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찬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옷을 주워 입고 운동 겸 슈바빙으로 달려갔다. 날은 차가웠지만 겨울 햇살이 맑았고 청아했다. 하늘이 높아 보였고 유난히 아오이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차갑고 맑은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슈바빙에는 조 카커가 부르는 영화 탑건의 주제곡이 흐르고 있었다. 늘 일찍 와 있던 종규는 보이지 않고 어쩐 일인지 아침잠이 많은 득재가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효상이는 고물상 일을 도와준다고 슈바빙에 올진 모르겠다고 했다.

슈바빙 주인 누나는 구운 쿠키와 코코아에 뜨거운 우유와 위스키를 조금 넣어서 주었다. 이렇게 맛있고 몸이 풀리는 메뉴를 다른 곳에서는 왜 팔지 않는지 모르겠고, 이렇게 맛있고 좋은 음료를 팔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한국인에게 맞지 않는 음료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좋아하고 잘 마셨기 때문이다. 이상하지만 주인 누나가 만들어주는 음료를 마시고 24시간 정도가 지나면 어김없이 그 음료가 생각났다.

득재는 내가 와도 책을 읽는데 몰두했다. 기철이와 똑같이 책을 좋아했지만 기철이와는 다른 기질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득재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도 효상이는 못 온대. 우리 언제 한 번 고물상에 가서 일을 도와줄까?”라고 내가 말하니, 득재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마크를 만들었다.

테이블에서 보니 득재가 읽고 있는 책은 이성복 시인의 시집이었다.

“시인들은 정말 홍어처럼 온몸을 내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득재가 말했다. 나는 가만히 득재의 얼굴을 보았다. 녀석은 2월의 우리 집 앞마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코코아를 한 잔 마셨다.

우유와 섞인 코코아는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고 끝 맛에는 위스키가 감돌았다. 묘한 맛이었다. 맥주와는 달랐다. 나는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맥주를 마시고 카 나오는 찡그림과는 달랐다. 아마도 득재는 홍어의 암모니아 냄새를 내가 떠올렸다고 생각했을 모양이었다.

“홍어가 발효되면서 유독 암모니아 향이 지독한 것은 홍어는 소변을 성기로만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홍어 자신의 몸 전체로 배출하기 때문이래.”

득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만큼의 엄청난 일은 나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득재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개구리가 적어 준 거야. 라디오에서 듣고 녹음해서 돌려가며 적어 넣은 건데 나에게 주더라.” 종이에는 이성복 시인이 시와 대담에서 그가 했던 말이 적혀있었다.

[어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나는 모든 것을 시로 연결해 버리는 버릇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다는 겁니다. 거북이가 말입니다. 아가릴 쫙 벌리는데 제 혀를 마치 벌레처럼 보이도록 만들더군요. 그러니까 물고기가 그게 벌레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다가 도리어 거북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아요.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개미를 잡아먹고 사는 새가 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른 힘센 새가 자기 알을 훔쳐 먹으려고 나타나면 뱀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새는 이게 진짜 뱀인 줄 알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진실에 의해 보호받는 것도 또 진실을 가지고 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저런 식이 아닌가. 진실이라는 것은 본래 가짜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as if의 형식, 즉 마치~처럼 직유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했었죠. 거북이가 제 혀를 벌레처럼 보이게 만들고 또 새가 뱀의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처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합니다.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삶 자체가 허구라면 허구 속의 허구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 속에 허구를 만들어서 삶이라는 허구를 뒤집거나 무아 시키는 것 그런 것이 시겠지요]

나는 다 읽고 가만히 득재를 보았다. 무슨 말인지 몰랐고, 개구리가 어째서 득재에게 이 종이를 주었는지도 몰랐지만, 득재는 자신의 좋아하는 개구리에게 그 종이를 건네받는 순간 가치전환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앞으로도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깨지기 쉽고 아프기 쉬운지 나는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열일곱 소녀처럼 위태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제니스 이안이 부르는 ‘엣 세븐틴’에서 처럼 모든 십칠 세는 힘든 법이니까. 그 또래는 그런 것이니까.

