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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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땅 위, 보니것의 날카로운 시선과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흐르는 삶과 세상을 향한 쓸쓸한 애정. 그의 농담은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이 웃음을 거둔다는 경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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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3-11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니것 소설 6권 읽었습니다. 블랙 유머가 좋습니다만...항상 2퍼센트 부족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항상 별4개...아직 읽지 않은 책 중에 5개가 있을 듯한 기대는 합니다...ㅎㅎ 저두 이 책 재밌게 읽었습니다..역시 평점은 별4개..

곰돌이 2026-03-11 12:58   좋아요 0 | URL
저는 다음에는 <제5도살장>을 읽어볼까 해요. 담담하게 농담을 툭 던지면서도, 뒤에는 묘하게 씁쓸한 냉소가 남는 느낌이 있어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야무님 리뷰는 항상 솔직한 시선이 느껴져서 읽는 재미가 있어요!! 다음 보니것 작품 리뷰가 올라오면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ㅎㅎ
 

<나라 없는 사람> 중에서...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 P32

인간은 춤추는 동물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문을 나서서 뭔가 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다. 누군가 다른 이유를 대면 콧방귀를 뀌어라. - P66

블루스는 전세계인에게 돌아간 선물인 걸까? 내가 들어본 최고의 리듬앤드블루스 연주는 폴란드 크라쿠프의 한 클럽에서 핀란드 출신의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연주한 것이었다. 재즈 역사가이자 훌륭한 작가이고 무엇보다 나의 절친한 친구인 앨버트 머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이 나라에 노예제—결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할 잔혹 행위 —가 번성했던 기간의 평균자살률은 노예보다 노예 소유주 쪽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머리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노예들에겐 우울증을 해결할 방법이 있었던 반면, 노예 소유주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예들은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함으로써 노인자살 충동을 떨칠 수 있었다. 머리가 제시하는 또다른 이유도 나에겐 꽤 합당하게 들린다. 즉 블루스는 우울증을 집 밖으로 날려버리지는 못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방 안 구석으로 쫓아버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사실이다. - P71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윙윙거리는 꿀벌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삼촌은 즐거운 이야기를 끊고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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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세계문학 단편선을 종종 사 모으고 있었다. 책을 처음 펼칠 때면 새 책을 만나는 설렘에 몇 편을 단숨에 읽고, 한동안 애정을 담아 이리저리 들춰본다. 하지만 그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 가고, 읽다 만 단편집들은 책장 한켠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읽지 못한 책들이 조금씩 밀려가는 느낌이 은근하게 마음을 눌러 온다. 그래서 비교적 얇은 편에 속하는, 흑인 문학의 거장 랭스턴 휴스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었다.

41편의 단편 중 맨 처음에 실린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에는 아프리카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선원들이 등장한다. 그중 주인공은 열여덟 살, 스스로 바다를 택한 소년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찌든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원이 된 모습이라기보다는, 바다 그 자체를 숨 쉴 수 있는 피난처로 삼고, 화물선의 좁은 공간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안식과 자유를 발견한 사람처럼 보였다. 거칠게 느껴지는 선원생활도 그들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마치 영화 《부력》 속 불법 원양어선에 선장과 그의 부하들이 육지에 내려, 소금기 가득한 몸을 대충 씻고 벌거벗은 채로 기다리는 여성의 방으로 달려가는 장면처럼, 혹은 작년에 정주행하면서 재미있게 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작품인 《보물섬》의 프리퀄로 제작된 미드 《검은해적》에서 선원과 해적들이 고단한 일상을 달래듯 창녀촌을 찾는 장면처럼, 본능적인 쾌락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열여덟 살 소년도 그 속에서 특별한 것 없는 한 명의 선원으로 지내다가 ‘누누마’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방랑벽이 있는 열여덟 살에게 세상은 아름다웠다. 선원이 된 첫해 나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가지고 있던 교재들일랑 모두 뱃전 너머로 던져 버리고 몇 달 동안 부모님에게 편지도 한 장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때껏 내가 알던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유였다. 바다는 나를 어머니처럼 맞아 주었고 웨스트일래너라는 화물선은 내 안식처가 되었다. (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 p. 8)

