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
서보 머그더 지음, 진경애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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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 기너, 그리고 사람들의 운명을 도와주는 존재 아비가일의 신비로움까지 애잔하면서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소설은 다음 장, 그다음 장 계속해서 넘겨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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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일
서보 머그더 지음, 진경애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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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를 다시 만났다.

저번에 읽은 <도어>는 한 인간이 살아가며 겪은 엄청난 사건과 그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극적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던 점이 오히려 내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 같아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와서 좋았다. 나쁜 평판은 듣고 싶지 않아 타인에게 친절은 베풀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그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는 않은 솔직한 심리 묘사는 세밀했고 따끔했다.

삶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일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버겁다. 어쩌면 그래서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인물의 감정이 마를 대로 마르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 것 같아 더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가보다. 또 반대로 누군가는 더 아플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사소한 일에 힘들어하는, 이를테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유난이다’ 타박을 들으며 힘겨워하는 사람을 보면 그 또한 여간 애타는 게 아니다. 때론 오히려 더 애잔하게 바라보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들려주고 받아들이는 감정과 살아가는 방식 또한 제각각인 사람들을 향해 절대 쉽지 않은 이 삶을 살아내는 모습 또한 다양하게 볼 수 있도록 많은 책이 쏟아진다. 기쁨과 즐거움을 숨기지 말고, 아픈 것도 눈치 보며 아프지 말라고 하는 듯이, 읽는 동안이라도 내 안에 들어차 있는 온 감정을 맘껏 느껴볼 수 있도록 말이다.

바쁠 땐 책 읽는 것도 정말 말 그대로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인지 세밀하게 쪼개져 있는 사람의 심리가 저자의 필력과 만나 그 책의 등장인물들이 주는 여운이 오래갈 때, 이럴 때 정말 기분이 좋다. 그래서 <도어>의 여운이 아직 다 가시지도 않은 채, 이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열네 살 소녀 ‘기너’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 까마득하게 먼 국경에 있는 머툴러 김나지움 기숙사로 들어가게 된다. 한 집에 살고 있었던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프랑스 여성 ‘마르셀’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추축국인 헝가리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녀의 아버지는 침묵을 지키기만 할 뿐이다.

헝가리의 장군인 아버지의 딸로서, 그녀는 슬픔과 절망을 최대한 자제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을 제외하고는 부족함 없이 자랐을 것으로 보이는 이 꼬마 아가씨가 자신 못지않게 슬픔을 숨기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걸 보니 내 가슴의 온도가 조금씩 높아져 간다.

고모와 마르셀, 그리고 파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대위 쿤츠 페리,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지만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걸로 보이는 아버지와 무덤에서 조용히 잠들어 계신 어머니까지 이 모두와 헤어져야 한다. 집에서 멀어져만 가는 차 안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감당하기엔 아직은 너무 어린아이다.

(P. 16) “넌 다른 세계로 가는거야.” 장군이 말했다.

변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숙사로 가기 전 아버지가 사준 곱고 가는 목걸이를 마지못한 듯이 받았던 기너. 그리고 용돈으로 고른 재떨이를 사며 아버지에게 드렸던 순간, 부녀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바라만 봤던 그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오고 가는 말없이 슬픔을 절제한 부녀의 눈빛은 이미 저울로도 잴 수 없을 만큼 슬픔의 무게로 무겁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심정으로 지내는 기너의 기숙사 생활은 그저 ‘갇힌 사람’으로만 보이면서도, 그나마 이곳이라도 올 수 있었던 기너의 삶 저편으로 그녀와 비슷했던 나이에 남의 집 하녀로 들어갔던 저자의 또 다른 소설 <도어>에 나온 에메렌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이미 모두 잃었기에 잃을 게 하나도 없었던 에메렌츠와 엄격한 기숙사 규칙에 따라 가진 소지품을 모두 내놓아야 했기에 핸드백에 들어있던 가족들의 사진과 빗, 집 열쇠, 잔돈 등의 지나간 삶을 기억나게 할 보물들이 많은, 그래서 빼앗길 게 많았던 기너. 두 소녀의 불행이 모두 가련하다.
더 좋아지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내 삶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간다는 것은 다를 바 없이 불행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어느 날, 학교의 경계를 두르고 있는 높은 돌담 벽 안쪽으로 한 소녀의 석상을 보게 된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친구들이 ‘아비가일’이라고 소개해 준 이 석상은 ‘아주 나쁜일’이 생기면 항상 자신들을 도와준다고 말한다. 학교의 규칙들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학급 친구들의 이런 유치한 이야기까지 들어주며 지내야 한다니 걱정만 쌓여간다.