“소설가는 어떤 의미로 쓰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하면 어떻게든 소설을 쓰게 되지만 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재능이라든가 의지만으로 시는 써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자신의 몸속에, 온몸 구석구석, 몸의 끝까지 퍼져있는 세포와 말초신경 전부가 시를 향해서 돌진하려는 태동이 가득한 사람이 그것을 형태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학습의 도움으로 시를 적을 수 있는 것 같아. 나 같은 놈이 시를 쓰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진실이란 무엇일까.”

하나의 고민을 어렵게 끝내고 나면 두 개의 고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것이 열일곱 살의 삶이고 인생이었다. 득재는 기철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적고 싶은 시에 대해서 다가가지 못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슈바빙에는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이 흘러 불안한 열일곱, 그 또래의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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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찬데 햇살은 따습다. 눈으로 보이는 일상은 고요하기만 하다. 작년 오늘처럼 꽃샘추위가 얼굴을 할퀴었지만 조용한 하루다.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평온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용돌이 같은 일상일지도 모른다. 계엄이 터지고 포고령에서 처단하라는 단어까지 등장하고, 대통령이 구속되었다가, 극우들이 폭도로 변해 서부지법에서 엄청난 폭동을 일으켜 체포가 되었고, 종교의 탈을 쓴 극우들의 집회에서는 누군갈 향한 욕과 공격이 난무하고 있다.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태가 터졌고 일이 벌어졌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나라는 약탈을 하고 강도로 돌변하고 길거리를 온전하게 지나다닐 수 없다. 도민성이라는 거, 국민성이라는 거, 한국인들의 이런 성향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어린이들은 늘 같은 시간에 유치원에 등원했고, 인기 좋은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고, 폐지 줍는 노인을 도와주는 청년도 있다. 은행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차들은 신호를 지키며, 사람들 역시 신호등에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다. 이게 당연한데 이 당연한 게 너무 당연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의 국민성이라는 건 아마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질서를 지키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가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모든 국민이 대단한데 도대체 몇몇 권력자들이 나라를 지옥으로 망가트리고 있어서 웃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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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먹으면 아주 맛있다. 오일리와 프래쉬가 입안으로 들어와 축제를 펼친다. 어울리는 술은 제임슨. 내가 위스키 맛을 아는 건 아니고 제임슨의 끝 맛, 캐러멜 맛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김건희가 대선주자로 나오면 정말 대 환영, 따봉일 것 같다. 김건희가 대선주자로 나온다면 김문수 대신일 테고(벌써 재미있어), 그렇다면 경선에서 한동후니와 붙게 되는데(생각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어), 평생 함께 할 것처럼 굴던 사이가 틀어지고 난 후 “제가 무슨 말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그건 김건희 후보님의 억측입니다” 이러면서 김건희는 턱 안에서 맴맴 도는 말투로 경선 치르고 나면 아마 몇 년은 늙어버려 얼굴을 펴는 시술을 받아서 지금보다 더 탱탱해질지도 모른다. 김건희가 아이유를 닮고 싶어서 계속 그런 쪽으로 변형을 주는 모양인데 극우들은 아이유 싫어하던데. 그러거나 말거나 폭싹 속았수다는 너무 재미있어서 CIA에도 재미있다고 소문이 났던데. 아무튼 내란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우리는 토마토에 마요네즈 듬뿍 뿌려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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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서만 살아가는 거 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죽으면 희망이라는 건 애초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러니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 부부가 하던 카페와 아는 동생이 하던 꽃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긴 시간 버텼는데 몇 개월이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어요. 만약 민생을 생각하고 돌보는 마음이 가진 대통령이었다면, 그랬다면 자영업자들이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얼마나 버틸지 깜깜하네요.