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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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기록‘을 담고 있다.

짊어져야 할 무거운 삶의 짐을 지탱해 줄 바닥짐 하나 없는 소녀티를 막 벗은 스무살 처녀. 가족들과 얼기설기 엮인 실타래처럼 불안한 마음을 식량 삼아 감내해야 했던 비현실적인 진짜 이야기.

(P.56) 오로지 배고픈 것만 진실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모조리 엄살이요. 가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나는 악에 받쳐 있었다.

(P. 61) 지난 여름의 전쟁이 박살내고 지나간 자리가 별 없는 밤 하늘을 배경으로 태고의 폐허같은 괴기하고 비현실적인 선을 시커멓게 드러내고 있었다.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해 올케와 함께 남의 집 담벼락을 넘어 세간살이를 들쑤시며 먹을 것을 찾는 ‘나’는 밀가루 건더기 듬성듬성한 멀건 수제비국 부족하게 나눠 먹으면서 머릿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장에 식구들 배곯지 않는 ‘내일’이 간절하다. 지긋지긋한 사상이며 이념이며 다 무슨 소용인가.

한 고비, 또 한 고비.
단 하루도 맘 편히 지낼 수가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 하는 세상 속에서 앞날의 대한 불안감은 줄어들지를 않고 서로 색깔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구를 겨누고, 줄을 그어 버렸으니 우린 맥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P. 91) 북으로 난 국도 위로 퍼부어대는 폭격과 기총소사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움직이는 거라면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

(P. 98) 가장 바람직한건 우리가 자는 사이에 소리없이 전선이 우리 위를 지나가서 밤 사이에 바뀐 세상을 맞을 수 있는 거였다. 우리는 어디서 밤잠을 자든 낮잠을 자든 이런 소망이 자는 사이에 이루어지길 빌면서 잠들곤 했다.


각자의 근심과 한숨을 삼키면서 내남없이 서로 내뿜는 형체없는 그림자같은 불행의 냄새로 가득 한 곳에서도, 인생은 덧없음이 아니라는 희망을 준 사람들의 온정이 전쟁과 분단이 훑고 간 상처를 잠시 잊게도 하고, 또 더욱 경멸하게도 만들었다.

(P. 184) 세상만 자반뒤집기를 안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먹고 살게 돼 있었다.


뭐랄까, 희망 끝자락에 ‘딱‘ 붙어서, 이제는 조금씩 그녀와 가족들에게도 살아가는 힘 얻을 일이라도 생기려나 하는 ‘꽃망울‘을 본 느낌이랄까.
향토방위대에서 만나 함께 했던 언니에게 취업자리를 부탁해서 얻게 된 미군 피엑스 파자마부를 다니며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월급 봉투 당당히 내 놓았을 때 그 벅찬 감정이란...

(P. 226)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내 안에서 삶의 의욕이 쾌적하게 기지개를 켜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아도 난 이제 스물한살이었다. 미치게 젊은 나이였다.


가늠도 할 수 없는 삶의 모서리 만큼 일지언정 6.25 전쟁이 쏟아붓고 간 그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살아 남는 것이 중요했고, 먹고 사는 것이 급급했으므로 , 오빠의 ‘죽음‘에서조차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없었던 그 한 서린 날들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냈을까?’하는 참혹함과 동시에 경외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가 본 ‘스낵바’ 이야기에는 나도 같이 콜라와 팝콘을 어석어석 씹고 싶은 신기함 가득 한 즐거움을 함께 느꼈다.
거친 말도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며 이야기 보따리 잔뜩 이고 온 어느 입담 좋은 어르신 같았던 박완서 작가님의 1951년 1.4 후퇴부터 1953년 결혼까지의 시기를 담은 이 책에서, 나로썬 상상할 수 없는 거친 그때의 삶도 ’살아낸‘ 힘은 결국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그녀에게 아프라고 던지는 돌덩이와 함께 ‘냉소’와 ‘환멸’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당찬 모습으로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P. 7) 내가 살아 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 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 펼쳐 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고, 현재의 잘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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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는 향토방위대가 떠나기로 한 날보다 하루 먼저 떠났다. 그들의 목적지가 ‘거기‘라는 걸 빼고도 우리 식구의 피난 행렬은 남루하다 못해 기괴해 보였다. 여태껏 엄마의 자존심의 방패가 돼 주었던 싱거 미싱 대가리도 그 울퉁불퉁한 모양을 옷 보따리 사이에서 비죽대고 있었다. 미싱 대가리가 재산 목록 일호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해서 창피할 건하나도 없었다. 오빠가 버젓이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앉음으로써 우리 식구의 피난 행렬은 아무래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의 짓 같지가 않았다. - P167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인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빈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 P202

