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각에 빨대를 꽂아서 먹게 되면 우유에서 어릴 때 아버지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후 마셨던 우유의 맛이 난다. 단맛은 없는데 달달한 맛이 느껴지는, 모두가 초콜릿 우유에 빠져있어도 네모난 각의 우유에 빨대를 꽂아서 쪽쪽 빨아먹고 있으면 초콜릿 우유보다 더 맛있었다. 묘하게도 주둥이를 벌려서 마시는 우유 맛은 전혀 어릴 때 맛이 나지 않는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맛도 분명 다르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주둥이를 벌린 우유를 마시기도 하는데 그냥 우유의 맛이다.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딱 흰 우유! 그것이다. 


주둥이를 벌려 마시는 우유는 국민학교 때 억지로 매일 받아서 먹어야 했던 우유의 맛이 있다. 바로 마시지 않고 집으로 들고 오면 배가 부른 아이처럼 부풀어있다. 빨대를 꽂아서 먹던 우유는 목욕 후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느리게 마셨던 맛이 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 우유의 맛은 급하게 먹던 우유와는 맛이 달랐다. 목욕 후 노곤한 몸으로 천천히 빨아 마시는 우유가 모르핀처럼 퍼질 때면 온 세상이 만개한 벚꽃처럼 느껴지고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가 그대로 이불을 덮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요리사 박찬일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도 잘 나와 있지만 맛이라는 건 추억의 절반이 아니라 70% 이상은 맛으로 기억되지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매일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폴라 압둘의 러시 러시를 듣는다.


러시 러시의 뮤직비디오에는 미소년인 키아누 리브스가 나온다. 폴라 압둘의 미모가 최고일 때 러시 러시를 불렀다. 뮤직비디오에서 폴라 압둘이 키아누 리브스에게 키스할 것 같더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숙맥인 키아누 리브스를 애타게 한다. 고소영의 점보다 폴라 압둘의 점이 더 섹시하다고 생각했고 폴라 압둘은 노래를 정말 잘 불러서 노래를 듣는 동안에는 몸을 이렇게, 이렇게 흐느적거리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폴라 압둘은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도전자들의 감정에 가장 많이 이입이 되어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모두에게 긍정적이다.


조깅을 좀 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산물 시장으로 왔다. 밤이라 모두가 문을 닫고 퇴근을 했는데 아직 집으로 가지 못한 늘봄 상회 안에서는 난로를 피워놓고 느긋하게 의자를 붙여서 다리를 쭉 뻗고 반쯤 누워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보았다. 70살이 다 된 것 같았는데 더 나이가 많은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그들은 느긋했다. 오늘은 일요일 밤이니까 이렇게 좀 있다가 들어가자며, 느긋하게 과일을 입으로 넣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부부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당연한 일인데 그게 마치 일탈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 요즘이다. 하하, 호호 크지 않는 웃음소리가 늘봄 상회 안에서 기분 좋게 울린다. 아마도 노부부는 어렵고 힘든시기를 한 곳에서 같이 이겨냈으리라. 그렇기에 저렇게도 모든 것을 초월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과일을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부부에게 초초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 주위는 빠르게 흘러간다. 모두가 시간이 없어서 빨리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오늘 됩니까? 바로 됩니까? 내가 평소에 가장 많이 듣는 소리다. 당장 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얼굴을 한다. 대체로 초조하다. 그래서 카페가 곳곳에 있어야 한다. 카페 안에서는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카페를 채우는, 초조함이 없는 사람들은 대다수 젊은 사람들이다. 


생계를 위해 일하고, 누군갈 만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어딘가에 올리는 글을 적고, 메일을 받고 수정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하루키 소설을 조금씩 읽고,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피규어를 정리하고, 잠들기 전에 영화 한 편을 보고. 이런 일은 하루를 금방 지나가게 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유를 늘 바라지만 막대한 자유가 주어지면 불안해한다. 며칠이 몇 달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조급해하고 초조함에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바쁜 일상의 틈을 벌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사각의 매일우유 각에 빨대를 꽂아서 천천히 빨아먹으며 폴라 압둘의 러시 러시를 들으며 늘봄 상회의 주인 부부처럼 느긋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느리게 보낸다. 느리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면 아마도 인생은 꽤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https://youtu.be/LNPb931Hq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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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리도 없이’는 올해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아니, 제일 좋았다고 해야 맞을까. 암튼 개인적으로 최고였다. 이 영화는 클리셰를 온통 박살 낸다.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다 허물어진다. 영화는 보는 내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휙 스친다. 그의 영화들이 스친다기보다 고 감독이 떠오른다. 고 감독이 고민하는 버려진 가족, 새로운 가족, 바뀐 가족, 헤어진 가족이 이 영화 속에는 라면 위의 치즈처럼 녹아있다.