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생각나는 가수는 신해철입니다. 마왕의 노래는 희망이 바로 너라고 하는 것 같거든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고 일어설 힘이 없고 세상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저는 항상 거울을 보거든요. 여러분도 거울을 보면 여러분 스스로를 믿는 단 한 사람, 마지막 한 사람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들 자기 자신, 끝까지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https://youtu.be/kpbfJoV6Gbw?si=u1usexGs2FYeIx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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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봄의 기간이 가장 짧은 봄을 가진 홋카이도의 사람들은 그 짧은 봄을, 기간이 무척 짧아서 좋다고 합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이겨냈기에 비록 다른 지역보다 봄이 짧아도 느끼는 봄의 기쁨은 크다고 합니다. 조깅하고 돌아오는 길에 골목을 지나왔습니다. 한 집의 담벼락 너머로 방향제 향이 났습니다. 봄의 냄새입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봄이 세상에 도래하면 모든 풍경이 바뀌고 컬러가 변합니다. 그렇지만 바다는 봄이 되어도 육지만큼의 변화가 없습니다. 봄이 되어 해가 따뜻해도 바다는 겨울만큼 차가웁습니다. 바다는 봄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는 듯 봄의 햇살을 튕겨냅니다. 봄의 바다는 아주 차갑거나 몹시 차갑습니다. 정말 겨울에서 벗어나기 싫은 듯 아직 바람도 거세며 찹니다. 갈매기들은 여봐란듯이 계절의 변화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바다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다에 나와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 사람이 하지 않으면 대번에 표가 납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도 변화를 바랐지만 쉽게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물감이 번지듯 천천히 오듯이 변화는 천천히 우리에게 옵니다. 바닷가는 사계절을 사는데 바다는 사계절을 살지 않습니다. 바다는 여름과 겨울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다에 봄과 가을은 없습니다. 바다는 몹시 차갑거나 덜 차갑습니다. 어제도 헌제 앞에서 밤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일상을 뒤로 미루고 모두 하나가 되어 파면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계절을 살지 않는 바다가 마음에 들듯 어제 헌제 앞에서 밤을 잃은 그대들 역시 마음에 듭니다. 바다는 항상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 덜 불행하다는 바다는 늘 비슷한 모습으로 사계절을 살아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불행하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싶습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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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3월에 내리는 비는 봄비라고 불립니다. 3월의 비가 겨울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봄에 내리는 비는 겨울에 내리는 비보다 잔인한 거 같습니다. 이른 봄에 내리는 비는 추위를 몰고 오니까요. 까탈스러운 추위입니다.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추위입니다. 이런 비가 내리는 봄날에 우산 이외에 들어야 하는 짐이 많으면 그건 참 낭패입니다. 어딘가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도 아주 귀찮습니다. 느닷없는 말이지만 비가 온다고 우산을 들고 감독을 봤던 클린스만이 떠오릅니다. 클린스만의 웃는 모습은 아주 미웠습니다. 웃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을 수 있을까. 인간의 웃는 모습이 이 정도로 혐오스러울 수 있을까. 웃는 얼굴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 있다니. 무라카미 류도 무의식 중에 들리는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웃는 모습이 혐오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석방되어서 나온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향해 웃을 때 모습입니다. 그건 충격이었고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여러 매체에서 그 모습을 보여줬는데 저는 그럴 때마다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단지 웃음 짓는 모습만으로 혐오를 넘어 분노와 충격을 느끼게 할 수 있다니.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비를 맞으면 비는 아주 차갑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초봄의 차가운 비는 땅에 닿아 시가 됩니다. 시는 온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시는 슬퍼서 몸이 차가워지는 거죠. 초봄의 비는 슬픔을 안고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또 힘든 주말을 불면으로 보내겠습니다.

