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달을 거의 시켜먹지 않는다. 배달앱도 깔려있지 않다. 그래서 불편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집에 있는 시간이 잠자는 정도의 시간밖에 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음식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집으로 올 때 포장을 해서 들고 온다. 주문을 하고 앉아서 대기하는 게 아니라 조깅을 하러 가면서 주문을 하고 조깅이 끝나면 받아서 오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이 요즘에 반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택트 시대에 배달이라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고, 또 문 앞에 두고 벨만 눌러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준다. 아주 간소한 음식도- 요컨대 짜장면 한 그릇도 배달해주고, 국수 한 그릇도 배달을 해 준다. 한 그릇은 배달 안 됩니다, 같은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배달앱에 한 번 빠져들면 끊을 수 없다,라고 하기보다 사용을 중지할 수는 없게 된다. 티브이의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예능도 한몫했고 그것이 트렌드이자 요즘의 언택트 시대에 살아가는 당연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일인 거주자는 끼니를 만들어 먹기보다 때우기에 더 가까운데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 또 배달보다 더 비싸게 치기 때문에 일인 거주자가 요리를 해 먹으려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요리를 하고 나면 치울 거리도 많다. 그럴 바에는 배달을 해 먹는 게 시간이나 돈이 적게 든다. 요즘은 배달을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맛으로 지켜온 음식점도 배달앱에 등극을 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배달앱을 통해 음식의 조리의 정도도 선택을 할 수 있다. 들어가는 재료 또한 지정하여 넣을 수 있기에 당연하게도 비대면 주문방식이 작금의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흐름에 동참을 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 근처의 작은 스파게티 전문점에서도 주문은 테이블마다 로봇이 찾아가서 받는다. 이런 시대에 배달앱이 없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있다. 


그건 뭐랄까, 무더운 여름에 모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혼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할까. 모두가 정장에 구두를 코디하는데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 것과 흡사할까. 아무튼 폰에 배달앱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나의 폰에는 그것이 없다. 게다가 나는 폰에 깔린 어플이 총 서른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배달을 시켜먹지 않지만 그래도 배달을 해서 먹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바닷가에서다. 그때 배달앱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배달앱으로 바닷가로 배달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든 가끔 누군가가 내가 사는 바닷가에 눌러 왔을 때 치킨을 배달시켜 먹기도 한다. 바닷가에 앉아서 먹으면 뭐든 맛있지만 치킨 역시 맛있다. 해운대에서도 치킨이 가장 맛있는 것 중 하나라고 하던데. 하지만 치킨은 주로 포장을 해서 바닷가에서 먹는다. 배달은 안 되지만 근처에는 예전에 백종원의 삼대 천왕에서 백종원이 방송에 소개한 치킨집도 있다. 이 치킨 집(위의 사진 치킨은 아님)은 아주 오래된 집으로 배달이 없다. 그리고 하루에 정량만 판다. 그래서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먹지 못하는 치킨 집이다. 치킨인데 탕수육 같으면서 치킨인 그런 치킨이다. 아무튼 아주 맛있다. 그걸 포장해서 바닷가에 앉아서 먹어도 맛이 난다.


무엇보다 바닷가에서 먹으면 맛있는 것 중에 최고는 짜장면이다. 바닷가에 짜장면집이 있어서 배달을 할 필요 없이 그릇째 들고 밖에서 먹으면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그 맛이 배가 되는데, 실내에 앉아서 먹어도 유리창을 통해 바다가 보인다. 바닷가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방파제가 나오는데 거기서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다가 짜장면을 배달을 시켜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방파제에서 배달을 시켜 먹는 것은 쓰레기가 나오기 때문에 별로다. 예전에는 테트라포드에 짜장면 배달 010-XXX-XXXX 같은 번호를 페인트로 써 놓기도 했지만 요즘은 없는 것 같다. 요즘은 방파제가(슬도) 관광지가 되어서 거의 가지 않는다. 


배달앱이 없이도 너무나 잘 지내는 것이 이상해진 요즘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의. 시켜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개 산책하는 시간에 미리 주문하고 산책 끝날 때 받아옵니다. 그게 편하더라고요..

교관 2020-12-17 11:51   좋아요 0 | URL
^^ 비슷한 분 발견 ㅎㅎ
 


요즘은 끊었던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저녁에는 배철수의 음캠도 듣고 있다. 배철수 음캠을 거의 십 년 넘게 매일 들었는데, 그래서 배철수 음캠에 참여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물이 없는 배캠에서 선물이 오기도 했다.


