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만 하고 있어.”


같은 말인데 예전과 너무 다르게 들리는 말이 ‘유지’가 아닐까 싶다. 유지만 하고 있어서 속상했던 때가 그리운 나날들의 연속이다. 요즘은 장사하는 사람들은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서 대출에, 받을 수 있는 보조금에, 발버둥을 쳐도 유지하는 게 힘든 날이 되었다. 그러다가 돌아보면 그 자리는 빈자리가 되어 있다.


어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국밥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요는 그 사람은 근래에 자꾸 살이 쪄서 큰일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국밥을 너무 좋아하는데, 일주일에 7번은 먹는데, 특히 국물을 주욱 들이켤 때 몹시 행복하다고 했다. 또 새우젓도 많이 넣어서 먹는데 주위에서 살이 쪘다고 자꾸 입을 대서 그 좋아하는 국밥을 끊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운동도 좋아해서 매일 운동을 하는데 유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우리 같은 일반인이 살이 찌고 빼는 건 운동과는 무관한 것 같다고 했다. 먹는 걸 줄이거나 끊거나 조절이 필요하다면서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만들었다. 일 마치고 힘든 건 국밥 한 그릇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릴 정도로 국밥을 먹는 동안에는 정말 행복한데 그걸 포기하고 살을 빼야 한다니, 삶이 너무 허무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운동을 이렇게 매일 하는데 유지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감한다. 나는 십 년이 넘게 비슷한 몸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유지하기 위해 정말 죽기 살기다. 그렇게 좋아하는 라면도 올해 들어 10번도 먹지 않았다. 국밥은 딱 한 번 먹었으며 짜장면은 먹지 못했다. 매일 조깅을 한 시간 반 정도 하고 밥을 먹을 때 술을 마시는데 한 잔 마신다. 한 잔을 마실 뿐이다. 한 잔을 달랑 마신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는다 나도. 고작 한 잔을 마시다니. 대학생들과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러려면 술은 왜 마셔요? 술을 마시고 취해야죠. 취하려고 마시는 게 술인데 한 잔 이라니 흥.라고 한다. 왜 안 그렇겠니. 물론 나도 대학교 다닐 때는 그랬지.


이렇게 죽기 살기로 매일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유지하는 게 어렵다. 너무 어렵다. 배는 알게 모르게 자꾸 나오며 달리는 것도 나날이 조금씩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꼭 살이 찌지 않고 유지하는 생활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넓게 보면 인생이 그렇다. 삶도, 살도 유지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져 버린 요즘이다.


태연의 노래 중에 ‘들리나요’가 있다. 가사 중에 ‘먼발치서 나 잠시라도 그대 바라볼 수 있어도 그게 사랑이죠’라는 가사가 있는데 ‘먼발치’라는 말이 나온다. 먼발치를 찾아보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온다. 황경신의 ‘밤 열한 시’를 보면 먼발치에 대해서 나와있다.


멀다는 건 두 사람 사이에 먼 거리가 있다는 것이고

발치는 발의 근처인데

먼발치는 어찌 된 말일까

게다가 한 단어라니

하고 잠에서 깨어나 문득 생각했다


라며 글은 시작된다. 먼발치는 슬프고 쓸쓸한 말이다. ‘먼’이란 눈에서 벗어난 목소리가 닿지 않는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인데, ‘발치’는 숨을 죽이는, 그림자를 밟는,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서성이는 위치다. 그래서 먼발치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가까이 있지만 만날 수 없는 불운한 숙명 같은 말이다. 예전 같지 않은 말 ‘유지’가 마치 ‘먼발치’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이제 다시는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내일 속으로 자꾸 걸어 들어가는 기분.  


“유지만 하고 있어”가 “유지만 했으면 좋겠어”로 바뀌었다. 유지라는 게 가능한 일인가. 유지를 한다는 건 증식보다 더 대단한 지금이 되었다. 먼발치처럼 가까이 있는데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 그렇지만 이 일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힘들다고 앉아서 징징 거릴 수만은 없다.

현디가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그랬다. 쓸데없는 일에 분노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화를 내야 하는 일에도 내가 참으면 되지, 라며 평화를 표방한 침묵으로 일관해버리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서 후회하거나 잠들기 전 이불을 덮고 나서야 화가 나서 이불 킥을 해버린다. 정작 화를 내야 하는 일이 닥쳤을 때 마땅히 화를 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나면 일상이 조금씩 와해된다고 느껴서 그런 자신에게 더 화가 난다. 나는 왜 화를 내야 하는 때에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막상 닥치면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고 상처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


생각해보면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것도 일상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화를 내야 할 때 내지 못한다 하여 징징 거릴 수만은 없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을 유지하는 동력은 소심함이다. 대심한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하지만 나 같은 소심한 사람은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 나의 소심함이, 그것이 이 고요한 물과 같은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인 것이다.

