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펼쳤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앞부분만 읽어보려고 했는데 금세 100쪽을 넘겨버렸다.

모든 것을 훑고 가버린 듯한 황폐한 마을이 등장한다.
습하고 축축하면서도 시큼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떠날 시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내뿜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머릿속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진창길을 걷느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부츠를 신은 남자들과, 강박이 느껴질 만큼 끊임없이 사람들을 기록하는 의사까지... 쓸만한 물건들은 모두 드러내어 버려진 물건과 함께 남겨진 듯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소리까지 민감해지면서 나마저 집요한 관찰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직 윤곽이 분명치 않은 그 형체를 보고 싶게 만드는 궁금증 때문인지 책장이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다.


- 밑줄 -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만 있으면 돼. (p. 26)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수킬로미터를 걷는다. 어쩌다가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도 같지만, 짙은 어둠이 내내 이어진다. 어쩌다가 달도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달은 그 아래 자갈길을 걷는 두 지친 방랑자들처럼,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는 마주치는 모든 장애물을 통과해 마침내 새벽이 올 때까지 하늘의 전장(戰場)을 가로질러 도주하는 중이다. (p. 70)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것-집들과 담장들, 나무와 들판, 공중에서 하강하며 나는 새들, 배회하는 짐승들, 육신을 가진 인간들, 욕망과 소망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에 헛된 저항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모든 것, 벽돌공이 쌓고 목수가 만들고 여인들이 바느질한 모든 것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애써 이룬 모든 것이 저승의 물살에 어지러이 휩쓸려 형체가 불분명한 액체로 화한다 해도 오로지 기억만은, 그가 맺은 계약이 깨져 죽음과 몰락이 그의 뼈와 살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을것임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p. 87)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5-10-09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시작하자!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첫 장 넘기면 곧바로 확 빨려 들어간 몇 안 되는 책이었답니다. 이 책 읽으신다는 것 만으로도 반가워서 말입죠.

곰돌이 2025-10-09 20:58   좋아요 2 | URL
한두 장만 읽어보고 느낌만 조금 가져보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페이지 터너! (참고로 이 책은 Falstaff님 리뷰를 읽고 땡투까지 했답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5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님이 원조셨군요 ^^

페넬로페 2025-10-09 21:45   좋아요 2 | URL
역시 폴스타프님👍👍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0-09 2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작가님 노벨문학상 수상하셨네요!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오~!! 괜히 기쁘네요. 전 참고로 살만 루슈디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어요...ㅎㅎ

페넬로페 2025-10-09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곰돌이님
선견지명 있으십니다^^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곰돌둥절!!! ㅎㅎ 어쩌다가 이렇게 책 읽은 시기와 맞아떨어졌어요. 얻어 걸렸는데 그래도 왠지 기쁘네요, 곰돌으쓱!! ㅎㅎ

2025-10-09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09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발표하는거 보고 방금 샀는데,,, 곰돌이님께 땡투를 했더라구요.
전에 장바구니에 넣을때 곰돌이님 리뷰나 피드 보고 한듯요.^^
발표 직전까지 제가 왜 긴장을 했는지...^^ 암튼 축하합니다~~

곰돌이 2025-10-09 21:44   좋아요 1 | URL
우연히 <사탄탱고>를 펼치게 되어 그레이스님께 축하까지 받게 되네요. 하하!! 또 곰돌둥절입니다!! 이 책의 작가님이 조금 무섭게 생기셔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데 책은 술술 잘 넘어가네요!! (아무말 대잔치ㅎㅎ)
 
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쉬는 날이 되면 반드시 늦게까지, 정말 늦게까지 잠만 자야지라고 생각하지만, 기계처럼 잠에서 깬 나는 베개에 눌려 찌그러진 눈을 하고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아 굼뜬 손으로 핸드폰만 연신 뒤적거리다가 차라리 이럴 바엔 책이나 읽는 게 낫겠다 싶어서 독서등을 켜고 책상에 앉아 7편의 중단편으로 엮인 권여선 작가님의 <비자나무 숲>을 펼쳤다.

