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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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작가의 진솔한 고백이 담긴 서문이 좋으면, 본문의 마지막 장까지 그 울림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은 유독 더디게 읽혔다. 별로여서도, 거창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과한 몰입일지 모르겠으나, ‘그때의 나’를 자꾸만 불러내는 솔직한 말들이 다음 문장과 문단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가 내려간다. 작가와 나만의 은밀한 공감이자 소통이었을까. 심리적 연대였을지도.

그 뜨거운 온기가 좀 가시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봤던 것 같다. 여전히 무언가를 단정 지어 말하는 일에는 주춤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배워야 할 수많은 것 중에 운이 좋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살피기에 앞서 우선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 내 안의 고통과 슬픔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을 가져본 뒤에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내 방식대로 함부로’ 껴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 읽는 것으로 그칠 뿐인 사람이라는 것이 겸연쩍어 읽는 것조차 피했던 시간을 지나, ‘아는 것’만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택하며 한 장씩 읽어 내려갔다.


이브 엔슬러. 극작가이며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그녀가 서문에 ‘사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속도를 줄이는 것과 되돌아보고, 보고, 진정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설명했다. 일단 속도를 줄이고 되돌아보는 것에 나는 걸려들었다. 이제 남은 건, 보고, 진정으로 다시 보는 일일 테다.

작가는 전 세계 고통이 머무는 자리를 직접 찾아갔고, 그곳에서 만난 소외되고 짓밟힌 존재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아냈다. 너무나 참혹해서 사실이라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참 쉬운 말로 쓰였다. 보라는 걸 테지. 많은 사람이 봐주길.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유하길. 그리고 그 아픈 이름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간절함이 문장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가장 잔인한 배신을 당했던 아이가, 커서 전 세계의 비명이 들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남의 상처를 어루만진다는 것. 자신을 파괴했던 고통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제는 타인의 부서진 삶을 수습하러 다니는 이브 엔슬러의 행보에 경이로움과 동시에 나는 왜인지 안쓰러움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자궁암 3~4기를 지나온 그녀를 보며, 나는 자꾸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너무 오래 자기 몸보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 같아서. “나는 암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내 몸 안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p. 192)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과거의 자신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뒤늦고도 간절한 위로는, 어쩌면 타인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몸 안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일이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런데도 이브 엔슬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자꾸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은 왜 끝까지 남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갈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그 치열한 여정 자체가, 어린 날의 상처를 마주하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이자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이 아니었을지.

우리는 함께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고. 그리고 우리는 그 숨에 소리를 보탠다. 다른 소리들이 따라온다. 하나씩 차례로, 한 명, 한 명. 이윽고 우리는 몸짓을 보탠다. 발을 구른다. 주먹으로 친다. 사납게 팔을 휘젓는다. 여자들은 이제 두 발로 서, 저 깊은 곳 아래 있는 슬픔을, 분노를, 공포를 끌어올려 포효한다. ( p. 162)


며칠 전 본 영화 <파라다이스 하이웨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감금당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지낸 꼬마 여자아이 레일라. 목숨을 건 위태로운 도주 중 잠시 머문 휴게소에서 레일라는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를 만난다. 가족들과 트럭에서 북적거리며 지내는 그 아이는 레일라에게 참 해맑게도 자기 일상을 조잘거린다. 그런데 대화 도중 레일라의 표정이 묘해지는 순간이 있다. 소년은 ‘외로움’이라는 게 대체 어떤 느낌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사랑 속에서만 자라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다.

단 한 번도 혼자 있어 본 적 없다는 소년의 그 천진한 얼굴을 바라보며 레일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 외로움과 공포가 공기처럼 당연했던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 내게는 삶 자체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존재조차 모르는 생소한 감정이라는 사실이 레일라의 그 복잡한 표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브 엔슬러의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를 읽으며 ‘타인의 아픔을 헤아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 장면이 떠올랐다. 이브가 말하는 ‘슬픔을 껴안는 행위’는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누군가에겐 숨 쉬듯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겨우 닿을 수 있는 ‘파라다이스’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잔인한 간극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것 말이다.

