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고향 집, 헤어질때 어머니가 흘리던 눈물, 그리고 아직도 쓰리고 아픈 등과 다리에 남은 상처만큼이나 욱신욱신 쑤시고 심장이 두근거리던 아버지와의 고통스러운 불화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매티는 그저 푹신한 등받이가 있는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시간이 그만 정지해 버렸으면’하고 바랐다. 단지 자신은 바로 이 버스에서 새로 태어났으며 과거의 모든 것과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싶었다. - P50

시간은 말이 없고 아리송하여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날마다 조금씩 사라지지도 않는다. 한평생이 거품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 투명한 파도를 타고 홀러가다가 이따금 기대하지 않았을 때 제멋대로 의식 위로 튀어 올라 물보라를 일으키는 한편으로 시간은 소용돌이치며 사람의 마음속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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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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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 가장 외로움이 묻어나는 첫 문장이었다.

(P. 11) 그 기억의 편린들은 좀처럼 휘발되지 않을 것 같고, 어느덧 나의 일부분으로 스며든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찰나의 순간에서 느낀 감정들을 섬세하게 풀어낸 문장들을 발견하면, 금세 내 삶에서 축적된 감정들과 맞닿아 보며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8편의 단편으로 엮인 이 책은 보통의 연애와 만남 그리고 일과 퇴사 같은 일상에서 분출되는 감정들을 담고 있다.


“ 뭐 그걸 꼭 겪어봐야 아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말들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 겪어봐야 안다. 큼직하게 나눈 카테고리 안에서의 예측 가능한 감정 말고, 촘촘하게, 굳이, 기어코,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그 사람의 연약한 감정 세포 하나하나를 어떻게 겪어보지 않고 다 알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 책은 그 섬세한 표현들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그 사람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었다.

(P. 98) 나는 손을 뻗어 낙하하는 빗방울을 쥐어보려고 했다. 추락의 궤적을 자꾸만 낚아채려고 했다. 쥔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와 봤을 때에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실 나와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모두가 뜯어 말리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 새로운 삶을 위해 주저없이 퇴사를 하는 모험적인 사람들.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모든게 다 공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쿨럭’하고 나오는 기침을 가슴과 목의 날카로운 쓰라린 통증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갑갑했던 가슴 속을 긁어주는 시원함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 수 없다.

사랑의 관한 부분은 거의 동성간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의 관한 부분은 개인의 존중되어야 할 자유의 몫으로 생각하기에 나에겐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에 가닿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보고 판단하기엔 광활한 우주 앞에 인간은 요만한 먼지일 뿐.

물론, 수용하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그 기다림이 무척이나 외로웠을 사람들의 ‘고민’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고, 불편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 날의 계절들을 품은 문장들은 생생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좌절감을 느끼는 등장인물의 쓰린 감정들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P. 101)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옷깃에 인 보풀을 발견하고는 무십코 잡아당겼는데 그게 쭉 늘어나기만 하고 끊어지진 않아서 아이씨 뭔데, 하는 채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알 듯 말 듯 주변을 멤돌다 없어져 버리는 관심이나 위로 말고, 걱정이나 두려움에 싸여있는 어두컴컴한 방안에 있는 누군가가, 온기를 머금은 아늑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서로가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게 당연한 ‘보통의 일상’을 누릴 수 있길. 더이상, 특별하게만 비춰지는 사랑이 아닌, 좋을때도 있고 나쁠때가 있는 그저 평범의 사랑으로서만 비춰지며 자신이 택한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험하지 못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경험해 보는 것 어떨까.

한 걸음 내디기가 참 어렵고, 매 순간 무너짐으로 시끄러운 속을 달래야만 했던 나와, 어떤이들이 마음의 고통을 나눠보며, 그 속에 갇혀 있는 막막함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심의 위로와 손길을 ‘사람’에게서 채우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로 스스로에게 더 상처를 내고, 문을 닫아 버렸던 사람들이 한 손에 쏙 잡히는 작은 ‘책’으로부터 조금씩, 촘촘하게, 차곡차곡 구멍이 나 버린 마음을 채워 보는 것이 때론 충분한 온기를 얻게 된다는 걸.

이 또한 어느 정도의 현실이 받쳐줘야지만 가능하다는 불신의 마음으로 또 한번 낙심하더라도, 나와 닮은 인물과 내 마음을 닮은 구절에 생각지 못한 ‘치유’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걸.


어떤 간절함이 느껴지는 등장인물의 떨림과 주저, 깊게 내쉰 숨으로 가득 찬 방 안에 공기만으로도, 나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어딘가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해보이는 이별 뒤에 한 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사람을 떠올리는 그리움에서 살짝 ‘찌질미’를 느끼게 하는 모습들이 꽤 마음이 갔다. 그런데 만일 그 이별의 사유가 서로의 식은 사랑이 아닌 사회의 억압과 사람들의 시선에 의한 포기라면 좀 슬플 것 같다.