기획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팔도기획」 출판사에서 일하는 이십 대 여성 ‘김 작가’는 읽는 내내 정이 1도 가지 않았던 홍 팀장 밑에서 몇 명의 선배 작가와 함께 자비 출판을 원하는 고객의 요구에 맞게 대필하거나 원고를 수정하고 가필하여 최소한 출판 가능한 수준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원고를 가지고 사무실을 방문했다.
출판 의뢰를 하러 온 줄 알았더니, 대필 같은 아르바이트를 원해서 왔다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침 급하게 마감해야 할 작업도 있어서 ‘윤 작가’라 불리며 투입되는데, 근무를 막 시작한 직원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말문이 막힐 만큼 대쪽 같은 자기만의 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다들, 이건 뭐지?라는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안 한다, 못 한다 소리 한 번도 못 해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고 지냈던 김 작가는 뒤에서 윤 작가에 대해 숙덕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눈치껏 한마디 얹어보고 앞으로 닥칠 일들이 아득하고 험난해 보이기만 한 그녀의 당당함에 잽싸게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리며 몹쓸 개를 끌 듯 힘겹게 길쭉한 삼각형의 꼭짓점을 계단 밑으로 질질 끌고 내려왔다. (p. 34)

누울 자리 봐 가며 발 뻗는다고 기대감 따위 저 깊숙한 곳에 넣어두어야만 하는 곳의 기분 나쁜 냄새를 단박에 알아내고 헛헛함에 친숙해져야 하는 사람이었던 김 작가와 달리 매사 결기 있게 대처하는 당찬 윤 작가의 말과 행동에 잠시 현실을 떠올려봤다. 분명, 직장 상사와 선배를 앞에 두고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지 않는 윤 작가의 태도에 나머지 직원들은 괜히 눈치를 살피며 양쪽 귀만 엄청나게 커진 채로 업무용 PC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 없이 손만 괜히 바빠지고, 당사자 못지않게 다들 온몸이 뻐쩍 지근해지고 있을 게 눈에 훤하다. 아니, 그런데 윤 작가에게 인내심이라도 베풀 듯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눈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당연히 며칠 못 버티고 그만둘 거라 생각했던 김 작가의 예상과 모든 것이 달랐던 것이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어긋남은 점점 무력감을 주고, 불합리함 속에서도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추욱 내려간 듯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지내온 김 작가에게 윤 작가의 뚜렷한 신념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게 만든다.


5년이나 함께 살다가 홀연히 떠나 이제는 요양소에서 지내는 ‘심 여사’를 만나러 간 ‘오 여사’의 이야기를 담은 「은반지」는 다사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꽤나 사연이 있는 듯한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며 멍하니 상념에 빠진 채 나 자신에게도 현실을 제대로 보며 살아왔는지 질문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심 여사?”
“아픈 데가 왜 없겠어요? 이도 시원찮고 무릎도 아프고 그렇죠, 오 여사님은요?”
그 말에 오 여사는 반색을 했다.
“아이. 나도 그런데. 나도 무릎이 안 좋아서 한동안 병원다니느라 고생했어요. 이는 겁이 나서 아직 못 가봤고. 심 여사는?”
“저는 그냥 참아요. 늙어서 아픈 걸 어쩌겠어요?”
심 여사의 말이 자신에 대한 비난처럼 들려 오 여사는 기분이 좀 상했다.
“늙어서 아프든 젊어서 아프든 아플 때 가라고 있는 게 병원인데 안 가면 자기만 고생이지 뭐.”
“그건 그렇죠. 형편 따라 하는 거죠.”

내 집에서 5년이나 살다가 갑자기 떠나버린 심 여사가 괘씸해도 서울에서 꼭두새벽에 출발해 몇 시간 걸려 이놈의 요양소까지 얼굴 보러 와줬거늘, 어째 말끝마다 어깃장 놓는 듯한 심 여사 때문에 오 여사는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두 여성의 대화는 점점 음침하면서도 오싹한 기운을 만들어내 잔잔한 수위의 스릴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만큼이나 숨죽이며 몰입하게 만들었다. 절대 잊지 못할 거라 다짐했던 순간조차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지듯, 혹시 오 여사가 미처 알지 못한 채 흘려보낸 세월 속에 심 여사만 아는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궁금증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심 여사의 증오와 원망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그 순간 오 여사의 머릿속을 헤집는 말들은 이제서야 아귀가 딱딱 들어맞게 되는데...