쏘지도 날지도 못하는 매미들에게
유일한 방어책은
수백만 마리가 일제히 함께 날아 오르는 것. (p. 243)

결국 중요한 건 타인의 고통이 내 삶 바깥의 이야기로만 남지 않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소년과, 외로움 말고는 세상을 배워본 적 없는 레일라. 그 둘 사이의 거리를 함부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든 가늠해 보려 오래 시선을 두는 마음. 이브 엔슬러는 평생 그런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 서 있으려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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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6-05-12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정말 글을 잘 쓰더군요. 번역자의 문장도 크게 기여했겠지요. 저도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곰돌이 2026-05-12 13:39   좋아요 1 | URL
사실 고통의 기록이라는 생각에 감정 소모나 하고 끝나는 건 아닐까 싶어 선뜻 손이 가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서문에 담긴 작가의 솔직한 고백 덕분에 그런 경계심이 허물어지더라고요.
특히 ‘읽는 것’으로 그칠 뿐인 독자가 괜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끔 살피는 작가의 배려가 느껴져서, 고마운 마음으로 한 장씩 넘길 수 있었습니다.
평생 너무 아팠기에, 타인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몸에 밴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너지가 대단하신 분 같아요.
아, 그리고 오랜만에 뵙는 젤소민아님의 댓글도 저에겐 작가의 문장만큼이나 반갑고 좋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6-05-12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서 멈출때가 있는 것 같아요. 곰돌이님 말씀처럼 은밀한 공감이자 소통을 할 때 위로 받거나 뭔가가 씻기는 느낌이 들어요. 작가의 사유와 행동이 대단한 것 같아 이 책 읽어 보고 싶습니다.

곰돌이 2026-05-12 15:40   좋아요 3 | URL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처럼 보여도, 이상하게 오래 남는 말들이 있잖아요. 제게는 이 작가의 말들이 좀 그랬던 것 같아요.
‘고비 없고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라고 하기에는 너무 힘든 삶을 사셨더라고요. 그런 분이 “나는 단어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려 겨우 존재할 수 있었다”라고 하니, 글쓰기를 자기 거울처럼 삼아온 분들이라면 더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본문 속 이야기들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읽다 보면 너무 아프고 화나는 이야기들이 많아요. ㅠㅠ
정말 인간이라서 좋고, 또 인간이라서 싫은 순간들의 반복이었어요.

rainbass 2026-05-15 0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본인을 알아야 타인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문장을 보고 놀랬습니다. 곰돌이님 제법이시군요~~ 10점 추가~ 👏👏👏

곰돌이 2026-05-15 06:23   좋아요 1 | URL
늘 너무 뒤늦게 깨달아서 말이죠. 흑흑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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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쓰인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쉬운 말로 쓰였다는 건 이제 더 이상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외면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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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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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이 계속 늘어나다 보니, 이왕이면 대략 짐작되는 이야기는 조금 미뤄두고, 새로 알아가는 즐거움 쪽으로 마음이 더 뺏기곤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미 알고 있는 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만드는 소설이 누구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이 그런 쪽에 가깝다. 카리브해의 풍경, 남보다 못한 애증의 혈연, 식민지 경험의 흔적. 어떤 이야기일지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그 문장만큼은 쉽게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더 깊은 고통을 마치 당연한 일상처럼 풀어내는데도, 어떤 문장들은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화를 내고 울부짖으며 쏟아내도 이상하지 않을 처절한 순간에도, 제 갈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처럼 비명 한번 없이 냉소가 흐르는 담담함. 감정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 그 무심한 태도가 못내 마음에 남았던 걸까. 그렇게 나는 다시 수엘라라는 아이의 삶과 마주하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받는 상처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엘라. 태어나 처음으로 읽어낸 말이 자신을 억압하는 ‘대영 제국’이었던 아이. 아프리카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카리브해 원주민의 지워진 흔적까지 짊어져야 했던 수엘라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 틈에서도 ‘우리’였던 적이 없는 이방인이자 생의 밑바닥에서도 끝내 스며들지 못한 채 밀려난 섬이었다. 제국도, 이웃도, 그 어떤 타인도 그녀를 온전히 품지 않았기에 일찌감치 직시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위한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남의 손에 키워지며 겪은 멸시와 설움이 어찌 가볍겠냐만, 수엘라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 그것은 이미 자신에게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그런 수엘라에게 유일하게 다정한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의심 속에 붙잡혀 있고 패배자인 우리는 비현실적인 모든 것, 인간적이지 않은 모든 것, 사랑 없는 모든 것, 자비 없는 모든 것을 규정한다. 우리의 경험은 스스로에 의해 해석될 수 없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신은 올바른 신이 아니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적절하지 않다. (...) 적법하지 못한 자들, 가난한 자들, 비천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p. 45)

