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 녀석이 연락 와서 좀 만나자고 했다. 나는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더니 밖에서 좀 만나자는 것이다. 밖에서 만나서 뭘?라는 생각을 했지만 연락은 아주 오랜만에 온 것이고 그 녀석은 나와 어린 시절에 달동네라 불리는 한동네에서 같이 지낸 친구 녀석이었다. 그 동네는 가난이 습격한 동네로 골목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 녀석을 밖에서 만났는데 어딘가로 데리고 가더니 빈 점포가 있는 곳에서 치킨집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녀석은 타이어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벌써 십 년 정도 됐다. 직책도 어느 정도 되고 앞으로도 더 진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식당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치킨집을. 이곳에 빈 점포가 났다는 것을 알고 이래저래 나름대로 알아본 모양이다. 치킨도 여러 군데를 알아본 모양이다. 프랜차이즈로 말이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내도 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었다. 녀석에게는 아이가 셋이 있다. 그중에 둘이 초등학생이다. 곧 중학생이 된다. 그리고 담보로 구입한 아파트의 빚도 갚아야 한다. 각종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을 하다 보니 두 명이 지금처럼 벌어들이는 것으로는 뭔가가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못 한채 그대로 늙어 버릴 것만 같았다. 회사 직원들이 죄다 주식을 하면서 게 중에 누군가는 주식으로 돈을 만지게 되었다. 그래서 덥석 주식을 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손해만 봤다. 회사를 계속 다닌다고 해도 미래가 없다.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타이어 회사를 다녔다면 자영업을 해도 타이어에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같은 말을 했지만 그걸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알아본 것 중에 제일 안정적으로 보인 게 치킨이었다. 몇 달을 다니면서 봐도 이 어려운 시기에 치킨을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치킨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원들이 능력을 발휘하며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자영업을 할 때 왜 전부 식당을 하게 될까. 우리나라는 알겠지만 식당이 포화상태다. 아니, 과포화 상태다. 박찬일 요리사는 인구 7백만 홍콩에는 식당이 2만 개 정도 있는데 현지에서는 그것도 많다고 걱정을 한다고 한다. 서울에는 12만 개 정도 식당이 있다고 한다.


자영업의 종류는 굉장히 많다. 예전 같으면 전파상도 있고, 철물점도 있고, 가구점도 있지만 요즘은 그런 걸 할 수가 없어졌다. 그런 물품은 대기업 마트 같은 곳에서 대체로 저렴하게 다 판매를 한다. 또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배송까지 완벽하게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식당으로 자영업을 하게 되고 식당 중에서도 큰 기술을 요하지 않는 기름에 빠진 닭의 유혹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기름의 유혹은 먹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치킨을 만들어서 팔려는 사람들에게 까지 마수를 펼친다. 기름의 유혹은 대단하다. 다수가 소수에게 다가가 입김을 불어넣는다. 마치 그래야 한다고. 그렇게 시작해서 결과가 옳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선택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 부추긴다.


내 경우를 보면 나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왜 그런 소설을 매일 쓰고 있냐고. 현실적인 소설을 쓰라고 한다. 현실을 반영하고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을 써라고 한다. "너처럼 바다가 끓어오르고, 사람이 수분이 빠져나가 미라처럼 죽어 버리고, 어둠에서 어둠이 새끼를 낳듯 돌출하는 그런 소설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왜 오래도록 그런 소설이나 쓰고 앉아있냐, 현실적인 소설을 써"라고, 기름의 유혹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현실적인 폐부를 찌르는 멋진 소설은 나는 쓰지 못한다. 그건 잘 쓰는 소설가들이 쓰면 된다. 그리고 현실적인 소설은 내가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다. 이미 포화상태인, 잘 쓰지도 못하는, 아니 쓰기 싫은 소설은 쓰기 싫은 것이다. 소설은 어떤 순간에도 개성이다. 부동산에 치이고 직장이 힘들고 매일 숨을 쉴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적인 소설이 있는가 하면, 개와 대화를 하고 뇌파 속에 단백질을 밀어 넣는 소설도 있는 것이다.  


