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영화 휴일

이만희 감독의 영화로 휴일, 일요일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당시의 내몰리는 청춘들의 보이지 않는 휴일의 끝없는 결락과 우울 그리고 불안을 소설처럼 그리고 있다.

그래서 68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프랑스의 누벨바그 보다 더 모호하고 비극적이며 우울하여 영화는 상영 금지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는 내내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00년대에 극장에서 상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복잡하고 문명의 건물들이 빼곡한 곳에서 돈이 없어 갈곳 없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모습이 대비됨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거대한 서울의 한복판이지만 어디에도 갈 데가 없다. 그들이 갈 곳이라는 건 남산도서관 뒤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공원이나 육교 같은 곳뿐이다.

영화는 임신을 한 여주인공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빈털터리 주인공이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는 내용을 보여준다. 그런 장면들이 화면의 전환,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과 신시사이저의 기괴한 배경음악이 주인공이 처한 우울의 극치를 올려준다.

주인공들의 인물보다는 영화음악, 카메라의 클로즈업, 배경이 주는 압박감, 그리고 감정의 절제와 폭발이 주는 생과 사의 경계를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의사는 허욱과 지연에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지연이 위험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술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말한다. 지연은 수술을 하고 허욱은 밖을 떠돌며 술을 마시다 아이엘싸롱 바에서 고독한 한 여자를 만난다. 고독은 고독을 알아보고 외로움이 가득한 휴일을 어떻게든 버티려는 두 사람은 새벽까지 술집을 찾아다니며 마시고 또 마시며 취하고 두 사람은 공사장으로 향한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가 미래인 허욱. 일요일은 오전에는 빨리 지나갔으면 하지만 밤이 올수록 초조해지는 이상한 날이다, 일요일마다 지연을 만나는 허욱은 일요일이 너무 기다려지지만 일요일이 오는 게 싫다. 빈털터리라 지연을 다방에도 데리고 갈 수 없는 신세다.

공사장에서 바에서 만난 여자와 몸을 섞은 뒤 새벽에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술대에 오른 지연이 생각이 난다. 갈 데가 있어 갔다가 오겠다고 하고, 여자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이런 부분은 꼭 홍상수의 영화에서 종종 보는 장면이다). 일요일에 만났기 때문에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자는 말한다.

허욱이 한달음에 달려 병원으로 지연의 수술 결과를 보러 오지만 결국 눈을 뜨지 못한 지연. 지연은 그렇게 낙태를 하다 비참하게 죽고 만다. 허욱은 휴일이면 지연과의 추억만을 잔뜩 끌어안고 암울하고 또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영화는 지연과 행복했던 지난날을 보내는 허욱의 추억을 편집하며 보여준다. 추억이 가득한 서울의 이곳저곳을 허욱은 미친 듯이 다닌다. 그리고 전철을 타지만 목적지가 없어진 허욱. 추억 속 지연의 아름다운 미소가 잔뜩 나오며 영화는 끝이 난다.


허욱이 돈을 빌리는 동안 모래바람을 맞으며 허욱만을 기다리는 지연의 모습이 교차 되면서 보여주는데 묘하게 우울하고 아주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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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제에 이어지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좀비와 뱀파이어에 이어지는 이야기. 이번에 나온 베트맨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이전에 이미 다 했잖아, 조커보다 덜 하잖아, 전하려는 게 뭐야. 같은 말들이 흘러넘쳤다. 나는 이번 베트맨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바로 ‘복수’ 때문이다.


복수.

복수를 검색하면 복수 차는 게 제일 먼저 검색이 되고 둘 이상의 수도 검색이 된다. 여기서의 복수는 ‘가해자에 대해 똑같은 방법으로 해를 돌려주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영화에서 또는 현실에서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는 건 법으로 허용이 되지 않는 행위이며 그렇게 복수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없고,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삶을 보상받는 것도 아니라고 머리로 훈련을 받았고 눈으로 교육을 받았다. 복수는 안 되는 것, 나쁜 것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복수를 하는 내용의 영화는 끝이 미저러블 하게 끝나거나 호러블 하게 끝날 뿐인 영화가 다수였다.


