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포터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7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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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 구젤 야히나의 <나의 아이들>에 이어 두 번째로 읽게 된 작품인 이 소설은,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대조적인 감정선이 툭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줘서 서서히 스며들다가 완전히 빠져들었다.

기억, 말하자면 역사, 덧없는 회상, 일어났던 모든 일을 모은 미덥지 않은 집합체는 그들을 방치해두지 않았다. (p. 30)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말이 전부인 ‘일레인 신시아 포터’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지금 앤티가 세인트존스시의 묘지에 서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 ‘로더릭 포터’ 씨의 무덤을 찾고 있다. 어떤 결심이 들었기에 그녀의 무거운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게 된 것일까?

일단, 포터 씨의 삶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서인도 제도의 앤티가섬에서 태어난 그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이 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무역이라는 잔혹한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흑인 노예 후손이며,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 역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고, 그럴 줄 아는 아이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기에 당연히 내 아버지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며, 읽고 쓸 줄 알고 심지어 그런 일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존재인 ‘나’는 그들이 살았던 세상, 그들이 존재했던 세상 속에서 그들이 남기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간다.

앤티가섬이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일단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뻥 뚫리는 해변과 미세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하늘은 보기만 해도 여유롭게 쉴 수 있을 만한 곳 같아 보인다. 그렇다. 나는 지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앤티가섬의 절경을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포터 씨는 자연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모른다. 고단한 일상에 아무것도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다.

앤티가섬에서 택시 운전사로 살았던 포터 씨의 일과는 어떤 모습일까.

1922년 1월 7일 세인트폴구의 잉글리시하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아버지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던 그는, 승객을 태우고 짐을 내려주며 명령과도 같은 말을 듣는 내내 벗은 모자를 손에 쥐고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위안이 되는 바닥만 내려다본다. 그리고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영겁의 세월이 깃든 껍데기 같은 양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세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저마다의 역사와 고통을 안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 자신의 고용주 ‘슐’ 씨에게 그의 차를 고스란히 그의 집에 갖다 놓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난다.

어느 날, 포터 씨는 택시 승객으로 ‘바이쳉거’ 박사를 만나게 된다. 고향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소용돌이치는 일들을 겪다가 앤티가섬에 오게 된 그가 본 세상은 폭력이 만연했고 혼란 그 자체였다. 이제는 과거의 기억이 기적처럼 여겨지고, 전쟁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전 끝없이 따뜻했던 햇빛을 그리워하며 “사무엘”이라 자신을 불러주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였던 소년 시절을 떠올리는 바이쳉거 박사에게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깊은 한숨이 느껴진다. 반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포터 씨에게는 그저 맥없이 내쉬는 숨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포터 씨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 ‘너새니얼 포터’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한 적은 없지만 어쩌다 보니 스물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마저도 아는 것은 열한 명뿐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떤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듯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된 포터 씨의 아버지. 세상사 그 어느 것에도 궁금해하지 않는 그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통발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마릿수 정도가 되겠다. 자기 손과 발을 보고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햇빛과 낮과 밤, 이 모든 것은 그를 이루는 일부였으며 자연이 곧 자신이었다. 매일의 고통과 위험은 숨쉬기처럼 당연했고, 그것이 정상이었던, 고통 그 자체의 삶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의 삶에 들어올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사랑은 꼭 그의 삶에 들어왔어야 했지만, 사랑은 너새니얼 포터의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세상은 그의 앞에도 뒤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세상을 이루는 바로 그 땅 위에 서 있었고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영원히 잃었다. (p. 47)

저자는 다시 우리의 시선을 ‘나’의 아버지 포터 씨에게로 옮긴다. 그는 늦은 밤 짙은 어둠과 이른 아침의 엷어지는 어둠 속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며 매일의 위험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낸, 자신의 아버지 그 자체였다.

70년의 생 시초에 70년은 포터 씨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세월로 여겨졌을 것이며, 생의 끝 무렵에는 그가 살았던 모든 날 이 하루,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루와도 같이 느껴졌다. (p. 63)

대책 없이 자신처럼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는 자식을 많이도 낳았다. 고통을 낳듯이 낳은 자식 중 원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고, 사랑이란 건 받은 적이 없어 줄 줄도 몰랐다. 누가 누구를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로 바라볼 필요도 없이 내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경계가 없고 거리가 없이 그저 똑같을 뿐이었다.

