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일상의 조각들 덕분인 걸까.
오늘은 유난히 하늘도 맑고 파랗게 느껴진다.

“학교 가는 길바닥에 감꽃이 떨어져 있는 거야. 아휴, 그게 뭐라고 글쎄 그걸 잔뜩 주워담아서 책가방에 넣었어. 그 감꽃을... 아니, 그게 그땐 그렇게 신기하더라고. 허헛. 학교 끝나고 집에 가서 책가방을 열어보니까 아주 그냥 곤죽이 되어 버렸지 뭐야. 아이고, 내가 세상에 그랬던 적도 있었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보며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셨던지, 비 오고 바람이 세게 불면 우산을 손에 쥐고 걷는 것도 어찌나 심장이 벌렁벌렁 한지 모른다면서 옛날 얘기를 해주시는 외할머니를 바라보니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는 시시콜콜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하는 편은 아닌데, 모처럼 뵈러 간 외할머니 앞에서는 왠지 모를 안전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착착 부닐면서 온갖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자주 뵙지 못하는 죄송스러움 섞인 민망함에 주절주절 하는 내 얘기가 할머니의 왼쪽 귀를 타고 오른쪽 귀로 나가는 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해골 복잡하게 뭔 놈의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느냐는 말씀에 난 그냥 씨익 웃어본다.

외할머니가 챙겨주신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쓸어 담는 엄마의 모습이 집에서 볼 때와는 달리 깜찍하면서도(?) 왠지 들떠 보인다.
통통하고 아담한 체형에 얼굴까지 비슷한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니 뽀얗고 귀여운 북극곰 같다.

꽃처럼 예쁘고 젊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같은 아픔을 겪고 살게 된 눈앞에 있는 중년의 자식을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모습과 또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밖에 없는 짙은 슬픔의 감정을 참고 사는 나의 엄마.

이 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니 나도 금세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얼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입 쪽 빨아먹고 추스르면서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를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본다.


이제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외할머니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신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살아라. 마음의 병이 있으면 죽는 거다.”

우리 외할머니답게 진하고 묵직하게 몇 마디 하시고는 이제 그만 부지런히들 가라고 재촉하신다.

난 사실 감꽃을 처음 봤다.
아마 본 적이 있더라도 관심도 없이 지나갔을 거다.
조심스럽게 피어있는 감꽃을 보면, 이제 외할머니 생각부터 날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샀다.


<내가 되는 꿈>,<쓰게 될 것> 이후로 오랜만에 최진영 작가님의 <어떤 비밀>을 골라 봤는데, 내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들켜버린 듯한 느낌을 줬던 두 권 모두 너무 잘 읽었기 때문에 아마도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P. 21) 사는 대로 사는 것 같지만 오늘은 언제나 처음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술술 잘 읽히는 반면 가볍지 않은 내용에서 등장인물들이 주는 여운이 오래간다. 이번에 선택한 것은 <편지>,<기도의 막이 내릴 때>이다. 최근에 읽은 <악의>는 조금 아쉬웠는데, 그래도 재미는 있다.


살만 루슈디의 책은 처음 접한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과 <광대 샬리마르>를 골라 봤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사람을 암울하고 염세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삶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줄거리도 와 닿고 구매자 평도 좋아서 선택했다.
“폭력에 예술로 답하겠다”는 그와의 첫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혁진 작가님의 <광인>은 우리 부서 과장님이 추천해 주신 책 중 하나인데, 너무 잘 읽었다면서 몇 번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정말 잘 읽어봐야지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앞으로 출근할 때마다 읽고 있느냐고 물으실 것 같다.
운동이든 뭐든 꾸준히 열심히 하시는 걸 보면 알 수가 있다.
분명히 물어보실 거다.

그리하여,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예술과 위스키를 곁들인 40대 두 남성의 대화를 담은 0장을 시작으로, 1장부터는 좀 더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잘 읽힌다. 사실적인 감정묘사 덕분인 것 같다.

(P. 38) 그래도 해야죠. 아직 싫어지진 않았으니까요. 이렇게나 힘들고 고달프면 싫어져야 하는데 그래지지가 않으니까요. 제가 한 선택은 여전히 유효한 거죠. 아마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렇게 싫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어요.
나는 준연을 물끄러미 봤다. 좋아하고 일면 존경하는 마음만큼이나 안타까웠다. 준연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준연은 허심하게 웃었다.


이브 엔슬러의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는 책 받고 훑어보니 목차부터가 마음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이 묻어나는 기록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 괴롭지만 피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계속해서 듣고 싶다.
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 고통일지라도.

분명, 그 고통은 강인함을 품고 있다.

(P.13)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과 순간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지독히도 외로운 우리가 갈구하는 손길, 잃어버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벽을 허무는 이야기, 벽을 세운 우리에게 왜 그랬느냐고 자문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서보 머그더의 <도어>는 책 내용과 역시 구매자 평이 좋았기에, 그리고 나는 사람을 향한 ‘오해’를 벗기고, ‘이해’하는 마음이 아직 부족하다 느끼기 때문에 사람 간의 관계와 심리를 담은 책들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P. 15) 물방울들 사이에서 내 인생의 조각들이 휘말려버린 그 강은 이미 굽이져 흘러버렸으니 그곳에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에메렌츠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했는데, 과거를 위해 미래에 그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해두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인지하는 것은 아직 요원했다.


