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14화에 박동훈이 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정희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려고 가게 앞에 앉아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때 지안이 옆에서 십 분 동안 같이 있어준다.


그렇게 죽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이 흘러나온다. 엣 세븐틴은 제니스 이안이 17살에 겪었던 일로 예쁜 소녀들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들로 인해 열일곱 소녀가 겪어야 했던 사랑에 대한 좌절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i learned the truth at seventeen로 시작을 한다. 당시 제니스 이안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있다. 나는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아 버렸어,라며 제니스 이안은 그 특유의 쓸쓸함으로 그때 받은 사랑의 좌절을 노래한다. 깨끗하고 맑은 얼굴을 가지고 지난 사랑의, 당시에 받은 좌절을 쓸쓸하게 노래한다.


그건 마치 정희를 보는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는 정희는 혼자가 되면 더없이 쓸쓸하고 외롭다. 잠드는 것이 무섭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겁다. 사랑의 좌절이 정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누군가 정희를 안아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려 버릴 것만 같다. 그건 아마도 정희 옆에서 십 분 동안이나 같이 있어줬던 이지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니스 이안은 14살에 데뷔해서 75년에 엣 세븐틴으로 빌보드 1위에 오르고 75년 전체 히트곡 랭킹에서 19위를 차지한다.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이 밤,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을 듣는 것도 이 밤을 보내는 울림으로 좋다. 더불어 이안이라는 이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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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당길 때가 있다. 국물 있는 음식은 뜨거울 때 먹는 게 맛있기 때문에 빨리 먹에 된다. 특히 돼지국밥 같은 경우에는 고개를 들지 말고 숟가락으로 팍팍 떠먹는 게 맛있다. 그래서 탕이나 국은 밥을 말아서 후루룩 먹는 속도가 배가 불러오는 속도를 이기기 때문에 한 그릇 더 먹게 된다. 그래서 국에 밥을 말면 아주 많이 먹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어도 맛있고,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도 맛있고, 복국도 그렇고 탕은 다 맛있다. 그래서 매일 국을 한 끼 꼭 챙겨 먹는다면 나는 아마도 살이 많이 쪘을 것이다. 하지만 국이나 탕이 맛있어서 왕왕 국물이 당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미치도록 당긴다.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다. 보통은 그럴 때 라면을 끓여 먹는데 라면을 끓이면 국물을 마신다기보다 라면과 밥에 딸려오는 국물을 먹기 때문에 국물을 후루룩 마시는 느낌은 없다.


그래서 국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인다. 참으로 끓이기도 쉽고 푹 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좋다. 기본적으로 나는 미역이 좋다. 한동안은 조깅을 하고 매일 들리는 동네 빵집에는 지역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역으로 만든 미역 빵을 팔았다. 미역이 가장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다. 그래서 미역국을 끓이면 나는 엄청 먹는다. 미역국만큼은 누가 나무라더라도 먹고 싶은 만큼 먹는다. 한동안은 가자미가 들어간 미역국을 먹었는데 내 입맛에는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이 딱이다. 푹 삶긴 미역과 푹 익힌 소고기는 궁합이 잘 맞다. 아주 좋다.


예전에 친구들과 한창 횟집에서 회를 먹으러 다닐 때가 있었다. 우리의 단골 횟집도 가면 회가 나오기 전에 여러 밑반찬을 주는데 거기에 미역국도 있었다. 아이들은 먹을 게 많기 때문에 미역국 따윈 거들떠도 안 보지만 나는 늘 그 미역국 그릇을 내 앞에 당겨 놓고 밥을 한 공기 주문해서 말아서 야금야금 먹었다. 내가 미역국을 좋아해서 먹기도 하지만 한 그릇 먹고 나서 회가 나오면 내 젓가락질은 줄어들기 때문에 친구들한테는 더 좋다. 회를 좋아하지만 회가 앞에 있다고 해서 눈이 반짝이거나 돌격대처럼 돌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횟집에 딸려 나오는 미역국에 눈이 더 간다.