날들이 가고 밤들이 지나갔다. 다시 날들이 가고 밤들이 지나갔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무연한 하늘은 별들이 총총하게 들어찼다가는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웨스트일랜호는 조용히 침묵하듯 떠 있었다. (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 p. 12)

백인 선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는 누누마와의 관계는 문란하거나 저질스럽게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청춘 멜로의 한 장면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서로를 이해하며 필요할 때 의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맞물린다. 소년은 한때 누누마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세월이 흘러 거의 잊힌 지금, 그녀와의 기억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 고백한다. 이어지는 단편 「눈부신 그 사람」에서도 같은 화물선 웨스트일래너호와 선원들이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가 같은 소년의 시선인지, 혹은 또 다른 선원의 기억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는 선실을 담당하는 한 선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가 우연히 승객 중 데이지 존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선원 중 가장 잘생긴 에릭 긴트에 대한 호감뿐 아니라, 외로움과 고독이 은밀하게 담겨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일해 온 선교사 부부의 딸인 온순하고 순종적인 그녀에게 호감 가는 남자가 생긴 것이다. 일기장을 처음 본 선원은 입이 새털인 것이 분명하다. 입이 한가하면 답답해 죽나보다. 이미 선원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싹 퍼졌다. 배 후미에 있는 선원들 숙소에서 각자 침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서 시시덕거리며 한 여성의 은밀한 속사정을 떠들어 대니 말이다. 그런데, 한가해도 너무 한가해 보이는 선원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부릴 화물이 거의 없는 탓에, 배는 한참을 정박해 있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바다의 고요 속에서 소소한 소란과 수다, 그리고 은밀한 호기심은 그렇게 배 위에서 느릿한 시간 속에서 퍼져나간다.

컬럼비아 대학 자퇴 후 잠시 화물선에 올랐던 저자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삶에서 어떤 경계를 두지 않고 자유로움을 얻고 싶었던 갈증을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껄껄껄 웃어대는 선원들을 따라 거리낌없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지만, ‘지금 웃어도 되는 걸까’ 싶은 복잡함이 마음 한쪽에 남아 특유의 여유로움이 온전히 즐겁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흔들흔들하는 배가 멀미를 일으키지 않고 잔잔하게 다가온다. 욕이 섞인 농지거리를 주고받는 선원들의 장난 역시 불쾌하지 않다. 아마도 저자는 고된 삶의 면면을 거칠게 드러내기보다는, 상륙해 항구를 거닐고 농부들과 섞여 어울리는 선원들, 해 질 무렵 선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항구 처녀들과 산책로를 걷는 장면 등 고된 삶의 연속인 나날 속에서도 서글픔을 감춘 그들만의 생기와 문화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의도가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든 듯하다.

태양이 바다 너머로 떨어지자 다카르 항에 어둠이 찾아온다. 니스나리옹의 브루사드 호텔의 작은 정원 카페. 원주민 음악, 분수, 흑인 웨이터들, 담배 연기, 포도주, 별들. 여기저기 테이블에 흩어져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선원들과 흑인 소녀들, 몇 명의 프랑스 여인들이 보인다. 뚱뚱한 가게 주인은 손을 마주 부비며 흥청대는 가게 분위기에 고무되어 있다. 프랑스 여인들 중 한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뉴어크 출신의 마이크가 부르기 시작한 < 왜 내가 너 때문에 울어야 하나>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갑판장은 테이블 위에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제리는 분숫가에서 춤을 추고 있다. 취한 사람들의 웃음과 주정소리가 작은 정원을 가득 채운다. (「눈부신 그 사람」, p. 26)

바다에서 일주일을 같이 생활하다 보면 그리스인, 서인도 제도 흑인, 아일랜드인, 포르투갈인, 미국인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된 선원들끼리 꽤 친해지기 마련이다. 날씨가 따뜻하면 선원들은 후갑판에 모여 서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바다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도 아주 친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타국의 항구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그들은 마치 형제들처럼 똘똘 뭉친다. 물론 언제나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는 주방장과 설전을 펼칠 때도 모든 선원은 하나로 뭉친다. 바다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로 치자면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꼬마 숫총각」, p. 31)


