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즘의 과일은 무슨 짓을 당했기에 맛이 너무 난다는 것이다. '너무'라는 부사가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바뀌기 전의 의미로 '너무'다. 너무 높고, 너무 어둡고, 너무 커서 호러블 한 것처럼 과일에서 맛이 너무 난다.

품종개량에 대거 성공하여 재배한 모든 과일 광고의 제일 앞에 붙는 말이 당도가 최고라는 말이다. 보통 광고는 거품이 많은데 과일의 광고는 정말 거짓말하지 않고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도가 높고 깊다. 어마 무시하게 달다는 말이다.

오래전에는 수박이며 귤이며 달달한 과일을 과일의 바닷속에서 찾아야 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그래도 귤 정도는 예전처럼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섞인, 차갑고 쎄그라운 귤은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굳이 겨울에 미간을 좁히며 맛있게 먹었던 귤에게 까지 바늘과 호스를 꽂아서 온갖 실험을 하여 당도만 높은 슈퍼 귤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아직 맛 표현이 덜 했던 어렸던 조카에게 귤을 먹였을 때 그 새콤함에 자연적으로 표출되는 얼굴 표정이 지금의 어린이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귤이 슈퍼초사이어 귤이 되어서 전부 맛이 너무 나 버렸다. 단 맛이 처음에 강타하고 난 후 다음에 쎄그라운 맛이 따라와야 하지만 끝끝내 단맛 가득한 귤이 탄산수처럼 입 안에서 터지고 만다.

이럴 때 과일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기분이 든다. 올여름에, 아니 지난여름에 그렇게 좋아하는 포도도 사 먹지 않았다. 샤인 머스켓 때문인지 포도가 정말이지 꿀맛처럼 달디달았다. 어째서 모든 과일이 이렇게나 전부 맛이 너무 날 수 있을까. 키위, 자두, 체리, 복숭아까지 여름에 먹은 과일 모두가 이름만 다를 뿐 대체로 당도가 대단했다.

그래, 겨울을 기다리자. 겨울에는 사과도 있고, 무엇보다 쎄그라운 귤이 있으니, 라며 감염병이 도래한 세계에서 잘도 버텼다. 하지만 귤이란 귤이 이렇게도 모두가 하나같이 달아도 되는 것일까. 멀리서 보는 아파트처럼 개성이 말살되었다. 과일이 가지고 있던 어떤 아이덴티티가 몽땅 인간의 욕심에 의해 사라져 버리고 눈동자가 검게 되어서 갖은 괴물로 탄생되어 그린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아무튼 과일에게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는 배를 먹었는데 참 시원했고 참 달았다. 이 정도로 달게 과일의 맛을 내려면 약품이라든가, 그걸 피해 갈 수는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과일을 구입하면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렇지만 귤 정도는 그대로 넣었다가 까먹곤 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렇게 지금까지 지내왔고 여러 번의 겨울을 보냈다.

얼마 전에 임지호 요리사가 귤을 베이킹파우더로 닦아서 물에 씻어 귤을 까먹는 걸 보았다. 귤껍질에 농약이 묻어 있을 수 있으니 손으로 그대로 만지고 까서 먹으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귤을 까먹는 것에도 이렇게까지 복잡한 세계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귤을 씻어서 까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귤이란 검은 비니루 봉다리에 가득 담아서 사들고 와서 엎드려 만화책을 보면서 바로 쓱 꺼내서 까먹고, 티브이를 보면서 까먹고, 친구들끼리 모여 담요에 전부 발을 밀어 놓고 담요 위에 여러 개의 귤을 던져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귤을 까먹었다. 이제 이런 모든 것에 제동이 걸렸다. 귤에게, 과일에게 배신을 당하는 날들이 점점 오고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곧 나올 신곡의 노래 중 가사에 이런 말이 있다. 

