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동안 비가 오기도 했고 해가 쨍하게 뜨기도 했고 바람이 많이 불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로 고요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오징어 게임도 두 번이나 볼 수 있었고 보면서 놀랐고 재미있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많이 떠올랐고 황동혁 감독도 카이지 외 여러 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명절 기간에 성룡 영화가 하긴 했다. 케이블에서 뱅가드를 했는데 감독인 당계례의 영화는 황당한 장면이 많기로 유명하다. 요컨대 전투 장면에서 엑스트라가 뒤에서 혼자 막 군무를 하는 모습을 그대로 영화에 담기도 한다. 성룡도 그걸 알면서 왜 이런 감독과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재미는 없었다.


영화를 보고 먹고 마시다가 저녁에는 또 조깅을 좀 했다. 조깅을 하면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늘 있고 또 그 풍경의 달리지는 모습을 계절에 맞게 볼 수 있고 그 모습을 폰 카메라에 담아 본다.

구름 속에 숨은 달이 얼굴을 보이기 위해 살며시 빛을 발하고 있다. 가만히 서서 이 신비의 장면을 바라보았다.

달이 구름 위로 모습을 살며시 드러냈다. 아마 달 위에 떠 있는 별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달은 별을 만나기 위해 구름 속에 편안하게 있기를 거부하고 위로 위로 얼굴이 나오는 것이다.

드디어 달이 별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별은 그 자리에 그대로여서 움직일 수 없으니 달이 별을 만나기 위해 위로 위로 날아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이 자리에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저 신비한 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매일 같은 곳인데 매일 모습이 다르다. 인간과 똑같다. 인간도 매일 마음이 다르다. 남이 볼 때는 늘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바람이 없고 달빛이 강한 날에는 반영이 좋다. 좋은 카메라가 있었다면 반영 샷에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반영 샷은 하늘의 모습을 수면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또 다른 모습이다.



또 하루가 지났다. 저 멀리 보름달이 보인다. 달의 그림자가 강물 위로 늘어진다. 그 위로 비행기가 추석맞이 비행을 한다. 모두 명절 잘 보내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멋진 풍광이다.

15센티미터 정도의 물고기를 낚아 올리기에 무슨 고기냐고 물어봤다. 숭어 새끼야, 라며 바늘을 꺼내자마자 강으로 보내줬다. 어찌나 쿨하고 멋지게 보이던지. 15 센티미터면 보통 그대로 들고 가서 먹을 텐데. 아저씨는 그랬다, 이렇게 풀어주면 나중에 30센티미터가 될 게야. 아아 정말 그 한 마디가 너무 멋졌다. 짝짝짝.

또 다음 날이다. 평소에 달리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그래서 노을의 모습을 마주하고 달리게 되었다. 붉은 오렌지 빛의 향연이다. 저건 그래서 태양이다. 태양이 힘을 잃고 빛이 조금 연할 때, 이때 인물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면 몹시 드라마틱하게 나온다. 빛이 머리를 타고 어깨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잡아낼 수 있다. 영화로 치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황정민이 초반에 석양을 등지고 촬영한 장면이 있다. 굉장히 드라마틱하며 광고 같은 아주 멋진 장면이 이 시간대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 시간에 촬영을 끝내지 못하면 다음 날 이 시간에 다시 촬영을 해야 한다. 자연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달려 강 상류로 올라가면 낚시는 금지이기 때문에 물고기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물고기들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오글오글 모여서 오히려 사람을 구경하는 것 같다.

도로가로 나와서 달리는데 삼만 원을 주웠다. 사진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어두운 곳으로 만 원짜리가 일렬로 한 장씩 떨어져 있었고 자동차들이 계속 밟고 지나가서 돈의 면이 오돌토돌하다. 아마도 자동차들이 밟아서 도로 바닥에 밀착되어서 날아가지도 않고 있다가 나에게 발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돈으로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 먹었다.

다시 다음 날이 되었다. 저 아웃포커싱이 된 부분은 저수지다. 그러니까 나는 바다와 강, 저수지 등을 주로 다니는 모양이다. 이곳의 산쓰장은 아주 잘 되어 있어서 몸을 풀고 있는데 무당당이가 꾸물꾸물 기어가기에 사진을 하나 찍고 이대로 두면 사람들에게 밟혀서 찍 눌려 죽을 것 같아서 저기 숲으로 보냈다.

