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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이들 2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5
구젤 야히나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평점 :
1권과 이어진다.
러시아의 볼가강 유역 독일 식민지 마을 ‘그나덴탈’에 사는 ‘바흐’는 아이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삶의 큰 흥분을 느끼지 못한 그는 시를 사랑했고, 잠들기 전 독서시간이 하루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런 바흐의 심장을 들끓게 한 ‘클라라’와의 아련한 사랑, 그리고 1918년~1938년 사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통 속 볼가강 유역에서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살아갔던 이야기를 담은 <나의 아이들>은 읽는 재미가 상당해 1권을 다 읽고 바로 2권을 읽는 것이 기대감으로 들뜨긴 해도 마음만은 편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1918년~1938년 사이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의 여파가 그나덴탈 주민의 삶을 비켜나갈 수 없을 테니 고난이 예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1편에서 그나덴탈을 떠났던 사람들이 트랙터를 갖고 다시 돌아왔다.
머지않아 농업의 집단화가 시작될 것이고 이 말은 희생양이 된 농민들이 추방당하거나 기근에 시달리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의미 아닌가.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인 흐름은 단지 등장인물들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어줄 뿐이었다. 저자의 몰입하게 하는 섬세한 감각이, 이 소설을 예상 가능한 문장들로 채우지 않기 때문이다.
바흐는 그나덴탈에 새로 부임한 당 지도자 ‘호프만’을 만난다.
글재주가 없는 꼽추인데, 그래서인지 글쓰기에 탁월한 바흐를 자신의 끔찍한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로 선택한다. (이들이 만나게 된 사연은 1권에 자세히 나온다.)
그리고 바흐는 호프만을 위해 옛날이야기를 써서 갖다 주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글과 맞바꿔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바흐가 써 온 소설을 바탕으로 호프만은 자신의 이념에 맞게 수정의 작업을 거친 후, 그나덴탈 사람들이 보는 신문인 <볼가 쿠리어>에 싣기 시작한다. 즉, 선동을 목적으로 바흐의 글쓰기 능력을 갖고 오는 것이었다.
그나덴탈인들의 삶의 모습은 중세시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구시대적인 삶을 사는 그나덴탈을 자신이 원하는 정부에 필요한 용도를 갖춘 도시인 사회주의 건설에 혈안이 돼 있었다. 발주처이자 공사 현장에 감독관도 되었다가 관리관도 되었다가 현장 대리인도 되어 여기저기 간섭을 하고 다녔다.
호프만이 미친개미 날뛰듯 하는 동안 누군가 ‘볼가 독일 소비에트 공화국’에 금가루라도 뿌려 놓았는지 폐허로 가득했던 그나덴탈은 이제 주민의 마당이 아닌 콜호스의 공공재산 동물농장에서 우는 낙타와, 말소리가 들렸다. 그 울타리 안에서 날갯짓하는 거위와 오리를 볼 수 있고, 주변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고취되어 가슴에 빨간색 넥타이를 나부끼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농부들은 소련의 멋진 일꾼들이 되어 몹시 바빴다.
그리고 이민자들에게 한 약속과 함께 미소를 짓고 있던 예카테리나 2세의 동상은 철거되며,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는 볼가강을 바라본다.
(P. 81) 석양의 기다란 그림자는 노란 들판과 도로 위에 그려진 하얀 선에 드리워졌고, 거대한 볼가강은 천천히 흘러갔다. 그는 하늘 위에서 이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토록 광활한 대지를, 이토록 풍부한 물을 품은 강을 왜 하필 이렇게 작고 부산스러운 민족에게 선물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공평한 일인가?
1927년 스탈린의 지배기 이후로 호밀과 메밀 대신에 티타늄, 아연, 주철 등이 등장하면서 농업에 치중하던 소련은 공업화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P. 90) 졸지에 고아가 된 트랙터들은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것인데, 그중 일부는 붙잡혀서 용광로로 들어갈 것이며...(중략)...광활한 독일 소비에트 공화국 어딘가에 버려진 채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것이다.
이제 그나덴탈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볼가강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련의 공산주의 청년들의 나팔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조국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타국이라 말할 수도 없는 독일제국을 향하여 그나덴탈인들은 떠났다.
왼쪽 노를 젓고 오른쪽 노를 저어가며 거센 물살을 거스르고 바람을 거슬러서 낯선 모국어와 문화가 기다리는 곳을 향해 갔다.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뛰어넘으면서도 희망을 품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현재의 삶이 행복이구나 싶다가도 궁금증이 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 삶을 들여다본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까. 정신없이 쏟아지는 차와 어딘가에서 뱉어내는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심 속에서 시뻘건 모자를 쓰고 벌떼 몰려다니듯이 해 가며 초점 잃은 눈으로 침 튀기며 무언가를 외쳐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기괴해 보여, 그런 우리의 삶이 더 두렵게 느껴질까.
아니면 ‘이 사람네들도 우리랑 같네.’할려나.
그나덴탈에 남아있는 바흐는, 위험에 맞서기보다는 문을 굳게 닫고 피하던 예전의 우유부단한 겁쟁이가 아니다. 광기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소중한 존재를 지켜주는 것만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이라 느끼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부랑자들로부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킬 자신이 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남아있는 자가 떠나고 싶은 자를 가두는 모습으로 비칠 만큼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하는 삶을 벗어나기란 참 어려웠다.
2권까지 다 읽고 나니,
‘나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단순하지만, 또 이처럼 따뜻하게 들려올 수가 없다. 그리고 왠지 모를 허탈감도 든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부모가 소중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어르고 달래고 품 안에 끼고 지내며 사는 모습과, 낡은 것을 뒤로하고 어수선한 세상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는 자식의 입장까지 낯설지 않은 감정으로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역사의 과정이 볼가강의 반짝이는 윤슬이 내려앉은 물줄기처럼 힘도 들이지 않고 흐르는 듯했다.
저자의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감정으로 차분하게 써내려간 문장이 오히려 상황의 서글픔을 더 잘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굳어가는 혀가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게 만든 기구한 삶이 아닌 행복과 희망만을 담은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삶 속의 바흐를 상상해봤다. 그곳에서 바흐는 클라라와 행복했던 시절처럼 주위에는 무지갯빛 비눗방울이 떠다니고 모두가 소리 내 웃고만 있다. 모든 공포는 사라지고 없다.
현실이 상상을 비웃고 있기에 다시 바흐가 살아온 삶을 떠올려본다.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생존을 향해 어린아이들과 함께 모진 삶 살아나간 어른들까지 모두가 다 서글펐고 슬픈 감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삶을 향한 의지가 어딘가에는 숨어있는가보다. 그렇기에 생명의 숨소리를 듣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