왜냐하면 복수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법의 허용 범위를 벗어나며 내가 다시 가해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눈높이를 법이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은해의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과 법적으로 처벌하는 과정이 전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다. 한 어린이 집에서 고작 3, 4살짜리 아이가 김치를 못 먹어서 먹다가 뱉어냈는데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려서 아이가 날아갔다. 그리고 아이는 곧바로 일어나서 토해낸 김치를 치웠다. 그리고 그 옆에 네 명의 다른 어린이들이 몸을 웅크리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우리는 봤다. 아이가 날아갔다. 맞아서. 그것도 어린이집 교사라는 인간에게.


이럴 때 모든 사람은, 대부분의 부모는 분노 때문에 눈앞에 가물거릴 것이다. 똑같이 해야 한다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하지만 법은 어떤가. 법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바리케이드를 친다. 사람들은 댓글에서, 내가 부모라면 그 여자의 집으로 가서... 같은 울분에 찬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복수는 좋지 못한 것, 안 좋은 것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묘하게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영화 속에서, 티브이에서 그런 훈련을 뇌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복수하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우리는 나쁜 것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욕심이 나쁜 건 아니다. 욕심이 있어야 재능을 키워 자산이라고 불리는 재산이나 자신의 능력을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장관 후보자들의 문제점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네트워크가 있어서 자식들이 전부, 군대부터 대학교까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이 되었다. 서민들은 치킨 주문해서 딸려 오는 음료 때문에 서로 죽지 못해 싸우고 난리도 아니다. 오늘을 견디기 위해 어떻게든 아등바등거리지만 저들은, 욕심으로 잔뜩 배부른 저들은 자기네들끼리 이미 모든 줄이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서 넥타이를 매고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다.


영화 더 배트멘에서 거짓말을 하면 죽는다. 거짓말을 한 시장이나 청장은 빌런에 의해 죽고 만다. 사실 이 영화에서 빌런의 개념은 모호하다. 그리고 빌런이 나쁜 거라지만 그간 현실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들과 법이 적용되는 허용범위를 보면 빌런의 편에 서고 싶다. 주인공이 복수를 하면 안 되지만 빌런은 복수를 해도 영화에서는 설득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빌런이며 복수를 한다면 더없이 우리가 바라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장관 후보자들을 보라.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늘어놓으면서도 떳떳하다고 한다. 주문했는데 뭐가 들어있니 안 들어있니, 같은 문제 때문에 아등바등거리는 서민들이 보기에 저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다 가졌음에도 관료에 오르려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저런 자들이 또 권력을 잡아서 어떤 거짓말을 할지 무섭다. 저들의 거짓말은 우리의 거짓말과 단위가 달라서, 금방 밝혀지는 우리의 거짓말과는 달리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는다.


어제 좀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현재 미국에서는 실제로 좀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작년부터 각종 영상으로 올라오더니 공영 티브이, 공중파, 그리고 다큐멘터리에서도 취재를 하면서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이 필라델피아의 캔싱턴이다. 이 도시는 그야말로 좀비처럼 일상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https://youtu.be/sdz_xL82o60 <= 클릭 충격 주의


이 도시는 태생부터 아픔이 많은 도시인데 어쩌면 그 망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캔싱턴에는 700명에 달하는 심각한 약물중독자가 모든 생활을 팽개치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현재는 경찰들도 단속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려 제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약쟁이들이 이 도시로 흘러 들어와 일반 시민들은 매일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시에서는 시장이 나서서 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 년에 수백억이 이들의 재활치료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있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길목에서도 팔에 바늘을 꽂아서 약을 하고, 차가 움직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허우적거리며 서 있다. 그들은 약물의 심각한 중독으로 뇌의 기능이 망가지면서 방향감각이나 여타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신체조건이 망가졌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거짓말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약물은 합성 약물인데 원래는 수술 마취용으로 만들어진 약물이었다. 실제 마약보다 몇십 배는 강력한 약물로 아주 극소량으로 수술할 때 의사가 사용해야 하는데 제약회사와 정부, 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재력가와 권력자들이 남용할 경우의 문제점을 숨기고 오직 장점만을 피력하며 시장에 허용을 해버렸다. 그 결과로 약을 하려는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또 전 세계에서 캔싱턴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하는 약물은 놀랍게도 10달러 정도로 아주 저렴하다. 어떤 보급책은 무료로 약물을 나눠주고 있다. 무료로 몇 번 맞다 보면 약을 찾게 되고 그러면 돈을 내야 한다. 만 이천 원 정도로 약물을 구입할 수 있으니 천국을 맛보는 약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약을 하는 본인들의 문제도 있겠지만 권력자와 재력가들의 거짓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망가졌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0여 년 전 정부가 허가를 했고 장점만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입해서 집집마다 틀었던 가습기가 그렇다. 독극물에 달하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 여기저기 과학적, 의학적으로 밝혀졌지만 10년이 지나는 동안 아직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무려 10년이다. 그동안 그 당시 뱃속의 아이는 태어났지만 한창 뛰어다녀야 할 초6 정도의 나이에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다. 그들은 청문회 같은 곳에 나와서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은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다. 콕 집어 그 회사의 사장이 책임이니까 책임을 지겠다, 같은 말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뒤에서 이를 허가해준 정부기관의 공직자들도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이들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지만 전혀 책임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은 우리가 하는 거짓말과는 다르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시스템에 먹히고 만다. 시스템이란 하루키의 말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편리한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에 인간이 먹히게 되면 영혼을 가진 우리는 망가지고 만다.


