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모두가 극찬을 한 영화다. 극찬받을만한 영화이며 보는 내내 소름이 돋고 무서운 장면이 1도 없는데 내내 분노가 일고, 무서웠다.

이 영화의 영리한 점은 무서운 장면이 없음에도 역사적으로 지구인이라면 나치의 만행을 다 알기에, 특히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기에 영화를 보면 그 무서운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는 착각이 든다.

루롤프 회스는 실존인물로 회스 작전(얼마나 빠르고 많이 유대인을 잡아서 죽이는가)을 성공했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고 다시 아우슈비츠로 간다고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회스 작전에는 당신도 한몫했다며 아주 기뻐한다.

회스는 가정적인 새끼다. 가족을 생각하고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러나 성적으로 알 수 없는 삐뚤어짐이 있다. 아내 역시 너무나 친절하고 화사한 꽃 같지만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난 일이 터지거나, 회스가 아우슈비츠를 떠나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다는 이야기에 악마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집 안 일을 하는 유대인 도우미에게 남편에게 말하면 너는 바로 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정말 끔찍하다. 영화는 사람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사람을 태운 재가 화단에 뿌려지는 모습이 나온다.

회스의 막내아들은 창문을 열었다가 울부짖는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이 총살에 그대로 죽는 모습을 보고 혼자서 다시 방 안에서 놀며 중얼거린다.

회스의 아내 역시 집 안의 막일을 하는 인부에게 담배를 권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운다. 헤트비히의 엄마가 집으로 왔지만 그녀의 엄마는 유대인의 생각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밤새도록 저 담너머에서는 사람을 태워 죽이고 재를 뿌리는 생각에 잠들지 못한다.

회스에게 유대인이란 그저 없애야 하는 통계일 뿐이다. 이 영화는 깊게 빠져서 보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눈으로는 너무나 평온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지만 귀와 생각, 다른 감각으로는 불쾌함을 느끼는,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을 사용해야 해서 보는 이들의 감정에 파고들어 화음을 무너트린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어보면 동화가 그렇게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잖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회스가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는데 산채로 태우는 거야.라는 대목이 계속 남는다.

영화는 좋지만 깊게 빠져서 보면 좀 고통스럽다. 우리가 다 알기에 이 불협화음을 영화를 보는 내내 가져야 한다. 이런 영화가 진정한 공포물이다. 인간의 잔인성을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이렇게 보여주니까.

영화를 보면 현재의 아우슈비츠의 모습도 교차해서 보여준다. 사실 인간의 이런 잔인한 행동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헤트비히의 산드라 휠러는 추락의 해부에서도 굿이었는데, 추락의 해부도 리뷰해야 하는데 많이 밀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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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외가의 부뚜막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어. 부뚜막에서 오랫동안 가족들의 밥을 해준 솥에서 나는 냄새가 있어. 여름에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들어오면 약간 추워서 오들 거리거든. 그때 솥에서 쪄 낸 알감자를 후후 불어 먹었는데 몸도 따뜻해지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부뚜막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지. 여름방학이 되면 늘 외가에 갔었지. 초등학생 때는 그게 방학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했어.


여름 하면 외가의 부뚜막 냄새가 그리워져. 외가는 아직 있지만 그 옛날의 외가는 아니지. 부뚜막이 있던 집은 새로 지어서 그냥저냥 볼 수 있는 집으로 바뀌었어. 그래도 그 집이 도시에 있는 집들과는 달라서 창문을 열면 바로 개울이 보이고 여름에 개굴개굴하는 소리가 들려.


2층까지 있어서 민박도 받았고, 2층의 옥상 같은 베란다에서 고기도 구워 먹을 수 있었지. 그때는 이미 고등학생이 된 후라. 그래도 외가에 가면 동네에 아직 부뚜막이 있던 집들이 있어서 여름의 냄새가 있었어. 솥에서 물이 끓는 냄새, 감자나 고구마를 삶은 냄새가 외가의 동네에 머물러 있었지. 그래서 여름에 외가에 가서 동네를 거니는 것이 좋았어.


초등학생 어린이 때 놀러 와서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서 나오면 외할머니와 외숙모 외삼촌, 그리고 형들 누나들이 맛있는 것들을 만들어 와서 나에게 먹이곤 했지. 그 냄새가 있어. 후각은 감각 중에서 제일 늦게 후퇴하나 봐.


어쩌다가 그 비슷한 냄새를 맡으면 기시감이 확 드는 거야. 그러면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멍하게 되곤 해. 마치 그때의 그리운 시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어. 지금은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게 별로지만 그때는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서 시끌시끌한 게 기분이 좋았어. 위로받는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도 살아 계시고 외할머니, 외숙모도 다 살아계셔서 그 시끌벅적함이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이었다고 생각해.