‘생각을 하지 말고 생활을 하자’

너무 생각에 생각에 의한 생각을 하다 보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나중에 나에게 그대로 그 힘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의미를 두지 말고 시시콜콜해지자. 힘을 빼고 멍하게 있을 수 있으면 있자. 하루키의 말대로 물을 많이 마시고, 천천히 걷자. 그리고 오래 걷자. 그러다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요컨대 '여느 때와 다른 것'이라고, 여느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보다는, 여느 때는 무엇인가가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요즘의 과일처럼 삶은 우리를 자주 배신하며 종종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생각을 하지 말고 생활을 하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1-01-06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1-07 12: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ㅠㅠ 새우깡은 짠맛이 덜해지고, 자갈치도 짠맛이 죽어가는데, 과일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달기만 하네요 ㅎㅎ

2021-01-07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1-08 13:42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책 같군ㅇ요.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흔한 짜파게티 사진도 없어서 잡채로 대신 ㅎㅎ




쟁반짜장을 아직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아직 먹어보지 못했지만 쟁반짜장이 짜장면보다 마음에 드는 건 비벼져 있다는 것이다. 짜장면은 왜 직접 비벼야 할까.라는 게 오래전부터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같이 먹는 사람에게 했던 말이었고 대체로 묵살되었다. 짜장면을 비비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것에 토를 다는 건 안 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나처럼 미적거리는 인간에게 경종이라도 울리듯 조금만 지나면 면은 불어있다. 비벼져 있으면 면발이 짜장에 코팅이 되어 불는 속도도 늦어질 것이며 불어도 맛이 괜찮을 것 같은데 비벼야 하는 짜장면은 포장해서 십오 분만 가면 불어서 잘 비벼지지도 않는다. 마치 군대에서 나오는 짜장면처럼.

그러고 보니 짜장면 자체를 먹어본지도 오래되었다. 짜파게티는 가끔 끓여 먹지만 짜장면은 2018년도부터는 먹지 못했다. 바쁜 것도 아니면서 짜장면 먹은 지가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안 먹게 되는 건 계속 먹지 않는 것 같다. 때가 되어서 꼭 찾아 먹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맛있는 것도 어떤 분기점을 살짝 넘어가 버리면 안 먹게 된다. 나라고 하는 인간의 장점과 단점은 싫어하는 음식이 없다는 것이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딱히 그 음식을 먹기 위해 기를 쓰고 거기까지 가서 줄을 서서 먹고 하는 행위가 나의 문화권 안에는 없다. 싫어하는 음식은 너무 맵지만 않으면 다 먹는다. 비린내가 나건, 물컹거리건, 유통기한이 하루 이틀 지나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국밥을 포장해서 집에 왔는데 소금이나 양념장이 없어서 그냥 그대로 먹기도 했다. 싱겁지만 고소한 게 그 맛에 또 길들여지면 괜찮다. 

 

찾아 먹게 되는 것과 먹고 싶은 것과 매일 먹는 것과 먹고 싶은 걸 먹는 것과 먹고 싶은 것이 있지만 눈앞에 다른 음식이 있으면 그저 그 음식을 먹는 것과 먹고 싶지 않은 것과 먹기 싫은 것과 해 먹는 것과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과 먹는 것에 대한 관계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꽈리처럼 얽혀 있다. 아무래도 내가 찾아서 먹지 않고 안 먹게 되는 것에는 ‘귀찮음’이 꽃처럼 피어있다.

짜장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나도 짜장면을 좋아하고 짜장면에 얽힌 추억도 있다. 대학교 때 학교에 가다가 문득 그대로 발을 돌려 친구의 집으로 갔는데 그날 친구는 아버지와 함께 주택의 벽공사를 하고 있었다. 보로쿠 여기에 올리고! 하는 친구 아버지의 지휘에 따라 그날 벽돌을 벽에 쌓아서 시멘트를 바르는 일을 했다. 몇 시간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어서 친구 아버지가 중국음식을 시켜주었다. 친구는 잡채밥을, 나는 볶음밥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짜장면 세 그릇을 주문했다. 뭐 그래도 신문지를 펴고 둘러앉아 먹는 짜장면은 맛있었다.  


