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이 좋아서 마우스로 한 번 그려봄


여러분들은 슈퍼맨을 좋아하시는지. 슈퍼맨 시리즈가 ‘맨 오브 스틸’ 같은, 지금처럼 많지 않고 다양하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에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이 최고였다. 그리고 나는 현재, 오늘, 지금까지 크리스토프 리브의 슈퍼맨을 가장 슈퍼맨 다운 슈퍼맨으로 생각하고 있다.

슈퍼맨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격스러운 장면이 있는데, 슈퍼맨 1편에서 로이스 레인이 에어포스 원 취재차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 헬기를 타고 고층건물 옥상에서 이륙하는 도중 전기선에 걸려 추락을 하게 된다. 그때 로이스가 탄 헬기가 빌딩에서 떨어질 때 처음으로 슈퍼맨이 등장한다. 슈퍼맨의 영화에서 가장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공중 부유해서 활공하여 추락하는 로이스를 끌어안고 위로 오른다. 물론 하늘 위로.

내가 당신을 구했소.라고 슈퍼맨이 말하니, 나는 당신이 구했고 그럼 당신은 누가 구했어요?라고 로이스가 말한다. 똑 부러지고 취재에 온몸을 다 바치는 로이스도 정신이 없다는 말이다. 이때 흐르는 음악이 슈퍼맨의 주제가다. 바로 존 윌리암스의 음악이 나온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감격스럽게 한다.

클라크에서 슈퍼맨으로 변하기 전 존 윌리암스의 부대는 시동을 건다. 붐붐하면서 슈퍼맨을 등장을 암시한다. 그리고 슈퍼맨으로 완벽하게 변한 다음에는 존 윌리암스의 음악은 슈퍼맨을 한층 더 슈퍼맨으로 만든다. 이 음악은 하나의 아이콘이 된다.

시대가 발전하고 영화적인 기술이 하늘을 뚫을 것 같아도 크리스토퍼 리브 이후의 슈퍼맨이 인기를 더 얻지 못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존 윌리암스의 슈퍼맨 주제곡만큼 슈퍼맨과 주제가가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장면에서 존 윌리암스의 슈퍼맨 주제곡은 이 장면을 보는 모든 이들을 영화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생명이 없을 것 같았던 영화가 생명이 있는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빈곤한 진실보다 화려한 허구가 훨씬 가능성이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로이스가 헬기에 매달렸을 때 클라크가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에서 나와 추락하는 헬기를 보고 회전문으로 달려가면서 존 윌리암스의 슈퍼맨 주제곡은 성능 좋은 바이크의 시동을 걸듯 시동을 건다. 그리고 붐붐하던 슈퍼맨 주제곡은 로이스를 안고 하늘을 오르며 떨어지는 헬기를 한 손으로 잡고 오를 때 극에 달한다.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모차르트 같은 존 윌리암스가 있다면 다크 나이트의 히스 레저의 조커의 쩌는 주제가에는 베토벤 같은 한스 짐머가 있다. 한스 짐머에 대해서는 다음에.

참고로 로이스는 슈퍼맨이 학창 시절 촌에서 기차보다 빨리 달릴 때 기차 안에서 망원경으로 클라크가 달리는 모습을 보던 여자 꼬마 아이가 루이스다. 크리스토퍼 리브는 78년부터 87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슈퍼맨 4편에 출연했으며 낙마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이라는 이름을 걸고 슈퍼맨의 다리를 고치겠다고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슈퍼맨을 잘 들여다보면 꼭 당시의 미국을 상징한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막강하며 또 친근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구의 어떤 나라도 미국을 건들지 못한다. 설령 지구 밖 미지의 종족이 와도 미국을 건들지 못할 거라는 걸 마치 영화를 빌려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슈퍼맨은 하늘을 날고 굉장한 슈퍼파워를 지니며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한다. 그런 슈퍼맨에게 당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빌런들은 슈퍼맨 그 주위의 사람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림으로 해서 슈퍼맨을 조롱하거나 힘을 약하게 하려 한다.


