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육은 정말 우리나라에만 있는 음식이 아닐까 싶을 만큼 한국적이다. 사실 한국적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편육은 잡채처럼 보통 잔치집이거나 장례식장에서나 먹을 수 있어서인지 편육에 대한 내밀한 기억들은 아마도 ‘어른'이나 ‘잔치’ 내지는 ‘외가’ 같은 단어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족발은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또 편육은 잘 볼 수 없다. 편의점에서 편육을 팔지만 나는 아직 편의점에서는 편육을 사 먹어 보지 못했다. 시장의 족발집에서 편육도 같이 만들어 파는 경우가 있는데 매일 나오는 족발에 비해 편육은 뜨문뜨문 올라올 뿐이다.


사진의 저것은 닭발 편육이다. 아파트 앞의 중형마트에서 파는데 매일 나오지 않으며 어쩌다 가끔 나온다. 그래서 나오면 마트에서 연락이 온다. 어쩌다 보니 마트와 그런 관계가 되었다. 편육이 먹고 싶어 한 번 사 먹고는 계속 찾으니 마트 측에서 나오면 연락을 준다. 관계라는 건 강 사이에 놓인 다리처럼 전혀 왕래가 없을 것 같은 저쪽과 이쪽을 연결시켜준다. 그러다 보면 편육을 사러 가서 이것저것 수다를 떨곤 한다. 어쩔 때 나를 내가 보면 전혀 나 같지 않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닭발 편육은 돼지편육과는 좀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면 닭발 맛이 난다. 또 보통의 편육과는 다르게 매콤하다. 내 입에는 꽤 맵다. 거기에 썰려있지 않고 통 짜로 포장이 되어 있는데 사들고 와서 직접 썰어서 먹어야 한다. 나처럼 귀찮음이 가득한 인간이 썰면 사진에서처럼 굵게 썰어서 먹게 된다. 볼이 볼록하게 되어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맛있음을 두 배로 올려준다. 아쉬운 점은 자주 사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편육은 이인자의 느낌이다. 늘 족발에게 일인자의 자리를 내주면서도 이인자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인자의 자리로 오르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가끔 이렇게 매콤함으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족발을 사 오면 달려드는 가족에 비해 편육은 또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의 술안주로도 좋다. 편육에 대한 추억은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편육을 접하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분명 잔치하는 집에서 먹어 봤을 것이다.


예전에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갓집에 가서 편육을 먹었는데, 친구는 종손에 장손이었고 상갓집은 경주 양남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마을에 있는데 마을 전체가 무슨 무슨 파로 한 마을 사람들이 다 친척이 되는 아주 큰 집안이었다. 그곳의 대들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대대적인 상을 치렀는데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마당의 한편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직접 만들었다. 편육도 직접 만들어서 먹다 보면 돼지의 털이 덜 뽑혀 입에서 막 씹혔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편육을 몇 접시나 먹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어른들도 편육은 잘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편육 특유의 식감과 맛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나에게 편육을 이만큼 싸주기도 했다.


야호 하며 집에 들고 와서 먹으니 또 현장에서 시끌벅적하게 먹었을 때만큼 맛이 나지 않았다. 기묘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식당에서 맛있게 먹는 음식을 똑같이 포장해서 집으로 와서 먹으면 식당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식당에는 은은한 조명과 식당 안에 퍼지는 맛있는 냄새, 테이블마다 행복하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음식 맛을 더 끌어올려준다. 여자들이 왜 분위기 있는 카페나 식당을 가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되었다.


편육 전문식당도 있으면 참 좋겠지만 없다. 아무튼 편육은 이인자다. 이상하게 편육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다. 자취를 할 때에도 족발이나 편육은 술안주로 먹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잘 먹지 않았고 사진을 찍는다며 타지방을 하릴없이 돌아다닐 때에도 각 도시의 전통시장에서도 편육은 사 먹지 않았다. 없어도 그만인 음식이 편육이다. 편육 같은 음식도 세상에 아주 많다. 그래도 누군가는 또 편육을 만들어 팔고 어떤 사람은 편육을 사 먹는다. 닭발 편육을 먹고 있으면 이 도시의 시내 중심가에 유명한 닭발집이 있는데 거기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공간에서 장사를 했다. 처음의 닭발은 닭발 본연의 모양이었다. 뼈가 다 붙어 있는 닭발이었다. 닭발은 연탄에 구워서 판다. 그래서 연탄의 불맛이 닭발에 스며들어 아주 맛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해서 공간을 넓혔다. 공간의 벽을 부수고 그 뒤를 뚫었다. 그러면서 닭발 주인의 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닭발집에서 일을 하더니 며느리, 또 다른 아들, 이렇게 해서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안주도 하나둘씩 늘어났고 닭발도 뼈가 없는 닭발도 생겨났다. 이제 닭발은 체계적으로 구워서 판다. 한쪽에서는 초벌구이를 열심히 하고, 옆에서는 주문이 오면 한 번 더 구워서 테이블로 나간다.