"쉬어서 버리면 안 되지."
엄마가 헛소리처럼 말하면서 팥죽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사랑하는 가족이 숨 끊어진 지 하루도 되기전에 단지 썩을 것을 염려하여 내다 버린 인간들답게, 팥죽을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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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는 내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문제였지만 무사히만은 개인적인 운명에 속할 터였다. - P78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 P82

그날을 앞두고 식구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벌떡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가슴을 쥐어뜯곤 하는 엄마를 올케가 천사 같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임진강만 안 건넌다면요."
"오냐, 오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지 임진강만은 건너지 말거라" - P90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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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머리에 딸린 찬마루 밑은 온통 시커먼 분탄 더미여서 부엌 바닥까지 새까맸지만 무쇠솥 뚜껑은 반질반질 참기름을 발라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찬마루 위는 다리가 부러진 밥상, 금간데를 양회로 때운 항아리, 밑이 반쯤 빠진 체, 시루, 바가지, 양철통, 궤짝 등이 꾀죄죄하고 귀살스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든것들이 어둠에 잠길 때까지 우리는 막장에 갇힌 광부처럼 희망없이 서로를 의지하고 부엌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 P15

아침저녁 석탄 가루로 수제비를 떠야 하는 올케나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끔 눈만 빤작이는 얼굴을 마주 보고 허파 줄이 끊어진 것처럼 허리를 비틀고 한없이 웃어제끼곤 했다. - P21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게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그렇게 잘나 보이던 오빠가 너무 보잘것없이 누워 있었다. 오빠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럼 돌아온 게 아니지 않나. - P24

"모든 병은 나을 때가 돼야 낫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숨 섞인 엄마의 이런 탄식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의 자책과 시간의 치유력에 대한 절절한 기도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 P41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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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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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나보낸 사랑하는 이를 향한 상실감을 가진 채, 함께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수 없는 허망함을 가슴에 묻고, 슬퍼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소란스럽지 않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견뎌내는 것이 애도의 과정이라면, 그 애도의 기간은 평생이지 않을까.

무한한 슬픔을 달래도록 시간의 흐름이 내게 준 요령이란 애써 떠올려본들 눈물만 차오를 것 같은 기억들은 마른침 한번 꿀꺽 넘기고, 애처로움은 찾아낼수 없을만큼 행복했던 사소한 일상만을 얼른 떠올려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거.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거니까...
뭐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하면서 그냥 그렇게 또 참아보는 거.

이 책의 저자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아이디어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내 인생이 더 빛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아니면 이별로 인한 애달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도록 , 운명을 바꿔보려 할까?


동쪽으로는 20년 후 미래의 시간, 서쪽으로는 20년 전 과거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 보낸 상실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자문기관에 신청 후, 심사를 통해 승인을 받은 이들로 한해서 ‘애도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다. 멀리서 관망하며 말이다.

총 2부인 이 책은 1부에서는 16세 소녀 오딜의 모습을, 2부에서는 20년 후 36세가 된 오딜의 모습을 담는다.

다붓다붓 모여 그들만의 놀이터가 되어주는 운동장에서 왁자지껄 깔깔대는 아이들을 멀리서 혼자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서로 너나들이하는 아이들이 몰려오기 전, 얼른 잽싸게 뛰어들어가 빈 교실에 앉아 쓸쓸한 안정감을 느껴본다.
얼른 이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는 16세 소녀. 오딜.
같은 반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피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혼자만의 외로움이나 소외감에도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오딜을 본 같은 반 남학생인 ‘에드메’와 ‘알랭’이 그녀를 도와준다. 처음으로 받아 본 낯선 도움에 고마움을 느낀 오딜은 ‘에드메’에게 조금씩 끌리는 감정을 느낀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16세가 된 학생들은 각자 실습을 통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딜은 그녀의 어머니가 바라는대로 ‘자문관’이 되기 위해 심사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에드메는 바이올린 연주로 음악원에 가고 싶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몰래 연습을 하며 오디션을 준비한다.

이렇게 진로를 고민하며 지내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그네를 타던 오딜은 20년 후인 미래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 동부 철책에서 넘어 온 에드메의 부모님을 우연히 목격한다.

(P. 40) 에드메의 부모님이 이곳에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다른 밸리의 방문을 승인 받을 수 있는 사유는 사별뿐이었다. 산 너머, 20년 이후인 동부 밸리의 세상에는 에드메가 죽고 없는게 틀림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에드메의 운명을 알게 된 오딜은 이 사실을 발설하는 것이 위반사항 이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속앓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문관이 되기 위해서 더욱 철저하게 자문기관 실습 심사 프로그램에 임해야 했다.

(P.79) 방문이 청원자에게 ‘옳은’일인가? 방문이 청원자를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인가?