 라디오를 다시 들으니 그 세계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변화는 있으나 변함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4년 만에 다시 라디오를 듣게 되었는데 라디오 속의 오전과 저녁은 세상의 혼잡과 환란과 무관하게 편안하고 평안했다. 그게 마음에 든다. 오전과 저녁의 디제이의 멘트는 꼭 새끼 고양이의 털과 발바닥처럼 부드럽고 헤어지기 싫은 기분이다.


그런데 실시간으로 반응을 받고 커피세트 같은 걸 선물로 바로바로 날려주니까 뭔가 듣기 오그라드는 댓글도 많다. 가령 어떤 노래를 디제이가 틀면 '어머 그 노래 대박 사건, 우리 사무실 전부 떼창으로 따라 불렀답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대박이라고 외쳤어요, 다 미쳤어요'라는 멘트를 읽어주고 커피 선물을 쏜다. 듣고 있으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거짓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택을 받을 수 없으니 튀거나 오버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된 요즘이다. 작금의 시대에는 모든 부분이 그렇다는 사실이 재미있으면서 좀 씁쓸하긴 하다.


나는 실시간으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듣지 못했는데 요즘 유튜브로 그걸 들을 수 있어서 왕왕 듣게 된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는 밤 11시에 했기에 시끄럽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다. 그리고 이종환이 어디서 누구의 엽서입니다, 라며 '엽서'를 읽어준다. 엽서는 사연과 이동거리가 길며 기다리는 동안의 두근거림이 있다. 그리고 신청하는 노래 역시 주로 사람의 마음과 온도,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의 이야기를 한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실시간으로는 감상하지 못했지만 유튜브를 통해 듣고 있으면 보브 딜런과 제네시 조플린과 지미 핸드릭스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이 던지는 세계에 몸이 희석되는 기분과 흡사하다. 사연을 들어보면 요즘과는 달리 문학적인 표현이 많고 그에 따른 문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릴케가 죽고 못 살았던 루 살로메의 글 한 구절을 엽서에 써 보내고 이종환이 읽어주기도 하고, 클래식도 들려준다. 이종환의 목소리는 그 영역에서 헤리티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종환은 좀 독불장군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방송을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지 못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음주로 방송을 하는 건 금지되지만 이종환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 있었던지 술을 마시고 디제이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횡설수설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방송이라는 게 빵구가 나면 아주 큰일로 확산하기 때문이다.


이종환 하면 판피린 물약 같은 판콜에이와도 뗄 수 없다. 항상 손을 뻗는 곳에 한 박스씩 구비를 해두고 한 병씩 꺼내 마셨다고 한다. 판콜에이는 달달하면서 뒷 맛이 주는 기묘함 때문에 한 번 중독이 되면 계속 찾아 마시게 되는 무엇이 있다. 바카스와 다르지만 비슷한, 그래서 한 병을 마시면 초기 감기를 잡고 좋지만 두 병 이상은 무리가 올 수 있다. 이종환은 디제이 맨트가  하나 끝나면 누구야,라고 불러서 판콜에이를 가져오라고 해서 자주 마셨다고 한다.


이종환은 청취자에게 폭언을 해서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하차하기도 했고 후에 '이종환의 음악살롱'을 했지만 결국 음주방송으로 하차해야 했다. 이종환은 73년에 종로에 음악 감상실 '쉘부르'를 열어서 가수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출신 가수들이 어니언스, 이수만, 허참, 주병진, 남궁옥분, 변진섭 등이다. 실시간이 없었던 그 오래전, 오직 엽서로 청취자들과 소통을 했던 라디오에서 이종환의 목소리는 김중식 시인의 시에서 궤도를 이탈한 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https://youtu.be/s0MokpD2bGU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 전에 끝난 군대 미스터리 스릴러 ‘써치’ 때문인지 유튜브에 들어가면 ‘푸른 거탑’이 뜬다. 실시간으로 몇 편 보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정말 재미있다. 화면의 구석에서도 디테일을 살리는 연기를 하고 있어서 놀라면서 보게 되었다. 여러 영화 속 명장면들의 패러디와 오마주를 이렇게나 재미있게 편집을 할 수 있다니. 유주얼 서스펙트부터 글루미 선데이까지 박수가 절로 나온다. 푸른 거탑에 나오는 연기자치고 어설프게 하는 연기자도 없는 것 같다. 주인공들은 전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찰지게 군인을 표현했다.


남자들에게 군대 이야기는 정말 빠지면 안 되는 이야기다. 제일 왕성한 시기, 이십 대 초반에 2년을 단체생활을 하기에 좌충우돌하게 되고 그 기억은 오래 남아서 다시 추억으로 포장된다. 푸른 거탑에는 여배우들도 많이 나오는데 지금은 최고의 배우가 된 이정은도 왕왕 나왔다. 주인공들은 부대 안에서 하루도 사고를 안 치고 넘어가는 날이 없다.