참 이상한 게 규모가 커지고 메뉴가 늘어나면 이상하게 더 이상 안 가게 된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초반의 맛도 변한다. 근간에 한 번 가서 먹을 때는 추세에 따라가서 그런지 너무 매웠다. 여성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매운맛이었다. 그래서 여자 손님들이 많다. 여자 손님들이 많으면 남자 손님들도 많아진다. 따지고 보면 그 집은 그대론데 우리가 변한 것이다. 단지 우리는 변화하지만 변함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인간은 이런 사소한 것에는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싶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닭발 편육은 가끔 이렇게 먹는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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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그림처럼 너무 예쁘다. 저녁 7시경, 오월의 모습이다. 이런 색감과 이런 잔잔함과 이런 고즈넉 과 강물 위의 이런 실루엣은 딱 이맘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 미미하게 번지듯 퍼지는 보색 대비의 색감이 이렇게나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일상에서는 일탈만큼의 특별한 자유는 없지만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늘 있다. 아침에 눈 뜨면 보이는 커튼과 자주 가서 마시는 커피의 향과 주인과의 눈인사. 저녁이면 늘 달리는 곳의 소소한 변화가 일상을 반기고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재미 또한 쏠쏠해서 비슷하지만 다른 기분을 가진다.


이 코스모스처럼 보이는 꽃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서 찾아보니 코스모스가 맞다. 여름이 지나야 피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경종 같은 것을 알리려는 것일까. 코스모스가 5월에 피는 이유를 찾아보면 과학적으로 이유가 분명하게 있지만 지금은 그저 제철을 잊어버리고 자태를 뽐내기 위해서 세상 밖으로 나온 코스모스만 이야기하자. 코스모스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고 예쁘다고 칭찬받는 봄에 피는 꽃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모두가 활짝 피는 봄에 특별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모든 꽃들이 그저 우르르 만개하지만 사람들은 정말 눈에 띄는 꽃들에게만 관심을 보인다. 그럼에도 모든 꽃들은 봄에 피기를 간절히 바랐다. 코스모스도 가을에 얼굴을 내보이기보다 봄에 사람들 앞에서 자태를 뽐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계절을 앞당긴 건 아닐까.


이름 없는 들꽃아,

모두 피는 봄에 같이 피지 못 한다고

슬퍼하지 마라.

설중매는 홀로 설원에서

꽃을 피우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샛노란 꽃도 코스모스인  알고 아름답네예쁘네 같은 생각을 하다가 검색을 해보니 금계국이라는 꽃이었다국화의  종류라고 한다금계국이 강변에 이렇게 활짝  때면 흐린 날도 아름다운 날로 탈바꿈시킨다꽃의 노란색은 원색에 가까운 노란색이다우리가 보통 눈으로 보는그러니까 가시광선을 통해서 보는 색감은 모두 컬러가 섞여있다검은색도 실은 검은색이 아니며 노란색도 노란색이 아니다하지만 꽃이 지니고 있는 노란색은 그야말로 노란색이다원색에 가까운쨍하고 깨끗한순수한 노란색에 가깝다그래서 디지털 이전 필름 회사들은  꽃이 지니고 있는 노란색에 가까운 색감을 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그래서 코닥 필름이  시간 동안 필름으로 이름을 떨칠  있었다노란색 꽃이 예쁘게 나온  근래의 영화 '아이들은 즐겁다'에서 다이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한 재경이가 찍은 다이의 노란 꽃이다아이들도 예쁘고 영화  사진 속의 꽃도 예뻤다금계국이 이렇게나 활짝 피어 있을  강변으로 가자강변으로 일단 나가면 재미있는 장면도 많이   있다일단 일어나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저메키스 감독의 폴라 익스프레스는 믿음에 관한 내용이지만 주인공 소년이  기차를 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발점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깅을 하다가 한 동네를 거쳐 오다 보면 오래된 빌라의 색감과 노을 진 구름의 색감이 비슷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 빠진 빌라의 벽의 불그스름한 색감과 아직 제대로 붉은빛을 발하는 계절이 오기 전의 노을의 색감이 비슷하다. 딱 이 정도의 색감이 좋다. 여기서 더 붉어진다면 영화를 너무 봐서 그런지 꽤나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6월이 지나 7, 8월의 저녁 시간에는 붉은 노을이 아니라 빨간 노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금계국이 피기 전의 사진이다. 위의 금계국이 핀 곳과 같은 곳인데 금계국이 없는 강변이 슬펐던지 역시 하늘에서 미미한 붉은빛을 띠운다. 나를 보며 따라와, 그러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닿을 수 있을 거야. 정말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마스크를 쓰고 조깅을 하는 건 정말 짜증이 난다. 마스크 안에 찬 땀이 케이 에프 94 때문에 밖으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마스크 안에 세균이 번져 수포가 바글바글 생겨 탁 터지면서 그 안에서 꾸물꾸물.라는 상상을 해봤다.