예상을 박살 내는 장면으로 영화는 가득한데, 초희가 잡혀 온 태인의 집에 있는 거지 같은 아이 문주는 태인의 진짜 동생이며, 초반에 일을 떼주던 실장이 그 꼴을 당하고, 술 취한 자전거 아저씨는 진짜 경찰이고 심지어는 아이를 찾으라고 명령까지 내린다. 여경을 묻는 장면에서 경찰모를 덮어 줄 때에도 어? 했는데 나중에는 아니 이런, 하게 된다.

무엇보다 예상을 전부 깨트리는 인물은 초희다. 순수한 태인은 초희와 지내면서 자신의 동생, 문주와도 잘 지내고 빨래도 해주는 초희에게 점점 태인의 방식으로 마음을 연다. 그리고 태인은 자기도 모르는 새 그만 초희에게 기대게 된다. 초희가 자신의 가족이 되었다고,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초희는 태인의 집에서 마치 식구처럼 잘 지낸다. 도대체 잡혀 온 인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초희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초희 자신의 집에서도 3대 독자만 사랑하는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이고 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그것의 그저 연장이었을 뿐이다. 마지막에 초희가 선생님에게 태인은 착하고 나에게 잘해준 오빠라 하지 않고 나를 인질로 삼은 나쁜 유괴범이다, 그동안 나는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선생님에게 말한다. 


가끔 어른들은 딸아이의 재능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 한다. 우리 애는 물건을 제자리에 곧잘 갖다 놓고, 정리정돈을 무척 잘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아이에게 주위 어른들은 칭찬을 하고 예쁘다 하고 올바르다고 한다. 대체로 보면 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짙은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들이 칭찬을 많이 듣는다. 강신주 박사는 이런 여자아이들은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눈치가 빨라서 그런 것이라 말한다. 눈치가 남자아이보다 빠르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하면 엄마의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어른들의 강요는 아이에게 눈치라는 또 다른 자아를 생성시킨다. 초희에게는 이미 그런 페르소나가 생긴 것이다. 어른들에게 잘 맞는 아이로 생활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영화 속 인물 중에서 가장 불행하고 착하면서 나쁜 인물이 초희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계산해서 클리셰를 전부 비틀어 버림으로 보는 이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결국 인간은 페르소나를 안고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온통 어둡고 아픈 과거를 안고 행복한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모두가 밝기만 하다. 

초희를 팔러 간 닭집에는 인질의 아이들이 이미 여럿 있다. 그 아이들의 목숨이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닭보다 못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순수하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악랄하고 끔찍한 범죄가 그들에게는 그저 일상인 것이다. 그걸 너무 유쾌하게 뒤집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에 맞지 않게 색감이 정말 예쁘다. 그간 영화 속에서 본 색감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아름답게 나온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상반된 컬러 같기도 하다. 마치 초현실 풍경화, 쉬르 리얼리즘 수채화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컬러 속의 인물들은 온통 흑백이고 단색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초희는 집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가면을 쓰고 지낼 것이다. 전혀 행복해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척, 착한 척하며 지낼 것이다. 그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초희는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부모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언니 아사히 에리처럼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전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나는데 그 장면이 아주 잔인하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사람을 묻고, 유괴를 하고, 부당한 돈으로 불안하게 지금까지 삶을 살았고, 인질범들과 함께 있어서 겁이 나서 언제나 도망칠 궁리만 하고, 이제 친해진 언니가 또 도망갈까 봐 불안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은 채 행복한 모습으로 끝이 난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오랜만에 생각과 고민과 사고를 하게 만든, 개인적으로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 ‘소리도 없이’였다. 