다른 국이 다큐멘터리 적이라면 미역국은 문학적이다. 은유가 가득하다. 누군가 태어나면 우리는 미역국을 먹는다. 생일에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들로 채워져도 미역국은 주인공 앞에 꼭 놓인다. 미역국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떨어질 수 없는 음식이다. 또 낙태를 해도 미역국이 그 앞에 놓인다. 누군가는 미역국을 웃으며 먹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먹었다. 미역국은 한국에서 인간의 탄생과 소멸을 함께 했다. 먹고 나면 몸이 따뜻해지고 온후하다. 문학적인 맛이다.


인간이 문학과 떨어져 살 수 없듯이 미역국은 우리 곁에 늘 있는 문학과 같다. 오죽하면 미역국 라면까지 나왔을까. 미역국은 다큐적이지 않다. 카프카적이다. 검은 빛깔의 색도, 맑은 국에서 우러나는 맛도, 속을 따뜻해주는 만든 이의 그 마음씨도 모든 것이 미역국 한 그릇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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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의 팬티

나의 아저씨 5화 초반에 박기훈이 박동훈에게 그런 말을 한다. 가진 것 없어도 팬티는 오만 원 이상 짜리를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 죽어서 쪽팔리지 않는다. 죽고 나면 쪽팔리는 것도 알 수 없어서 몇 천 원짜리 입고 죽으면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쪽팔리지 않아야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쪽팔리는 게 아니다, 우리 쪽팔리지 말자.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3분의 2 정도에 박동훈이 고깃집에서 그 소동이 있은 후 눈이 오는 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지금은 죽을 수 없다, 팬티가 오만 원짜리가 아니라 죽을 수 없다며 겨우 겨우 일어나서 몸을 추스른다.

죽고 난 후의 팬티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절대 아니다. 지금은 고인 된 오규원 시인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야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 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오규원 시인은 시인들의 시인으로 유명한 시가 많다. 시 '칸나'를 통해서 사랑을 이렇게 표현을 하다니 정말 놀라웠고, 시인들의 값을 매긴 메뉴판의 시로도 유명하고 시선집도 아주 유명하다. 오규원 시인은 또 괴짜다. 친구들이 먼저 가 버린 수목장 자리들 옆에 한 자리를 비워 놓고 여기가 내 자리라고 했는데 결국 그 자리에 들어갔다.


죽고 난 뒤의 모습에 왜 신경을 쓰냐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본 사람은 잘 안다. 죽고 나면 수의를 입히는데 그 과정에서 죽었을 때 입은 속옷을 벗겨내야 한다. 깨끗하고 좀 더 비싼 걸 입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절실하고 진실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 하는 사이에 죽고 말았다. 오규원 시인의 시선을 따라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의 아저씨에서 박기훈이 말한 것은 생각해 볼만하다.


나의 아저씨 극본을 쓴 박해영 작가는 아마도 시인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정확하게는 시인의 깊이 있는 시선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지안의 할머니가 달이 보고 싶어서 지안이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부분의 방바닥이 추운데도 그곳에 누워 벽에 붙은 작은 창으로 악착같이 달을 보려고 했다. 그 모습은 윤동주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산문시 ‘달을 쏘다’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달을 쏘다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너무 아름다워서 읽고 있으면 그 정경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를 쓴 곳이 일본의 감방이라고 알고 있다. 감방에 붙어 있는 저 작은 창으로 매일 몇 분 정도 보이는 달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문으로 인해 몸은 점점 행려병자처럼 되어가고 고통스럽지만 창으로 보이는 달을 보며 아름다운 것을 생각했다. 죽어가며 아름다운 것을 본 윤동주를 깊게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울렁한다. 그때 윤동주가 가물거리며 본 그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달을 지금 우리가 보는 저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안이 할머니가 그토록 보고 싶은 달이기도 하다.