제법 묵직한 덩치를 자랑하던 책들 중 하나를 골라 겨우 몇 편만 읽었을 뿐인데, 왠지 숙제를 마친 듯 후련한 기분이 든다. 리뷰를 올릴 때마다 별점을 매겨야 하는 것도 참 곤욕스러운 일 중 하나인데, 페이퍼는 그 곤욕스러움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한몫한 걸까? 끝으로 최근에 구매한 네 권의 책을 기록해 본다. 다음에 펼쳐질 읽을거리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미국의 체호프’라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의 열두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사실, 나는 정작 둘 다 아직 안 읽어봤다.)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이었는데, 얼마 전 박완서 작가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다가, 똭! 등장하는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변영주 감독님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고, 손에 넣고 싶었던 책이기도 해서, 이건 분명 나에게 보내진 ‘사라’는 우주적 신호였다. 한동안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비우기를 연거푸 반복했지만, 결국 이번에는 사버렸다. 저번 페이퍼에 뚱책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올려놓았는데,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얇은 책들이 줄줄이 놓여 있다. 덩치에 좀 질렸나? 낄낄. ㅋㅋㅋ 일단, 분위기라도 느껴볼 겸, 맨 처음에 실린 「깃털들」을 읽어봤다. 새 자동차, 두 주 정도 캐나다로 여행을 원하며, 반면에 아이들은 원하지 않는 부부인 잭과 프랜이 등장한다. 어느 날, 직장에서 알게 된 버드라는 친구에게 저녁 초대를 받게 된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두 사람이 풍기는 느낌은 뭐랄까, 뭔가 묘하게 불편하다. 흠...

“우리 달달한 과자를 가져가자.”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프랜이 말했다. “아니다. 뭘 가져가든 난 신경 안 쓸래. 이건 당신 체면치레니까. 법석 떨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난 안 갈 거야. 라즈베리 커피링을 만들 수는 있어. 아니면 컵케이크나.”

“디저트는 준비하겠지.” 내가 말했다. “디저트도 정하지 않고 식사 초대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p. 15)

저녁 초대가 달갑지 않은 듯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히 거절할만큼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두 사람의 대화는, 읽는 내내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버드의 집으로 가기 위해 교외로 나서는 길에서 잭은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운전하며 드라이브의 즐거움에 빠진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목초지와 낡은 축사, 그리고 천천히 이동하는 젖소떼를 바라보며 “참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말하지만, 프랜은 그 말에 공감하기는커녕 짧게 “깡촌이네.” 뚝 잘라 말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프랜의 반응에도 잭은 크게 맞서지 않고, 그녀를 이해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또 한편으로, 이 부부는 아이를 갖는 문제를 언젠가는 하게 될 일처럼 미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버드의 집에 있는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혹시 이들 부부에게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만드는 요인이 될까 봐, 괜히 나 혼자 은근히 긴장감이 돌았다. 버드 부부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이 날의 저녁 식사는 주인공 부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결말로 이어진다. 쌉싸름하다.



존 치버 『팔코너』

에제키엘 패러것. 영락한 집안의 차남으로 중년의 대학교수이자 마약중독자이다. 동시에 유일한 형제인 형을 죽이고 팔코너 교도소 독방동에 수감된 734-508-32번 죄수.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푸른 하늘이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 공간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이제 사기꾼과 살인자는 동료로, 폭력과 인권유린이라는 채찍을 휘두르는 교도관들은 관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판사의 소개 글을 여기까지 읽고, 더 내려가면 스포일러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스크롤을 쭉쭉 내려보다가,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폴스타프님의 조언: “출판사 소개 글은 읽지 말고 읽길 바란다.”를 발견했다. 폴스타프님께 땡투를 날리고, 망설임 없이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실제 변호사인 저자가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을 변호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을 읽은 이후,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책은 오랜만이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혹시라도 스포일러가 될까 소심하게 뒤표지를 들여다봤다.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고찰하는 작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죄의 무게를 실감하게 만드는 상상할 수도,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던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 갇혀 지내게 된 그가 들려줄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이 될까.