세월이 흘러 생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러, 나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마음으로 이 문장을 마주하니 말문이 막힌다. 눈이 멀도록 찬란한 카리브해의 햇살 아래, 그 무심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존재를 ‘사랑 없는 모든 것’으로 정의 내릴 수밖에 없었던 삶. 누구나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산다지만, 수엘라의 세계는 유독 서늘하다. 지배자가 정해놓은 질서에 순응하거나 보이지 않는 구원에 기대어 삶을 버티는 사람들 틈바구니 너머, 자신을 설명할 단어조차 없는 암흑 속에 머물러야 했던 그녀에게 행복이나 안온함 같은 보편적인 가치들은 들리지 않는 먼 나라의 말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설명하려면 결국 지배자가 만든 단어와 논리를 빌려와야 한다는 것, 그래서 고통을 말할수록 오히려 그것에서 멀어지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분명 내가 겪은 일인데도, 내뱉는 순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낯선 기분. 이 막막함 속에서 수엘라는 지배자가 정해놓은 해답(사랑, 신, 구원)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기를 거부한 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캄캄한 의식 속에 머물며 자신만의 비참한 진실을 응시하기로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 해석 불가능한 고통의 현장을 우리 역시 똑바로 바라보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이 물러섬 없는 태도는 결국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온기, 그 근원적인 결핍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조차 발뒤꿈치만 보여주던 어머니. 그녀를 향한 허기에 비하면, 세상의 비정함은 오히려 견딜 만한 것이었을까. 이제 나는 궁금해진다. 이토록 철저히 버려진 세계 위에서,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어머니의 ‘자서전’을 그녀가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랑은 나를 무너뜨렸을 것이다.
사랑은 항상 나를 무너뜨렸다.
사랑 없는 분위기에서 나는 잘 살 수 있었다.
이 사랑 없는 분위기에서 나는 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p. 35)

삶에 없었던 사랑.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그 다정함을 찾아 헤매기보다, 끝내 그 결핍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삶을 견뎌내는 수엘라. “나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p. 26)라며 되묻는 아득한 물음 앞에서는, 그녀에게 지독한 결기를 읽었던 내 마음이 무색해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는 일흔 해의 세월을 통과해 온 노년의 수엘라가 서 있다.

“꼭 사랑받고 행복해야만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이 메마르고 질긴 상태로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수엘라의 생존 의지에서 서늘한 수긍의 지점을 발견할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고통을 덜어낼 수 없어 차라리 몸의 일부로 받아들인 누군가라면, “아, 내 삶에도 이런 해석 불가능한 구석이 있지.”라며 수엘라, 그리고 킨케이드와 마주해 어설픈 위로조차 끼어들 틈 없는 적막 속에 머물게 될 수도 있고.