https://youtu.be/y0tpQAbx0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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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커피의 첫 경험은 있다. 첫 경험이라는 게 흡족하기보다는 뭔가 생각에서 벗어난 경험을 하기 마련인 경우가 허다하다. 어린 시절에 작은 이모 댁에 가면 늘 어른들은 좋은 찻잔을 꺼내 커피를 마셨다. 그 냄새가 어찌나 좋은지 나도 한 번 마셔보고 싶었지만 어린이는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의 칼바람이 부는 우리 집에 비해 모친의 동생이었던 작은 이모는 서울에서 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모부는 건축업을 해서 일찍부터 부의 축적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작은 이모의 두 딸은 어린 시절에는 뽀뽀뽀 같은 어린이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종종 나올 정도로 우리와는 삶의 격차가 컸다. 모친은 동생 앞에서 위축되거나 부끄러워할 법도 한데 어린 나의 기억에 그런 모습은 없었다. 단칸방에 살다가 서울의 작은 이모의 아파트에 가면 동생과 함께 사촌동생들과 여러 방을 뛰어다니곤 했다. 어른들은 모여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예쁜 커피 잔이 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듣기 좋았고 커피의 향도 그동안 맡아보던 냄새에서 벗어난 좋은 냄새라서 커피라는 음료를 꼭 마셔보고 싶었다. 어른들은 커피 잔에 설탕과 프림을 넣어가며 홀짝홀짝 참도 맛있게 커피를 마셨다. 저 흙탕물 색의 커피가 무슨 맛이기에 저리도 맛있게도 마시는 것일까. 늘 궁금증 유발 대상이었다.


사실 언제 커피를 처음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시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요즘도 커피를 매일 하루에 한 잔씩 마시지는 않는다. 커피를 맛있게 마신 시기가 각각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2017년도 겨울인 것 같다. 원래는 몇 년 동안 가던 라바짜 카페가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시는 사장님 덕분에 그곳은 여름 겨울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늘 평온하고 온화한 음악이 있다. 입으로 커피를 마시고 귀로는 음악을 마신다. 크지 않은 공간에 커피 마니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추억도 많은 곳이었는데 없어지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마간 방황을 하다가 2017년에 바닷가의 또 한 군데를 찾게 되었다.


겨울의 조깅은 정말 힘들다. 옷도 두껍고 몸도 더 풀어야 하고 땀이 조금 났다 싶으면 금방 식어서 더 춥기 때문에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조깅을 하고 매일 커피를 마시러 들렀던 카페가 있었다. 차가운 바닷가의 칼바람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단절된다. 그 기분이 좋다. 창을 사이에 두고 저곳은 바닷가의 혹독한 추위가 득실거리는데 여기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커피를 홀짝일 수 있는 따뜻함이 있다는 것이 좋다. 역시 거의 매일 들렀기 때문에 주인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내가 적은 시와 그림을 사진으로 만들어서 한 장씩 창가에 붙여놓기 시작했는데 주인이 좀 많이 붙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늘 하나의 커피만 마시다가 여러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산미가 풍부한 커피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맛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었다. 어떤 날은 한 번에 두 잔씩 마시기도 했다. 호기롭게 에스프레소와 콜롬비아를 같이 마시기도 했고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를 같이 마시기도 했다. 그런 날은 카페인 때문인지 밤을 지내우는 날이기도 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카페인은 정말 잠이 달아나게 만들었다. 


2017년도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그해 가장 추운 날에도 카페를 찾았다. 뉴스에서 모스크바보다, 삿포르보다 더 추운 날이라고 했다. 그날이 기억이 나는 것은 조깅을 하는데 조깅코스에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그때 저기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오고 있었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이런 날씨에’라고 생각을 했다. 자전거가 스치고 지나가면서 헬멧과 마스크로 꽁꽁 가린 얼굴이 힐긋 나를 향했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이런 날씨에 얼굴을 다 드러내 놓고 바람을 맞으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아팠다. 살갗이 아픈 날이라고 느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의 밑바닥 같은 공기가 얼굴을 아프게 할퀴었다. 얼굴이 10세 아이에게 여러 번 뺨을 후려 맞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이 아픈 날이었다.