나는 눈물이 없었다. 아니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꽤 오해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실 가까이 있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눈물이 잘 나오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 그 사람과의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들이 눈물을 만들어 낼 뿐이다. 책을 봐도, 영화를 봐도, 시를 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노래를 듣고 약간 글썽일 뿐 눈물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지. 그런데 2018년에 본 나의 아저씨가 굳건하던 내 눈물샘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민 손을 그만 덥석 잡았을 뿐인데 그 뒤로는 뭔가가 조금만 뭔가 싶으면 눈물이 난다. 그것이 싫지만 또 좋다.


사람들은 슬픔을 강요한다. 나는 이만큼 슬픈데 너는 왜 나만큼 슬퍼하지 않냐. 슬퍼야 하는 장소에서 마땅히 슬퍼해야 하는 건데 너는 왜 그렇지? 슬픔의 증거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강요한다. 눈물은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눈물은 그렇게 해서 흐르는 물이 아니다. 눈물은 짜다. 그래서 사람의 몸에는 바다가 하나씩 있다. 그리하여 눈물을 아무리 흘려도 계속 짠 물이 흐른다. 이렇게 짠 물이 슬플 때가 되었다고 해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좋거나 감동을 받아서 훨씬 많은 눈물을 흘린다. 음식에서도 짠맛은 적당해야 그 음식이 맛이 좋다. 기분이 너무 좋을 때 흐르는 눈물을 맛을 보라. 적당하게 짜다. 그래야 몸속에 있는 바다가 요동을 치지 않고 기쁨과 조화를 이루니까. 그래야 하니까.

달을 쏘다



 오랜만에 만난 김은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집은 요즘 보기 드물게 연탄아궁이가 있고 방바닥의 장판은 아랫목 쪽이 쭈글쭈글해 있었다. 김은 라면 하나를 끓여 왔다. 큰 냄비에 물을 잔뜩 부어 끓였다. 멋쩍게 웃으며 먹을 게 라면 하나밖에 없다며 밥을 가득 말아서 먹자고 했다. 다행히 아직 추위가 지붕을 덮지 않아서 라면을 나눠먹고 밥을 말아먹으니 땀이 났다. 겨울이 걱정되었지만 묻지 않았다. 라면은 물이 많아서 스프의 맛이 살짝 날 정도였지만 김치를 걸쳐 먹으니 어쩐지 맛있었다. 어떻든 먹어야 하고 어떻게든 먹게 된다고 김은 말했다. 다른 가족과는 떨어져 사는 모양이었다. 가족과 지낼 때도 서러운 단어 가난이 악착같이 붙어있었다. 가난에서 겨우 벗어나는가 싶더니 김은 절망의 크레바스로 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6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직장을 잃었을 때 지옥이라고 했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라면도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햇살이 싫었고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잠들 어도 거기까지 따라오는 채권자들과 눈을 뜨면 보이는 빚은 자살의 유혹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지옥이라는 건 멀쩡한 건물이지만 그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일이라는 건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중심에 김이 있었다. 김은 나에게 오천 원을 달라고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주었다. 김은 소주를 사 오겠다며 만원을 들고나갔다. 나는 현금을 털어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3장을 냄비 받침으로 썼던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라면 받침으로 썼던 책은 윤동주의 시집이었다. 십오 년 전에 내가 선물로 준 책이었다. 김은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이 책 한 권이 남았다. 김은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에게도 한잔 권했다. 책 사이에서 돈이 수줍게 비어져 나온 것을 보고 김은 고맙다며 라면 사 먹겠다고 했다. 김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호의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김은 소주를 한 병 비웠다. 가난은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불편하다. 생활이 불편한 것보다 마음이 불편하다. 새로 잡은 직장에서는 누구나 돈을 좇지 말고 돈이 따라오게 돈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라고 한다. 정말 개좆 같은 말이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건 돈이다. 돈 이외에 따라오는 이상은 돈이 깔려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자살을 결심했을 때 절에 갔는데 할머니가 엎드렸다 일어났다, 집에서는 죽어도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절에서는 옆 사람에게 질세라 절을 하는 거였다. 무엇이 할머니를 저렇게 절을 하게 하는 것일까. 절을 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돌봐달라는 할머니들은 없었다. 전부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이곳의 하늘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가면 그곳을 갈 수 있는데 내 입장이 그곳으로 갈 수 없게 만든다. 윤동주의 글이 떠올랐다. 윤동주의 '눈'을 읽으며 이렇게 맑은 사람이 그 더러운 곳에서 죽어가는 것과 지금 이 방처럼 비루하고 좁은 방에서 저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달을 쏘고 싶어 하면서 죽어가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던 윤동주의 글이 떠올라서 이를 악 물고 싶었다. 절망의 끝에 가면 통통하게 살이 찐 희망이 있다. 삶에 내 살갗을 가차 없이 갉아대는 것이다. 살면서 처절한 가난까지 경험했는데 내 감정과 정직하게 맞서는 것을 피해왔다. 내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하는 것, 그러면 삶이 내 몸으로 스며들게 된다는 걸 알아 가고 있다. 김은 그렇게 말을 하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굴에 조금 미소가 파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그 옛날 감옥에 난 창으로 보였던 그 달이었을 것이다. 겨울의 모퉁이에서 윤동주의 글을 읽고 내내 눈물들 흘렸던 그 기억들은 전부 추억에서 살고 있다. 거리가 추울까 봐 이불처럼 눈이 내린다고 한 윤동주의 글을 그동안 잊고 지냈다. 김은 꿈에서 윤동주와 조우했을 것이다. 저리도 웃고 있는 것을 보면.


