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이 되었다. 그리고 벌써 일주일이나 지나가 버렸다. 칠월은 일 년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쨍쨍한 태양이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는 여름이기 때문이다.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칠월이 일 년 열두 달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사람이 나다.


정말 거짓말처럼 칠월이 딱 되었을 때 매미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매미소리를 듣는 걸 좋아한다. 쐐에에에 에 하며 아주 시끄럽게 매미들이 우는 소리가 좋다. 매미소리는 시끄럽지만 소리다. 오토바이, 자동차 같은 소음이 아니다. 그래서 매미소리는 참 좋다. 누군가는 매미가 도시에서 다른 소음 때문에 그렇게 시끄럽게 운다고 하는데, 촌으로 가도 매미는 쐐에에에 에 시끄럽게 울더라.


도심지라고 해도 강변에는 차가 없으니까 저녁에 조깅을 하다가 숲이 있는 곳으로 가면 매미소리가 들린다. 듣기 좋다. 여름이고. 조깅을 하면 땀이 흠뻑 나오고. 너무나 좋다.


아직은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 뉴스에서는 또 역대급이라는 말을 써 가며 폭염이 벌써 왔다고 한다. 물론 덥기는 덥지만 에어컨을 틀어 놓고 잠들어야 할 만큼은 아닌 것 같다. 에어컨 바람은 오래 맞고 있으면 좀 별로다. 매년 하는 말이지만 여름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은 조깅을 하면서 땀을 듬뿍 흘리고 나면 자연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에어컨 바람을 맞다가 자연바람을 맞으면 덥덥한 바람으로 느끼겠지만 땀을 잔뜩 흘리면 몸의 온도가 올라가서 자연바람도 시원하다.


샤워를 하고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고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여름밤이 시원하다. 설령 폭염이 닥친 날이라고 해도 에어컨 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닷가에서 책을 읽으며 고등어 굽듯이 뒹구르르 태양에 몸도 잘 구우면 보기도 좋고, 더위도 덜 탄다. 자동차에 에어컨도 아직 틀지 않고 있다. 창문을 열고 다녀도 될 만큼 자연바람이 아직 시원하다.


시원하다고 느끼려면 에어컨 바람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조깅이나 스쾃을 매일 해주는 것이 좋다. 물론 나도 코로나 이전보다 달리는 거리가 줄었다. 며칠 전에는 마음먹고 그때만큼의 거리를 달렸는데 무리였다. 몇 번을 쉬어야 했는지 모른다.

칠월 일 일이 되자마자 매미들이 합창을 한다. 아직은 때 이른 소리처럼 들리지만 매미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있어 아 여름이구나. 하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덥지만 무덥지 않고, 시끄럽지만 소음처럼 들리지 않아서 매미소리는 좋다.

조깅을 하러 나왔더니 고영희 씨가 자세를 잡고 있다. 아마 잠자리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가을에나 나타나는 고추잠자리가 이 시기에 가득 나타난다. 강변을 조깅하면 눈에 띄는 현상들이 있는데 오뉴월에는 벌레들이 엄청나다. 날벌레 떼들이 곳곳에 있어서 팔을 휘저으며 달려야 한다. 그 시기가 지나면 이상하지만 고추잠자리가 가득 나타난다. 코로나 때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서 메뚜기가 엄청 나타났다. 그때 기록을 보니까 초딩들이 방아깨비를 잡아서 다리를 잡아떼는 재미에 빠져 있는 모습을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해 놨다. 코로나 때 전국에서 내가 있는 이 도시에 메두기 떼가 가장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에 때로 메뚜기가 나타났다고 해도 미국처럼 곡식을 아작 내는 일은 없다고 한다.


고영희 씨 더운데 조깅하지 말고 저기 그늘에서 쉬고 있어.

이곳은 아파트 단지 안이다. 한 40년 된 아파트 단지인데 아파트는 한 동이며 엘베가 없는 아파트고 단지 안에 이런 건물도 있다. 이곳을 지나치면 한 5초 동안 서서 여기서 단편 공포영화를 찍으면 참 좋겠는데, 같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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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의 붉은 꽁지가 아이의 얼굴을 스치고 해변을 물들였다. 자동차 보닛이 가스레인지처럼 달아올랐고 밤의 달빛이 놀다 들어온 강아지처럼 방구석에 처박힐 때면 그 사람은 레오파드 원피스를 몸에 부착시키고 화장을 했다. 눈썹을 올리고 눈 화장을 하고 립글로스를 발랐다. 그 사람은 늘 어두워지면 외출을 했다.


바다는 거대한 그늘로 더욱 침잠된 비극을 피어오르게 하고 낮 동안 뜨거웠던 열기가 남아 있는 해변의 구석구석에서 비극의 맛을 보려 갯지렁이가 꾸물대는 모습이 몽환적으로 비쳤다.