어떻게든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을 들볶는 일에 지쳐갈 때, 오히려 지독하게 무심한 문장들이 차라리 서글픈 안심이 될 때가 있는 것처럼, 킨케이드의 글을 읽는 동안 수엘라의 삶과 고통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그저 가만히 응시했던 것 같다. 메마른 생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했던 그 삶을.

어떤 구원도 약속되지 않은 허허벌판 위에서 오직 자신의 숨소리에만 의지한 채 생을 지속했던 사람. 어쩌겠는가. 누구에게도 섞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그 지독한 무심함이야말로, 수엘라가 경계 밖의 생 위에서 자신을 지켜낸 유일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녀를 살아가게 만든 것은 구원이 아니라 부재였을지도.

”그저 그 얼굴, 내가 영원히 산다 해도 결코 보지 못할 그 얼굴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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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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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결핍, 버려짐의 끝에서 한 여성은 묻는다. 사랑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끝내 그녀는 살아남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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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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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생>으로 잘 알려진 장예모 감독의 <원 세컨드>를 봤다. 영화의 무대는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 척박한 땅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는 이들에게 명절보다 설레는 날은 영화 상영일이다. 모래바람을 뚫고 오토바이에 실려 온 필름 통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빛의 세계가 열리던 시절, 영화는 두 달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귀한 축제였다.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의 땀 냄새 섞인 공기 속에서도 스크린의 불빛만을 기다리던 간절한 눈빛들. 누구랄 것도 없이 달려든 마을 사람들이 흙먼지에 오염된 필름을 귀한 보물인 양 정성스레 닦아내는 모습은, 지극한 정성을 넘어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반동으로 몰려 노동 캠프에 갇힌 주인공이 선전 영화 속 찰나의 순간, 단 ‘1초’뿐인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그 어떤 거창한 혁명의 구호보다 인간적이고 뜨거웠다.

옌롄커의 소설 <물처럼 단단하게>는 그 숭고한 ‘인간애’의 자리에 ‘욕망’을 밀어 넣는다. 똑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누군가는 단 1초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파멸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넜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본능을 정당화하는 훨씬 편리한 명분으로 혁명을 앞세운다. 작가는 그 거창한 명분 뒤에 숨은 인간의 민낯을 아주 작정하고 들춰낸다.

이번에 처음 읽게 된 옌롄커의 작품. 제법 두툼하다. 독서대에 책을 고정하는데, 표지에 들어간 옌롄커의 얼굴이 읽는 내내 강제 오픈되는 바람에 그 다소곳하면서도 사색적인 시선 처리를 실시간으로 감당하며 한 장씩 넘겨 내려갔다.

주인공 가오아이쥔은 자신을 숭고한 혁명가의 자식이라 정의하며 스물두 살에 입대한다. 원한다면 군 복무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지만 ‘고향에서 진짜 혁명을 일으키겠다’라고 밝히며 4년 만에 제대한다. 그런데 그의 속내를 까 보면 참 일차적이다. 1년 8개월 동안 여자 구경도 못 했다는 둥 본능적인 허기를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이 남자의 원대한 꿈은 숭고한 이념보다 억눌린 결핍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진실해야 합니다. (p. 17)

가오아이쥔의 이 천연덕스러운 자문자답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래, 인간이라면 그래야 마땅하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뒤이어 나오는 고백들이 가관이다. 권력의 핵심인 지부 서기의 딸이라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말부터, 풍채가 남다른 아내를 묘사하며 굳이 마오쩌둥을 거론하는 뻔뻔한 솔직함까지.

