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는 하여간 재미있는 곳이다. 들어가면서부터 이미 뭘 구입할지 선택 물품이 정해져 있고 그걸 다 고르고 나면 어디 어디 코너로 가서 무엇을 구경할 것인가가 프로그래밍이 된 동선이 있다. 동선을 따라서 다니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

주차를 하고 마트에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전에는 옷 가게들이 있고 마고리엄의 장난감 공장 같은 곳이 있다. 주인이 세계를 떠돌며 모아놓은 것 같은 상품들을 파는데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물품들을 구경하느라 마트에 내려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기차나, 말처럼 생긴 코끼리나 허공을 빙빙 도는 물고기 모빌 등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끈다.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대형 마트에 서점이 다 있어서 서점에 들어가서 책 구경도 했었는데 어느 날 모든 대형마트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마트 속에서 서점이 싹 사라졌다. 대형마트는 대형 마트답게 세일을 했는데 책도 그랬다. 그래서 마트에 딸린 서점에 자주 가다 보면 앉아서 책도 읽고, 책도 저렴하게 구할 수 있고, 적립도 하고, 이래저래 괜찮았는데 싹 없어졌다. 서점 코너에는 항상 엄마를 따라온 아이가 앉아서 그림책을 보는 모습은 늘 정겨웠다.

마트로 내려가서 그로서리 쇼핑을 한다. 컵라면과 라면은 늘 탑처럼 쌓여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저 쌓여있는 라면탑을 달려가서 몸으로 무너트리고 싶다. 영화를 보면 잘도 그러는데 실제로는 그러면 안 되겠지요. 라면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수많은 종류의 라면 중에서 마음에 드는 라면을 이만큼 집어서 바구니에 넣고 싶다. 일을 마치고 밤에 가니까 초밥은 늘 세일을 한다. 그래서 먹고 싶은 연어 초밥만 한 통 담아서 넣을 수 있다. 마트 초밥은 먹을 게 못 되니 제대로 된 초밥을 먹으라는 말을 왕왕 듣는데 나는 마트 초밥도 맛있다. 제대로 된 초밥집에는 제대로 된 시간에, 제대로 거기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귀찮다. 그에 비해 맛이 썩 떨어질지 몰라도 언제나 가면 그 자리에 초밥이 있어서 쓱 건져오면 된다. 무엇보다 내 입맛에 마트 초밥도 맛있다는 것이다. 


멍게도 꽤 먹을만하다. 멍게는 집에 오면 바로 미나리와 고추장과 함께 밥에 넣어 슥삭슥삭 비벼서 먹으면 맛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고래고기 수육도 맛볼 수 있다. 마트에서 파는 고래고기 수육은 비린내가 아주 많이 나기 때문에 먹고 난 후 다른 가족의 반응이 격해질 수 있다. 양치질로는 어림도 없으니 각오를 해야 한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몇 해 전에는 물개 기름도 팔았다. 물개 기름을 숟가락으로 떠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고래나 물개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살아야 하니 몸을 보온하기 위해 기름이 가득하다. 요즘은 알약으로 영양제 형태로 나오는 모양인데 아무튼 그런 것도 팔았다. 대단히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피규어를 좋아하니까 피규어 코너를 가면 건담이나 마징가 프라모델을 비롯해서 진열되어 있는 모델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마트에서든 아이들을 붙잡기 위해 이런 피규어 장식과 파는 곳이 있지만 규모가 전부 다 다르다. 내가 돌아가면서 들리는 마트는 세 군데로 각 곳의 피규어 코너만 놓고 봤을 때 모두가 그 담당 직원 때문인지 확고하게 색이 다르다. 구입하지는 않을 테지만 지난번에 왔을 때 없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버전의 마징가 프라모델이 나오면 집었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예정에 없던 물품이므로 가격이 저렴해도 서서 아주 고민을 하게 된다.

마트에 가면 늘 구경하는 것이 어항 속 열대어다. 10시가 되면 어항에 보자기를 덮어 씌운다. 열대어들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그전에 실컷 구경을 해야 한다. 열대어들의 유영을 멍하게 보는 건 아주 평안해진다. 집에서 구피들을 키웠을 때에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느새 새벽이 되어 버린다. 열대어들은 조금 큰 녀석들보다 작은 녀석들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해주며 잘 지내보자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인간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어두워서 다 잔다고 하지만 또 그때 미워하는 서로에게 대들어 싸울지도 모른다. 