은은하게 속 터지게 하는 묘한 신경쓰임 대비 정작 본인은 나른해 보이기도 했던, 아니 그런 척 해 보였던 등장인물의 모습에는 ‘피식’ 웃기도 했다. 꼭 쓸쓸하고 헛헛함만이 아닌, 친근하면서도 익숙한 사람들의 관계 속 그 안에서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을 저자의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 책 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을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한정된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과감히 퇴사를 하고 떠나버리기도 하고, 후회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담은 걸로 보였으니까.


기억에 남는 문장들과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이미지들이 많지만, 특히 <고요한 열정>편에서 누나 ‘연수’가 많이 떠오른다.
상처를 입은 남동생 ‘연후’가 집을 떠난 뒤, 본인도 외로움과 통증이 있음에도 누나 ‘연수’는 동생을 찾으러 다닌다.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헤아려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존중의 마음이 참 뭉클했고 고마웠다.
외면하지 않아서 말이다.


생경한 계절의 풍경에서, 급한거 없이 느긋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지나가다 눈에 띈 상점에 진열된 여러가지 물건들에서 과거를 떠올리 듯, 사람의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조금은 쓸쓸했던, 그리고 공허함과 과거의 그 날들이 남긴 후회가 느껴지기도 했던 <우리는 같은 곳에서>였다.


(P. 154) 어째서 나 같은 삶에는 단 하나의 예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생을 견디다가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그들처럼 소거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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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편린들은 좀처럼 휘발되지 않을 것 같고, 어느덧 나의 일부분으로 스며든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 P11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 P39

원근감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 착각이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바로 영지였다. (중략) 그러니까 모든 건 평면 위에 놓여 있을 뿐이라는 거야.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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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 강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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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할안이 UN 총회를 통과 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의 일부를 받은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을 선포했다.

나치의 학살을 겪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나라가 없기 때문에, 유대인 국가 건립이 씨앗이 되어 그들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박해를 받는 고통 속에 유대민족주의 정체성을 위한 이스라엘 건국이 결과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의 충돌,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적인 대립을 만들게 된다.

그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나라들이 만든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공격했지만 거듭 된 패배로 난민만 발생하는 비극을 낳고 만다.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를 알리는 방법으로 테러를 선택하는 무장단체 ‘PLO’를 시작으로 지금의 ‘하마스’까지, 이런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조직들의 행보가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이 전쟁은 언제쯤에야 끝이 나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갑갑한 마음에 최소한의 의미를 담아 책을 펼쳤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사소한 일>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간의 갈등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인 ‘나크바(대재앙의 날)’ 전쟁이 벌어진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1949년 8월 9일부터 8월 13일 닷새간 벌어진 일을 통해 이스라엘 점령군 소대장과 군대가 벌인 참혹함을 보여준다. 2부는 그로부터 25년 후, 어느 팔레스타인 여성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은 과거의 참혹함을 마주하도록 한다.


이집트와 경계선이 있는 남부지역에서 군인들은 진지를 설치하고 훈련과 군사작전을 전개한다. 그리고 순찰을 하면서 아랍인들을 색출하는 것 또한 그들이 하는 일이다.
1949년 8월 이글거리는 햇볓이 내리쬐는 어느 날, 아랍인들과 잠입자들의 움직임이 감지 됐다는 공군 소식통에 소대장과 병사들은 순찰을 하러 나간다.

모래는 먼지구름을 내며 이동하는 차를 따르고, 병사들은 소대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언덕과 언덕을 이동하며 순찰을 하던 중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멈췄던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 그 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랍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랍의 유목민 ‘베두인족’을 향한 총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색출의 완벽한 성공을 알리고, 그 무리 중 한 ‘소녀’를 자신들의 막사로 데려간다.

소녀가 ‘생존의 비극’을 얻게 된 순간이다.


25년후,

팔레스타인의 한 여성은 1부에서 다룬 소녀의 대한 기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생일과 우연히 일치하게 된 그 사건에 궁금증을 품게 된다. 결국 그 날의 범죄를 단죄할 단서를 찾기 위해 그녀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경계선을 넘는다. 무모하리만큼 위험한 여정이 예상되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쿵쾅대는 가슴으로 나 또한 그녀의 동선을 뒤쫓아갔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개가 그녀의 차를 향해 달려 들면서 짖어댄다. 앞날의 불행을 예견하는 듯한 징조들 때문에 침착함을 유지 하기가 힘들다. 무섭고 불안하다.


