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는 우리나라에서는 잔치음식의 대명사이다. 생일잔치나 돌잔치에 초대되어서 갔는데 잡채가 없으면 어쩐지 허전하다. 그렇다고 잡채가 있다 해서 매달리지도 않는다. 잡채는 언제부터 우리 밥상 위에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잘 갖춰 입은 재미없는 도련님 같은 느낌이다.


잡채는 맛있는 음식이지만 그 맛을 내기까지는 여러 실수를 맛봐야 한다. 자산어보의 변요한이 한 말처럼, 실수가 변명이 되면 실패가 되고 실수가 과정이 되면 실력이 된다는데 잡채를 맛있게 하는 사람은 그런 실수의 과정을 겪었기에 맛있는 잡채의 맛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잡채는 다른 음식과는 다른, 만드는 이의 스토리가 깃들여 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는 잡채를 아주 쉽고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서 따라 하면 비슷하게 맛을 낼 수는 있지만 일단 잡채에 들어가는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찮다. 당면은 찬물에 불려 놔야 하고, 고기는 밑간을 해주는데 간을 하려면 진간장, 설탕, 후추, 참기름, 마늘을 넣어서 밑간을 해서 볶는다. 시금치도 끓는 물에 데쳐서 물기를 또 바짝 짜야한다. 그리고 소금과 참기름 같은 걸로 또 밑간을 해준다. 버섯이나 당근, 양파도 볶아야 하는데 잡채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 같이 볶으면 안 된다. 버섯을 볶고, 양파를 볶고, 당근을 따로 볶아야 한다. 이렇게 잡채에 들어가는 재료가 다 준비가 되면 잡채를 비빌 양념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까다롭게 잡채를 만들어도 다른 음식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 처음부터 인기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치킨을 먹고, 피자를 먹고, 국을 먹고, 밥을 먹고 다 먹고 난 다음 술을 마실 때 안주가 더 필요하다면 잡채를 먹는다. 잡채는 분명 참 맛있는 음식임에는 분명하다. 맛있는 잡채를 맛있게 먹으려면 잡채만 오롯이 밥상 위에 오르면 된다. 잡채는 김밥처럼 적은 양으로 할 수가 없다. 집에서 김밥을 말 때 달랑, 한 줄만 말 수는 없다. 잡채도 마찬가지다.


고독한 미식가에서도 고로 상이 잡채를 아주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 한국 사람이 하는 가게에서 고로 상이 김밥과 함께 잡채를 먹는다. 고로 상이야 워낙에 음식을 맛있게 먹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잡채가 당장 먹고 싶다. 내가 사는 도시의 전통시장에 가면 먹거리 골목 한 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 잡채가 있다. 그곳을 지나가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기며 데면데면 앉은 아주머니들이 잡채를 호로록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배가 고플 때 그곳을 지나치면 앉아서 잡채를 사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잡채가 잔치상 위에서 다른 음식에 비해 약간 홀대를 받는 것처럼 수많은 식당이 있지만 잡채 전문점도 없다. 잡채만 파는 음식점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잡채에는 콩나물을 넣기도 하고, 돼지고기를 넣는 집고 있고, 소고기를 넣는 집도 있다. 잡채는 밥과 함께 먹는 사람도 있지만 잡채를 우유식빵에 싸서 먹어도 아주 맛있다. 잡채도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종류가 많아서 전문점에서 다루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잡채 전문점은 없다. 그러니까 잡채가 먹고 싶다고 해서 라면처럼 해 먹을 수도 없고 잡채 전문점도 없어서 쉽게 먹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잡채는 먹거리가 흘러넘치는 요즘 더 소외되는 게 아닐까. 잡채는 누구나 좋아하는데 아무나 먹을 수 없다.