어항 속에 반드시 물고기가 없어도 된다. 그저 한들거리는 수초만 바라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다. 나는 그만큼 재미없는 인간이다. 나만큼 재미없는 인간은 재미없는 것에서 또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평소에 심심하다던가 지루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열대어를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높은 굽과 날씬한 다리를 덮은 가죽바지, 리얼 폭스의 코트가 대형마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여자였다. 하지만 수수한 화장의 여자가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1년 전에 찾았던 룸살롱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였다. 미인이라 할 만큼 예쁜 얼굴은 변함없었고 큰 키 덕분에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마트 2층의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잔했다. 나는 커피 원액을 주문했고 여자는 녹차를 마셨다. 계산은 여자가 했다. 나는 요즘도 잘 다니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이제 룸살롱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여자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매춘부에게 육체적인 사랑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욕망의 주체인 남자는 육체의 사랑에 집착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한 손님에게 그만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침에 손님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돈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의 주체는 타자였다.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주체로 보고 욕망에 맞춰 나가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님을 사랑하게 된 후, 욕망의 주체가 자신이 된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마찰이 일어났다.


그녀의 마음속에 또 다른 자아라고 하는 슈퍼에고를 느끼고 손님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손님에게 그녀를 그저 욕망의 분출구일 뿐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까지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떻든 마트라는 곳은 재미가 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가게 되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재미있는 대형마트도 언젠가부터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오면 한 시간 반 정도가 너무 쉽게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으로의 귀가가 늦어지기 일쑤다. 


오랜만에 들린 마트에서 어항 구경도 끝이 나고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서 먹고 싶은 것을 담아 왔다. 튀김과 닭발 편육을 담았다. 닭발 편육은 매콤한 맛이다. 밥과 함께 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는 맛이 좋다. 편육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고 간장에 빠진 양파를 곁들여 오물오물거리고 있으면 음음 다음에 또 들러야지, 하는 생각이 순간 든다. 


튀김은 식어도 괜찮다. 치킨과 튀김은 뜨거울 때 후후 불어서 아흐 같은 소리를 내면서 먹는 게 맛있지만 식어도 맛있는 게 튀김이다. 담아주는 간장에 겨자를 뿌려서 거기에 찍어 먹는다. 나는 튀김을 항상 김말이와 오징어튀김만 집어서 온다. 김밥 튀김을 좋아하지만 마트에는 팔지 않는다. 김밥 튀김은 조깅하면서 오는 전통시장에서만 판다. 튀김 몇 개는 그대로 먹고 몇 개는 밥 위에 올려서 먹는다.  뭐든 튀기면 맛있다. 그 맛있는 튀김을 밥과 함께 먹으니 맛있을 수밖에 없다. 작은 행복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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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2-01 12:44   좋아요 0 | URL
두부는 사진에 안 나왔을 뿐 거의 매일 밥상 위를 채우고 있어요 ㅎㅎ
 


두부를 거의 매일 먹는 나로서는 하루키의 두부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하루키는 신주쿠 술집에 굉장히 맛있는 두부를 내놓는 집이 있는데, 처음 갔을 때 너무 맛이 좋아서 한꺼번에 네모나 먹고 말았다고 한다. 간장이나 양념 같은 것은 일체 치지 않고 그냥 새하얀, 매끈매끈한 걸 꿀꺽하고 먹어치우는 것이라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말하고 있다.

두부 하면 하루키다. 그는 갓 사 온 두부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하룻밤 지난 두부를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귀찮으니까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주의가, 방부제라든가 응고제 같은 것의 주입을 초래한다고 했다. 두부 장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에 된장국에 넣으라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열심히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건데, 모두들 아침에 빵을 먹는다든가, 슈퍼에서 파는 방부제가 들어 있는 좋지 않은 두부를 사 먹거나 하니까, 두부장수 쪽에서도 의욕이 떨어져 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두부를 만드는 우수한 두부 가게가 거리에서 한 집 한 집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고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렇지만 공장 두부도 좋아한다. 손두부(어촌 시장의 손두부 집은 많이 사라졌는데 백화점에서 손두부를 만들어서 팔고 있다. 생각해보면 묘하다)를 먹을 때도 있고 공장 두부를 먹을 때도 있는데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공장 두부도 공장에서 갓 나온 두부를 먹으면 눈이 번쩍할 만큼 맛있다. 단지 전국 각지의 슈퍼와 편의점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처리를 하는 것이다.