길거리 오브제를 만났다. 이제 못 쓰게 되어 버려진 청소기를 바라보는 벽화는 이제 너는 쓸모없는 놈이구나. 라며 핀잔을 준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낸 로봇 청소기는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새로운 고성능 로봇 청소기가 들어옴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마치 오래전 영화 아이로봇에서처럼 헌 것들은 새 것에 의해 버려지고 찌그러져 한낱 쓰레기가 될 뿐이다. 벽화의 그림은 우리도 원래 쓸모없는 놈이었어. 자 이제 우리와 함께 가자, 이 문을 열고 우리와 함께 가는 거야,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네가 해야 할 일들이 가득 있어, 모두가 널 좋아할 거야. 그래서 다음 날 청소기 주인은 쓰레기차에 분리수거를 하려고 나가보니 로봇 청소기도 없고, 그림의 벽화도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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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의 영화 버전 ‘아이엠 히어’는 딱 요즘의(코로나를 소거하고) 이야기다.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에서 레스토랑을 하는 중년의 스테판은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한국 여인 ‘수‘와 대화를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상상을 하게 된다.


매일매일 인스타그램의 메시지로 대화를 하다 보니 수가 좋아지고 무료하고 자신만 왕따를 당하는 것 같은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진 스테판은 한국은 벚꽃이 지금 예쁜 시기고 같이 보면 참 좋겠다는 수의 한 마디에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기분이 하늘 끝까지 오른 스테판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에게 메시지를 넣는다. 비행기 시간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아이엠 히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수의 아이디를 단다.


그렇게 8시까지 만나기로 한 수는 나오지 않고 스테판은 공항에 머물며 수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한국인들과 조금씩 친해지게 된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술을 마신 한국인들과 같이 사진을 찍으며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를 단다. 그러기를 일주일이 지난다.


스테판은 그동안 공항에서 먹고 자며 수를 기다리지만 수는 나타나지 않고 스테판의 사진은 점점 인스타그램을 채우고, 그럴수록 몇 명 없던 팔로워들이 삼천 명이 넘어가며 스테판의 이야기는 인스타그램을 타고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프렌치 러버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한국 여인을 찾아서 무작정 서울로 와서 공항에서 그녀를 기다린다며 뉴스에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점점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간다고 느낀 스테판은 그녀가 일한다는 건물을 찾기 위해 공항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수. 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꾼다. 일상에서 일탈을 맛보게 하는 것이 렌선이다. 렌선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일탈을 즐긴다. 터트릴꼬얌게이트를 연 주인공의 인스타그램도 인터넷 사진을 퍼 와서 마치 자기가 그 카페에 간 것처럼 적어 넣고, 피자 사진, 화장품 사진도 다 인터넷 사진을 퍼 온 걸 마치 자기가 그걸 사용하고 먹은 것처럼 올렸다가 지금은 폐쇄되었다. 일탈에 미치게 되면 정말 그렇게 다 들통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스테판은 수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일탈 속에는 일상에서의 편안함이 없다는 걸. 그리고 일상 속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정말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라든 걸 깨닫는다. 영화를 보면서 든 두 가지의 생각. 하나는 인천공항의 여러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정말 크고 넓구나, 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배두나는 영어, 일어, 프랑스어까지 도대체 못 하는 게 무엇일까. 킹덤 3에서 전지현과 배두나는 또 어떤 모습일지 빨리 보고 싶네.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한 단어는 ‘눈치’다. 눈치가 전혀 없는 스테판은 눈치 없이 그저 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한국으로 수(배두나)를 찾으러 와서 매일 인스타그램에 수의 아이디를 태그 한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수에게 눈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눈치가 없어서 스테판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른다. 그저 만나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던 스테판과 달리 수는 그저 넷 상으로만 연락을 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이 일상에서 일탈을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실지로 눈치가 없으면 사회생활이 힘겨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미용사는 손님에게 눈치 없는 게 인간이야?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사회생활이라는 건 그 안의 인간관계를 말한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평행 관계가 아닌 그 외의 인간관계에서 눈치가 없다는 건 사회생활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눈치가 너무 없으면 그 마저도 알 수 없으니 어쩌면 일말의 눈치도 없는 게 그냥 눈치가 없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지도 않을까 싶다.


