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지구도 생겨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우주 밖에 없었던 세상이었습니다. 우주에 있던 먼지들이 모이고 모여 한 행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행성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빛이 번쩍! 하더니 한 아기가 “응애응애” 하며 하늘에 둥둥 떠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노래에 맞혀 입으로 후! 하고 바람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행성에 공기가 생기고 적당한 중력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노래에 맞혀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다가 생기고 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파랗게 물들고 구름이 생겨나고 해, 라는 것도 생겨 났습니다. 해는 행성을 따뜻하고 밝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행성은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습니다.


행성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행성을 살기 좋게 만든 아기가 그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기라고 부르면 안 되겠죠? 이제는 이름을 부릅시다. 이름은.

2.

‘페리마’였어요. 페리마는 행성에다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이름을 ‘지구’라고 지었지요. 페리마는 지구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렀어요. 페리마는 시간이 갈수록 지구가 너무 허전하고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리마는 생각했어요.


‘내가 지구를 더 발전시켜야겠군!’


페리마는 지구를 더 발전시키기로 마음먹었어요. 페리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갓난아기 때 지구도 만들었는데 이런 것쯤은 식은 죽먹기겠죠? 그래서 페리마는 씨앗 이란 것을 만들었어요. 여러 종류에 씨앗들을요. 씨앗은 작았어요. 그 씨앗들을 흙에다 뿌렸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났어요.


씨앗을 심었던 자리에서 작은 싹이 자라났어요.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풀과 나무 그리고 꽃까지 생겨나 지구는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페리마는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허전하진 않지만 너무 조용하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을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페리마는 흙을 물에 적셔 진흙을 만들고 그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페리마는 얼굴부터 만들기로 했어요.

3.

처음 만든 얼굴은 좀 이상했습니다. 돼지 같기도 했습니다.


“이건 아니야”


페리마는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좀 이상했습니다. 이건 말 같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아니야”


 페리마는 다시 한번 만들었습니다. 이건 토끼 같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아니야”


페리마는 이것 말고도 여러 번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26번째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이거야!”


페리마는 너무 좋았습니다. 페리마는 실패한 얼굴들이 아까워 그 얼굴들로 ‘동물’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사람에 팔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4.

그래서 팔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팔도 처음 만들건 이상하겠죠?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 만든 팔은 이상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시 만들어야겠어.”


페리마는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만든 팔에다가 손이라는 것을 달고 손에는 5개의 손가락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5개인 이유는 페리마가 아기였을 때 페리마는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듬직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얼굴과 팔과 손이 완성되었습니다.


페리마는 아까 만든 팔과 손이 아까워 그것은 다리와 발이라고 지었어요. 발에는 손가락처럼 발가락이 5개가 있었어요. 발가락은 손가락보다 짧았어요. 그리고 페리마는 이번에 가슴과 배와 엉덩이를 만들기로 했어요. 가슴, 배, 엉덩이는 모두 연결되어있었어요. 페리마는 만들기 시작했어요. 다른 것들은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슴,


여기까지가 초등 2학년인 조카가 쓴 소설이다. 그 후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깜깜무소식이다. 어린이와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는 말들이 입에서 막 나오는 경우가 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조카가 3살인가 4살 이럴 때, 밤에 차에 태워서 집으로 오는데 창에 붙어서 하늘을 유심히 보더니 “삼톤, 달이 왜 우리를 따라와?”라고 말했다. 어린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을 하게 된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무말대잔치겠지만 어린이 입장에서는 그 순간은 몹시 진지하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조카를 비롯해서 어린이와 지내게 되면 나도 진지해진다.


친구의 아이는 두 명인데 아직 작은 애가 뱃속에 있을 때 가족사진을 한 번 찍어 준 적이 있다. 그것을 이렇게 걸어 두었는데 둘째가 태어나고 3살인가 되던 무렵 그 사진을 보더니 기겁하고 울면서 엄마에게 형 하고는 같이 사진 찍고 나는 왜 먹어 버렸냐고 하는 것이다. 어찌나 애틋하고 웃기던지.


어떻든 조카가 쓴 소설은 읽으면 별거 아닌데 재미있다. 소설이란 읽기 쉽게 쓰는 게 좋은 소설인 거 같다.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언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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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볶음밥을 만들 때 법칙은 없. 다. 밥이 많고 반찬이 없을 때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기름을 두르고 볶으면 그만이다. 호주산 소고기도 많아서 당근과 파를 썰어서 넣고 볶으만 소고기 볶음밥이 완성된다. 소고기는 좀 질기다. 그래서 씹는 맛이 있다.