치킨의 유혹은 대단하다. 한 치킨 집이 탄생하면 어딘가에서 또 다른 치킨 집은 소멸된다. 치킨은 장소만 다를 뿐 늘 엇비슷한 양이 다른 장소로 배달된다. 그렇게 치킨은 순환하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 즉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늘 있으나 조직을 만든 초대 사람들은 지금은 한 명도 없고 그 자리를 세대를 거쳐 사람들이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의 한 초로의 소설가가 일본의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다며 산속에 들어가서 글만 썼다. 그 작가가 은둔 작가로 유명한 마루야마 겐지다. 마루야마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어보면 세 번째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라는 챕터가 있다. 국가는 존속할지 모르나 국민은 그 사이에서 소거되거나 소멸할 뿐이다. 어느 나라건 국가는 국민 개개인에 관심이 없다.


기름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시대의 중심에 있다. 티브이나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맞다고 하는데 나 혼자 아니라며 홀로 서서 무엇을 이뤄내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다. 그런 소수의 사람을 동경하고 또 따라 하다 보면 다수가 되고 그것 역시 기름의 유혹처럼 소수를 따라한 다수가 다 성공의 길에 오르지는 못한다. 기름의 유혹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외면할 수도 없고 매일 먹을 수도 없다. 눈으로 기름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먹어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더러운 기름은 몸속에 남아 있다가 어떠한 이벤트를 펼치게 된다.


과포화 상태의 음식점이 즐비한 이곳에서 식당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엉망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우리 현실의 민낯이라 박찬일은 말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열약한 사회 구조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게 식당이다. 차근차근? 몇 년 준비? 이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기름의 유혹에서 그건 있을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영화 ‘감기’에서처럼 정부는 국민을 버리지 않았다, 라는 통수권자의 한 마디가 꿈처럼 지나간다. 


실제 현실판 오징어 게임인 것이다. 그 속에 자본주의에서 조금 밀린 사람들이 우르르 존속되어있다. 치킨 집은 그나마 대안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치킨집은 오늘도 사라지고 오늘도 생겨난다. 오늘도 우리는 기름의 유혹에 시달리거나 현혹된다. 닭은 물에 빠진 것보다 기름에 빠진 닭이 더 맛있음은 전 세계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결속을 다지는 음식, 찜닭


우리 집에서는 오래전부터 찜닭을 왕왕해 먹었다. 그건 순전히 닭 한 마리로 온 가족이 배부르게 먹기 위함이었다. 찜닭을 하면 그 안에 여러 가지를 같이 넣어서 조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찜닭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월급날이거나 아버지가 보너스를 탄 날 정도였다.


간장으로 조려낸 찜닭에는 당면을 가득 넣어 조리해서 마치 잔치 음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당면은 늘 잡채로만 먹었고 잡채는 생일이나 큰집에 갔을 때에만 먹었기에 찜닭에 당면이 가득 들어있으면 그런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간장 양념이 오래 끓인 불에 의해 닭에 스며들면 찜닭은 진정한 맛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한 마리만으로 가족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맛있기도 하지만 찜닭은 슬픈 음식일까.


찜닭은 혀에 깊은 추억을 남겼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꽤 여러 개의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는 튼튼하기도 했고, 낡았기도 했다. 그런 다리를 건너오면서 우리는 그 사이에서 인생의 음식을 맛보았다. 음식에는 슬픔의 맛도, 기쁨의 맛도, 쓴 맛도 시린 맛도 있었다. 찜닭도 그중에 하나의 맛으로 추억 속에 자리를 잡았다.


찜닭이 밥상에 오르면 젓가락이 찜닭에 집중이 되기 때문에 다른 반찬을 그리 필요하지 않다. 된장찌개가 밥상에 오르면 계란말이와 진미채와 오이무침과 생선이 올라오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찜닭을 조리하는 것에는 어머니의 수고가 조금 덜 수고로운 것으로 현명함을 알아볼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간장 베이스에 닭을 쪄서 조리해서 먹는 건 아마도 우리나라밖에 없지 않을까. 간장이 음식의 베이스가 되는 나라는 일본인데 일본에서도 찜닭은 집에서 해 먹지 않는 것 같다. 찜닭도 유행을 타는 거 같다. 한 십 년 전에는 온 거리에 안동찜닭이 지금의 폰 가게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때가 있었다.