두부는 인간이 잠들어 있는 바다에서 인간의 땅으로 온다. 맛있는 두부는 간장도 양념도 필요 없다. 갓 나온 두부는 두부 본연의 맛을 꽉 쥐고 있기 때문이다. 두부 역시 간수로 만들어진다. 간수가 중요하다. 간수를 맞추지 못하면 두부의 생명은 사라지고 만다. 두부는 두부 장수의 뒤틀어진 팔의 생명을 나눠 정당한 맛을 낸다. 오직 적요한 시간, 그제야 으스러지지 않고 두부는 근사한 언어를 지닌 채 인간의 곁으로 온다.

밥상 위에 두부가 사라진다는 건, 카메라에 의존하는 사진쟁이는 피사체로 사진을 꽉 채우고, 어설픈 그림쟁이는 여백을 두려워하고, 사색 없는 글쟁이는 수식어가 많은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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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1-30 12:3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니요 못 먹어 봤어요. 저는 슈퍼 같은 곳에서 파는 공장 두부도 맛있어 하구요. 손두부도 맛있어하고 특별히 가리는 건 없어서 ㅎㅎ 두부를 거의 매일 먹기 때문에 슥 집을 수 있는 곳에서 파는 두부면 들고와서 먹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양화대교’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난리 났었다. 너도나도 양화대교 노래가 좋아서 빠져들었다. 거기에 아버지까지 들어가니 노래에 뭔가 신화가 입혀졌는지 아버지의 힘듦과 해가 지는 양화대교를 건너는 택시까지. 사람들은 노래 ‘양화대교’에 홀린 듯 자신의 그 어설픈 목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사람들만큼, 티브이에서 떠들어대는 것만큼, 그 노래에 빠져들지 못했다. 아니 빠져들 수 없었다. 일단 지방에 살고 있어서 양화대교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노래에서 처럼 양화대교를 건너며 슬픔을 느끼는 노래에 동참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새벽에 사탕을 두고 택시를 운전하러 나가고 전화를 하면 늘 양화대교라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막둥이의 사연이지만 내 친구 중에 아버지를 택시기사로 둔 막둥이가 있었다. 노래만 들으면 택시기사는 전부 가난하게 사는 것처럼 들리지만 택시기사를 둔 내 친구는 가장 빨리 아버지가 아파트를 구입해서 아파트에 살았었다. 게다가 친구 아버지는 노주현의 젊은 시절처럼 잘 생기고 멋진 데다 위트와 유머도 겸비했다. 고등학생이었는데도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는 것에 대해서 나무라는 것도 없었다. 천천히 몰면 오토바이만큼 안전한 녀석도 없지, 사고만 나지 말아라.라는 말도 해주었다. 멋진 아버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택시를 몰다가 점심은 집에서 늘 가족들과 먹었다. 친구와 친구의 누나가 집에 없을 때는 부부가 나란히 앉아 맛있는 점심을 먹고 소화를 좀 시킨 후 또 택시를 몰러 나갔다. 그런 모습이 나는 정말 부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양화대교의 신화에 나는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 자이언티의 목소리가 좋다고들 하지만 왜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 못할까.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의 가수는 성시경이나 서문탁이다. 물론 더 많지만 그런 목소리의 가수가 좋다. 양화대교의 노래에 흥! 했던 이유 중 가장 는 이유는 티브이에서 온통 떠들어대는 연예인들의 호들갑 때문이다. 맹신에 가까웠다. 아니 모두가 그러니 방호벽을 더 칠 수밖에 없었다. 좋은 노래는 좋은 사람처럼 노래가 가지는 힘 덕분에 가만히 둬도 사람들 마음에 들어찰 수 있는데 너도나도 티브이에서 떠들어 대는 통에 나 같은 인간은 전혀 양화대교의 노래가 좋다고 느끼지 못했다.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나올 때도 그랬다. 할리 퀸은 최고였다, 할리 퀸이 영화를 살렸다, 볼 건 할리 퀸 밖에 없었다. 정말 끝내주는 할리 퀸이었다. 시사회를 본 사람들이 전부 그런 소리를 해댔다. 특히 빠지지 않고 보는 방구석 1열에서 임필성 감독까지 그런 소리를 해댔다. 그러니 더더욱 그 영화가 보기 싫어졌다. 분명 그렇게 난리 법석 떨 만큼의 영화가 아니라는 건,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 그렇게나 떠들어 댈 만큼의 영화 속에서 멋진 할리 퀸이 아님에도(왜냐하면 다른 슈퍼파워를 지닌 히어로가 아닌 그저 인간이다) 너도나도 할리 퀸, 할리 퀸. 당시에도 이런 글을 한 번 올린 적이 있었다- 법석 떨지 말자, 소란 피우는 캐릭터만큼 제대로 된 캐릭터를 본 적 없으니까. 너희, 난리 소란 법석 떠는 인간들 때문에 가만히 두면 이만큼 해낼 캐릭터나 영화들이 더 망하게 된다.