그래서 늘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자연을 악착같이 매일 보려고 노력한다. 문을 열고 밖에만 나가면 된다. 다리만 문 밖으로 나가면 된다. 말 그대로 소확행이다. 매일 같은 코스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된다. 오늘 들어볼 노래는 콜드 플레이의 옐로우 https://youtu.be/mRP72Ib2e9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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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세월과 무관하게 아무 때나 봐도 빠져들어 아아 참 재미있구나, 하게 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까지 봐온 수많은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모든 감독들이 아마도 오즈의 영화 속에서 영감을 얻어서 테이크, 테이크 촬영을 한 것 같다. 오즈의 영화들 중에서 세 편을 소개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안녕하세요’다. 나는 책과 영화를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책 추천해달라는 말을 들으면 아주 난감해한다. 특히 소설을 벗어난 책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난처하고, 소설이라도 '해변의 카프카' 같은 소설을 추천할 수만은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책과 영화는 여자를 소개해주는 것처럼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주위에 추천하고 다니는데 일단 본 사람들은 아주 흡족해한다. 영화가 59년도 영화인데 어째서 그런 시대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까. 컴퓨터와 휴대폰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걸 소거한 채 지금 시대에서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참 신기하다.


영화적 언어가 끊어지지 않고 장면 장면 이어지는 것 역시 신기하다. 나오는 모두가 주인공인데 특별히 더 주인공에 가까운 건 두 형제 꼬마들이다. 영화 속 어른들의 이야기가 슬며시 형제들의 장면으로 바뀌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영화는 도쿄의 중산층의 한마을 사람들의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오즈 야스지로의 언어로 풀어낸다. 하나의 소식을 한 사람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면서 베리에이션이 되면서 의심이 커져 간다. 그 장면 장면을 풀어내는 게 코믹에 가깝게 흘러간다. 그리고 두 주인공인 형제가 집에 티브이가 없어 티브이가 있는 옆집에 자꾸 놀러 가게 되고 엄마는 그 집에 가지 말라고 한다. 그 일로 엄마와 다투게 된다.


결국 형제는 엄마에게 폭발해서 이제 어른들과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도발한다. 이 과정에서 7살짜리 동생 이사무 짱의 초 귀여움이 화면을 뚫고 나온다. 어른들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한, 두 녀석은 학교에 가면서 옆집 아줌마들에게도 평소와 다르게 인사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간다. 이상하다고 느낀 아줌마는 건너 건너 말을 전하면서 이사무 짱의 엄마를 또 의심한다.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아이들에게까지 말해서 아이들이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낸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물고 하며 잔잔한 코믹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미장센이다. 중산층의 가옥이 아주 현대식이며 통일된 균형감의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30년대의 오즈의 마법사에서처럼 지금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색감으로 영상을 채웠다. 영화에 마법을 부렸다. 이런 색감은 일본의 수많은 사진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컬러풀한 서랍장이며, 녹색의 주전자며, 세련된 등과 빨강과 노랑의 빨래, 지붕의 색채는 보는 내내 기분 좋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말은 주인공 꼬마들이 티브이 안 사주는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어른들의 인사는 정말 쓸데없는 것이다, 중요한 내용은 전혀 전달하지 못한 채 아침에 보면 그저 똑같이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말이나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나 할 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생각해 보면 그런 어른끼리 하는 쓸데없는 인사 따위로 자동차를 팔아먹고, 사회의 윤활유가 된다.


이 영화에도 가장들이 정년퇴직 후 고민을 말한다. 이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의 스타일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다. 가족의 관계,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 직업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간극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과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필요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들에 대 해서 생각하게 한다.


집에 반항하느라 동생과 함께 굶고 있다가 허기가 져 집에서 몰래 밥과 물을 가져 나와서 둑에 앉아서 형제는 밥을 먹는다. 형이 반찬이 없어서 밥만 먹으니 좀 그렇지?라고 하니 이사무 짱이 반찬을 가져온다며 일어나서 둑을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경찰이 오니까 덜컥 겁을 먹고 형에게 말해서 둘 다 그대로 도망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나이의 형제의 입장과 마음과 생각을 너무 잘 표현했다.

 

이래서 너도나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무 짱의 흥! 하는 제스처가 압도적이었던, 아주 사랑스러운 영화, 그래서 깨물고 싶은 영화 ‘안녕하세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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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흑백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셋방살이의 기록’은 패망 후에 오즈가 만든 처음의 영화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오래 전의 영화는 정말 빠져 들어서 보게 된다. 무엇보다 ‘잘 만들었다’라고 느끼게 된다. 박찬욱이 그토록 칭찬한 우리나라 ‘하녀‘를 보면 박찬욱이 왜 좋아하는가, 에 접근할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60년 정도 살다가 죽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영화를 55편 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손실된 영화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기록은 33편이다. 그래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33편이나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즈 야스지로의 여러 영화를 유튜브에 가면 풀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 만세.