군대가 냄새나는 20대 초반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으니까 청결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 어디보다 청결에 신경 쓰는 곳이 군대다. 그래서 매일 하는 점오 시간 전에 하는 막사 전체의 청소는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친 듯이 한다. 먼지 하나 있으면 안 되고, 모든 곳이 반짝반짝 빛나게 되고, 어떻게 해도 닦이지 않는 곳은 치약, 치약으로 모든 곳을 깨끗하게 닦는다. 치약은 모든 곳에 쓰인다. 기름기 묻은 그릇을 닦을 때에도, 관물대를 닦을 때에도, 막사 내 바닥을 닦을 때에도 치약은 온통 다 쓰인다. 제일 막내들은 청소를 할 때 변기 청소를 해야 하는데 손으로 걸레질을 다 한다. 그래서 막내 생활이 길어지면 손에 똥독이 도돌도돌 올라오기도 한다. 손으로 걸레를 들고 변기를 전부 닦아낸다. 그래서 점오를 할 때 화장실의 변기가 정말 바로 설치한 것처럼 항상 반질반질 깨끗하다. 역시 치약이 사용된다.

 

그 정도로 청결에 신경을 쓴다. 막내일수록 속옷을 자주 빨지 못할 수 있으니 항상 점검을 한다. 그래서 막내들은 매 시간, 늘 바쁘다. 시간만 나면 속옷과 군복을 빨고, 운동화도 빨고, 건조대에 널어놓은 고참들의 빨래가 없어지는지도 체크해야 한다. 그래서 아픈 사람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감기가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게다가 군대에서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다. 하지만 또 군대에서 아프면 평소에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무서운 부대원들이 따뜻하게 대해준다. 그런 일화를 다룬 푸른 거탑 편을 올려본다. 꾀병을 부릴 때마다 들키던 캐빈이 진짜로 아프게 되면서 부대원들은 극에 달하는데.


https://youtu.be/pKlQ88uzarQ


푸른 거탑의 주인공들은 정말 하나하나가 사고 치는데 뭔가가 있다. 군대를 조용히 보내고 전역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도 사고를 많이 친다. 나도 사고를 쳐서 영창에 갈 뻔한 일이 있었다. 나는 법무부 소속으로 구치소에서 군생활을 했다. 구치소 앞에는 관사가 있어서 중대장이나 집이 먼 직원들이 관사에서 평일에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타지방에 있는 집으로 간다. 우리 부대의 중대장도 내가 작대기를 네 개를 달 무렵 새로 왔는데 집이 타지방이라 주말이면 관사를 떠난다.

우리는 주말이면 시간이 널널해서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보낸다. 탁구(이건 평일에도 한다)를 치거나 여름이면 선텐을 즐기기도 하고 종교 행사를 하거나 면회가 오면 면회 온 친구들과 보내기도 한다. 부대에서는 회식비를 직접 충당했는데 구치소 뒤에 만 평 정도의 배밭이 있어서 배 농사를 지었고, 돼지도 9 마린가 있어서 사육을 했다. 돼지를 사육하기 전에는 염소 몇 마리를 키웠는데 야간 근무는 늘 염소 몇 마리가 잘 있는지 수를 헤아리는 것이 근무의 전부였다. 한 마리라도 없어지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돼지는 정말 잘 먹었다. 붉은 황토도 먹었다. 그리고 돼지는 아주 똑똑한 동물이다.


어떻든 배 밭 너머에는 저수지가 있는데 주말에는 막사를 몰래 빠져나가 그 근처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간부들도 다 민간인들이라 상부에 보고를 해봐야 자기들 감봉되고 전출을 가거나 출세가 더디기 때문에 대체로 눈을 감아준다. 주말에 구워 먹을 고기와 고구마, 숯과 불판 같은 것들을 평일에 운전병을 통해 다 구입해 둔다. 그리고 잘 짱박아두다가 주말에 간부들 몰래 구워 먹는다. 그럴 때는 항상 회식병이 따라와서 수발을 든다. 고기를 굽는 동안 닭과 고구마는 은박지에 잘 감싸서 불구덩이 안에 던져 놓는다. 그리고 들고 온 소주와 함께 고기를 먹는다. 고기를 다 먹을 때쯤 은박지에 숨겨진 닭과 고구마를 꺼내면 정말 맛있는 요리가 된다.