사랑하는 이가 떠난 뒤, 올려다본 하늘은 어떤 색일까.
자신이 마주치는 삶에서 잊히는 것의 애달픔과 통증이 에워싸고 있어 아무런 색도 느낄 수 없었을 한 여성이 사랑하는 애인이 죽은 후, 오랜만에 그의 동생과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같이 근무하는 미영 씨의 생일 선물로 고르는 ‘비니’ 하나도 어떤 것으로 정할지 꽤 망설인 그녀가 죽은 애인의 동생의 전화를 받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주도행 표를 예매한 것이다.

서로의 만남 자체가 슬픔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지 모를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은 단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수천, 수만 가지, 아니 그 이상. 어쩌면 단 한 마디조차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아픔 속에서 아직은 회복되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희미한 가능성마저 접어둘 순 없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햇살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비통한 마음을 조금 거두고 올려다본 하늘이 희끄무레한 잿빛이어도 말이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만들어낸 빈 공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만이 전부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변화된 일상과 슬픔을 진부한 말로 채워 넣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다.

사방에 부딪혀 깨진 달걀처럼 곤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숨을 쉬게 될 것이고 그때쯤이면 비자나무 숲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p. 117)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어긋나버린 인생을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극단적이고 불쾌한 전개를 통해 운명의 폭력성을 보여준 「길모퉁이」와 「소녀의 기도」에는 불행한 삶 안에 갇혀 기다리는 사람이라고는 사채업자와 빚쟁이, 그리고 구역질 나는 완전 건덕지 같은 새끼(p. 160)뿐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평생 악몽처럼 따라붙을 자신의 잘못된 선택 앞에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욕망이 만들어 낸 상상 속 내 모습을 움켜쥔 채, 길모퉁이를 지나 무엇이 기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애먼 길을 돌고 돌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를 향해 자유의지로 내딛은 발걸음의 의미를 스스로 알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인간이 증오와 원망의 마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을 탓하는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로 그 운명이 밀어 넣었다고 답하는 것만 같았던 두 작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없었다. 특히 「소녀의 기도」는 불행, 폭력, 탐욕이 오물과 뒤범벅되어 나락으로 빠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재생이라니. 그건 간단한 만큼 불가능한 개소리였다. (p. 148)


그리고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를, 아니면 알기에 더욱 지독하고 쓰라린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읽고 난 뒤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렀던 「꽃잎 속 응달」은 책 속의 문장으로 줄거리를 대신한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 딴에는 잘해보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돌아보면 온 청춘을 다 바쳐 망조가 드는 길로만 숨 가쁘게 치달려 온 셈이었다. 자신이 가려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와버렸음을 실감하는 이 순간, 이 절대적인 낯섦은 차라리 이곳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애초에 가려던 곳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었다. (p. 227)

그 시절이 영영 가버렸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과연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p. 229)


지나온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선물과도 같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치욕스러움이자 끔찍한 고통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착각에 빠져 살아왔을지 모를 삶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치욕스러움이자 끔찍한 고통일 수도 있는 조금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춰진 기억을 집요하게 건져 올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문,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라는 물음에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했던 것 같다.

아직은 삶을 더 많이 살아보고 난 뒤에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꼈던 것은 계획한 대로, 의도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 허무할 수도 있고 절망적일 수도 있는 그 삶을 붙들고만 있는 것이 과부하가 될 때, 그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하지 않은 관계 속에 후회가 가득한 기억들만이 존재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말고, 괜찮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삶,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 제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하고,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들에게 감동하였습니다. 제가 상처를 입을 때마다 제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니까요.”

이 소설은 화자인 극작가 ‘커더우’가 이제는 아흔 살이 된 산부인과 의사 고모 ‘완신’의 삶과 자신의 고향인 가오미 둥베이향을 회상하며, 되짚어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순간들을 편지로 써 그가 존경하는 ‘스기타니 요시토’ 선생님께 보내고, 마음속 깊이 묵혀둔 감정들을 손끝에서 흘려보내듯 써내려간 이야기가 희곡 <개구리>로 탄생한다.

서양 의학을 배운 혁명 열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해 준 지하 병원 창설자인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업을 잇고자 위생학교에 들어가 열여섯 살에 졸업한 고모는 위생소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신식 조산 훈련에 배치되었고, 그 뒤로 고모가 받은 아이가 모두 1만 명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만만치 않은 경력에 빼어난 미모까지 겸비한 고모 자랑에 ‘나’의 입은 침이 마를 새가 없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처벌받던 시절인 문화 대혁명(1966년~1976년)이 시작되기 전, 동맹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이 적대 관계로 전환해 전운이 감돌고, 공중에서는 비행훈련으로 비행기 굉음이 자주 들려오던 시골 마을에서는 손목시계를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았으며, 까만 이를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얀 이를 자랑하는 고모였으니 어린 조카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말할 필요도 없다. 화자 스스로 과시욕이 있다고 고백한 바, 출신 성분 좋은 집안 식구들 이야기라면 사흘 밤낮도 부족하다.