책을 받고 나니 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만족이란 것도, 행복이란 것도
내가 그렇다 느끼면 그게 만족이고 행복이란 것을 이렇게 또 실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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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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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마주하게 된 사람들에게서, 우연히 포착한 사물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점점 그것들과 서서히 혹은 너무 빨리 멀어지거나 다가가지 못한 어느 한 구석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 않음에도 용기를 내고 삶을 더 잘 살아내고 싶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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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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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불려지길 원하는 사람일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타인의 생각과 시선을 그토록 신경 쓰며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잘 하지 않는 생각들이다.
그런데 권여선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 다시 이런 상념에 빠지게 된다.


단 한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8편의 단편으로 담아냈다.


한 사람의 내면으로 천천히 다가가 들여다 본 그들의 여정은, 낯선 거리감 속에서 마치 조금씩 반짝거리는 빛 줄기를 만난 듯 한 발 나아간 앞 날이 예상되는 누군가도 있었고, 세상과는 고립되어 자신은 겪어보지 못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을 통해 더욱 더 깊은 어둠으로만 빠져들어가는 누군가도 있었으며, 서글픈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세상에 뿌려진 수 많은 타인들을 만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감정들을 파고 들어가며 살아가야 했던 누군가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마주했다.

<모르는 영역> 편에 담긴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관계 속에서의 위태로움을 가까이에서 바라봤던 입장으로써 안타까움과 불안감을 가진 채 들여다 봐야 했지만, 서서히 느슨해지는 이들의 변화에 묘한 반가움도 느낄 수 있었기에 괜시리 뭉클하기도 했다.

각자의 사정을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포기는 하지말라고 하는 듯,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심어주고 싶었던 노력과 애달팠던 마음이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그 기쁨을 저버리지는 말라고 하는 듯.


물론, 때로는 포기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참 씁쓸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오히려 당장에 불행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예쁘고 화려한 포장지로 감싼 내용물을 꺼내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 조심스럽게 뜯어보는 그 순간의 행복도 물론 좋다.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좋은가. 기대감을 가져본다는게.

그런데 나와 우리 주변 사람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이, 그들의 실제 음성이 들려오듯 그 감정 그대로 전달되는 공감의 글을 볼 때만큼 와닿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번에 다시금 실감했다.


엄마가 떠넘기고 간 그 빚을 고스란히 받은 언니가, 또 다시 어린 동생인 소희에게 주고 떠나버린 이야기를 담은 <손톱> 편은 어린 소희에게 이 세상과 상황이 너무나 가혹했다.

어떻게든 또 감당하고 살아내야 했기에 남들 눈에는 모지락스럽게 보일지언정, 다른 방법이 없다.
먹는거 입는 거 줄이고 줄여서 돈만 미친듯이 벌고 살아야 된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도대체 언제쯤에야 끝날지, 자신의 나이가 얼마나 더 들어야 좀 나아지는건지 까마득하기만 한 소희의 이야기는 쉽게 다가가고 안아줄 수 없을만큼 조심스러웠다.
사람에게 마음을 많이 다쳤을 그녀에게 무슨 수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섣부른 위로는 소희의 마음을 더 다치게 할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게 할 만큼, 그렇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할 만큼 불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느끼게 하는 가혹함을 줄까봐.

그러니 이 순간의 감정들을 담아 내는 저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그럼에도 우연히 만난 자신과 닮은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던진 웃음에 같이 웃어주는 소희다.
어느 날 운 좋게 앉아서 갈 수 있었던 버스 안,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따뜻하다’ 느끼며 이 순간의 좋음을 느껴보는 그런 소희다.


기대되는 미래를 바라보며 행복을 꿈꾸는 사람이 있듯이, 당장에 고통이 덜 한 삶, 덜 불행한 삶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저자는 알아주고 있었다. 이렇게 드러내기 보다는 덜어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도 박탈감 느끼지 않도록 인간의 정신을 곰곰이 들여다 본 사람처럼 생각해주는 저자의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용기가 생긴다.
이 용기가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잘 살고 싶어졌다. 더 잘 살아내고 싶어졌다.

바닥에 떨어졌다고 그대로 포기하지 말고, 그럼 그 바닥에 맞닿아진 채로 또 살아보자 생각하면서 표면적인 변화가 없더라도 그냥 잘 살아보자라고 하는 그 힘을 얻었다.
주어진 삶을 만끽하다가 괴로운 날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럼 그 삶 마저도 살자. 잘 살자. 더 잘 살아내보자.


그들은, 우리는,
비록 자신들이 원하던 것이 아닐지라도 주어진 대로 또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드러내기를 주저하며 덜어내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느꼈을 서글프고 애달픈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담아준, 또 그렇기에 쓰라린 마음으로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 준, 하지만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 않아도 위로를 받음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아직 멀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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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홀가분함은 너무 가벼운 대신 밀려오는 분노와 서글픔은 가눌길 없이 묵직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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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껍데기 속에 갇힌 느낌, 바삭하게 구워지는 과자처럼 겉은 점점 검고 단단해지는데 속은 끓는 시럽처럼 뜨거운 핏물이 휘도는 느낌. 겉과 속이 분리된 느낌이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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