내가 영창에 갈 뻔한 일이 있었다. 보통 토요일 오후 1시에는 중대장이 관사에서 나와 자신의 집이 있는 타지방으로 간다. 구치소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력이 죽 지켜보다가 중대장이 관사를 빠져나가면 막사에 보고를 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의 주말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날은 여자 후배들 세 명이 면회를 왔다. 그중에 한 명이 미스코리아 대회를 나갔던 애가 한 명 있었다. 미모가 출중했다는 말이다. 날씬한데 다리고 길고, 사투리도 쓰지 않고, 아무튼 길쭉길쭉 그런 애였는데 졸다구 하나가 그만 반해버려서 어떻게든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면회 자리에 불렀다.


그런데 이 녀석이 면회시간이 끝나고 저녁에 대학교 앞에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이 녀석도 짝대기 네 개로 나보다 4달 늦게 들어온 녀석인데 나를 졸라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녀석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간절한 눈빛으로 제발 그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여자 후배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내가 아주 졸다구 때 친구들과 면회를 왔다. 그때 고참 역시 반해서 연락처를 가르쳐 줄 수 없냐는 것이다. 나는 그 고참에게 참 많이 맞았다. 구치소에서 근무하는 이런 부대는 내무생활이 힘들어서 구타가 잦다. 그리고 구타가 심하다. 역시 구타가 심해도 간부들을 통해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심하게 구타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 간부들 역시 감봉에 전출에, 진급이 힘들기 때문이다. 신병 때에는 얼굴을 많이 맞아서 코가 퉁퉁 부었는데 하필 그때 집에서 면회를 오기도 했다. 도저히 싸들고 온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그대로 집으로 들고 가라고 했다. 안경을 쓰는데 맞다가 안경이 깨지기도 했다. 암튼 그렇게 졸다구들을 많이 때리던 고참이 나를 찾아온 여자 후배에게 반한 것이다. 밉다고 안 가르쳐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르쳐줄 수도 없고 참 난처했다. 결론은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에 내무실에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걸어 두었는데 우리 내무실 고참 세 놈의 카드가 같았다는 것이다.


여자 후배는 다니던 미용실에서 미스코리아 제의가 들어와서 나가게 되었다. 미스코리아는 어떡하면 뽑히는지 대체로 모른다. 미스코리아는 얼굴이 예쁘다고 뽑히는 것도 아니다. 예쁜 것도 3위다. 진, 선, 미 중에 예뻐봐야 '미'다. 미술대회는 그림을 잘 그려야 하고, 노래 대회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하는 명분이 있는데 도대체 미스코리아는 어떡하면 뽑히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미스코라아 대화가 한 도시에서 열리면 그 도시의 사람들만 출전하는 게 아니다. 다른 도시에서 떨이진 사람들, 처음 도전하는 사람들도 우르르 온다. 한국의 도시에서 들만 오는 게 어니다. 남가주에서도 오고 아주 난리가 아니다. 그럼 올해 미스코리아 대회가 한 도시에서 열리면 그 해 도전하는 사람들만 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작년, 재작년에 떨어진 사람들이 일이 년 열심히 준비해서 재도전을 하기 때문에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도전해서 쉽게 붙을 수 없다. 당최 미스코리아는 무엇으로 뽑히는가, 그걸 아는 사람은 각 도시의 미스코리아를 배출해낸 미용실의 원장님만이 알고 있다. 미스코리아는 그날 나온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다. 그 모든 것을 원장님이 다 잡아준다. 말투, 걸음걸이, 키, 화장 등 모든 것을 원장님이 트레이닝을 해준다. 미스코리아를 내가 나가고 싶어서 원장님을 찾아가면 만만찮은 비용을 내가 다 내야 하지만 미용실에서 손을 내밀면 미용실에서 모든 비용을 댄다. 여자 후배는 그해 포토제닉상을 받았다. 요즘은 없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수영복 심사가 있었고 후배의 엉덩이는 미국 모델들처럼 위로 봉긋 올라 있어서 수영복이 꽤 잘 어울렸나 보다.


여자 후배는 대학교 때 같이 방구석에서 아이들과 뒹굴고 이야기하고 놀던 여자애로 우르르 모여서 밤새도록 술 마시다 보면 아침에 눈썹이 다 지워져서 놀리고 잠이 들면 얼굴에 치약으로 영구 콧물을 그리기도 해서인지 미스코리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막상 무대에서 그런 식의 옷과 그런 식의 포즈로 서 있는 걸 보니 멋있기보다 어떻게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는데  청바지 입고 조신하게 앉아 있으면 많은 남자들에게서 데시를 받곤 했다.



