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물 터지듯이 출간되는 많은 인문서적들 덕분에 우리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시간대비 효율적인 독서는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인문서적들을 접하기보다 본인이 추구하는 사상이나 새로운 지식에 대한 고찰이 적기 때문인 듯 싶다. 그저 교양수준으로 접하는 탓인지 인문서적에 대해서는 그리 까다로운 시선으로 선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서양의 철학을 기반으로 발전한 외국 인문서적들의 번역본을 접하고 있는만큼 요즘 젊은사람들의 인문학적 넓이는 깊은 편이겠지만 우리나라의 기존 문화와 함께 발전해온 인문서적들에 눈을 돌려본 적이 없었다는데 적잖이 놀라고 부끄러웠다. 인문적소양이 필요하다는건 절절히 느끼고 있으면서 막상 그 깊이와 본질을 보려한게 아니라 다양한 부페음식 먹어치우듯이 많은 양의 서적을 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 내용물이 제대로 부합하여 정리되지 못한게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고전 인문학이라는 분야의 그 내용에 대해 기대하는 바도 없었고, 딱딱하고 지루하여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읽기 쉬운 현대서적들을 읽었을 뿐이다. 어쩌면 고전에 대해 관심이 없는 독자의 탓 일수도 있고 그동안 고전을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현재의 분위기자체가 우리의 고전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에 서로서로 반성 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인문학의 싹>으로 일반인들이 고전을 좀 더 쉽고 가깝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발전적인 일이고 감사할 일이라 책 소개글을 읽고 도착하기도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다. 원래 가지고있던 인문학적 소양이 얕았던 탓인지 우리의 고전을 통해 접하는 인문학이 왜 이렇게 새롭고 놀랍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뭔가 정말 뜻밖이다!!창조적이다!이런 느낌이 전혀 아닌데도 새로웠다. 내가 너무 우리의 인문학을 무시해 온걸까? <인문학의 싹>으로 편안하게 고전들을 접하면서 조선에도 철학,수학,교육,지리 등 고전이라 불릴만한 인문서들이 있었구나 문득 느꼈다. 일단 존재여부는 알지만 공부해보려 한 적이 없었는데대한 반성이 든다. 탐욕적으로 읽으려 들었던 외국의 인문서적에 대한 욕심과 비교해보니 참 씁쓸하고 빛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인문서적에 미안하다. 그냥 읽으라하면 지루해서 어려워서 읽지 못했을 책 들이지만 독서의 기술이 얕은 나같은 일반인을 위한 배려로 너무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고 현재에 활동하고 계시는 인문학자들의 설명을 곁들인 친절한 구성을 보여준다. 보통은 넘어서는 두께에 고전을 다룬 인문서적이라 첫장을 펼치기에도 겁이났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무겁고 어렵지 않게 설명이 곁들여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모로가도 서울만가면 된다고 고전 원서를 읽을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재해석한 설명들로 그 고전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어디가서 뻔뻔하게 고전에 대해 어느정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도로 고전에 대해 아는척 대화하기는 많이 부족하지만 <인문학의 싹>으로 싹튼 고전에 대한 관심이 곧 좀 더 심화학습을 거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도서관에서 한동안 가까이하지 않았던 인문서적들에 대해 조회부터 해보고싶다. 물론 인문학이란 정의하기도 설명하기도 정답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고 부족한 부분은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의 고전으로 재해석하는 인문서라니? 하지만 바로 그 시도에 무한한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지금은 다소 부족할지 모르는 고전에 대한 접근이지만 이 시도가 우리가 잊고있을지도 모를 고전에서오는 깊이와 가치를 점점 끌어내 줄 것이라 기대해본다.