네온의 불빛도 전날과 다르고 사람들은 등을 한껏 구부리고 바닥을 보며 어딘가로 빠르게 걸었고 술집이나 치킨집에도 사람들이 없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들이 그런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찍부터 마신 술 탓에 한 명은 거리에 그대로 토하고 두 명은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의 겨울은 변함없이 반복을 하고 있었다. 변함없는 것들은 늘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조깅을 끝내고 오뎅을 하나 사 먹고 바닷가의 카페로 들어가면 주인이 따뜻하게 맞이한다. 주인의 웃음은 캐서린 모리스를 닮았다. 그날 커피를 두 잔 마셨다. 카페에는 레이 찰스의 ‘조지아 온 마이 마인’이 흘렀고 나는 로미타샤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추위가 단절된 카페 안에서 따뜻함이 새어 나가지 않는 밖을 보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런 기분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미쳤는지도 모른다. 이런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몸을 추위에 차갑게 혹사시키고 길거리에 서서 오뎅을 사 먹고 카페로 들어와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걸 보면.


추위로 인해 차가워진 몸은 금방 데워진다. 그렇지만 마음의 틈을 벌리고 추위가 들어와 식어버리면 커피로도 마음은 복구가 어렵다. 창밖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레이 찰스가 부르는 ‘조지아 온 마이 마인’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따뜻하기만 했다. 레이 찰스의 음악은 언제나 영혼을 흔든다. 그는 7세에 이미 시력을 잃었지만 음악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스티비 원더처럼 음악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레이 찰스의 음악은 빛과 중력처럼 시간이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https://youtu.be/qIp9TwSEgFg


이렇게 자주 가는 카페에서는 모두 커피 잔과 받침으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접시에 놓는 미묘한 소리가 마음에 든다. 누군가는 별나다고 하겠지만 그런 유별남이 커피에 관련한 소모품을 발전시킨다고 본다. 한 번은 주인이 직접 만든 브라우니를 먹어보라고 내어 줬다. 그날은 어쩐지 패배주의를 가득 안고 지친 몸으로 지친 내색 없이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던 날이다. 주인이 직접 만들었으니 맛이 어떤지 먹어보라 했다. 카페를 나설 때 주인은 수술을 하는 집도의처럼 양손을 천장으로 향하게 이렇게 들고 문 앞까지 배웅을 한다. 그날도 브라우니를 직접 만들고 있다가 내가 나갈 때 나를 배웅했다. 




브라우니를 내어줬을 때 사장님, 능력 자시군요.라는 말에 캐서린 모리스 같은 웃음을 보이고 먹어보라며 주방으로 갔다. 검은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검은 브라우니의 부드러움에서 위로를 받고 검은 밤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 브라우니의 부드러움은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몸으로 부드럽게 번진다. 창밖으로 검은 밤이 있고 창으로 비치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브라우니를 맛본다. 백야가 있듯 '검은 낮'이 죽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짙은의 '백야'를 부르리. 오오오 지지 않으리. 


아마추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을 프로들은 보여준다. 프로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누가 보던 보지 않던 떠들썩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게 그 자리를 지켜낸다. 아마도 여기 이곳은 소수의 프로들과 다수의 아마추어들이 울타리를 만들어 세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딘가에 불온하게 붙어 부유하고 있는 표류물이다. 계절에 휩쓸리고 세월에 따라 이리저리, 프로라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라고 아마추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애매한 지점에 위태롭게 서있다. 그 속에서 맛보는 브라우니와 커피는 위로다. 괜찮아, 하는 것처럼. 나의 커피예찬은 떠들썩하지 않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콜롬비아 커피는 마음에 든다

혀끝에 남아 그리움처럼 미미하게 감도는 산미

산미가 입 안에서 춤을 춘다

커피가 혀라는 세계에 노을처럼 그러데이션이 된다

어른 아이가 부르는 it’s rain처럼 콜롬비아가 쏟아지는 비처럼 퍼진다

콜롬비아를 담은 커피 잔마저도 커피 잔 답다

19세기 농장을 찾은 귀족이 된 것 마냥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커피 잔을 쟁반에 내려놓을 때

부딪치는 소리도 듣기 좋다

입안에 감돌던 커피가 목으로 전부 빠져나가고 나면 허전함마저 든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핀 들판 저 너머에는 자줏빛 밭이 보이고 