더 배트맨에서 파괴되어 계엄령이 내려진 고담시에서 당선된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제도를 믿을 수 있게, 공직자를 믿을 수 있게 만들겠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법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수많은 거짓말과 거짓으로 보이지 않는 죄를 지으며 바이러스처럼 퍼트리고 있다.  정치인이 자신의 언어가 없다면 그 정치인이 몸담고 있는 정당, 도시,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국민은 시스템에 점점 도살당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그들을 제대로 감시를 하는 수밖에 없다.



https://youtu.be/Bfqi3_D-2W8 <= 클릭 충격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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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인류에게 남긴 업적을 보자면 에일리언이 그렇고, 이티가 있고, 뱀파이어가 그렇다. 공룡도 있지만 앞의 것들은 완전히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인류의 업적이다. 뱀파이어는 이전부터 내려오는 민담 같은 이야기 속 존재이지만. 그래서 뱀파이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뱀파이어는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었고 여러 버전이 있고, 드라마로도 시리즈가 계속 나왔다. 뱀파이어는 인류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을 종족이다. 인간의 피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뱀파이어는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뱀파이어가 영화를 통해 나오게 되면 전 세계의 사람들은 주머니의 돈을 꺼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극장으로 달려가서 숨을 죽이며 뱀파이어가 나오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렸다. 사람들이 뱀파이어를 기다린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뱀파이어는 아름답고 잘생겼고 예쁘고 늘씬하고 탄탄한 신체와 미모 그리고 젊음을 가진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이 세대를 거쳐 이어지면서 어떤 인간들은 뱀파이어를 추종하기도 했다. 인간으로 삶에 허덕이며 처절하게 내몰리며 사느니 뱀파이어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뱀파이어가 되면 하얀 피부에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모습을 유지하며 불멸한다. 아름다운 몸과 얼굴로 이성에게 접근이 용이하며 인간의 최대 희열인 성적인 욕구 역시 서로 충족이 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뱀파이어를 피하기보다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했다. 뱀파이어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다기보다 인간이 뱀파이어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다. 뱀파이어가 주춤하는 사이 그 공간을 어느 날 좀비가 파고들어 왔다.


인류를 위협하는 좀비. 영화 28주 후와 28일 후에서 좀비들은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윌드 워 Z에서 좀비들은 격렬하며 빠르게 뭉쳐서 인간을 덮쳤다. 뱀파이어와는 전혀 달랐다. 썩어 문드러진 얼굴과 신체, 생각이 없고 뇌가 없어진 듯한 움직임으로 낮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인간을 물어뜯는다. 좀비들은 좁은 공간에서도 격렬하다. 부산행에서도 좀비들은 자신의 신체가 떨어져 나간다는 느낌, 생각, 의식이 없어서 마구 뭉쳐서 달려든다. 이렇게 어느 날 나타난 좀비는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좀비가 세상에 도래하기 전에는 뱀파이어가 있었지만 뱀파이어는 이제, 지금 현재 좀비에게 영화적 업적을 다 물려주고 말았다. 명분도 없어졌고, 나와 봐야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도대체 왜 좀비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을까.