 

너는 록을 듣지 않아 https://youtu.be/Bq0JS2uiduE?si=ZeFcLX1b9V-HYZ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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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향기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은 골목이라고 생각되는 거 같다. 봄날의 골목은 그야말로 생명이 느껴지는 거야. 벌레들도 많아지고 길고양이들도 따뜻한 곳으로 나와서 볕을 쬐고. 겨울 동안 듣지 못했던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소리가 봄의 골목을 시끄럽게도 하지만 잘 들으면 운율이 있어 새 따위에게 놀라곤 한다.

여기 보이는 골목은 지금은 전부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서 없다. 휴대폰이 있어서 이렇게 바로바로 골목의 봄날을 담을 수 있었다. 골목의 틈으로 봄이 되면 어김없이 민들레가 올라온다. 그건 아무리 봐도 너무나 신기한 일이다. 녹색의 그것이 겨울의 차갑고 딱딱하고 검은 바닥의 틈 사이로 올라와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곤 이내 골목의 풍경을 봄으로 바꾸어 놓는다. 민들레는 잡초지만, 잡초라서 튼튼하고 생명력이 고래 심줄 같아서 좋다. 민들레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순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이유가 확실하다. 우효도 민들레를 불렀잖아. 일상을 보내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낸 노란색을 그렇게 자주 볼 수 없다. 자연이 만들어낸 노란색은 불순물이 낀 노란색이 아니라 샛노란 색이다. 노란 꽃잎처럼 내 맘에 사뿐히 내려앉으라고 우효도 노래를 불렀다. 민들레는 잡초라서 민들레 같은 사랑은 질긴 것 같다.

나는 봄의 골목을 좋아해서 이 도시의 골목을 매년 담았는데 많은 골목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요즘은 생각한다. 분양도 안 되는데 고층 아파트는 끊임없이 짓는다. 집 없는 사람에게 그냥 나눠주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대단위 아파트를 짓는 것일까. 아무튼 사라진 골목의 사진은 나중에 신문사에 팔아먹어야지.

골목에 봄이 오면 방향제 냄새가 난다. 아지랑이 냄새라고 할까. 집집 마당에 심어 놓은 나무가 봄에 잎을 올리면서 허브처럼 향이 난다. 목련에서 나는 향 같은 거 말이지. 그러면 그 자리에 서서 미친놈처럼 냄새를 흠흠 맡는다. 이런 방향제 향은 골목에서만 나는 거 같다. 도로나 아파트 단지에서는 봄이 와도 나지 않는다. 물론 도심지 안에서도 안 난다. 그래서 봄이 되면 조깅하고 돌아올 때 골목으로 다니는데 봄의 방향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봄의 골목은 따스한 정감 같은 게 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저녁에 아버지들이 집에 오시면 된장찌개 끓이고 고등어 굽는 냄새가 골목에 퍼지고 말이야. 요즘은 아파트에서 고등어 잘 못 굽다가는 옆집에서 항의 들어 온다메.

골목의 곳곳에 봄을 알리는 민들레와 초록초록한 잡초가 벽면에 그려 놓은 벽화와 어울렸다. 이 골목들이 전부 아파트로 바뀌어서 아쉽다. 이렇게 골목을 지나가면서 사진을 담다가 방향제 향이 나면 그 자리에 서서 향을 맡는 거지. 그러면 기시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국민학교 때 봄 소풍 갔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요즘처럼 미세먼지 같은 건 없어서 봄 소풍 가면 재미있었다. 뿌옇고 먼지 낀 시야가 아니라 맑고 청명하니까 놀기 좋았다. 김밥이 터져 있고 조금 상한 듯한 맛이 나고 사이다는 시원하지 않아서 밍밍한데 그래도 맛있었다.

방송 같은 곳에서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고 하는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골목을 볼 수 없다. 어제는 조깅하면서 보니 초딩 아이들은 지금도 놀이터에서 시끄럽고 혼돈스럽게 놀더라고. 그 어려운 나는 반딧불을 부르면서 말이야. 또 조금 달리다 보니 가방을 전부 인생 네 컷 입구에 던져 놓고 그 속에서 깔깔거리면서 시끄럽게 놀더라고. 장소가 바뀌었지,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이런 봄날의 골목의 계단에 건방진 자세로 앉아서 하루키의 초현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좋다. 그러다가 골목에서 독서 모임을 하면서 그늘에 앉아서 책 읽고 서로 이야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봄에 내리는 비는 땅에 떨어져 시가 되는 것 같다. 시는 골목에 내려와 풍경을 바꿔 놓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골목에 떨어진 봄비에서 시를 느끼지 못한다. 시는 가까이 있는데 못 보는 거지. 아름다움은 주위에 널려 있는데 멀리 있는 아름다움을 보려 하니까 힘든 거지. 그러다 보면 골목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요즘 내란 불면에 헌제 선고 기다리느라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라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봄의 골목 이야기를 한번 해봤다. 이 상태로 주말을 보내야 한다니. 이 상태로 또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한다니. 이렇게 기분이 별론데 입맛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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