언젠가부터는 눈치가 없는 걸 허당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이 허당이라 불리며 귀여움을 받지만 실생활에서 허당은 주위를 힘들게 한다. 눈치가 없고 허당인 사람은 아부가 없다. 아부가 없다는 말이 윤리적으로는 도덕적으로 들리는 말이겠지만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다. 아첨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첨이란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는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와는 다르게 아부는 뭐랄까, 아부를 잘한다는 말은 눈치가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허당인 사람은 회사생활보다는 혼자서 하는 일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눈치가 없다면 분명 일을 하는 도중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어쩌면 자기만 모르고 따돌림당할 수도 있다. 회사의 상사는 오히려 눈치 없이 상사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더 바랄지도 모른다. 박연준 시인도 에세이에서 자신은 허당이라서 어쩌도 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허당인 박연준 시인은 혼자서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생활의 인간관계에 금이 갈 일은 없다. 아무튼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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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에 대해서 찾아보면 조선까지 올라간다. 유명해서 이제는 다 아는 도루묵 이야기. 선조 임금이 피난길에 은어를 먹었는데 너무 맛이 좋아서 후에 다시 먹어 보니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했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도루묵이라 불리는 도루묵을 우리 집에서는 조림으로 많이 먹는다.


커서 생각해보면 조림보다는 전어구이처럼 구워서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데 구이를 해 먹고 나면 그 연기와 뒤처리가 엉망진창.


조림으로 먹으면 좋은 것은 무를 같이 조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무가 도루묵의 맛과 양념을 듬뿍 빨아들여 아주 좋은 맛을 낸다. 무는 조림을 만나서 정말 다양한 맛을 낸다.


도루묵 조림은 어린 시절에는 썩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도루묵은 아버지가 좋아했다. 제철이 겨울이라 겨울의 어느 날 퇴근한 아버지는 후후 손을 불며 들어와 씻고 밥상에 앉는다. 냄비 뚜껑을 열면 연기가 올라오며 조림의 향이 방안에 감돈다. 가시가 많아서 어릴 때에는 거들떠도 안 보는 생선인데 아버지는 일일이 발라서 동생과 나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밥반찬이었던 도루묵 조림은 이제는 어엿해져서 맥주나 와인 안주로 먹고 있다. 도루묵이 요즘에는 잔잔하다. 그래서 어쩌면 그냥 먹기가 더 편한 것 같다. 가시도 그냥 잘근잘근 씹어서 먹으면 된다. 조림 맛이 처음에 나지만 뼈를 계속 씹다 보면 고소한 맛도 많이 난다.


우리는 말짱 도루묵이다.라는 말을 한다. 꽝이라는 말이다. 근데 위의 어원처럼 도루묵은 도로 갖다 놔라, 뭐 이런 의미처럼 들린다. 말짱 도루묵이다는 말은 어쩌면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파생된 것은 아닐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아버지와의 도루묵 조림을 먹는 시절이 그리워서 그때를 추억하며 현재의 도루묵을 먹을지도 모른다. 실컷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면 참 기운 빠지지만 다시 결과를 만들어냈을 때는 또 두 배의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


말짱 도루묵이라서 좋다. 그런 음식도 도루묵이 처음이고, 추억의 맛도 떠올리고 안주로도 딱 좋은 도루묵 조림을 오늘도 오물오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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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5-2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는 도루묵이 하도 많이 나서 리어카에 실어 갔다 버릴 정도였었죠.도루묵은 생선 취급도 해주지 않던 시절이었죠. 지금은 금테를 두르고 있지만요.
이것이야말로 말짱 도루묵 현상이 아닐까요?ㅎㅎ

교관 2021-05-28 11: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ㅎㅎㅎ. 정말 말짱 도루묵이 된 경우가 요즘엔 많은 거 같아요. 아귀도 그렇고, 멍게도 그렇고,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저도 그렇고 ㅎㅎ. 개개인 각각 누구나 다 금테를 두르고 있는 거 같습니다
 


2007년 시카고의 역사책을 쓰려고 하던 아마추어 사진작가 존 말루프는 역사책을 쓰는데 필요할까 싶어 동네 창고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서 30만 장이 넘는 사진 필름과 상상을 넘어버린 잡동사니를 구입하게 된다. 몇몇 사진을 인화해서 프로 사진가에게 보내보곤 했지만 답이 없어서 그저 처박아 두었다가 그 필름을 스캔을 하기로 한다. 스캔을 해서 봤더니 1950년대부터 1970년의 시카고와 뉴욕의 풍경, 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이었다.