차라리 분노든 증오든 좌절이든 같이 감정을 나눌 수 있도록 표출해 주면 읽는 마음이라도 덜 불편할 텐데,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겉으로 감정을 내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들처럼, 심지어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다. 경외감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대해 포터 씨와 그의 아버지는 쩍쩍 갈라지는 나무껍질과도 같은 건조한 모습으로 그 무엇도 궁금해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감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그런 이들을 떠올리며 글로써 담담하게 담아내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니 무연한 마음만 들었다.

왜 부양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자식을 많이 낳았느냐고, 왜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못 했느냐고 소리쳐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는 모습에서, 허약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운명이 물려받아야 할 업보처럼 인생의 비등점 없이 오랜 세월의 풍파를 떠받치며 연약한 모습으로만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삶 자체를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연민 안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더 이상 원치 않는 고통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엄마가 된 ‘나’의 간절함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내 속마음 일 뿐이지만, ‘나’라는 인물은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에 연민으로 들여다 볼 수 있기까지의 시간이 덜 걸렸을 것 같고,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에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게 되었을 것 같다. 이제는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거미줄처럼 그어진 줄을 스스로 거둬내 가슴 속에만 쌓고 지냈던 그 응어리를 세상 밖으로 당당히 드러냄으로써 ‘나’ 자신이 가진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고통까지 전부 토해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요? 내게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당신의 관심을 원할 때 어떻게 하면 관심을 받을 수 있죠? (p. 169)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어, “내가 태어난 것은……”으로 시작하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포터 씨와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갔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세상 모든 포터를 위해 ‘나’는 과거를 끌어올려 글로써 적어 내려갔다. 분명, 그녀는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글 속에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어 하며 자기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또 다른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향한 위로의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이 소설 내용 중에서, 포터 씨 탄생의 순간부터 그의 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가 바닷가에서 맞이한 죽음을 담은 64쪽부터 84쪽까지의 이야기도 절대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태어난 것이 죄가 되고, 고통으로부터 마침표를 찍는 것이 죽음뿐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의 애석함이 너무 슬프고 먹먹해서 나의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게 만들었다.

원망과 서글픔이 없을 수가 없는 ‘나’의 마음을 조심스레 헤아려보자면, 이 소설이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햇빛과 낮과 밤, 이 모든 것의 일부로서만이 아닌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 끝에 존재했던 포터 씨, 로더릭 포터로서의 인생을 끌어내 준 것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은 결코 한 적이 없었던,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 자체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던 황량한 삶을 살아간 사람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말이다.

포터 씨 자신은 아무 말도,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함은 얼마나 슬프며 애초부터 목소리를 갖지도 못했던 것은 얼마나 더 슬픈가.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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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7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관심가던 작가였는데 읽어야 될 작가로 바뀌네요.

곰돌이 2025-09-07 15:33   좋아요 1 | URL
나중에라도 읽게 되시면 리뷰 올려주실 거죠? ㅎㅎ 바람돌이님의 섬세함으로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지네요!
 

<미스터 포터> 중에서...

바다, 바다, 너무나 광활한, 너무나 광활하고도 광활한 바다가 그들, 포터 씨와 바이쳉거 박사 앞에 놓여 있었으며, 둘 다에게 바다는 극도의 위험을, 너무도 어두운 기억들을 품고 있었다. - P16

그는 그 전 모습 그대로, 프라하에서 왔고 그에 수반된 모든 일을 겪은, 죽음에서의 탈출과 낙원에서의 추방과 지도로만 알았던 끔찍한 이름들이 붙은 장소들로의 여행을 겪었으며 이제는 포터 씨로의 그리고 포터씨를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고 또 앞으로의 모습으로 만들 장소로의 여행을 겪은 사람 그대로였고, 그 모든 것은 참으로 하잘것없어 어떤 지도 제작자도 포터 씨의 존재와 그가 어디서 왔는지와 무엇이 그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리하여 바이쳉거 박사는 그것을 지도에서 본 적이 없었다. - P23

포터 씨는 자신이 속한 모든 포터들을, 그리고 어쩌다 자신이 그 혈통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 열망이 없었고, 과거를 캐물어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대지의 모양이나 하늘의 색을 서술하라는 요청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모든 진실한것에 선천적으로 깃들어 있는 확신을 실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P31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세상에 들어오지 않는다. - P46

너무나 많은 고통이 포터 씨에게 따라붙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이 그를 소진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그는 남기고 갔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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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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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님의 책은 인물이 남긴 잔상이 오래가는 편이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소희, <각각의 계절>에 마리아, <안녕 주정뱅이>에 수환과 영경이는 여전히 내 주변을 채우고 있는 사람처럼 멀지 않게 느껴진다.