아무튼 주말에 저수지를 지나 조금 가면 나오는 울산대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탈영이다. 그전까지 사실 몇 번 몰래 빠져나가 대학교 앞에서 한 잔 하고 들어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떻든 탈영인 것이다. 후배에게 반 한 이 녀석은 전출 온 녀석으로 진주교도소인가, 그곳에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 녀석은 진주에서 음지의 세계 생활을(나이트 기도 같은) 하다가 그대로 군대에 끌려갔다가 법무부로 차출이 되어 진주 교소에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방(흔히 감방이라 불리는)에 온통 친구들, 선후배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편의를 봐주다가(담배를 넣어 준다던가, 술을 넣어 준다던가) 영창을 갔다가 내가 있는 구치소로 전출을 오게 되었다.


그 녀석의 얼굴은 험상궂게 생겼다. 나와 같은 내무실도 아니었다. 다른 내무실인데 나와 친해지게 되었다. 겨울에 같이 외박을 받았는데 그 녀석은 진주의 집에 가기 어려워서 우리 집에서 같이 보냈다. 덩치가 컸는데 내 옷이 맞는 옷이 없었다. 다행히 멜빵바지가 하나 있어서 그걸 입혔다. 그리고 가죽잠바를 입혔는데 그날 밤에 술을 마시고 힘을 주니까 가죽잠바의 날갯죽지가 죽 다 찢어진 적이 있었다.


아무튼 그런 녀석이 여자 후배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저녁에 술 약속을 잡았다. 중간에 여러 말들이 오고 갔지만 생략하고, 저녁 근무를 빼돌린 다음에 대학교 앞에 있는 주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들키면 탈영이고 영창을 가게 된다. 그렇다고 하지만 왕왕 있는 일로 만약에 들켜도 간부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군인 신분이라기보다 직업공무원에 더 가깝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일일이 상부에 보고하기보다 자신의 손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다.


저녁이 되었고 철조망으로 된 담장을 살며시 넘어서 우리는 저수지를 돌아서 대학교 앞까지 왔다. 후배들을 만나서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 녀석과 함께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낮에 한 번 만났기에 후배는 술술 이야기를 잘 도 했다. 술과 안주가 나오고 재미있어지려는 찰나 중대본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요즘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부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중대본부에 있는 휴대전화를 몰래 들고 나왔는데 연락이 왔다. 중대장이 관사에서 집으로 간 줄 알았는데 관사에 다시 들어왔다가 우리가 막사를 넘어서 저수지 쪽으로 가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기다렸지만 우리는 오지 않고 중대 집합을 시켜 인원 점검을 한 결과 두 명이 비어서 비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우리는 일어나서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이미 중대가 막사 앞의 운동장에 다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몹시 살벌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탈영을 했기 때문이다. 중대장실에 끌려간 나는 중대장의 고함소리를 다 받아야 했다. 평소에 좋게 봤는데 이 놈 이거 안 되겠구만, 너희 전부 영창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국방부의 영창과는 다르게 구치소의 사방에 계급장을 떼고 올라가서 각 잡고 영창 생활을 한다. 나는 중대장에게 모든 것이 다 저의 잘못입니다, 저만 영창에 가겠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해다. 그랬더니 그래? 그럼 너만 영창 가, 잘 됐구만. 하는 것이다. 속으로 이거 큰일 났구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대장은 다른 간부들과 달리 바로 보고하고 조치를 취하려 했다. 중대장의 머리에는 자신의 감봉이나 전출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소대장들이(역시 직원들로, 모두가 다 난처한 상황) 중대장을 어르고 달랬다. 평소에 저 녀석(나를 가리켜)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래서 결국 동초 근무(막내가 하는 야근 근무지)를 일주일 동안 하게 되었다. 영창은 면하게 되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제대할 때까지 주말에는 가끔씩 배밭 근처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여자 후배는 요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만나지만, 몇 해 전에 화교인과 결혼을 하여 중국집을 여러 개 하는 사모님이 되었다. 아이도 낳고 아줌마가 되었지만 어쩐지 아직도 늘씬하고 옷을 잘 입고 다닌다. 단지 입을 벌리면 어느새 수다가 시끄럽게...


https://youtu.be/gG13OlTF-nU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중목욕탕을 좋아하던 내가 안 간지 9년? 10년? 은 된 것 같다. 대중목욕탕에 자주 갈 때는 일주일에 두 번도 간 적이 있다. 찜질방은 나와 맞지 않은데 대중목욕탕은 또 잘 맞았다. 씻는 건 싫어해도 목욕하거나 샤워하는 건 어른이 된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목욕탕을 좋아하는 것도 기억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토요일 저녁에는 늘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는 주말을 몽땅 우리에게 할애했다. 분명히 주말에 하고 싶은 일이나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 텐데도 주말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보냈기에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다.