이렇게 반 정도 볶고 반은 김치를 넣어서 볶았다. 그러면 이름이 소고기 김치볶음밥이 된다. 이렇게 볶음밥을 만들면 어쩐지 집에서 먹는 한 끼가 마치 어떤 날을 기념하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기도 한다. 볶음밥만큼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없고, 또 일회용 볶음밥도 많아서 그저 데우기면 하면 되는 볶음밥이지만 자주 해 먹지 않는다.


어릴 때는 볶음밥 하면 중국집 볶음밥을 최고로 쳤다. 웍에서 튀기듯이 볶은 볶은밥에 우리는 한껏 취했다. 양도 많고, 특히 같이 튀겨진 듯 그러데이션으로 튀김옷이 입혀진 계란 프라이와 함께 먹는 그 맛은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짜장면보다 더 비쌌고 우리에겐 짜장면보다 더 맛있는 게 볶음밥이었다. 그때의 볶음밥에는 짜장은 곁들일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집에서 볶음밥을 하면 의미가 있는 날처럼 여기곤 한다. 볶음밥은 사실 여러 반찬을 꺼내고 담아서 먹기 귀찮거나 힘들기 때문에 한 접시에 담아서 먹는다. 그게 본질일지는 모르나 예쁘게 보이는 볶음밥은 그것만으로 사실을 덮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볶음밥이 맛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 나 자신 이외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살아간다고 느끼는 일이다.


볶음밥을 먹다가 생각을 해봤다. 우리는 왜 살아갈까. 우리는 어쩌다가 태어나서 살아가기보다 어느 시점부터는 살아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아주 오래전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고민해왔다. 도대체 우리는 왜 살아가는 거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치고받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거지? 게다가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말하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끝으로 가는 인생일 뿐인데 왜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러려고 살아가는 것일까.


가끔 우리는 정체성이나 주변성 때문에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왜 이럴까? 왜 제대로 안 되는 것일까? 또는 내 친구는 이런데 나는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같은 생각을 가끔씩 한다. 이런 정체성은 가족 간에도 일어난다. 어릴 때야 다 비슷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족의 구성원에서 벗어나는 사건사고를 치거나 그저 주변인의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가족에게서 외면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가들과 문장가들이 왜 사람들을 살아갈까를 고찰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우리 인간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칭찬을 들으며 인정을 받고, 학교에서는 공부한 만큼 성적으로 인정을 받고, 부부관계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서로에게 인정을 받는 일, 군대에서 고참에게 인정받고, 직장상사에게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인정받는 일, 의사는 환자에게 인정을 받고,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창조적인 일을 하라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창조적인 일을 하지만 그 속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창조적인 회사에서 반복적인 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반복적인 일을 해도 상사에게 또는 동료에게 인정을 받으면 하루를 잘 보냈다고 하겠지만 대체로 그러지 못하다. 그래서 매일 지옥 같은 하루를 겨우 견디고 있다.


닭을 좀 팔면 어때. 좀 못 배워서 닭요리를 파는 일을 하지만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닭을 먹는다. 닭 요리를 잘해서, 닭을 튀겨서 손님들이 맛있다며 인정을 해주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런 것 따위 손님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돈을 내며 먹는데도 잘 먹었다며 인사까지 한다.


이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인정받기 위함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볶음밥을 먹다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내가 만든 볶음밥을 옆에서 오물오물 맛있다며 먹는다. 인정을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별거 아닌 것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건 가슴이 꽤나 뜨거워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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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첩을 좋아해야 할 시기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가 나이가 들어 케첩의 맛이 빠졌다. 케첩이 이렇게 맛이 좋은데 지금까지 그 맛을 모르고 지내왔다니 나도 놀랄 일이다.


