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은 이 일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헌병으로서 최선을 다해보기로 결심했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어 처음 지원했던 두 실습 과정에서 떨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게 됐다고 했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순찰이 아주 잘 맞더라고. 지난날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더 나은 앞날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 P247

피슈그뤼 선생님이 죽었다니. 내가 내 과거에 어떤 감정을 느낀게 언제였던가? 나는 어떤 감정이라도 들기를 기다렸다. 꼭 선생님이 아니라 그 외 어떤 과거에 대한 감정이라도. 슬픔과 후회의 감정은 이미 수년 전에 말라붙어 각질처럼 벗겨진 지 오래였다. 때로는 필요한 것이 곧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나는 피슈그뤼 선생님을 기리며 술병을 들었다. ‘편히 잠드세요, 선생님.‘ - P260

비참한 미래와 망가진 척추, 내 눈에 들어오도록 자기 고개를 꺾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이후로 몇 달 내내 혼란스러웠지만, 이제 이해가 됐다. 자기 삶을 되돌리고 싶었던 그 여자가 뤼시의 탈주 경로를 틂으로써 이곳의 내게 기회를 주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 P309

겨울이 남기고 간 황폐함 속에서 피어난 초록 새싹을 보면 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투병을 마치고 마침내 고른 숨결을 내뱉듯 대지에 색채가 돌아왔다. 바람이 한 점씩 불어올 때마다 황금빛 꽃잎, 푸른 잎사귀가 열광하며 언덕을 깨웠다. - P340

돌이켜 보니 아쉬운 일들, 후회되는 일들이 슬픔이 되어 오랜 열병처럼 여전히 내 속을 헤집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은 사택 창틀에 비친 예배당 묘지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묘비는 내가 조각해 넣은 것 중에 사람과 가장 가까운 대상이었다.
혹시 내가 외로워서 이런 걸까? 지금 내게는 인생을 함께할 누군가보다 인생을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 P3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엔 심사 프로그램에서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전혀 없었는데,
연달아 통과하자 이제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달라진 마음가짐 때문에 내 약점이 드러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꿈이 외부의 승인과 타인의 인정에 좌지우지되는 건 아닐까, 하는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혹시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꿈도 생명체처럼 크게키우려면 보살핌이라는 품이 필요할지 모른다. 약간의 격려로 흙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내 꿈은, 이제 작은 새싹처럼 빛을 향해 스멀스멀 뻗어나가고 있었다. - P189

너무 캄캄해서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아침이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의 진흙탕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쓸쓸함이 반가웠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하릴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하루로 걸어 들어갔다. - P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의 봄,
하얀 물감 한 방울 ‘똑’ 떨어트려 놓은 분홍빛 세상.
포근하고 좋다.

요즘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시간의 계곡>을 읽고 있다. 저자는 친한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라는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총 2부로 나눠져 있고 아직 1부도 다 못 읽었다.

동쪽으로는 20년 후 미래의 시간, 서쪽으로는 20년 전 과거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 보낸 상실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자문기관에 신청 후, 심사를 통해 승인을 받은 이들로 한해서 ‘애도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다. 멀리서 관망하며 말이다.

나는 양쪽 다 서글프게만 느껴진다.


소재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다.
”가능만 하다면 과거든 미래든, 가 볼 의향이 있어?” 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사뭇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경험이 다들 있지 않은가?

철학자인 저자가 상실감을 어떤식으로 풀어나갈지 궁금하면서도 무거운 마음이 드는 것은 역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현재 읽고 있는 부분은 반짝이기만 한 10대 소년 소녀들의 천진난만함을 느낄 수 있는 모습들이 많이 담겨져 있고,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읽는 내내 마음이 정화 되는 것 같았다.

여름 날, 숲 속 깊은 곳에서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며 온 세상이 행복으로만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 주는 충만함과 고만고만 한 녀석들이 자기네들끼리 신나서 킥킥 거리는 와중에 코를 자극하는 풀내음에 들숨 한번, 날숨 한번 해 보는 그런 감성.

예상되는 슬픔은 잠시 안 보이는 곳으로...
저 깊숙한 곳으로..


봄을 만끽할 수 있도록 피어있는 꽃들로 출퇴근길이 풍성해서 좋다. 곧 꽃비를 맞게 되겠지?

생각지도 못한 적립금 선물로 기쁨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바람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미천한 먼지가 할 수 있는 것이 ‘독서’뿐이라 책을 몇 권 샀다.

히죽히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5-04-0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수린, 김연수 작가님의 작품들 좋습니다~!! 시간의 계곡 표지랑 내용이 마음에 드네요~!!!

곰돌이 2025-04-09 18:04   좋아요 1 | URL
시간의 계곡은 책 크기도 살짝 큼직하고 자간 간격도 맘에 들어요!! 그리고 감정 묘사가 섬세해요...술술 읽혀집니다 ^^
 

"고마워. 진심으로."
"됐어, 그런 말 마. 이게 뭐 별거라고."
"아니, 네가 귀찮다고 학을 뗄 만큼 오래오래 고맙다고 얘기할거야. 평생 갚아도 부족할 빚이라고."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간 장례식장은 모순 되지만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는 곳이었다. 여기저기서 흘러 나오는 곡소리에 겁을 먹고 들어가자마자 무거운 공기에 압도되어 숨 쉬기도 버거운데, 한 쪽에서는 얼큰하게 취기가 도는 김에 그간 밀려있던 이야기들을 왁자지껄 목청 높혀 쏟아내는 난리통이라 어린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하염없이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제 각기 삼삼오오 모였고, 웅성웅성 그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 잘 돌아가셨지. 더 사셨으면 큰 골치가 될 뻔 했어. 자식들 고생 덜었지 뭐.”