이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배우들이 나오는 연예가중계 같은 프로그램에서 배우들에게 한 번 울어주시겠어요?라고 부탁하면 배우들은 몇 초만에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 리포터와 사람들이 박수를 차치며 연기를 무척 잘하는 것처럼 말을 한다. 눈물을 몇 초만에 흘리는 것과 연기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데 마치 눈물을 금방 쏟아내는 배우는 연기를 아주 잘한다는 공식을 그런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에게 심어놨다. 그리하여 눈물을 몇 초만에 흘리는 배우가 나왔는데 연기가 생각보다 형편없던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배우가 나오면 리포터가 눈물 주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리포터는 빨리 갈아치우자. 아니 작가는 갈아치우자.


티브이에 나와서 기가 막히게 하는 말은 맹신하지 않는다. 유명한 의사들이 매일 나와서 하는 소리들, 기본적으로 의사는 병원에서 환자를 돌봐야 하지만 인기에 맛을 들인 의사들이 매일 나와서 그저 하릴없이 떠들어댄다. 마치 큰일 난 것처럼. 오늘[며칠이 지났지만] 오전에는 눈썹 건강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떠든 모양이다. 이제 하다 하다 별. 그것처럼 기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맹신하지는 않는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기기는 대략 4대 정도다. 데스크톱이 있고, 아이패드가 있고 폰이 있고 유심이 없는 폰이 있다. 데스크톱을 빼고는 전부 애플 제품으로 워드로 작성해서 메모장에 옮겨 놓으면 여기저기 각 기기로 확 퍼진다. 연동이 된다. 그래서 하나를 들고 나오지 않거나 두고 나와도 다른 기기로 연동된 글을 다시 이어서 쓰면 된다. 그리고 그날그날 작성한 글 중에 개인적으로 좀 중요하다고 생각한 글은 메일로 옮겨서 데스크톱에 옮겨 놓는다. 이렇게 데스크톱에 옮겨 놓는 이유는 기기를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기 전, 긴 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메모장에서 작성을 했는데 그러면 바로 다른 기기들에게 퍼져나간다. 그런데 누구나 한 번쯤은 노트북으로 문서작성을 하다가 갑자기 어? 뭐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꺼진다거나 기껏 작성해 놓은 문서가 날아간다거나. 그렇게 되면 굉장히, 몹시 화가 나고 어디에 분노를 표출해야 할지 난감하다. 순간이지만 정말 어떻게 상황 대처를 해야 할지 난감하다. 울고 싶기도 하고 기분이 확 떨어진다. 무적 같은 애플 기기도 그렇다. 나는 메모장에 3천 개 정도의 메모가 있고 그중에는 하나의 메모에는 워드 100장이 넘어가는 분량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많다. 분명 메모를 해서 다른 기기로 옮겨 간 것까지 확인하고 다음 날이 되었는데 작성해 놓은 글이 없어진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 옮겨진 것을 확인 한 다음 블루투스나 와이파이를 다 꺼버린다. 그러고 다음 날 확인을 했을 때 만약 하나의 기기에서 그런 오류가 나도 오류까지 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놓지 않았을 경우에 작성해 놓은 글이 기기들에서 몽땅 날아가 버린 경우가 여러 번 있었고 지금, 이렇게 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글은 그날그날 메일로 보내 놓고 그걸 데스크톱에 옮겨 놓는다.