알감자를 먹고 개울에서 또 놀다 보면 저녁이 되거든. 산 속이라 여름이라도 빨리 어두워져. 아무리 폭염이 와도 그늘에 있으면 시원한 곳이 외가가 있던 불영계곡 속이야. 저녁에 되면 부추를 잔뜩 넣고 전을 구워주거든. 부추가 많이 들어 있어서 어릴 때는 먹기 싫지만 외가에서는 그것마저 맛있었지. 냠냠 오물오물 거리며 먹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그 뜨거운 전을 손으로 떼서 입에 넣어주곤 하셨지.


이런 생각이 들면 보통 앨범을 펼쳐 보잖아? 앨범을 보면 사진이 그때의 시간을 고스란히 붙잡고 있으니까 왜곡된 기억도 바로 잡히곤 하잖아. 그러나 지금은 앨범을 열어 보지는 않아. 그 속에 너무 빠져 들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하거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감정 중에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갈비탕을 먹고 남은 찌꺼기처럼 항상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흔들면 위로 부유하곤 해. 그래서 언제나 그리움의 맛이 입으로 올라오곤 해서 그리운 사람, 그리운 장소, 그리운 냄새에 깊게 빠져드는 것 같아.


그래서 부침개를 먹었지. 뜨거운 부침개를 후후 불어 먹어도 그리운 맛은 안 나지만 맛있게 먹는 거야. 오늘 어쩌다가 여름의 부뚜막 냄새를 맡았어. 정말 외가의 부뚜막 솥 냄새가 확 나면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어. 인간은 어째서 이런 감정들이 드는 걸까. 이런 감정은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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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마음에 드는 영화다. 인간들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와 기후 변화 따위로 똑똑한 민물 상어가 된 릴리스가 파리의 세느 강으로 가서 인간들을 초토화 시켜 다 죽여 버리고 아포칼립스로 만들면서 영화는 깔끔하게 끝난다.

영화는 초반부터 쓰레기로 뒤덮인 바다로 들어가는 생물학자들을 보여준다. 그들이 작은 상어를 연구하며 추적기를 달았는데 그 상어가 릴리트라는 이름의 청상아리다.

그런데 릴리트가 어느새 7미터나 되는 거대한 상어가 되었다. 공격성이 없었던 릴리트에게 전부 물어뜯기고 몸이 분리되는 사고를 겪고 3년이 지난다.

파리는 한창 올림픽 전초전으로 철인 3종 경기에 매진이다. 그러나 세느 강은 똥물 수준에 강에서 오래된 포탄이 발견되고 엉망이다. 하지만 시장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깨끗한 파리의 세느 강 같은 이미지로 경기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에 상어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경기를 열면 안 된다는 주인공들을 쫓아낸 시장은 경기를 열지만 지옥이 펼쳐진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환경을 생각하며 상어를 바다로 돌려보내려는, 그린피스 같은 조직의 스무 살의 여자가 상어를 죽이려는 한강경찰 같은 세느 강 경찰들의 신호를 끊고, 사람들을 대동해서 릴리트가 있는 강으로 가서 자신의 방식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그 과정이 답답하고 갑갑하다. 말도 안 통하고, 유튜브로 인간들이 상어를 죽인다며 상어를 돌려보내야 한다며 릴리트를 유인하는데 상어가 두 마리가 온 것이다. 보면서 상어 새끼야 저 여자 좀 잡아 묵으라, 같은 생각을 할 때쯤 확 뛰어올라 여자를 반동 가리를.

이전의 상어 영화들과 다르게 한 마리가 사람을 물어서 피를 내면 여러 마리가 달려들어 머리, 팔, 다리를 물어서 뜯어 가는 장면이 굿이다.

거기에 온갖 자신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여자 시장도 으이구 저 독불장군 같은 여자 시장도 좀 잡아 묵으라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화악 전부 다 ㅋㅋ. 시원시원하게 다 죽어 나간다.

릴리트는 인간들 때문에 민물에 적응하는 상어가 되면서 자웅동체까지 되어서 뱃속에 수십 마리의 새끼 상어를 배고 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지상에서 군대가 동원되어 총을 난사할 때 이리저리 휙휙 유영을 하며 강바닥에 깔린 포탄을 터트리게 해서 세느 강이 완전 범람하고 흘러넘쳐 지옥이 된다.

