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거리 곳곳에 있었다. 여름을 알리는 뜨거운 빛이 길거리의 그림자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뜨거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름이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름이 거리 곳곳, 사이사이에 뜨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누군가 찾아왔다. 누군가'들'이었다. 이 도시에는 젊은 작가들이 예술을 알리고 싶어서 활동하고 있다. 사진작가들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그리고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들, 그리고 연극이나 예술 영화인들이 있다. 지방의 도시라서 이들의 활동은 아무래도 제약을 받거나 영역이 중앙 도시만큼 활발하지는 않다. 하지만 10년 전에 비하면 뭐랄까 비약적으로 나아졌다. 골목의 숨은 곳에 소극장이 들어서고, 소규모의 갤러리도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도 작년 딱 이맘때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전시회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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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건물과 자동차만으로는 먹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문화가 있어야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거나 숨기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소통과 위로를 알게 된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예술영화를 논하는 사람들로 나의 영화 리뷰를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서 오는 것일까. 영화 리뷰라고 해봐야 아주 짤막한 글을 쓸 뿐이고 게다가 근래의 예술영화(라고 해야 할까, 예술 영화의 기준은 도대체 뭘까)에 대해서 쓴 글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이름 모를 감독의 이름 모를 제목의 영화, 그리고 예전의 이문열 소설의 원작인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해서 쓴 글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나는 상업영화도 좋아해서 상업영화에 대한 리뷰도 쓴다. 그래 봐야 순전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상업영화가 나는 더 좋다.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답게 ‘베를린 천사의 시’나 내가 좋아해서 꽤나 보았던 고다르의 ‘알파빌’이나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부터 우리나라의 김기영 감독의 ‘하녀’까지 여러 예술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근래의 ‘드라이브 마이카’까지. 하루키는 내가 좋아하니까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고 하기에, 아 그전에 그들이 찾아온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모임을 같이 하자는 목적이 제일 크고, 또 모임을 할 때마다 그 장면을 사진이나 글이나 영상으로 남겨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일 년 뒤에 전시를 하는 목적이었다.  


그들 중 나에게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기에 한 영화를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스파이더맨이기에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에서 예전의 샘 레이미 감독의 초기작을 좋아한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그런 영화를 보는 건 시간이 좀 아깝다고 했다. 상업영화는 봐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예술 영화를 보는 게 인생의 시간을 잡아먹는 쓸모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예술 영화가 마치 최고라고,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학이 등장하고 영화 역사가 이루어진 현재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변화하고 감동을 주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상업영화였다. 예술 영화가 마치 상업 영화 그 위에 있다는 생각은 뭐랄까 참 졸렬하다.  