혹자는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라고 하는데 지금 나 정도 되면 습관이 되어서 그게 불편한지는 모르겠다. 어떻든 매일 일정량의 글을 작성하니까 그렇게 작성해 놓은 글이 날아갈까 봐 불안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저 습관이 되었다. 그러니까 폰 바탕화면에 앱이 있는 자리가 손가락이 기억을 해서 그대로 터치를 해 버리는 것처럼 습관이 되었다. 기기를 맹신하지 않는 다음 이유는 지금도 메모장에서 검색을 해서 찾으려는 글을 찾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애플 사용자 또는 애플 맹신자에게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지만 아마 그들 대부분은 메모장에 방대하게 글을 저장시켜 놓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폰을 신처럼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모장에 일정량의 메모를 넘어 포화상태가 되면 검색을 해도 잘 찾지 못한다. 그건 아이패드, 아이폰 다 해당된다. 아이폰 8, 아이폰6 에스, 아이폰4에스, 패드나 패드 미니, 심지어 아이팟 터치에서도 같은 현상이다. 시험 삼아 검색으로 찾지 못하는 글을 위로 위로 한 없이 드래그를 해서 찾는 경우도 꽤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기가 너무 비싸다. 기기가 비싼 것이 맹신하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할 수 있다. 새 제품은 매년 쏟아지고 그걸 손에 쥔 뒤에는 그 기기가 다칠까 봐, 스크래치가 날까 봐, 혹시 떨어트릴까 봐 아주 조심하게 다룬다. 아이폰 12프로 맥스 526기가는 190만 원이나 한다. 거의 200만 원에 육박한다. 고가의 폰을 손에 쥐는 순간 우리는 어쩐지 손에 들고 있는 폰이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종교처럼 그것에 더욱 달려들어 맹신 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해서 폰을 더욱 아기 다루듯 다룬다. 


기기를 이렇게 다루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그런 와중에 위에서 말하는 오류가 나면 더 없는 허탈과 짜증이 몰려온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막 사용할 수 있게 중고로 구입을 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이상하게 사용하는 모든 기기들을 구입했을 당시의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로 사용을 하는 편이다. 딱히 그러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데, 아주 오래된 카메라도 새것 같고, 정말 오래된 미니카세트 플레이어도 마치 며칠 전에 구입한 것 같다. 아이패드나 아이폰(중고폰 가게 주인이 폰에 액정 보호 필름을 얼마 전에 붙여 주었다)은 보호필름은 붙이지 않고 사용을 하는데 유튜버들이 말하는 것처럼 화면에 딱히 스크래치가 가거나 떨어트리지 않는 이상 손상이 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손가락으로 터치를 하는데 화면에 무슨 손상이 갈까. 아이패드만 3년 전인가 새것으로 구매했고 그 나머지는 전부 중고들이다.