슈퍼맨은 신의 영역 속에 있는 존재다. 우리는 신을 철석같이 믿는다. 신은 '신'이기에 그 믿음에 인간이 빠져든다. 그런데 신과 같은 슈퍼맨이 '나는 당신들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를 지구인과 같은 인간으로 봐주세요'라고 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슈퍼맨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신은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신이라는 건 감정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감성에 휩쓸리지 않는다. 하지만 슈퍼맨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는 순간부터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어제까지 우리의 이웃이었지만 갑지가 돌변해서 성폭행을 저지르는 옆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슈퍼맨을 보면서 슈퍼맨이 청소년기에 엄청난 괴리감과 두려움으로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했을 때가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였다. 청소년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청소년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리는, 인간은 나와 다르면 무섭도록 냉정해지고 소외시키려 들고 멀리하려 한다. 인간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면서 동시에 가장 미워한다. 슈퍼맨에 관한 나의 마음 같은 것들이 모아져 미드 '스몰빌'이 나왔다. 


정말 재미있었다. 시즌 1에서는 클라크의 괴리에 대해서 잘 보여주었다. 그래픽적인 슈퍼파워보다는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 인간으로 보내야 하는 청소년기의 클라크에 대해서 잘 표현을 했다. 정말 나에게 슈퍼파워가 있는데 청소년기라면 욱 해서 뭐라도 저지를 것 같은데 클라크는 그런 감정을 정말 잘 조절했다. 물론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이후 영화는 슈퍼맨을 비롯한 슈퍼파워를 지닌 각종 맨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늘 인간과 슈퍼파워를 지닌 존재의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를 어떻게 좁히느냐 하는 부분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최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을 보면 존 윌리암스의 음악이 부부붐하며 나온다. 그 부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파블로의 개처럼 슈퍼맨이 날개를 펼치고 활공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수순적으로 기분 좋은 클라크의 살짝 미소가 뒤따라온다. 존 윌리암스의 음악이 없었다면 지구 상에 슈퍼맨은 그저 한 번 나왔다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https://youtu.be/jVM-pSD0Q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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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며칠 전부터 명절을 지나고 오늘까지의 조깅 일상을 보면 정말 극과 극을 달리는 날씨 속에서 달렸던 것 같다. 여름에는 추울 날이 없으니 이렇게 하루 사이에 극과 극을 오고 가는 날씨를 경험하는 건 지금이 딱이다. 2, 3월에 우리는 왕왕 날씨의 변화에 허덕인다. 명절이 오기 전의 며칠 동안은 추위에서 벗어난 날들의 연속이었다. 바람이 기분 좋은, 이제 곧 봄이 올 것 같아서 두꺼운 옷들은 이제 넣어야 하나,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영상의 날이었다. 조깅을 하는 동안 옷이 축축해져서 짜면 물이 나올 것만큼 땀을 흘렀는데 명절이 지나고 엊그제 같은 날은 도대체 이게 영하 몇 도야? 할 정도로 추워서 땀은커녕 몸을 데우기 위해서 그저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통 저녁 6시 정도부터 한 시간 반 정도를 조깅을 하니까 조깅을 하기 위해 나오면 해가 달에게 하루를 반납하려고 자리를 내주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때는 온 세상이 오렌지 빛으로 물든다. 해는 떠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붉은 오메가를 끌고 저 산 너머로 잠을 자기 위해 준비를 한다. 해가 밝음을 끌고 가버리고 밤이 오면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는 대신 인공조명이 밤을 환하게 밝힌다. 낮과 밤의 대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바닥을 보니 나뭇잎이 떨어져 있기에 사진을 찍어서 이렇게 표현을 해봤다. 조금만 신경 쓰면 자연 곳곳에 작품들이 널려 있다. 매일 보는 해와 달도 사진을 찍어 놓으면 모두가 달라 보인다. 같은 곳에서 비슷한 시간에 사진으로 담는데 늘 다르다.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넌 뭐가 매일 신기하냐,라고 해도 신기한 건 신기한 것이다.



명절 기간에는 너무나 따뜻했다. 완연한 봄 날이었다. 곰이 기지개를 켜고 나와서 잠을 자느라 홀쭉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나올법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볍게 입고 조깅을 했다. 명절 기간에는 늘 달리는 조깅코스를 달리지 않고 집 근처의 바닷가를 달린다. 이렇게 가벼운 옷차림으로 실컷 달린 후 바닷가의 로컬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를 투고해서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며 마시는 맛이 있다.