토요일에는 아버지와 함께 늘 동네 목욕탕에 간다. 아버지와 함께 가니 탕 안에서 헤엄을 쳐도 나무랄 사람이 없어서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아버지는 썩 시원하지도 않을 텐데 아버지의 등을 밀면 나에게 시원하네, 잘 미네, 같은 말로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때도 나오지 않아서 아버지는 등을 미는 기계에 등을 댈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 싫어서 시원하게 기계에 등을 미는 걸 포기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조금 지난 후에야 그걸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어떤 시점이 오는 것 같다. 무엇을 알게 되는 시점. 그 이전에는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그 시점.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조안나 골드를 먹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토요명화를 보다가 노곤함에 속수무책으로 잠으로 빨려 들어가는 행복한 기분을 주말에는 만끽했다.


일전에 조깅을 하다가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를 가봤다. 아직도 그 동네 목욕탕이 있지만 이제 목욕탕은 하지 않았다. 딸려 있는 여인숙의 간판도 보였지만 여인숙도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동네는 워낙 달동네라서 그런지 아직도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 있었다. 목욕탕은 대형 목욕탕과 달리 계단을 오를 필요도 없고 밖에서 탕까지 가서 몸을 담그기까지 문 두 개만 지나면 된다.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겨울에는 난방을 해놔도 탕에서 나와 로비에서는 재빨리 물기를 닦아야 한다. 춥기 때문에. 동네 목욕탕은 그렇다.  


밖에서 부르면 예! 하고 나갈 수 있었다.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천장과 벽의 어디쯤 뚫려 있는 작은 창으로 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대형 목욕탕에서처럼 편리한 시설은 없지만 몸을 말리고 옷을 입기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고 겨울에는 평상 옆에 난로가 있었고 난로 위에는 오뎅이 잘 익어가고 있었다. 오뎅을 팔기도 했기에 홀딱 벗은 아저씨들이 전부 빙 둘러서 오뎅을 하나씩 먹고 국물을 홀짝 거렸다. 

역시 겨울에 먹는 오뎅이


늦게까지 하지 않기에 목욕을 제대로 하려면 저녁 8시에는 들어가야 문을 닫기 전에 원하는 만큼 목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길거리에서 시간을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지듯 동네 목욕탕은 사라졌다. 지우개로 슥삭슥삭 지우듯, 정말 거짓말하지 않고 거의 대부분 없어졌다. 그리고 세상에는 스포츠센터처럼 거대한 찜질형 대형 목욕탕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려한 내장 인테리어에 냉탕도 몇 개, 온탕도 몇 개, 편의시설과 이발소가 딸려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방도 거대했다. 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여러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을 라커를 찾는데만 시간을 들여야 하는, 아주 거대한 공룡 같은 목욕탕.


나 역시 그만 대형 목욕탕이 좋아서 종종 가곤 했다. 탕 밑에서 올라오는 기포가 몸을 시원하게 때려 주었고 샤워기가 남아돌아 어디든 자리에 앉을 수 있고 밤새도록 하기에 새벽에 가서 샤워를 하고 탕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잠시 잠들 수도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남탕은 여탕과는 다르게 수건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수건을 두 장 이상 사용하는 남자는 아주 드물다. 대체로 한 장의 수건으로 모든 것을 끝낸다. 또 목욕을 하면서 사타구니의 털에 샴푸질을 해서 계속 빗는 아버님도 있고 냉탕에 들어갈 때마다 아흐 하는 큰 소리를 꼭 내는 아저씨도 있다. 무엇보다 잠자는 수면실에서 홀딱 벗었지만 하나를 걸치고 잠이 든 아버님들이 보이는데 그 하나가 양말인 경우도 있다. 목욕탕에 이발소도 딸려 있어서 이발도 하고 몸이 좋은 남자는 절대 빨리 옷을 입지 않는다. 아무튼 재미있는 곳이 목욕탕, 대형 목욕탕이었다.


하지만 9년 전부터는 목욕탕에는 다니지 않게 되었다. 여러 개의 이유가 있겠지만, 별 볼일 없는 나 같은 인간(일지라도 건축과를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방화벽이나 방화문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의 눈으로 봤을 때 거대한 대형 목욕탕에는 방화문이 없다는 이유가 컸다. 조금 허술하지만 탕에서 밖까지의 거리가 짧은 동네 목욕탕에 비해 대형 목욕탕에 불이 나면 탕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믿기나? 불이 났을 때 재빨리 옷은 못 입더라도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전혀 그럴 수 없는 구조다. 설사 나오더라도 멀쩡한 정신이 될 수는 없다. 검은 연기 때문에. 목욕탕에서 화재 때문에 죽은 모습은 다른 어느 곳에서 죽는 모습보다 비참하다. 그렇지 않을까? 홀딱 발가벗은 채로 수건으로 몸도 못 가리고 어딘가에 축축하게 박혀서 죽어 있는 모습은 그와 다르게 죽음을 맞이한 어떤 죽음보다 비참하고 안타깝다. 여러 군데의 대형 목욕탕에 가봤지만 건물 밖에서 목욕탕 안까지 들어가는 길은 꽤 복잡하고 긴 거리를 올라야 도달할 수 있었다.