얼리어답터도 아니고 나는 기계치에 속하는데 예전에는 블랙베리나 갤럭시 초기 모델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그때는 극장에서 영화를 자주 볼 때인데 블랙베리의 자판이 손에 익으면 자판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대사가 있으면 바로 입력이 가능했다. 초기 갤럭시 모델은 그 당시에는 너무 커서 아아 이렇게 벽돌 같다니 했지만 지금은 화면 크기가 보통의 수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기들은 때가 되면 말썽을 일으키는 7세 아이처럼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모든 기기들이 나오기 전, 아이폰이 도래하기 전 주머니에 들어가는, 소위 미니 노트북을 하나 장만했었다. 그 이전에는 늘 수첩에다 메모를 했다. 주머니에 수첩이나 메모지를 넣어 다니다가 뭔가가 생각이 나면 메모를 했다. 그 자리가 길거리면 벽에 대고 길거리에 서서 메모를 했고, 어딘가에 앉아 있다면 테이블이 될 만한 무엇에 놓고 메모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메모 뭉치가 하수구에 빠져버렸다. 으악! 충격에서 헤어났을 때, 그 당시에 값비싼 미니 노트북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일단 주머니에 들어갔다. 들고 다니기가 좋다는 말이다. 마트에서 그로서리 쇼핑을 하고 나올 때 식당에 앉아서 잠시 메모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노트북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할 수 있다니, 하며 좋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때는 터치가 안 되는 화면이라 마우스 없이 커서를 움직이는데 인내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요즘 기기들은 꺼진 상태에서 구동하기까지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냥 바로 되지만 저건 컴퓨터니까 시스템 종료에서 켜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와이파이가 되는 지역이 별로 없어서 인터넷을 하기까지가 꽤 힘들었다. 이렇게 흘러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데 비단 맹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기기만 그런 게 아니다. 종교나 정치인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에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종교단체다. 도무지 어떤 방식으로도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건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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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조깅을 하는 건 여름에 비해, 다른 계절에 비해 힘들다. 특히 지난주처럼 영하로 떨어져 버린 밤에는 정말 조깅을 하기까지 가지 말아야 할 이유 서른여섯 가지가 따라붙는다. 검은 내가 하얀 나에게 조깅을 하지 않기를 적극 권장한다. 두꺼운 옷 때문에 조깅을 하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것조차 만만찮다. 지난주에는 레깅스를 두 장을 입었더니 다리를 굽히는 것도 힘들었다. 아아 오늘은 하루 쉬고 내일 뛰지 뭐, 같은 생각이 아무튼 조깅하기 직전까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일단 달리게 되면 조깅 후 10분 정도가 지나면 등에 땀이 흐른다. 아무리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에도 어김없이 땀이 흘러 옷이 축축해진다. 매일 그 간극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한 시간 정도 달리게 된다. 매년 겨울, 그것도 아주 추운 날의 겨울에 느끼는 거지만 몹시 추운 날에는 조깅코스에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는 경우가 있다. 굉장히 추운 날에는 강변에 서식하는 길고양이조차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런 날이라도 일단 달리고 10분이 지나면 윗도리는 땀으로 촉촉해지다가 축축해지는 수순을 밟는다.


겨울의 조깅은 매일이 다르다. 변수가 있어서 어떤 날은 바람이 심해서 눈이 차갑기도 하고, 지난주처럼 영하의 날에는 마스크 위로 입김이 올라와 눈썹에 붙어 얼음이 되기 직전까지 간다. 그건 정말 기묘한 체험이다. 무엇보다 늘 비슷한 곳의, 비슷한 거리를 달리는데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조금씩 다르다. 내 내면의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달라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이 듦과 시간의 운동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내 내부가 느끼고 지방을 제외하고 듣고 느끼는 것이 쌓이는 것이다.

 

보통 근력운동을 한 다음에 조깅을 하는 경우가 있고 조깅을 한 사십 분 정도 한 다음 근력운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근력운동을 하고 나면 체력이 거의 방전이라 빠른 걸음 정도의 수준으로 달리게 된다. 보통 근력운동은 한 사십 분 정도 한다. 그러고 나면 다리가 거의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지나갔기에 조깅을 하는데 힘이 다 빠진다. 그렇지만 그 고통이 주는 묘한 성취감이 있다. 조깅을 거의 매일 한 덕분에 어떻든 지금 내 친구들보다 허벅지는 탄탄하고 굵다. 


불과 몇 년 정도 지났지만 예전에는 추운 겨울의 날에 조깅을 하면 대체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추운 날 조깅 따위를 하지요?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 자주 가는 빵집의 주인도, 워셔액을 사러 가는 생활용품점 주인도, 나를 볼 때마다 "오늘도 열심히 시네"같은 말을 지치지 않고 한다. 그러면 나는 "하루 24시간 중에 고작 한 시간 정돈 데요 뭐"라고 하고 휙 간다. 겨울에 조깅코스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건 몇 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가 도래한 이후 집에만 있던 사람들이 여름이건 가을이던 겨울에도 저녁이 되면 나와서 걷거나 조깅을 한다. 그 수가 코로나 이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래서 작년 한 해 동안은 명절에 조깅을 해도, 추운 날에 조깅을 해도 예전 같은 그런 눈빛은 사라졌다. 심지어 강변의 길고양이들도 '그래, 열심히 한 번 해봐'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조깅을 하면 맞은편에서 아주머니들로 이루어진 조깅 단체와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아주머니 조깅 단체는 일주일 내내 마주치지 않고 수요일과 그 외 또 다른 날에 마주친다. 아주머니 조깅 단체와 그동안 마주치며 느낀 특징들이 있다. 일단은 나처럼 혼자서 달리지 않는다. 아주머니'들’에서 처럼 그들은 늘 떼로 달린다. 아주머니 조깅 단체는 일주일 내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수요일이나 그 외의 하루 중에 달리는 거 같은데 동호회를 만들어 한 번에 모여서 달리다 보니 매일매일 같은 시간을 맞출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수요일만은 모두가 시간을 빼야 해, 라며 수요일에는 모여서 조깅을 한다. 아주 멀리서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오면 아 저 사람들은 아주머니 조깅 단체군. 하게 된다.


