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 P191

"이게 바로 구절초,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의 진짜 이름은 구절초야.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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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이모와 외할머니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아련히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 잠 속에 빠져드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어머니가 울거나 소리치지않고 오랜 시간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어린 안진진의 외갓집 나들이였다. - P132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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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부른 일상 이야기>

“ 엄마, 나 택배로 시킬 거 있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
” 봄동이랑 오이랑 상추랑 깻잎. 묵무침이나 해 먹을까?“
” 왜? 또 아빠가 묵무침 해달라고 했어? 묵 쑤느냐고 괜히 엄마 힘만 드는데 그냥 두지......”

나는 안다.
어차피 엄마는 마음속에서 이미 며칠 전에 냉동실에 자리차지나 하고 있는 녹말가루로 묵을 쑬 계획을 세웠다라는 걸. 그 불을 지피게 한 것은 아빠라는 것도.
(눈치가 조금 없을 뿐. 그저 본능에 충실했을 뿐.)

“ 녹말가루가 냉동실 자리차지나 하고 있어서 그냥 대충해서 먹어치우지 뭐.”
모든 엄마들의 국룰1탄처럼 묻는게 묻는게 아니다. 누군가의 의사 따위는 필요없는 그저 혼잣말을 크게 하는 것 뿐이다.

엄마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우리집의 쩝쩝박사 아빠는 그저 해맑게 기대와 행복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난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벌써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해진다.
(아빠는 엄마가 쉬는 걸 못 견디는 유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방으로 들어오는 그릇 달그락 달그락 소리들로 내 귀가 상당히 괴롭다.)
둘다 저렇게 웃어가며 꽁냥꽁냥 맛나게 해 먹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안 내켜서 나는 불만인걸까. 심보 참 고약하네.
휴...할말하않...

굉장히 안 내킨다.
우리집에 엄마들의 국룰 2탄 ‘대충해서 먹어치우기’ 가 선포되면 응답하라 1988 덕선이 엄마가 강림하시고 맛있게 딱 한번만!!먹고 깔끔하게 잘 먹었습니다!!로 끝나는 법이 없다.

나는 안다.
분명히 세숫대야만한 거대한 크기의 그릇에서 묵무침이 까꿍 하고 있을거라는 걸. (날 먹어치워줘~~~~냠)

엄마 힘들까봐 염려되서 뭔가 해볼까? 하는 액션만 나와도 일단 정지!!제어부터 들어가는 내가 대단한 효녀인줄.
이렇게 열을 내는 이유는 늘 언제나 남은 녀석들을 먹어치우는 처리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안다.
이렇게 곁에서 엄마가 해주는 음식 맛있게 먹는 순간 조차가 엄청나게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걸.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역시나 내 실력 죽지 않았네!! 하면서 얼마 전 나름 요리라고 말하기엔 뭐하지만 내가 만든 찌개가 생각보다 엄마가 만든 찌개보다 맛이 꽤 괜찮게 나와서(지금 생각해도 신기방기)너도 놀라고 나도 놀라 엄마를 당혹스럽게 만든 그 사건이 단순 우연의 헤프닝이 될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어느하나 당연한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배부른 일상을 보냈다. (여러의미로)

그리고 나는 봤다.
이미 진작에 예고한 거대한 세숫대야 묵무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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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3-04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까이 살면 조금 얻어 먹고 싶은 비주얼입니다.
곰돌이님의 마음은 아는데 주책스럽게 넘 맛있어 보여요.
집에서 직접 묵을 쑤면 계속 저어야 하잖아요!
어머님,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얼마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 울컥했어요^^

곰돌이 2025-03-04 19:03   좋아요 1 | URL
처음 받아보는 댓글에 깜짝 놀랐어요^^ 맛있어 보인다는 말씀을 얼른 전달하였습니다.(무지 좋아하시네요.^^ 칭찬에 목마르신 쉐프님이라서요.) 페넬로페님 울컥 하신 마음에 저의 닿지 못하는 손 부끄럽지만 살포시 얹어 드려봅니다.

숲노래 2025-03-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보면 머잖아 ‘엄마손 집밥’은 가뭇없이 사라지리라 봅니다. ‘엄마손 집밥’이 사라진 자리에 ‘아빠손 집밥’이 깃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집밥 시늉 시킴밥(배달요리)’이 차지할까요?