요즘의 대형 목욕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대형 목욕탕은 무법천지였다. 그저 보기에 찬란하고 화려하고 자본을 많이 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형 목욕탕뿐이었다. 법이라는 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어떠한 불이익을 당해서 법의 도움을 한 번 받으려 하면 일반인은 그 벽이 너무 크고 높아서 엄두도 나지 않는다. 법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아직도 법을 믿나, 라는 말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어른이 된 이후에 사람들은 소방훈련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소방훈련을 받으면 소방대원은 말한다. 식당이나 술집에서 분위기 좋고 구석진 자리보다는 출입문 근처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그게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화재에 재빠르게 나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모든 식당이나 술집이 법을 꼬박꼬박 지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법을 지키려면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대중목욕탕을 가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문 닫는 시간이 없다 보니 들어가면 너무 오래 그 안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실지로 목욕을 하는 시간은 짧은데 2시간 이상 머무르게 된다. 잠깐 졸기라도 하면 3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게다가 나는 회귀성이 강해서 갔던 곳으로 줄곧 가는 경향이 짙다. 가고 오고 하는 시간이 1시간 반은 넘는다. 그러면 도대체 목욕탕에서 잡아먹는 시간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 시간이 늦은 밤이면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없기에 오는 도중에 국밥을 한 그릇 먹기도 한다.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때를 미는 것이 귀찮아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는 그냥 두고 나올 때도 많다. 다음에 이곳을 집중으로 밀지, 뭐. 하는 생각을 해버린다.


그러다 보니 대중목욕탕에는 가지 않게 되었다. 편리하지만 역시 아버지와 함께 했던 동네 목욕탕에서의 추억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없어서였던지 한 번 가지 않게 되니까 이제는 전혀 가지 않게 되었다.


친구 중에 목욕탕 집 아들내미가 있었다. 그 녀석과는 고등학교 내내 전혀 마주할 일이 없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을 배우면서 친해지게 된 녀석인데 집이 목욕탕이었다. 부모님은 목욕탕에서 1분 거리의 집에 살고 녀석은 목욕탕 위 옥상에서 살았는데 그 녀석의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목욕탕으로 내려가서 씻으면 된다. 그때 목욕탕 안에서 옷을 입은 채 세수만 하는 것도 묘한 기분이었다. 텅 빈 목욕탕에서 이른 오전에 뜨거운 수증기가 폴폴 올라오는 탕을 앞에 두고 옷을 입고 세수만 하고 나오는 기분은 아무튼 기묘하고 이상하고 찝찝했다. 


목욕탕에 가지 않은 덕분인지 매일 샤워를 하게 되었다. 조깅을 하고 들어오니 어쩔 수 없다. 샤워를 할 때는 진지하게 한다. 발가락 사이, 배꼽 안도 손가락으로 때타월을 돌돌 말어서 잘 닦아낸다. 그래도 가끔 탕에 몸을 담그고 망상에 젖는 그 시간이 그립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한 요즘(그렇다고 해도 오전에 한 시간 정도 듣는다. 10시 20분에서 11시 30분 정도? 정지영 약간, 김현철 약간, 그 정도 듣는 편이다. 예전처럼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지는 않는다) 라디오를 듣다 보니 아직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곳이 라디오구나 하게 되었다. 


2016년도에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되어서 그동안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서 듣다가 며칠 전에 다시 듣기 시작했다. 2016년도 이전에는 죽 라디오를 들어왔었다. 그래서 일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선물이 없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도 선물을 받기도 했었다. 라디오에 참여도가 높은 요즘이라 누구나 실시간으로 접근이 가능하고 또 그만의 재미가 있다.


없어질 거라는 우려 속에서도 라디오는 꾸준하게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다. 무엇보다 라디오에서는 라디오 밖에서의 사건사고에서 벗어난다. 코로나로 인한 힘들고 어려운 기사보다는 노래로 위안과 위로를 하려는 글과 사연이 많다. 오전의 라디오를 듣다 보니 2016년에 듣던 광고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광고라는 건 가장 발 빠르게 변화하는데 ‘이카운트 이알피' 광고는 전혀 변하지 않고 아직도 나오고 있었다. 대단했다. 속을 벌리면 계약이니 뭐니 하는 관계가 있겠지만 그 광고를 4년 만에 다시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뭐 반갑기도 했고.