바닷가에 나오면 일단 바다가 있고. 매일 같은 바다지만 그 바다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있다. 명절이라지만 작년 이전의 해와 다르게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게 바람직한 현상이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서 북적이지만 이번 명절에는 사람들이 좀 줄었다. 누군가 말을 타고 와서 풀어놨다. 말에 대해서 19금 이야기가 있는데, 오래전에 경주에 갔을 때 풀어놓은 말이 너무 멋져 여자 친구와 나는 그곳으로 갔다. 다가가니 우리 쪽으로 말이 다가왔다. 멋있더라. 갈색 빛이 기름을 발라 놓은 듯 빛나면서 뒷다리의 근육 하며, 정말 끝내주는 말이었다. 우리 쪽으로 왔기에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니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빼더니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내가 건드리는 게 싫다는 것이다. 말 주제에. 그런데 그때 여자 친구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아주 좋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지금부터는 19금이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말, 이 자식이 갑자기 발기를 하는 것이다. 자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말의 그건 인간의 그것이 발기하는 것과는 다르게 발기가 되는데(아무튼 엄청남) 발기를 하고 나니 남사 스러 울 정도로 너무 드러나는 것이다. 뒷다리가 세 개인 줄 알았다. 그때 여자 친구는 그것을 아주 재미있어했다. 도대체 선 한 눈을 해가지고 말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해변을 달려서 벗어나면 등대가 나오는 곳이 있다. 사진을 찍은 뒤쪽으로는 온통 소나무밭으로 소나무가 많은 곳에서는 기분 좋은 향이 있다. 이곳에 서서 저 먼 곳을 보면 바다도 어쩐지 작은 장난감 세계에 속해 있는 기분이 든다. 여기로 올라오려면 아주 긴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계단을 쉬지 않고 뛰어오르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오는데 그 고통을 한 번 느끼고 나면 그 이후에 오는 편안함이 두 배가 된다. 그 간극의 주기를 타는 것에서 오는 쾌감이 있다. 작정하고 오르막길을 뛰어오르면 통증 속 흥분이 있다.



구름을 쳐다보고 있으면 늘 인간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아 오키프 남편이자 바람둥이, 근대 사진가의 아버지라 불린 스티글리츠의 구름 연작 시리즈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의미를 두는 건 아니다. 구름이란 그저 어딘가에서 늘 어딘가로 흐르고, 얼굴이 같은 사람이 드문 것처럼 구름도 매일 보면 매일 다르다. 하지만 구름 자체는 비슷하다. 하얗고 솜사탕 같고, 젓가락이 있으면 휘휘 저어서 다 흩트려보고 싶은, 그런 구름이 하늘에는 늘 떠 있다. 사람도 얼굴은 다 다르지만 눈 두 개, 코 하나, 콧구멍 두 개, 입 하나, 이런 것들은 전부 비슷하다. 하늘을 한 번 쳐다보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일상은 사소한 행동과 큰 의미 없는 것들로 연결되어 있다.



바닷가를 달려서 내려오면 한 집의 마당에 볕을 쬐고 있는 백구가 있다. 묶여 있어야 하겠지만 묶여 있어서 그런지 조금 처량해 보인다. 백구야, 하고 부르면 고개를 발딱 드는 것이 아니라, 감고 있던 눈만 살짝 떠서 눈동자를 위로 치켜뜬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식곤증이 폭력적으로 내려왔는지 쿨쿨 잠들어 아무리 불러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너 같은 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나는 그냥 잘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얄미운 놈들.



명절 연휴 후반에 늘 달리는 조깅 코스를 지나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어 오다가 족발집을 봤다. 족발집이 뭐 어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족발집은 거의 다 싹 사라졌다. 요즘은 사람들이 주로 족발을 배달하거나 포장만 해서 파는 곳에서 투고해서 집으로 들고 와서 먹는다. 족발 집에 앉아서 족발을 먹었던 기억도 별로 없지만 족발 집에 앉아서 소주 한 잔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이었다. 이곳 바닷가에는 대규모 제조업 회사가 있어서 오래전에는 퇴근 한 아버님들이 삼삼오오 족발에 모여 앉아서 소주잔에 족발을 먹으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족발들이 하나둘씩 없어졌다. 