저 끝이 바다다. 동네 자랑이다. 바닷가에 살면 바다는 매일 본다. 어쩌다 보는 바다보다 매일 봐야 바다의 재미를 알 수 있다.

너무 잘 먹은 탓에 달리는 게 힘들어서 걷는 중이다. 지는 해를 등지고 있어서 다리가 키다리 아저씨 같네. 또는 공포 영화 속 젓가락 귀신같기도 하네.

와, 이 그러데이션을 보라. 하늘이라도, 파란색이라도 이렇게나 층을 두고 여러 색이 있다. 재스민 블루, 옐로 블루, 퍼머낸트오랜지블루, 딥 스카이 블루.

그리고 뒤를 돌면 석양이 지고 있다. 태양이 마지막 힘을 짜내 그림자를 까맣게 까맣게 태운다. 그림자가 다 타고나면 우리는 밤의 세계를 맞이한다.

조깅을 하고 오면서 자주 들리는 카센터에는 아직 어린이인 백구 녀석이 있어서 늘 사람을 기다린다. 낮동안 아마도 아빠와 삼촌들이 놀아주고 챙겨 줄텐데 명절 연휴에는 혼자 보내야 해서 이렇게도 다가가면 놀아달라고 난리다. 저 멀리서 보면 백구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돌아올 때는 전통시장으로 온다. ‘상자 옆의 고양이‘가 세상사를 초월한 듯 초연한 자세로 앉아 있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나를 쓱 쳐다본다. 그 모습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움직였다. 아마 명절 연휴라 시장에서 던져주는 고등어 머리 같은 것들이 없어서 조금 당황하지 않았을까. 이제 명절이 끝났으니 많이 얻어먹으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징어 게임이 호불호가 나뉜다는데 불호인 것은 아마도 지루한 장면과 어떤 부분의 연기, 어디선가 본 듯한 영상과 내용, 앞으로 나갈수록 보이는 결말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특히 1번 노인이 혼자 게임에 참가했을 때 눈치를 안 채려고 해도……


그러나 나처럼 오징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처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경험이 있지 않았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오징어 게임 속에서처럼 죽음의 갈림길에 놓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생활 같은, 요컨대 군대에서 훈련을 나가기 전에 잠시 대기 탈 때 저 앞에는 조교들이 진을 치고 있고 통과하지 못하면 난리가 날 것 같은 분위기, 기다리는 동안의 두려움과 초조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또는, 취업의 문턱에서 면접관 앞에 서기 직전의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그 초조와 불안, 옆의 응시자들은 모두 나보다 스펙이 놓아 보이고 다 자신감 있는 모습에 점점 조여 오는 압박감. 이런 모든 총체적 분위기를 오징어 게임을 보며 예전의 그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좀 살아본? 사람들은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인간성을 다 보여준다.


도대체 인간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다. 인간이 가지는 대부분의 감정이 다 나온다. 폭력성, 이타성, 배려와 욕심, 배신, 협동심, 본능, 인간의 처절한 본성이 툭툭 튀어나온다. 어제까지 내 편이었는데 오늘은 기회만 있으면 나를 죽이려 든다.


좀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좀 살아보니 인간의 더러운 모습, 인간 그 너머의 인간 이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배신이라는 건 나를 모르는 생판 남이 아니라 나를 아주 잘 아는 나와 친한 동료가 배신을 하고 사기를 친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배신 때문에 빚을 떠안게 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커져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일을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살인이라는 것도 게임으로 교묘하게 덮으면 계속할 수 있다.


챔피언 권투 선수가 있다고 치면 도전하는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안심이 된다. 정보가 노출이 되어 있으니까 대비가 된다. 하지만 정보가 전혀 없는 신인이 올라오면 당황하고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게임인지 알 수 없는 ‘죽음’의 시간 앞에 놓이면 두려움에 떨고 초조함이 정신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타인을 죽이려 든다.


초반에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혼비백산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마치 코로나 시대 초기에 그렇게 두려워하던 감염병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이제 무뎌진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 속 사람들은 온통 빚을 지고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어서 게임을 하러 왔다. 처음에는 저기서 죽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동료라는 생각에 놀라고 소리치고 무서웠는데 시간이 지나 저 사람들이 없어지면 내가 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거액의 돈까지 준다.

