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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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물결이 치는 잔상까지도 담아낼만큼 여백없이 꽉 채운 이들의 서사는 혼란과 불편함을 주기도 했지만, 지나칠만큼 불완전했던 감정과 상황에서 공존했던 진솔함과 처참함으로, 헛헛하면서도 안타까웠고 한 인간을 향한 연민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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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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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을 때, 감정이입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책을 읽고 평가를 내려야 하는 예리한 눈이 필요하지 않은, 그저 오롯이 독서를 즐기는 눈만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책들을 하나씩 꺼내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갖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즐겁고 행복하고 슬프고 아프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감정이입을 덜 하려고 애썼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호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나 감정들을 그들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을 읽는 흥미를 잃게 될 것 같았다.

그랬던 내가 마지막 장까지 읽고 이 책을 덮는 순간엔,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아려오듯 올라오는 연민 섞인 울음을 끌어내려야만 했다.


본업은 곡을 쓰고 생업으로 플루트 레슨을 하는 준연.
마흔이 넘어 결혼문제로 어머니와 다툰 후 안해본 걸, 생각조차 안했던 걸 해보고 싶어 레슨 광고를 보고 준연을 찾아간 해원.

이제는 도전도, 사랑도 내맘처럼 쉽지가 않고, 열정이란 것도 예전만큼 뜨겁지 않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내 앞에 놓여진 선택의 순간들도 지나간 경험들에 빗대어 보며 더 나은 방향, 안전한 방향을 구분하고 조언도 할 수 있는 안목을 갖은 마흔을 넘긴 두 남자의 만남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 두 남자 사이에 등장하는 준연의 오랜 친구이자 음악을 관두고 위스키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 하진.


해원은 특히 사랑 앞에 더욱 조심스럽다.
괜히 내색했다가 차게 식는 상대방의 표정 보면서 쪽팔리는 것도 싫고, 앞만보고 자신의 감정만을 폭발시키며 상대에게 달려가기엔 ‘사랑’이라는 것 조차가 이제는 그에게 우선순위에 있는 것도 아닌 듯 싶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랑에는 어차피 시작도 있지만 다 끝이나게 되어있어라고 단언 하는 듯한 해원의 태도는, 어린 시절의 부모에게 얻은 상처와 충만하지 못했던 사랑의 부재가 서로 겹겹이 쌓여 그의 마음들이 퍼석하게 된 것임을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그런 그에게 ‘하진’만큼은 달랐다.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해원이 처음 준연을 만났을때를 떠올려보면, 첫 만남에도 이렇게나 진심일 수가 있나 싶을만큼 굉장히 진지했다.
오래되지 않은 사이 임에도 어머니 병원비로 준연에게 천만원을 건네는 해원의 행동에 나는 흠칫 놀랐다. 물론 책에서 묘사되는 준연이가 해원과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가벼워 보이지 않는 우직함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큰 돈을 줄 만큼 서로의 대해 잘 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좋았나보다.
서로의 엇비슷한 면을 발견하는 대화속에서 진심의 우정을 자아낼만큼 두 사람에게 짧은 만남의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을 향한 외로움도 있었을 것 같다.


서울시 내에 신축아파트가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고, 아버지는 건설회사 대표이고, 뉴스에 상장 대박으로 자주 나왔던 그 회사에서 주가와 재무관리 일을 하고 있는 해원은 풍족한 삶을 살아온 반면,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행이라는 지우지 못할 고통과, 그럼에도 아버지 손을 벗어나지 않는 이해하지 못 할 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진은 위스키 만드는 일에 굉장히 열정적인 여성이다.
사랑의 표현을 ‘돈’으로 해결하는 듯한 해원과는 다른 사람이다.
서로 자신과 다른 모습에 끌렸는지 이 둘은 첫 만남부터 호감을 느끼고 사귀게 되었지만 왠지 어딘가 모르게 해원과 준연 사이 그 중간 어디쯤에서 머무는 듯한 하진.

가난해서 가난밖에 생각 할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도 하기전에 단념해야만 했던, 해원의 여자친구이기 전에 자신과 오랜 친구 사이였던 하진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경제적으로 우월한 해원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준연.