나의 입맛에는 집에서 해 먹는 찜닭에 길들여져서 밖에서 파는 안동찜닭은 아주 매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늘 북적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많던 찜닭 집들이 싹 사라졌다. 마치 대만 카스텔라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돼지고기나 소고기에 비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닭을 먹어야 하는데 찜닭은 들어가는 재료가 많아서 인지 다른 닭요리보다 비싸다. 그래서 그런지 안동찜닭을 먹을 바에 치킨을 먹겠다는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집에서 가끔 찜닭을 조리해서 먹으면 아주 예전에 먹던 맛은 나지 않지만 꽤나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제 학생 때처럼 간장 국물에 밥을 비벼서 먹을 만큼 위가 크지 않아서 싹싹 긁어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억의 맛이 난다. 찜닭 한 마리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결속을 다졌다. 그런 음식들이 각 가정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추억의 음식은 마음을 따뜻하게도 하지만 또 마음 저 안쪽에서부터 아프게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거의 다 봤으며 봤던 영화를 계속 보는 편인데 하나와 엘리스는 도대체 몇 번을 봤는지 모를 정도다. 그래서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팬심으로 쓴다.


이와이 슌지의 립반 윙클의 신부가 나왔을 때 혹평이 가득했다. 이와이 슌지와 서태지와 보브 딜런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냈을 때 혹평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즐긴다는 걸로 알고 있다.


풍경 사진보다 보도사진이 존경받는 이유는, 새벽의 일출을 촬영한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가 멋지고 아름답고 잘 나왔다는 ‘감탄’이 있다. 하지만 보도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상하거나, 보기 싫거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무슨 사진이지? 하는 다양한 반응들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기 때문에 보도사진이 존경을 받는다.


세상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뉜다면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때 나는 당연하지만 전자에 속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처음 접하고 그 사람의 영화는 소설처럼 읽혀서 피부로 흡수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두와 피크닉으로 빠져들어간 이와이 월드에서 만난 릴리 슈슈에서 하늘을 날고 싶었던 츠다를 두드려 깨워 밝은 모습의 하나와 엘리스로, 첫사랑을 찾은 사월의 이야기를 넘어 조금은 답답하지만 립 반 윙클의 신부를 거쳐 스왈로우 테일 버터 플라이의 미래에서 모두가 애벌레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잘 만들어야 한다. 늘 하는 말,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 영화라는 예술은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예술에 신세를 진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의상, 건축, 음악, 미술 이 모든 예술이 영화보다 선배다. 영화는 이 선배 예술들에게 조금씩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붙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와이 슌지는 아주 착실하게 그 점을 이행하고 있다.


릴리 슈슈에서 마지막 장면.

공연을 시작하기 전의 장면에서 엑스트라 수천 명이 공연장 앞에 모여 대기를 한다. 이와이 슌지는 그 수천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에게 전부 다른 대사가 적힌 대본을 준다. 그리고 누가, 어떤 장면으로 촬영이 되어 영상으로 나올지 모르니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와이 슌지는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고, 현재 만들고 있고, 앞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이와이 슌지의 힘, 내지는 록웰 아이즈가 가지는 특별함이다.


위에서 사진의 예를 든 것처럼 감독의 사상이나 의도를 떠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일본 특유의 말보다는 이와이 슌지 특유의 음악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 중에서 영화음악이 제1순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는 입장은 이와이 슌지 만의 특별한 영화음악은 그의 영화를 완성하는 마법이라고 생각한다.