2018년 이전에는 내가 다니는 활동반경 내에 중국집이 있었다. 그래서 포장을 해서 집으로 들고 가서 먹거나 그곳에 앉아서 냠냠 거리며 먹었다. 자주 가게 되면 주인과 유대가 쌓이게 된다. 그러면 짜장면을 시키면 탕수육이 조금 딸려 나오기도 하고 혼자서 앉아서 소주를 홀짝 거리면 같이 앉아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중국집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어쩐지 중국집에 가고, 중국집에 들러 포장을 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내 곁에서 아주 멀리 가버린 것이다. 


쟁반짜장이 마음에 들지만 쟁반짜장을 먹으려면 움직이는 활동 반경 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걸 결심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것 같다. 맛있는 걸 먹겠다고 활동반경을 벗어나야 해? 에이. 라며 결론을 지어 버린다. 주로 가는 곳만 늘 가는 습관 때문에 불편하기는 하지만 득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자주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골이 되고 그러다 보면 주인이 알아서 챙겨 준다. 나처럼 귀찮음이 밑바닥까지 깔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이다. 알아서 챙겨주기에 귀찮을 일이 1도 없다. 


이 좁은 나의 생활 반경 내에 쟁반짜장은 없다. 쟁반짜장은 비벼서 나온다. 쟁반짜장은 귀찮음에서 벗어난 짜장계의 신성일 지도 모른다. 맛도 분명 좋을 것이다. 먹어보지 못한 취두부의 맛을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확실하게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귀찮다. 반경 내에서 굼벵이처럼 움직이며 아코디언처럼 등을 접었다 펴가면서 아, 귀찮아를 외친다. 며칠 만에 날이 흐려졌다.


시애틀 스벅 1호점 텀블러, 세상에는 귀찮지 않은 것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호빵이라는 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과거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라는 게 꼭 옛날 극장에서 하는 영화 사이의 예고편의 필름처럼 촤르르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과거로 걸어가는 순간 필름은 거기서 잠시 멈춘다. 손을 쭉 뻗어 필름을 뒤로 돌리면 사람이 거꾸로 걸어가고 물이 위로 솟아오른다. 술을 잔뜩 마시고 머릿속을 찰랑거리는 공백으로 만든다. 그러고 나면 과거에서 후후 불어가며 먹었던 호빵이 도사리고 있다. 마당은 새로 산 도화지처럼 하얀색으로 마를 대로 말라 차갑고 딱딱하다. 해는 며칠째 나지 않아 잿빛 하늘이 실패한 얼굴을 하고 있고 바람도 없다.

겨울인데 겨울과 겨울 사이의 푹 꺼진 계절처럼 느껴진다. 오분마다 공간의 밀도가 달라진다. 부풀었다 팽창했다, 구에 가까워졌다가 평행해졌다가, 바지가 커졌고 겨울 장갑이 촌스러워졌다. 장갑은 장갑으로 마땅한 책임을 다했다. 그저 손의 보온에만 그 기능을 다 할 뿐이었다. 손으로 쥐고 말아야 여타 모든 기능은 그 밖의 일들로 치부해버린다. 록키가 되어 그를 따라 해 본다. 올바르고 정의감에 불탔던 이탈리아 종마 록키 발보아. 공간의 높은 밀도 때문에 금방 지치고 만다. 장갑을 뺐더니 손바닥에 땀이 물처럼 고여있다.

공허했던 속을 채워준 건 호빵일지도 모른다. 겉은 하얗고 속은 검은, 겉과 속은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우리는 호빵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을지도 모른다. 호빵이라는 세계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호빵을 먹는 행위와 호빵의 맛으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일반적인 곳에서는 먹는 행위로 인해 맛이라는 게 따라오지만 과거로 들어가면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고 만다. 행위는 그대로 둔 채 맛이라는 것이 먼저 입안으로 들어와 버리는 기분이 든다.

손에 들고 있는 호빵은 과연 무엇인가. 호빵을 반으로 갈라 보지만, 호빵은 반으로 갈렸지만 갈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갈라진 호빵은 호빵을 반으로 가른 행동만이 거기에 있을 뿐 맛도 그리고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또 하나의 객체(object)가 되어 있어서 호빵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가르고 갈라도 호빵은 그대로다. 호빵에서 우리는 떠나고 만다. 아직 찰랑거리는 술이 머리의 공백을 채우고 있으니 현재의 호빵을 갈라 본다. 호빵의 겉과 속은 같다. 새하얗고 또 희다. 혹독한 겨울일수록 호빵은 호빵다워야 한다. 촌스러움을 간직한 채 시간을 멈추고 호빵을 후후 불어 먹고 싶지만 조카는 이미 커 버려 앤 마리의 음악에 심취해있고 심해 상어는 꼬리를 나부끼며 저 멀리 가버렸다.