생선구이에도 케첩을 뿌려 먹으니 맛이 좋다. 케첩이 맛있다는 걸 왜 어렸을 땐 몰랐을까. 싶다가도 나의 입맛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비린내 나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시들해졌다. 그런 것을 보면 케첩에 별 관심이 없다가 근래에 맛에 빠진 것 역시 내 경우에서는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서 한 번은 케첩을 밥에 비벼서 계란 프라이를 올려서 같이 먹으니 이거 뭐야, 오므라이스 맛과 비슷한 것이다. 어렵게 밥을 볶아서 오므라이스를 만들 필요가 없을 만큼 맛이 거의 흡사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와사비에 빠져서 커피 빼고는 모든 음식에 와사비를 뿌려 먹었는데 좀 웃기지만 근래에는 케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오래전 초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그 녀석의 동생이 나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를 본 적은 없다. 녀석의 동생은 우리 집에서 같이 밥도 먹곤 했지만 친구 녀석은 자존심 때문인지 동생만큼 자주 우리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민수와 민지


그 녀석의 이름을 민수라고 하고 동생은 민지라고 하자. 내가 기억하는 민수의 집 모습은 백열등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옅은 빛과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은 천장 모서리의 거미줄, 있으나 나오지 않는 티브이, 책보다는 옷가지가 걸려있던 책꽂이. 이런 모습이다. 5학년 때에는 민수와 매일 놀았다.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는데 민수는 그래도 덩치는 컸다. 민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탁구였다. 민수는 학교 탁구선수였다. 탁구만 열심히 하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나오는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민수와 민지의 엄마는 어느 날 시장에 갔다 온다며 나가서 1년이 넘도록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도 엄마를 찾아 나선 지 6개월이나 지났다. 아직 어렸던 나는 집세가 뭔지,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할 때였다. 나에 비해 민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민수는 탁구를 잘 쳤고, 탁구를 잘 쳐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밥을 챙겨주는 엄마가 없기 때문에 살은 점점 빠졌다. 연습량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민수는 늘 배가 고팠다. 그 허기를 달래준 것이 식빵과 케첩이었다. 그리고 라면이었다. 나는 집에서 김치를 그릇에 담고 라면을 몇 개씩 훔쳐서 민수네로 갔다.


곤로 같은 것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붓고 라면을 끓였다. 말린 사과에서 나는 냄새 같은 석유의 향이 번지는가 싶더니 파란 불꽃이 올라왔다. 민수는 라면을 늘 4개씩 끓였다. 민지가 잘 먹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 안 라면에는 케첩을 뿌렸다. 민지와 나는 으 하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민수는 맛있다고 했다.


민지는 내가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좋아했다. 갈 때마다 김치, 라면과 함께 동화책이나 백과사전 같은 것들을 들고 갔기 때문이다. 민지는 책을 참 좋아했다. 민지에게 책 보는 게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응, 오빠야, 내 책 보는 게 그래 좋데이. 우리 집에는 책 사줄 사람이 없으니까 책이 없다 아이가. 학교 도서관에는 일찍 문 닫는다고 나가라카데.


민지는 동화책을 보면서 라면을 먹었고 다 먹고 나면 엎드려서 책을 봤다. 내가 가져간 책은 그날 대부분 다 읽었다. 우리 집도 내가 어린 시절에는 가난이 관통하는 집이었지만 동화책만은 부모님이 어떻게든 사주었다. 하루는 어린 왕자를 들고 갔는데 민지가 그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보통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리고 나에게 줬는데 그날은 하루를 더 보겠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민수가 나에게 말했다.


니, 저 책 저거 우리 민지주믄 안 되겠나.


그 말에 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사실 마음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책은 내 동생의 책이었다. 책이 없어진 걸 알면 동생이 울고 불고 할 텐데. 그러다 보면 엄마에게 또 혼날 테고. 무엇보다 책을 어딘가에 줘버린다며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단칸방에서 겨우 방 두 개로 이사를 한 우리 집은 아버지와 엄마가 못 배운 사람들이라 나와 동생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그런 분위기가 책은 원하는 만큼 마음껏 읽게 하겠다는 현실로 이어졌다. 동화책 전집, 위인전, 백과사전, 집에는 어린이가 볼 만큼의 책은 가득했다. 어머니에게는 책에 대한 애정과 애증이 반반씩 었었다. 내가 멈칫멈칫하자 민지가.


오빠야, 오빠야 나는 괜찮데이. 나는 이래 오빠야가 들고 오는 책 읽으면 된다 아이가.


그날 이후 어쩐지 나는 민수랑 서먹해졌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예전처럼 친숙함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탁구실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엎드려뻗쳐해서 코치에게 두드려 맞고 있는 민수를 보게 되었다. 민수의 얼굴은 울분을 참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천 원짜리가 몇 개 있었는데 그날 민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식빵에 케첩을 뿌려 나란히 앉아 먹었다. 그리고 민지를 위해서 맛있는 크림빵을 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민수는 그날 이후 탁구를 그렇게 연습하지 않아 보였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라면과 책을 들고 민수의 집에 놀러 갔는데 보통의 날과 달랐다. 민지는 울고 있었고 민수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작은 모습은 그동안 버텨온 것이 와그르르 무너져있는 모습 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쪼그리고 있는 민수에게 다가가 보니 민수의 머리가 꼭 쥐가 파먹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오빠야, 울 오빠야 머리를 주인아저씨가 막 잘랐데이. 엉엉.