립반 윙클의 신부의 미나가와는 마시로가 배우라는 사실이라는 걸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린다. 듣고 나면 미나가와는 사람들에게서 외면을 받았지만 마시로는 그런 미나가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한다. 미나가와는 이런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같이 있어도 좋다고 느낀다. 그것에 여자 남자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사랑이든, 친구든 그것은 상관없다. 미나가와는 마시로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웃음이 많다. 그 모습은 하나와 엘리스에서 아리스가 혼자서 인상을 쓰며 밥을 먹는 것과 마크와 하나와 함께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과연 내가 큰 불행이 닥쳤을 때 나를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내 옆에 몇이나 있을까. 마시로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이와이 슌지는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을 해내고 만다.


립반 윙클의 미나가와를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당신의 시선에 달린 것이다. 타인에게 나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봐주길 바라지만 그럴 일은 없다. 타인을 보는 시선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미나가와는 마시로에게 자신을 소중히 여겨 달라고 말한다. 내 주위에 그렇게 나에게 말해 주는 이가 있을까.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다면 타인에 대해 편견만을 지니고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달라진 나를 발견함이다. 전과 후의 내가 전혀 변화가 없다면 책 따위는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보는 내내 알 파치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영화 대니 콜린스에서 동료이자 친구인 매니저가 아들인 톰에게 피아노를 건네주며 말한다. 대니는 천성이 착한 사람이다. 하는 일마다 그르쳐서 그렇지. 그런 대니를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개연성이니 맥락이니 전개니 불안이니 같은 단어로 이와이 슌지를 논하지 말자. 적어도 당신이 이와이 슌지의 팬이라면 의심하지 마라. 미나가와는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매일 조깅을 조금씩 하니까 매일 달리면서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 폰에 카메라가 달려 있으니 매일 이렇게 몇 장씩 풍경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언뜻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필름 카메라 시기에는 막 찍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로바로 몇 장씩 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삭제할 수도 있다.


폰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 얇은 폰에 들어있는 카메라인데 망원도, 광각도, 일반 사진도 다 찍어낼까, 하는 생각에 근접한다. 근래의 폰 카메라는 단 렌즈가 없고 두 개씩, 세 개씩 카메라가 달려있다.


폰 카메라 이전의 디지털카메라는, 그러니까 일명 똑같이라고 부르는 카메라는 전원을 켜면 주둥이가 앞으로 나와서 사진을 찍었다. 주둥이가 길어지는 이유는 길어진 만큼 빛을 많이 받아서 이미지화시킨다. 그런데 폰은? 폰은 이렇게나 얇은데 어떻게 뒷배경의 보케가 날아가며, 광각의 넓은 화각을 찍어낼까. 그러다 보니 카메라를 두세 개씩 달아서 하나는 광각, 하나는 망원, 하나는 일반렌즈로 빛을 받아서 찍은 정보를 하나로 합쳐서 이미화를 시켜버렸다. 그래서 얇은 폰을 들고 다니며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별거 아니지만 너무 신기한 일이다. 이런 신기한 일이 지금도 옆에서 마구마구 일어나고 있다.


매일 조금씩 조깅을 하면서 매일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보는 건 매일매일 신기한 일을 접하는 일이다. 아이패드 미니가 몇 년 만에 풀체인지가 되어 나와서 신기한 것보다 매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쓸데없을 것 같은 일들이 신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기한 건 매일 비슷한 곳을 사진으로 담아도 사진은 다 다르다.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기의 흐름과 구름의 모양, 하늘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달라지는 색감이나 계절의 변화에 반응하는 생명체들이 사진마다마다 다르다.


이런 모습은 비슷한 형태를 지녔지만 다 다른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렇게 강변을 따라 매일 달리다 보면 정경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저 숨을 내뱉으며 바닥을 보며 달리는 구간이 있고, 정경의 매력에 젖어드는 구간이 있다. 그런 구간에서는 천천히 뛰거나 빠르게 걷거나 한다. 그리고 팔목에 달린 폰으로 사진을 한 컷 담는다.