아주머니 조깅 단체의 특징은 복장에 무척 신경을 썼다. 조깅을 하는 것에 멋지게 갖춰 입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복장에 집착을 보이는 것처럼 달리는 복장에 돈을 들인 표가 난다. 메이커에 조깅화 역시 좋다. 어떤 아주머니들은 복장 위에 마라토너처럼 숫자가 적힌 번호판을 달기도 했다. 그게 묘하게 복장과 어울려 프로의 냄새가 난다. 아주머니들의 조깅 복장에 비하면 나는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다.


다음의 특징으로는 아주머니들은 달리면서도 수다를 떤다. 나는 이점에서 무척 놀랐고 경외심마저 들었다. 나는 고작 한 시간 정도 달리는 동안 힘이 들어 숨을 내뱉는 것조차 어려워하는데 아주머니들은 쉬지도 않고 달리는데 역시 쉬지도 않고 수다를 떤다. 잠깐 스치면서 듣는 수다의 내용은 썩 고급스럽진 않으나 그렇다고 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친정에 그제 갔었는데 친정에 글쎄 그게 있었다니까까까까까까 하며 말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옆에서 그래? 참말이가? 가가가가가 하며 대화가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에도 아주머니 조깅 단체가 스치면 아주머니들은 늘, 언제나 조깅을 하면서 수다를 떤다. 내가 달리기를 하면서 입을 한 일자로 꾹 다물고 무표정으로 달리는 것에 비하면 모두가 생글생글 밝은 표정으로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조깅을 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머니들은 몹시 가볍게 달린다. 전혀 몸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새가 하늘을 날듯, 100미터 육상 선수가 천천히 1킬로미터의 트랙을 도는 것처럼 몸이 가볍다. 겨울이지만 나처럼 두꺼운 옷도 아니다. 모두가 몸애 달라붙는 스판 소재의 운동복차림이며 메이커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운동복을 입고 재잘재잘 호호하며 가볍게 물수제비처럼 조깅을 한다. 매일 달리지도 않고 이렇게 추운 겨울에 두꺼운 패딩을 입은 것도 아니고, 혼자서는 재잘재잘 거리며 달릴 수 없잖아,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그들은 떼로 단체가 가볍게 열을 맞춰 달린다. 조깅은 고독한 운동이야, 라는 나의 굳건한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었다. 정말 아주머니 조깅 단체는 신기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을 잔뜩 가지고 있다. 


아주머니들은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애들을 키우다 보니 극도의 고독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애기 아빠 밥 먹여서 회사에 보내고 아이들 차례로 학교로 회사로 보내고 나니 나는 이미 늙어 버린 것만 같다. 손도 주글주글하고 이제 거울과 마주하는 것이 싫기만 하다. 그러다가 조깅을 하게 되었고 달리면서 고독과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달리는 건 힘들지만 조깅은 나를 알아가는 운동으로 재미있기만 하다. 모임에 나가면 나와 비숫한 사람들이 몸을 풀고 있고 다 같이 조깅을 하다 보면 세상일은 잊게 된다. 아주머니들은 이런 고충을 이겨내고 오늘도 가볍게 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주칠 때마다 비록 인사는 못 했지만 파이팅입니다. 오늘도!