잡채는 집집마다, 사람마다 잡채에 대한 추억이 있고 스토리가 있어서 잡채가 우리의 밥상 위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잡채를 먹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엄마를 떠올리는 사람,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식에 스토리가 입히면 그 맛은 두 배가 된다. 나에게 잡채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어릴 때 잡채가 밥상에 올라오면 나와 동생 앞으로 잡채 그릇을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잡채는 어린 시절에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잡채를 좋아하는 어린이들도 있겠지만 잡채도 어른이 된 다음에 맛있게 먹게 된 음식이다. 아버지는 자주 먹지 못하는 잡채를 자신이 먹고 싶었을 것이다. 어릴 때 친척들 결혼식에 가면 아버지는 잡채를 가져와서 맛있게 먹으며 맥주를 한 잔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전통시장 먹자골목의 잡채 거리에는 장 보러 온 어머니들이 앉아서 잡채를 호로록 먹고 있다. 잡채를 먹는 동안은 어린 시절에 엄마가 잡채를 해서 생일 상에 올려줬던 추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호호 거릴 수 있다. 잡채는 어른들 마음속에 아직 아이로 남아 있는 마음을 꺼내 준다. 아버지가 되고 나면 아이들처럼 먹고 싶은 걸 마음 놓고 아내에게 만들어달라고만 할 수는 없다.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잡채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들 생일에 잡채가 올라오면 다른 음식에 밀려 저 옆으로 빼놓으면 그제야 아버지들은 잡채를 맛있게 먹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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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를 챙겨 먹기란 어려운 것은 아니나 쉽지 만은 않다. 게다가 나처럼 배달음식을 시켜 먹지 않는 인간에게는 끼니란 정말 여가는 1도 없는 오로지 생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고 결국 끼니의 걱정에서 해방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매일 끼니를 챙겨 먹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거창하게 끼니를 때울 수가 없기 때문에 늘 간결하게 챙겨 먹게 된다. 보기에는 간결한 음식인데 간단하지 만은 않다. 이유는 뭐랄까 단지 배를 부르게 먹는 것보다는 먹는 음식의 영양가 같은 것도 조금은 생각해야 하고 간결한 한 끼를 차리는데 간단하지 만은 과정이 도사리고 있어서다.



멸치 덮밥은 실패도 없고 뒷정리도 아주 깨끗하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맛이 좋다. 그리고 맥주와 아주 잘 어울린다. 멸치 덮밥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맛있게 보였는데 실제로도 해 먹으면 아주 맛있다. 원래는 덮밥 위에 간장소스를 뿌려 먹지만 곁들이는 깻잎무침에 양념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비벼 먹으면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의 멸치 덮밥은 음식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 주인공들은 더 맛있게 먹는다. 박찬일 요리사의 글처럼 추억의 절반은 맛이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란 건 기억보다는 추억으로 그 맛을 내면 깊숙이 간직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맛있는 멸치 덮밥을 해 먹으려면 간단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과정이라는 건 음식을 만드는 과정보다는 저렇게 조리가 다 된, 아주 맛있는 멸치를 구하는 일이다. 촉촉하면서 간이 살짝 배인 멸치가 정말 맛있는데 여기 근처 백화점에만 판다. 매일 파는 것도 아니며 인기가 좋아서 그런지 오후에 가면 다 팔리고 없다. 그저 멸치볶음이라서 다른 곳에서 구입하면 전혀 맛이 다르다. 그러면 한 번 갈 때 왕창 사 오면 되는가? 그것도 어려운 게 많이 비싸다.


멸치볶음을 뭘 어떤 식으로 볶는지 몰라도 집에서 하는 그런 멸치볶음의 맛과는 다르다. 간결하게 보이지만 간단하지 않은 멸치 덮밥을 슥삭삭삭 비벼서 한 입 먹으면 먼저 멸치의 고소한 맛과 살짝 단 맛이 치고 들어오며 밥과 어우러질 때 깻잎의 풍부한 맛이 들어온다. 입 안에서 앙상블을 느낄 수 있다. 이 정도로 간결한 음식을 만들어 먹기 까지가 꽤나 험난한 과정이 있다.


