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가끔 궁리에 대해서 생각을 하곤 한다. 일큐팔사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혔다. 이 곳은 바닷가이며 바닷가에 앉아서 일큐팔사를 읽다가,


고양이 헤시시가 비도 오지 않는데 서럽게 운다. 헤시시는 마치 이 세계와 저쪽 세계를 접합하려는 듯 고독한 소리를 냈다.


헤시시의 소리를 듣고 리틀 피플들이 호우 호우 내려온다. 헤시시는 리틀 피플들과 접합하려 더 크게 울었다. 헤시시의 고독에 겨운 소리를 들으며 나는 궁리에 빠졌다.


궁. 리.

궁리는 생각과 조금은 차이가 날걸. 졸음과 잠의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골이 있는 것과 비슷할 거야. 궁리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궁리에 대해서 생각을 할수록 늪은 깊고 끈적여 발이 빠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들어가고 만다.


궁리는 한문으로 窮理 다.  한문에 대해서도 궁리를 해본다. 한문은 어려워서 당연하게도 멀리하게 되지만 궁리만이라도 한문으로 옮겨 적어 보고 싶다. 그건 꼭 이름을 잃어가는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불러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오래전에는 말이야 사람들이 너도나도 궁리를 했었어. 그건 생존에 관계된 것이거든. 궁리를 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배고픈 자에게 허울 좋은 말을 해봐야 그저 개 짖는 소리로 들릴 뿐이야, 배고픔을 벗어나는 궁리를 하지 않으면 깨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 수밖에 없어.


배고픔을 잊는다는 것. 다양한 감정으로 마음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 그러고 나면 조금 행복해질 거야.

오규원의 시와 영화 라따뚜이에는 궁리가 있다. 그렇게 조금 행복에 가까워진다. 봄이 오면 민들레 홀씨가 된다. 이 많은 형제들 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궁리를 해야 했고 바람을 타고 저 멀리멀리 날아가는 길을 택한다. 바람에 몸을 실어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서 궁리를 한다.


성석제는 투명 인간을 통해 궁리를 말했다. 사실 어쩌면 궁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궁리를 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기를 쓰고 궁리를 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헤시시가 일어나서 리틀 피플들과 손을 잡고 두 개의 달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헤시시는 궁리가 끝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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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스트 맨’은 우리에게 쓸모없을 것 같은, 삶에 무용할 것 같은 예술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이 든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예술이 뭐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술은 인간이기에 인간에게는 반드시, 꼭 필요하다.


동물에게는 예술이 필요도 없고 소용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옆에 예술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술을 직접 행하고 있으며 보고, 만지고, 듣고, 숨을 쉬듯 받아들이고 있다.


옆에서 누군가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말은 지금처럼 살기 싫다는 말이고, 가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립된 것처럼 외로워서 힘들고, 누구도 나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고 회사에서는 나만 소외되고,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된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서 울고 싶은데 누가 볼까 두렵고, 너무 멍청해서 사람들에게 밥값이나 내는 눈치 없는 인간 취급에, 요즘 들어 왜 그러는지 모르게 자꾸 주저앉고 싶다.


이런 힘든 마음을 자동차나 옷 같은 것들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건물이나 냉장고 같은 것으로도 안 된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그림이나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 시를 읽거나 소설을 보게 되면 거기서 위로를 받는다. 어떤 이는 노래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려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아름답기만 한 색채가 빛의 고통으로 빚어낸 산물이라면 예술 역시 예술가들의 고통으로 이루어졌다. 시는 시인의 손끝에서 탄생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즐겁게 예술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즐거움 그 뒤에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술렁술렁 그림을 그렸을 것 같은 피카소도 그림 그리는 것 빼고는 거의 사회생활은 엉망이었다. 예술은 춥고 배고파야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예술은 잔인하다. 그 덕분에 진짜 힘든 이들이 위로를 받는다.


윤여정이 그랬는데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다. 그런데 서러움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 같다. 이 영화 더스트 맨은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영감이 될 영화이고 어떤 장면에서는 감동을 크게 받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곳, 먼지만 가득한 곳에서 예술의 씨앗은 사람의 마음을 타고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60억의 서복보다 훨씬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다.