밑의 사진들은 매일 비슷한 곳을 달리면서 담은 사진이다. 비슷한 곳이지만 어둡기나 밝기, 그리고 바람의 흐름 따위가 매일 다르다. 인간은 눈, 코, 입 전부 숫자가 같지만 다 다르게 생긴 것과 흡사하다. 달리면서 피부로 느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밑의 사진은 윗 지방에는 폭설이 내렸던 날, 바다가 있는 내가 사는 도시는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개울이나 강이 얼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돌을 한 번 던졌다. 저렇게 얼어 있으면 돌로 꼭 깨고 싶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윗 사진의 그림자를 보면 알겠지만 밑의 사진처럼 이런 복장으로 겨울에는 달린다. 달리기 전까지 몹시 힘겹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또 어떻게든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때는 등이 축축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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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7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1-28 12: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장갑 없으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려운데 또 장갑끼고 10분 정도 지나면 손이 후끈해서 벗어버리고 싶고, 인간은 참 간사하네요 ㅎㅎ

2021-01-27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1-28 12:08   좋아요 1 | URL
정말요? 모여서 달리는 단체 러너들을 저는 많이 보거든요. 스치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ㅎㅎㅎ

2021-01-28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가끔 유튜브로 오래전 오락실 게임 채널을 본다. 갤러그라던지, 너구리 같은 게임들. 


아이들은 단음처럼 소박한 음향이 나오고 홀린 듯 동전을 밀어 넣으며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동전을 넣는 순간 묘한 음이 들리면서 게임을 시작된다. 아이들(오락실을 차지하는 손님 대부분이 아이들과 학생들이었다, 왜 그런지 어른들은 오락실을 찾지 않았다, 아마도 어른들은 어린이였을 때 이런 게임 같은 것을 모르고 자라온, 그래서 기기 속 게임에 동전을 넣어가며 열을 올리는 아이들을 몽땅 호러블 한 것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은 게임기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게임을 하는 동안만은 진지해진다.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시간보다 더 진지해진다. 동전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동전이 내 손에서 게임기 속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오락기와 나 사이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기묘한 흐름의 세계로 들어간다. 띠리리리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화면에 보이는 게임을 이겨야만 한다는 의지가 올라온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알아 버리게 된다. 


단음의 똥파리들 소리가 미묘하기 달라지는 중독에 한차 한차 더욱 강력해지는 똥파리들이 나타날 뿐 결국에는 내 쪽에서 죽어야 게임은 끝이 난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이치지만 우리들은 그동안 잘도 갤러그에 빠져서 져야만 하는 게임에서 승리의 목표 속으로 계속 달려들었다.


갤러그는 하면 늘지만 이기지는 못 한다. 똥파리들을 다 죽였을 때 나는 음향과 다 죽이지 못했을 때 들리는 음향의 차이가 있다. 하다 보면 회차가 두 자리를 넘기고 40차, 50차 까지도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지고 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에잇 뭐야, 하고 넘기기보다 이 지기 위한 순차적 반복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다음 회차를 위해 여러 번 이겨야만 하지만 한 번 져버리면 동전을 다시 넣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모아 놓은 주머니 속의 동전이 다 없어지도록 갤러그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동전을 소비해가며 도전을 했다.


인간의 인생이란 반드시 이기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기 위해서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지는가 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확정 지어질 수 있다. 바로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이다. 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전을 하고 실패를 맛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갤러그를 하기 위해 매일 삼사십 분씩 학교 앞의 오락실에 들러 동전을 밀어 넣으며 오늘도 지는 순간 가방을 울러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 조금씩 실력이 늘어간다. 그리고 동전을 밀어 넣는 횟수도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게임에서 지고 나면 허탈해하고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오지만 다음 날이면 어제보다 나은 회차를 넘기리라는 동기부여가 된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오락실의 문을 당당하게 연다.

어제까지의 풍요로움이 오늘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연애시대 은호의 말처럼 고요한 물과도 같은 일상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쉽게 허덕인다. 우리 인생은 너무 약하여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과 같다. 여러 번 이겨도 한 번 지면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런 일은 예고 없이 어느 순간 다가온다.


힘이 들지만 그럴 때마다 주머니의 동전을 꺼내서 갤러그 오락기에 집어넣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무너지기 전까지 그동안 쌓아놓은 개개인의 비교할 수 없는 금자탑이 있어서 다시 하면 된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힘들어서 질 수 있지만, 내일이 되어 다시 오늘을 맞이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인생이란 꼭 이 기기 위해 치열하기보다는 덜 지기 위해 일상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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