침엽수가 몇 그루 밭 옆을 지키고 있고 눈이 녹지 않은 

저 먼 산꼭대기에는 운무와 구름이 서로 인사를 하고 있다

이미 가을을 맞이한 나무와 여름의 끝자락을 놓칠 수 없는 나무가 

보이는 그곳에 앉아 조잘조잘 떠드는 새떼를 보며 

당신과 함께 콜롬비아를 한 잔 마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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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질 거라고 했지만 포근한 날의 연속이다. 밤이지만 청명한 날의 가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단지 건조 치수가 높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일기예보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비가 온 여름에는 너무 많은 비가 와서 모든 시스템이 멈추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기후변화와는 무관하게 바닷가에 앉아서 바다의 냄새를 맡으며 먹는 컵라면은 꽤 맛이 좋다. 아니, 최고의 맛이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생각이 많을수록 단순한 바다를 찾으면 평화롭다. 덴마크적인 바다는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발길만 옮기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는 칼스버그인데 그것이 없어서 칭따오 한 캔을 땄다. 그리고 홀딱 빠져버린 천오백 원짜리 컵라면에 물을 붓고 바다의 냄새를 흠 하며 맡는다. 여기까지의 행위를 하는 것이 몹시 좋다. 일단 바닷가니까 바다가 없는 곳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와 할 수 없는 행동이기에 좋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야외에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계절은 그리 많지 않고 길지 않다. 여름이면 바닷가라도 덥고 습하다. 겨울이면 추위 때문에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한다. 봄과 가을이라도 바람이 심하고 비가 내리면 이렇게 앉아서 평온하게 맥주를 홀짝이며 컵라면을 즐길 수 없다. 지금 딱 이 계절에만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약간 두꺼운 옷만 있으면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컵라면을 호로록 먹으며 맥주를 즐길 수 있다. 


바닷가의 정취에 빠져있는데 앞 테이블에 한 아저씨가 와서 앉더니 기타를 꺼내 든다.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원곡은 보브 딜런의 곡인데 이 밤바다에 어울리는 노래다.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른다거나 기가 막히게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노래를 즐기는 듯 보였고 주위에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노래를 한 곡 끝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아저씨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칭따오가 두 캔이었는데 나는 한 캔을 건넸다. 아저씨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 주름을 몇 개 더 만들었다. 


이맘때가 되면 기를 쓰고 밤바다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신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말하는 '감성'라든가, '정취'에 취하기 가장 좋을 시기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사람들의 기분도 여름만큼 들뜨지 않아 조용하다. 달과 지구의 거리가 멀어지기에 밤바다의 파도도 잠잠하다. 라면 국물이 식어도 괜찮은 밤이다. 이제 곧 데카브리다. 나의 인생철학은 어쩐지 회귀성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아저씨가 맥주를 잘 마셨다고 가고 나서 나탈리 콜의 노래를 죽 틀어 놓는다. 볼에 닿으면 기분 좋은 이불 같은 외투의 안감 스웨이드. 이런 밤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저 멀리 생과 사를 오고 가는 오징어 배의 불빛을 보라

연료를 소진시켜가며 덴마크식 바다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라

뜨거운 여름을 견뎌낸 사람들의 건강한 발걸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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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금은 날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하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아니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3년 정도 그렇게 추운 겨울은 아니었다. 


기록된 날짜를 보니 2017년도 12월인 것 같다. 2017년 겨울은 아주 추웠다. 그때 뉴스에서는 러시아보다 더 춥다고 할 정도로 혹독했다. 내가 그해의 겨울을 잘 기억하는 것은 조깅을 할 때 그때는 아주 두꺼운 아디다스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다음 해부터 지금까지의 겨울은 그 정도의 추위가 아니라서 패딩 같은 것을 입고 달리지 않았다.

 

그날은 혹독한 그해의 겨울의 추위 중에 가장 추운 날이었다. 조깅을 하는 길목에 매일 나오는 귤 할아버지도 들어가고 없는 날이었다. 조깅코스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강변에서 먹이를 바라는 길고양이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렇게 추운 날이면 길고양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추위를 피할까.