  

가서 요래 보니 요즘이라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주인은 분주하게 족발을 준비하고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정감 있었다. 어쩌다가 족발 집은 전부 사라진 것일까. 족발 집 뒤로 오래된 목욕탕의 굴뚝이 어둠 속에 솟아 있었다. 목욕을 하고 가볍고 뜨거워진 몸으로 족발 집에 앉아서 족발을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달려서 오다가 땀을 너무 흘려서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잔 마셨다. 이 도로는 조깅 코스의 마지막 코스로 대략 1. 5킬로미터의 도로인데 오르막길이다. 그래서 4, 50분 정도 달린 후에 이 오르막에 접어드는데 쉬지 않고 오르막길을 달리게 되면 다리에 고통이 오면서 저기까지, 저기까지, 하며 멈추지 않고 숨이 턱 막히는 헉헉 거림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은 중간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다. 이런 완제품은 처음 마셔보는데 오전에 마시는 로컬카페의 커피보다 더 비싸다는 것에 놀랐다. 추위가 오기 전 날인데 땀을 정말 많이 흘렸다. 그래서인지 편의점 앞에 앉아서 마시는 음료는 정말 맛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보면 구름처럼 차도의 차들은 저쪽에서 저쪽으로 싱싱 달리고 사람들은 여기를 지나 어딘가로 늘 걸어간다. 그 사이에 나도 껴 있다. 나도 어딘가에서 달리기 시작하여 여기를 지나 저기로 간다. 늘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돈다. 김중식의 시 ‘이탈한 자가 문득’이 생각난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나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한다. 나는 언제쯤 궤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게 될까.



그곳을 지나 오래전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를 지났다. 이 동네를 자주 지나치는데 이 동네에 들어오면 어린이 때의 내가 보인다. 저 멀리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여기 서 있는 오래된 세계에서 기억을 더듬게 된다. 하지만 이제 이 동네도 개발에 의해 곧 허물어진다. 재개발 비용을 전부 받았다고 한다. 개발을 하려고 컨테이너 사무소가 들어서 있더라. 이제 모두 이 곳을 떠나게 되고 불도저가 밀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갑자기 추워졌다. 지난번의 추위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건 명절 기간 내내 따뜻하다가 영하로 훅 떨어지니까 체감상 더 추운 것 같다. 엊그제는 레깅스를 두 장이나 입었는데 다리가 시렸다. 보통은 아무리 추워도 10분이 넘어가면 등에서 땀이 나지만 전혀 아니었다. 얼굴에서 밖으로 드러난 저 작은 부분으로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바람이 타고 들어왔다. 어제도 엊그제 못지않게 추웠지만 바람이 없었다. 바람이 없으면 달리다 보면 등에서 땀이 난다. 땀을 흘리고 난 후 뜨거운 물로 온 몸을 씻어 내는 기분 역시 좋다.



샤워를 할 때는 꼼꼼하게 한다. 거품을 가득 내어서 발가락 사이도, 배꼽 안에도, 아무튼 뚫려있는 구멍은 전부 깨끗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바짝 말린 후 우르오스나 로션 따위를 잘 발라서 촉촉하게 해 준다. 그리고 뜨거운 추어탕에 땡초를 넣어서 후루룩 한 그릇 한다. 몸으로 받은 추위가 물러가고 난 후에 먹는 추어탕은 꿀맛이다. 산초가루가 없어서 아쉽다. 아, 요즘은 학생들하고 마라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아직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꼭 먹어보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아마도 마라탕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나는 있으면 먹고 없다고 해서 찾아서 먹을 만큼 빠져 있는 음식도 없는데 마라탕을 먹어보면 찾아서 먹게 될까. 어떻든 추어탕 두 그릇을 후루룩 먹고 나면 잠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온다. 하나, 둘, 셋 하기 전에 그대로 눈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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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2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겨울인데 보라색 나뭇잎이 참 신기하네요^^

교관 2021-02-21 13:01   좋아요 0 | URL
요즘은 봄에도 코스모스 피고 막 그러잖아요 ㅎㅎ
 


라면은 언제 먹으면 가장 맛있을까. 바로 지금 끓여 먹으면 제일 맛있다. 나 배불러서 아무것도 못 먹어,라고 하는 사람도 일단 라면을 끓여 놓으면 달려든다. 아니 한 젓가락은 꼭 먹어본다. 그리고는 젓가락 질을 계속한다. 라면은 어떤 마법이 숨어 있다. 대하기 껄끄러운 사람과 비싼 고기를 먹는 것보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먹는 라면이 백배는 맛있다.