- 윤동주의 달을 쏘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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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조깅하기 아주 좋은 날이다. 저녁이면 그렇게 덥지도 않고 달리고 있으면 땀이 뻘뻘 나지만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덮치지 않아서 땀은 빨리 마른다. 오전에 바닷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며칠 책을 좀 읽었더니 몸에서 태양의 냄새가 날 만큼 탔다. 여름에는 피부가 좀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좀 더 멋들어져 보인다.

조깅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올렸다.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같은 곳을 달리는 것에 지겹지도 않냐고 하는데 조깅을 해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아쉽다. 매일 같은 곳을 조깅을 해도 매일 다른 모습이다. 매일 하늘이 다르고, 구름이 다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다르고 낚시꾼들이 다르고, 심지어는 새소리도 다르다. 그리고 그것들을 폰이 있으니 기록을 할 수 있다.


나는 인스타그램 3개의 계정을 가지고 하는데, 하나는 짤막한 영화 리뷰만, 하나는 하루키의 이야기만, 하나는 조깅을 하면서 보는 다른 매일의 풍경을 올린다. 다 인기는 없다. 그래도 기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으니 조깅을 하다가 눈에 띄는 것들은 차곡차곡 사진으로 담고 메모를 해둔다. 나는 단점투성이로 똘똘 뭉쳤지만 그나마 메모하는 습관은 학창 시절부터 죽 해온 것 같다.


조깅을 하면서 지겹지 않은 이유 또 하나는 일주일은 강북을, 일주일은 강남을, 그리고 일주일은 강북의 좌측으로 죽, 일주일은 강북의 우측으로 죽, 또 일주일은 강남의 좌측으로, 또 일주일은 강남의 우측으로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린다. 또 다른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에도 적었지만 예전에는 여름이면 두 시간을 넘게 달렸는데 이제는 무리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30킬로미터를 달리며 걸으며 그렇게 보냈는데 이젠 추억의 조깅이 되었다.