초초하게 쭈그리고 앉아 다리를 말고 날짜변경선 너머 달의 뒤편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마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잠기곤 했다. 이런 감정을 달래듯 풋사과를 씹었다. 시고 단 맛이 위로처럼 따뜻하고 축축이 목 안으로 차오르고 까닭 모를 눈물이 고여왔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눈물은 눈으로 나오지 않고 등으로 흘러 기분 나쁘게 셔츠를 적셨다. 수명이 다 된 매미가 더운 어둠 속에서도 엄마엄마 비극적이게 울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가만히 집중하노라면 내 육체는 아주 얇고 투명한 빛의 막이 되어 집개미가 식탁 위를 오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저 밖 해안가 가로등의 하얀빛이 고통처럼 얼굴을 뚫고 방구석에 뿌리를 내릴 것만 같아서 눈을 감았다. 해가 숨어 버렸지만 가시지 않는 더위에 눈을 감고 보이는 그 세상에 적응하려 했다. 그럴수록 침착하고 음험하게 끓어오르는 숨 막히는 열기에 냄새나는 입을 벌렸다.


그때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누군가 쳐다보고 있었다. 열기에도 보송한 얼굴을 한 채 예쁜 이마를 드러내고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름다운 입술을 한 그 사람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안다. 어룽어룽한 전체적인 얼굴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 사람은 작은 입을 벌려 무엇이라 말을 했다. 나는 몸을 공벌레처럼 말고 조용히 그 사람의 모습을 눈을 감고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땀 내 나는 바람에 흔들리고 갯것들이 귀신같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고 성가시게 갈라진 머리칼이 뾰족하게 주뼛 솟았다가 힘이 풀어지며 바닷속 해초처럼 흐물렁거렸다. 그 사람은 손을 내밀었는데 나는 더욱 내 몸을 마는데 손에 힘을 주었다. 매미 소리가 또 들렸을 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깨진 거울 파편처럼 차디차게 반짝이며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그 사람은 침잠된 비극을 잘 접어서 알 수 없는 소리로 말을 했다. 그 속에는 어쩌면 탄식이나 후회보다 비참함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돌멩이처럼 더 몸을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눈을 뜨려고 하니 마른 눈물에 눈이 붙어버렸고 무덥고 어두운 비극 속으로 어디선가 차가운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빛줄기를 타고 끓어오르는 은유를 보았고 은유 속에 울면서 타오르는 그 사람이 있었다.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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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상 경영난 속 휴간이라는 기사를 봤다. 휴간하면서 신인문학상 공모전도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구름처럼 흘러가는 흐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실제로 닥쳤구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기사에는 댓글이 한 줄도 달리지 않는다. 뭐랄까 그만큼 사람들에게서 많이 동떨어진 다른 곳의 이야기인 것이다. 일 년에 공모전은 수없이 열린다. 그리고 당선자들은 쏟아진다. 매 년 공모전이 여기저기에서 열리니 달려들었던 사람들에서 어떻든 매 년 당선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 년 배출하는 문학 공모전의 당선자와 당선작을 대체로 잘 모른다. 쏟아졌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온전히 문학에 전념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는 드물다. 내가 아는 중소규모의 출판사도 매년 에세이와 시집을 발표한다. 공모전이라기보다 출판사 측에서 이 정도면 괜찮아, 해서 책을 출판하고 그 비용은 대체로 텀블벅으로 한다. 그래서 시집 같은 경우는 읽어보면 시?라고 생각되는 시집이 많이 있다. 박준이나 유희경 같지는 않다. 이전의 우리가 알만한 등단 시인의 시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출간을 한 사람들의 특징은 거의 모두가 강연을 한다. 그래서 그 강연이 들을만한 강연이가 한다면 또 글쎄다 같은 의문이 든다.

이것 또한 살아남기 위한 흐름이라면 흐름이다. 일단 책을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그 책을 읽어줄 독자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글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책까지, 그것도 시집이나 에세이집을 출간하는 것이니까. 흐름이라는 건 설령 좀 잘못 흘러간다고 해서 딱 버티고 막아서 다른 흐름으로 돌리는 것이 아주 어렵다. 흐름이 바뀌는 흐름이 보이는 건 꽤 시간이 걸린다.

종이책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더 많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넘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전자책으로 전부 넘어가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이런 흐름은 시간이 걸린다. 종이책은 한 권 구입해서 여러 사람이 돌려 볼 수 있으니까 자신의 폰으로만 볼 수 있는 전자책이 수입적인 부분에서는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사람들은 종이책을 선호한다.

그러나 조금씩 눈에 띄지 않지만 종이책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문예지가 사라지듯이 말이다. 문예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든 것은 나의 단편 소설을 2년이나 연재해 준 계간 풍자문학이 사라졌을 때다. 수면 밑에서 깔짝깔짝 거리고 있던 나를 그래도 수면에 닿게 해 준 계간지가 코로나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런 계간지는 읽는 재미가 있다. 단편소설뿐 아니라 수필, 기행문, 시까지 여러 문학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하루키 역시 에세이는 문예지를 통해서 발표를 한다. 그런 점은 우리나라와 좀 다르다. 계간지 같은 문예지는 그 당시의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에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정치와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영화가 기록하고 다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흐름이다. 야후를 대동한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전문가들은 큰일이 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흐름이다. 스마트 폰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역시 큰일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주 5일 때에도 그랬다. 그냥 흐름이다. 그 흐름에 올라탄 나는 몸을 맡기면 된다. 단지 그 흐름 속에서 흐름을 잘 타는 사람이 있고, 못 사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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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김밥과 부탄가스! 근데 폐간됐군요.
문학사상은 좀 아쉽네요. 살아있는 동안 살려고 몸부림쳐야 살아지는 게
우리의 인생 아니겠습니까? 또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지겠지요.