저메이카 킨케이드 『내 어머니의 자서전』

작년에 읽은 책 중 손꼽히는 작품중 하나는, 카리브 문학의 거장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미스터 포터』였다. 주인공의 할머니가 맞이한 죽음, 차가운 파도가 몰아치는 순간의 그 슬픔과 고요가 아직도 마음을 붙든다. 글이 이렇게 날카롭고도 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여운이 길었다. 나중에 이 책 속에 담긴 그녀의 기록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통찰과 언어의 힘이 또 얼마나 깊숙이 나를 흔들지 기대된다.

내가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한 이유는 나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는 내게 다정하게 들렸고, 나를 덜 고독하게 해 주었는데, 나는 고독했고 나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였나? 내 어머니는 죽었고,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p. 21)

무슨 일이 일어났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즉각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나마, 분별없게나마 나는 몇 마디 말을 통해 내 생활을 변화시켰다. 아마 내 생명까지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늘 스스로에게든 남들에게든 내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로 의식하고, 스스로의 욕구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신경을 쓰고, 나의 불만을, 나의 즐거움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그 때문이다. 뚜렷한 목적 없는 이 어린애다운 고통의 표현으로부터 내 인생이 바뀌었고 나는 그 점을 마음에 새겼다. (p. 28)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죔레는 거기에》

원래 『죔레가 사라지다』라는 제목으로 예약 구매한 책이, 막상 손에 쥐니 『죔레는 거기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새로운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든다. 올해 아흔두 살, 세월의 무게가 온몸에 배인 노인 카다 요제프와 그의 노견 죔레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라슬로는 긴 호흡과 난해함으로도 유명하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이 노인과 개라는 설정 덕분인지 비교적 편안하게 읽힌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줄거리와 역자 후기를 읽어보면 세대 간 갈등, 가치관의 충돌,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지만, 아직은 숲의 가장 높은 지대에 살고 있는 요제프와 죔레의 세계는 고요함을 뿜어내고, 조금은 여유롭다. 그러나 평온함 뒤에는 긴장이 숨어 있다. 헝가리 아르파드 왕가의 벨러 4세, 칭기즈 칸의 후손이자 왕위 계승자인 것을 숨기고 사는 요제프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둘러본다. 군주제를 재건하려는 추종자들, 무장봉기를 꿈꾸는 집단, 또 다른 정치적 세력까지 뒤얽혀 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이유로, 1945년에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 결정을 지금까지 단단히 지켜온 요제프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그 이유는 이제 이 삶이 지쳤기 때문이며, 벌써 세 번째 만남이라는 이 시점에서 그는 그들에게 신뢰가 간다고 여기기에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아주 작은 노력조차도 육체적으로 자신을 지치게 하며, 이제 그만하고 놓아도 된다는, 마지막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 한 사람의 인생으로는 아흔한 해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으며, 너무도 다양한 것들을 견뎌야 했지만, 그는 결국 그것들을 이겨냈고, 가족과 종교적 계율과 사랑하는 조국이 그에게 요구한 대로 품위를 지키며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매일 음식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를 들고, 제때 일어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이 제 궤도를 따라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면서, (p. 28)

당신들이 발견한 사실, 즉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은 일곱 겹으로 봉인된 비밀로 남아야 하오, 알겠지만 누구도, 아무도 이것을 알아서는 안 되며,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서는 안 되오, (p. 31)



(헥헥)
작정하고 페이퍼를 작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 혼자 신나게 이 말 저 말 말보따리를 풀어놓고 말았다. 뭐, 늘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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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6-03-0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가 참 좋습니다. ^^ 다 읽어보고 싶도록 만드시네요. ㅎㅎ