리메이크된 동경 가족을 좋아했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원작도 재미있게 봤을 것이다. 바람 속의 암탉, 만춘 등 몇 편을 봤는데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를 정말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셋방살이의 기록은 패망 후 어수선한 도쿄의 어디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무서운 얼굴을 한 아줌마 다네의 집에 고아로 보이는 고헤이가 들어오게 된다. 고헤이는 누군가를 따라와서 어디에도 맡아주지 않는 꼬마다. 모두가 어린이 같은 건 싫어하고 다 버리라고 한다. 주워온 남자가 다네 아줌마에게 하루만 맡아달라고 해서 재워주는데 그날 밤 오줌을 싸고 만다.


맡기 싫은 고헤이를 맡게 된 건 그전 날 잡화점 근처의 상인들이 모여 어린이 고헤이를 맡을 사람을 뽑기로 결정을 하는데 그만 다네 아줌마가 걸리고 만 것이다. 그 뽑기는 짜고 다네 아줌마가 걸리게끔 판을 짠 것이다. 재수가 없다고 느낀 다네는 하루 재워주자마자 이불에 오줌을 싼 고헤이를 무서운 얼굴로 나무란다.


그리고 저기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버리고 오려는데 고헤이가 눈치를 채고 따라온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다네 아줌마가 그렇게 싫어하던 고헤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1시간이 조금 넘는 분량에 다 집어넣었다. 


고헤이는 벼룩 같은 것에 등을 이렇게 움찔거리는데 영화 말미에는 다네 아줌마 역시 벼룩에 옮아서 둘이 같이 등을 움찔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네 아줌마가 고아인 고헤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감동스럽다. 하지만 결국에는 고헤이의 아버지가 찾으러 와서 고헤이는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고 다네는 그동안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면서 눈물을 쏟는다. 늘 무서운 얼굴의 다네 아줌마였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것이다.


다네 아줌마가 가족으로 받아들인 고헤이를 데리고 사진을 찍는 장면은 인상 깊다. 영화학도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추천한다. 패망하기 전의 영화 방식을 패망 후에도 자기만의 색깔로 고수하며 만들어낸다. 셋방살이의 기록 역시 인간의 관계, 사이, 가족 간의 거리를 오즈만의 방식으로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 몇 편을 보다 보면 다 다른데 다 통일된 흐름이 있고 다 재미가 있다.



#


영화에는 트릴로지가 있듯 오즈 야스지로 삼부작으로 마지막 소개할 영화는 ‘꽁치의 맛’이다. 꽁치의 맛은 오즈 야스지로가 죽기 전에 만든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독신으로 살다가 죽은 오즈 자신의 모습을 오마주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다.


이 영화도 오즈 야스지로 영화 특유의 감각이 돋보인다. 약간 위를 보는 듯한 다다미 촬영기법, 컬러풀한 미장센, 가족과 가족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공백에 대해서 홈드라마식으로 잘 보여준다.


당시 아파트에 형형색색의 빨래가 널린 장면은 60년대 초라는 걸 여실히 무너트리며 누벨바그 장르를 여봐란듯이 보여준다. 오즈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동등하다.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자체가 없다. 초로의 주인공 히라야마의 큰아들은 결혼해서 분가했다. 아들 먼저 퇴근하면 아내가 일하고 들어오기 전에 햄을 볶아서 오믈렛을 만들어 놓는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정년을 앞두고 있다. 일찍 아내를 잃고 분가한 큰아들 내외를 빼고 딸 미치코와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히라야마의 마음속에 늘 돌처럼 꾹 누르는 것은 미치코를 마냥 옆에 두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인다. 하지만 미치코 역시 일찍 시집을 가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 사이에서 소심한 방황을 하는 히라야마. 하지만 결심을 한 뒤로 미치코를 시집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히라야마 주위에는 다양한 삶이 포진해있다. 아내를 잃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과 아직 부부가 오랫동안 같이 사는 친구가 있고, 먼저 잃은 아내를 빨리 잊고 착하고 예쁜, 젊은 여자와 재혼해서 행복해하는 또 다른 친구, 신혼이지만 신혼이라 사사건건 철없이 서로 다투고 삐지는 아들 내외, 딸이 시집을 가버리면 혼자서 외로워서 안 된다며 곁에 두고 있다가 그만 딸이 혼자서 중년의 여자가 되어버려 그것을 후회하는 어린 시절의 학교 선생님, 24살에 시집을 가면서 일을 그만둔 히라야마 회사의 여직원, 미치코가 마음에 둔 큰아들의 회사 남자 직원이 있는데 중간에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다른 여자를 만나버린 큰아들의 후배, 그리고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미치코에 대한 자신의 시선.