나는 왜 그렇게 됐냐고 물었다. 왜 민수의 머리를 이렇게 잘랐냐고. 민지는 이미 눈물로 인해 얼굴이 쭈글쭈글해져서 나에게 말했다. 민수는 머리가 길어서 자르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방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머리를 잘랐다. 자른 머리카락을 민지가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버렸는데 주인아저씨가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야 이자슥아, 니 머리카락 방에서 잘랐나? 머리카락을 잘랐으면 쓰레기통에 버리야지 여게 버리면 우짜노 이 잡놈의 새끼야. 하수도 막히면 니가 책임질끼가. 너거 집 월세 벌써 몇 달이나 밀린 거 아나? 아버지 어데 가싯노!


죄송합니다.


너거 애비하고 애미는 도망갔는기라, 너거를 버렸다. 니 인자 탁구도 안 친다메. 니가 탁구를 계속 쳐야 학교에서 보조금이 나오고 집세를 낼꺼 아이가. 빨리 친척집에 연락해가 방을 빼라.


안 됩니더. 곧 엄마하고 아빠가 올깁니더. 울 엄마 돈 벌어가 곧 올깁니더. 그리고 아빠도 엄마 찾아서 같이 올겁니더. 울 엄마 아빠는 우리 안 버릿습니다.


이 자슥아, 너거 애비하고 애미하고 너거만 없었으면 벌서 갔을기라. 너거 어매가 너거를 버릿는지 너거만 모르제.


민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주인아저씨를 노려봤다. 민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탁구실에서 엄마가 도망갔다고 놀리는 라이벌이 있었다. 그만 멱살을 잡고 코피를 터트리고 말았다. 코치에게 걸려 엎으려 뻗쳐서 다리가 붓도록 맞았다. 민수는 그날로 탁구를 그만두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참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미칠 것 같았다. 몸이 뜨거웠고 주인아저씨를 홉뜬 눈으로 계속 노려봤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이 자슥아, 니가 그래 노려보면 우짤 긴데. 당장 방 빼서 너거 동생하고 길거리에 나갈끼가. 와 그래 꼬라보노. 이 어린자슥이 벌써부터 어른 말씀하시는데 그런 눈으로, 이 새끼 안 되긋네.


아저씨는 집으로 들어가서 가위를 들고 나왔다. 머리를 자르려는 아저씨에게 민수는 대들었지만 힘이 달렸고 기운이 없었다. 화가 난 아저씨도 울분에 참지 못하는 민수의 머리를 마구 잘랐다. 머리카락이 옷으로 마당으로 떨어졌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은 민수의 자존심이고 민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목구멍으로 울컥하는 슬픈 눈물을 민수는 참아냈다.


며칠 뒤 여름방학을 맞이했고 방학에 나는 민수네 집으로 갔다. 하지만 집에는 민수와 민지는 없고 공백만 가득했다. 주인집 말로는 친척이 와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에게 말이라도 해주고 가지. 나는 섭섭함을 넘어서 어떤 배신감이 들었다.


며칠 뒤에 집으로 편지가 한 통 왔다. 초등학생 답지 않게 예쁘고 바른 글씨체였다. 그것은 민지가 쓴 편지였다.


[오빠야, 오빠야 니 잘 지내고 있제. 우리는 큰 아빠 집으로 왔데이. 근데 좀 무섭다. 그래도 그 집의 주인아저씨랑 같이 있는 것보다 덜 무섭데이. 우리 오빠야가 오빠야 니 많이 보고 싶다고 한다. 내도 오빠야 니가 가지고 온 책도 읽고 싶다. 우리 오빠야 다시 탁구를 한 단다. 그래가 내한테 어린 왕자 책도 사준다고 약속했데이.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그랬잖아. 그래가 책 안 읽는 우리 오빠야한테 말했거든. 근데 우리 오빠야가 그라데. 내는 어린 왕자처럼 많은 것을 발견하지 못해도 친구 한 명은 발견했다고. 그래가있제 내가 우리 오빠야 대신에 오빠야 니한테 고맙다고, 인사할라꼬 편지했다 아이가. 여기서 거기에 놀러 갈라믄 차타고 엄청 가야한데이. 울 오빠야가 탁구 해가 일등 하면 오빠야 니한테 꼭 같이 가자고 하더라. 오빠야 니도 딴데 가지 말고 잘 지내고 있으레이.]