그의 들끓는 열정은 고향에 오자마자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다. 샤훙메이라는 여자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린 것! 사실 그녀는 초면이 아니었다. 우연히 철길에서 마주쳤을 때, 가오아이쥔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보란 듯이 맨발을 드러내며 발가락 플러팅(?)으로 묘한 살냄새를 풍겼던 구면의 여성이었던 것. 이 지독한 첫 만남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회했으니, 불이 붙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대의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 가오아이쥔은 옌롄커가 곳곳에 심어둔 불온함 속에서 자기 욕망을 부지런하게 몰아붙인다. 단단하게 굳은 대의를 비틀고 예리한 칼날로 현실을 쓱 그어버리는 파격.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 틈새로 튀어나오는 상징들을 알아채는 재미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울분 속에서, 살만 루슈디의 책들이 남기곤 하던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특유의 잔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니 왜, 가진 게 쥐뿔도 없어 판이라도 뒤집어보려 근거 없는 패기 하나로 거친 역사에 몸을 던지는 무모함을 볼 때 말이다. 집안 배경도 출셋길도 막막한 처지에서, 혁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쫓아 가족마저 뒷전으로 미뤄두고 밖으로 나도는 매정한 뒷모습. 거기서 느껴지는 욕조차 아까운 한심함, 그러다 어느 순간엔 기어코 애처로워지고 마는 그 복잡한 심경. 휴, 인간의 민낯에 낄낄거리다가도 문득 서글퍼지는 건, 왜인지 모를 일이다.

이따금 겸연쩍을 때면, (책을 뚫고 전달되는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이라도 한 듯) “제 말을 끊지 마십시오.”라며 세상 점잖은 톤으로 엄포를 놓는 그 도둑이 제 발 저린 듯한 방어기제를 구경하다 보면 어이없는 실소가 삐져나온다. 만약 그가 결핍 하나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이토록 처절하게 혁명을 운운했을까, 하는 물음에 이미 답이 읽혀버린 탓일까. 그건 그렇고 혁명이란 단어는 수백 번 본 것 같은데... 아니, 아이쥔! 진짜 혁명이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 ㅋㅋㅋ


마오쩌둥의 어록을 불쑥불쑥 소환시키는 이 기묘한 서사 끝에, 나는 가오아이쥔이 온갖 생각을 쥐어짜고 요란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 아래에서 혁명은 거창했고, 인간은 그보다 더 적나라했음을 확인했다. 옌롄커의 책들에 ‘금서’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그가 끝내 시선을 거두지 않는 지점 때문일 것이다.

꽉 쥐고 있던 손가락을 쫙 펴는 것처럼, 이런 불편하고 노골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헤집으며 헛웃음 한 번 지어보는 것. 고상하진 않아도, 금기를 넘나드는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그런 솔직함을 느끼는 동안 문득 권력의 검열 아래 입을 틀어막힌 이야기 중에 얼마나 많은 수작이 묻혀버렸고, 묻히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새삼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아래, 복잡한 심사를 띄워 보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가오아이쥔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신의 날뛰는 마음을 노래 가사가 이토록 고요하게 가라앉혀줄 줄은 몰랐다던 그의 나직한 고백. 나 역시 이 소설의 어느 갈피가 내 마음을 붙들 거라 예상치 못했듯이. 투박한 노래 한 줄에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마음. 왜인지 이 장면이 한쪽 가슴을 뜨겁게 데운다. 묘하게도 우리가 책을 읽으며 얻는 감정과도 맞닿아 있어서일 테지. 어지럽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뒤늦은 평온.

그리고 나는 이 비루한 역사의 굴레 속에서, 작가가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한 볼펜의 무게를 가만히 가늠해 볼 뿐이다.

“저는 죄상을 폭로해줄 투박한 심대의 볼펜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p.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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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01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한국의 어느 여류 소설가가 한강 작가는 자격이 없다며 중국의 옌렌커가 수상했어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죠. 그때 궁금하여 그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 또한 대단한 작가임은 부인할 수 없겠더군요. 특히, 띵씨 마을의 꿈(丁庄梦)은 수작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곰돌이 2026-05-01 21:2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옌롄커의 작품들이 꽤 많아서 어떤 것부터 읽어봐야 할지 고민 중이던 참에 잉크냄새님의 댓글이 너무나도 반가워요! <일광유년>을 일단 찜해두었는데, 추천해주신 작품도 꼭 챙겨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