같다. 힘든 삶 속에서 우리가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었을 때 먼저 자신을 연민의 감정으로 들여다보고 돌봐야만 타인에게도 같은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층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원치 않는 일을 겪으며 산다. 정신력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태도가 스스로에게 원동력이기보다는 고문이 될 만큼 힘에 부치고 뜻대로 안 되는 상황에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억지로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닐 때가 있다. 단순히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대상이 되어 꼼짝 못 하고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의 소박한 안녕을 원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질 수 있길 욕망하는 것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괴로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젊고, 우리가 버리려고 하는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 (p. 388)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내다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고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감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마음을 괴롭힌다. 앞으로도 창문을 열고 눈을 뜨면 같은 간판에 같은 사람들, 같은 절망과 같은 회의감을 느끼며 감옥 같기만 한 우체국 안에서 원을 그리는 시계처럼 사는 삶이 앞으로 얼마나 변화할지 아닐지, 그것은 모르겠다. 다만, 분명 바뀌지 않은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삶에 묵힌 공기를 환기시키는 날이 올지 또한 모른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츠바이크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결말을, 크리스티네를 향한 내 진심으로 채워보고 싶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우리 함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보자. 살다 보면 어두운 거리가 차츰 희미하게 빛을 내며 그동안 보아온 것과 다른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너무 감상적인 태도인 걸까? 그렇다 해도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계속해서 살아내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알 때까지 계속해서 살아보는 거다.

내가 가진 생각이 해답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와닿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가치관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면,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사는 똑같이 위태로운 인간인 내가 ‘틀림없이’ 좋은 일과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듣고 읽으려는 마음가짐만은 잃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실은, 그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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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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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이 여러 사람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어버린 퍼즐 블록의 한 자리를 얼른 새로운 블록으로 채워 완성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이기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의 잔인함을 톨스토이는 냉철한 시선으로 담았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였다. 성공과 출세가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주변에는 상류층 사람들만 존재했기에 그토록 원하는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며, 평범한 시민의 시선으로 그의 삶은 분명 꽤 괜찮았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껴 아내에게 등 떠밀려 찾게 된 병원에서 만난 의사에게 법정에서 짓고 있던 자신의 익숙한 표정과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뻔한 절차를 진행하며 뻔한 대답을 요구하는 근엄한 표정 말이다. 처음으로 타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에 이어,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안락한 삶을 살았던 그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이의 입장에 서서 들여다봤다. 죽음이라는 공포감이 만들어낸 암흑세계 안에서 꺼내줄 수 없는 무력함과 절망감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기를 다루듯이 대해야 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예민해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겪어봤거나 겪고 있거나 겪게 될 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로하려 다가간다는 것은 사실 참 힘들다.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면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은 뭐가 이렇게 신이 났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주춤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하면 환자 취급하는 게 서글프고 짜증스럽게 느껴질까 봐 또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그를 세심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 앞에서 그깟 오페라 망원경을 챙겼는지, 그리고 누가 그걸 어디로 치웠는지 따위의 논쟁이나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도 돈과 명예로 해결할 수 없는 병을 얻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삶의 끝자락 혹은 파멸의 경계에 와서야 사소한 것의 소중함,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처럼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만큼 자신의 존재는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긴 했어도 제법 만족스럽게 살아갔던, 적당히 흘러가는 삶 속에서 느낀 행복한 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그를 괴롭히며 생의 연장을 요구했다. 이런 이반 일리치의 심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몸과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존엄을 잃는 그 순간에 내가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깊은 고뇌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별생각을 다 해봤지만, 도무지 어디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가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이런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버리게 된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접했다. 왜인지 그의 이름만으로도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신화 속 인물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과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었고, 현실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완성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들어서 입문작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서사 구조가 간단하지만, 날카로울 만큼 사실적이기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묵직한 뜨거움이 올라오면서 내 목을 괴롭혔고, 책을 핑계 삼아 눈물을 확 쏟아내고 싶을 만큼 비애를 느껴야만 했다.