이 모든 것이 주인공을 저물어 가는 일 년의 가을 끝에 매달린 꽁치와 비슷하게 보인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미치코를 시집보내고 집으로 들어와 어두운 식탁에서 아 외톨이구나,라고 되뇌며 꺼져가는 밤에 눈물을 훌쩍이는 모습은 아주 정적이며 단순하게 흐른다. 어떤 영화적 테크닉도 없는데 크나큰 울림을 준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늘 그렇구나, 이별이란 그렇구나, 결국 인간은 혼자인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면은 아마도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심정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틀비틀 물을 마시며 테이블에 앉는 그 모습이 아마도 인간의 마지막 힘을 주는 모습일 것이다. 제목이 ‘꽁치의 맛’인데 꽁치가 ‘추도어’다. 가을은 일 년 중에 저물어 가는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황혼의 빛을 낸다. 가을 꽁치의 맛은 처음에는 맛있지만 끝 맛은 끝물에 잡힌 꽁치가 씁쓸한 맛을 낸다. 꽁치를 그저 보는 것으로 맛을 알 수는 없다. 꽁치는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다. 먹기 전에는 꽁치의 맛이 쓴 지, 단지 알 수 없다. 인생은 살아봐야 알 수 있다. 인생이라는 맛이 쓴 지 단지에 대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60년대에 만들었는데 지금 봐도 누구나 재미있어한다. 분명 무겁고 외로운 주제를 다루는데 오즈는 어슬렁 돌아다니며 동네를 구경하듯이 담아낸다. 그 속에 큭큭 나오는 웃음이 있고, 슬픔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애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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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은 문어고 밑으로는 오징어다.

음식으로써 보자면 문어와 오징어의 큰 차이가 있다. 혹시 사진만으로 그 차이를 찾아냈을까.

사진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경험상 우리는 그 차이를 대체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 사진은 오징어 반찬이다. 정확히는 오징어 무채 썰이. 오징어든 문어든 둘 다 음식으로 정말 맛있다. 근래에 이준익의 자산어보도 나오고 해서, 자산어보를 직접 읽은 적은 없지만 소설가 한창훈의 소설이나 그의 바다 에세이(라고 해야 할지)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어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와 바닷가에서 기생하는 갯것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바다 생물은 한창훈이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경험한 생물들이며, 갯것들 역시 그렇다. 그의 에세이에서 각주로 자산어보를 달아놨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자산어보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기대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다 푹 빠져서 보게 되니까.


각설하고 음식으로서 오징어와 문어의 큰 차이를 말하자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징어는 그대로 먹을 수 있고 문어는 삶거나 데쳐서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 그저 그동안 '오징어는 회로도 먹고 했는데 문어는 회로 바로 먹지 않았다' 정도에서 좀 더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기사나 자료보다는, 식당을 하는 사장님들도 자세하게 알 수 있게 설명을 해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오징어나 문어 같은 연체류에 속하는 두족류 중에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오징어와 낙지가 있다. 오징어는 바로 회로 먹을 수 있고 낙지도 탕탕이로 그동안 우리는 먹어왔다. 그런데 문어는 생으로 먹어 본적이 거의 없다. 문어는 데쳐서 먹거나 삶아서 먹지 바로 회를 떠서 먹지는 않는다.


문어가 오징어나 낙지와 다른 점은 문어는 몸통이 거의 없다. 대가리와 대부분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보통 문어는 삶아서 다리 부분을 많이 먹는다. 그만큼 음식으로서 다리가 문어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어를 낙지처럼 다리를 탕탕 쳐서 그대로 회로 먹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나면 사람들이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문어는 낙지나 오징어와는 달리 진액이 엄청 나오는데 그 진액에는 독소가 있다. 다리라고 불리는 것이 다리의 개념보다는 촉수의 개념이다. 그래서 독소가 있는 진액으로 먹이를 잡아서 먹기도 하고 그렇겠지.


그런데 이 진액에는 세균이 가득하다. 균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균이 너무 많아서 바다에서 잡아서 회로 다리를 먹고 나면 심각하게 배탈이 나기도 한다. 문어는 죽고 나면 진액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진액을 전부 제거하고 나서는 문어를 그대로 회로 먹어도 된다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먹으려면 반드시 전문점이나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이게 왜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하냐고 하면 밀가루로 1차적 세척을 빡빡해줘야 한다. 그리고 굵은소금으로 2차적 세척을 또 빡빡해준다. 마지막으로 문어 껍데기를 전부 벗기고 다리 속살을 얇게 저며서 어쩌고 하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회로 먹을 수 있다. 그럴 바에는 늘 먹던 대로 삶아서 먹자. 그래도 맛있잖아.


주꾸미도 회로 잘 먹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보다 질겨서 그렇다고 한다. 주꾸미는 생으로 먹으면 아주 질겨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회로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조리를 해서 먹고 회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으니까 그걸 먹자.


그러고 보면 가축으로 소, 돼지, 닭, 염소, 개, 말 정도로 인간은 제한을 두었는데, 제한을 두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야생동물에서 인간의 범주 속에서 같이 공생할 수 있는 추려진 것이다. 총. 균. 쇠. 인지,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애매하지만 인간은 곰도, 표범도, 산양 등 여러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하려고 시도를 했었다. 그 시기가 정말 오래전부터 다.