그러니 예술하는 이들이여 지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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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e-xR_E6v1k


노래를 듣고 갑자기 뭔가에 홀린 듯,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가끔 있다. 유영석이 있는 화이트의 네모의 꿈을 들었을 때 그랬다. 처음 듣고는 그런 느낌이 없었지만 여러 번 듣다 보니 가사가 너무 좋은 것이다. 좋다는 말은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온통 네모난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네모네모 하지 않은데 어느 날 사람들의 머리가 네모가 되는 것이다. 네모가 된 인간이 사람들에게 네모를 쏘아대며 네모를 늘려가는 영화. 점점 네모의 머리를 한 사람들이 늘어간다.


네모의 꿈을 듣고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네모난 것들 뿐인 이 세계의 풍경은 정말 복붙 해 놓은 것처럼 똑같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고, 네모난 조간신문, 네모난 책가방, 네모난 책과 네모난 버스, 네모난 건물, 네모난 학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컴퓨터,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


가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상상하고 생각하게 해 주었다.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온통 네모난 건지. 잘난 어른들의 멋진 말을 우리는 늘 들었다.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라고.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은 정말 얼굴이 네모나게 보였다. 꼰대들의 얼굴은 네모다.


이 네모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둥글둥글하다. 날 때 우리는 동글동글하게 태어났다. 그때는 아마도 엄마의 사랑만으로 태어났기에 동글동글, 네모난 구석이 없는, 각진 구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랑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 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우리의 세계에 시간이 개입한다. 사람의 ‘ㅁ‘ 이 사람의 ‘ㅁ‘ 과 맞닿게 된다. 점점 형태가 일그러져 뾰족한 ‘>’가 되어 서로 찌르고 아프게 한다. 사랑보다 이해를 바라는 시간은 내일의 내 모습을 오늘 얼굴에 그려 놓는다. 어느 순간 보니 내 얼굴에 많은 금이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서야 사람의 ‘>’이 사람의 ‘<‘을 서로 조금씩 갉아서 동그란 ‘ㅇ'으로 바뀌어서 사람과 사람은 사랑이 된다.


네모난 꿈은 초등학교 책에도 가사가 나온다고 한다. 대학교 때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실과 집을 온통 둥글게 설계를 해서 조원들에게 비난과 여러 말을 들었다. 일단 이런 식으로는 기간 안에 모델링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설계로 모델링을 만들어봐야 너무 허무하다, 비록 잠깐이지만 튀는 설계로 해서 해 보자,라고 설득해서 그렇게 밀고 나갔다. 하다 보니 어쩐지 나만 영차영차 열심히 하게 되어서 밤에 다른 조원들은 당구 치러 갔을 때에도 낑낑거리며 뭔가를 둥글게 만드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지금 앉아 있는 내 주위를 둘러봐도 대부분 네모난 것들이다. 키보드, 휴대폰, 아이패드, 화면, 프린트기 등등. 그래도 사람은 네모네모 하지 않다. 손도, 다리도, 얼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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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생선 비린내에 대해서 말했지만 나는 비교적 비린내가 나는 음식을 좋아했었다. 정확하게는 비린내보다는 비린 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했다. 비린맛을 왜 좋아하는지 그건 참 알 수 없지만 대학교 때 자취를 하면서, 군대를 제대하는 시점으로부터 해서 비린내가 나는 음식을 잘 도 찾아서 먹고 다녔다. 자취를 할 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꽁치통조림을 따서 그대로 밥과 함께 먹거나 통조림 채 팔팔 끓여서 술안주로 먹곤 했다. 그게 햄버거처럼 가장 간단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생각해보면 꽁치통조림도 맛과 통조림 모양이 변치 않은 채 라면처럼 굳건하게 오래가는 것 같다.


