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매일 그곳에 서서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봐

웃는 사람, 고개를 숙이는 사람, 인상을 쓰는 사람, 어린이, 할머니, 심지어는 나무 가까이 와서 침을 뱉고 가는 사람도 있어

나무는 사람들의 침을 맞아도 아무렇지 않아

나무는 지치지 않지

어떤 이는 나무에게 욕을 하고, 어떤 이는 술을 마시고 나무에게 다 토했어

나무는 투덜거리지 않아


여름에 태풍이 왔을 때 나무가 있던 곳은 물에 잠기고 자동차가 뒤집어졌어
나무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덕분에 그곳에 서서 태풍을 견뎌낸 거야
태풍의 혹독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무는 생각을 했을 거야
곧 맛있고 온몸의 여린 부분을 감싸 안아줄 빛이 떨어질 거야, 그리고 나는 힘을 내서 기다릴 거야,라고


나무는 여러 해의 봄눈을 맞으며 여러 번의 사랑을 했어
하지만 모두 떠나가 버린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
나무는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떠나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았어
그런데 일 년 전 하늘하늘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날 힘겹게 나무를 찾아온 어린 새 한 마리가 있었어


유난히 작고 힘이 없어 보이는 어린 새는 무리에서 공격을 받고 벌레도 못 잡아먹을 정도였어
작은 새는 부리와 다리에 암에 걸려 보기 싫게 큰 수포가 생겼던 거야
어린 새는 나무가 뻗은 가지에 앉아 잠을 자기만 할 뿐이었어
나무는 뿌리에 힘을 줘 물을 듬뿍 빨아서 작은 새가 먹을 수 있게 상처를 내고 물을 흐르게 했어
새는 나무의 상처에서 흐르는 물을 핥으며, 나무의 자양분을 먹으며 기운을 차렸어


나무는 새를 위해 상처가 난 곳에 벌레가 일게 했어
어린 새는 그동안 먹은 것이 없기에 벌레를 맛있게 잡아먹었어
그럴수록 나무는 점점 메말라 갔던 거야
나무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 했지만 보드랍고 작은 새에게 그만 사랑을 느끼게 되었어
나무는 새를 위해 그늘을 만들었고 새는 나무를 위해 노래를 불렀어
노래는 나무의 가지에 내려앉았고 나무는 다시 올, 봄을 기다리겠노라고 생각했어


새를 위해 낸 상처는 점점 깊어져 나무는 시들어 가기 시작했어
새 역시 암이 몸으로 계속 퍼지기 시작한 거야
새는 그런 나무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떠나기로 했어  


나무야 슬퍼하지 마 나는 너를 사랑했어
새야 나는 너를 기다릴 거야 봄이 오면 다시 와 주겠니
새는 말없이 나무를 떠났고  
나무는 떠나가는 새를 말없이 바라보았어


새는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지
나무의 몸에는 많은 흔적이 있지만 나무는 유독 작은 흔적을 잊지 않고 있었어
어떤 절망도 나무를 지치게 하지 않아
가지는 시들어 잎을 피우지 못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메말라가는 나무를 발로 찬다고 해도
나무는 지치지 않고 다가올 봄을 기다려
나무는 그렇게 그곳에 바보처럼 서서 봄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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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는 일제강점기의 대단한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다룬 것도 아닌데 이야기에 몰입된다.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극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는 것 같다. 영화는 모든 것이 나무랄 데가 없다. 엄청난 배경, 시대를 오가는 스토리, 그리고 배우들.

내가 지방 사투리 쓰는 곳에 살아서 그런지 파친코에 나오는 사투리가 제일 자연스럽다. 영화는 영화 톤의 경상도 사투리가 있는데 파친코의 사투리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쓰는 사투리를 그대로 쓰는 것 같다.

영화는 아주 잘 찍은 사진을 수십, 수백, 수천 장을 이어 붙여 놓은 것 같다. 빛이 과하지도 않고 감성을 준다고 심하게 어둡지도 않고. 영화 속 모든 장면의 빛이 마치 전시회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모든 배우가 등장 할 때 원 라이트가 적용되는데 특히 이민호가 등장할 때는 원 라이트로 이민호의 얼굴을 더욱 입체감 있게 표현된다. 빛이 한 방향에서 부드럽게 떨어져서 반대쪽에서 소멸하는데 이민호가 등장하면 거의 대부분 원 라이트로 입체를 살렸다.

선자와 현수의 계곡 데이트 장면에서의 계곡은 정말 소박하면서 아름답게 나온 것 같다. 우리가 어릴 때 시골에 놀러 갔을 때의 그런 계곡을 보는 것 같다.