국가 생산력이 향상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출산율도 덩달아 높아졌다. 고모는 당시 매우 귀했던 자전거로 곳곳을 누볐고, 신식 분만으로 새 시대를 열어야 했던 분위기 속에서 전문적인 의술 없이 산모와 아기의 안전과는 동떨어진 늙은 산파들 사이에서 전도유망한 의사이자 당찬 여성이었다.

이 소설의 화자 ‘나’를 받아준 것도 고모다. 엄마 뱃속에서 거꾸로 선 바람에 발부터 나올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처음이 아니니 혼자서 찬찬히 낳아 보려무나.”라고 말했던 할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마당에 나가 북 치고 장구를 치면서 아이들은 떠들썩한 걸 좋아한다며 지들이 안 나오고 배기냐는 소리만 하고 있는 통에 ‘나’는 세상 구경도 못 할 위험에 처했고, 구시대적인 풍습을 철석같이 믿는 할머니를 밀어내고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신식 의술로 출산을 도와준 고모는 생명의 은인이 아닐 수가 없다.

직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저자의 방식은 내가 미처 고통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할 새 없이 충돌하듯 맞닥뜨리게 하여 흠칫 놀라기도 하고 종종 속에서 뭔가가 자꾸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내 나라, 내 고향에서 벌어진 ‘들추어 내서 말하는 것이 난처하고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그 누구도 억압할 수 없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모가 씩씩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이상하네. 여자가 딸을 낳으면 남자는 우거지상이 되던데. 소가 암송아지를 낳으니까 남자 입이 헤벌어지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암송아지는 자라면 다시 새끼를 낳잖아!
고모가 말했어요. 사람은요? 여자아이도 커서 시집을 가면 아기를 낳잖아요?
아버지가 말했어요. 그거야 다르지.
고모가 말했어요. 뭐가 달라요? (p. 56)

남존여비 사상에 찌든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불행을 담은 현실을 눈에 담아야 하는 것도 고통이라지만, 기술이 있어 굶어 죽을 일은 없는 고모는 큰소리라도 뻥뻥 치는데 그러지도 못한 여성들이 버텨낸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갑갑했다.

어느덧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옛날 1960년대 시절의 이야기도 한낱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나’의 큰형 막내아들의 항공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시끌시끌한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로 일흔이 다 된 고모가 가족들을 향해 한 마디 던지며 등장한다.

아니, 왜 이렇게 큰 등을 켜고 그래? 할머니 하신 말씀 생각 안 나? 컴컴해도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진 않는다고. (p. 80)

평생 타향을 전전하다가 이제야 친정에 온 고모의 모습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고, 어째 가족들도 예전처럼 고모 주변을 둘러싸고 칭송하던 모습과는 달리 영 탐탁지 않음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 분명 복잡한 사연이 있는가 보다.

‘나’는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은 고모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준비해 왔음을 알리며, “하나도 적지 않고, 둘은 적당하며, 셋이면 많다.”라는 구호와 함께 산아 제한 붐이 일어났던 1965년 말, 고모가 공산당 소속 당원으로서 강제성을 띤 산아제한 정책 계획 생육 지도자로서 정책을 짜고, 지휘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 온 이야기부터 결혼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고모가 젊은 시절 만난 ‘왕샤오티’라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종사가 타이완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고모가 반동분자라 의심받는 이야기 등등 붉은 깃발이 바다를 이루던 시절의 이야기가 쉼 없이 쏟아졌다.

때때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순진무구한 동네 사람들이 무척 진지한 태도로 당연한 이야기를 껄껄 웃으며 나누는 모습에 웃는 것이 실례가 될 것만 같은 잔웃음을 짓게 될 때도 있다.