곰돌이 2026-03-08 08:16   좋아요 1 | URL
아쿠, 감사합니다. 끄적끄적 적어 내려가는 동안 저도 꽤 즐거웠어요. 책이 재미있었거든요. 하하. 즐겁게 읽어주신 것 같아 제 마음도 좋습니다. 오늘은 밥 한 끼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ㅎㅎ

자목련 2026-03-08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만난 책은 <대성당>뿐인데 이 한 권이 있어 괜히 좋습니다. ㅎㅎ

곰돌이 2026-03-08 09:33   좋아요 0 | URL
좋다고 생각해 주시는 그 마음이 저는 더 좋습니다. (부끄)

페넬로페 2026-03-08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마음에 들어 저도 세계문학 단편선을 몇 권 구매했는데, 잘 안 읽게 되더라고요. 라슬로의 신간은 헝가리어 직접 번역이라 저도 희망도서 신청했어요. 곰돌이님의 책 소개는 우아하게 아름답습니다^^

곰돌이 2026-03-08 09:35   좋아요 1 | URL
살아생전 ‘우아’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없던 곰이 세상에나 마상에나…. 제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ㅋㅋ 저 오늘 밥은 다 먹었습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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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르신과 햇살에 데워져 따뜻한 숨을 품고 있는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본다. 눈앞에 산과 들은 초록초록 신록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살랑이는 바람에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얹어보고 눈부신 풍경 속에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위로하듯 서로의 침묵에 기대어본다. 어르신은 말씀이 없으시고, 나 또한 굳이 말을 보태지 않는다. 말 대신 나누는 침묵 속에서 숨을 고요히 맞춰본다.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펼치자,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그녀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위로가 어떠하였는가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가장 깊은 위로를 건네는 것은 결국 바람과 나무와 흙이라는 듯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며 나의 오래 묵은 마음도 겨울을 벗어본다.

믿음과 기회를 잃은 채 얼어붙은 희망 속에서 성장이 멎어 버린 듯했던 한 소녀가 세월이 흘러 삶의 소소한 즐거움의 놀이터가 되어주는 작은 마당을 가꾸며 맨손으로 흙을 주무른다.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든 자기 손을 들여다보며, 며칠만 이 흙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끝에서 푸릇한 싹이 돋아나지 않겠느냐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나이 든 여인에 이르기까지의 긴 세월. 저 멀리 산등성이에 겹겹이 쌓인 초록의 결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나는 따뜻한 빛을 가만히 받아들이듯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 할머니였다면 옆구리 쿡 찔러서 눈치 한번 쓱 주고 싶을 만큼 솔직하면서도 통통 튀는 매력을 지닌 분께서 이곳저곳 뚫고 올라오는 잡초를 매일 뽑아내며 몸을 쓰는 동안, 평생 이고 지고 살아온 수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얼마나 세차게 소용돌이쳤을까. 우리 외할머니도 꽃과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셔서 정원을 곱게 가꾸는 분이신데, 안부 전화를 드릴 때마다 늘 무언가를 뽑고 계신다. 애당초 쇠심줄 같은 고집을 꺾을 생각조차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 허리 아픈데 그만 쉬시라고 하면 “뽑는 동안에는 안 아프다”라고만 하신다. 아마도 잡초를 뽑는다는 것은 단지 풀을 솎아 내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 응어리를 하나씩 드러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잡초라도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손길을 쉽게 말릴 수 없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은 대체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건네받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경청하는 이의 마음에 가까웠다면, 이 책은 조금 달랐다. 나 역시 이야기 속에 슬며시 발을 들여, 한 마디쯤 보태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에 담긴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짤막한 감상과 그녀에게 영향을 준 여러 권의 책 이야기 덕분에 거리감이 좁혀져서인 것 아닐까 싶다. 생각지도 않게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 불쑥 등장하여 반가운 마음이 앞서 장바구니에 슬며시 담고, 언젠가 그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그때의 나는 또 어떤 감상을 얻게 될지 궁금해지면서 잠시 생각은 삼천포로 빠지기도 했다. 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책 구경만 또 실컷 했지만, 그마저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지금의 젊음을 당연하게 여기며 건방을 떠는 나 역시, 시간이 흐르면 번화가의 화려한 불빛이 그저 어지럽게만 느껴질 날이 올 것이고, 목적지를 잃은 사람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는 순간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두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시간은 무언가를 빼앗아 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믿는 방향 감각은 어쩌면 상처를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얻는 또 하나의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걸 일러주는 박완서 작가의 단단함과,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살맛 나는 순간들이 조용히 곁을 내주고, 쉬엄쉬엄, 편안한 호흡으로 읽히도록 이끈다. 저자의 책을 하나 둘 야금야금 읽어왔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한다기보다는 어떤 문장에서 나의 마음이 붙들릴지, 어느 대목에서 오래 묵은 생각이 조용히 흔들릴지 그저 천천히 받아들이고만 싶을 뿐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어르신과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마치 만개한 꽃으로 가득한 마당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마음 한편이 포근하다.