오늘, 11월 24일 화요일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의 마지막 곡은 마돈나의 '보그'가 나왔다. 마돈나의 여러 멋진 노래 중에서도 가장 멋진 노래가 아닌가, 가장 멋진 뮤직비디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그 하면 보그지가 먼저 떠오르고 뮤직비디오 역시 최신의 유행을 말하기도 한다. 가사 속에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그레이스 캘리, 할로, 진 켈리, 그레타 가보, 디마지오, 마론 브란도, 지미진이 마돈나의 입을 통해서 마구 튀어나온다. 보그를 부르며 했던 안무는 우리나라의 광고에서도 너나없이 카피를 했다. 


내가 학창 시절 시끄러운 음악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균형을 잡아준 앨범 중에 마돈나의 앨범도 있었다. 마돈나의 앨범 몇 장을 가지고 많이도 들었다. 마돈나는 철저하게 타인의 곡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는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퍼포먼스와 스타일을 입히는 형식을 추구한다. 마돈나의 노래에 대한 열정은 소문이 났지만 ‘헝업’의 도입 부분에 아바의 노래가 쓰이는데, 아바는 자신들의 노래를 타 가수가 쓰는 걸 싫어하기로 유명했기에 그런 일이 그동안 없었다. 마돈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아바를 만나 당신들의 노래를 샘플링하고 싶다고 말했고 대선배, 대그룹 아바는 마돈나의 열정에 오케이를 한다. 그러고 보면 지구 상의 슈퍼그룹이나 해외 팝스타들이 한국에서 공연을 거의 다 했지만 마돈나는 아직 한국 공연을 한 적이 없다. 요즘은 뭐랄까 코로나 때문에 구설수에도 오르지만.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유명세를 탈 때 마돈나와 함께 그 노래를 연습했다. 그때 연습을 하다 지쳐서 둘 다 스테이지에 누워서 쉬고 있을 때 마돈나가 싸이에게, 본 공연을 할 때에는 내 몸의 어떤 부위든 터치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했다. 사생활이야 모르겠지만 아티스트적인 면모로는 악착을 넘어 악랄하게 무대를 점령하기에 지금까지 꾸준하게 인기를 누르고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마돈나의 '보그'를 오랜만에 라디오에서 들으니 반가웠다.


마돈나 대부분 엘피판이었는데 다 없어지고 카세트테이프로 하나가 남아있다

https://youtu.be/GuJQSAiODqI 

라디오에서는 일상의 정보도 많이 알려준다. 요컨대 손가락이 마주치는 부분에 정전기가 많이 일어나면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그곳에 한두 번 탁탁 건드리면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는다던가, 어딘가 출장을 갔을 때 옷을 다릴 수 없을 때는 샤워를 하고 나면 뿌연 수증기가 욕실에 있는데 그 안에 셔츠를 걸어두면 아침에 구김이 전혀 생기지 않는 정보를 알려주기도 한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한 시간마다 교통정보를 알려준다. 57분 교통정보를 마치면 누구였습니다,라고 리포터가 인사를 한다. 교통정보를 알려주는 리포터 중에 이름이 고경봉 리포터가 있었다. 고경봉 리포터의 목소리는 전달력이 강했고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튀지 않지만 라디오를 많이 듣던 사람들은 누구나 고경봉 리포터를 알고 있었다.

 

매일 고경봉 리포터의 교통정보를 듣다가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리포터를 해서 실시간으로 문자를 보내면 휴가 갔습니다, 라는 방송국 관계자의 답변이 오기도 했다. 이 고경봉 리포터의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고경봉 리포터의 남편 이름도 고경봉이다. 2006년 고경봉 리포터는 연말 라디오 시상식 특별상을 받고 그곳에서 지인을 통해서 같은 이름의 남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너(고경봉 리포터)의 카페에 회원으로 등록된 사람이다. 현재 회원 수는 달랑 두 명. 너(고경봉 리포터)와 회원 두 명, 총 세 명이 같이 만나자, 라는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사정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후에 남자 고경봉이 여자 고경봉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되고, 두 사람은 얼굴도 모른 채(여자 고경봉이 남자 고경봉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메일을 주고받다가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느낌이 잘 통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석 달이 지난 5월의 어느 저녁 7시에 만나서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해 11월 결혼식을 올린다.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다. 남편 고경봉은 한국경제신문기자였고 아내 고경봉은 리포터였다. 두 사람은 우리 이름은 ‘고경봉’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잡지사에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라디오는 이렇게 때때로 영화 같은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변화하되 변함없는 곳이 라디오, 그곳일지도 모른다.


http://mywedding.designhouse.co.kr/in_magazine/sub.html?at=view&info_id=422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