이 소설은 죽음을 의식으로부터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몇 분, 몇 시간 만이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잠을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단계까지 와버린 이반 일리치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집요하게 자신의 삶에 몰입하는 동안 얻게 된 깨달음을 알려준다. 자신이 떠난 뒤의 세계를 상상하며 존재의 공허가 만들어낸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다가도 오늘은 그럭저럭 덜 아픈 몸 덕분에 마음까지 밝아져 희망을 얻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되뇌고 또 되뇌었던 수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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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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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한창 더운 7월의 어느 여름, 위화의 <인생>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와 따끈한 붕어빵을 먹으면서 배 속이 뜨듯해지는 것이 딱 이대로 자면 참 좋겠다 싶은 계절이 와버렸다. 나는 곰이라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니 입이라도 즐겁게 맛있는 간식을 옆에 두고 <허삼관 매혈기>를 펼쳤다. 작가의 서문이 참 좋다. 독자를 향해 감사의 말을 담은 개정판의 서문인데, 책과 나의 거리를 가깝게 좁혀주는 말 한마디가 동면에 들어가지 못한 곰 한 마리의 마음을 스르르 움직이게 했다. 뒤로 이어진 서문에 또 콧구멍에서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게 만드는 작가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도 나름대로 부끄러움이 있는 곰인지라 생략할 수밖에 없겠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을 때, 부엌에서 외할머니가 이것저것 만들고 계시길래 뭐든 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병에 걸려 사람들을 귀찮게 하던 내가 묻고 또 물었다. 찌개에 톡톡 넣는 하얀 가루의 정체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미원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궁금했다. 설탕 같기도 하고 소금 같기도 한 가루의 맛이 어떨지.

“할머니, 미원은 무슨 맛이야? 짜? 달아?”
“무슨 맛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음식에 조금씩 넣는 애야, 얘는.”
“아니, 그래도 어떤 맛이 있을 거 아니야. 응?”
“흐음... 순수한 맛?”

꼬맹이가 순수한 맛이 어떤 맛인지 당최 알 도리는 없고, 나중에 TV에서 조미료는 몸에 안 좋다며 음식에 넣지 말아야 한다는 둥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는 걸 주워들은 내가 어린 마음에 ‘우리 할머니는 나한테 몸에 안 좋은 걸 넣어서 음식을 만들어 주셨던 거구나….’라며 배은망덕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먹을 땐 좋다고 뱃속으로 집어넣었던 할머니의 음식이 그릇으로 몇 그릇인지 새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녀석이 말이다. 이제는 할머니가 말한 순수한 맛이 어떤 뜻인지 알아들어도 열두 번은 더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직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삼관 이야기를 좀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허삼관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고, 지나간 삶을 추억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잠시 누려봤다.


“저 장가나 가버릴래요.”

삼촌의 외밭에 가서 온종일 죽치고 있다가 수박 두 통을 해치우고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가는 근룡이와 방씨를 우연히 만나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피 팔아 벌어온 돈 삼십오 원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장가나 가버리겠다고 한다. 힘을 들여 번 돈이 아니라 제 피를 팔아서 번 돈, 말 그대로 피 같은 돈이니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성안의 생사 공장에서 누에고치로 가득 찬 수레를 미는 작업을 하고 지내는 허삼관에게 예비 신부 후보가 둘씩이나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볼우물까지 있는 큰 눈을 가진 임분방이 1번! 뒤이어 간이식당에서 꽈배기를 튀기는 예쁘장하게 생긴 허옥란이 2번! 수박이나 먹을 줄 아는 사람인지 알았더니 패기가 넘쳐 황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 들고 허옥란의 집에 찾아가 허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 준다며 데릴사위를 자청한다. 결국 허옥란이 허삼관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소식을 알려주는 장면을 읽고 한 몇 초가 지났나? ㅋㅋ 분만대에 누워 있는 허옥란이 진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속으로 ‘아, 벌써 임신해서 출산하는구나.’ 했는데 두 번째 출산이란다. ㅋㅋㅋ 이렇게 낳은 자식이 5년 동안 아들만 셋. 그들의 이름은 허일락, 허이락, 허삼락이다. 이름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고, 하루는 싸우고 들어온 삼락이를 위해 형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해 보겠다며 이락이가 식식거린다.