근래에는 라면을 끓이며, 라면을 먹을 때 빌리 아일리시 노래를 듣는다.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는 신비로워서 그런지 먹는 라면도 꽤 신비한 음식처럼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꼬불꼬불한 면발에서 한 없이 느껴지는 생명력이 몸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라면 한 그릇 끓여 먹고 나면 배도 부르고 든든하다. 신비한 음식이다.


예전에는 라면을 두 개는 기본으로 끓여서 밥도 말아서 먹고 국물까지 싹 먹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짜파게티는 3개 정도는 끓여 먹었지만 이제는 국물이 없는 짜파게티마저 여의치 않다. 나이가 든 것이다. 위가 예전만큼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또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어린 시절과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요즘에는 불 마왕 라면이나 염라대왕 라면을 먹는 것이 유튜브에서 유행이다. 맵 부심이 있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전하며 먹고 있다. 그들은 라면에 관한 것만큼은 전문가들이라 스프가 익어가는 냄새만 맡아도 베트남 고추를 썼다느니, 캅사이신이 어쩌고, 하는 말을 한다. 유튜브에서 매운 라면을 먹는 모습만 봐도 코 등에서 땀이 난다. 신기한 일이다.


어째서 다른 음식에 비해 라면 먹는 모습이 더 맛있게 보이는 것일까. 또 후루룩 소리를 크게 내며 먹는 일본 라면보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끓여 먹는 라면을 먹는 모습이 왜 시선을 더 끄는 것일까.


라면이 다른 음식에 비해 가지는 장점이 많다. 어디서든 먹을 수 있고 들어가는 부재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짜장면은 중국집에 가야 하지만 라면은 집에서도 쉽게 끓여 먹을 수 있다. 새벽에 깨서 냄비에 물만 올리고 끓여 먹을 수 있는 게 라면이다. 끓이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 또한 묘미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와 흡사하다. 들어가는 여분의 재료에 따라 맛은 또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콩나물을 넣었을 때의 맛과 김치를 넣었을 때, 계란을 깨트려 넣었을 때와 그냥 넣었을 때가 다르다. 라면을 끓여서 면을 건져내놓고 국물에 다시 파와 계란을 풀어서 한 번 끓여서 라면 위에 부어놓으면 맛은 정말 상상하는 것 이상 맛있다. 분식집에는 늘 라면이 있고 편의점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다. 여기는 지방이라 한강에서 파는 끓여 먹는 라면이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이제 편의점에서 한강의 끓여 먹는 라면처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라면에 관한 추억은 꼭 하나씩 있다. 몇 해 전에 후배와 함께 순천으로 2박 3일로 여행을 갔었다. 후배는 한창 사진에 몰입해있을 때여서 어스름할 때 순천만을 담고 싶어 하기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 여행을 하기 전에 후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와서 많은 시간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고, 묻고, 답하고, 촬영을 하고 갔다. 그리고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면서 둘 다 서로 여행을 같이 다닐 스타일은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배는 봉고를 몰고 다니며 일을 하는데 그 안에 일에 필요한 장비들이 잔뜩 들어있다. 일을 마치고 봉고를 몰고 그대로 그 차를 몰고 둘이 여행길에 올랐다. 그 봉고차를 나는 운전을 할 수 없어서 2박 3일 내내 후배가 운전을 했는데 혼자서 계속 운전을 하니 힘이 들었다. 후배는 여행을 가기 전에 잠꼬대가 심하다고 하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나는 침대 밑에서 자야 할 정도로 잠꼬대를 할 줄은 몰랐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주먹질을 하는 바람에 옆에서 잘 수는 없었다.