그건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진 학회의 사람들은 사진협회의 사람들을 자신들보다 조금 밑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사진협회는 사진업으로 먹고살아야 하니까 예술보다는 상업사진이 주가 되는데 사진 학회의 사람들은 사진업을 하진 않더라도 사진학을 공부하고 사진을 전공하거나 프랑스에서 사진에 대해서 유학을 하고 와서 그런지 프라이드가 굉장하다. 하지만 그들의 사진을 보면 그림자 찍어 놓고 자기네들끼리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손뼉 치지만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그저 그런 하나의 사진일 뿐이다. 그것보다 오히려 잘 나온 가족사진 한 장이 시간이 지나 추억을 하게 하고 그 당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사진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감정의 변화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위로를 하는 건 상업영화였다. 이번 박찬욱도 자신의 영화가 예술영화로 비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했다. 자신의 영화는 상업영화라고 말이다. 예술영화는 분명히 영화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마치 상업영화의 위에서 행해진다는 생각은 아주 몹쓸 생각이다. 허진호 감독의 ‘행복’이라는 영화는 상업영화지만 보는 내내 주인공 은희에게 빠져들었다. 지켜봐 주는 이가 없어서 한없이 강해지는 한 여자의 이야기. 미래가 보이는 남자와 현재만 살아가는 여자. 옅은 병을 가진 남자를 사랑하며 위태한 여자. 현재가 중요한 여자와 내일이 중요한 남자의 사랑. 그런 은희에게 밀땅 같은 걸 할 여유가 없다. 절대 뛰어서는 안 되는 병을 지녔지만 새벽에 언덕을 달리는 은희에게는 몰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밥을 먹던 황정민이 “너,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도 않니?” 이 대사가 콕 박혔던 영화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나는 그 모임을 하지 않기로 했다. 등을 구부리고 구석진 곳에 앉아서 외로움과 싸워가며 글도 써야 하고, 매일 1시간 반 정도 조깅도 해야 한다. 요즘은 특히 마요네즈를 매일 먹고 있어서 조깅하면서 쉬지 않고 일정 거리는 달리려고 한다. 이 죽일 놈의 너무나 맛있는 마요. 어제는 두루치기에 휘휘 둘러서 먹었는데 소름 돋을 정도로 맛있어서 그만. 그리고 3일에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있다. 요즘 보는 영화, 그 안에 예술 영화는 그다지 없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것일까. 신기하다. 근래에는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시즌4’와 ‘덱스터 시즌 2’를 보고 있다.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의 ‘오비완 캐노비’ 2편까지 봤다. 이 영화들? 이 드라마들의 리뷰를 신나게 적었다. 특히 오비완 캐노비의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 꼬꼬마 레아 공주를 보는 재미가 있으며 스타워즈 이전 시리즈가 확 떠오른다. 스타워즈 팬이라면!


스타워즈의 깊이 있는 세계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릴 때 명절이면 늘 라이트 세이버를 휘두르는 제다이들과 한 솔로의 스타워즈를 친척들과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봤던 기억 때문인지 스타워즈를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겨울방학이면 서울에 왕왕 갔었다. 그건 삼성동인가, 백남준 비디오 아트를 보기 위해서 여름과 겨울에 갔다. 사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단지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의 예술 세계가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플럭서스. 자기 파괴, 정신적 제설 작업, 자아의 또 다른 표현.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끌렸다.  그리고 전시회장에서 큐레이터에게 질문을 너무 해서 따로 불려 가기도 했다. 어느 한 큐레이터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도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예술을 이해하려고 하면 너무나 어렵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울 수 있다." 그 이후에 나는 백남준의 세계가 더 좋아졌다. 아마 그 당시에 나는 몹시 외로웠고 어디에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고요하고 조용한 성격인가 봐.

하지만 조용한 성격이란 없다. 사람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보통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 수가 적은 아이도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말을 많이 한다.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란 없다. 상대방이 나의 말을 대체로 무시했기에 그 사람 앞에서는 조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단순한 마음을 복잡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사촌 누나 집에서 뛰쳐나와 연락도 하지 않고 어딘가 여관에서 혼자 잠을 잤다. 작은 창으로 난 밤하늘의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새벽이 어스름 오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것과 나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그대로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인터폰으로 체크아웃 시간이라고 해서 나는 나왔다. 사촌누나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혼나고 그녀의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얻어먹고 고모 댁에 가서 인사를 하고 나와서 둘째 외삼촌 댁이 있는 시흥으로 갔다. 작은 슈퍼를 하던 외숙모가 나를 위해 저녁을 맛있게 차려주었다.  


나는 평소 친하지 않았던,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사촌들과 다 같이 한 방에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이 해가 바뀌는 12월 31일이었고 티브이에서 스타워즈가 했다. 모두가 두꺼운 한 이불에 발을 집어넣고 귤을 까먹으며 스타워즈에 빠져들었다. 스타워즈의 캐릭터와 몬스터들에 대해서 떠들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몰랐는데 같이 보는 스타워즈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만달로리안을 볼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옛 추억의 스타워즈가 확 밀려오는 건 이번의 ‘오비완 캐노비’였다.