주인공 기훈은 지질하고 무엇하나 잘하는 것 없는 루저다. 그런데 루저이지만 또 인간에 대한 믿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어디 하나 쓸모없는 인간에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지질한 인간이다. 소심하고 작은 일에 감정의 높낮이가 조절이 되지 않고 화가 나도 화를 낸 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무서워 화를 내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그래도 약간의 오지랖은 있어서 조깅을 하다 폭염에 쓰러진 사람을 옮겨 119에게 인계하기도 했고, 박스 할머니의 박스를 옮겨주고 주머니에 오천 원을 꺼내 음료수 드시라고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지갑을 주워서 돈이 있어도 꺼내지 않고 그대로 지구대에 갖다 줘서 주인이 나타나 고맙다는 소리도 들었다. 정말 지질한 인생이고 가진 것은 개뿔도 없는데 남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는 그런 인생이다. 영화 속 기훈과 참 닮았다. 중요한 건 영화 속 기훈은 무쓸모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닮은 것에서 놀라지 않았다.


이런 무쓸모 인간인 기훈이 주인공인 것은 그나마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일 것이다. 또 알게 모르게 동료들에게도 믿음을 준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두 가지를 가지면 살아남는다. 그것은 ‘힘’과 ‘믿음’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 덕수는 힘을 쟁취하지만 믿음을 얻지 못해 결국 죽고 만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서로가 동료라는 생각이 없다. 동료라면 다 같이 살아야 하는데 이 게임에서는 다 같이 살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한 집 건너 누가 죽었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자영업자들이 대거 자살을 했는데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몇 있을까 싶다. 만약 죽기 전에 길에 나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선뜻 만원 하나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니까.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가 너무 놀란 기훈과 가장 닮은 부분은 영감님과 일대 일로 구슬치기를 할 때 영감이 치매가 걸렸다는 걸 알고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그만 영감을 속이는 그 모습이 닮아서였다. 나는 주위에서 안 그런 척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막히면 실은 나 살고자 다른 사람을 구덩이로 몰아넣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기훈이 잠시 고민하더니 영감님을 속이는 그 장면, 그 처절하리 만치 생과 사가 갈리는 그 순간의 기훈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나를 보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깅을 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노을이 좋다. 그대로 서서 매직 아워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생각이 든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위가 되면 동요 ‘노을’이 라디오에서라도 나온 것 같은데 느닷없이, 두부를 칼로 싹둑 자르듯이 끊어졌다.


노을뿐 아니라 동요 자체도 들을 수 없다. 티브이 속 어린이들은 트로트에 열을 올리고 그 모습에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박수갈채를 보내니 어린이들에게 동요가 무쓸모처럼 소거된 것 같다.


동요가 듣고 싶어 한 번은 유튜브로 오연준 어린이가 부르는 고향의 봄을 듣고 가슴이 터질 만큼 좋아서 그대로 댓글을 달았더니 누군가 표현이 너무 예쁘다고 해주었다. 그건 내가 예쁘게 글을 썼다기보다 오연준 어린이의 노래를 듣고 그 마음이 아마도 글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게 동요의 힘이라면 힘이고 기능이라면 기능이지 않을까.

노을의 가사도 눈물이 나올 만큼 좋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쯤 누구나 알고 있다.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라는 상냥한 표현에서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 라는 말도 예쁘다. 아아 정말 가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오른다.


정말 노을의 가사가 좋아서 조깅을 하다가도 이맘때에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에 취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눈앞의 노을은 저리도 붉게 타오르는데 도대체 동요 노을은 어디로 쏙 들어가 버렸나.


노을을 부른 어린이가 귄진숙(양)이다. 30년도 더 됐으니까 이제 권진숙 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권진숙 양의 노을이 듣고 싶어 진다. 그리하여 유튜브를 돌려 찾아보면 당시, 84년도의 동요대회로 갈 수 있다.