기대가 결과가 될 때까지 그걸 하는 사람인 해원을 향해 하진이를 잘 부탁한다는 준연의 말이 왠지 신경쓰인다.
내 곁에 있는 정말 좋은 사람이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하는 진심의 마음이 우러나왔던 그 말에서 쓸쓸함도 보이지만 무언가를 우려하는 사람처럼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나는 주식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 하지만 굳이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 책을 향한 내 마음이 주식시장의 변동성 만큼이나 불확실함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여 다소 불안정하게 읽어나가야만 했다. 예측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공감하고 싶지 않을만큼 내겐 이 사람들이 다 별로였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에게 생긴 거리감을 쉽게 좁히진 못했다. 달리 말하면 저자가 심리묘사를 굉장히 섬세하게 잘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서서히 중후반을 지나 이들이 만들어 낸 서사들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그 안에서 발견한 자신의 사랑,기쁨, 절망, 고독함 등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든 감정들을 쉼 없이 쏟아내는 이들의 모습에서, 곳곳에 공감의 구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전달된 나의 감정 낙차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낀걸지도 모르겠다.


항상 위축이 돼 있었던 유학시절을 보냈던 하진은 그 시절이 그녀를 강인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 몫을 하니까 받을 수 있었던 존중과 대우.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해원도, 나도 끄덕여 본다. 해원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랬지만 그러지 않았던 하진에게 서운하고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쉽지 않았던 유학시절들이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다 이해하기엔 그들의 시작점이 달랐다. 살아온 삶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모서리가 있는 준연, 해원, 하진 이 세명의 삶 속에 들어있는 감정들이 이제 막 피운 꽃봉우리처럼 싱그럽지는 않다. 그것은 살아가게 해주는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속에서 얻은 단단함이자 뭘 요구하지 않는, 기대하지 않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의지도 어렵고 기대하는 마음은 두렵고.

하지만,
그럼에도 진짜 사랑을 찾고 싶은 게 사람이다.

(P. 282) 우리는 자기 얘기에 눈물을 흘릴 줄 모르기 때문에, 대신 눈물 흘려 줄 사람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나는 책에 흠집 하나 남기지 않고 새 책처럼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조금은 따뜻한 색의 색연필로 밑줄도 좀 그려주고 싶고, 와닿는 문장에 예쁜 색의 인덱스도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온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나보다.

벽돌같은 책이 품고 있는 이 살벌하게 길고도 긴 글들은 공감이 되서 짜증이 나고, 시리기도 하고, 헛헛하기도 했다.
이들이 드러내지 않았던 외로움을 모른 척 할 수 없을만큼 나도 이제 서서히 알아가는 나이라서 그런지 읽을수록 마음이 쓰리다. 그리고 점점 가열되어가는 이들의 관계에서 오는 혼란의 감정이 더욱 더 불편해져만 간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떠밀림에 그대로 떨어져도 봤었고 다시 내 자신을 끌어올려도 봤었던, 그렇기에 매일 매일 마음까지 바빴던 나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슴속에 얼기설기 얽혀있는 감정들을 이 책에서 발견하는 순간만큼은 공감의 쓴웃음 한번 지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공감에 가닿을때까지 고단함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기에 준연, 해원, 하진의 감정들이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정돈되지 않은 내 마음속에 말이다.


열정을 넘어 집착으로 이어지는 욕망의 감정이 고통을 줬어도 어쩌면 그렇기에 내가 서서히 이 책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걸지도 모르겠다.

읽는동안 속이 타들어가서 술이라도 한잔 넘기면서 미간에 주름 세우고 인상 좀 쓰고 싶어졌다. 피우지 않는 담배 일지언정 크게 들이마시고 연기를 한숨 삼아 푸~~~우 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다 내뱉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가지 마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여러 번 들락날락 했다. 감정 폭력을 당한 기분이 들어서 중간 중간 고비도 있었다.


(P. 499)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촌극이라는 걸. 짤막짤막한, 아무 의미도 깊이도 없고 그저 지푸라기 잡듯 지폐를 붙잡아 보려 서로 밀치고 깨물고 할퀴고 때리는, 도대체 왜들 그렇게 천박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느냐는 말밖에 안 나오는 촌극.