일주일에 두 번씩 먹고 나면 당연하지만 그다음 날까지 온 집 안에 꽁치 비린내가 영화 속 안개처럼 들어차 있어서 누구도 오지 않았고 왔다가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특히 여자들은 도대체가 이런 냄새를 맡으며 인간이 생활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는 가버리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지들도 그 전날 술을 같이 마셨으면서 다음 날 꼭 모른 척한다. 남중 남고만 나왔는데 대학교에 가면서 여자에 대한 상상이 깡그리 무너졌다. 아침에 눈썹이 반쯤 날아간 얼굴을 보는 건 보통이었다.


어떻든 내가 사는 곳은 고래로 유명하고 어린 시절에는 종종 고래고기가 시장에 수육으로 나와 있어서 부모님이 자주 사 와서 먹곤 했다. 덕분에 고래고기에 대한 비린내에 적응이 되었다고 할까. 요즘은 예전처럼 고래를 잡는 것이 불법이라 고래고기를 잘 팔지 않는다. 아주 가끔 마트에 돌고래 수육을 파는 경우가 있는데 밍크고래나 다른 고래에 비해 돌고래 수육은 비린내가 60배는 더 강하다. 거기에 잘 삶아내지 못하면 비린내는 집을 폭파시켜 버릴 것만 같다. 물론 제대로 된 전문점에서 제대로 삶으면 비린내가 좀 덜하지만 기름으로 둘러싸인 고래고기가 가지고 있는 아주 막강한 비린내를 잡아내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고등어를 구워서 바로 먹으면 아주 맛있지만 고등어구이도 이틀 정도 지나서 먹게 되면 비린맛이 많이 나는 게 아주 좋다. 그러니까 이 비린 맛이라는 것에 한 번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마라탕에 빠지거나 평양냉면에 빠지는 것과 삭힌 홍어를 찾아서 먹는 습성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부터는 비린맛을 찾아서 먹지 않게 되더니 예전처럼 비린맛이 그렇게 썩 맛있지도 않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 겨울까지만 해도 과메기철이면 과메기를 먹었는데, 과메기만 된장에 조금 찍어서 그대로 먹곤 했다. 김이라든가, 미역이라든가, 쌈에 싸서 초장에 잔뜩 찍어서 먹으면 과메기의 비린맛을 느낄 수 없어서 과메기의 맛 그대로를 찾아서 먹곤 했는데 이제는 과메기 철이 되어도 시큰둥해졌다.


오히려 20대에 쳐다보지도 않았던 햄버거나 편의점 음식을 찾아서 먹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주식은 대체로 마트에서 구입하는 식재료와 편의점 음식이다. 그것 참 신기하다. 그래도 가끔 비린 맛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생선을 구우면 어김없이 하루 이틀 정도를 둔다. 숙성을 해 놓은 다음에 먹으면 좋은 비린맛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가끔 와사비에 찍어 먹기도 하고 고추장과 마요네즈를 섞어서 소스를 만들어 찍어 먹기도 하지만 백후추를 뿌려서 먹는다. 하루 이틀 정도 지난 생선구이의 비린 맛에 백후추가 달라붙어 묘한 맛을 끄집어낸다. 비린맛이기는 한데 살짝 비켜간 비린맛이 난다. 백후추는 그냥 후추처럼 강하지는 않은데 생선의 비린 맛과 뭐랄까 기묘하게 어울린다. 절대적으로 맛없고 치약 맛만 날 것 같은 민초 빵이 의외로 술과 어울리는 것처럼.