따지고 보면 간결한 음식들은 대체로 간단하지 만은 않다. 제일 간편한 컵라면도 컵라면을 사러 거기까지 가야 하고 컵라면에 스프를 뜯어 넣고 집이나 직장이라면 물도 끓어야 한다. 우리는 컵라면을 먹기 위해 벌이는 이런 일련의 행동을 거의 귀찮아하지는 않지만,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간단하지만은 않는 과정을 거쳐야 끼니라는 걸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음식은 어떤 음식이 맛있냐면 다른 사람이 해주는 모든 음식이 맛있다.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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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글에 집중하는데 세 시간 정도 매일 틀어 놓는 브이로그가 있다. 그저 단조로운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일 뿐인데 그 단단한 단조로움과 반복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매일 몇 시간씩 틀어 놓는다. 늘 비슷한 영상으로 편집을 할 뿐이다. 마치 일기 같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데 보고 있으면, 틀어 놓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브이로그의 주인공의 순환의 일상에서 나오는 백색소음이 작업을 하는데 집중하게 만든다.


그 소리 역시 평소에 늘 지나치며 듣는 소리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기 일쑤여서 무시했던 소음들로 듣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젖은 마음으로 내려오는 하얀 밤의 소리, 낮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어떤 밤의 소리, 그리하여 그 소리로 젖은 마음을 바짝 말릴 수 있는 소리. 시리고 하얗고 투명하게 맑고 더럽지만 사랑스러운 소리. 표현하자면 그런 백색소음들이다.


주인공은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임고생으로 비슷한 여타 브이로그와 다른 점은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사진에서처럼 항상 저 위치의 카메라가 주인공의 일상을 비쳐준다.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약간 위로 올려보는 듯한 다다미 촬영기법을 보는 것 같다.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내려다보는 시야각에 비해 약간 위로 보는 듯한 각도는 안정감을 준다.주인공은 그저 쳇바퀴 굴러가듯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을 하며 점심 먹고 오후 일과를 보내고 퇴근해서 공부를 하는, 단순한 반복의 매일을 순환한다. 고요한 물처럼 재미없을 것 같은 일상이지만 주인공은 그 속에서 작은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요컨대 금요일이면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주말 저녁을 보내는 것이 기뻐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 데이트를 하며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 대해서 행복해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조금씩 더 알아간다. 사람들도 대부분 나도 작은 것에 많이 기뻐한다고 말하지만 썩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작은 일에 기뻐하기보다, 작은 일에 분개하는 경우가 더 있는 것 같다. 김수영 시인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도 분개하는가'를 읽어보면 그 시를 이해하게 된다. 작은 일에 기뻐하는 건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 브이로그의 주인공은 그렇게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주인공이 보내는 일상 속에서 자아내는 백색소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꾸고 그 속에서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자유한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만 일탈이 길어지면 불안해하며 일상을 그리워한다. 일상에서는 일탈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주인공이 일하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다이어리에 글을 쓰는 소리, 구두 소리, 버스 소리, 하루가 저물어 가는 소리는 백색소음으로 편안하다. 그 소리는 나의 소리이며 모든 이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여름에 모든 일들이 집중이 잘 된다. 그 이유 중 하나에 매미소리가 있다. 매미소리를 집중해서 들으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매미소리가 편안하지 않고 시끄럽게 들리는 건 매미소리와 함께 다른 소음이 껴 있어서 그렇다. 시골집 앞마당 평상에 누워서 듣는 매미소리는 음악과 같다. 제목을 붙이면 ‘매미 협주곡 라장조 작품 32’ 정도 되겠다.


주인공은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데 일과 공부를 동시에 한다는 건 내입장에서는 굉장한 일이라고 본다. 나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하고 담을 쌓아서 그런지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봤다. 주인공은 일하는 모습을 제외하고 나면 영상에 넣을 것이 없다며 슬퍼하는 자막은 재미있다. 그렇게 주인공은 오늘도 조금 성장해간다.