이득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한 때는 경멸의 대상이었던, 그리고 돈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대물림 해준 아버지와 지옥이라 여기던 집에서 끔찍이 싫어한 서재에 나란히 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돈이 주는 쾌락을 말하고, 도망치지 말고 도망치게 만들라는 말을 들으며 해원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하는 말을 자르지 않고 중간에 나오지도 않은 걸 보면, 납득하고 있던 중일까? 또 다른 힘을 얻고 있는 중이었을까? 그 돈이 주는 권력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있었을까?


해원은 페달을 밟았다.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증오했던 아버지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할 만큼, 사랑했던 하진 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짓밟고 뭉개버리고 연기로 날려버리고 나면 자신이 꿈꾸던 장면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 날이 분명 올 것이라 믿었다.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그녀의 모든 걸 앗아간 이후에 말이다. 이것이 해원에게는 희열이고 사랑이었다.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던 준연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걸림돌일 뿐이었다. 그런 준연에게 손길을 건네는 하진을 바라보는 일이 해원을 미치게 만들었다. 사랑하니까 존중하고 싶지만, 사랑하기에 그녀 곁에서 준연이 떨어져 나가줬음 좋겠다.

(P. 515) 이 사랑은 운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운명 그 자체였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열어젖힌, 내가 시작했고 내가 완성하려는 사랑.


작은 물결이 치는 잔상까지도 담아낼만큼 여백없이 꽉 채운 이들의 서사는 혼란과 불편함을 주기도 했지만, 지나칠만큼 불완전했던 감정과 상황에서 공존했던 진솔함과 처참함으로, 헛헛하면서도 안타까웠고 한 인간을 향한 연민을 느끼게 했다.

단순한 집착이 광기에 옷을 입고 통제할 수 없는 소유욕으로 분별력을 잃게 만들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욕망이 결국 산산 조각나는 자신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부자 아버지 밑에서 풍족함으로 과잉된 삶을 살아왔던 해원에게 없던 것은 사랑 하나였다. 이런 사랑이 결여 된 사람이 운명처럼 사랑을 느낀 한 여자를 향한 집착은 인간이기에 그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며, 또 인간이기에 죄의식을 느끼게 했다.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는 배처럼, 서서히 무너져가는 해원의 내밀한 감정에서 그의 선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해원은 더이상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했다.
헤어짐을, 죽음을.

(P. 586) 모든 것이 다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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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일상의 조각들 덕분인걸까.
오늘은 유난히 하늘도 맑고 파랗게 느껴진다.

“학교 가는 길 바닥에 감꽃이 떨어져 있는거야. 아휴, 그게 뭐라고 글쎄 그걸 잔뜩 주워 담아서 책가방에 넣었어. 그 감꽃을... 아니, 그게 그땐 그렇게 신기하더라구. 허헛. 학교 끝나고 집에 가서 책가방을 열어보니까 아주 그냥 곤죽이 되어 버렸지 뭐야. 아이고, 내가 세상에 그랬던 적도 있었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보며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셨던지, 비 오고 바람이 세게 불면 우산을 손에 쥐고 걷는 것도 어찌나 심장이 벌렁벌렁 한지 모른다면서 옛날 얘기를 해주시는 외할머니를 바라보니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는 시시콜콜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하는 편은 아닌데, 모처럼 뵈러 간 외할머니 앞에서는 왠지 모를 안전한(?)느낌이 들어서인지 착착 부닐면서 온갖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자주 뵙지 못하는 죄송스러움 섞인 민망함에 주절주절 하는 내 얘기가 할머니의 왼쪽 귀를 타고 오른쪽 귀로 나가는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해골 복잡하게 뭔 놈의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냐는 말씀에 난 그냥 씨익 웃어본다.

외할머니가 챙겨주신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쓸어 담는 엄마의 모습이 집에서 볼 때와는 달리 깜찍하면서도(?) 왠지 들떠보인다.
통통하고 아담한 체형에 얼굴까지 비슷한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니 뽀얗고 귀여운 북극곰 같다.

꽃처럼 예쁘고 젊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같은 아픔을 겪고 살게 된 눈앞에 있는 중년의 자식을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모습과 또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짙은 슬픔의 감정을 참고 사는 나의 엄마.