이렇게 혹독한 날이지만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달리게 되면 팬티의 선 부분에 땀이 찬다. 등에도 후끈 거리며 땀이 난다. 추우면서 후끈하고 축축한 미묘한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땀이 나면 보통 기분이 상쾌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기분이 아주 별로다. 힘들어도 쉬지 않고 뛰어야 한다. 뛰다가 걸으면 땀이 식으며 더 축축하다.

활발하던 철새의 무리도 고요하게 밤의 적막을 덮고 혹독함을 맞이했다. 다시 돌아갈까 싶다가도 조깅을 하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여기까지 나온 게 아까워서 계속 달리기로 했다. 무엇보다 반환점에 가면 반드시 하나씩 사 먹는 리어카 오뎅이있다. 오래되고 지저분하고 짭조름한 오뎅이 정말 오뎅 같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왜 그런지 오뎅은 세련되고 깨끗한 곳보다는 약간 지저분한, 파리가 윙윙 비행하는 곳의 오뎅이 맛있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더러워 보이고 닦고 닦은 흔적이 기름 떼처럼 보이고 먹고 나면 세균 때문에 여권 없이도 홍콩에 갈 수 있을 정도의 리어카식 포장마차의 오뎅이 좋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매일 오뎅을 한 4년 동안 먹었다.

그 사이에 좋아하는 오뎅이, 오뎅 집이 추려졌다. 대놓고 매운 양념이 들어간 시뻘건 국물의 오뎅은 피하게 된다. 또 꽃게를 넣어서 국물을 우려낸 곳도 피하게 된다. 꽃게를 넣으면 꽃게의 맛이 모든 오뎅 국물의 맛을 다 잡아 먹는다. 무의 시원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뎅과 무, 대파 같은 것들로만 국물을 우려낸, 그리고 가끔 매운 고추가 들어가서 국물에 약간의 매콤함이 깃든 국물의 오뎅을 선호하게 되었다.

매일 가는 오뎅 집에 가서 오뎅을 두 개씩 사 먹다 보면 나중에는 제일 맛있는 ‘무’는 그저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주인 할머니가 무는 그냥 먹으라고 한다. 오뎅 국물에 몸을 푹 담가서 푹 데쳐진 무의 맛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오뎅을 먹기 위해 이렇게 혹독한 추위에도 일단은 끝까지 달린다.

반환점에 가면 부연 연기를 피워 올리며 맛있는 오뎅이 기다리고 있다. 오뎅을 한 입 먹고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김을 불면 입김이 영화 속 그래픽처럼 이만큼 나온다. 아아 겨울의 맛이군. 하는 기분이 든다. 오뎅을 파는 곳에도 생맥주를 팔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오뎅 한두 개에 맥주 한 잔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으로 여고생 두 명이 롱 패팅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차가운 생과일주스를 마시며 지나간다. 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여고생들은 시대가 변해도 역시 멋있었다.

오뎅을 먹기 위해서는 어떻든 거기까지 가야 한다. 다른 곳에도 오뎅을 팔지만 입맛이 이 집의 오뎅에 맞춰졌다. 푹 삶기지도, 설익지도 않은 오뎅이 좋다. 무엇보다 오뎅 국물이 내가 원하는 맛이다. 그러니까 오뎅을 먹고 싶어서라도 거기까지 매일 달려가야 한다. 그래서 혹독한 추위에도 일단 나왔다면 달릴 수 있다.

차가운 겨울은 모든 풍경을 변하게 만든다. 그 풍경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도, 그리고 인간의 모습도 변화시킨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차가운 풍경도 기억의 필터를 대고 보면 꽤 아늑하고 희미하고 뿌옇고 흐뭇하다. 또 돌아보면 후회의 순간들이 지나간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후회할 수 없을 정도로 후회하여 내 죄가 물에 불은 신문지처럼 될 때까지 후회하면서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기도 한다.

그랬던 오뎅 집이 그해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주인 할머니가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더니 그대로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후보였던 오뎅 집도 그만두고 난 후 지금까지는 오뎅을 사 먹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먹은 오뎅만 해도 엄청나다. 한동안 인별그램에 매일매일 조깅 후 먹은 오뎅을 올리기도 했다. 겨울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개인적으로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오뎅을 먹고 국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입김을 후 불면 화악 나오는 게 냉철하고 차가운 겨울의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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