백후추는 그냥 후추보다 맛은 떨어진다. 그런데 또 어울리는 곳이 있다. 생선구이에 그냥 후추는 어울리지 않지만 백후추는 또 어울린다. 그리고 분무기 형식으로 칙칙 뿌리는 싸구려 트러플 오일 향이 나는 소스가 있는데 그것과 같이 먹으면 비린내가 꽤나 고급진 맛으로 바뀐다. 그저 비린내만으로 먹던 음식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그렇지만 백후추가 있으니 괜찮다. 그렇게 바뀌는 관계들로 삶은 이루어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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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바뀌었다. 이번 오월에는 전시회를 연다. 지금 거의 준비가 끝났다. 사월 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코로나 이후 이 도시에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연일 수십 명씩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전시회에 아는 사람 그 누구도 초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 기묘한 전시회가 될 것 같다. 2021년도 사분의 일 분기가 지나가고 일 년 중에 가장 푸르른 달로 접어들었다. 어린 시절의 오월에는 풀 냄새가 주위에서 진동해서 흠 하며 향기를 많이 맡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이 제대로 된 기억인지는 나도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근래에 강변을 달리다 보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럴 때면 늘 기시감에 젖는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곳을 조깅하지만 가끔 일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좀 더 이른 시간에 나와서 조깅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조깅은 목적이기보다 그저 대상이 되고 조깅을 하며 지나치는 풍경이나 모습을 멍하게 보기도 한다. 강을 보며 강멍하기도 하고, 하늘을 보며 하늘멍을 하기도 한다. 벤치에 앉아 멍하게 강을 보고 있으면 정말 멍하게 된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다. 생각보다는 환상이나 공상 쪽으로 기울다가 다시 멍해진다. 그리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본다. 이럴 때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 나온다면 꽤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저기로도 갈 법한데 이상하게 저기에서 여기로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인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몇 컷 찍어본다.

매일 달리지만 매일 조금씩 비겁한 곳에 살은 더 찌는 것 같다. 옷을 입고 있으면 전혀 표가 나지 않지만-체육복을 입고 있으면 아버님들이 멋있다고까지 하는 말을 아주 가끔 듣지만 매일 조깅을 하는 것과 매일 안 보이는 곳에 살이 붙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정면으로 달려가기 전에 하늘과 조깅코스를 담아본다. 이 사진 속의 색채는 십육만 가지 컬러가 채색되어있는 것만 같다. 하늘이라도 저 먼 하늘의 색과 가까운 하늘의 색은 다르다. 이런 장면을 보면 나는 늘 하는 말이 있다. 괴테는 색이란 빛이 고통으로 빚어낸 것이라서 세상에서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 역시 부모가 고통 속에서 탄생시켰기에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전부 다른 모습이며 각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비가 내리고 나면 강도 고요해서 푸른 색감과 반영의 멋진 장면을 담을 수 있다. 암청색에 가까운 푸른 색감은 새벽과 하늘이나 물빛에 어울린다. 오래전 감성을 건드렸던 필름 사진 같은 기분도 잠시 낼 수 있다. 이런 날만 되면 사람들 중에 얼굴이 파랗게 변하는 바이러스에 걸려 다른 사람들을 먹으러 다니고 점점 사람들은 얼굴이 파랗게 변하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얼굴이 파랗다고 하면 스머프가 제일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스머프 하니까 하는 말인데 혹시 스머패트를 기억하시는지. 스머패트는 원래 스머프가 아니라 갸갸멜이 스머프들을 잡기 위해 만든 복제 스머프였다. 남자들만 있는 스머프들을 미인계로 잡는다는 계획이었지. 갸갸멜은 실은 물리학보다 화학에 천재성을 보인 과학자였다. 그런 갸갸멜이 스머프 일망타진을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테크놀로지 스머프가 스머패트라는 거지. 하지만 물리학에서 좀 벗어나게 만들어졌는지 파파스머프로 인해 순화되었다. 이후에는 완전히 스머프가 되어서 아픈 스머프를 간호해주며 돌보게 된다. 스머프 종족은 어떤 식으로 번식을 하는 것일까. 전부 남자인 스머프 마을에 스머패트 혼자 여자다. 후에 사세트가 등장하지만 사세트는 어린이였다. 단 한 명의 여자로 살아가는 인생이란 어떨까. 아기 스머프는 어떻게 탄생할까. 똘똘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배짱이 스머프 등 심지어 파파 스머프까지 스머패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파파스머프 때문에 마법으로 스머패트는 박애주의자가 된 것일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 보색 대비의 느낌을 낼 수 있다. 겨울을 벗어난 나무와 들판의 풀과 꽃들은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하늘은 한껏 석양의 그것을 뽐낸다. 그 반대되는 대비가 조화롭다. 이 세상은 그런 대비의 조화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땅과 하늘이 그렇고 아이와 어른이 그렇고 남자와 여자가 그렇고 패션리더와 패션 테러분자가 그렇다. 그렇게 말하고 나의 복장을 보니 테러를 일삼아도 크게 일삼는다.