나도 제다이들보다 아임 유어 파더,라고 말하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던 다스 베이더를 좋아했다. 스카이 워커가 용암에서 팔다리가 다 잘린 그 후, 파메드가 죽고 난 그 후, 아기 루크와 아기 레아의 그 후, 제다이들이 몰살당한 그 후, 그 후의 이야기가 이번 오비완 캐노비에서 보여준다. 회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존 윌리암스 느낌의 음악과 함께 ‘루카스 필름’ 글자가 나올 때 뭔가 짜릿하다. 스타워즈가 처음 나왔을 당시 루카스 필름에서 한창 그래픽을 배우던 이십 대 청년 워즈니악은 파견근무 형식으로 디즈니사로 가서 애니메이션의 움직임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가 70년대에서 80년대였다. 그 당시의 그래픽이라고 해봐야 8비트, 16비트 이런 시기에 우주선을 날리고 라이트 세이버를 휘둘러야 하니 골 때렸다. 그런 그에게 와서 우리 같이 일해보지 않겠나, 나에게 좋은 3D 애니메이션 기획이 있네,라고 손을 내민 사람이 스티브 잡스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10년 뒤에 세계를 놀라게 한 토이스토리를 만들어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이번에 버즈의 이야기가 새롭게 영화가 됐는데 기대가 된다.


뭐 그건 그렇고, 오비완 캐노비는 보는 재미가 있는데, 꼬꼬마 레아 공주의 똑 부러지는 연기를 보는 재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가 굿이다. 유다인이라는 도시는 꼭 중국이나 일본 같은 느낌이고 의상도 기분 상으로 중국 느낌이 확 든다. 한국계 배우 성 한도 나오는데 분장을 떡칠해서 도통 알아볼 수 없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헤이든 크리스텐슨이 그대로 나온다 하니 역시 기대.


영화는 사람과 비슷하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듯이 예술 영화가 상업 영화 그 위에 있지도 않고 상업 영화가 예술 영화보다 못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늘 겸손해야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이 영화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사진, 건축, 의상, 음악, 미술 이 모든 예술이 영화라는 예술보다 선배다. 그래서 영화는 선배 예술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https://youtu.be/_Lzx0dLZ1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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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이 귀여워!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이 먹는 양이 실로 많아 보이지만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여러 반찬이 푸짐하게 나오는 게 아니라 대체로 중점적인 요리 하나 정도가 나온다. 그 양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로 상은 두 세 요리를 먹는데 가격적으로 보면 보통 3만 원은 넘게 나오는 것 같다. 실제로 밥 한 끼를 먹는데 3만 원 정도를 써야 한다면 현실적으로 큰 고민이다. 하루 꼬박 세 끼는 먹지 못 하더라도 두 끼를 먹는다면 6만 원이 홀라당 달아나 버린다. 천만번 양보해서 고로 상은 1인 기업 형식이며 돈도 잘 버는, 그 짝에서는 재능을 가진 유능한 사람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삶의 낙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독신이니까 가능하리라 본다. 하지만 고로 상의 먹성이 참지 못하고 터졌을 때는 부산에 와서 낙지볶음을 먹고 돌아간 후 (급작스레 부산으로 오게 되어서 그런지) 일본의 포장마차에서 라멘 한 그릇을 먹은 후 다시 한 그릇을 주문하면서 미친 듯이 튀김과 덴푸라를 이것저것 여러 개를 시켰다. 카메라가 멎는 마지막까지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고로 상은 그 정도의 많은 양을 먹어야 만족에 가까워져 정말 잘 먹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로 상이니까. 평소의 고독한 미식가에서의 고로 상은 정말 만족할 만큼 배를 채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고로 상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순전히 픽션의 세계에서의 이야기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 4에서 9화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고로 상은 철판요리 집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모택동 립이 있는 가게다. 모택동 립이라는 걸 손으로 들고 뜯어먹은 다음 검은 볶음밥을 먹는다. 철판요리라서 요리사가 그 위에서 요리를 하는데 우롱차로 볶음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커플의 남자가 저건 우롱차로 만드는 볶음밥이라고 애인에게 말한다. 그러면 애인이 “헤에, 카와이”라고 한다. 그러자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고로 상이 속으로 ‘볶음밥이 귀엽다니, 흠’라고 한다. 정말 볶음밥이 귀엽다니, 고독한 미식가의 시나리오 작가는 대단히 재치가 넘치는 사람이거나 글에 대한 재주가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여러 명이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세계의 인기작 미드 프렌즈의 작가는 50명이 넘었다. 여하튼 고독한 미식가를 볼 때마다 고로 상이 내뱉는 주옥같은 음식에 대한 찬양 멘트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이번에는 고로 상이 또 어떤 멘트로 음식을 가지고 놀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커플의 여성이 말한 것처럼 음식 중에서 볶음밥이 가장 귀여운 음식이 아닌가 싶다. 볶음밥을 해 놓고 보면 귀여워! 하는 느낌이 있다. 그건 뭐랄까 찌개를 보고 귀여워!라고 하는 느낌은 없다. 역시 고기를 굽거나 튀긴 생선을 보며 귀엽다는 느낌도 덜 받는다.