해가 정수리에 꽂혀 머리가 뜨거웠고 편지를 읽는 내내 눈시울도 뜨거웠다. 민수는 그렇게 온다는 약속을 했지만 영영 오지 않았다. 편지봉투에는 받는 우리 집 주소만 있었다. 그때 몹쓸 마음에 주지 못한 어린 왕자 책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없어질 책이라면 그때 민지에게 줘버렸어도 되는 거였다. 이후로 나는 탁구대회가 티브이에 나오면 민수가 나올까 봐 봤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민지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몇 권의 책을 권해 줄 수 있다.



그 녀석이 내도록 점심시간에 먹은 것이 케첩을 뿌린 식빵이었다. 요즘처럼 맛있는 우유식빵 같지 않았다. 텁텁하고 맛도 없는 그런 식빵이었다. 거기에 케첩을 뿌려 운동장의 벤치에 앉아서 몇 개씩 먹었다. 그 녀석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가면 같이 앉아서 식빵에 케첩을 뿌려 주었다. 나는 그 맛도 없는 케첩 뿌린 식빵을 그 녀석과 나눠 먹었다. 그 녀석은 늘 인상을 쓰고 있었고 운동을 잘했고 덩치도 컸다. 한창 먹을 시기인데 그 정도 먹는 것으로는 아마도 모자랐을 것이다. 근래에 자주 케첩을 이것저것에 뿌려 먹으니 그때 생각이 난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케첩은 그대로 어딘가에 뿌려 먹어도 맛있지만 뜨거운 음식에 풀어 먹어도 맛있다. 김치찌개나 짜글이나 특히 라면에 넣어 먹으면 맛있다. 이런 말을 하면 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 우리나라 컵라면 도시락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 것이라고 한다.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먹지 않아 봤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이상하지만 맛은 좋다. 갈비찜이나 돼지고기를 삶을 때 쌍화탕을 넣으면 맛이 확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다. 뜨거운 라면에 케첩을 같이 끓여 먹으면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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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대사가 가장 와 닿았던 영화가 남한산성이 아닐까 싶다.

어린 누리의 눈에 비친 대감 김상언은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연결된 끈이었다. 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와 민들레가 필 때 강가에 나가 꺾지를 잡고 놀았을 누리는 헤어져야만 하는 김상언이 미우면서 고맙기만 하다. 민들레가 필 때면 저를 다시 데리려 오시는 겁니까.라고 울먹이며 묻는 누리의 말에 그리하겠다고 말하는 김상언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김상언의 눈빛에서 누리의 할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던 자신의 과오를 끝끝내 밝히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음을 용서해달라,

너를 지켜주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 보다는 날쇠의 곁에 있음이 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 나를 용서해달라.




나이가 들어서 서운한 말을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이가 어리면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 그렇지 않다.

요컨대 어린아이 때는 한 시간 전에 엄마에게 무차별 폭격으로 혼이 나도 한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헤하며 엄마에게 붙어있다.


그렇다면 왜 나이가 들면 그럴까.


인간의 저장 공간, 즉 뇌 속의 저장 공간은 사건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과 감정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 저장 공간은 방대하여 기억하는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저장 공간은 점점 작아진다.


그러니까 아이 때는 저장 공간에 쌓일 사건과 감정이 별로 없기에 워낙 커서 다른 기억이 들어옴으로 지난 기억을 덮어버린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저장 공간이 퇴화되고 작아지면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능력까지 같이 감퇴한다. 이 감정 기억이 저장되는 공간을 편도체라고 한다.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구타를 심하게 당하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이것을 사건 기억이라고 하고, 이 사건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을 해마라고 부른다. 편도체와 해마는 붙어있고 편도가 해마에 비하면 무척 작다.


한 예를 들어, 예전에 누군가(부모, 친구, 선생님)에게 학대로 심하게 상처를 받아서 잊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아 마음을 다듬어서 상처를 준 사람을 시간이 흘러 찾아가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이 그때 내가 잘못했구나 미안하다고 용서를 해달라고 해서 용서가 될까, 하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구조가 있다.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왕왕 쓰지만 사실 용서는 어쩌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상처를 심하게 받고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지금의 상대방이 아니라 과거의 상대방에게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대방을 만나서는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상대방을 삭제를 해야 용서가 가능하다.