릴리트가 어느새 수십 마리의 릴리트가 되어서 철인 3종 경기를 하던 인간들도, 강변에서 구경하던 인간들도 전부 물에 빠지고 죽고 몸이 반동 가리 나고 야호다. 나 변탠가.

달려온 릴리트들 한자리에 모여 앉아, 즐거워 이빨 치며 함께 보는 지옥 강물, 신난다, 재미난다, 릴리스 명작 이야기.

프랑스에서 이 영화를 아주 싫어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올림픽 반대 시위하느라 세느 강에 막 응가를 싸고 난리도 아닌데. 강물 수질도 너무나 엉망이라 수영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릴리트 덕분에 시원한 지옥도를 보게 해준 불란서 영화 ‘센강 아래’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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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들의 내한 공연이 이뤄지면 여지없이 한국떼창이 화재에 오르는 유튜브 영상이 많다. 그러면 수순처럼 일본에서 팝스타가 실망했다는 영상까지 같이 따라온다.


한국은 흥의 민족이라 떼창으로 감동을 오히려 받고 가는 팝스타들의 영상을 만들어서 올린다. 일본으로 간 팝스타는 가만히 앉아만 있는 일본 관중에게 실망을 하고 어쩌고 같은 영상이 올라와서 보는 이들이 일본 놈들 쯧쯧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이제는 이런 호들갑 좀 그만 떨자. 국뽕은 나쁘지는 않지만 지나치면 호들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들이라고 해서 왜 떼창을 하지 않을까. 이번 엄청난 인파의 일본 버니즈와 만나는 뉴진스의 팜하나의 푸른 팜호초 영상을 봐라.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것도 지금 세대, 그리고 마츠다 세이코를 좋아하던 세대가 전부 한데 모아 팜하니의 푸른 팜호초를 따라 부르잖아.


일본의 밴드 글레이의 한 공연에서는 20만 명이 한 번에 모였다. 20만 명이라고. 2만 명도 벌벌 떨만한 인파인데 열 배인 20만 명이 모여 글레이의 노래를 같이 불렀다. 이 공연의 스텝만 7000명으로 공연이 끝나고 관중이 빠져나가는데만 하루가 넘게 걸렸다.


국뽕에 차오르는 건 좋으나 지나치면 나 이외의 것은 나쁜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적당해해야지. 피규어 세계에서도 그렇다. 한정판으로 한국의 작가들이 모여서 만드는 유명한 한국의 한 피규어 회사가 있는데 이미 나온 피규어들은 이게 피규어인지 실물을 그대로 줄여 놓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퀄리티로 인기가 많은 회사가 있다.


이 회사에서 나온 피규어가 원더우먼, 조커, 할리퀸, 메라 등 실물과 너무나 흡사하게 피규어를 만들어서 세계도 놀라고 피규어 전문가들도 놀라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피규어가 나오면 너도나도 영상을 만든다. 그 대부분이 한국이 해냈다, 드디어 한국이 미쳤다. 같은 문구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을 만들어서 내놓을 때마다 국뽕에 차오른 말과 문구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한국이 해냈다 보다는 피규어 만들어 내는 그 회사가 해낸 것이고, 피규어 작가들이 해낸 것이니까 그들을 주어로 집어넣어서 말하는 게 낫다고 본다. 피규어를 나도 좋아해서 가끔 피규어 유튜브를 보는데 그들도 나름대로, 뭐랄까 경쟁은 아닌데 경쟁을 하고 있다.


이번에 아주 비싼 아톰이 새롭게 나왔는데 너도 나도 구해서 올리고 있다. 먼저 구입해서 영상을 만들어 빨리 올려야지 조회수가 다른 유튜버보다 많이 나오는지 몰라도 여러 피규어 유튜버가 하는 얘기가 비슷한 얘기뿐이다. 피규어 세계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개성이 강한 유튜버가 있는데 이들은 유행에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살린 피규어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조금씩이자만 꾸준하게 구독자도 늘고 광고도 자주 들어오는 것 같고 괜찮아 보인다.


피규어 세계는 그렇다 치고 테크튜브들은 더 하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애플 신제품 발표나 새로운 휴대전화가 나오면 너도나도, 전부 우르르 같은 기종을 비슷한 말로 올릴 뿐이다. 뭐 이벤트를 하는 유튜버가 있고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을 한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다 보니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다. 뭐든 적당히 하면 되는데 그만 그 선을 넘어가 버리면 호들갑이 된다. 떼창은 한국이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피규어는 10년 전에 비해 지금이 그 시장이 더욱더 커지고 확고해진 것 같다. 물가가 치솟은 요즘, 먹고살기가 힘든데 어째서 피규어 시장은 규모가 점점 확장되는 것일까. 알고 있는 속눈썹 샵 사장님과 이야기를 해 보니 일주일 내내 예약이 꽉 차 있다고 하더라. 즉, 외식가격이 올라, 한 끼 정도 안 먹을 순 있어도 속눈썹 연장하는 건 해야 한다는 거다. 그걸 해야 하는 나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 않았을 때 드는 불안이나 예약을 해 놓고 가서 시술을 받을 때 어떤 알 수 없는 기분이 물가가 올라 한 끼 정도 굶으면 돼, 하고 생각해 버린다.