주인공도 청춘이다. 현재 취업하지 못한 취준생들은 앞이 깜깜하다. 그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은 꿈을 꿀 수 있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과 다르다. 신해철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는데, 운전을 하고 가다가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보험회사에서 나와서 주유소까지 갈 만큼 최소한의 기름을 주유해준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일만 해라고 하는 사회구조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멈춘 청춘들이 최소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게 이 사회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할 일이다.


'목표'와 '꿈'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청춘인 주인공은 꿈을 향해 일상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까지 위로를 받는다. 미래에 대한 건강한 고민과 작은 기쁨에서 큰 만족을 느끼는 모습에서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던 강의에 초대를 해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 힘든 일상을 단단하게 보내는 모습에서 아마도 청춘들 역시 많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재미없는 일상을 통해서 성장해간다. 무엇보다 매일 경험하는 오늘은 모두가 처음이라 서툴다. 처음부터 뭐든 잘하는 사람은 없다. 코로나가 도래하고 많은 사람들이 화를 많이 낸다. 화를 낼 일이 있으면 당연하지만 화를 내야 하지만 화가 나기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주인공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놓은 상황을 받아들인다. 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일어난다는 걸 주인공은 보여준다. 


주인공이 브이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는데 나부터 위로가 된다. 위로는 실은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받는 일이 많다. 위로라는 건 일상 같은 것이다. 이 브이로그의 주인공을 보면서 일상을 보내는 근사한 방법이란 그 속에서 상상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지치지 않고 브이로그를 만들기를 바라며.


https://youtu.be/gDr96OntC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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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은 어른의 음식 같다. 아니 어른의 음식이다. 군대에서 처음 추어탕을 먹었다. 그 이전의 기억을 아무리 잡아당겨 봐도 추어탕을 먹은 기억이 없다. 군대를 가기 전에 돼지국밥도 먹고, 삼계탕도 먹었지만 추어탕을 먹으러 가지는 않았다. 집에서 추어탕을 해먹을 법도 한데 우리 집에서 추어탕 같은 건 해 먹지 않았다. 일단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추어탕을 할 만큼의 손을 가지지 못했다.


요즘 여고생들과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과 함께 가장 좋아하고 자주 먹으러 가는 음식이 마라탕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마라탕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마라탕에 대해서 여고생들은 자신만의 방법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맛이 다르기 때문에 중독이 되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추어탕에 대해서 물어보면 먹어 보지 못했거나 마라탕만큼 친근한 음식은 아니었다. 흥, 하고 만다.


입대를 하기 전에는 추어탕을 먹어보지 못했지만 군대에서 추어탕은 왕왕 나왔다. 군대에서 먹었던 추어탕은 미꾸리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고등어를 갈아서 만들었지만 맛은 추어탕과 똑같다. 근래에 들어 생각해보면 좋지 못한 미꾸리를 사용해서, 귀찮다고 깨끗하지 않게 세척해서 미꾸리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보다 고등어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고등어로 만든 추어탕도 맛이 똑같아서 산초가루를 넣어서 먹게 되면 풍미가 확 올라와서 한 그릇 더 먹게 된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추어탕을 먹어보고 맛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하고 나서 이상하게도 다른 음식처럼 찾아먹게 되지는 않았다. 보통 맛있는 음식은 찾아서 먹게 되는데 추어탕은 이상하게 눈에 힘을 주고 찾아보지 않는다. 오늘은 추어탕이 너무 먹고 싶은데? 한 그릇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묘하지만 돼지국밥은 찾아서 먹게 되는데 추어탕은 그렇지 않다.


그건 아마도 내가 사는 지역에 돼지국밥은 아주 많고 맛도 다 다르고 들어가는 고기도 달라서 찾아서 먹게 되는데 추어탕을 파는 집은 잘 없기도 하거니와 미꾸리를 사용하던, 고등어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이던 맛이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에 안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음식 중에는 그런 음식이 있다. 짜장면은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맛은 집집마다 다 다르다. 아귀찜도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갈비탕도 그렇다. 그래서 찾아서 가게 된다. 저 집 짜장면은 내 입맛에 딱 맞아, 아 오늘 이 집 아귀찜을 먹으러 왔는데 일찍 문을 닫았군, 갈비탕 한 그릇 먹는 데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나(내가 사는 바닷가에도 이런 집이 있다. 딱 200그릇만 팔고, 들어가는 고기의 양이 엄청나다), 하며 찾아가게 먹게 되는 음식들이 있다. 