곰돌이 2025-03-04 19:02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아빠손 집밥은 이번 생에는 어려울 거라 확신합니다. 상상만으로도 뒤치다꺼리로 분주해지네요.^^ 솜씨는 없지만 흥미는 있어서 조금씩 실력을 연마하고 있는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런지요...🤔
 

그런데 나는?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보내고 있는 나. - P17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 P18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 내 손으로 곧잘 밥을 지어먹곤 했다. 착한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나는 날에는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서 밥상을 차려놓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넘은 후로는 그렇게 착한 마음이 생기는 날이 참 드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 P60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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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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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소녀 에디트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과 노력을 다하는 현역 장교인 호프밀러. 이성보다 앞서 나가는 이놈에 ‘연민’ 때문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안심시켜 주었지만 점점 두려워지고 초조하게 만드는 상황들로 혼란스럽다. 그래 맞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런 상황은 아니였는데 벅차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너무 얕잡아본 것 같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점점 내 자신마저 잃어간다.

악의는 없지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여(연민이 만들어낸) 나에게 호프밀러처럼 모든 것을 아니, 꽤 많은 부분을 맞춰주고 도와줬던 사람이 있었다. 그 당시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반드시 해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대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알았다. 나의 어려운 부탁이자 무리가 되는 그 일들을 들어주는게 쉽지 않다 라는 것을. 하지만 반드시 그의 입으로 ’해결이 잘 될거야(반드시).’ 라는 확답을 들었어야만 했다. 결과는 나중일이다. 무조건 일단 나를 안심 시켜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그의 목에 내멋대로 걸어놓고는 쥐어짜고, 또 쥐어짜며 내가 듣고자 하는 모범정답을 얻어냈었다.
에디트라고 몰랐을까? 불편한 다리로 인해 대신 얻게 된 감각신경들로 그녀는 굉장히 예민하고 민감함을 가진 소녀이다. 호프밀러에게 쥐어짜내 얻어내려 했던 것은 그녀를 안심시켜줄 만한 믿음의 말이였을 것이다. (물론 연민과 현실을 아주아주 잘 숨기되 진심과 애정은 가득 담긴 말이어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호프밀러가 너무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고, 에디트와 그의 가족들이 그리 잘 알지 못 하는 단 한번의 만남에서 얻게 된 인상으로 호프밀러에게 너무 큰 기대감을 갖고 그에게 호소하는 책임감이 부담스럽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에디트와 그녀의 가족을 너무 이해한다. 나에게도 아픈 가족이 있었으니까.(과거형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이 아직도 와닿지가 않는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돌봤었던)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에디트의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날카롭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모습(어린아이 같기도 한)들을 그저 바라보면서 마음에서는 미안하기만 하고 애처롭기만 하고 익숙해질만 한데도 여전히 ‘ 이 시련이 차라리 나에게 온 것이였다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시 과거의 건강한 상태로 절대 되돌려줄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다가가야 할 때의 죄스러움과 가슴을 훑는듯한 고통을.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그 고통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읽으면서 누가 내 가슴을 긁어내는 것 같은 불쑥하고 찾아오는 찌를듯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에디트를 향한 모든 사람들의 간절함에서 오는 아픔과 함께 조금은 숨이 막힐듯함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라고 표현한 것은 아픈 가족이 있는 집에서는 늘 함께 공존해야하는 어둠이 깔린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희망이라는 빛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 무거운 커튼을 새로운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살포시 들춰서 달큰하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면, 가족들이 365일 공을 들인 노력보다도 더 큰 긍정의 효과로 그간 없던 생기와 간절했던 희망이 다시금 만들어질 때가 있다. 그 때의 경외감을 어찌 호프밀러와 그녀의 가족들이 밀어낼 수 있겠는가... 단 하루라도 더 웃음지을 수 있고, 행복감을 줄 수만 있다면 거짓말도 괜찮을 때가 있다. 무엇이든 다 간절하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들의 감정들 하나하나가 허투루 지나칠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을 다 섬세하게 담아냈기에 제목처럼 읽는내내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좌절과 잠시 스쳐지나간 희열 등 이들의 감정들을 가슴에 다 담아내기가 너무 벅찰정도다.

아픔이 꼭 아픔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통증과 고통이 꼭 통증과 고통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불행이 꼭 불행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를 향한 혐오를 가지고 벼랑끝으로 올라가 내 몸뚱아리와 함께 내던지는 것으로 나의 짐을 덜어버리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나니 불규칙하게 내 귀를 괴롭혔던 현악기의 심란한 연주가 끝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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