소설적인 요소를 부과하지도 않고 그저 조서를 꾸미듯 사실적으로 적어나간 그의 필체에 삶의 다양성과 인간심리에 대한 반응들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어 더 섬뜩한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2>. 워낙 전작이 호평을 받으며 기대를 받았기에 작가도 부담이었을 것이고 전작만한 후속이 나오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우리는 살면서 1번도 접하기 힘든, 듣기도 힘든 사건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은 생각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기만해서는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부족한데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2>가 기존의 법학관련 판례모음집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의 그 구성력이나 문장표현력이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판례들을 전해주는데 탁월함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작가이면서 전 법조인이었던 경력을 살린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2>의 출판으로 그의 2가지 능력이 시너지효과를 내며 범죄에 관련한 사건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의 의식수준을 높여준다는데대한 의미도 크다. 범죄자를 함부로 동정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저자의 글에서 그동안 사건의 표면만 보고 함부로 속단하여 동정하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 계기였다. 다양한 입장이있기 때문에 늘 속단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동정하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또한 사건을 깊이 알지못하는데서오는 오류라니 모르는게 죄인걸까...;; 가끔 범죄는 사회가 바라는 형태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인간의 관계에서 범죄가 기인하는만큼 예나 지금이나 소통의 단절과 관계의 오류는 일상에 미미하게 존재하지만 소집단이나 개인으로 응축될 경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 되었다. 사실 문화적발전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단절로 범죄가 늘어났다는 의견은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더래도 과거에 비해 외로움이 심해지고 건강하고 생동감있는 표현력이 줄어들었다. 물론 시대마다 그 성격을 달리하며 사람들간의 교류나 표현들이 변형되기 때문에 경제적 발전이나 급속한 기술발달로 계층간, 계급간, 세대간의 격차가 점점 커지는데 모든 원인이 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로인해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것은 이미 적지않게 일어난 작은 주변의 마찰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문제들로 알 수 있다. 다양한 사례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읽고 있지만 비단 그 사고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까? 어쩌면 지난 시간들 속에 내가 범죄에 노출되었거나 범죄의 주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들을 충분히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인간적인 이성으로 잠재워진 부분도 있을 것이고 혹은 주변의 도움이나 여건상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2>는 단편형식으로 사례들을 보여주고있어 교양상식을 필요로하나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지금의 우리들에게 맞춤인 교양서적이다. 물론 좀 더 깊이를 추구하는 입장이라면 부족할지 모르겠으나 범죄와 그와 관련한 법적인 절차에 대해 익숙치않은 일반인들에게 한번쯤은 거치는 편이 좋은 법률사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피할 수 있다면 평생 눈 감고, 귀 막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제대로 공부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또한 우리가 어떤 입장에 놓일지 알 수 없는만큼 긴박한 상황에서도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도록 이런 사례들을 한번쯤은 훑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활적으로 유익한 독서였다.
자국이든 외국이든 역사적 발견이나 기록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은 단순히 그 근거들이 가진 역사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현재의 정치적인 문제들에 가져 오게 될 효과들 덕분일 것이다. 실제로 이웃나라같은 경우는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국민들을 속여가는 교육정책을 펴니 '사실이 아니면 그만'이라고 뒷짐지고 있을 수 만은 없다. 지금의 독도처럼 일본의 끊임없는 우김들이 쌓이면 훗날 권리행사에 있어 제약을 받게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식민지도 아닌 지금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역사란 승자의 편에서 씌어지는 것. 그렇지만 방대한 사료들을 토대로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상대적인 추측을 하는 노력을 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새로운 유물의 발굴은 그들에게 학술적 가치 그 이상을 의미한다. 새로운 발굴은 기존의 사실들을 더 견고히 뒷받침 해 주기도 하고, 전복해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발굴에 기뻐하기 보다는 그 사실유무에 더 신중을 기해야한다는게 안타깝다. 아까도 예를 들었듯이 역사를 왜곡하느라 교과서도 바꾸는 일본은 유물발굴도 허구로 발표한 적이 있기 때문에 당시의 뉴스를 생각하면 영 기분이 안좋다. 자국의 역사에 자부심이 부족해 그런 것이야 어쩔 수 없다치지만 그로인해 피해를 당해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달갑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는데도 강하게 제재를 가해 두번다지 그런 몰상식한 행위를 할 수 없게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에 한숨이 나는 것이다. <역사를 다시 쓴 10가지 발견>에서는 투탕카멘, 마추피추, 사해의 두루마리 등 전세계적인 발견들을 통해 우리의 문화에 윤택함이 흐를 수 있게 한 핵심을 보여주는데 이런 우연한 발견들이 모여 현재의 발전을 이루는데 지렛대가 되는 역할을 하고있으니 '만약 발견을 할 수 없었거나, 늦어졌거나, 왜곡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면 재밌다기 보다는 아찔하다. 선사시대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선조들의 문화적 발전과 기술력에 깜짝깜짝 놀라는데 어쩌면 우리가 발견하지도 못한 더 깜짝놀랄 유물들이 숨겨져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일반인인 나도 흥분되는데 고고학자들은 그런 기대로 얼마나 학생시절 가슴이 뛰었을까... 유물들이 갖는 가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 잡설이 길어졌다. 얼른 구성에 대해 얘기해야지. 책의 구성에 대해서 말 하자면 교과서적인 내용만을 나열하지 않고 실제 우리가 교양적으로 인지하는 상식선의 문화적 유물들에 대해 다루면서 우리의 문화의식수준을 한단계 높여주고 있다. 각 장마다 하나의 유물에 맞춰 기술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도 않고 바쁜 경우는 당장 필요한 장만 선택해서 읽어도 내용의 흐름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편리하다.(개인적으로 사해의 문서에 관심이 있었는데 따로 조사해보려는 노력이 없던 탓에 이번 <역사를 다시 쓴 10가지 발견>의 차례를 보고 어찌나 기뻤는지 그 부분부터 읽었었다.)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자주 접해야하는 인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지만 중고등학생들도 방대한 세계사를 시험보는 기준으로 달달 외우느라 고생인데 가끔 이런 인문서적으로 뇌에 흥미성 세계사를 접하게 해 주기에 딱이다.