곰은 힘도 좋고 잡식성이라 농사에 도움이 될 거라 키웠지만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다. 또 얼룩말도 그냥 말처럼 가축으로 하려고 했지만 결론은 사나워서 가축화가 되지 못했다. 현대사회의 동물원에서도 사육사들이 육식동물에게 사고를 당하는 일보다 얼룩말에게 물리거나 차여서 사망하거나 다치는 사고가 더 많다고 한다. 또 치타도 속도가 빠르고 이런저런 이유로 가축화하려고 했는데 치타는 교배가 아주 기이하게 이루어진다. 암컷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면 그 뒤를 수컷이 또 굉장한 속력을 내며 따라가서 교배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치타가 가족을 이루려면 어마어마한 땅을 보유해야 하는데 그것에서 실패했다. 또 산양 같은 경우는 한 번에 4미터씩 뛰어 올라서 울타리 같은 것들의 실패로 가축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동물을 가축화하려는 노력 끝에 지금의 가축으로 추려진 것이다.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음식 역시 인간이 생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근래에는 인간이 음식을 생존 그 이외의 것으로도 먹기 때문에 눈으로도 먹고 입으로도 먹어야 하는 시대에 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의 베리에이션이 많아졌다. 라면에 마요네즈를 넣어서 같이 끓여 먹으면 아주 고소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러시아에서는 한국 라면에 마요가 아예 동봉되어 있다.


또 생으로 먹으면 안 되는 음식 중에 하나가 장어라고 한다.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장어는 손질하는 사람의 손에 상처가 있어도 안 된다고 한다. 장어의 피가 눈에 탁 들어가고 큰일이 날 수 있다고 한다. 장어류에는 혈청 독이 있다. 피에 독이 있기 때문에 손에 상처로 피가 들어가면 염증이 생기고 곪을 수 있다. 또 눈에 피가 들어가면 눈이 충혈되고 붓고 타오르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우리가 먹는 붕장어나 갯장어의 회는 그래서 피를 싹 제거한 다음에 물에 빡빡 빨아서 탈수기에 돌려서 수분을 싹 말려서 먹는다. 그렇게 해서 붕장어의 회를 먹게 된다. 그런데 혹시 장어를 먹고 기름이 간혹 배탈을 나게 한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건 잘못된 보도라 한다. 장어의 지방은 불포화지방으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한다. 배탈이 나고 병원에 실려가는 대부분의 요인은 피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먹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민물장어, 흔히 뱀장어는 절대 회로 먹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구워서 먹어야 한다고 한다. 불판에 구워 먹는 게 맛있기도 하고 또 양념 같은 것을 발라서 먹기 때문에 맛이 배가 된다. 고독한 미식가도 장어구이와 장어덮밥을 맛있게 먹는다. 뱀장어의 독은 아나필락시스라고 하는데 요즘 뉴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다. 이 아나필락시스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데 반응이 나타나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 독은 단백질 독성이라 가열하면 싹 사라진다고 하니 뱀장어는 구워서 맛있게 먹자. 


장어구이를 언제 먹어 봤지? 울쟈.

삶은 문어는 기름장에 보통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이렇게 마요네즈와 와사비, 땡초를 같이 넣어서 소스를 만들어 먹으면 고소, 킁 함, 매운맛이 싹 올라오면서 문어의 맛있는 다리를 오물오물거리고 칼스버그를 한 모금하면 아주 행복하다.  

오징어는 날 것 그대로 먹을 수 있기에 이렇게 무채 썰이와 함께 밥에 올려 외암 먹으면 역시 행복하다. 이렇게 무 채 썰이에 들어가는 오징어는 늘, 항상 모자란다. 먹다 보면 오징어는 금방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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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패삼겹살이 보통 두툼한 삼겹살보다 나는 좋다. 그래서 집에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하는데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대패삼겹살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집에서는 그냥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보통 사람들이 삼겹살보다 대패삼겹살을 잘 안 찾게 되는 이유는 얇고 비계가 많아서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고 두꺼운 삼겹살에 비해 맛도 떨어진다는 이유다. 내 입맛은 어째서인지 대패삼겹살이 두터운 삼겹살보다 훨씬 맛있는데 주위에서는 내 입맛이 특이하다고 했다. 오래전에 특별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특이한 것으로 바뀌곤 한다. 생각해보면 주위에서 내가 좋아하는 전통시장 안의 돼지국밥집에는 같이 안 가려고 한다. 거기는 주로 할아버지들이 국밥을 먹고 있으며 꼬릿 한 비린내가 난다는 이유다.  