위안 형님도 대단하시죠. 사천 동생이 말했어요. 위안 형님은 우리 샤좡 시장에서 판을 벌이고 점을 치는데, 별명이 ‘신선거사’예요. 우리 큰어머니 댁 암탉이 없어졌는데 위안 형님이 육갑을 짚어 보더니 말했어요. 오리는 물가로 가고, 닭은 풀밭으로 가니 풀숲에 가서 찾아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풀숲에서 찾은 거 있죠? (p. 183)

한숨 돌리고 나니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모는 계급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계획 생육 정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은 사회주의 기본 사상을 흔드는 일이라며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이 루프 시술, 정관 수술, 중절 수술을 어떻게든 피하려 하자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듯이 한 마디로 정리한다.

물이 든 그릇은 반듯하게 들어야 한다. (p. 197)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출산을 도우며 안전하게 아기를 받던 고모의 양손은 권력의 지휘 아래 탄생의 고귀함을 알리는 대신 생명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지금의 삶을 운명이라 여기듯 충성스러운 공산당원으로서 맡은 계획 생육 사업에 광기로 보일 만큼 최선을 다했고, 그 방법은 참혹했다. 나 역시 원칙을 중요시하는 직에 종사하다 보니 불합리함 앞에 그녀가 홀로 감수했을 내적 갈등과 차마 드러내지 못한 괴로움을 모를 수가 없었지만, 길이라는 것이 저쪽으로 가다 보면 이쪽으로도 오게 마련인 것을 왜 그리도 잔혹하게 보이면서까지 다른 방향은 보지 않고 자신을 증명해 내려 하는 건지 참담하기만 했다.

고모는 산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건강한 아기를 안겨줄 때 순수하고 순결한 감정으로 희열을 느꼈던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때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받았던 고모였고, 어찌 보면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 나서 겪어야 했던 일로 온갖 욕을 얻어먹고 있으니 조카인 ‘나’의 시선에서 읽히는 수많은 감정 안에 고모를 향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졌고, 그런 고모의 뒤를 죄책감에서 비롯된 괴로움이 바짝 쫓았다.


누구나 후회가 많은 삶을 살아가면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고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비칠 때도 있겠지만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인식하며 극복하려고 했던 인물과 달리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번민으로 잠 못 이루던 시절조차 잊히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양심과 공감 능력마저 상실한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볼 때는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목숨이 걸린 일을 우연한 사건 혹은 소소한 일로 치부했던 사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프고 비참한 남의 불행에 “자업자득이죠.”라고 말하는 모습에 나는 부작용만 남긴 야만적인 강제 정책에 대해 분노한 것만큼이나 화가 났다. 본질적인 권리를 무시당한 타인의 고통에 아픔을 느끼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게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사람이라면 말이다.

국가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작품을 통해 여러 인간 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다만,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을 조심스레 말해보자면 저자의 솔직한 서술에 기대감이 점점 커져 이 소설의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무언가가 나오겠지...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얻지 못한 채 끝이 난 느낌이다. (또르르)

다음에는 모옌의 또 다른 소설 <열세 걸음>을 읽어보려 하는데, 의미심장한 표지부터가 이미 진입 장벽의 높이를 세워주지만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읽어봐야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5-10-01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 님껜 한방이 없었나봅니다.^^
<열세 걸음> 저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곰돌이 2025-10-01 21:57   좋아요 1 | URL
기대감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갔었나 봐요ㅎㅎ 모옌의 작품을 읽어봤다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레이스님처럼 다양하게 읽어봐야겠어요!!

rainbass 2025-10-02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우지는 못했지만 생명을 아는 구식산파가 더 많이 죽였을까, 배웠지만 생명을 수단으로 본 이모가 더 많이 죽였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꽤 두꺼운데 잘 읽혔던 책이네요. 나오겠지...나오겠지..곰돌이님의 엄청난 글이 나왔잖아요~ 👍

곰돌이 2025-10-02 06:21   좋아요 1 | URL
중문학을 많이 접하지 못한 편인데, 굳이 취향으로 따져본다면 읽어본 것 중에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재밌게 읽었거든요. 전 좀 더 따뜻함을 얻는 걸 좋아하는가 봐요. 앗, 그리고 남겨주신 댓글 마지막 줄은 블러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ㅎㅎ (식은땀)

새파랑 2025-10-04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장사진이 너무 멋집니다 ㅋ 서재가 도서관 급이네요~!! 전 아직 중국문학은 손이 안가더라구요....