이 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니 나도 금세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얼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입 쪽 빨아먹고 추스리면서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를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본다.


이제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외할머니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신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살아라. 마음의 병이 있으면 죽는거다.”

우리 외할머니 답게 진하고 묵직하게 몇마디 하시고는 이제 그만 부지런히들 가라고 재촉하신다.

난 사실 감꽃을 처음 봤다.
아마 본 적이 있더라도 관심도 없이 지나갔을거다.
조심스럽게 피어있는 감꽃을 보면, 이제 외할머니 생각부터 날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샀다.


<내가 되는 꿈>,<쓰게 될 것> 이후로 오랜만에 최진영 작가님의 <어떤 비밀>을 골라 봤는데, 내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를 들켜버린 듯한 느낌을 줬던 두 권 모두 너무 잘 읽었기 때문에 아마도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P. 21) 사는 대로 사는 것 같지만 오늘은 언제나 처음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술술 잘 읽혀지는 반면 가볍지 않은 내용에서 등장인물들이 주는 여운이 오래간다. 이번에 선택한 것은 <편지>,<기도의 막이 내릴 때>이다. 최근에 읽은 <악의>는 조금 아쉬웠는데, 그래도 재미는 있다.


살만 루슈디의 책은 처음 접한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과 <광대 샬리마르>를 골라 봤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믿겨지지 않는 일들이 사람을 암울하고 염세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삶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줄거리도 와닿고 구매자평도 좋아서 선택했다.
“폭력에 예술로 답하겠다”는 그와의 첫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혁진 작가님의 <광인>은 우리 부서 과장님이 추천해 주신 책들 중 하나인데, 너무 잘 읽었다면서 몇 번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정말 잘 읽어봐야지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앞으로 출근 할 때마다 읽고 있느냐고 물으실 것 같다.
운동이든 뭐든 꾸준히 열심히 하시는 걸 보면 알 수가 있다.
분명히 물어보실거다.

그리하여,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예술과 위스키를 곁들인 40대 두 남성의 대화를 담은 0장을 시작으로, 1장부터는 좀 더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잘 읽힌다. 사실적인 감정묘사 덕분인 것 같다.

(P. 38) 그래도 해야죠. 아직 싫어지진 않았으니까요. 이렇게나 힘들고 고달프면 싫어져야 하는데 그래지지가 않으니까요. 제가 한 선택은 여전히 유효한 거죠. 아마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렇게 싫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어요.
나는 준연을 물끄러미 봤다. 좋아하고 일면 존경하는 마음만큼이나 안타까웠다. 준연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준연은 허심하게 웃었다.


이브 엔슬러의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는 책 받고 훑어보니 목차부터가 마음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이 묻어나는 기록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 괴롭지만 피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계속해서 듣고 싶다.
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 고통일지라도.

분명, 그 고통은 강인함을 품고 있다.

(P.13)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과 순간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지독히도 외로운 우리가 갈구하는 손길, 잃어버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벽을 허무는 이야기, 벽을 세운 우리에게 왜 그랬느냐고 자문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서보 머그더의 <도어>는 책 내용과 역시 구매자 평이 좋았기에, 그리고 나는 사람을 향한 ‘오해’를 벗기고, ‘이해’하는 마음이 아직 부족하다 느끼기 때문에 사람간의 관계와 심리를 담은 책들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P. 15) 물방울들 사이에서 내 인생의 조각들이 휘말려버린 그 강은 이미 굽이져 흘러버렸으니 그곳에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에메렌츠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했는데, 과거를 위해 미래에 그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해두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인지하는 것은 아직 요원했다.


책을 받고 나니 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만족이란 것도, 행복이란 것도
내가 그렇다 느끼면 그게 만족이고 행복이란 것을 이렇게 또 실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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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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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마주하게 된 사람들에게서, 우연히 포착한 사물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점점 그것들과 서서히 혹은 너무 빨리 멀어지거나 다가가지 못한 어느 한 구석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 않음에도 용기를 내고 삶을 더 잘 살아내고 싶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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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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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불려지길 원하는 사람일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타인의 생각과 시선을 그토록 신경 쓰며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잘 하지 않는 생각들이다.
그런데 권여선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 다시 이런 상념에 빠지게 된다.