대패삼겹살은 익는 시간도 빨라서 익으면 밥에 싸서 외암 먹는 맛이 있다. 귀찮아서 쌈을 싸서 먹고 하는 걸 잘하지 않는데 대패삼겹살은 재빠르게 익어서 뜨거울 때 뜨거운 밥과 함께 먹기 좋다. 물론 내 입에는 참 맛있다. 대패삼겹살집이 성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대패삼겹살 집에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고 코로나 때문인지 최근에 대패삼겹살 집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의 시내 중심가에도 대패삼겹살 집이 생겼는데 실내가 무척 크고 럭셔리 한 고기 집 못지않게 실내 장식이 되어 있다. 저녁에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보면 늘 사람들이 가득 있다. 코로나 시대지만 가벼워진 주머니 때문에 대패삼겹살집이 호황이다. 늘 사람들이 많다. 맛있게도 먹는다. 그래, 대패 삼겹살은 맛있다니까. 


언젠가 대패삼겹살이 유행일 때 우리가 종종 가는 대패삼겹살 집도 있었다. 일 인분에 천 오백 원하는 곳이었다. 삼인분 정도만 먹어도 어느 정도 허기가 해결될 수 있었다. 밥과 함께 된장찌개를 같이 먹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간 적은 없었다. 분명 저렴한데 친구들과 함께 소주를 마시고 나오면 다른 곳에서 먹은 만큼의 돈은 나왔다. 횟집에 가서 먹으나 치킨을 먹으나 대패삼겹살 집에서 먹으나 나오는 돈은 비슷했다. 그게 참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그래도 ‘저렴한데 맛있어’가 우리를 관통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식당을 단골집으로 정해놓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들락거렸다.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가면 늘 앉는 자리에 친구들 중 누군가는 꼭 앉아서 소주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그냥 그 자리에 껴서 먹으면 된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시절에는 그런 단골집들이 꽤나 있었다. 아무 때나 쓱 들어가서 인사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마시곤 하던 곳이. 그리고 거기에 가면 친구 중에 누군가는 꼭 있었다. 제대를 하고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역에서 디제이를 하던 초등학교 동기가 레코드 카페를 열어서 그곳에 종종 갔던 적이 있었다. 앨범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친구가 레이 찰스의 탁성이나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레이 찰스의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했다. 그 친구가 맨해튼 트랜스퍼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맨해튼 트랜스퍼 멤버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면 주위에 어느새 몇몇의 손님들이 몰려와서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빠졌지만 우리가 자주 가는 곳 중에 단골 대패삼겹살집도 있었다.  


대패삼겹살은 빨리 익기 때문에 성격이 급한 나 같은 인간은 금세 집어 먹을 수 있다. 노릇할 때는 비계의 부드러운 맛이 뇌를 녹일 것 같다. 구워졌다 싶으면 빨리 집어 먹어야 대패삼겹살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구워 놓은지 시간이 좀 지나면 바싹해져서 고기 맛이 나는 썬칩처럼 되어 버린다. 그 맛도 나름대로 맛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해서 먹기도 했다. 대패삼겹살은 아무래도 쌈 같은 거 싸지 않고 익으면 바로 밥 위에 올려 간장에 빠진 양파와 같이 먹는 게 맛이 있다. 이건 이대로의 세계가 좋아, 하며 날름날름 익기가 무섭게 건져 먹었다.


단골집이라 밭에서 상추를 키우는 친구(의 어머니가 키운다)가 그 집에 갈 때는 텃밭에서 딴 상추를 들고 왔다. 직접 재배한 상추는 색감이 진하지 않고 굵지 않으며 크지도 않다. 작고 부드럽고 연녹색의 상추였다. 친구가 상추를 들고 오는 날에는 주인고 같이 앉아서 상추에 쌈을 싸 먹었다. 대패삼겹살 집에서 내주는 상추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럴 때면 주인은 우리에게 6인분 같은 5인분을 그냥 주었다. 주인은 아주머니로 넉살이 좋은 사람이었다. 고독한 미식가 – 세토우치 출장 편 두 번째 맛 집의 주인아주머니 같았다. 같이 앉아서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껴서 같이 하고 손님들의 이야기에 적절하게 참견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간섭을 싫어하는 손님들이 없을 정도로 사근사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의 대패삼겹살 집이 점점 눈에 띄게 줄어들어 거의 사라지더니 굵은 삼겹살이 테이블을 점령했다. 굵은 삼겹살을 먹게 되면 절차가 못 마땅하다. 직원이 와서 이렇게 저렇게 잘라서 알맞게 구워주는데 그것 또한 우리는 별로였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삼겹살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누군가 한 번 갈까,라고 해도 에이 하며 대체로 가지 않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고기는 이제 집에서 각자 구워 먹자, 라는 식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가 오기 전 재작년에 해운대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 거기서 대패삼겹살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생삼겹살과 가격이 같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패라는 게 이런 맛이니까 그저 한 번 먹어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대패삼겹살이 요즘 다시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돌고 도는 유행일까. 이젠 여기저기 대패삼겹살 집이 생겼지만 예전처럼 가지 않게 되었다. 대패삼겹살은 여전히 맛있지만 자주 먹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건 기호도 습성도 조금은 바꿔 놓는다. 그래도 누가 사준다면 날름 나가서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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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의 서재 광고가 참 많이 나온다. 대대적이다, 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주야장천 나온다. 마치 책을 읽지 않는 너희들아, 너희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 정도나 했어, 그러니 닥치고 들어 봐,라고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 시대에 듣는 책 읽기로 그 갈증이 해갈이 좀 된다면 괜찮은 일일까. 우리나라는 성인이 책을 일 년에 한 권 정도 본다고 몇 해전 통계가 있었다. 도대체 통계라는 건 왜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만큼 책을 읽지 않으니 책 좀 읽어라, 라는 말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출판 7위다. 어마어마하게 책을 찍어 내고 있는 나라다. 그러니까 그만큼 읽고 있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도 없는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계속, 꾸준하게 읽는다는 말이다. 요컨대 문화를 소비하는 주 축은 2, 3, 40대 직장여성이다. 그들이 월급을 받으면 읽고 싶은 책을 듬뿍 구입하여 읽고 리뷰를 올리고 인증샷을 찍는다. 그 리뷰가 알음알음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남자들 같은 경우 책보다는 다른 것에 투자하는 경우가 더 많다. 게임이 그렇고 자동차나 낚시 같은 여가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렇다면 게임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책에 투자를 하는 것보다 삶에 있어서 질이 떨어진다거나 덜 현명한 것일까.