후배는 노가다를 해서인지 밥을 빨리 먹었다. 여행길에 올라 보통은 시켜 먹지 않는 음식점의 음식을 잔뜩 주문했는데 후배는 밥공기의 밥을 후딱 두 그릇 정도 먹고 나면 배부르다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니 남은 음식이 너무 아까운 것이다. 둘째 날 저녁에는 오리백숙 집에서 백숙이 나오기 전에 그 집에서 전갱이 튀김 같은 것을 한 접시 주었는데 그걸로 밥과 술을 마시고는 백숙이 나오기 전에 그대로 식당(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의 바닥에 피곤하다며 누워서 잠이 들어 버렸다. 올 때는 부산을 거쳐서 왔는데 운전하느라 힘드니까 내가 운전을 하겠다고 해도 이 봉고는 자신밖에 운전을 하지 못한다며 하지 못하게 했다. 아무튼 둘 다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랬던 우리 둘도 맞는 부분이 있었다. 둘째 날 오전 일찍 일어나서 순천의 여기저기를 돌다가 좀 외진 곳까지 가게 되었다. 배가 고프니까 식당을 찾았다. 식당을 찾았는데 외관이 너무 있어 보이는 식당이었고 주위에는 그 식당 밖에 없었다. 들어갔는데 메뉴판을 보니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싼 곳이었다. 어차피 비싼 돈을 주고 주문을 해도 후배는 밥 한 두 공기 정도 먹고 나면 배불러서 숟가락을 놓을 텐데, 그리고 그 사실을 후배도 알고 있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데 묘하게 종업원이 우리에게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두 명이서 밥 한 끼 먹는데 5만 원 정도인데 3만 원에 먹을 수 있는 메뉴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후배는 노가다를 하면서 꼭 식사시간을 지켜서 인지 배가 고픈 것을 참지 못했는데 후배가 우리는 돈이 없어서 안 되겠다며 그곳을 나오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봉고를 몰고 좀 가니 시골의 슈퍼 같은 곳이 나왔다. 편의점은 아닌데 편의점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둘이서 컵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밖의 파라솔에 앉았다.


컵라면이 익어가는 3분 동안 여행 3일 중에 제일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그리고 먹은 컵라면은 참 맛있었다. 그때도 2월이었는데  출발할 때는 날이 추웠지만 하루가 지난 순천은 따뜻했다. 그 슈퍼의 컵라면은 종류가 별로 없었다. 아마 둘 다 김치사발면을 먹은 것 같다. 하나로 모자라서 우리는 하나씩 더 먹었다. 라면은 늘 그렇듯이 맛있었다. 서로에게 지친 우리를 컵라면은 위로해 주었다. 컵라면을 먹는 동안에는 그곳에 앉아서 그 여행을 즐겼다.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느끼지 못했던 여행의 묘미를.


라면은 여행지에서 먹는 라면도 참 맛있다. 대천에서 회를 실컷 먹었어도 새벽에 새우를 넣고 끓인 라면 맛을 잊을 수 없고, 타지방에 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휴게소에서 먹은 라면이 생각나기도 한다. 라면은 밥 때문에 홀대받기 일쑤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밥보다 더 근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근사하기에 질투를 당하는 것이 라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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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2-20 11:46   좋아요 0 | URL
라면엔 소주 한 잔 해 줘야죠 ㅎㅎ 캬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 판타지를 입히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된다. 마츠코의 일생을 만든 감독은 분명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자의 전성시대 각본을 보고 마츠코의 일생 감독은 감탄하고 감동받아 마츠코의 일생을 영상으로 아름답지만 안타깝게 그렸을지도 모른다.

영자는 여자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과 경험을 당했고 뾰족하고 온갖 거친 삶을 돌처럼 살아간다. 시골에서 동생들을 네 명이나 둔 장녀로 상경하여 부잣집 식모로 일하다가 몹쓸 아들놈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영자는 밥을 먹다가 부잣집 아들놈에게 끌려 나와 성폭행을 당하는데. 성폭행을 당하고 난 후 영자는 턱밑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럽고 서글픈 단어 가난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수치심보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싶은 영자의 마음이 그대로 화면을 통해서 나온다. 굶주려 죽을 것 같았던 사람, 가난해서 비참하고 불편했던 사람들은 영자의 모습에 그만 가슴이 터질지도 모른다.   