그 동안 풍족하고 인정받는 삶 속에서만 지내왔기에 다소 편협한 면도 보이는 그녀의 학교생활이 도통 밝아 보이진 않다.
세상의 중심을 나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이 꼬마 아가씨도 피해 가지를 못 하니 말이다.
기너를 향해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얄궂은 놀이가 시작된다.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참아본다.
토요일 오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시간만 오면 맘껏 투정을 늘어놓을 수 있고, 해결책을 주실 테니까 지금 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조금만 참아보자. 조금만.


소식이 왔다.
아버지 전화가 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얼마나 기쁜가. 떨리는 가슴으로 전화를 받으러 가는 이 기쁨.
자신의 우울함을 전할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랏일로도 힘드시니 즐거운 소식만을 전달했으면 한다는 사감의 말씀에 그저 잘 지낸다고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

기너는 계획을 세운다.
지옥에서의 탈출.

기차를 타고 여기서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괜찮다.
어디든 군부대가 있으니 자기소개를 하고 장군인 아버지가 데려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이 지옥 같은 학교에서 자신이 얼마나 우울하게 지냈는지를 알면 절대 가만히 계실 아버지가 아니니까.

감옥처럼 폐쇄된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기너와 감옥처럼 폐쇄된 이곳을 ‘일부러’ 찾아내 그녀를 보낸 아버지.

그녀는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부다페스트 집으로 갈 수 있을까?


기너는 이제 마음이 점점 힘들어지다 보니 그저 아이들의 유치한 이야기라 흘려들었던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
가장 힘들 때 도움을 준다는 석상, 아비가일.
아무도 없이 혼자인 것 같지만,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부터는 어제보다 나은 삶이라 여겨지며 또 살게된다. 그래서 떠올렸나 보다.

그런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 엉킨 실타래 같았던 친구들과의 관계가 기대도 안 했던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풀리고 뜨거운 눈물로 서로 끌어안는 순간을 맞게 된다.
공습 방어 훈련을 위해 들어간 지하실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과 전선에 있는 자신의 아빠와 오빠를 떠올리며 제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그 마음속에서 아이들은 그동안에 철부지 같았던 자신들의 행동들을 떠올린 것이다.

더 늦게, 조금만 더 천천히 세상을 알아도 될 순수하고 아직은 실수가 많은 나이인 이 어린 소녀들조차도 폭격과 전쟁, 그리고 죽음 앞에는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만든 거다.
상황 자체가 참 슬프다.


무거운 이야기들만 담고 있진 않다.
이 ‘요새’안에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하기에는 상상력이 마구마구 샘솟을 시기의 이 말괄량이 아이들은 얌전한 듯하면서도 얼마나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거릴 일이 많은지 모른다.

이 리뷰에 담지 않은 많은 이야기 속 일렁거리는 모든 감정선을 포함해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 기너, 그리고 사람들의 운명을 도와주는 존재 아비가일의 신비로움까지 애잔하면서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소설은 다음 장, 그다음 장 계속해서 넘겨 보게 하였고,

<도어>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전쟁의 아픔을 담고 있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가며 살 수 있었던 삶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떠올려야만 하는 수많은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며, 잊지 않으려는 저자의 마음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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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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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보다는,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읽어내려갔다.

노트에 와 닿는 단어들을 적어본다.
믿음과 아늑함이라는 단어를 적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알 수 있었다.
무엇이 필요했는가를. 무엇이 그리 힘들게 하였는가를.

책을 읽으면 나의 욕심도 느낄 수 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그저 흔들리는 내 머릿속을 ‘잠깐’이라도 보살펴 준다면 난 그걸로 됐을 뿐이었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나를 잠시 해방시켜 주기만 해도 성공적인 하루가 되었을 테니까.

책이 한 권 늘어나고 또 한 권이 늘어난다.
이제는 나에게 뭔가 주길 바란다.
나의 마음속 기도에 응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내 뜻에 기어코 응해준다.

(P. 9)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


궂은비가 단비로 바뀌기까지 무진 애를 썼던 사람들과 아직도 내가 사는 세계 저편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좇는 바람에 피곤해진 사람들이, 감정의 폭발 없이도 그 감정의 층위를 불편하지 않게 섞어주는 막연하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잠시 마음을 식혀보는 건 어떨까.