이른 시간에 나오면 몇 시간 달리며 걷다가 저녁이 된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며 나와 무관한데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후배가 얼마 전에 단편영화를 하나 찍는다며 시나리오를 들고 왔는데 이런 내용의 시나리오였다. 내가 읽기에는 꽤 철학적이라 내가 잘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응원을 보낸다.

하늘은 그대론데 구름이 매일 다르다. 그래서 하늘은 볼 때마다 같은 하늘은 없다. 구름은 눈에 보이지만 만질 수는 없다. 지구 상에 그런 물질이 우리 주위에 상시 존재한다. 바람도 느낄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고 빛도 눈에 보이지만 촉감을 느낄 수 없다. 바다도 강도 그리고 안개도 그렇다. 이런 물질과는 다르지만 벌레는 만질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다. 바퀴벌레도 만질 수는 있지만 그럴 수 없다. 까마귀도 눈에도 보이고 만질 수 있지만 만지려는 사람도 없고 역시 그럴 수는 없다. 얼마 전에 영화 ‘더 파더’를 봤다. 더 파더의 리뷰를 한 번 따로 적겠지만 정말 공포를 체험했다. 인간은 왜 늙을까, 늙어서 치매라는 것들이 왜 걸릴까, 인간도 애초에 고양이처럼 40세 정도까지만 살면 더 좋을 텐데. 그러면 40년 안에 80년 동안 해야 할 것들을 해야 하니까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을 텐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 저녁이 하루를 덮는 시간이면 하늘에 빛을 내는 공이 뜬다. 저 멀리 떠 있는 공은 어딜 가나 보인다.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어딜 가도 빛나는 공이 보인다. 나무에 빛나는 공이 걸릴 뻔 하기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빛나는 공이 작아지기도, 마치 자연주의적 그림 같은 사진에서도 빛나는 공이 단연 돋보인다. 

예전에는 사진 속에 전깃줄이 나오면 신경질 적으로 그 선들을 다 지웠는데 언젠가부터 사진을 더 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전깃줄이 없었다면 너무 완벽한 그림이다. ‘너무’라는 부사는 예전에는 부정적인 의미였기 때문에 너무 완벽하다는 말은 완전무결하다는 말이며 완전무결한 것들은 마음이 없거나 감정이 소거되어 늘 이성이 모든 걸 검열한다.

골목의 저 끝에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이런 장면은 언제나 정겹다. 차갑게만 보이는 골목에 들어온 가로등 불빛은 따뜻하기만 하다. 골목이라는 자체가 현재의 격차를 보여주는데 골목에서 마주하는 집에서마저 또다시 격차가 느껴진다. 이 동네 사람들은 주일이 되면 저기 교회에 가서 다 같이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할까. 기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내 차례가 되려면 아마도 98년이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되니 인공광원과 자연 광원이 동시에 하늘에 떴다. 자연광과 인공광은 멀리서 보면 참 비슷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인공광에 비해 자연광은 절대 가까이서 볼 수는 없다. 형형색색 인공광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밤 풍경을 수놓는 건 네온의 아름다운 불빛들이다. 만약 단색의 인공광이거나 불빛이 없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불만을 내뱉으며 욕을 할지도 모른다. 인공 불빛은 따뜻하게 보이지만 광합성이 없고 자연광은 생명력이 강하지만 그만큼 눈과 피부에 좋지 않다. 모순은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불편한 진실을 잔뜩 안고 있다. 당분간 아랑 미용실은 좋겠다. 달과 등이 한꺼번에 미용실 앞을 비추니.

일상 그리고 또 일상이 오늘도 지나간다. 그리고 내일도 지나갈 것이다. 그 속에서 만나는 해와 달, 전깃줄, 흐르는 강물, 건물, 나무와 풀, 스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게 나를 이루고 있고 모두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나와 무관한 것들로 인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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