이들의 삶을 통해 나의 위선을 확인하면서 그동안 소홀히 하고 놓치고 있던 내 주변에 가까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후회와 미안함을 느끼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지금까지 읽은 작품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의 틈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 읽은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각각의 상황 속 세밀한 감정들을 느껴보면서 스스로 돌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나의 시간을 끄집어내고, 현재의 감정을 살펴보며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에 담긴 7편의 단편 모두 애써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읽어 내려갔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얕은 잠에서 잠깐 깼을 때, 완전히 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찰나의 순간마저도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흘려버리지 못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장을 읽을 때면, 여기저기 붙어 있는 묵힌 감정들을 날카로운 것으로 싹싹 긁어서 한데 모아 남김없이 탁 털어내는 것만 같았다.

시곗바늘이 돌면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시침과 분침이 시시각각 낯선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으면서 흘려보낸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나아지고 마음이 아물고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울지도 않고 글을 다시 쓰게 될 그 시간, 그때의 시곗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게 될지 알지 못해 그녀는 못 견디게 불안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거칠고 두터운 시간이 흘러갔다. (p.34)


사회 초년생 시절, 모든 것이 불안정했지만 완벽하고 싶은 마음에 무모한 열정을 앞세워 이리 돌리면 이리 돌려지고 저리 돌리면 저리 돌려지듯 휩쓸리면서 앞질러 가는 이들을 쫓아가며 사느라 참 바빴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은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서서히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되며 이내 줄어든 열정은 다른 곳에 쏟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랑. 그리고 사람이 복병이었다.

현재의 나로부터 해방시켜줄 만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건져 올린 기억 속에서 사랑과 실연의 극복 또한 참 다양할 것이다. 일이든 사랑이든 극에 달했을 때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치졸함, 이 치졸함이 결국 나를 위한 극약처방이자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던 그 시절을 화끈거리며 떠올려본다.

누구나 그렇듯 대단하지 않은 것에 흔들리고, 별거 아닌 일로 극복하는 삶을 반복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내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 보면 누군가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무망감이 희망으로 방향을 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겪는 고통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민감한 인식을 가진 저자가 우리에게 조금은 시리지만 담담하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그리고 이 위로의 말은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말로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p. 80)


이 소설은 자꾸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게 만든다.
그래도 괜찮을 것만 같다.

내가 탄탄하게 다지고 쌓아 올린 이성의 끈을 조금도 놓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느 하나도 남김없이 터트리고 싶은 이중 심리로 복잡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고민 없이 책을 들고 여러 감정을 느껴보는 그 자체가 많은 도움이 된다. 한 감정에 오래 머물러서 굳어질까 봐 조금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때가 있어서인지, 생각이 멈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나에겐 비극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도 이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꿈에서 깨고 나자 금방 잠들면 또다시 그 꿈이 이어질까 봐 억지로 피곤한 눈을 부릅뜨고 현실의 공기를 충분히 마신 뒤, 꿈이라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에야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나의 반응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현실을 살 때는 아무리 깨고 싶은 꿈을 꿔도 그따위는 너무 아무것도 아닌 거다.

이제는 흐릿하게 맴돌았던 기억들이 투명한 물 위에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하나, 둘 드러나는 이야기가 예전보다는 조금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이때 나는 느낀다. 빛이 바랬다는 것을.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p. 118)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갖가지 감정들을 직접 읽어보며 충분히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줄거리를 생략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리고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그 마음을 대신해 주는 이야기로 가득했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글은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느낀 내면의 서늘한 고독을 끌어내는 고유의 결이 내 감정에 더 솔직해지고 싶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 몸에서 비워야 할 게 있다면 우선 드러내 보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싶다.

아슬아슬한 조화를 이루며 불안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남긴 흔적에는 환멸감, 자격지심, 둔감한 무관심, 분노, 증오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거창한 무언가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보잘것없는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나를 얼마나 끌어올려 주고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말이다.