뉴스를 통해 매일같이 알려지는 비극에 ‘저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견뎌내고 살아갈까’하는 마음과 함께, 어느 순간 원래 전쟁통 속에 있는 나라, 복잡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멈춰있는 고통을 겪는 나라로 인식이 될 만큼 희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날의 지속은 점점 ‘무딘 감정’을 만드는게 현실이다.

당장에 눈 앞에 펼쳐진 내 나라 문제에 가려져 우리의 시선은 금세 일상으로 돌려지고, 저자는 이를 경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낸다.


온종일 굉음과 건물을 부수는 포격, 수류탄 소리 가득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끔찍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에서 알려주는 조각 조각의 기억들을 우리가 가슴에 담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이 조각들이 결국 사소한 일처럼 묻혀지고 기억에서 사라지는 사건들을 끊임없이 끄집어 내고, 더 선명하게 빛을 내어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만드니까.


이 책 속에서 다뤄진 끔찍한 사건들만 조심히 도려내어 옮겨 놓고 들여다 보면, 각자의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어느 날의 일상들을 읊어 내려가는 듯하다. 현실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그 감정들을 얇은 두께의 이 책에 담아내는 저자의 방식이 그 날의 사건들을 대하는, 이제는 무딘 감정으로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와 내 삶의 터전이 부서지고 내 가족들이 희생 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관한 이야기를 읽을때면 늘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 뿐이기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듯한 나의 감정들이, 시작은 ‘진심’을 담아 들여다봤어도 결국에는 ‘관심’으로만 끝나버린 듯한 원치 않는 칙잡함을 만들어 언제나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어째서 멈추지 않는 것인가?

강대국들이 개입되고 국제 사회 문제로 까지 번진지 오래된 이 갈등은 ‘종교’가 정치적 영역까지 침범하여 종교적 극단주의자들로 인해 ‘타협’이 안 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만 머물러 있다.
오히려 이 극단주의자들로 인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강경파들만 득세하게 만들었다. 공존하지 못 하고, 평화를 찾지 못 하고, 시민들은 죽어 나가고 있다.

이것이 현재 대부분 사람들의 시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억압은 민족, 종교, 성별의 대립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윤리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사소한 일>은 저자의 그런 시각을 담고 있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 해가 밝았다.
잠에서 깨면 일어날 것이고 일을 할 것이고 가족과 함께 할 것이고 TV를 볼 것이고 책을 읽을 것이고 반짝거리는 하늘의 별을 바라 볼 것이고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아픔이, 피부에 느껴지는 폭격에 가까워짐이, 이 시간 어딘가에서 그들에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며 기어코, 일상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도 한 줄기 빛을 바라는 절망감 섞인 희망을 품어 보면서 무연한 마음으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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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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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날씨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죽을때까지 기억하고 싶은 ‘수미’와 지금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떠올려 보고 무언가를 쓰고 있으며, 쓸려고 하는 작가 ‘나’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펼쳐진다.

기후가 변화하고 동물이 사라지는 지구의 끝이 가까워질 때, 이제는 내가 갖고 싶은 미래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여겨질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쓰게 만들었을까?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별거 없는 흔한 일상들을 다 담아내기 위해 쉼표를 찍을 시간도 부족한 듯 적어 내려간 것처럼, 다소 줄줄이 이어지는 글이나 의식의 흐름대로 흐르는, 적고 있는 당사자만이 알 것 같은 이야기와 감정들이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다소 복잡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뚜렷한 기억 속 한 장면이 담긴 묘사가 내게는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듯한 당혹스러움으로 물음표를 만들어 냈다.
등장인물들의 연관성과 책 내용을 파고들듯이 들여다보는 순간, ‘왜 자꾸 딱 떨어지듯 명확하게 모든 걸 알고 넘어가려고만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내가 말이다.

책 제목처럼 산책을 하듯이, ‘그냥 따라가보자’ 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줄 한줄 읽어내려 갈수록 의식하면서 끄집어 내려 애쓰지 않아도 ‘나’의 일상 속 떠올려지는 그 ‘기억’에서 ‘절실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건지 뻥 뚫린 고속도로 같은 시원함은 없지만 잘 읽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초반에는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읽어냈다. 고속도로의 쾌속질주 보다 궁금함을 자극하며 군데군데 둘러볼 수 있는 국도에서의 운전을 더 좋아하는 나의 취향도 반영 되어 거리를 좁혀 나갈 수 있었다.

책의 절반 이상을 읽고 어느 정도 가까워짐을 느낀 후,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혼란과 복잡함의 이유가 되었던 것들이 전부 사라졌음을 느꼈다. 확실하게.
그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하기 위함은 아닐까 하는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점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간절함이 더해져 진심으로 다가온 것이다.


수미와 나.