존은 일일이 스캔을 뜬 파일을 사진 블로그를 만들어 올리게 된다. 그리고 자고 일어났더니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하기에 이른다. 놀랍다, 굉장하다, 감동적이다, 마음에 쏙 들어요, 감탄밖에 안 나오네요, 놀라운 발견, 고마워요, 대단해요 등 반응이 엄청났던 것이다.


존은 사진들을 뉴욕 미술관에 보내지만 퇴짜를 맞고, 자신이 사진 전시회를 직접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일일이 사진을 인화하고 다듬고 액자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존이 봤을 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은 잘 나온 사진보다 정말 좋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시카고 문화센터에 전시를 신청하게 되고 그 결과는 역대 최다 관람객이 보이면서 정보라고는 오직 이름뿐이었던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가 시작된다.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 모든 매체는 거리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에 주목하기 시작하고 존은 비비안 마이어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을 보면 주로 인간을 담았다. 수필은 강과 바람 바다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소설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사진은 보는 이들의 똑같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사람을 담은 사진에는 각각 다른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로베르 두아노의 익살스러움도 있고, 샐리 만의 빛도, 다이안 어버스의 금기를 담은 사진도 있고, 앙리 카르티에 브레숑의 찰나도 사진 속에 있었다.


메리 엘렌 마크가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았다. 그녀가 비비안의 사진에 대해서 놀라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사진을 담아냈다고 한다. 초상권이나 저작권 개념이 없었던 시대였지만 비비안의 사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건 사람들을 담기 위해 요즘처럼 망원렌즈 같은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그 사람을 찍기 위해, 촬영하기 위해, 그 사람을 담기 위해 그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는 것이다.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같은 사진은 담아낼 수 없다. 비비안 마이어의 행적을 보면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사진은 그녀를 ‘관계’에 대해서 다가가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화장실에서 흔히 찍는 셀카의 개념도 제일 먼저 도입한 사람이 비비안 마이어였을지도 모른다. 그 이전의 사진가들은 전혀 거울에 리플렉션 되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보다는 개념이 없었다. 95년도에 일본의 히로 믹스가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일본 열도와 전 세계 사진 바다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그때 히로 믹스가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코니카 빅 미니로 셀카를 찍었지만 비비안 마이어가 훨씬 이전에 이미 시도를 했다. 하지만 비비안 마이어는 아마추어 무명이라 그녀의 사진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영화는 비비안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매개로 서서히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간다. 이 다큐의 특징이라면 다큐멘터리의 확정적인 개념에서 살짝 벗어나 비비안의, 비비안이라는 사람의 미스터리를 비비안의 물건을 가지고 하나씩 풀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비비안 마이어를 통해, 그녀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순열주의’ 또는 ‘집단주의’ 또는 ‘엘리트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무명, 아마추어가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창조물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엘리트주의 속에 속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할까. 지금도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작금에서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높이 평가하는 사진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과 다르게 말이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피카소 역시 냉대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재능은 자신 혼자서는 무리다. 그것을 발견하고 키워주고 유지시켜주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것을 위해서 아침에 눈을 떠 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 꽤 열심히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전이 몇 해 전에 서울에서 있었다. 요즘은 아무 때나 인터넷으로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나는 늘 이것을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사 진부였을 때만 해도 사진 전시회를 보려면 그곳까지 가야 했고, 돈을 구해야 했고, 학생이라 문전박대당하기도 했고, 늦어서 문이 닫혀 돌아와야 했다. 그런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지금처럼 클릭만으로도 이렇게 멋진 사진들을 귤을 까먹으며 볼 수 있다는 것에 늘 놀라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내 주위에서 내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는 것들은 꽤나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뭔가 좀 더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을까 싶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다큐 같지 않은 다큐였다. 흥미진진함이 영화 전반에 있기 때문에 한 번 밖에 없는 일생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도 생각하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비비안 마이어도 찾고 자신도 찾아가길 바라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등을 구부리고 고독하게 창조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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