그런데 삼계탕은 또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맛이 거의 비슷하다. 특별히 맛있다는 삼계탕집을 가도 특별히 맛이 없을 것 같은 삼계탕집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에서 삼을 넣고 삶아도 삼계탕 집에서 파는 맛과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맛이 다른 음식에 비해 집집마다 맛이 비슷한 음식을 이상하게 잘 찾아가지 않게 된다. 삼계탕도 먹으면 분명 맛있지만 누군가와 만나서 삼계탕을 먹으러 가지 않는다.


파스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많이들 먹으러 가는데, 박찬일의 ‘보통날의 파스타’를 보면 본고장의 파스타 종류가 삼천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모양, 들어가는 재료, 익히는 시간에 따라, 가정집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른데 종류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래서 파스타도 맛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 김치도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르니까.


그러고 보면 라면이 나오는 식당 역시 사람들이 찾아서 가는 것 같다. 라면도 맛이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라면으로 소문난 곳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그것처럼 추어탕도 집집마다 추어탕 특유의 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거의 비슷한 맛인데 비슷하게 맛있다. 전복 추어탕이라는 것을 먹어봤는데 그냥 추어탕이었다. 그냥 맛있다. 추어탕의 그 맛이다.


아마 친구와 만나서 머 먹을래?라고 친구가 물었을 때 대뜸 추어탕이라고 대답하면 오케이! 가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뭔가 음, 그런데 말이야 왜 하필 추어탕이야? 근처에 추어탕 파는 곳이 있기는 있어?라고 할지도 모른다. 여기 유명한 돼지국밥집에는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국밥을 먹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근처에 고등학교가 2군데나 있어서 맛이 좋은 돼지국밥 집에는 거대 제조 회사원들과 고등학생이 앉아서 먹지만 추어탕 집에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먹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재래시장 반찬을 파는 곳에 국도 파는데 추어탕을 파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포장을 해와서 팔팔 끓여서 먹는다. 이렇게 먹는 추어탕의 맛은 알고 있는 그 추어탕의 맛이며 꽤나 맛있다. 사실 추어탕을 잔뜩 사놓고 매일, 일주일을 먹어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할 만큼 추어탕은 맛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어탕은 가끔 먹게 된다. 이렇게 시장에서 추어탕을 파는 날이면 포장을 해 와서 먹곤 하는데 추어탕은 다른 '탕'에 비해 약간은 괄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맛있는데 많이 찾지 않는, 막상 먹을 때는 좋은데 누군가 물어보면 먹고 싶은 음식에서 늘 소외되고 있는,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힘들어서 가정에서는 잘 안 하지만 가끔 아파트에 추어탕의 냄새가 확 퍼질 때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음식이다. 어른들의 음식이라서 그럴까. 추어탕 전문점에는 잘 가지 않지만 누군가 추어탕 사줄게,라고 하면 날름 나가서 먹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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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4-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생짜 그대로 삶아 나오는 남원식 추어탕의 비주얼이 추어탕에 대한 약간 혐오적 선입견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교관 2021-04-20 12: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먹는 거 가리지 않는 저도 그건 좀;;; 한 번 편견이 들어버리면 20대의 기네스 펠트로가 와서 아양을 떨어도 바뀌지 않을ㄹ 것 같아요 ㅎㅎ
 

근래에 음악이나 팝가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쩐지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요즘은 정말 눈이 번쩍 뜨일정도로 전문적으로 지난 팝 가수들의 근황이나 그들이 걸어온 길을 들려주는 유튜브가 많아서 나처럼 그저 예전에 들었던 것들로 썰을 푼다는 건 허구에 가까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누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이 있어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억을 일단 편집을 해버리면 그 속에 허구가 들어가게 된다.