외침으로써 위로받고 치유받고 싶었다.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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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3-06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이 나를 솎아낸다‘라는 부분을 보니, 뭔가 마음이 서글프네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을 필요없다 느끼셨을까요...
그런 점에서 ˝정신의 탄력˝이 부분이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곰돌이 2026-03-06 16:2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한 문장이 마음 한켠을 서늘하게, 또 쓸쓸하게 찌르는 느낌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세상 속에서 ‘내가 점점 필요 없어지고 있나?’ 싶은 순간이 분명 있잖아요. 그래서 ‘정신의 탄력’이라는 말이 더 깊게 와 닿는 것 같아요. 마음을 붙들고, 나 자신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일은 쉽지 않고 무겁기만 한데, 그런 사람들에게 박완서 작가의 글은 참 울림 있고, 소중하게 느껴지죠.
 
악마의 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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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현실이야. 우리는 현실 속에서, 바로 여기서 살아야 해. 계속 살아야 한다고”

지브릴은 그토록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고 바랐던 신을 보게 된다. 비록 기대했던 전능한 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신성한 ‘말씀’의 축복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심을 버리고 나니 새로운 결심이 빈자리를 채웠다. 천사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겉모습이 아니라 실체가 보인다. 이 도시를 구하리라. 이 도시, 진짜 런던. 악의 힘이 얼마나 완강한지 실감할 수밖에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도시의 주민들을 바라보며 선을 널리 펼치겠다는 결심을 더 굳혔다. 앞서 1권에서 내출혈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회복과 동시에 ‘믿음’을 잃었던 지브릴.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천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무신론자 영화배우 지브릴 파리슈타가 천사의 역할로 활동했던(?) 꿈에서 더 나아가 현실에서도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환상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고? 대천사 지브릴의 존재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그의 꿰뚫는 시선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개운해지면서 꼭 해야만 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전달받아 대천사 지브릴과 하나됨을 느낀다. 오호! 분명 그럴싸한 변화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앗! 영 기대치에 못 미치는 현실이 이어진다. 게다가 지브릴의 머리 뒤에 환하게 비치던 황금빛 후광마저 꺼져버렸다. 뭐지?

여기 이렇게 천상의 존재가 나타났건만, 눈부신 빛과 선을 뿜어내는, 빅벤보다도 거대한, 템스강 양쪽에 발을 걸칠 수도 있는 거인 같은 대천사가 나타났건만, 저 조그마한 개미들은 여전히 교통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운전자들과 말다툼을 벌일 뿐이었다. ˝나는 지브릴이다.˝ 그의 목소리는 강변에 늘어선 빌딩들을 뒤흔들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흔들리는 건물에서 지진을 피하려고 뛰쳐나오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눈멀고 귀먹고 잠든 자들. (p. 71)