“이런 씨팔, 감히 내 동생을 얕보는 놈이 있다니. 가서 그 자식 손 좀 봐줘야겠는걸.” (p. 78)

뭐, 물론 내 맘처럼 세상이 잘 돌아가 준다면 좋으련만….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 돈을 받아 결국에는 허옥란과 결혼까지 하게 된 허삼관이 십 년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아 피를 팔아야 할 지경에 처한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속만 터진다. 쪼잔하고 옹졸하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질 허삼관은 허삼관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조용할 날이 없지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아니,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라고 놀랄 만한 상황도 자다가 목이 말라 찬물을 들이키고 다시 드러눕는 것만큼이나 대단하지 않은 일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허삼관이 때론 앞에서 화통 삶아먹는 소리를 하며 화를 더 긁고 말로 다 까먹기도 하지만,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기에 사람 마음을 참 와따가따 하게 만든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참혹한 상황에서 허삼관네 가족의 상황도 다르지 않으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멀건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배고프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식들에게 움직이면 배가 고프니 조용히 누워 있으라고 다그치다가, 피골이 상접한 자식들의 모습이 짠했는지 허삼관은 상상의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말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아이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듣고 있다. 쓸데없이 요리 과정은 어찌나 생생한지 모른다.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 안 될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이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아야 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말 위화가 손가락 안에 드는 것 같다.

가혹한 운명과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위화는 버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비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고통 안에서도 좌절 대신 나름의 즐거움을 찾길 바라는 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인생>과 시대적 배경이 비슷해서인지, 남루한 모습으로 자신과 닮은 소 한 마리 끌고 밭에 나가 쉬고 일하고 쉬고 일하는 것을 반복하던 노인 ‘푸구이’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면 투박스럽고 억척스러운 모습에 손사래를 치게 만들고, 뜻이 맞지 않는 일만 점점 늘어나는 내 집 식구들을 들여다보는 눈길에 애정이 한 스푼 더 들어가게 되고, 괜히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게 만들어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네들, 먼저 이 소금을 좀 먹어봐. 소금을 먹어서 입 안에 짠맛이 돌면 그때부터는 어떤 물이든 다 마실 수 있거든.” (p.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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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2-04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큰일났네요. 앞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란 제목을 볼때마다 곰돌이님이 생각날것 같습니다. ‘어디에선가 나는 곰이로소이다‘ 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곰돌이 2025-12-04 06:48   좋아요 1 | URL
혹시 영화 <코카인 베어> 보셨나요?🐻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ㅋㅋㅋ

rainbass 2025-12-04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목부터가 대박인데용

젤소민아 2025-12-06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장면 어디쯤...불한당 같은 젊은이들과 나누는 허삼관의 대화가 압권이었어요. 피를 하도 빼서 몸이 식어가는 허삼관...자기 핏줄이 아닌 첫아들을 끌어안는, 작고도 큰 사람이죠. 저도 <인생> 읽었어요. 좀 심하죠....푸구이 노인만 남고 다 죽는....ㅠㅠ 두 작품 다 유머가 깃들어있으면서도, 우리삶의 끈적한 슬픔을 제대로 보여준 것 같았어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곰돌이 2025-12-06 13:35   좋아요 0 | URL
때론 속이 갑갑할 때가 있을 만큼 묵묵히 받아들이고만 사는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도 속이 터지기도 하고 시큰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고요!! 일단, 위화의 작품은 너무 재미있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