늘 미래를 대비한다고 하지만 당장 오늘 일도 귀찮아 내일로 미뤄버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익숙해져있다. 이제 20대도 끝나가고 30대로 가려하는 시점에서 뭔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경고음이! 마침맞게 <인생의 마지막 교과서>를 보고 왠지 위안과 함께 의욕이 되살아났다면 과장일까? 30대를 바라보는 나이라면 대비해야할 성공을 위한 지침서라는 뉘앙스를 마구 풍기는 표지에 역시나 성취에 대한 도서인가 싶었으나 지금까지의 자기계발서에서 만연했던 '성공'과는 차이가 있어 다른 자기계발서보다 더 깊이를 주고 있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너무 '성공'을 부추긴 나머지 '자아'라던가 '사회의식'을 형식상 곁들였을 뿐이지 너무 소홀하게 여긴 것이 아닌가 싶어 일반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늘 강박적인 느낌에 불편했었기에, <인생의 마지막 교과서>역시 그런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루퉁한 표정으로 펼쳤으나 기대 이상으로 성숙한 사회에 대한 대비, 인품과 자아에 대한 바른 길을 찾기 위해 안내하고 있어 감동스러웠다. <인생의 마지막 교과서>에선 30대의 사회인이 갖춰야 할 업무적 스킬이나 노후대비에 대한 재테크 수단을 일러주진 않는다.(당연한 것이겠지만;;) 사회적 지위와 편리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바로 '나' 스스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고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끊임없이 환기시켜준다. 성장을 해야하는 때 이기에 성숙을 위한 준비보다 성장에 목표를 맞추느라 제대로 목표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조언이 아닐까? 저자의 말처럼 이제 사회는 성숙기에 들어가고 있는데 늘 우리는 한템포 느리게 적응하여 대중매체의 선동으로 일괄적인 변화의 삶을 살고있다.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적 구도에서 결정되는 목표에 따라 설정되었었다는 생각을 하니 순간 섬뜩하고 스스로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사회가 정해주는 인생의 '사회적 성공과 행복 프로세스'에 생각하는 힘을 단념하고 살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전공분야에서의 업무에 건강을 한번 잃고 정신을 차린 나에게는 사회적 성공만을 부추김에 따라가느라 바쁜 일반적 청년의 역할을 못하는 것 같아 늘 불안하고 시민의식이 부족한건 아닌지 자책하던 나에게 많은 위안을 줬다. 사실 교육에 있어서는 늘 앞선문화를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실제로 시행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른들이 운영하기에 시행에 비해 느리게 적용되는 교육문화는 그래도 유연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덕분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빠르게 발전해나가지만 어른들의 사회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기에는 경직된 문화이기에 어려운 탓이다. '열린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이지만 닫힌 사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니 여러가지로 맞지않아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생각하는 힘이 없는 상황의 교육문화 속에서 성장했더라면 좋았을껄 스스로 늘 고민하고 답을 찾느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정해나가는 행보가 착실한 조직문화에 반하는 느낌에 낙오된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스스로 세운 '인생의 행복'에 대한 자긍심으로 '독서'를 지속하며, '사회적 역할' 이외의 '가족구성원'과 '인간적'인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여왔다. 독서하는 와중에도 늘 '사회적 성취'를 강조하는 자기계발서들을 보면 사기가 꺾이는게 사실이었는데, '성공'과 '사회적 의무' 외에 진짜 사람의 '행복'이 중요하다 동조해주는 책을 만나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물론 조직문화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조직문화에서 탈피해야한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조직문화를 이루며 조화를 이룰 줄도 알아야 하니까. 다만 저자는 조직문화 자체가 인간의 도덕적 의무와 누려야할 행복에 대한 권리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 사회성장의 발판으로 이뤄져 왜곡되게 고착된 작금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있는 조직문화의 단점들을 잘 추려서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고 성숙한 사회로 갈 수 있는 개인들의 행복을 위한 준비를 위해 노력해야한다. '성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성숙'한 한결 고차원적인 인간상에 대한 책이다. 막연히 사회적 지위의 성취를 위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겠지만, 높은 인품과 깊이있는 인생에 대한 고찰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정답을 구할 수는 없어도 위안과 함께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나 우리나 빠른 경제적, 사회적 성장을 거치면서 놀라운 성과는 거두었지만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가 그만큼 크기에 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낳아 해마다 이슈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 그 부작용들을 딛고 성숙사회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을 보니, 시기는 좀 늦더라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조직문화를 이루는 우리나라이기에 좋은 선례를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며 응원을 보내본다.