최악의 바람둥이 영화배우 지브릴을 애인으로 둔 알리의 이야기도 조금 해야겠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이라면 자신의 죽은 남편만 떠올려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소중한 딸의 애인이 최악의 바람둥이 영화배우, 그것도 이제는 회까닥 돌아버려 천사라고 말하는 지브릴인 것이 못마땅하다. 지브릴에게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란 힘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니 말이다. 알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찾아보지만, 연속적인 꿈은 여전했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인 아랍어로 된 시를 읊어대는 등 결국 ‘천사’를 또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화계의 슈퍼스타였던 지브릴에게 다시 영화를 찍을 기회가 찾아온다. 인도 라자스탄의 시소디아 왕조에서 따온 이름인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영화감독 ‘시소디아’를 만나게 된 것인데, 시소디아는 지브릴의 요양 기간 동안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상자를 가져와 중국식 사탕옥수수부터 봄베이식 요리까지 골고루 맛보게 해주며 회복을 돕는다. 화려한 제국이면서도 외부의 침략을 많이 받은 라자스탄의 역사처럼 시소디아는 지브릴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영화계에 발을 담그도록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느낌상 평탄하게 잘 굴러가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다. 어쨌든 지금은 알리가 집을 비워야 할 때 지브릴의 곁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의 모습이다. 단지 혀만 짧을 뿐이다.

“괘괜찮아요. 돗돗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잇잇 있을게요. 지지브릴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건 오히려 틋틋 특권이니까.” (p. 80)

이래나저래나 지브릴은 살만한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애처로운 우리의 염소? 악마? 참차는? 머리에 뿔이 달린 털복숭이 악마이지만,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참차의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 본다.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난 뒤, 다시 인간의 모습을 찾은 참차! 지금 그는 자신이 살던 집 골방에 틀어박혀 언젠가 자기 부인과 함께 읽었던 단편 소설을 떠올린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나 구멍 크기만 봐서는 내상이 얼마나 심한지 가늠할 수 없어.”라고 말한 소설 속 인물의 말을 떠올리며 세상의 온갖 눈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다. 나와 당신이 타인의 삶을 헤아려보듯이 말이다. 평범한 삶을 회복하겠다는 소망과 모순되는 현실의 일면들에 주저앉아버린 시간을 갖고 난 뒤에 참차는 분명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진부함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그 모든 일이 날이 갈수록 어쩐지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이를 닦고 무엇이든 진하고 뜨거운 것을 마시고 나면 제아무리 끈질긴 악몽도 저절로 잊히듯이. (p. 174)

참차의 삶을 들여다보는데 결국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동질감과 측은함이 밀려왔다. 나는 실제로 용기가 부족하고 무언가를 바꾸려 한다기보다는 관조하며 인정하는 태도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서 참차의 삶에 더 관심을 두고 읽었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결국엔 원하는 삶에 가까워졌지만, 내 맘처럼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삶이 아니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비행기 사고를 당했고, 또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러나 그 기적이 불행의 씨앗이 되어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던 그의 삶도 참 고단하다. 뿔 달린 악마의 모습을 했을 때, 사람들은 참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편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주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건 ‘순응’이었다.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듯 구태여 숯검정 같은 속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더 짠하다.

예전의 삶을 재창조하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사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이해한 것이다. 참차는 골방에만 틀어박혀 온갖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텔레비전 채널을 마구 돌려본다. 마치 언젠가는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점점 빠르게만 변화하는 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수많은 비극 속에서 영국 땅에 자리 잡았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의 의식적인 노력과 속세에 초연해진 듯한 모습은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뒤 남은 좌절감과 고독함을 더 드러냈다. 그러나 참차는 허무와 패배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그가 세상에 다시 뛰어들게 만든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처한 상황을 타인과 연관 지어 더 깊게 파고들고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것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한다고 생각해서 비우려고 하는 쪽이다 보니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온 참차의 발걸음이 내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었다. 어쩌면 지브릴을 만난 뒤로 겪은 시련으로 인해 그의 존재 자체가 참차에게는 최악의 인연처럼 여겨지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삶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을 얻게 되었을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나는데, 분명한 것은 선택은 내 몫이라는 것이다.