에반게리온에서 한 번 이야기를 했지만 코믹스를 제외하고 티브이판과 구 극장판은 제작위원회가 수익을 다 가져간다. 출판사, 방송국, 음반사, 피규어 회사, 게임회사로 수익이 분배된다. 제작비 외에는 지속적으로 제작진에게 수익에 따른 자본이 지급되지 않는다.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의 경우 편당 제작비가 1100만 달러 정도인데 에반게리온의 가장 큰 돈줄은 파친코가 70% 이상으로 가장 높다. 이 파친코 가게의 80%가 재일 동포 소유다.

이민호는 극 중에서 우리나라를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가 멋진 걸 잊고 있었네, 억세고 또 강인하고].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있고, 아무것도 없지].

일제강점기를 견디고 버텨낸 한국인들의 이야기. 다음 회가 궁금해. 애플 코리아 놈들이 유튜브로 1편을 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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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장국영은 비틀스의 곡 ‘트위스트 앤 샤우트’를 부른다. 샘과 그의 친구들이 기타를 치고 코러스를 넣어주며 피아노 앞에서 부르는 트위스트 앤 샤우트가 세상에서 가장 신나고 또 신나고 가장 신난다. 

샘은 영화에서 유명한 프로듀서지만 음악을 했던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직접 연구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자신과 오래도록 함께 음악을 한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는 샘의 모습은 즐겁다. 

그리고 장국영은 원영의와 금지옥엽을 관통하는 노래 ‘추’를 부른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저 사랑스럽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그건 상관이 없다. 그저 너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지금 그의 노래를 들으면 목소리에는 늘 비애가 서려 있다. 그리고 노래를 타고 장국영의 비애가 흘러나올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가슴은 따뜻하거나 아프거나 할 것이다. 

금지옥엽을 보면 커피프린스 1호점도 생각이 나고, 류자링의 귀엽고 예쁘고 발랄하고 안타까운 모습도 볼 수 있고 남장을 한 원영의가 주인공들과 함께 티키타카 하는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금지옥엽’이었다. 




#

믿기지 않았던 그날 홍콩에서는 장국영의 추모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스 때문이었다. 사스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장국영의 믿기지 않는 추모행렬에 동참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를 추억하고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추모했다. 장국영이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걷어 치우고 장국영은 47살의 아름다운 나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팬들의 곁을 떠났기에 언제나 그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반이었던 장국영은 금지옥엽에서 이반이 아닌 연기를 했다. 금지옥엽의 주제곡 ‘추’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고, 비틀스보다 더 신나게 ‘트위스트 엔 샤우트’를 부른다. 우리의 기억 내면에 장국영은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국을 자주 찾았던 장국영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손바닥에 한글을 적어 이선희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소라의 프러포즈에 나와서 함께 찍은 사진을 이소라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장국영의 노래에는 이상하지만 늘 비애가 서려있다. 그 때문인지 끌림에 딸려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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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는 조스 스톤의 ‘jet lag’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스 스톤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여자다. 노래 하나만 잘 부르면 되는데 키도 크고 늘씬한 데다 배우이기도 하다. 나는 카페의 창에 붙어 있는 바에 앉아 있었다. 혼자라서 작은 카페의 몇 개 없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기도 뭣해서 창밖으로 거리의 풍경이 보이는 바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음에 겨우면 가끔씩 창밖을 쳐다보며 졸음을 공멸시켰다. 사람들과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파랑(wave)이 잔상이 거리에 남았다.


조용한 카페에 여자 두 명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여성들은 테이블에 앉지 않고 내가 앉아있는 자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받아와서 앉았다. 그렇게 길지 않은 바에 나를 비롯해 여자 두 명이 앉으니 자리가 꽉 찼다. 여성들은 가방에서 빵과 과자를 꺼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다. 비교적 읽은 책 제목 정도는 기억하는 것에 비한다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어린 시절 내가 차고 다녔던 nappy의 종류처럼 전혀 기억이 없다. 당연하지만 앉아서 읽은 책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내용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분명 옆에 앉아있었던 두 명의 여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자 두 명은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했고 커피를 마시고 그들이 들고 온 빵과 과자를 먹었다. 여자들이 빵을 먹는 소리가 처음에는 여트막하게 들렸다. 대부분의 로컬 카페는 외부 음식은 반입금지라고 붙여놓지만 이 카페의 주인은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외부에서 조각 케이크를 들고 오던 말든, 빵을 들고 오던 말든, 만두를 들고 오던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니 카페에도 치즈케이크와 티라미수, 블루베리 크림 조각 케이크와 웨하스 정도는 있었지만 주인은 외부 음식 반입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음식을 따로 들고 와서 커피를 주문해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나의 달콤한 졸음도 싹 달아나고 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여성 두 명이 빵을 먹는 소리가 공백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컸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성 두 명이 빵을 씹는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나란히 앉은 두 명의 여성 중 구부러진 등을 보이고 앉은 여성 때문에 건너편의, 그 옆에 앉은 여성은 입만 보였다.