권진숙 양은 평택에서 왔는데 그곳의 장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을 잘한다. 그리고 서울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에도 똑 부러지게 답을 한다. 여자 아나운서는 마지막으로 그럼 서울과 평택 중에 어디에 살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귄진숙 양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귄진숙 양은 약대를 나와서 제약회사를 상대로 약에 관련된 컨설턴트 하는 회사의 대표로 있다. 노을이라는 동요는 권진숙 양을 위한 노래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잘 불렀다. 이 곡을 만든 이동진 선생이 2010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권진숙 양에게 하고픈 메시지를 전했다. 찾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당시의 기사에는 동요제가 열렸을 때 모든 작사가와 작곡가들이 권진숙 양의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그만큼 노을이라는 동요가 사람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다. 어찌 되었던 요즘은 전혀 들을 수 없다. 찾아들어야 하는 노래가 됐다. 그래서 찾아 듣곤 한다.


오늘의 선곡. 권진숙 양의 ‘노을’ https://youtu.be/xwxAdmKHlrY


다시 뒤를 돌면 매일 보는 풍경이 처음 보는 그림 같다.




요즘은 매일이 영화로운 나날이다.

이 색채와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달과 달빛, 그리고 그 위의 별까지.

장면 장면이 영화인 요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마의 휴일을 보면요, 앤이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려고 하다가 멈칫하잖아요.

집어넣으면 정말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손목이 없어질까 봐 말이죠.

그러다가 조 브레들리가 손을 집어넣고 거짓으로 아악 할 때, 그때 앤이 너무 놀라서 소리를 치며 브래들리의 손을 막 빼잖아요.

그 장면은 앤이 정말 귀여워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리고 조가 거짓말이라고 하니 놀라면서 안도의 표정, 그 표정은 오드리 헵번 만이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앤은 조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헤어져 궁전 같은 곳으로 돌아왔을 때 굳은 표정으로 바뀌잖아요.

예쁜데, 예쁜 얼굴인데 거기에서 어떤 무엇인가가 빠져버렸어요.

그건 아마도 감정인 거 같아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을 겪으며 사람들에 대한 이 알 수 없는, 복잡하고 기분 좋은 감정 말이에요.

그건 아마도 희로애락을 말할지도 몰라요.

앤은 그동안 여러 감정에 대해서 다양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마지막에 추억의 사진을 건네받잖아요.

거기 사진을 보면 앤 공주가 살면서 정말 나올 수 없는 표정이 찍혀 있잖아요.

그 기분 좋은, 그 황홀한, 그 미칠 것 같은 흥분의 표정이 사진 속에 있었어요.

조와 친구는 그 특종 사진을 신문사에 보내지 않고 앤 공주에게 추억의 선물로 주잖아요.

만약, 정말 만약인데, 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도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데요, 원작을 쓴 트루먼 카포티는 홀리 역에 메릴린 먼로를 추천했다고 해요.

메릴린 먼로의 홀리는 어땠을까.

메릴린 먼로가 했어도 좋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메릴린 먼로가 어쩌다가 섹시스타가 되었지만 그녀는 여러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어요.


아 만약, 정말 만약에 앤 공주가 다시 궁을 뛰쳐나와 로마의 작은 2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조와 사랑을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평생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아갔을까요.

동화를 보면 끝은 늘 행복하게 끝나잖아요.

뭐 신데렐라도 그렇고 백설공주도 그렇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 뒤의 이야기가 사실 더 궁금하거든요.

왜 이적이 부른 노래 중에 그런 노래가 있던데 말이죠.

신데렐라 그 이후의 이야기가 있어요.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빨래며 집 청소며 매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거거든요.

앤 공주는 좀 다를까요.


로마의 휴일에서 주인공은 단연 앤 공주잖아요.

머리를 자르러 갔을 때 생각나요?

이발사가 그러잖아요.

요만큼?

그러니까 앤 공주가 점 더 짧게.

그러니까 또 요만큼?

아니요 더 짧게.라고 하니까 이런 머릿결을 잘라내는 것에 이발사가 용납이 안 되어서 재차 되묻곤 하잖아요.

그리고 결국 짧게 자르잖아요.

머리를 앞으로 내렸을 때 그 머리카락을 살짝 걷거든요.

그때 앤의 표정을 봤어요?

오 정말 예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요.

눈을 이렇게 치켜뜨고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한 그 맑고 순한 표정 말이에요.