가난해서 호빵이 더 맛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난이라는 건 부끄럽지는 않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재미로 반으로 갈아야 만 하는 지금의 호빵은 찰랑거리는 머리의 공백을 요만큼 매워준다. 그래서 호빵은 참 기이한 음식이다. 혹독한 겨우내 멋지게 옆에 있다가 멋진 봄이 오면 저 멀리 혹독하게 가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지금은 호빵을 먹을 수 있다. 아직 하루는 상처 받지 않았고, 손상받지 않은 시간이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행복한책읽기 2021-01-0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교관님은 저 글들을 압축해 시를 쓰심 참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

교관 2021-01-04 11:41   좋아요 0 | URL
그럴 능력이 저에게도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감사합니다. 새해부터 너무 좋은 칭찬을 듣네요!!
 


라디오에서 좋은 말을 들었다. 좋은 말이라는 건 평소에서 약간 벗어나서 지내다 보면 그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들이 라디오에서 나올 때 좋은 말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질병은 시간의 낭비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몹시 안타까워하며 심지어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현재’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현재란 몇 시간? 며칠을 말하는 것일까.


조금 있다가, 할 때 조금은 얼마 동안을 말할까. 금방이면 돼, 할 때 금방은? 찰나는? 이따 봐, 할 때 이따는?


과연 시간이라는 게 인간의 영역 안으로 끌어 들여와서 숫자로 표기를 해놨지만 그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지정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낭비를 싫어하지만 생활 속에 시간의 낭비는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깊이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찰나를 찾아보면 75분의 1초, 약 1.6초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찰나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우리가 ‘1.6초’를 넣어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유튜브 조금만 볼게,라고 했을 때 엄마는 또 시간의 낭비가 저절로 머리에 대입이 된다. 곧, 갈게.라고 말하는 남편이 3시간이 넘도록 아직 회식자리에 있으면 아내는 시간의 낭비가 또 스치고 지나간다. 그럼 시간의 낭비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시간의 낭비를 줄이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한해의 끝에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대체로 시간의 낭비가 일상을 파고 들어서 후회를 한다.


그리고 수순처럼 신년에는 해야 할 것들을 나열한다. 꼭 해내야지, 하면서 계획을 짠다. 하지만 내년의 오늘이 되면 어김없이 오늘처럼 똑같이 시간의 낭비로 인해 후회를 한다. 아무것도 한 거 없이 한 살의 나이를 먹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낭비를 줄이려면 뭘 하면 좋을까.


신년에 하고 싶은 것을 적기보다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적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저씨'에도 그런 대사가 나왔지만, 어릴 땐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행복하게 보낼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면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매일매일 떠오르는 해처럼 솟아오른다. 한두 번이 아니다. 매일 행복하게 보내기는커녕 불행하지 않게 하루를 견디면 다행이다.


오늘도 기사에는 통장잔고에 130억이 있는 스타강사의 소식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돈이 많다고 해서 하고 싶은 걸 전부 다 하면서 살 수는 없다. 돈이 많다는 건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돈이라는 건 필요하다.