볶음밥이라는 걸 아이들과 함께 먹게 되면 더 귀엽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렇게 볶음밥을 다 조리 한 다음에 식힌다. 뜨겁지 않게 식힌 다음에 아이들에게 비닐장갑을 끼게 하고 별 모양이나 삼각형의 모양의 판에 꾹꾹 눌러서 예쁜 모양을 잡는다. 그 위에 김가루를 뿌리면 맛도 좋고 보기에도 역시 귀여운 볶음밥이 된다. 볶음밥 안에 채소를 왕창 넣어도 아이들은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야금야금 맛있게 잘 도 먹는다.


이 볶음밥이 ‘귀엽다’라는 말보다 일본의 ‘카와이’가 좀 더 어울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일본의 학부형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볶음밥으로 만들어 그 위에 귀엽게 데코레이션을 해서 더 그렇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가정집 도시락을 보면 짱구부터, 병아리까지 무척이나 귀엽게 도시락을 만들었다.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지! 뭘 그렇게까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은 음식을 먹기 이전에 보는 것으로 한 번 맛을 보기 때문에 프랑스 요리나 뉴욕의 식당가에서 접시 위의 공백을 중요시하며 데코에 신경을 쓴다. 입으로 들어가서 다 똑같은데 왜 과자의 모양은 끝없이 다르게 출시를 할까, 한 번 생각해보라.