날씨도 자기 계절을 찾아가듯이, 나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조금은 느슨한 마음으로 지켜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 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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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4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4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bass 2025-09-06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연극을 검색하다가 ˝봄밤˝이라는 연극 제목이 있었는데 <권여선 작가>의 글을 무대로 만든거라고 해서. 저는 처음 들어본 작가이길래 책을 검색했더니. 저와 <친한친구가 좋아요> 한 책이라며 곰돌이님이 검색되더라구요. 오홍, 신기했습니다. 곰돌이님이 좋아하는 작가였다니.

곰돌이 2025-09-06 05:38   좋아요 1 | URL
권여선 작가님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에 수록된 단편인데 몇 달 전에 영화로도 개봉됐어요. 최근에 연극 ‘봄밤’으로 초연된다는 기사 저도 읽었는데 괜히 반갑더라고요 :) rainbass님도 한 번 읽어보세요. 아, 그건 그렇고 하필 제 글이 검색되는 불상사를 겪으셨군요. ㅎㅎ
 

얕은 잠에서 깰 때마다 시계를 보았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게 두려웠다. 시곗바늘이 돌면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시침과 분침이 시시각각 낯선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을 들으면서 흘려보낸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나아지고 마음이 아물고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울지도 않고 글을 다시 쓰게 될 그 시간, 그때의 시곗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게 될지 알지 못해 그녀는 못 견디게 불안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거칠고 두터운 시간이 흘러갔다. - P34

단단한 불신과 의혹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채 하염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 밖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마치 언젠가 그녀 자신이 자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던 것만 같은 달콤한 기시감이 강물처럼 그녀를 감쌌다. - P40

현실의 시간은 밤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기억의 한낮을 산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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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8-28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집, 정말 좋아요!
곰돌이 님의 리뷰 기대해요^^

곰돌이 2025-08-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맨 처음에 실린 ‘빈 찻잔 놓기’만 읽고 언저리에만 맴돌았을 뿐인데도 좋네요. 이따금 자목련님이 예전에 올려놓으신 글을 읽어보는데, 그것 또한 잘 읽고 있어요. 글이 너무 좋아서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참았고요! (혼자 몰래 야금야금) 앗참!! 저의 리뷰는 절대 절대 기대하지 마시길요 ㅎㅎ
 
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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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의 방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노동자 마틴 에덴은 우연히 만난 상류층 여성 루스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어울릴 만한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 축적된 습성을 버리고 허기를 채우듯 지식을 쌓아갔다. 새로운 세계에 금방 눈을 뜬 사람처럼 발견하는 기쁨과 흥분으로 들뜬 그의 열정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될 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지만, 너머의 삶에 가닿기 위한 매 순간 쉬지 않는 노력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세계에서 감행하는 모험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랑의 모험이었다. 세계가 그토록 경이로운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들 때문이 아니었다. 루스가 그 안에 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이제껏 알고, 꿈꾸고, 상상한 것 중에 가장 경이로운 존재였다. (1권 p.137)

그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던 열망이 원동력이 되어 묵은 더께를 털어내듯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움의 노력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삶에서 치열하게만 살았던 마틴이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상류 사회의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된다. 그들은 노동계급 사람들과 사는 동네와 먹는 음식의 차이만 다를 뿐 아니라 분명, 그가 찾고자 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막연한 기대와 상상이었을까.

동경의 눈빛으로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말은 무거운 삶의 짐을 지탱해 줄 바닥짐 하나 없이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에게 묻은 흙은 스스로 털어버리며 살아온 마틴에게,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했다. 그저 자기 과시로만 가득한 현학적 허세였다. 멀리서 보면 격조는 높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삶에서 길어 올린 통찰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흡수하지 못한 남의 말만 복제한 알맹이 없는 말들이었다.

자기가 속한 계급의 모든 이들, 그리고 루스의 계급에 있는 이들은 작게 한정된 공식에 따라 작게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군집적인 존재들이었다. 끼리끼리 모여서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틀에 박힌 삶을 살면서, 그들이 종속된 그 유치한 공식 때문에 개인이 되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다. (p. 63)


마틴과 루스의 사랑, 이것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첫 만남에서 느꼈던 뜨거운 열정, 설렘, 욕망 등의 감정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마틴은 자신을 향한 루스의 사랑보다는 창조적 자아의 힘이 그의 가슴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루스 또한 사랑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에 홀로 고뇌하고 있었다.