책장을 넘기듯 매일이 넘어간다. 그 시간이 여러 시간 겹쳤고 어떤 시간은 오늘처럼 시월의 강한 바람이 한 차례 몰아치면 빠르게 넘어간다. 7, 8월처럼 혹독한 더위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이 계절에 맞게 옷을 갈아입는다. 하늘도, 바람도, 꽃들도 달라졌지만 무엇보다 강물도 계절에 맞게 옷을 갈아입었다.


여름의 뜨거운 온도에서 벗어난 강물은 진중하고 진득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시월은 옷을 갈아입는 계절이다. 표층적인 옷뿐 아니라 심층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이다. 우리는 그런 계절의 중심이 있다. 이렇게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때가 되면 어김없이 색을 갈아 치우는 자연의 모습에 조금은 슬프기도 한다. 악착같이 버티고 견뎌도 지구가 돌아가는 것에는 대책 없이 흐름에 딸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 하나의 존속으로 존재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어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강물이 멈추지 않았기에 살아있는 인간의 삶 역시 멈추면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너의 그 푸르른 힘으로 고달픈 시절을 버텼다'라고 윤대녕은 '어머니의 수저'에서 고등어를 말했다.


루시드폴은 고등어를 노래 불렀다.


몇만 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그래도 나는 안다네 그동안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난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고등어구이에는 내 어머니만의 맛이 있다. 구운 듯 튀긴 듯 고등어구이. 그 맛에 산울림도 고등어를 노래 불렀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놓고 주무시는구나


저녁놀이 저 하늘을 뒤덮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면 골목에 퍼지는 고등어를 굽는 냄새는 코를 자극했다. 아침의 계란 후라이 냄새보다 더 사람을 잡아당기는 냄새, 연탄 불위에서 적세(석쇠)에 고등어를 끼워 엄마가 구워대던 고등어의 냄새. 그 냄새가 골목을 타고 동네에 퍼지면 이제 아버지의 퇴근이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동생과 함께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간다. 이 버스, 저 버스를 기웃거리며 아버지가 내리나 안 내리나 동생과 내기를 한다. 아버지가 한 버스에서 내리면 동생은 달려가서 아버지에게 안긴다. 작업복 냄새. 아빠, 오늘 엄마가 고등어 구웠어. 그래? 맛있겠네, 어서 가서 먹자. 아빠가 가시 발라줄게.


서슬 퍼런 가난이 불편하게 우리 집에 들러붙어있어서 매년 연탄가스 때문에 개근상을 한 번도 못 탔지만 그 사이를 벌리고 들어와 우리를 지탱하게 해 준 것들 중에는 고등어 구이가 있었다. 불행은 연탄 때문이지만, 연탄 위에서 고등어를 구워야 맛있다는 어머니. 그렇게 연탄에서 나오는 가스를 마시며 시간을 견뎌왔다.


요즘처럼 예쁜 접시에 각종 소스와 레몬은 곁들이지는 않았지만 투박하게 올라온 고등어구이는 가족의 저녁을 책임지는 한 끼의 주인공이었다. 루시드 폴의 가사에서처럼 고등어구이는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을 책임졌다.


산울림이 노래한 것처럼 전날 절여놓은 고등어를 굽는 냄새가 퍼지는 일요일 아침은 행복했다. 된장찌개와 함께 거실의 볕이 드는 곳에 놓은 밥상에 둘러앉아 맛있게도 고등어를 뜯어먹었다. 이렇게 아침 한 끼를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그 시간만큼은 불안도 없고 걱정도 없었다.


요즘은 계절의 경계가 지우개로 문대듯 흐려졌지만 꽁치와 함께 가을의 음식이 고등어다. 고등어구이를 올려 야무지게 밥을 먹었던 조카를 보면 묘하지만 꽤나 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반달눈을 한 채 오물오물 거리는 모습도 예쁘다.


누군가 고등어구이를 먹다가 훌쩍인다면 어머니가 생각나서일 테니 그럴 땐 왜 그러냐 묻지 말고 밥숟가락 위에 고등어 한 점 뜯어서 놓아주자. 그 옛날 어머니가 내 밥 숟가락에 고등어를 놓아준 추억이 떠올라 행복해할지도 모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