곰돌이 2025-10-04 20:5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감성과는 조금 벗어날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드실 때, 류전윈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추천합니다! 책장은 어쩌다가 깔맞춤까지 하며 정리를 하는 바람에 흔적을 남겨봤어요! 느낌 아시죠?ㅎㅎ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그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듯, 쳇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은 현재의 소박한 삶에 감사함을 느끼고 속에 들어찬 서글픔은 서로를 위해 잘 포장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잠든 부인 옆에서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남편 ‘펄롱’은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채 왜인지 심란해 보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앞으로 닥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고민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방황하는 사람처럼 복잡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큰 집에 혼자 사는 여성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지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펄롱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선물로 아버지와 500피스짜리 퍼즐을 받고 싶어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어린 펄롱에게는 간절했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글픔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리려 했지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 외양간으로 뛰어 들어가 울어버렸다.

젖소가 자기 칸 안에 묶인 채 선반 위의 건초를 끌어 내려 만족스러운 듯 먹고 있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펄롱은 말구유에 언 살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아픔을 잊기 위해 손을 차가운 물에 깊이 담그고 손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까지 한참 그러고 있었다. (p. 30)

펄롱이 아기였던 시절, 구슬처럼 빛나는 맑은 눈으로 들여다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윌슨의 집 정사각형 부엌 안에서 일해야 하는 엄마가 위험한 것들로부터 조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을 유아차의 안전띠에 매인 아기 펄롱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공중에 대고 허우적거리는 손짓과 음성은 쌓이고 쌓여 자신이 마음껏 양팔을 휘젓고 소리 내는 것이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더 자라서 윌슨이 가끔 같이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실을 가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먼지가 내려앉듯 그렇게 펄롱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쌓여만 갔을 것 같다.

그렇게 펄롱은 자랐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농장 일꾼 ‘네드’가 준 보온 물주머니와 윌슨이 준 곰팡내 풍기는 낡은 책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 당시에는 원하는 선물이 아니었기에 서럽게만 느껴져 외양간으로 달려가 눈물을 쏟았지만,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 덕분에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필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집 크기와 보이는 행색에 따라 쳐다보는 시선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숙덕거림 속에서 가족들도 외면한 어머니를 일할 수 있게 해준 윌슨이 따뜻하게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 준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쳐 온 생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이라면 불행했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준 순간들을 발견했을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를 배려와 관심이 단순한 행동을 넘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줬음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난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였고,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기에 외면하지 않고 그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다.

그 순간 소녀의 심정을 떠올려보았다.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늘 그곳에 그가 있을 거라는 안심만으로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고마움과 안도감으로 이미 따뜻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펄롱이 어린 시절 윌슨이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p. 82)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오늘의 평온만을 원하는 삶에서 더 나아가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고마운 순간들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끝내지 않고 현재와 연결 지어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고뇌하며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으나, 펄롱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겁이 났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감수해야 할 것들도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내내 이어지는 서리가 내린 듯한 날씨가 마치 금방이라도 맑게 갤 하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게 했다.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목소리에 휩싸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겁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밖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놓는 몇 파운드의 동전을 못마땅해하는 부인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러 나가고 싶지만 내색도 못하고 아빠 펄롱의 일손을 돕기 위해 사무실을 봐야 하는 딸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은 불완전한 삶 속에서 세상의 불의 앞에 고민하게 될 때, 인간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지난 삶의 선택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마음의 소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늘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 했으며, 그나마 합리적인 쪽을 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스크롤 내리는 손가락의 속도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기사들 사이로 지금, 이 순간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처럼 침울함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만 머물러 있는 쪽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사실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어떤 경계에서 고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내적 갈등과 감수해야 할 현실로 가슴 속이 꽉 막혀 있을 때, 늘 타인의 생각과 판단을 배경으로 했던 지난날의 내 선택들을 되짚어보니 원하는 대로 흐르는 듯 보이는 강을 바라보며 침묵과 용기 사이에서 고뇌했던 펄롱의 모습이 현실의 내 모습 같아서 공감할 수 있었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p. 2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ainbass 2025-09-29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책이라고 해서 안 읽고 있었는데, 곰돌이님 글 읽으니 어렵지 않을것 같기도 하고...🤔

곰돌이 2025-09-29 13:16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사두고 계속 읽지 못하는 바람에 영화까지 미뤄지다 보니 킬리언 머피를 얼른 보고 싶어서 그 계기로 최근에서야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강추까지는 아니지만 이 소설 속의 날씨처럼 추운 계절에 어울릴 만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ㅎㅎ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이제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 P19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ᅳ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ᅳ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 P20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ᅳ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P29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아이는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 P81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