[코로나로 인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오랜 기간, 이렇게나 처절한 고통에 처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감염병 전문가들이 그런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는 했었지만 스스로의 체감을 통한 확신적 예측이었다기보다는 과거의 유사 사례로부터 학술적으로 추정하는 경고에 가까웠죠.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례를 체험한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이에 견줄만한 규모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것이 가장 최근의 것으로만 따져도 무려 100년도 넘은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란 현실을 냉정하게 직면하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소망의 렌즈를 끼고 현재를 바라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많은 전문가들조차 쉽사리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게,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백신의 개발입니다. 지금까지의 백신은 장장 10년가량을 투자해서야 손에 얻을 수 있었고 어떤 소모 물질이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가지리라고 정확히 예측해내는 것은 과학의 영역 이상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19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강했지만 그에 대응하는 백신은 예상보다 일찍 현실화됐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코로나 19가 시작됐을 때보다 더 불안해지고 마치 암흑 속에 놓인 것 같은 시점보다도 더 많이 다투고 미워합니다. 그간 많이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막상 방법을 얻고 희망을 품게 되니 더 성마른 마음이 드는 것이겠지요.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개혁의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진할 때도 후퇴할 때도 있지만 크게 보면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얻어온 흐름인데 상황이 이보다 더 안 좋았던 시점보다도 더 크게 절망하고 심지어 원망하고 다그칠 누군가를 우리 안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잠시 멈춰 생각해봅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의 초입보다도 더 절망적인 조건에 처해있는 걸까요. 또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크게 추락했던 그 날들 보다도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요. 2020년 12월 29일 정준희의 생각, 아니 정준희의 질문이었습니다.]


정준희 교수의 이 짤막한 브리핑을 들으며 지금 처한 상황은, 지금 우리가 놓인 이 절망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서로 원망할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아야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된 데는 펜데믹이라는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에 놓인 보잘것없는 나약한 한 개인으로써 절망이라는 거대한 무게가 자꾸 눌러서 그럴지도 모른다.


두 달 후보다 내년이 먼저 와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신년의 계획을 해야 할 것보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낫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건 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시점, 이 시국, 이 사태에서 깊은 정적 속에 있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얼마 전에 스위트 홈을 다 봤다. 스위트 홈은 당분간 인터넷 세계에서 많은 풍문을 남길 것이다. 영화는 괴물을 피해 집단을 만들어 지내는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비춘다. 사람의 본모습을 말한다. 영화 미스트에서도, 미드 컨테이전이나 워킹 데드에서도 사람에 대해서 다루었다.


서로가 믿어야 함께 지낼 수 있지만 마음은 불신하고 있는 모순의 형태를 지닌다. 나는 감염이 되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감염이 될 수 있기에 감염자가 완벽하게 괴물이 되기 전까지 벽안에 가둬두는 방식으로 곁에 두려 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감염이 될 수 있기에. 그렇기에 감염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교묘하게 감염자들과 같이 지낸다.

이런 모습은 현재 실제의 우리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선별 진료소에서 무료로 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음성 판정을 자신의 sns에 올리고 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양성이 나왔어도 올렸을까. 나는 음성을 받았으니 안심이라고 양성 판정자들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버리는 것을 수도 있다. 음성 판정을 받은 사람 중에 매일 사무실에 나가야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 한 번의 검사가 끝이 아니다. 또 받고 또 받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sns에 올릴 수 있나. 그러다가 덥석 양성이라도 나오면 똑같이 올려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감염병 자체보다 감염이 되었을 때, 감염이 되기 전에 나를 대하던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나를 다르게 대하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양성 판정을 받은 확진자는 다 나았어도 사람들이 피한다. 걸렸다가 나은 당사자도 나 때문에 혹시, 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피한다. 말 그대로 일상이라는 게 파괴되고 깨져버린다. 현재 그토록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소원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이제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음성 판정을 받은 sns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 놓고 더욱 소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옳은 선택이라도 올바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꼭 말해주고 싶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오늘부터는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내 팔 안에 있는 것들을 더 끌어안고 그것들에게 더 마음을 주자. 새책도 좋지만 읽던 책을 한 번 더 읽고, 오늘도 한 끼 먹은 것에 좋은 마음을 갖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위의 사진과 밑의 사진의 시간차가 좀 있다. 스파이디들이 좀 늘었고 히데의 피규어도 있다. 



우리는 하릴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걸었다는 것이 중요했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적고 있었는데 누가(매일 보지만 그저 인사만 하는 옷가게 여자 사장님) 와서 나에게 참 특이하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데도 택배가 옷가게로 배달되어서 옷가게 여자 주인이 들고 왔다. 잘 모르겠지만 글 적느라 주위의 소음에 소홀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넌 참 특이하구나, 라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이하다는 말은 이상하다는 말이었다.