교관 2024-07-07 11:22   좋아요 0 | URL
2016년도 여름호부터 2017년 가을호까지 저의 단편 소설이 실렸답니다 ㅋㅋ 그래서 좋은 추억이 담긴 계간지입죠
 


이 영화는 어쩐지 카프카를 닮았다. 특히 변신. 이 영화를 융의 집단무의식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에게 폴은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잠자처럼 느껴졌다.

카프카는 모든 소설에서 하는 말이 ‘출구는 없다’였다. 변신에서도 출구는 없다가 큰 골자다. 집단무의식에 의해서든, 변신에서든 잠자도 그렇고, 폴도 그렇게 폭력에 시달린다.

영화 속 폴은 호모 사케르가 되어 간다. 인간이긴 하나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에 의해 ‘기능’을 잃어버리는 운거지퍼가 된다.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 인간이 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에서 추종으로, 다시 비판에서 비난을 듣는다.

어째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폴이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까. 이 폴의 경우를 지금 현재 박정훈 대령에게 대입하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박정훈 대령은 아무런 잘못은 고사하고 진실된 일을 했을 뿐인데 기능을 잃어버린 인간, 호모 사케르 취급을 받는다.

출구가 없는 것이다. 박정훈 대령은 아침에 출근하면 아무도 없는 막사에서 혼자서 하루 종일 가만히 있다가 밥 먹고 저녁에 퇴근을 할 뿐이다.

이 영화의 예고 문구가 현실 같은 악몽, 악몽 같은 현실이다. 이 영화는 똥 같은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똥과 대변은 같은 말이니까.

얼룩말의 폴은 눈에 띄게 되어서 그러지 않아야 하지만 sns의 타깃이 된다. 폴은 사람들의 맹목적인 경멸과 비난을 받아서 딱하게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건 욕망과 욕심이 잔뜩 붙어 있는 폴의 모습을 니콜라스 케이지 밉상스럽게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더 록에서 숀 코네리에게 뒤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 승승장구였던 그는 콘에어에서 엄청난 근육으로 액션까지 해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로 돈과 명예 그리고 예쁜 한국인 아내까지.

그러나 내리막길로 추락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사람들의 비판에서 비난을 듣는다. 날려버린 돈을 메꾸려 수많은 영화에 싸구려 비용으로 등장했었다. 가망 없어 보였던 니콜라스 케이지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판의 호모 사케르였다.

술과 가정불화, 이혼, 여성편력, 돈 지하 끝까지 떨어졌던 니콜라스 케이지였지만 피그를 기점으로 다시 조짐을 보이더니 드림 시나리오 같은 허를 찌르는 영화를 꿰찼다. 아직 중간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생각하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는 계속 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출구는 분명 없다. 하지만 그 출구가 되면 된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드림 시나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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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자기 계발서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근데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고, 읽을 계획도 없다.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구를 가끔 받는데 사람들에게 자기 계발서를 권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지 몰라서 권할 수가 없다.


자기 계발서를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에 어떤 댓글이 달렸는데 그건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소설책 읽는 시간도 촉박한데 자기 계발서까지 읽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중요한 건 소설만으로도 자기 계발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현명해지려면 자기 계발서는 필수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다면 나는 현명해지지 않겠다. 자기 계발서를 읽어야만 자기 자신을 계발할 정도로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소설이나 인문학으로도 자기 계발은 저 먼 우주까지 끌어올리지 않을까 싶다.


좀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편하고자 기계를 만들었는데 – 그 기계 속에는 휴대전화도 포함이 되는데 지금은 사람이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는 휴대전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한 인간이 되었다. 휴대전화가 없이는 음식도 배달하지 못해서 먹지 못하며, 어딘가로 가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로 휴일에 연락이 오는 회사 상사 때문에 휴대전화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면 정마 큰일이 나는 것이다. 예전에는 만취에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요즘은 만취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리게 되면 다음 날 맨탈의 붕괴를 막을 수가 없다. 그 엄청난 불안이 온몸을, 온 마음을 잡아먹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깜깜해진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인데, 기계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기계와 좀 더 동 떨어진 책이 소설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날아다니는 상상력,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을 하는 상상력, 이런 상상이 비행기를 만들고, 잠수함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인공지능이 발달해 가는 이 시대에 영화 시나리오도, 시도, 소설도 인공지능이 써버리게 될 것이다. 하물며 자기 계발서 역시 인공지능이 쓰고 그걸 인간이 자기 계발을 하는데 사용한다면 이 역시 기계에 인간이 지배당하는 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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