강남으로 가서 우측으로 달리면 무지개다리가 나온다. 무지개다리라고 이름이 붙은 건 밤이 되면 무지갯빛으로 빛이 알록달록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예쁜데 다리 위에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 아마 달이나 화성 같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니 달이 아름다운 것이지 막상 달에 도착하면 삭막도 이런 삭막이 없다고 할 정도일 것이다.

다리를 건너 죽 달리면 지난번에 말했던, 까마귀 떼가 엄청나게 있는 숲이 나온다. 


조깅을 하다가 만나게 되는 까마귀 떼

겨울에서 봄의 길목 저녁 시간에 이곳에 조깅을 해서 오면 공포스러운, 어마 무시하게 멋진 까마귀 떼의 비행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새가 기가 막힐 정도로 많다. 그래서 이곳을 나라에서 새에 관해서 무엇으로 지정을 한 것으로 아는데 그것보다 여름에 저 숲, 앞의 조깅코스로 달리면 새똥 냄새가, 닭장에서 나는 닭똥의, 그 냄새의 백만 배 강한 새똥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냄새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냄새만큼 시끄러운 새들의 소리가 숲에서 난다. 사람들이 없고 혼자서 달리라면 손을 저을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나무들이 다 한 방향으로 쏠려있다. 쏠려 있는 방향은 북서쪽이라 태양도 없는데 어째서 나무들이 다 저 방향으로 쏠려 있을까.


이제 칠월이 되었지만 유월의 하늘은 이랬다. 본격적인 여름이면 이런 하늘은 잘 볼 수 없다. 습도가 높고 가스층이 두터워 뿌연 하늘이거나 먼지가 가득하고 무더운 하늘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해가 달에게 하루를 반납하는 개늑시에는 미칠 듯 타오르는 노을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매일 밖으로 나와서 조깅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조깅을 할 때에는 쇼트가 좋다. 이건 좀 웃기지만 긴 트레이닝보다 짧은 운동복이 좋은데, 겨울에도 그렇다. 그래서 겨울에 긴 운동복을 입고 달리는 것보다 쇼트 안에 레깅스를 입고 달리는 게 훨씬 잘 달려진다. 웃기다고 말한 건 기능적인 면보다는 그저 쇼트가 달리기에 좋다는 느낌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겨울에는 어쨌거나 밖에서 조깅을 하는 자체가 힘든 일이다. 미친 짓이기도 하다. 겨울 조깅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허, 하는 말만 나온다.


트래드 밀보다 야외에서의 조깅이 (더 나은 점이 아니라) 재미있는 점은 변수가 많다. 조깅을 하다가 중간중간 몸을 푸는 곳이 있다. 운동기구들이 있고 동네 어르신들이 어슬렁 쉬엄쉬엄 운동을 하면서 저녁이 되면 우르르 나와있다. 조깅을 매일 하지만 매일 비슷한 속력으로 달리는, 비슷한 컨디션이지는 않다. 어떤 날은 몹시 잘 달리는 경우가 있고, 어떤 날은 다리가 전혀 달리기 싫어하고, 어떤 날은 말처럼 달리기를 바라기도 한다. 인간의 몸이라는 게 매일 다르고 그럴 때마다 신체에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을 느끼면 기분이 꽤 나아진다. 요컨대 요가처럼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려가며 몸을 늘린다던가, 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얼굴처럼 울그락불그락하게 되어가면서 근력 운동을 좀 하면 신체에 기분 좋은 고통이 온다. 매일 그런 고통을 조금씩 느끼면 꽤 기분이 상쾌하다.


그렇게 몸을 푸는 곳이 강변의 조깅코스에서 군데군데 있다. 며칠 전에는 30분 정도 몸을 풀고 가야지 하며 신나게 몸을 풀고 있었다. 관절을 꺾고, 팔 굽혀 펴기나 이름은 모르겠지만 팔운동을 하고 다리를 풀고. 그런 루틴의 반복을 몇 번을 했다. 그러는 동안 동네 어르신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한 아버님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자신이 군대 있을 때 나처럼 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음 그냥 무시하고 한 번 웃고는 말면 그만인데 아버님의 이야기를 받아줬다. 아버님은 신이 나셨다. 자유당 시대부터 해서 자신이 살아온 70 평생의 인생을 나에게 와르르 이야기를 했다.