좀비는 뇌가 없다. 좀비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의지뿐이다. 하나의 목표가 생기면 의지만 가지고 달려든다. 먹이도, 잠도, 옷도 필요 없다. 멋지고 화려하고 예쁘게 옷을 입은 뱀파이어와는 너무 다르다. 좀비는 지저분하고 썩어 문드러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든다. 좀비가 되느니 사람들은 죽는 게 낫다고 생각을 했다. 뱀파이어가 사라진 이유 중에는 현재 인간의 피가 예전만큼 신선하지 않다. 산소포화도가 예전 같지 않아 진 것이다. 술과 담배, 마약 종류 - 각종 합성 약물로 인해 사람들의 피가 깨끗하지 않고 더러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세계를 점령하던 뱀파이어들이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더니 좀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뱀파이어는 인간이 사육이 불가능하지만 좀비는 사육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정을 내린 곳이 군부[軍部]였다. 좀비를 군인으로 키운다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좀비는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옷도 필요 없다. 그 말은 군인 1명을 1년 동안 훈련시키는데 들어가는 식비, 군복, 막사 비용을 완전히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맥스 브룩스의 '세계 대전 Z'를 보면 좀비의 앞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쥐를 넣으니 좀비는 그 쥐를 잡기 위해 구덩이에 머리를 박고 3일 동안 으르렁 거렸다고 나와 있다.


이 책은 좀비가 전 세계를 휩쓸고 간(내용을 담은 영화가 월드 워 Z) 후 몇 년이 지난 각 나라의 사정에 대해서 인터뷰 형식을 취한 일종의 보고서 같은 소설책이다. 이 책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좀비라는 카테고리에 핵을 집어넣어도 세계 각 나라의 대체 방법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소름 돋는 건 지금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간 현재 각 나라의 바이러스 대처법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보이는 형태가 오래전에 나온 저 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로 이제 영화 역사에서 좀비가 언제까지일지는 모르나 업적을 계속 쌓아 갈 것이다. 좀비는 괴물이며 이는 사회의 여러 곳에 적용이 된다. 거대한 은행을 좀비에 비유하기도 하며,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를 읽어 보면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속 현대사회에 좀비가 어떤 형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끔찍하며 소름이 돋는다. 사람을 죽이는데 이유 없이 그저 죽이는 살인자들도 좀비에 속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엄청난 일이며 대단한 심적 부담이 있으며 피가 역류하는 듯한 몸의 변화도 온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총기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서 원거리에서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근거리에서 칼이나 가위 같은 날카로운 흉기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피가 낭자하는데 코피 정도밖에 경험이 없던 인간이 끈적하고 뚝뚝 떨어지는 피가 흥건한 곳에서 제정신 일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이유 없이 사람을 그저 죽이는 살인자들이 있다. 98년에 전과 14 범인 황영동이 그렇다. 여자들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십만 원을 달라고 하고 없다고 하면 그저 죽이는 것이다. 또 그해 9월 23일 대전의 한 가정집에 들어가 부녀자에게 십만 원을 달라고 해서 십만 원을 받는다. 하지만 그냥 칼로 찔러 죽인다. 10월 1일에는 한 다방에 들어가 여주인에게 20만 원을 빼앗고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그때 칼로 사람을 38번이나 찌른다. 10월 10일에 한 할머니도 그렇게 죽이고, 마지막 10월 16일에 한 식당에서 맥주와 고기를 실컷 먹고 6만 원이 나왔지만 음식 값을 내지 않겠다며 거부를 하다 여주인을 칼로 마구 찔러 죽이고 만다. 그 여주인은 34살로 임신 6개월이었다. 23일에 한 공중화장실에서 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옆에서 공사 중이던 인부들이 달려와 격투 끝에 붙잡혔다. 이때 달려들었던 23살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은 칼에 찔려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어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성폭행범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같은 인간인데 한 공간에는 이렇게 다른 인간이 살아가고 있다. 98년의 일이라지만 지금도 똑같다.


세상에는 좀비 같은 인간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다. 좋은 차를 몰고 다니지만 차를 따라가지 못하는 주인을 우리는 많이 봤다. 좀비가 너무 많다. 인류 영화 역사적으로 가장 큰 업적은 좀비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좀비. 시체이나 살아 움직이는 존재.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인간. 겉으로는 멀쩡하게 움직이나 생각할 수 있는 뇌가 없어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인간. 우리는 이들을 좀비라 부른다. 어느 날 이보다 더 멋진 뱀파이어가 나타나 다시 영화적 위협을 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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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4-2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뱀파이어를 보고 싶다면 역시 <렛미인> 이죠.