단 한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8편의 단편으로 담아냈다.


한 사람의 내면으로 천천히 다가가 들여다 본 그들의 여정은, 낯선 거리감 속에서 마치 조금씩 반짝거리는 빛 줄기를 만난 듯 한 발 나아간 앞 날이 예상되는 누군가도 있었고, 세상과는 고립되어 자신은 겪어보지 못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을 통해 더욱 더 깊은 어둠으로만 빠져들어가는 누군가도 있었으며, 서글픈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세상에 뿌려진 수 많은 타인들을 만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감정들을 파고 들어가며 살아가야 했던 누군가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마주했다.

<모르는 영역> 편에 담긴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관계 속에서의 위태로움을 가까이에서 바라봤던 입장으로써 안타까움과 불안감을 가진 채 들여다 봐야 했지만, 서서히 느슨해지는 이들의 변화에 묘한 반가움도 느낄 수 있었기에 괜시리 뭉클하기도 했다.

각자의 사정을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포기는 하지말라고 하는 듯,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심어주고 싶었던 노력과 애달팠던 마음이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그 기쁨을 저버리지는 말라고 하는 듯.


물론, 때로는 포기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참 씁쓸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오히려 당장에 불행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예쁘고 화려한 포장지로 감싼 내용물을 꺼내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 조심스럽게 뜯어보는 그 순간의 행복도 물론 좋다.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좋은가. 기대감을 가져본다는게.

그런데 나와 우리 주변 사람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이, 그들의 실제 음성이 들려오듯 그 감정 그대로 전달되는 공감의 글을 볼 때만큼 와닿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번에 다시금 실감했다.


엄마가 떠넘기고 간 그 빚을 고스란히 받은 언니가, 또 다시 어린 동생인 소희에게 주고 떠나버린 이야기를 담은 <손톱> 편은 어린 소희에게 이 세상과 상황이 너무나 가혹했다.

어떻게든 또 감당하고 살아내야 했기에 남들 눈에는 모지락스럽게 보일지언정, 다른 방법이 없다.
먹는거 입는 거 줄이고 줄여서 돈만 미친듯이 벌고 살아야 된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도대체 언제쯤에야 끝날지, 자신의 나이가 얼마나 더 들어야 좀 나아지는건지 까마득하기만 한 소희의 이야기는 쉽게 다가가고 안아줄 수 없을만큼 조심스러웠다.
사람에게 마음을 많이 다쳤을 그녀에게 무슨 수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섣부른 위로는 소희의 마음을 더 다치게 할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게 할 만큼, 그렇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할 만큼 불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느끼게 하는 가혹함을 줄까봐.

그러니 이 순간의 감정들을 담아 내는 저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그럼에도 우연히 만난 자신과 닮은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던진 웃음에 같이 웃어주는 소희다.
어느 날 운 좋게 앉아서 갈 수 있었던 버스 안,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따뜻하다’ 느끼며 이 순간의 좋음을 느껴보는 그런 소희다.


기대되는 미래를 바라보며 행복을 꿈꾸는 사람이 있듯이, 당장에 고통이 덜 한 삶, 덜 불행한 삶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저자는 알아주고 있었다. 이렇게 드러내기 보다는 덜어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도 박탈감 느끼지 않도록 인간의 정신을 곰곰이 들여다 본 사람처럼 생각해주는 저자의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용기가 생긴다.
이 용기가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잘 살고 싶어졌다. 더 잘 살아내고 싶어졌다.

바닥에 떨어졌다고 그대로 포기하지 말고, 그럼 그 바닥에 맞닿아진 채로 또 살아보자 생각하면서 표면적인 변화가 없더라도 그냥 잘 살아보자라고 하는 그 힘을 얻었다.
주어진 삶을 만끽하다가 괴로운 날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럼 그 삶 마저도 살자. 잘 살자. 더 잘 살아내보자.


그들은, 우리는,
비록 자신들이 원하던 것이 아닐지라도 주어진 대로 또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드러내기를 주저하며 덜어내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느꼈을 서글프고 애달픈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담아준, 또 그렇기에 쓰라린 마음으로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 준, 하지만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 않아도 위로를 받음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아직 멀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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