잘 돌아가셨다니......
어른들의 대화는 진심으로 충격 그 자체였다. 아까 하염없이 쏟아낸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때의 장례식장 풍경도 이제는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눈물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잘 돌아가셨다는 그 말이 상실을 담은 말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었던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어릴 적 떠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고향 구례를 ‘다시’ 찾은 딸이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해작이며 아버지와 자신과의 시간의 틈을 메꾸고, 얇아진 마음의 끈을 붙여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빨갱이라 불리며 등 돌리는 사람들과도 속없이 어울려 지냈던 아버지의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빨치산의 딸 ‘고아리’는 어떤 삶을 살았으며, 아버지가 그녀에게 주고 간 것은 무엇이고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P.24)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P.27)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가는 것, 다시 올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빨갱이의 딸로써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를 얻은 다른 가족들의 삶을, 이해할 수도 없고 짐작 조차 되지 않는다며 자신보다 더 가엾게 바라보고 저절로 수그려지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되뇌었다.
‘ 이해할 수 조차 없다. 짐작 조차 되지 않는다.’

(P.81)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 아버지의 죄라니.


고작 사년뿐이었던 아버지의 빨치산 이력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이 사회가 평생을 옥죄게 하였다. 그녀는 알아서 적당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름의 배려를 선택하는 삶을 걸어가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을 외면한 채.

생전 아버지의 오지랖이 구례 곳곳에 넓고 길게 뻗은 덕분인지 동네 사람들의 억척스럽지만 자신의 가족 일인양 보내오는 정스러운 손길 덕분에 치매가 더 진행되어 단속 해야만 했던, 그래서 마침 맞았던, 아버지의 장례를 순탄하게 치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P. 93) “아버지는 정말 무덤 필요없어?”
“ 두말하면 잔소리! 땅덩어리나 아니나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이다. 우리 죽으면 싹 꼬실라부러라.”

유물론자답게 ’꼬실라서 암 디나 뿌레삐레라.‘ 라고 생전에 말씀 하셨던 아버지를 험란했던 삶 속 에서 해방 시켜 떠나보내드렸다.

(P.110)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P. 198)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을 겪을 때 망연자실한 그 순간에도 돋을볕처럼 따사롭게 잡아주는 사람들의 손길을 잡고 다시 일어선다. 베푼게 없어 붉어진 두 볼과 갈 곳 잃은 손. 도망 갈 구멍을 찾느라 바쁜 눈에 비치는 사람들은 ‘된비알 같은 인생 다 그렇게 살아가는거야.’ 라고 말해준다. 그럴 때면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온다.

토닥..토닥..토닥..토닥..
그 손길에 움켜쥐고만 있었던 슬픔이 쏟아져 나올 때 나는 알았다. 눈물을 안으로만 삼키지 말고, 등 쓰다듬어 주며 함께 울어주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것을.

(P. 224)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마 사람의 곁이 부담이고 다 빚처럼 느끼며 살아왔을 ‘고아리’ 그녀도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에게서 내가 느꼈던 그 따뜻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모질고 거친 삶을 살게 한 아버지.
소주 한병과 에쎄 한갑, 돈 사천원 지출이 하루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원망하기엔 그녀와 어머니, 그들 세 식구 모두 많은 일에 대낀 세월은 한없이 고단했으며 가년스러웠다.

(P. 231)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의 아버지로 부활 한 듯 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기는 어느 누구나 겪게 마련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은 더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마음으로는 그 깨달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머리가 좀 컸다고 잘난 척 해대며 산다. 깊은 후회가 늘 따른다.


떠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고향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미처 알지 못 했던 각자의 ‘사정’들을 통해 그녀는 이제서야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를 사랑해줬던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하나 둘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 내 곁을 떠난 아버지.
사상과 신념이 중요했던 아버지 ‘고상욱’씨는 그녀의 딸 ‘고아리’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 참 다운 삶을 일깨워주고 그렇게 떠났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짠해져 코끝이 찡~해질라 하면, 어디선가 장독대에서 막 퍼담은 된장처럼 구수한 방언이 일렁거리는 마음을 위로하는 듯 무심하고 투박스럽게 눈물을 ‘쓰윽’하고 닦아주고 간다. 이렇게 방심을 하던 찰나, 맨 마지막 정지아 작가님의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P. 268) 감사합니다, 아버지. 애기도 하는 이 쉬운말을 환갑 목전에 두고 아버지 가고 난 이제야 합니다.


어떠한 가련한 사유로 행복에도 마지노선을 그어 놓은 채 살아가야만 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 앞에 놓여있는 것과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단 며칠, 몇분 몇초의 시간이라도 고통없이 사는 것 조차 너무나도 간절할 누군가들에게는 이 단 하루도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소중하기에. 이 하루는 너무나도 값지기에. 그리고 나를 평생 기다려주지 않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