피규어도 그렇다.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뭘 어쩌지도 못하는 피규어를 손에 넣게 되었을 때는 그 안도감과 여러 감정이 평온해진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공유가 가능하다. 그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이기도 하다.


소리를 지르러 가는 공연도 그렇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에 가는 것이 비록 돈이 많이 들지는 모르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나오면 그 숨 가쁜 기억으로 일주일, 한 달을 보내는 동력이 된다. 그 동력이 떨어질 때, 비록 나의 상태가 비루하고 남루하더라도 모은 돈으로 좋아하는 팝스타나 가수의 공연에서 또 충전을 한다.


뭐 어떻든 어떤 분야든 국뽕에 차올라 마음이 막 그럴 때가 있다. 한두 번은 괜찮지만 호들갑 떨며 깊어지면 나 아닌 것은 나쁜 것으로 보는 현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남을 깎아내리면서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


이번 글래스톤베리 2024년도 유튜브에 영상이 떴다. 신디로퍼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콜드플레이까지. 너무 좋더라. 후덕해졌지만 에이브릴 라빈도 노래를 불렀다. 아엠 위드 유를 부르는데 사람들은 그저 즐긴다. 글래스톤베리는 그래서 좋다. 저 수많은 깃발 중에 앞에서 펄럭이는 ‘퇴사’ 깃발을 보라. 이 한 번의 글래스톤베리를 위해 회사까지 떼려 치우고 간 걸 보면 와우 하게 된다.


Avril Lavigne - I'm With You (Glastonbury 2024) https://youtu.be/eE-mcJAdCLw?si=3YKBU9eQzP-klV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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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 바른 것,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평범한 것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모호하게 된다.


이 세계에서 소외된 자들이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비틀어진 감정은 꽁꽁 숨겨둔 채 나는 그러지 않아 하는 얼굴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고 있다.


그래서 정작 돌처럼 겉과 속이 같은 사람들은 소외당하고 이상한 취급을 받는다.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벌레 취급을 한다.


비상식과 비정상을 규정짓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정상일까. 그저 겉으로 멀쩡하면 정상일까. 장애가 있으면 단지 불편할 뿐이지만 아픈 사람으로 본다. 정신이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뉴스로 매일 접한다. 그런 사람들이 비정상이지만 정상인이라 칭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규제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기류는 말한다 “나는 늘 지구에 유학 온 기분이었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사람한테는 이 세상은 정말 재미있는 곳일 거야. 내가 상처받는 하나하나가 다 즐거움이고 나도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누리고 싶었어. 평생 딱 한 번이라도.”


사사키는 말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잖아. 그건, 다들 내일 죽고 싶지 않거나 죽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닐까? 내일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 죽음을 개의치 않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 그런 흐름에 섞이는 게 사회의 일원이라는 거겠지.”


멜론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멜론의 맛을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멜론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멜론의 맛을 모르기에 멜론의 맛을 듣기만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세계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평범함을 규정짓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난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아,라고 말하지만 그 평범함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면 나의 모친이 생각난다. 나의 모친은 조카가 그저 평범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그 평범이라는 범주에 개성이라는 건 말살되어 있다. 조카는 이미 미술에 미쳐있다. 학교에서 전교생 통틀어 그림으로 1등이고, 미술 학원에서도 1등이라 다른 걸 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물론 나중에 프로로 뛰게 되면 좌절도 하고 울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엄청난 실력과 노력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 조카의 모습이 모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들처럼 똑같이 수업받고 성적 좋아서 자랑도 하고 싶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야 된다는 주의다.


거기에는 조카의 무뚝뚝한 성격도 모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옆집 아이들처럼 싹싹하지 못하나 한다. 옷 입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조카 옷을 구입해서 늘 나와 마찰을 일으킨다. 조카는 할머니가 사준 옷을 입지 않는다. 할머니의 눈 높이에서 산 옷을 입지 않은 조카 역시 모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흐름에 속하지 못하는 아주 개성이 강한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 있고 그들을 소외시키는 사람의 모습 또한 나의 모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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