이 두 인물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바로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수미는 방화사건과 관련되어 교도소에 들어 갔다가 출소한 ‘윤미언니’와 한동안 집에서 같이 머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둘은 함께 광주를 가게 된다. 어린 수미는 윤미언니를 염려하는 마음과 함께 도무지 평범한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그녀가 불안하기만 했을 것이다.

다른 시대 속 ‘나’는 우연히 부산에 한 목욕탕에서 알게 된 ‘최명환’이라는 중년여성을 통해 집을 구하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글을 쓴다. 이 최명환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목격한 인물이다. 그녀에게 그 시절 부산의 대해 자세히 듣게 된다.


이 책은 성인이 된 수미와 그녀의 친구 정승의 대화로 시작하여 어린시절의 ‘수미’와 ‘윤미언니’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시대의 ‘나’와 그 주변 인물들과의 일상을 담는다.
그리고 다시 첫 장면 수미와 정승의 대화로 끝이 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P. 18)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는 여전히 미래로 여겨지고 내가 그리는 미래도 미래에는 다시 되살리고 싶은 미래가 될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디에 써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나’의 모습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일상들을 적어내려간다.
사람들은 보통의 하루를 얼마나 ‘의미’를 두고 바라볼까?
미래의 삶에 지금 이 보통의 하루가 존재할지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음식 앞에서는 사뭇,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따금씩 다른사람 같아 보였다.
느낄 수 없었던 ‘생기’가 반갑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이 일어나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일상의 모습이라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확실한 사람의 사랑이 필요했던 그녀에게 그 허기진 마음을 ‘음식’이 채워주는 것 같아서다.

(P. 60) 더 크고 확실한 사람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과 어딘가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끝없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기차역에서 들리는 방송소리와 크게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비해 열차소리는 큰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옛날 기차를 떠올린다. 미문화원에 불을 붙인 이들이 조사를 받던 곳이 부산역 인근이였고, 그 때는 귀를 먹먹하게 할 만큼 기차소리가 매우 컸다고 한다.

(P. 177) 대공분실은 ‘내외문화사’라는 출판사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곳은 출판사가 아니지만 출판사 였어도 늘 기차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어떻게 원고를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중략) 내외 문화사라는 그곳에서 부림 사건 관련자들과 미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들을 비롯한 부산지역의 민주화 운동 관련인사들이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조사를 받았다는 것은 고문을 당했다는 뜻이 된다. 기차 소리는 고문을 하는 소리와 고문을 당하는 소리를 지운다.


보통의 일상 그 속에서도 발길이 닿는대로 천천히 ‘산책’하듯이 세상을 들여다 보며 눈에 들어오는 사람, 건물, 풍경속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기억해주는 따뜻함이 좋았다.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첫 발걸음을 시작하며 읽었기에 나에게는 표현의 강도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였지만, 그럼에도 소란스럽지 않은 그 덤덤함이 마음을 더 일렁이게 했던 것 같다.

‘나’는 1982년 미문화원에 불을 붙인 그들의 영혼을 느끼고 기억한다. 그리고 과거 구석구석을 폭력으로 지배하는 만행으로 ‘침묵’하게 만드는 자들을 향해 독재없는 민주주의를 외쳤던 1980년 광주 사람들을 떠올리며 지나간 과거로 흘려 보내지 않고 희생자들의 영혼에 숨을 불어 넣었다.
올바르고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어른이 되길 바랬던 ‘윤미언니’의 다짐과 닮은 ‘나’의 모습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윤미언니를 바라보며 그녀의 미래와 자신의 미래를 예상해 봤던 ‘어린수미’에게 그리고 바르고 이웃을 생각하는 어른, 많은 것을 배우는 어른이 되게 기도를 했던 ‘윤미’에게 지금의 ‘나’는 뚜렷한 무언가를 보고 싶었을 이들에게 꼭 좋은 어른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1982년 그 시간을 겪고, 바라봤었던 이들의 미래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확신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차곡차곡 써 내려간게 아닐까.

수미와 윤미의 마음을 잘 이해하며 써 내려간, 그리고 써 내려갈 지금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몰두하며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나’ 역시도 살아보지 않은 미래를 위해 지금 더 잘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짐해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P. 91)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생하게 빛을 내던 기억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해질 때가 있다. 지금은 당연한 이 현재의 모습들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미래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 때는 떠올려봐도 잊혀져서 결국 흔적도 없어질 미래의 과거이자 현재가 되는 오늘일거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너무 슬프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항쟁했던 희생자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떠났다.

그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외친 것일까.

보고자 하는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던 그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떠올리며, 나 역시도 내가 그리는 미래를 위해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 편에 서서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당장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그 날, 우리가 그리던 미래를 현재로 끌고 와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P. 153) 다른 시간을 살 수 있었다. 미래를 살고 와야 할 것을 살아낸다면 미래를 기억이 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미래를 기억이 되도록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그것이 보인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미래로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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