기쁨은 고통이 따르고 삶에는 죽음이 따른다는 말을 들을 때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감수해야 할 게 많은 그런 기쁨과 삶은 얻고 싶지 않았고,
거꾸로 고통 뒤에 기쁨이 오고, 죽음 뒤에는 삶이 온다는 마음을 가져보려 노력도 해봤지만, 그 또한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따금씩 떠올려지는 힘들었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 마음의 괴로움이 너무 커 얼른 밀어 넣어 버리곤 했는데, ‘힘들었던 때’를 ‘재생의 시간’으로 달리 생각하며 떠올려보니, 불편함이 조금은 덜어지는 걸 느낀다.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돌보고 지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외면을 하고 감추려고만 했으니, 치유의 시간도 갖지 못하고 씻겨 내려가지 않아, 되려 그 괴로움이 몸의 문신처럼 새겨지기만 했다.
나뿐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에선 안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이 스스로 다독이고 얼른 다시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던지.

(P. 37) 어떻게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인식하는가? 우리 안에 난데없는 정적이 깃들고, 심장에 비수가 꽂힌 듯 출혈이 이어질 때이다.

독서를 하면 나에게 남는 것은 사랑이다.
정말 사랑이다. 그게 전부다.
남는 게 사랑이라서 정말 너무 감사하다.
희미하게 들리는 게 아니라서.

나 역시도 결핍으로 시작한 독서라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을 읽으며, 제각기 독서를 하는 이유는 다를지라도 그 마음을 나누며 공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려가 보고,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에 괜한 마음의 든든함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너무 슬프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P. 113) 당신은 죽음보다 해로운 지혜를 내게서 지워버렸다. 당신은 내게 진정한 건강인 열병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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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6-21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도 개정판이 나왔군요. 독서도 사랑이고 보뱅도 사랑입니다~! 보뱅 책을 읽으면 치유가 됩니다~!!

곰돌이 2025-06-21 20:43   좋아요 1 | URL
사실 읽기 전에는 뭔가 간지러운 말들(?)이 이어지려나 싶어서 살짝 주저했었는데 아니여서 더 좋더라고요..보뱅님 통찰력에 중간 중간 순살이 될 뻔 했어요..
 
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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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모르는 이의 통증을 들여다보는데 왠지 그들이 모두 아는 얼굴일 것만 같다. 요구하지 않은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들춰낸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을 누군가가 없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듯 에둘러 표현하는 저자의 방식이 나에게 많이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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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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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에 시린 발보다 뜨거운 여름날 냉증으로 차가워진 발이 더 견디기 힘들다는 우리 언니의 말에 나는 미지근하게 아, 그렇구나. 해버린다. 내 손과 발은 사계절 내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공감을 못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대단히 거창한 대꾸를 바란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이렇게 사소한 말 한마디 못 건네며 공감을 못 해준다. 이 화상.

가만있자니 마음이 쓰여 뒤늦게나마 도톰한 기능성 양말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런 걸로 될 게 아니야!! 발 속이 찬거라구!!”
이 독사가 나에게 침을 쏘고 휑 가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는 어떤 계기 때문에 사소한 통증이나 고통쯤은 참을만한 것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생겼다.
소중했던 이가 버텨냈을 삶과 맞바꾼 고통을 떠올리면, 산 사람이 견뎌내지 못할 고통이나 통증은 없다고 생각하게 돼버렸다. 이렇게 한 가지만 생각하다 보면 정작 잃어가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랬다.
이렇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심함을 보이고 사는 내가 주로 손길이 가는 책들은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라니.


7편의 단편으로 엮인 박솔뫼 작가님의 <그럼 무얼 부르지>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당신과 내가 각자 겪고 있는 통증과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을 ‘저자만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서로의 통증을 나눠보는 느낌이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기분으로 사는 사람에게
너와 나 다르지 않다고.


봄이 오면 겨울 내내 움츠리고 있던 몸도 기지개 한번 크게 켜서 콧바람 쐬러 여행도 가고 보고 싶은 영화 보러 극장에 갔다가 친구들 만나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는 사람들.

그래.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

출근해서 바닥을 쓸고 서빙을 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손님들에게 나갈 오렌지와 사과를 깎으며 그들이 남긴 것들을 어떤 건 먹고 어떤 건 버리면서 치우는 와중에, 출근하기 전에는 뭘 하냐는 사장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는 ‘나’는 추운 겨울이든 따뜻한 봄이든 같다. 결국엔 모든 것이 같다.

(P. 9) 봄의 따뜻함이 마음을 녹이기 시작할 때쯤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책 맨 처음에 수록된 「차가운 혀」의 등장인물인 ‘바’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나’는 재떨이를 비우고 안주로 나갈 오렌지와 사과를 깎는 자신의 모습 그 이상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나 보다.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벽이 주는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살고 있다.