먼저 밀러의 서재 같은 어플이 나온 이유를 광고에서 찾아보면 요즘 시대에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눈뜨는 순간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책을 들을 수 있게 만든 것이 밀러의 서재라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어플로 책을 듣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책을 읽는 사람들이 다음이 궁금한데 진짜 시간이 나지 않아서 이동 중에 듣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 그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나 원래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밀러의 서재가 생겼다고 해서 그 어플을 이용해서 책을 읽는다? 글쎄, 정말 그럴까. 물론 광고라는 게 과장이 있지만 광고에서처럼 또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출근길에 책을 들을 수 있어서 집중이 될까.


요즘 시대처럼 바빠진 시대 그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해방 전후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때에도 소공녀라든가 이상한 나라 엘리스 같은 책들이 전쟁통에서도 유통이 되었다. 책이라는 건 바쁜 시대뿐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읽을 사람들은 어떻든 악착같이, 죽기 살기로 읽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소설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바로 그 전쟁통에서도 자신의 어머니가 소설책들을 어딘가에서 구해서 읽게 해 줬기 때문이다. 대부분 까막눈에 책이라는 건 읽지 않았을, 또는 사는 게 힘들어서 책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시절에도 꾸준하게 책이 좋아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서 1, 2대 문인들이 된 작가들이 있다.


백석이 그렇고 김유정이 그렇고 김해경이 그렇고 윤동주가 그랬다. 그 외에 많은 문인들이 고통스럽게 글을 적어서 역사를 남기고 책을 펴냈다. 그 시기를 지나 6, 70년대 신문이 보급되면서 신문에 실린, 매일 연재되는 소설을 읽기 위해 사람들은 너도나도 신문을 받아보거나 잡지를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가 70년대 중후반 티브이가 보급되면서 굳이 책에서 재미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재미있는 것들이 쏟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굳이 책을 읽게 하기 위해 밀러의 서재가 나왔다는 건 좀 뭐랄까, 아무튼 그렇다. 책을 재미로 읽습니까?라고 누가 할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책은 재미로 읽는다. 책이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그래서 읽다가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사유를 하는 것이다. 책을 의무로 읽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밀러의 서재는 300만 구독자가 있고 십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투적으로 광고를 하지만 책이라는 건 원래부터 줄곧 읽던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 하루의 빡빡한 사이클 속에서 읽을 시간이 모자랄 때 책 읽어주는 어플을 이용해서 읽으면 갈증의 해소가 된다, 정도로 생각이 든다.


의문이 드는 건 하루가 정말 빠듯할 때, '책'을 '늘 '읽'는 '사'람'이 하루가 정말 밥도 못 먹을 정돌로 빡빡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나의 팔로우 대부분이 책벌레들이다. 그 속에는 가정주부가 많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도 회사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며 장을 보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어떻든 시간을 내서 한 달에 10권씩 읽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여성은 일까지 하는데 매일 조금씩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루 종일 시간이 남아도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매일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매일 약간의 페이지를 읽고, 매일 일정량의 글을 쓰고 있다. 그러기를 거의 15년째 이어가고 있다. 하루가 엄청나게 빡빡하게 돌아가도 약간의 책은 늘 읽고 있다. 하루가 빠듯하게 돌아가니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서 좋아하는 소설을 읽을 시간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 주차장까지 걸어갈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조금씩 읽는다. 이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장편소설 한 권을 한 달 내에 읽을 수 있다.