어떤 선택이 날 가장 두렵게 만들까? 날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해줄지의 대한 여부는 애시당초 고려대상이 아니다.
떠나보낸 사람을 관망하는 것은 내겐 그저 너무 서글픈 일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 오딜은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 에드메가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산 속에 연습하기 좋을만한 장소를 소개한다.
그들만의 연주회장처럼 깊은 밤, 고요한 숲속을 아름다운 현악기의 선율로 채우는 동안 두 소년 소녀의 애틋함과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묘사들이 굉장히 서정적으로 다가왔고 내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P. 161) 달빛이 비치는 공터에는 돌로 된 옹벽이 있었다. 벽은 잡초로 무성했지만, 굴곡진 오솔길을 따라 계단처럼 층층이 쌓인 구조 때문에 객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진줏빛 반광에 비친 에드메의 얼굴에 검연쩍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바이올린의 위아래와 양옆을 살폈다. 이제 바이올린의 상태가 만족스러운지 그는 활을 들어올렸다.
활과 현이 충돌하는 순간, 삽에서 퍼 올려지는 흙처럼 음표가 사방으로 튀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깨끗함과 경이로움.
내겐 책의 내용을 떠나 힐링이 되는 순간들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P.340) 겨울이 남기고 간 황폐함 속에서 피어난 초록 새싹을 보면 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투병을 마치고 마침내 고른 숨결을 내뱉듯 대지에 색채가 돌아왔다. 바람이 한 점씩 불어올 때마다 황금빛 꽃잎, 푸른 잎사귀가 열광하며 언덕을 깨웠다.

(P. 382) 새벽녘에 사택을 나섰다. 날이 상쾌했다. 풀과 나뭇잎에 신선한 공기를 뿜어냈고, 예배당 앞뜰에서는 스피어민트 꽃의 향기가 진동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일 조차 일상에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며 다른 밸리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해도, 받이들이지 않겠다던 오딜.
자신이 좋아하는 에드메를 위해 운명을 바꿀 선택지에 놓여 고민은 깊어지고 그를 향한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간은 흐르고 복잡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뒤늦게 친해진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에드메’의 마음도 자신을 향한게 아닌 것 같다.
다시 외로움 가득 한 그림자가 그녀를 찾고 있다.

(P.202) 너무 캄캄해서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아침이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의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쓸쓸함이 반가웠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하릴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하루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의 계곡>은 방관하는 자, 감수하는 자, 이용하는 자, 이용당하는 자, 짓밟는 자, 떠밀린 자 등의 여러 인간군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나 역시도 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해 ‘따끔’하게 관통 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가까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디디는 길,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그 길 앞에 서 있는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거친 파도 앞일지, 벼랑으로 이어질 비탈길일지, 아니면 결과가 예견되는 일에 나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앞에 놓여 있는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인생은, 삶은, 매 순간 우리를 선택 앞에 놓이게 한다.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선택의 순간들은 ‘시기’를 따지지도 않고 맞닥들이게 된다.

그녀의 어딘가 용기 잃은 부족한 열정은 16세 소녀가 뒤늦게 친해진 친구들 무리 앞에서, 그리고 20년 뒤 장교들 무리 앞에서 미처 불꽃을 태우지도 못한 채, 흩어지는 연기와 절망감을 얻게 한다.
그들의 얼굴에 쏟아지는 햇살만큼, 익숙하고도 반가운 외로움 그리고 패배감이 그녀의 온 몸에 쏟아진다.

(P. 247) “지난날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더 나은 앞날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비가 내린 후 음푹 들어간 웅덩이를 ‘철퍼덕’ 소리를 거칠게 내며 밟고 지나가는 트럭이 남기고 간 바퀴자국을 바라보던 16세의 오딜,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거친 바람에 잔뜩 낀 모래가 박힌 이마 주름을 바라보는 36세의 오딜.
달라질 수 있을까? 그녀의 운명이?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얼른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걷는다.
걸으면서 흐트러진 마음 정돈을 하듯,
이 책도 그렇게 걸어가듯이 읽어내려갔다.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상실감은 삶의 무상함을 인정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경외심’을 발견하며 무너진 마음을 추스리고 극복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받아들이는 자세와 단단한 마음이 부족했던 나는 허위단심하며 지금도 배워나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워하는 마음을 추억이라는 자양분으로 삼아 오늘 이 하루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며 따뜻하게 가슴에 담아본다.

철학적인 많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며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저자의 글을 통해서 확인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P.364) “됐어야 해, 했어야 해. 그런 건 없어. 지금 내가 나인 거야. 그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P.452) ˝되기로 정해져 있는 건 없다. 하나의 결과가 다른 결과로 대체된 거야. 남은 결과를 결정하는 건 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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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4-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은 정해진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다 읽었어요 ㅋ 만약에 가능하다면 저는 동쪽보다는 서쪽으로 가고 싶어요 ㅋ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좋습니다~!!

곰돌이 2025-04-12 17:12   좋아요 1 | URL
벌써 다 읽으셨군요? 저도 동쪽으로 가는 건 좀 무서워서 서쪽을 택할 것 같아요...지금 읽는 거 다 읽고 나면 리스본행 야간열차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