무섭지 않다.
그들이 본 세계를 보질 못해서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니까.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의미를 잃은 사람들처럼.
궂은비에 몸이 추~욱 늘어진 풀 같다.


어느 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없는 ‘해만’이라는 섬을 찾은 한 남자. 존속살인을 한 범죄자가 해만에 몸을 숨겼는데 한참 후에야 그를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보고 이곳을 알았다고 한다. 찾는 사람만 찾는 곳인가 보다.

앞으로 몇 달 간 묵게 될 숙소에 이미 지내고 있던 사람들과의 대화가 이어지고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수도가 싫어요. 수도로 돌아가기 싫어요. 돈을 마련해 다시 해만으로 올 거에요.”

집값이 너무 비싸 내려온 사람들부터 나와는 다른 저편에서 지내는 사람들한테서 멀어진 마음에 이곳을 찾게 된 사람까지.
내가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소란스럽게 떠드는 무리로부터 피해 그들은 해만을 찾고 또다시 떠난다.

뚜렷하지 않은 무언가가 주는 불안함에 허우룩한 마음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며, 남은 건 텅 비어 버린 자신의 강렬해짐을 발견하는 것 뿐이라고 하는 「해만」편은 공허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P. 77) 나는 남은 날들을 생각했는데 잠시 아주 기쁘다가 말았다. 그러고는 해가 낮은 건물을 적시는 것처럼 쓸쓸함이 천천히 마음을 적셨다.


「해만의 지도」편에는 해만에서 만났던 인연으로 시간이 지나 또다시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신없이 보통의 직장인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해만에 갔을 때 묵었던 숙소에서 만나 알게 된 ‘우석’을 만나기 위해 약간의 설렘을 가친 채,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는 ‘나’가 등장한다.

우석과 카페에서 만나 자신이 그린 해만의 지도를 서로 들여다보는데 우석도 자신의 노트를 꺼내 또 하나의 지도를 만들어본다. 해만이라는 공통된 장소를 가지고 나의 기억과 그의 기억이 겹쳐진 지도.
그리고 그때 존속 살인을 하고 해만으로 숨었다는 범죄자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그저 일상을 보내다가 흘러가듯이 툭 하고 나온 이야기였을 뿐이다.

우석은 해만 숙소를 찾아왔던 존속 살인범의 여동생 ‘서나’라는 여성을 떠올리며 ‘나’에게 말을 하다가 지도를 달라고 하더니 그 여동생과 대화를 나눈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는 그 사건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 온 남자가 20대가 되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그 기사를 본 계기로 해만을 찾은 거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사를 떠올려보고 헤집어 보아도 그에게 여동생은 없었다. 혹시 그녀는 자신의 아픔과 닮은 그를 생각하며 해만을 찾아왔던 걸까. ‘나’가 아픔을 품은 채 구석진 곳 해만을 찾은 사람들을 떠올리듯이.

(P. 179) 우리는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그렇게 살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와 넷이서 꼭 껴안고 자는거. 그러면 다음 날도 행복해지고 우리는 힘들지 않을거야 계속계속.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을 거야. 계속 계속 아주 오래 행복할 거야.


교복입은 학생들을 감금한 노래방 사장이 등장했던 「안 해」 와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편은 왜 그래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황 속에서 강요받는 이해하기 어려움들을, 왜인지 납득이 가지 않게 들려준다. 처음엔 내 머릿속에 떠올려졌던 범죄들이 나오려나 했는데, 누구는 가둬놓고 누구는 노래를 시키는 거다. 다른 것도 곧잘 하는데 노래까지 잘 부르던 친구는 어딘가에 가둬놓고, 정작 노래를 듣고만 있던 나는 가두지 않고 노래를 시킨다.

노래방 사장이 진지하게 자신의 확고한 생각들을 이도 저도 못하는 학생들을 향해 지겹도록 주입한다.

(P. 46)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30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아이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어떤 아이는 기세 좋게 도망가려 애도 써본다.
도대체 열심히.열심히.열심히 잘하면 뭐가 있길래, 어떤 세상이 펼쳐지길래 그토록 열심히를 말하는 것인지.

갑갑했다.

친구와 놀러 간 노래방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노래방 사장이 감금을 시키더니 노래를 강요하고, 열심히 하라고 하고, 자기 생각을 주입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말이다.

살면서 말로써 표현이 안 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겪어봤고, 잘하고 싶지만 잘해도 뻔히 보이는 결과에 노력조차도 하기 싫었었고, 뭐든 잘하는 사람들과 비교되며 티도 안 나는 노력이라도 하면 열심히 좀 하라는 말도 들어봤기에 분노가 치밀고 억울하면서도, 한 학생의 노래방 사장을 향한 외침은 어딘가 후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강요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써 보여주시든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P. 53)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중략)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P. 62) 내가 몰라서 안 한 게 아니야.