상처는 아주 기묘해서, 상처를 안 줄 수는 있지만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다. 친구가 어머니와의 다툼을 이야기하는 것도 친구는 상처를 줄 마음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만약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엄마가 없다면 친구의 이야기는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용서란 무엇일까.

용서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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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하는 수많은 음식을 하지 않게 하는데 9년 정도가 걸렸다. 부모세대가 물려받은 전통이라는 이 고난만이 가득한 노동을 줄이려고 마찰, 타협, 설득, 공감 같은 시도가 있었고 그 기간이 9년 정도 만에 올해 추석에는 음식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올해 구정까지는 음식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 집은 일 년에 명절을 합쳐 총 세 번의 제를 지낸다. 가족도 조촐하거니와 음식을 하는 그 중노동에 비해 전통을 앞세워 우리가 느끼는 그 정당함은 별로 없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말보다는 친구들이나 옆집 아주머니의 말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는 이유를 물어보니 ‘누가 되지 않게, 다른 집이 봤을 때, 옛날부터 해 왔으니까’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 먹는 건데 사람 수는 적은데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리면 후에 두고두고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집에서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남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식은 음식이나 나머지 음식)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집에서 먹는 것에 반해 우리 집에서는 내가 잔반을 다 처리해야 한다. 특히 엄청난 나물과 딱딱해져 버린 생선을 먹어 치워야 하는데 참 별로였다.

전통이라는 문화가 부모세대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가 있으니 그게 악습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전통이라는 건 좋은 것, 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 옆집에서 보기에 누추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걸 바꾸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최초로 돌아가서 그때는 5년이면 될 줄 알았다.


상차림이 있다면 3분의 1씩 줄여가는데 3년씩 걸렸다. 이렇게 한 상 가득 명절에 음식을 차리게 된 건 그렇게 오래전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부흥기를 맞이해서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국가차원에서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대부분의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허덕이기 때문에 너무 잘 차려서 명절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오래전 조상부터 이렇게 명절에 분에 넘치게 큰 상을 다 가릴 정도로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는 건 아니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또, 엄청나게 흘러넘치는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살이 찌는 것도 생각을 해야 했다. 특히 남은 음식을 전부 때려 넣고 끓이는 전 찌개를 없애는데도 몇 년이 걸렸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먹지 않았더니 자연스럽게 전 찌개를 끓이지 않았다. 그것도 다 먹어 없애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런 걸 먹지 않는다. 거기에 방송 같은 곳에서도 언젠가부터 전통상차림이 너무 과하다는 말을 하는 곳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이 아침에 하는 방송을 철석같이 믿고 보기 때문에 아침에 병원에서 진찰하지 않고 티브이 생방송에 잔뜩 나온 의사들이 건강 어쩌고 하는 말을 듣는데 그중에서 몇몇 의사가 명절에 하는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 위주로 간단하게 차려서 제사를 지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구색에 신경이 쓰인다면 한 접시씩 시장에서 만들어 놓은 걸 사 먹으면 된다. 그렇게 9년 동안 하나씩 하니씩 음식을 줄여 나갔다. 떠먹는 음식이 있는데도 탕국에, 찌개에, 고기에. 이래서는 음식이 공포스러울 뿐이다. 가족이 많다면 모를까 온 가족이 다 모여도 5명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조촐하게 음식을 하고 고요하고 편하게 보내는 명절이 우리에게 훨씬 나은 추석이다.


결국 9년 만에 이번 추석에는 아무 음식도 하지 않았다. 동그랑땡도, 송편도 요만큼씩 시장에서 사 먹었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사 먹는 동그랑땡과 송편이 훨씬 맛있다. 왜냐하면 요만큼 먹기 때문이다. 먹다 먹다 남아서 보기 싫을 정도의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절이라는 게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하게 보내야 하는데 점점 그렇게 보내지 못하는 가족이 늘어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오전 라디오를 듣는데 사연으로 남편이 이번 명절에 시댁으로 친정으로 천 킬로미터를 운전했다며 고맙고 미안하다는 아내의 사연이 나왔다. 그러고 디제이가 자신도 모르게 바로 “보통 이 정도 거리면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할 텐데 말이죠”라고 하고서는 뒷수습을 하는 말투가 나와 버렸다.


명절에 음식만 줄여도 꽤나 편안한 연휴가 된다. 다 모여서 라면을 먹어도 맛있다. 추석에는 역시 컵라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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