영자는 그 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또 당하고 계속 당하다 그 집주인에게 걸려 쫓겨나 하루 종일 먼지로 가득한 방직 공작 같은 곳에서 일한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방식 공장의 일. 먼지가 눈처럼 쌓이는 곳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얹혀사는 아는 언니네 집에 가면 언니는 남자와 있고, 갈 곳이 없는 영자는 눈을 감고 보이는 그곳이 미래라는 것에 힘겹기만 하다. 일은 너무나 고되고 월급을 받아도 외상값을 갚고 나면 동전 몇 개만 남는 인생이다. 버스 안내양을 하지만 생명이 보장되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밀어 넣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일을 하는 영자. 버스 앞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끼어들고 급브레이크에 영자는 버스에서 튕겨 나가 교통사고로 그만 한쪽 팔을 잃고 외팔이로 몸을 파는 인생으로 전락하는 영자. 


그런 영자를 평생 자신의 여자로 알고 식모를 할 때 첫눈에 반해 끝까지 책임지려는 창수. 월남 전 3년 내내  창수는 영자만을 바라보며 제대를 하고 돌아왔다. 창수는 목욕탕 보일러 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손님들의 때를 밀며 번 돈으로 영자의 성병도 고쳐주고 매일매일 데리고 병원에 간다. 그럼에도 한 번 굴절된 영자는 삐딱하게만 창수를 대하고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다른 남자의 품에서 돈을 버는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는 창수는 그럴수록 돈을 벌어 영자와 함께 살기를 바란다.

영자의 인생, 외팔이라 재수가 없어 찾는 남자 손님도 드물고 팔을 한쪽 잃었을 때 보험금으로 받은 삼십만 원은 집에 있는 동생들을 위해 다 보내고 자살을 하기 위해 기찻길에 뛰어들지만 죽지도 못하는 인생.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힘겹고 버거운 영자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런 영자를 꽉 붙들고 있는 창수. 창수는 열심히 보일러실에서 의수를 만들어 영자에게 끼워주고, “영자 거울을 봐, 이제 옷이 헐렁이지 않을 거야, 내가 돈을 더 벌어서 스테인리스로 된 팔을 사줄게.” 일편단심 창수에게 그만 안겨 울어 버리는 영자.

창수는 목욕탕 문을 닫고 주인 몰래 자신만의 세계에 영자를 부른다. 아무도 없는 목욕탕에 영자를 위해 뜨거운 물을 받아서 초대한 영자의 등을 밀어준다. 이 장면은 너무 아름답게 나온다. 목욕탕의 뜨거운 수증기가 따뜻한 빗물처럼 그들에게 쏟아진다. 창수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영자의 등을 밀어준다. 가만있어 봐, 때가 나오잖아.  천하의 영자는 창수를 보면 자꾸 부끄러워지고 자꾸 남들의 눈치를 보며 여자 같아진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여기에서 그만, 제발 여기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했을 때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영화는 사건에 휘말리고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영자는 자신이 창수의 앞길을 막는 것 같다. 창수에게서 떠나는 게 창수를 도와주는 길이다. 결국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창수는 바람대로 양복 기술을 배워 양복점을 연다. 친구가 찾아와서 영자의 소식을 알려주고, 영자의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은 허름한 곳의 거지촌. 거기서 창수는 예쁜 딸을 안고 있는 영자를 본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한쪽 다리를 잃은 남편이 있다. 하지만 영자는 행복해 보인다. 그래, 영자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며 영화는 끝난다. 소설을 원작으로 소설은 결말이 비극이지만 그래도 영화는 완전한 비극은 아니다.  