이게 듣기 싫어하는 표를 상대방이 내면 아버님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내가 그만,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처럼 맞장구를 치며 계속 받아들인 것이다. 아버님은 여기 구청장이 자신의 후배인데 어느 날 술집에서 마주쳤는데 큰 소리로 행정업무를 못해서 나무랐다고 자랑을 했다. 속으로 흥, 아버님도 참 그런 거짓말을 하하하. 하며 말았지만 듣고 있으면 꽤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아버님은 뭐랄까 마치 변두리의 어두운 곳을 작업하는 일을 평생 해 온 것처럼 행색이 그렇게 편안하게 보이지 않았다. 햇빛에 오래도록 그을려서 피부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검었다. 더운 나라의 사람 같았다. 그런데 말을 들어보면 아는 것은 많아서 이 근처의 지역개발이라든가, 도시가 어느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하고 어떤 사람을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일목요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빠져서 들은 이야기는 백신을 맞고 후유증으로 새벽 2시에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혼자서(아버님은 혼자서 산다) 119에 연락을 해서 응급실에 실려 간 이야기였다. 119에 전화를 걸고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 종합병원의 복도에 칸막이가 쳐져 있고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과정을 세세하게 말해주었다. 병원에서 아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아들은 제주도에 있어서 바로 올 수 없었다. 아들의 자랑을 아버님이 잠시 했는데 아들은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중국 유학을 했을 당시 같이 공부한 친구와 함께 제주도에서 어떤 사업을 한다는 거였다. 아버님의 모든 이야기를 믿을 수는 없지만 백신을 맞고 난 후유증에 관한 이야기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어머니도 2차 접종까지 데리고 가서 맞았는데 1차 때에 후유증이 심해서 고생을 했다. 그래서 2차 때에 엄청 준비를 하고 백신을 맞고 하루 동안을 조마조마하게 있었다. 다행히도 1차 때만큼 심각하게 아프지 않았는데 그 비슷한 증세를 아버님이 말했고 그게 심해져서 병원에 실려갔다. 그래도 119에 전화도 하고 아버님에게 대단하다고 했다.


아버님은 뭐랄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절실하게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모든 아버님들이 그런 것 같다. 아니 그렇다. 아마도 내 편이 없다고 느껴서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럴 때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진지하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다 보면 아파트 경로당 앞 모임 장소에는 늘 아버님들이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즘 해방 타운이 인기인데,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혼자이기를 바랄까, 같은 것이 화두다. 그건 이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에서 편안하게 쉬기를 늘 바란다. 집이 있어야 하고 집이 아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집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집을 마음 놓고 타인에게 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공했다고 우리는 늘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집이 있음에도 일주일만 집에 있으면 집을 뛰쳐나가고 싶어 한다. 여행을 가서 집보다 떨어지는, 집이라 할 수 없는 곳에서 잠을 자고 욕을 하면서도 집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것과 비슷한다. 다시 돌아온 집, 다시 돌아온 내 가족.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알지만 외면한다. 자꾸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온다. 사랑하면서 왜 그래? 같은 말들. 사랑하니까 그러지. 같은 대답.