지극히 생계와 연관된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는 루스의 입장에서는 마틴이 다소 낙관적 편향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분명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이긴 하지만, 희망 가득한 계획처럼 모든 게 척척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꼭 붙잡고 행복과 성공을 추상적으로 그려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루스에게는 당장에 ‘결혼’이라는 목표를 단단하게 받쳐 줄 안전한 길이 중요하다.

마틴과 루스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때마다 허탈감이 들었다. 상반되는 입장 표출에 체념하는 기운만 느껴질 뿐이었고, 직접적인 상처만 최대한 피하는 듯한 배려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랑의 속삭임은 오히려 고단하게만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자기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자기 부모님의 적개심이 두렵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이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사랑만은 그렇지 않아. 가다가 나약해져서 맥없이 머뭇대지 않는 한, 사랑은 잘못 갈 수가 없어.” (p. 78)

정말 그럴까. 믿음만 존재한다면 가능한 게 사랑일까?
너무나도 다른 삶에 길든 상태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이 과연 짓눌리는 현실의 무게를 ‘함께’ 견딜 수 있을까?
루스의 조언에 늘 따라오는 마틴의 확대 해석은 이따금 숨이 턱턱 막혔다. 지나친 자기 확신이 자만심으로 경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굶주림과 궁핍이 진작에 알려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속 좁은 사람들의 관습적인 도덕을 비웃는 사람입니다. (p. 90)

그럼에도 마틴이 루스를 만나게 된 순간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한 노동자 계급에서 올려다본 우아하고 고상한 루스와 그녀가 속한 상류 사회를 동경했다. 그녀의 후광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그 삶에 가닿기 위해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었고, 결국 그가 가진 글쓰기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순간과 내 삶의 진실을 알게 해주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 아니며,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세상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날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한 해부가 자행되었다. (p. 174)

당장에 주린 배를 채울 걱정뿐이었던 지옥 같은 삶, 내일 눈 뜨는 것조차 고문이라는 생각에 잠들고 싶지 않은 그 순간조차도 고된 노동으로 저절로 눈이 감겨버리는 삶의 반복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삭제되었던 마틴의 인생에 루스와의 만남은 ‘인생의 종’이 울린 순간이라 생각된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집요함을 끌어올리고, 실패에 좌절하는 대신 자신을 위로할 줄도 알았으니 말이다.

마틴이 지식을 채우고 흡수하는 것에 온 에너지를 쏟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자신의 믿음과 사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의심하고 밀어내는 태도는 갑갑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정감 없는 삶 속에서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채 불안하게 살아오다가 뒤늦게 발견한 것들을 하나하나 삶의 진리로서 단정 짓는 것이 어찌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그에게 조심스레 말해주고 싶다.
이론상의 진실과 현실은 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모순을 조금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느냐고.
마틴처럼 치열하고 맹렬하게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덜 느낀 채, 세상과 사람의 이중성에서 느껴지는 환멸감 따위는 이젠 익숙하게 느껴질 만큼 타성에 젖어가며 평온함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향해 온 힘을 쏟으며 달려가는 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하는 것, 그건 막상 내 손에 쥐어지고 나면 내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이 생각처럼 대단히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디에도 진리는 없고, 진리에도 진리는 없을 것이다. 진리라는 건 아예 없을 것이다. (p. 236)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절망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삶의 방향을 잃었던 시절의 내 마음 한구석을 늘 채우고 있었던 공허함과 다시 마주하는 것이 아리기도 했지만, 나만이 눈치챌 수 있는 현재의 변화에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마틴의 삶을 들여다보니,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아니, 현실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소유하려고 했던 것이 나에게 아무런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해 다시 극복하려고 애썼던 내 과거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그 무엇도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생각에 도무지 앞날이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격앙된 감정으로 내 몸이 바닥에 미세하게 보이는 틈 사이로 아예 녹아 들어가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 싶을 만큼의 무너짐에도 어느새, 바깥 공기와 차단해 버린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지고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다시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온 세상을 채우고 있는 움직임과 소리에 ‘이런 삶도 괜찮아.’라고 받아들이기까지의 고난과 내가 선택한 적당한 아름다움을 보았던 그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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