영화는 교차편집 형식으로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영자는 세상 다 산 듯한 모습의 집창촌의 여성이다. 거칠고 무서울 게 없는 영자는 경찰서에서 우연히 창수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간다. 창수와 영자가 처음 만나게 된 시절로. 아주 잠깐이지만 두 사람은 풋풋한 모습으로 만두를 먹는다.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를 꼽자면 각본이 무척 좋다. 김승옥이 각본을 썼다. 그리고 영자의 연기다. 얼마 전에 죽은 송재호의 청춘 어린 모습을 볼 수 있다. 보일러실의 창수와 함께 같이 나오는 늙은이가 최불암인데 두 사람은 실제로 한 살 차이다. 한  살 차인데 한 명은 20대 청춘으로, 한 명은 노인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영자의 다리 한쪽이 없는 젊은 남편은 이순재다. 원작에서 각색이 되었지만 김승옥은 정말 이야기를 잘 만들어낸다. 시대에 맞게 캐릭터에 맞게 정말 생명을 확실하게 불어넣어 준다. 분명 영화인데 소설을 읽은 것 같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우리가 사랑한 여자, 우리가 버린 여자 영자라는 문구가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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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를 먹다가 오래전 기사에서 낙지의 고통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낙지는 고통을 모를까?라는 제목의 기사로 읽어보면 낙지는 사람과 닮았다는 부분이 있다. 척추동물과 연체동물은 약 5억 년 전에 같이 나타났는데 인간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낙지의 실험을 전 세계에서 많이 한다고 한다. 죽 읽다 보면 유럽에서는 낙지를 실험할 때 꼭 마취를 하도록 연구 윤리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른 사람들의 댓글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우리나라 돌문어도 사람들이 하도 건져내니까 얕은 바다에서 살다가 점점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데 문어는 바다의 수온이 달라지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때 알을 품고 있으면 새끼들이 배가 고플까 봐 문어는 자기 다리를 뜯어먹으며 새끼들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그래서 가끔 다리가 하나 없는 문어가 밥상에 오르기도 한다.


오래전에(2012년) 물고기의 고통에 대한 글을 한 번 적었던 적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파닥파닥’을 보면 만화인데 물고기에 대한 고통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물고기는 고통을 느낄까? 궁금했다. 만약 물고기도 고통을 느낀다면 인간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도 고기처럼 생선도 줄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 베지테리언들은 생선도 먹지 않는다.


고통을 인간의 몸으로 비유를 하자면, 우리 몸의 통감 세포가 고통을 인지하면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이것이 척추를 죽 따라 대뇌 신피질로 가서 고통으로 인식되는 방식이다.


그 당시 신문을 검색해서, 어느 해인지는 모르겠으나 8월 22일 자 조선일보 A29면에 ‘물고기도 고통을 느낄까?‘라는 칼럼을 발견했다. 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 때문에 속이 타 들어가는 생각 없는 시어머니는 싱싱한 회가 먹고 싶다고 채근한다. 동트지 않는 새벽 4시, 횟집에 들른 그녀 앞에 살점은 사라지고 뼈만 남은 채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어젯밤 주방장이 손님들 앞에서 솜씨를 부렸는데, 아직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있으되 산 것이 아닌 삶. 그녀는 저 물고기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다.로 칼럼은 포문을 연다. 이 글은 드라마의 실제 장면으로 첫 촬영을 그렇게 했다. 며느리의 삶이 사실은 수족관에 갇혀, 살이 발린 고통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 신세하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은 독일에서는 절대 내보낼 수 없는 장면이라고 한다. 독일에서는 물고기 역시 척추동물로 인정해서 비인간적인 학대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해서 물고기를 정당한 사유 없이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낚시꾼들이 들고일어났다고 한다. 물고기는 사람처럼 고통을 느끼는 대뇌 신피질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그것을 연구한 연구진은 진통제가 물고기에게 듣지 않는 것도 사람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독일의 과학자들은 달랐다. 독일 정부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물고기나 새우, 게, 바닷가재 등 사람들이 즐기는 해산물은 모두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를 잇따라 발표했다. 그해 초 영국 퀸스대 로버트 엘우드 교수 연구진은 ‘실험생물학 저널(세상에는 정말 우리가 모르는 잡지가 가득하다)‘에 ‘게와 새우 같은 갑각류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게의 다리에 전선을 연결하고 두 동굴 중 한쪽에 들어갈 때만 전기 자극을 줬다. 그러자 전기 자극을 받았던 게는 동굴에 들어가는 횟수가 크게 줄었다. 심지어 전선이 달린 자기 다리를 잘라내고 도망가는 게도 있었다.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기억까지 한다는 말이다. 엘우드 교수는 갑각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통념 때문에 다른 동물이라면 결코 허용되지 못할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는 과거 백인들은 흑인 노예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학대를 했다고 했다.


그 드라마에서 초반 장면인, 뼈가 드러나서 수족관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영상이었다. 위의 기사 ‘낙지의 고통’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이 있는 것들은 대부분 고통을 감수하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낙지나 오징어나 먹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티브이 요리 프로그램에서 살아있는 낙지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는 장면 하나는 빼먹어도 그 맛이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생물을 있는 그대로 죽여서 먹어야 맛있다는 최면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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