책을 늘 읽는 사람이 책을 읽지 못하는 경우는 신변이나 신변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다. 시간의 없음과는 무관하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병이 들거나 입원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럴 때 책이나 읽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기 때문에 책 따위는 보지 못한다. 그럴 때 아픈 사람을 두고 밀러의 서재로 책을 듣고 있을 수 없다. 당연하지만.


나는 읽어주는 것으로 책을 듣던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도 한 번 적었는데 그때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유튜브로 읽어주는 걸 잠들기 전에 왕왕 들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집중해서 듣게 되지 않는다. 소설은 더 그렇다. 집중해서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그렇기에 300만 명의 구독자가 있겠지만) 쉽지 않다. 읽어주는 책에 집중이 되는 경우는 자신이 쓴 소설을 소설가가 직접 읽어주는 경우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전의 김영하의 팟캐스터에서 확인을 했다. 자신이 쓴 소설이나 또는 김영하가 추천해주고 싶은 소설을 직접 읽어주면 다른 것에 신경이 분산되지 않는다.


책은 아니지만 글을 읽어주는 건 오래전부터 유명인의 입으로 계속 해왔었다. 김혜수나 이병헌이 시를 낭독하는 앨범이 판매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정확하고 감정이 실린 언어로 읽어주는 시를 듣게 되면 시에 대해서 또 다른 세계가 보인다. 그리고 여러 학교에서 크고 작은 시 낭독 대회가 열리곤 했다.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모든 학생이 시를 좋아하거나 시집을 읽고 있거나 시낭송 테이프를 듣지는 않았다. 아주 소수의, 몇 명 없는 시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시를 읽고 낭독하기를 즐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밀러의 서재 같은 어플이 취지처럼 썩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도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 위에서 의문을 가진 점인데 그건 아무래도 책을 읽게 되면 좀 똑똑해지거나 현명해져서 삶의 질이 윤택해진다는 것에 접근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좋아져서 행복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과연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에 도달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반적인 행복보다는 일반화가 아닌 부분의 덜 불행화 정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문지혁 작가도 유튜브를 통해서 세세하고 꼼꼼하게 말하고 있다.  https://youtu.be/wq5Op0plgC8


나도 책을 적게 읽는 건 아니지만 나 같은 경우를 보면 똑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 중에도 현명하고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 흘러넘친다. 내가 책을 읽게 된 건 학창 시절부터 시간이 날 때 음악 듣는 것 빼고 딱히 할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로 소설책만 읽고 있어서인지 현실적인 감각은 제로에 가깝다. 자기 개발서를 읽었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자기 개발서를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또 머리가 나빠서 읽고 나서 돌아서면 까먹는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4번 이상 읽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 빼고 세세한 것은 기억이 없다. 특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열 번도 넘게 읽었지만 그저 웃음만 나온다.


내가 매일 책을 읽는 건 습관이 되었다. 일단 습관이 되고 나면 손에 소설책이 들려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이가 처음 인형을 받아 들고 그 인형을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않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인형이 꼬질꼬질해져도 일단 손에 들려 있으면 아이만의 세상은 안정된 세계인 것이다. 이런 습관은 마치 고대시대 궁전에서 치르는 의식처럼 행해지고 있다.


또 어플로는 채워지지 않는 책 고유의 표지 디자인을 영접하는 것이다. 같은 하루키의 책이라도 시대별로, 출판사별로 디자인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손에 쥐고 보는 재미가 있다. 꼭 책의 내용을 읽지 않더라도 칩 키드가 디자인한 북커버를 손으로 들고 본다는, 일종의 성취욕을 채울 수 있다. 게다가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처럼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를 보는 재미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이런 기분 좋은 촉감과 마음에 드는 시각을 어플은 채우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책 읽어 주는 어플은 어쩐지 의무로 책을 읽어야만 하는 기분이 든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장에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다른 책과는 다르게 소설이란 답이 확고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다 읽고 난 후 느끼는 대로 수많은 생각의 결말이 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소설 속에서는 꽤나 현명한 캐릭터가 등장하니 읽으면서 그들에게 이입되어 읽는 동안 주인공들과 함께 소설 속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며 현명함에 도달할 수 있다. 시인이 시를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것인 것처럼.


나는 전자책으로도 책을 읽었고, 들려주는 것으로 책도 읽어 봤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책 읽어주는 어플 광고를 할 만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과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하게 읽어 왔다.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은 꼭 책이 아니라도 책 그 이외의 것에서 충분히 삶의 질과 양을 채울 수 있다. 그 속에는 경험을 통한 지식의 터득도 있고 현명함도 확실하게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 똑똑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상관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꼭 종이책을 선호하지는 않는데 아이패드에도 책이 잔뜩 들어있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에서 보면 좀 불편하지만 종이책을 계속 불안하게 들고 다니며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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