교관 2022-04-27 11:53   좋아요 0 | URL
렛 미 인은 원작 소설도 너무 좋았고, 원작 영화도,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도 아주 아름다워서 놀랬던 작품이었어요
 

피카소 오마주



말이 많다는 말은 비교적 듣기 좋은 말이 아닌 경우가 많다. 부장님은 참 말이 많아, 교장 선생님은 말이 많아, 부모님은, 너는, 그 사람은, 뒤에 말이 많다는 말이 나오면 잔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말이 많은데 듣기 싫지 않는 사람도 많다. 거래를 하거나 영업을 따 내야 하는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한다. 말을 적게 하면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말이 많지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많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소설가들도 말이 많다. 따지도 보면 소설가만큼, 글을 쓰는 작가들만큼 말이 많은 사람도 없다. 작가들은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말한다지만 실제로는 강연을 통해 말을 더 많이 한다. 그러니까 말이 많다.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내가 적은 글이라도 그 글은 읽는 독자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많은 말을 해서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가들, 작가들이 말이 많지만 그 많은 말이 듣기 좋은 작가가 있고, 또 아 진짜 말이 많군, 흥. 하는 작가도 있다.


많은 말인데 더 해줘요, 하는 작가의 경우 엄청난 말을 쏟아내지만 듣는 이들이 알아듣기 쉽고, 거북하지 않은 속도와 내용 그리고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심플한 클래식을 듣고 있는 착각이 드는 말 많은 작가가 있다. 그중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 김영하 소설가가 있다. 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영하의 소설은 나오자마자 날름날름 다 읽었을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 역시 하루키처럼 소설에서 손이 뻗어 나와 나를 데리고 소설 속으로 가버린다. 김영하 소설가는 그동안 강의와 소설이 아닌 책을 출간하다가 근래에 소설이 나왔다. 유튜브에서, 티브이에서 공연장에서 김영하 소설가는 말이 많다. 하지만 더 듣고 싶고 더 많이 해줬음 하는 소설가다.


개인적으로 말을 무척 많이 하는데 역시 더 듣고 싶은 소설가는 원종우다. 원종우는 과학자(라고 해야 할까) 만큼 과학에 대해서 식견이 높으며, 음악가이자 작가인데 그가 펴낸 SF단편소설집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가 너무 재미있었다. 짤막한 단편 소설들로 채워져 있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작품에 대한 과학적인 이야기와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원종우 역시 방송이나 이런 데서 말이 많다.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온다.


소설가만큼 말이 많은 게 시인이다. 시인은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 많다. 시는 짧지만 시의 세계는 깊고 풍부해서 시인의 입을 통해서 그 세계를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인도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군이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박준 시인도 말이 많다. 라디오 방송도 하고 있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스며든다. 우리는 스펀지가 되어 박준 시인의 말을 흡수한다.


그러고 보면 책을 펴내는 인문학자, 책을 펴내는 자기 개발서 작가, 책을 펴내는 철학가, 책을 펴내는 사진가와 평론가 등 책을 내는 사람들은 다 말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의 많은 말이 다 듣기에 괜찮지는 않다. 말 많은 소설가 중에서도 어쩐지 듣기 싫은 소설가도 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말속에 우쭐함이 묻어 있어서 나와 너는 다르며 나는 너보다 조금 위에 있다는 분위기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이 많은 말을 하면 듣기가 싫다.


또 반면에 배우들은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코미디언들 역시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또 말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아이러니해서 소설가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글만 쓸 것 같은데 말을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시인 역시 그렇고 철학가들 역시 그렇다.


하루키도 말이 많다. 과묵하기만 할 줄 알았던 하루키 역시 말은 많다. 참 말이 많네, 가 아니다. 하루키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또는 이전에 연설문을 통해 많은 말을 했다. 하루키는 분명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고, 화제의 인물이며 이례적으로 펴낸 소설들이 엄청난 판매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속에 어려운 단어나 힘든 말은 없다. 그리고 애써 풀어서 말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일상을 이야기하듯이 말을 할 뿐이다. 그건 아무래도 자동차보다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서 그곳의 현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시간을 보낸 탓일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문체가 있겠지만 말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소설가, 작가의 특성상 대부분 일상적인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들도 많다. 그런 작가들은 안하무인격으로 일방도로 같은 면모를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독자들과 언쟁을 높이고 싸우기까지 한다. 자신은 독자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말을 통해서 알리려 든다.