기무타쿠 주연의 그랑 메종 도쿄에서도 미츠히로의 유치원생 딸의 도시락을 기무타쿠가 주연한 오바나가 매일 새벽에 좋은 재료로 예쁘게 만들어줘서 반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는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여기저기서 반 아이들의 입에서 ‘초 카와이~’가 터져 나온다. 우리는 예쁜 도시락을 보고 ‘와 귀여워’보다는 ‘와 예쁘다’를 더 말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볶음밥을 보고 있으면 정말 꽤나 귀엽다. 각가지 재료가 한 곳에서 볶아져 아름다운 색감을 자아낸다. 컬러에서 중후함이나 노련함보다는 재잘재잘대는 귀여움이 가득하다. 물론 볶음밥은 맥주와 참 잘 어울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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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었다. 이토록 시원한 바람이 건물의 사이를 돌아 나의 볼을 건드렸다. 오월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길거리 곳곳에는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는 소음이 흩날리고 있었고 소음은 바람을 타고 주위를 맴돌았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 읽던 책을 펼쳐 읽으며 걸었다. 아직 ‘고탄다’는 죽지 않았지만 이제 곧 자신의 마세라티를 몰고 바다에 빠져 죽을 거리는 걸 안다. 고탄다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떠들썩하게 지내지만 그 속에서 몹시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고탄다 내면의 어떤 무엇을 건드려서 키키를 목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 고탄다 역시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는 걸 안다. 죽음이라는 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까이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고탄다는 그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벌써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소설이 있다. 나도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5월의 마지막이라고 해서 딱히 극적이거나 슬프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단지 매년 5월의 마지막이 되면 6월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덜 되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준비라고 해봐야 딱히 벌게 있는 건 아니다. 일 년 중 6월부터는 여름의 시작이니까 나도 여름에 맞게 나의 몸과 마음을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올해는 때 이른 5월의 더위 덕분에 해변에서 홀라당 벗고 잠시 책을 좀 읽었을 뿐인데 피부가 캐러멜 색으로 변했다. 6월부터는 세상이 소설처럼 바뀐다. 물론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내가 보는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 그 절정이 7월에 다다랐다가 8월에 정점을 찍고 조금씩 하강하여 9월이 되면 서서히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뜨거운 여름의 세상이 소설화가 되는 건 몹시 흥분되는 일이다. 집 앞의 해변의 모래가 아주 보드랍고 부드러운 모래로 변하며 태양이 기분 나쁠 정도로 뜨겁고 밝아서 세상의 모든 축축함을 바짝 말려 버릴 것 같다. 이 여름의 소설화가 좋아서 여름만 지속되는 하와이 같은 곳에서 일 년 열두 달 내내 소설적으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영화 ‘마지막 액션 히어로’에서 영화 속의 잭 슬레이터의 세계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는 메가데스의 Angry Again이 흘러나온다. 멋지다. 뿐만 아니라 AC DC, 데프 레파드, 테슬라, 에어로스미스의 음악이 심장을 두드린다. 그야말로 소설적인 영화다. 비현실이며 초현실이고 비규정적인, 그런 날들이 6월부터 이어진다. 5월의 마지막이 되면 좀 더 마지막이고 싶다. 5월의 그린 향기, 짙어지기 전의 녹음과 오월의 바람, 그리고 5월 내내 간직했던 추억을 마지막까지 향유하고 싶다.

5월의 색감. 노랗고 노란 기분 좋은 노랑


노랑이다


평온하고 평화로운 5월


전혜린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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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린이 때 이맘때가 지나면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마당에서 저녁을 먹는 일일 종종 있었다. 마당에는 평상이 있어 밥상을 들고 와서 평상에 앉아서 저녁밥을 먹었다. 특히 고기를 구워 먹을 때면 꼭 어딘가에 야영을 온 기분이 들어서 신났다. 고작 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가며 저녁을 먹을 뿐인데 나도 신났고 동생도 신났고 마당의 깜순이도 신났다. 기껏해야 집 안에서 마당으로 저녁 식사를 옮겨왔을 뿐인데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 마당에 있는 화단에서 벌레들이 일고 날파리들과 모기들이 출몰하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당의 불도 좀 더 환한 것으로 더 비춰야 했고 고기를 구워 먹는 불판도(전기로 구워 먹는)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기선을 길게 연결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고기를 굽는 냄새가 솔솔, 바람을 타고 옆집 뒷집으로 날아간다. 그러면 친하게 지내던 옆집 아줌마 아저씨가 아이들과 함께 온다. 마당이 시끌시끌해진다. 우리는 마당을 뛰어놀고 어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낭만적인 풍경이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몰려오지 않았기에 밤은 좋은 온도와 좋은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또 어떤 날은 화덕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화덕에 숯을 넣고 불을 지피고 그 위에 불판을 올리고 직화로 고기를 구우면 그 향이 연기가 되어 집 주위의 모든 하늘에 머문다. 숯에 닿아 직화로 구워진 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는지. 친하게 지내는 옆집들에서 호박이니, 쌈장이니, 상추니. 이런 반찬을 들고 와서 하하호호 어울린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즐겁고 어른들은 술잔이 오고 간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깊어진다. 별거 아닌 하찮은 것들이 행복으로 바뀌어 유월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때 정말 그 시간이 좋았을까 싶다. 지금의 내가 그 당시의 아버지 자리였다면 나는 그 저녁 시간이 그렇게 반갑지 만은 않았을 것 같다. 여름이 오기 전 오뉴월의 저녁에는 종종 그렇게 저녁을 먹었으니까 평일에도 마당에서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는 새벽에 눈 떠서 멀리 있는 회사까지 가야 했다. 버스를 타는 곳까지 열심히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꾸벅꾸벅 졸면서 회사에 출근을 했다. 퇴근을 해서 올 때에도 마찬가지다.  