아이들에게서나 나올 것 같은 그 표정을 앤 공주가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앤 공주가 조와 결혼을 했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사람들과 융화가 좋잖아요.

그렇게 서글서글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다 가진 사람’은 몇 없을 것 같아요.

마치 재벌의 셋째 딸이 대학교 기숙사에서 아이들과 너무나 잘 어울려 다니는 것과도 같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장면은 후에 나오는 영화에서 과거로 가거나, 미래로 간 여주인공이 그곳의 물정을 몰라 어리숙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들을 나눠주는 장면으로 바뀐 것 같아요.

로마의 휴일에서도 앤은 조에게 그러잖아요.

왜 내가 좋아하는 일들만 다 하는 거냐고? 조는 왜 이타적이냐고?

하지만 말이에요, 앤 앞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 같아요.

물론 조의 집에 청소를 하러 온 아주머니는 심통난 시어머니처럼 앤을 나무라지만 말이에요.

앤이 스쿠터를 타고 우당탕탕 사람들과 한 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 경찰서에 끌려가서 서 있을 때 표정 봤죠?

아아, 정말 뾰루퉁한 얼굴로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같은 표정 말이에요.

정말 사랑스러워요.


앤이 마지막에 사진을 들고 헤어질 때 조를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해요.

감정과 처지 사이에서 잠시 방황하는 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앤이 사라지고 조가 혼자서 쓸쓸하게 나오는 장면 역시 기억에 남아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까요.

노팅 힐에서는 그게 싫었는지 ‘절대’라는 의미를 깨버리고 두 사람을 같이 있게 하지만 앤 공주와 조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잖아요.

앤과 조는 알고 있었어요.

매일이 따분하고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이 미치도록 싫증 나지만 이런 생활이 무탈하게 보내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프레디 크루거' kds941024 https://blog.naver.com/kds941014/2223172320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에게 여러 추억의 음식 중에 중간에 딱 버티고 있는 것이 멍게다. 그 추억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내가 아직 6학년이었을 때 여름의 일요일에는 오전 8시에 하는 만화를 보기 위해 늦잠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그러면 마당의 수돗가에서 아버지가 멍게를 다듬고 있었다. 일찍부터 시장에 가서 손질이 안 된 멍게를 한 바구니 사들고 와서 한 시간 정도 땀을 흘려가며 멍게를 손질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어쩐 일인지 나와 동생은 멍게의 그 알 수 없는 뭉근한 식감과 밍밍하면서 간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미묘한 맛이 좋아서 잘 먹었다. 멍게는 초장에 찍어 먹지 않아도 멍게가 가지고 있는 맛으로도 맛있었다. 또 꼭다리 부분을 씹어서 멍게의 짭조름하고 간간한 맛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신이 나서 멍게를 사 와서 손질에 열을 올렸다.


나와 동생은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에 앉아서 멍게를 손질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 구부린 아버지의 등에는 우리가 말을 걸기 쉽지 않은 경건한 분위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 분위기 속에는 일종의 ‘좋은 고집’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평범하지 않는 찰나로 나오는 강한 집중이 있었다.


내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게 직접 손질해야 한다는 그런 집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나와 동생은 미간을 좁히고 더워지는 여름날의 일요일 오전에 마당에 서서 아버지가 멍게를 다듬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서 멍게를 다듬는 칼은 회사에서 직접 만든 것이다. 그런 칼이 여러 개 있었다.


멍게 먹는 여름의 일요일 오전은 행복했다. 아버지는 땀이 많아서 벌써 러닝셔츠가 홀딱 젖었다. 젖은 러닝셔츠 밖으로 나온 아버지의 팔뚝에는 근육이 좋다. 아버지는 그 근육을 우리가 먹을 멍게를 손질하는데 아깝지 않게 사용했다.


밥상에 둘러앉아 멍게를 먹고 있으면 어머니는 멍게 비빔밥을 만들었다. 거창하게 이것저것 넣지 않았다. 생 미나리와 멍게와 양념 조금이었다. 그래도 멍게가 있어서 풍성한 맛의 비빔밥이 되었다. 어린이들이 멍게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어른들의 눈에 흡족했을까. 여름방학의 일요일이면 평일날보다 일찍 일어나서 멍게를 먹었다.


그 기억이 내내 좋아서 가끔 멍게를 사 와서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