어떻든 오늘 올릴 글을 실컷 적어 놓은 다음 다른 이야기를 올리려고 한다. 일전에 휘트니 휴스턴의 다큐 영화 ‘휘트니’를 봤다. 이 영화는 다른 다큐 영화처럼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로 들이대고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휘트니를 알고 지냈던, 휘트니와 가장 가까웠던 주위의 사람들, 가족 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휘트니의 성장과 나락을 동시에 보여준다.


다큐 영화라는 건 일반 상업영화보다 사실에 근접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고 다큐 영화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큐멘터리를 촬영을 하고 난 다음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허구가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큐영화라고 해서 모든 다큐 영화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만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뉴스도 사실을 전달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닌 경우를 우리는 그동안 허다하게 봐왔다. 뉴스라는 건 이미 1분이라도 지난 사건을 편집해서 사실을 말하기에 완전한 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휘트니'는 카메라를 따라 보는 이가 휘트니의 근 거리에서 뱅뱅 맴돌며 조금씩 휘트니를 알아간다. 근접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휘트니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 극적이기도 하고 더 안타깝기도 하다. 덜 극적이거나 덜 안타깝지 않다. 영화 속 휘트니는 더 행복해 보이고 더 불행해진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회사에서 오시는 시간에는 종종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레코드점이 있어서 밖으로 난 스피커를 통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잔뜩 들었다. 레코드점 이름은 ‘나라 레코드'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신나라 레코드를 따라 한 모양이었다.


나라 레코드점에서는 늘 팝송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스피커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거기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주인아저씨는 60대로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었고 느릿느릿 걸었다. 아직 할아버지는 아닌데 할아버지들이 입는 바둑판무늬 같은 조끼를 늘 입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팝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팝을 늘 듣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스피커에 귀를 이렇게 갖다 대고 있으면 운 좋게도 들어오라고 해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주인아저씨와는 좀 친해지게 되었다. 팝가수들의 가십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이 실린 잡지책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가구풍 전축이 유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반을 왕왕 사주었다. 덕분에 나는 최호섭이 주제가를 부르는 태권브이 앨범도 나라 레코드에서 사주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패티김의 음반도 거기서 사서 포장을 하기도 했다. 


6학년 때 선물로 받은 미니카세트에 휘트니 휴스턴의 3번째 앨범을 넣어서 들었을 때 그 기분이 미미하지만 아직도 가지고 있다. 뭔가 여기 이곳, 어촌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휘트니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대부분 몰랐지만 미국 땅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의 작은 마을의 어린 녀석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생각에 아주 우쭐했다. 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하며. 매일 헤드 셋을 끼고 휘트니의 노래를 들었다. 휘트니처럼 노래를 부르려면 도대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는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잡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니. 내가 만약 흑인이고 거리에서는 흑인은 늘 핍박당하고 놀림당하고, 커서 취직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고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 해야만 하고. 그런데 교회에 가면 작은 어린 흑인 여자아이가 영혼을 건드리는 목소리로 가스펠송을 부르는 걸 듣는다면 어떻게든 이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흑인이라면 휘트니의 노래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휘트니가 아직 살아서 노래를 부른다면 미국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인종차별 사건이 덜하지 않을까.



후에 음악 감상실에 가게 되면서 풍부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카세트테이프가 오래가지 못한다고들 했지만 그때 구입한 휘트니의 앨범을 아직도 이렇게 잘 듣고 있다. 늘어짐 하나 없이. 그랬는데 영화 '휘트니'를 보면 남편의 폭력과 마약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엉망으로 변해가는 휘트니의 모습을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도대체 가장 사랑해서 만난 사람에게 가장 심한 폭력을 당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건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에게 악마가 되기도 한다. 삶이 이렇게도 어렵다.


https://youtu.be/8_90KE0it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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