옆집 가족들과 어울려 저녁식사를 즐겁게 했지만 주로 어머니들끼리만 잘 아는 사이였다. 아버지들은 대체로 회사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많고 가끔 주말에 이발소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게 아는 척을 했다. 이발소에서 하나의 주제로 아버지들끼리 이야기를 하게 되면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하며 어울렸지 어머니들처럼 매일 나물을 다듬으며,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의 문제로 이야기를 친근하게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들은 가족들끼리 어울리는 자리가 대체로 어색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말이 많은 사람이 있고, 또 그 말을 대체로 계속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무르익어 깊어지면 아내에게 끌려 집으로 가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어제 너무 마신 탓에 아침에 출근이 힘들었다는 아줌마의 말을 듣는다.  


아버지는 속내를 거의 내보이는 스타일이 아니라 별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고통도 얼굴을 조금 일그러트려가며 참을 뿐이고 말을 아꼈다. 왜 그렇게 말을 아꼈을까.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다 하나씩 숨기는 뭔가가 있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도,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래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주지 않으려 애쓰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상처 입혀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서 늘 거짓말이 필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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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주, 늘 가던 곳의 멕시칸 치킨집이 그날 나오지 않았다. 이로써 벌써 두 번째 팽 당했다. 보통 집으로 들어갈 때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고 포장을 받아서 간다. 10년이 넘게 그러고 있으니 후라이드 치킨은 언제나 우리 동네 멕시칸 치킨집이다. 나의 장점이라면 뭔가를 사러 가거나, 장을 볼 때 원하던 물품이 없을 시에는 항시 차선책을 강구해 놓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최선책이 실패했다고 해서 허망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멕시칸 후라이드 치킨에 대해서는 그게 무너졌다. 오래전이지만 우리 동네 멕시칸 치킨 집이 문이 닫혔을 때 다른 여러 곳의 후라이드를 사 먹어 봤지만 우리의 입맛에는 우리 동네 멕시칸 치킨집 만한 후라이드가 없었다. 그건 순전히 기호에 해당하는 것이며 기호 속에는 튀김가루의 맛이 크게 좌지우지할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인점마다 염지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따라 치킨의 맛도 다르다. 비슷한 양의 나트륨도 튀김가루에만 염지가 되어 있느냐, 치킨의 겉으로만 염지가 되어 있느냐, 아니면 치킨의 속살까지 염지가 되어 있느냐에 따라 튀김가루의 두께가 달라지고 또 맛도 다르다.


이번에도 팽 당하고 난 다음(보통은 팽 당하면 다음 날 사 먹었는데) 이 허망함을 달래 보려고 동네의 치킨 집을 찾아다녔다. 먹고 싶은 날 후라이드를 먹으리라,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다음 날로 미루지 못했다. 무릇 치킨이란 먹고 싶은 그날, 바로 먹어야 한다. 후라이드에는 그런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 미친 척 동네의 치킨집을 검색해서 그 앞을 지나다녀봤다. 근방 400미터 안에 치킨 집이 열 군데가 있었다. 비에이치씨, 비비큐, 교촌, 굽네, 멕시칸, 가마치 통닭, 케이에프씨, 다가치 통닭, 처갓집, 페리카나가 있었다. 게다가 닭갈비 집까지. 실로 대단했다. 우리 동네는 선박회사가 바로 코 앞에 있어서 회사원들이 퇴근 후 우르르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킨 집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깃집, 족발집, 선술집, 국밥부터 중국집, 칼국수를 파는 곳까지. 카페와 등등등. 확실하게 재보지는 않았지만 400미터도 아닌 것 같다. 양 사방으로 200미터 정도? 그래야 걸어서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400 미터면 너무 멀다. 회사원들이 퇴근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400미터를 걸어서 가기란 너무 고된 일이다.