성인이(위의 사진처럼) 되어서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도 장난감, 프라모델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가난해도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어떻게든 사주려고 했다. 나는 어렸지만 비싸고 좋은 장난감은 조르지 않았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 있는, 문방구에서 파는 프라모델을 좋아했다. 앉아서 프라모델을 만드는 그 시간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러고 있으면 아버지가 같이 앉아서 프라모델 만들기를 함께 했다. 그 어린 시절에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와 함께라는 것이 정말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문방구에 가서 장난감을 고르고 그것을 손에 쥐고 오면서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집에 와서 볕이 드는 곳에 앉아서 같이 장난감을 만든다. 옆에서 동생이 얌전하게 앉아 있고 어머니는 떡국 같은 것을 끓이고 있다. 장난감을 만들다가 내가 만들지 못하는 부분은 아버지가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어릴 때에도 집에 있는 찬장에 장난감이 가득했는데 요즘도 진열장에 피규어가 가득하다. 진열장 두 개가 더 있는데 그곳에도 피규어가 있고 옷장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피규어도 좀 더 있다. 어린 시절에도 아이들이 집에 그렇게 놀러를 왔다. 너는 참 특이하다면서. 어른이 되어서 진열장에 피규어가 가득하니 역시 특이하는 소리를 계속 듣게 되었다.


피규어는 내가 좋아했던 만화의 주인공들 위주의 피규어다. 코난, 라나, 포비나 빨강머리 앤, 은하철도 999,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 같은 주인공의 피규어가 아주 좋다. 이런 피규어는 이제 잘 구할 수도 없다. 그리고 꾸준하게 좋아하는 건 역시 스파이디들이다. 스파이더맨이 좋다. 다른 슈퍼파워를 지닌 주인공들에 비해 좀 떨어지는,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들지도 못하지만 늘 곁에 있어서, 뭐 그런 스파이더맨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슈퍼맨보다 더 좋아한 것 같았다. 


가끔 코난을 좋아하는 어른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사실 미래소년 코난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드러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이나 인더스트리아의 거대한 음모나 그런 이야기들. 포비는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도마뱀 꼬리를 준다던가, 덕분에 라나는 기절을 하기도 하고. 또 은하철도 999는 더 난해하고 심오하지만 그걸 나눌 수 있는 곳은 인터넷밖에 없다. '빨강머리 앤'은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으로 시리즈 3까지 나왔는데 참 재미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가 길다면 만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순전히 개인적인 방법이지만) '빨강머리 앤'을 두 편 보고 소설을 읽는다. 그러면 두 편 정도가 소설 한 3, 40페이지 정도를 차지한다. 대사도 거의 똑같기 때문에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 그림의 작화가 마음에 들어오는 이유 중 하나는, 장면 설정이나 레이아웃을 젊은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았다. 그 외 당시 최고의 작화 화가들이 엄마 찾아 삼만리에 매달렸다  총 52화로 마르코의 엄마 찾아가는 길은 험하고 고단하고 지치고 힘들지만 울며 웃으며 엄마를 찾으러 간다. 마르코의 엄마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정부 일을 하러 갔는데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머나먼 길, 삼만리라는 어마어마한 길을 엄마 찾아 혈혈단신으로 가게 된다. 벌써부터 눈시울이 따가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시대 상황을 찾아보면 마르코의 엄마가 왜 그 먼 곳까지 갔는지 알게 된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밀을 수출하는 신흥 부국이었다. 때문에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이민자들을 오냐오냐하며 받아들였다. 마르코가 얼마나 긴 거리를 가느냐 하면 1880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출발하여 마르세유를 거쳐 바르셀로나, 말라가, 다카르를 지나 대서양을 종단한다. 그리고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나 바이아블랑카에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코르도바, 투쿠만에서 결국 엄마를 만난다. 엄마를 만날 때 정말 눈물이 철철 난다.