유튜브에서 가끔 책 읽어주는 영상을 틀어 놓는 편인데 하루키의 에세이를 낭독하는 유튜버 중 그저 책만 읽어주면 되는데 낭독하는 이의 달리기 경험을 하루키의 조깅과 맞물려서 흡사하게 말을 한다. 하루키는 4 반세기를 매일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 사람과 고작 1년 정도, 그것도 일주일 내내 달린 것도 아닌데 마치 자신과 하루키가 동일선상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많은 말을 한다. 조깅은 –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멋진 몸이나 날씬한 몸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조깅도 그렇다. 지나고 나면 그런 멋진 몸은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매일 해줘야 유지가 된다. 조깅이 그런 것이다. 작년에 매일 달렸더라도 그걸 머릿속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매몰되어 버려 지금도 내가 계속 조깅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전문 운동선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20년 넘게 하루에 8시간씩 운동을 했더라도 은퇴를 하고 1년만 운동을 끊고 잘 먹고 잘 쉬면 살이 쉽게 찐다. 인간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오래전 릴케도 말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21살의 릴케는 37살 루를 만나 사랑과 죽음 그 이외의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오직 죽음 아니면 루에 대한 사랑을 말했던 릴케. 그리고 많은 말로도 모자라는 자신의 사랑은 시로 표현했다. 무명 시인이었던 릴케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루 살로메에게 매료되었다. 릴케의 구애가 장미와 편지를 통해 끝없이 이어졌다. 루 살로메는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매혹시켰다. 니체의 연인이기도 했고 프로이트의 연인이기도 했다. 루는 릴케의 애틋함을 1928년에 ‘릴케’를 펴내기도 했다. 릴케의 구애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뮌헨의 몽마르트 방갈로에서 한 달을 같이 보냈다. 그곳으로 달려간 전혜린은 두 사람이 머물렀던 곳을 [이 전나무 숲은 몇백 년 된 듯한 거대한 수목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낮에도 굴속같이 캄캄하고 보이는 것은 매끈하고 곧게 솟은 전나무의 줄기들뿐이었다. 어두운 때문인지 지면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그 이끼도 몹시 두껍고 보드러웠으며, 검은 초록빛이었다. 어둠 속을 잘 보면 그 이끼 위에 오랑캐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였고 오랑캐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유난히 짙은 보랏빛이었고 꽃송이가 크고 꽃줄기가 굵고 길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라고 했다. 주위에는 백화 나무가 꽉 차게 서 있고, 그 풀밭 위로 릴케와 루는 맨발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빵과 야채와 달걀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사랑은 그 모든 걸 가능케 했다. 릴케의 가장 찬란한 시가 루를 만났을 때 나왔다. ‘너는 위대한 여명’이나 ‘내 눈의 빛을 꺼다오’ 같은 시가 루와 함께 일 때 나왔다.


루 역시 릴케에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없어.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또 우리들 마당의 돌담의 이끼 낀 틈에서 피어 나오는 새파란 오랑캐꽃의 무리... 이런 것들이 가장 사실적인 것, 알아야 하는 것,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야....]라는 글을 써서 줬다. 장소가 주는 기묘함 때문인지 릴케는 그 속에서 사랑하는 루와 함께 하며 사랑과 죽음 그 외에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너는 밤과 시간의 뒤에 우는 닭소리다. 너는 이슬이다. 아침 미사다. 소녀다. 낯 모르는 남자다. 어머니다. 죽음이다] 릴케는 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릴케는 이곳에서 루에게 아주 많은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근래에는 나도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의 불안에 대해서, 나의 불안함 때문에, 나의 불안한 형태에 대해서, 근원적인 불안,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불안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은 못 했지만 불안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어주는 이에게 하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 아주 기묘한 일이며 특별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 속의 불안에 대해서, 불안이 있다, 라며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끄집어내게 되면 막혀 있는 속이 뚫리는 것처럼 조금은 시원해진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해본 적이 언제였을까. 인간은 대체로 솔직하게 말하거나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가족일수록 가족의 속 마음은 더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님보다는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등잔 밑이 어둡고 촛불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이야기가 괜한 말은 아니다.