 

일단 치킨 집만 놓고 보면 매장에 제일 사람이 많은 곳은 비비큐였다. 그곳은 최근에 생긴 집으로 실내가 가장 카페에 가까웠다. 그래서 여자들도 많이 있고 노래도 흘러나왔다. 그 외 보통의 치킨 집은 배달 위주가 되고 매장 내 홀은 테이블이 두서너 개 정도 있을 뿐이었다. 일단 후라이드를 먹기로 했으니 한 마리 튀겨 가기로 했다. 후라이드는 삼계탕처럼 어디든 다 엇비슷하니 맛있다. 매장에 사람이 별로 없고 빨리 될 만한 곳을 찾다가 비에이치씨에서 후라이드를 튀겼다.

 

보통 일을 하고 들어오면서 전화를 동네 멕시칸 치킨 집에 전화를 한다. 한 30분쯤 걸리기 때문에 가서 픽업해서 집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전화를 건 날이 쉬는 날이면 일하는 근처의 멕시칸 치킨 집에서 후라이드를 해가는 날도 있다. 이게 이상하지만 동네의 멕시칸만큼 맛이 없다. 같은 멕시칸이라고 해도 기름의 상태나 뭐 튀김가루에 들어가는 미묘한 양의 조절이라든가, 그런 것에 따라 맛이 달라질 텐데 맛이 없다고 느꼈다. 그런 이유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일하는 근처의 멕시칸 치킨집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있어서 인지 종류가 한 서른 가지가 넘게 있었다. 치킨에 관한 요리가 아주 많았다. 그리고 동네 멕시칸에 비해서 치즈볼도 주고 껍질 튀김도 주며, 무엇보다 포장을 하면 2천 원을 깎아준다. 그래서 한 마리를 만 오천 원에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동네의 멕시칸 보다 맛이 많이 떨어졌다. 동네의 멕시칸에는 치킨의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가 아는 후라이드, 양념, 반반, 마늘, 그 정도뿐이다. 아마도 치킨에만 집중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포장을 한 비에이치씨의 후라이드도 맛있었다. 그러나 튀김옷의 맛이 동네의 멕시칸(모든 멕시칸이 아닌) 후라이드를 따라오지 못했다. 맛은 있으나 더 맛있는 후라이드의 맛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동네 멕시칸 집에서는 사장님이 직접 만든 간장 양념을 주는데 이게 정말 맛있다. 분명 꿀을 넣은 것 같은데 후라이드와 너무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양념을 추가하면 얼마냐고 하니까 사장님은 그런 것 없다며 하나 더 넣어주기도 한다. 그 맛을 보고 집에서 엇비슷하게 만들어서 두부를 푹 찍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맛은 나오지 않았다. 엇비슷하긴 하나 간장의 맛에 과하지 않은 달달한 맛이 섞인 양념은 따라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치킨집의 후라이드가 그런 것이다. 엇비슷하긴 하나 그 맛은 아닌 맛.

 

그나저나 동네에 이렇게 많은 치킨 집이 있었다니. 치킨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은 없고, 일인일 닭인 요즘 치킨 집을 하면 모두가 장사가 잘 될 것 같은데 내막은 또 그런 게 아니니, 모두가 다 잘살기보다 모두 못살지 않게 되는 그런 날은 오지 않는 것일까. 그나마 아직까지는 둘둘, 네네, 호식이, 60계는 보이지 않고 있다. 곧 들어오겠지.


밑의 사진에는 멕시칸과 비에이치씨가 있다. 어느 후라이드가 멕시칸일까. 그리고 간장을 따라 만들어서 두부를 푹 찍어 먹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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