그리고 마르코는 반대 여정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마르코가 물어물어 힘겹게 엄마가 있는 집에 가면 이사를 가 버리고, 또 미칠 듯 엄마가 있는 집에 가면, 어떡해? 또 이사를 가버렸다. 또 찾아가면 일주일만 일찍 오지, 같은 말만 듣는다. 얼어 죽을 놈의 이사. 이렇게 마르코가 다닌 거리가 25,910 킬로미터다. 지구 둘레의 70%를 돌아다녔다. 조그마한 몸으로. 마르코의 여정도 딱하지만 시작하는 마르코 주제가가 '시' 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끝 부분에서 혈관 터질 뻔하지만 이 노래는 한 편의 장엄한 시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 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 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아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리


삼만 리는 끝이 없다. 정말 끝없다.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을 읽어봐도 맨발로 전라도까지 가는 길도 험난하고 끝이 없어 문둥이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 끝에는 하나만 남는데, 마르코는 삼만 리를 엄마가 보고 싶어 지치지 않고 간다. 마르코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뱃사람, 철도원, 서커스 단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 소매치기 등 인간 군상은 죄다 만난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 마르코의 이야기는 여행하는 로드무비 식의 형식이 아니라 마르코라는 어린아이의 성장기다. 그래서 이 만화를 유심이 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만화 주제곡 주제에 산 설고, 물길 설다는 표현도 참 애틋하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은 울먹이며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이 가사는 당시에 너무 슬퍼서 개사가 되어서 다시 불렸다. 요컨대 ‘엄마가 계신 곳 내가 거기 있다’로 바뀌었다. 주제가는 두 곡이다. 이 슬픈 버전이 있고 빠른 버전으로 한 곡이 더 있다. 원작은 이탈리아의 아동작가 에드몬드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실려있던 단편 ‘아페 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인데 그걸 주욱 늘려서 52부작으로 만들었고 엄마 찾아 삼만리는 극장 애니메이션 편도 있다. 극장판도 좋으니 보기 바람. 


라고 이야기를 하면 참 특이하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요즘(근 10년 정도)도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조깅을 하고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정도의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조깅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단하구나, 어떻게 매일 그렇게 할 수 있지? 같은 소리를 듣는데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듣던 내 귀에는 이상하구나로 들려 버린다. 하루가 24시간이고 그중에 1시간 정도 조깅을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일까 생각해보지만. 우리는 매일 하는 일들이 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배설을 하고, 집으로 가고, 집에서 나오고. 우리가 그런 일에 대단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뭐 하지만 좀 이상하게 보이면 어때,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나는 그만이다.


작년인가 해운대 고깃집에서 일행과 함께 고기를 먹었다. 고기가 다 익었는데 일행이 계속 젓가락을 사진 찍고 있는 것이다. 젓가락 손잡이 부분을 폰으로 유심히 이리저리 찍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젓가락을 찍고 있었다. 웃기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해서 나는 그 표정을 몰래 찍었다. 일행은 젓가락의 무늬를 찍고 있었다. 그게 미묘하지만 식당마다 젓가락, 쇠젓가락 무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식당을 자주 가지 않아서 나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너 참 특이하구나,라고 해버렸다. 그랬더니, 그 말 오빠가 자주 듣던 말 아니야, 라며 일행이 웃었다. 남들에게 듣던 말을 나도 하다니 결국 나도 그저 그런 인간이었다.


일행은 클래식 공연에 관한 일을 한다. 그들을 섭외하고 공연장의 세세한 부분(음향이라던가 장비 그런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공연이 잡히고 연주회가 시작되면 그 기간 동안 합숙을 하듯 공연자와 함께 공연장을 뒷받침하는데 그 세계가 참으로 재미있고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들의 험담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드뷔시의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드뷔시의 곡 중에 라메르가 있다. 드뷔시는 살아생전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건너온 그림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파도’를 보고 그대로 ‘라메르’를 작곡했다.


그 곡을 듣다 보면 기분 나쁠 정도로 파도가 치는 광경과 그 속에 몸이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더 드러나지만 곡 전체에 깔린 일본풍의 기이한 느낌은 소름까지 돋는다. 어째서 달랑 그림 한 장을 보고 이렇게 작곡을 할 수 있을까. 드뷔시는 정말 특이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고깃집에서 ‘라메르’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이상한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