이 책의 표제작인 「그럼 무얼 부르지」에서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릴 때의 저자의 심경을 등장인물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P. 134)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와 교토의 시조역 근처 바.
이 의외의 장소에서 30여 년 전 자신이 태어난 곳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듣게 된 ‘나’는 자신이 사는 광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날의 광주를 듣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이야기.
모든 것이 다 오래되었는데도 정리는 되지 않은 듯한, 그래서 그때의 사람들이 아직도 잘 보이는 곳.
아니다. 잘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 역시도 5.18을 겪은 세대도 아니고 주변에 물어보면 생생하게 들려줄 사람들도 마땅치가 않다.
내가 눈으로 보고 겪지 못해서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저 그때의 분위기를 더듬거려보듯 책과 영상을 볼 뿐이다.

(P. 146) 나는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아니고 거기 서 있는 건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손가락으로 광주가 어디 있는지 짚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손바닥을 허공에 내미는 사람이었다.


이 책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안나의 테이블」은 그동안의 내가 바라봤던 세상과 사물, 인간을 향한 시선에서 탈피하여 완벽히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봐야 했다.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들의 이어짐이 기존의 상식들로 차 있는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의 입장이 된 기분이다.
글쎄, 어떤 의도나 생각인 것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아픔과 통증이 더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부분들이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다 함께’ 이야기하고 더 많은 답을 찾고 싶어한다는 마음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P. 197)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묻는다. 한 10초쯤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던 단장은 미소를 띠며 아름다운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 환하고 반짝이는 것들.


박솔뫼 작가님 책은 장면 장면을 내가 이어붙여 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그 재미를 느끼기까지의 과정은 썩 즐겁지 않을 수도.

저번 <미래 산책 연습>을 너무 잘 읽었고, 더 만나고 싶은 생각에 그녀의 첫 소설집을 선택했다. 독특한 문장을 다시 만나니 아주 반가웠다.
아, 물론 이제는 독특하다는 느낌보다는 익숙함으로 다가온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 같다.
<미래 산책 연습>과 지금 이 책까지 고작 두 편만 읽은 건데 왜 이리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친해지려고 무지 노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읽을 때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나름 오기가 생겨서 난 절대 이 책을 덮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기도 했었다.
끄트머리 먼지와도 같은 내가, 이제는 낯설게만 느꼈던 그녀만의 문장에 반가움부터 느껴지게 되어버렸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나 잊히고 있는,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나 사람의 대해서 들여다봐 주고 끄집어내 주며 들려주는 그 마음. ‘진심’이 담긴 그 마음이 와 닿기 때문에 손길이 간다.
이렇게나 많은 책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고른다는 것은 나에게 와 닿음이 확실히 있었다는 거다.
무더위 속에서도 냉증으로 차가워진 발 때문에 곤욕스러운 내 언니의 사소한 문제조차도 공감해주지 못한 화상 덩어리일지라도 이렇게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길 바라는 소박한 혼자만의 다짐을 또 해본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통증을 들여다보는데도 왠지 그들이 모두 아는 얼굴일 것 같은 느낌을 줬던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대체로 대화의 중심이 아니라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처럼 말이다.
대화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내 하루를 전부 차지하고 있지 않듯이.

요구하지 않은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들춰낸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누군가가 없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은 듯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닿길 바라는 그 마음을 느끼며 읽었다.

궁금하다.
왜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쉽게 들려주는 게 아닐까?

우리가 더 깊숙이 곰곰이 들여다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만의 보호방식 인게 아닐까 라는 혼자만의 생각도 조심스레 해본다.

나의 애정 섞인 마음이 지나치게 확대해석을 하고 이 책에 살을 입히는 모습으로 비치게 함으로 반감을 느끼게 하면 어쩌지?라는 염려스러운 마음도 한편에 들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느낀 게 그러하니 말이다.

이 다음으로 <우리의 사람들>을 읽어 볼 생각이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궁금해하면서 들어주고, 들려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담은 책으로 또 만나고 싶다.
그냥 같이 있어주는 느낌만으로 따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P. 204) 나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뭔가 달라져 있겠지. 지금 같은 불안하고 슬프고 답답한 날이 아니라 방금 전 꿈처럼 한가하고 평화롭고 무얼 먹지 무얼 보지 생각하며 헐렁헐렁 걸어 다니는 날들이 먼 미래에는 있을 것이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간아 얼른 가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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