그래서 인간은 알 수 없다. 어떻든 그날은 그 아버님의 이야기를 듣느라 거기서 꼬박 한 시간을 있었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조깅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를 왕왕 만난다. 어떻든 요즘은 조깅하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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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에서 살면 좋겠다. 같은 옷만 입어도 더러워지지 않고 씻지 않아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고, 많이 먹을 수 있고. 살도 찌지 않고 아프지도 않다. 모험, 꿈과 희망이 있다. 불행하더라도 극복해서 행복에 도달한다. 못생긴 여자도 없고 못생긴 남자도 없다. 특히 악당은 더 잘생기고 더 섹시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양이와 대화가 가능하다. 이런 나의 동경 같은 것들이 모여 현재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마음은 아이로 남아있는 어른이들이 만화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가장 최근에 픽사의 ‘루카’를 봤다. 산타 모짜렐라!라는 말이 나온다. 줄리아가 하는 말이다. 줄리아를 줄리웨라 부를 때 줄리아가 혼잣말로 산타 모짜렐라 라고 할 때 웃기다. 산타 모짜렐라는 영화 말미에 산토 고르곤졸라로 바뀌고 그때에는 아마도 감동을 영화 속에 나오는 파스타만큼 먹게 된다. 이 영화는 이전의 픽사의 영화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이전에는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뚝 흘렀다.


주인공인 루카와 알베르토는 물에 닿아 괴물이라는 것이 들통난다. 굿바이 줄리아. 루카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 알베르토를 찾아간다. 강한척하는 알베르토는 누군가 내미는 손을 간절하게 잡고 싶었던 아직 아이였던 것이다.


다시 경기에 나간가는 루카의 말에 알베르토는 “미친 소리 하지 마”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루카의 미친 짓처럼 그렇게 미쳐가면서 조금씩 성장해간다. 경기 마지막 비를 맞아서 괴물로 변한 알베르토, 그때 알베르토가 그물에 잡히게 되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면서 루카도 비를 맞아 괴물이 된다. 그리고 알베르토에게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알베르토가 잡았을 때 울컥하며 눈물이 흘렀다.


루카의 인싸 할머니가 말한다. 끝까지 안 받아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그렇진 않을 거야. 루카는 이미 좋은 사람 찾는 법을 아는 것 같아. 이 말을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두가 나를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한 사람, 그리고 내 편인 한 사람만 있으면 이 험하고 험한 세상에서 해볼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카를 보면서 느낀 건 픽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걸 못하고 그대로 어른이 되어 버려서 그냥 우리 하고 싶은 걸 다 하자! 그래! 하며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루카를 보면서 정말 기분 좋고 애틋했다.


우와 나보다 훨씬 멋지게 사네. 난 아무 데도 못 가는데. 꿈만 꿀뿐.라고 루카가 초반에 알베르토에게 말한다. 그 꿈을 꾸는 것이 첫 시작인 것이다. 시작을 하고 나면 그다음은 조금씩 성장하면서 꿈을 이룰 수 있다.

조깅을 하다가 만난 길고양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이 길고양이도 이 험한 세상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들 투성이 속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길고양이는 아아 힘들어 죽겠네. 보다는 아아 그럼에도 내게 잘 대해주는 인간들이 있어서 꽤 할만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조깅을 하면서 만난 길고양이가 몇 있었다.


고양이는 강아지와 다르게 몸에 이렇게 무늬가 있다. 이런 무늬가 사람을 잡아 끈다. 아마 모든 고양이에 무늬가 있지는 않겠지만 무늬는 모두 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내가 조깅하는 이 긴긴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집에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사료를 들고 와서 곳곳에 물과 함께 깨끗하게 그릇을 씻어서 사료를 담아 준다. 아이도, 어른도 길고양이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 강변에는 사람들이 마구 다니는데도 벌러덩 누워서 쿨쿨 자는 녀석도 있다. 그 녀석은 새끼 때부터 여기 강변에서 지나다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길러졌다. 방목을 하지만 음식과 물을 사람들이 챙겨주고 비를 피하게 해 주었다. 그것을 아는지 그 녀석은 사람을 경계하는 다른 길고양이에 비해 뚱뚱하다. 고양이와 사람이 이렇게 공생하며 지내는 생활. 만화 속에서처럼,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나카타 상처럼 고양이와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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