워낙에 이야깃거리가 많아 인상 깊었던 것 한두 가지만 더 말해보자면, 이 소설은 막바지에 이르러 1666년 런던 대화재 사건부터 1879년 대영제국과 줄루 왕국 간에 일어난 줄루 전쟁까지 과거의 역사를 연결 지어 현재 런던의 한 카페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이곳에 지블리와 참차가 있다. 사방에서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치솟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각자 본성을 드러내는 선택을 한다. 실제로 런던 대화재 사건은 영국 시민들이 악마의 숫자 666이라 하여 분명 이것은 신이 내린 재앙이라 보고 가톨릭교도를 공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빵집에서 일어난 불이 도시로 번졌던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재앙 속에 인간의 위대함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재건 작업을 위해 시민들이 연대하였고 정치 시스템은 여러 목소리를 수렴하였다. 결국 질서가 무너지고 공포로 가득 찬 분열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듯한 이 장면이 2권의 핵심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온갖 환상과 기괴한 설정에 정신없이 따라가게 만들지만, 결국 헤매며 따라갔던 내 두 발이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니 말이다. 지브릴의 꿈속 이야기 중에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인도 농촌 마을에 사는 소녀 아예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걸어서 메카로 순례를 떠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거부와 수용, 만류와 설득이 오가면서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종교적 신념의 충돌을 담았다. 단순히 신념 차이로만 바라보기에는 종교적 대립이 사회적 요인과 얽히면서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조금은 갑갑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야만 했다. 물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종교 권력의 문제만을 드러냈다기보다는 분열한 세계를 포용하는 손길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으로 읽혔다.


저자의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상이 누군가에게는 자극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지만, 언어의 자유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지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주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루슈디의 다른 소설보다 특정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살아온 삶, 살아가는 삶,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지배에 따라 움직이며 현혹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환상과 종교와 관련한 믿음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 삶에서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삶의 균형이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많지 않은가. 거창한 것뿐 아니라 매스컴 등 사소한 일상과 연결되는 것들에서 너무나 쉽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정신 사나움? 나는 오히려 이런 설정과 역사와 신화가 섞인 복잡한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늘에 헬리콥터들이 몰려오던 모습을 목격했고, 여기저기서 물대포가 사람의 머리를 향하고 있던 모습도 보았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하고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당하는 사람을 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한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의 모습도 함께 보았다. 온통 분노에 휩싸이고 온갖 사건이 줄을 잇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 용기를 내는 것이 점점 갈수록 두려워져만 가는데, 누군가 우리를 향해 전속력을 다해 돌진한다. 목소리를 잃고 가장 힘겹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신해 주는 이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향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를 주시하는 자들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 염려되어 아슬아슬하기만 한대, 그럼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바라보니, 분명 그들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살만 루슈디도 마찬가지다.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위안을 삼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는 그의 용기가 값지다.

나의 지적 수준이 루슈디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눈만 끔벅거리며 읽는 순간도 종종 있었지만,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시대의 설화라든지 그가 영향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에 개인적으로 루슈디의 작품 중 가장 읽기 수월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할 책이었다. 만약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봤더라면 그의 다른 책으로 손이 쉽게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고 나름 팬심을 가진 상태라 평균 이상의 ‘좋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안개 속을 거치면서 끝끝내 밖으로 나오는 수고와 노력을 할 수 있었다. 2권의 후반부로 가면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 마치 상상 속 이야기가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뒤죽박죽 정신을 흔들어 혼란스러움을 겪은 독자의 널뛰는 감정에 ‘죽음’이라는 경건함과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주제가 담긴 서사가 더해지면서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준다. 아주 잘 읽었다. 작품 바깥의 소음에 휩쓸려 소홀히 대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소중한 작품이라는 번역가 김진준 님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삶을 되비추는 거울인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삶의 모든 원망과 다툼, 그리고 질투심을 씻어내려 준다는 것을 경험했던 살만 루슈디. 복수를 용서로 극복했던 사람.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깨달을 때쯤이면 너무 늦는다는 것, 이 가혹함을 경험하지 않길 바라는 그의 진심이 녹아들어 있는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숭고해질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아직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p.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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