불안은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불안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근원적인 불안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안은 확대되고 확장할 뿐이지 축소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오고 불안해진다. 이 행복의 끝이 이미 두렵다. 행복은 늘 추상을 달고 온다. 짧고 얕고 찰나적이다. 그런 찰나를 계속 만들어서 이어 붙어야 하는데 그런 삶은 지치게 된다. 한 번 주저앉으면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하기보다 덜 불행하기는 바라는 나에게 이 추상적이며 기이한 행복이라는 것이 근래에는 잦아졌다.


어제는 유튜브를 통해 100년 전의 한국어 육성을 원본으로 들었다. 일제강점기였다. 한국말을 못 쓰게 하는 일본의 만행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린이들이 우리나라 말을 많이 하고 싶어서 한국말을 배우는 것을 들었다. 또박또박한 소리로, 소나무, 그 모자, 저 보자기,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어서 이리 오너라, 나비 나비 오너라, 노자 노자 나하고. 그저 말을 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할 뿐인데 듣고 있으니 뭉클했다. 소설가들이 말이 많은 이유는 글로 다 못한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말이 많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말을 해야 한다면 가만히 있기보다 말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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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똑똑한 영화 찌질이들이 한곳에 왕창 나오는 영화다. 홍상수는 자신의 그 신묘한 찌질함과 여성관과 불륜을 매번 영화에 드러내는 세계 유일한 감독이지 않을까. 무서운 사랑을 찌질함으로 덮어버릴 줄 아는 감독, 진정한 일탈의 자유 속에는 무시무시한 시선이 있음을 우화적 영상으로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감독일 것이다. 그 영화적 똑똑함이 부럽고 좋다. 

어느 한식당, 영화 속에서 중원 형이 주인공인 감독에게 쪼잔한 놈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쪼잔한 놈. 홍상수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은 그런 각본을 그냥 써버렸다. 그리고 개 찌질한 이야기들이 술집에서 오고 간다. 완전 찌질한 인간과 좀 찌질한 인간과 좀 덜 찌질한 인간이 한식집에서 술을 몇 병이나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재미가 없는데 재미있다. 재미없는 재미가 있다. 북촌방향에는 소설이라는 술집이 나온다.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인공들이 하지만 뭐 그렇고 그런, 찌질한 고학력자들의, 찌질한 일상 이야기들 뿐이다. 그 찌질함 속에 인간의 일상과 일탈이 다 들어가 있다.

매 영화가 비슷한 것 같은데 다 다르다. 강변 호텔은 시 같아서 시적이고, 그때는 맞고~는 판타지적이고, 도망친 여자는 꼭 전시회를 보는 것 같더라. 북촌방향에는 김보경이 일인이역으로 나온다. 이 역시 판타지 적이다. 북촌방향의 김보경은 아주 예쁘다. 김보경이 술집 소설의 주인 예전으로 나올 때는 그저 예쁘게만 나오지만 감독을 사랑하는 경진으로 나올 때는 찌질함에 스며들어 연기를 한다. 김보경의 기담이나 진숙이 누나나 드라마에서도 좋았지만 북촌방향의 담배 두 개비 빌리려는 찌질한 경진이를 너무나 잘 표현했다. 김보경이 작년에 암으로 죽었을 때 이 북촌방향이 생각이 났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실제로 영화적 커리어가 있어서 망해도 상관없어!라고 생각을 가지지만 내면의 그 찌질함을 영화로 표현하고픈 배우들이 나오거나, 진실로 홍상수의 그 대본 없는 대본에 있는 그 시나리오적 배우로 한 번 영화에 나를 걸어보고픈 배우가 나오거나. 아무튼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영화 뒷이야기를 하자면 중원 역의 김의성은 극 중에서 베우이며 영화 한 편 출연 후에도 인기가 없어 베트남으로 가 사업을 했지만 쫄닥 망하고 다시 온 걸로 나온다. 그건 김의성 배우의 실제 경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북촌방향이 칸에 초대를 받아서 배우들이 다 갔는데 김보경은 참석을 하지 못했다. 이미 그때부터 수술을 하고 몸이 아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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