어째서 여성의 입이 내 시선에 명확하게 들어왔는지 의문스럽지만 빵과 과자를 입안으로 넣어서 씹는 모습이 보였고 그 씹는 소리가 카페에 흐르는 음악을 압도할 정도로 컸다.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사이에 여자의 치아가 보였다. 앞 니 두 개는 대단히 크고 튼튼하고 단단해 보였다. 마치 종마의 앞니 같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꼭 여물을 씹어대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입으로 빵을 집어넣으며 말을 했는데 그 양이 대단하여 착각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세상이 멎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놀라운 것은 움직임에는 일정한 리듬이라는 게 정확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빵과 과자는 일정하지 않는 패턴으로 입속에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반면, 음식을 씹는 입의 움직임에는 체계화된 질서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내 사고의 리듬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패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비행하는 파리의 눈알이 되어 여자가 음식을 씹어대는 입술만 확대시켜 쳐다보고 있었다. 패턴인 이렇다.


빵을 손으로 집는다.

입안의 음식물이 다 사라지기 일보 직전에 빵을 입안으로 넣는다.

또 입안의 빵이 다 사라지기 전에 과자를 입속에 넣는다.

그리고 큰 앞니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음식물을 분쇄해서 씹는다.


입술을 좌에서 우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음식물을 분쇄했는데, 정확한 형태와 간격 그에 따른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여자의 입술을 보고 있으니 마치 이 공간은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그 세계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모든 것이 여자의 입에 맞춰지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번 느끼고 나니 지금 앉아있는 현실과 현재의 시간이 바닥에서 붕 떠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카페에 흩어져 있던 의식을 그러모으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여자의 입술은 빵을 먹을수록 더욱 전투적이 되었다. 머리가 잘린 생선의 구운 이리를 씹으며, 죄를 먹고 기력을 회복하는 모습이었다. 귄터 그라스의 넙치도 생각이 났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겠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카페의 공간에 소리라는 곳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저 음식물을 끊임없이 씹고 있는 여자의 입에서, 큰 두 개의 앞니에서, 시간을 돌려야 했지만 나는 포르노를 처음 보는 학생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입술의 주름까지 전부 보였다. 봄으로 들어와 버린 계절에 크고 갈라진 입술의 주름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양식의 하나였지만 여자의 입술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빵과 과자가 들어가서 움직이는 입술과 입은 기계처럼 정확한 패턴을 그리며 음식물을 끊임없이 씹어댔다. 여자의 큰 앞니 두 개가 빵을 씹어대는 것에는 어떠한 불길한 정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말의 큰 치아 같은 여자의 앞니 두 개에는 치석이 그러데이션으로 번져 있었다.


치석의 색은 일반론에서 생각할 수 없는 색으로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흩어지고 분열되었던 내 의식은 점점 조밀해졌고 육체는 한순간에 분리가 되어서 바람이 불면 저 끝으로 날려가서 먼지가 될 것만 같았다. 주름이 거대한 입술은 간단없이 움직였고 큰 앞니로 입안에 들어간 빵과 과자를 분쇄하는 행위는 무섭도록 치열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각성을 불렀다.


그래, 각성이었다. 질서를 강요하는 두 개의 큰 앞니는 나에게 각성을 요구했다. 각성하지 않으면 점점 후퇴하여 저만치 달아나버린 자아를 따라잡지 못한다. 여자의 큰 앞니는 말처럼 원을 그리며 자유와 치아를 총제적으로 부단히 분쇄했다. 세계가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듯이.



Joss Stone - Jet Lag

https://youtu.be/n5Ac5IPkA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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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에 나온 웨스턴 무비가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건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흐르기 때문이다. 

맥베인 부인 역으로 나오는 젊은 카르디날레가 죽은 가족 앞에 섰을 때 흐르는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가히 환상적이다. 마초성 웨스턴 무비가 숭고하기까지 하다. 

제인 폰다의 아버지, 헨리 폰다의 연기며, 아름다운 카르디날레의 모습이며, 주인공인 하모니카 역의 찰스 브론슨까지.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영화다.

레오네 감독은 천재답게 초반부터 대사도 없이 그저 얼굴에 붙는 파리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몰입을 시켜 버린다. 마치 그들에게도 연기의 한 부분을 부여 한 듯이. 

그리고 엔니오 모리꼬네의 처절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3시간 가까이 이어지는데 빠져나올 수 없다. 

아버지는 찰스 브론슨의 팬이었다. 그래서 찰스 브론슨에 대해서는 줄줄 꿰고 있었다. 그 눈매며 손톱의 때까지. 지금은 나의 아버지도, 찰스 브론슨도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영화와 추억은 그대로 남아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찰스 브로슨의 장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찰스 브론슨 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악역인 프랭크 역의 헨리 폰다다. 

거의 50년 전에 나온 영화가 이토록 재미가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세르지오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유명한 영화음악이 많지만 이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은 이 영화에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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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3-2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악도 음악이지만 포스터가 엄청 강렬하네요.

교관 2022-03-25 11:04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봤어요 ㅎㅎ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