끝이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함이고 시작이란 끝을 위한 출발이기에 책장을 덮으며 나오미의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 느낌에 내가 더 가슴이 움찔했다. 안나는 이제 긴 휴식기에 들어갔을까? 나오미의 기가 전수되어 개로서의 도전을 하고있지는 않을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여정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개들과 함께 눈 속을 뒹굴며 가끔은 기적적인 상황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그렇게 순간순간의 아찔함들을 딛고 결국 홀로 북극횡단에 성공했다. 내가 이렇게 살았다 한들, 저렇게 살았다 한들 그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은걸까? 가슴 속에 꿈을 품은 적이 있다면 '실현'해내지 못한데 대한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죄책감이 든다. 이렇게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걸 걸로 부딪히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과연 얼마나 부딪혔길래 벌써 지쳤다며 안주하려 드는건지 허탈함이 밀려와서 혼났다. 스스로에겐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텍스트를 눈으로 쫓으며 함께 모험을했다는 생각에 완주의 뿌듯함을 느끼다니 나도 참...;; 단련된 몸으로 횡단하기도 그리 힘든데 운동신경이 둔한 내가 자연 속으로의 도전을 꿈꾸게 할 만큼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는 거의 그저 나날의 기록일 뿐이지만 워낙 긴박하거나 위급해도 횡단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학생때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기억에 남는 경험을 가졌거나 지금 인생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 방향으로 가고있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라는 용기와 확신을 얻은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 되었다. 자연 앞에서는 나이도 인종도, 성별도 무의미한 것이니까.(물론 저질체력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지만) 빌딩숲을 지나며 사회적 정글을 체험하는 것을 떠나 직접 자연에서 겪는 경험들은 우리의 생활을 충분히 리프레시해줄 것이란 기대가 생긴다. 워낙 위험천만해서 리프레시가 아니라 10년은 더 늙을지도 모르지만 정신만은 새공기가 주입되어 우리들의 생각 이상으로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도높은 자연에의 모험은 아니더라도 철인3종경기같은 스포츠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은 그저 욕심일 뿐인걸까...? 당장 하프 마라톤도 못하는 내가 우에무라 나오미의 모험심을 부러워만 하기에는 아직 젊어 욕심인 줄 알면서도 꿈꿔 본다. 그가 실종이 아닌 자연사로 우리곁에 남았으면 더 많은 체험을 들려줄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다운 임종이라 다른 형태의 숨을 거두는 장면은 영 어색하긴 하다. 하지만 멋있고 그답고를 떠나서 가족들은 그의 모험내내, 실종기간 내내 얼마나 불안하고 가슴 떨었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라 마냥 동경하기엔 역시 험난한 여정임을 실감케하니 등반이나 횡단같은 대장정은 아니더라도 강도높은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늘 가족들의 염려를 염두에 두고 준비를 잘 해서 부상이나 실종, 사고 등을 최소화하는데도 신경썼으면 한다. 워낙 혹한의 추위에서 개들과 친목을 다질 새도 없이 모험으로 다져진 우정으로 긴 여정을 보낸 저자이기에 이렇다할 감상적 표현은 없지만 특유의 투박하리만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있어 기록만으로도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역시 편집에 있어서 극적인 상황에 대한 강조나 간간한 문학적 에피소드도 있었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또 그 담백함의 매력도 있으니 이정도로 만족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