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내내 무더운 날이 지속되다가 6월에 접어들어 오늘까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도 흐린 가운데 그 사이의 틈을 벌리고 해가 바닥으로 내려오고 싶어 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놀랄 정도로 큰 천둥소리에 차렷 자세로 가만히 있기도 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천둥이 콰쾅하고 치면 놀라고 무섭다. 특히 고립된 지역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면 그야말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이없을 정도로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5월부터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지만 매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겨울 내내 집 안에서 꽁꽁 들어앉아있던 사람들이 날이 풀리면 야외로 쏟아져 나온다. 또 3개월 정도면? 하던 코로나가 3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야외로 흘러나왔다. 이번 5월은 얼마나 찬란할까. 그러나 달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뭐랄까, 코로나가 덮친 지구는 인간은 활동량이 줄어들었지만 그 외의 존재들, 동물들이나 곤충이나 날벌레들은 엄청나게 많아졌다. 강변의 수풀이 있는 곳을 지나치려다 놀라게 되는데 그건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날벌레떼가 부우웅하며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서로 누가 누가 빨리 가나 식으로 달리다가 그 수풀 쪽으로 갔는데 전부 욕이란 욕을 다 하면서 으악 이게 뭐야! 팔을 휘젓고, 자전거가 넘어지고, 방망이 같은 것으로 마구 휘두르지만 대략 10만 마리의 벌레 떼가 윙윙 붕붕 하며 코웃음을 칠 뿐이다. 정말 전기 벌레 퇴치기 하나 구입해서 등에 울러 매고 여기까지 달려와서 타다다닥 타 다다다 다다다닥 하며 휘두르고 싶다. 그러면 속이 정말 뻥 뚫릴 것 같다. 10만 마리의 벌레를 죽이는 재미를 알게 되면 다음부터 그 재미를 보기 위해 매일 여기까지 영차영차 달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가량 타다다닥 타 다다다 다닥하며 벌레들을 죽이다가 어느 날 벌레 퇴치기 사이사이에 벌레들이 가득 끼면서 틱 하며 꺼지는 것이다. 그때 벌레들이 부우 우우 우웅 하며 하늘을 검게 만들어서 나에게 확 덮친다. 나의 온몸에 벌레들이 가득 붙어서 나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숨을 쉬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벌레들이 날개를 펴 들고 입 안으로 가득 들어와서,,,


이렇게 달리다 보면, 강변을 따라 조깅을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시청이나 구청에서 나와서 강변에 많이 자란 풀을 벤다. 마치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 놓은 것처럼 싹 베어 버린다. 이렇게 때가 되면 매년 풀을 싹 잘라 버리면 굉장히 많은 벌레도 덜 일고. 풀을 베고 난 다음 바로 지나가면 풀냄새가 확 나는데 이 냄새가 아주 좋다. 꼭 녹차밭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하다. 바람이 없고 낮동안 해가 쨍쨍한 날이라면 냄새가 머물러서 서서 냄새를 한동안 맡았을 텐데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풀냄새가 바람에 따라다닌다.


야외에서 조깅을 하면 좋은 점 중에 하나라면 이런 것이다. 평소에 잘 맡지 못하는 자연의 냄새를 확 맡을 수 있다는 것. 생활 속에서 자연의 냄새는 썩 맡지 못한다. 만약 아직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동네에 산다면 하천을 따라 흐르는 하천의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냄새는 인상을 쓰게 만든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맡을 수 있는 좋은 냄새는 죄다 인공적인 냄새다. 샴푸 향, 비누향, 방향제, 조리하는 음식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 등이다.


그 와중에 이렇게 풀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 와아 이거 무슨 냄새야?라고 엄마에게 묻고 엄마는 풀냄새라고 말을 해준다. 그러한 정경은 어떻게든 보기 좋다. 주말에는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를 따라 강변으로 나온다. 아이들은 주위에 엄마나 아빠가 있기만 해도 마냥 신나고 좋다. 나도 그런 어릴 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 아버지를 따라 나와서 아버지는 볼일 본다고 어딘가 상점 안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나는 상점 안에 가만히 있기가 따분해서 상점 밖 로비에서 혼자 놀아도 그냥 재미있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고 아버지를 따라 나왔기 때문에 친구도 없지만 혼자서 팔만 벌리고 빙글빙글 돌아도 아빠가 저기 상점 안에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그저 신나고 재미있었다. 강변에 아빠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훌라후프를 돌리는 배 나온 아빠를 보면서 얼마나 재미있고 좋을까.


그런 아이들이 엄마에게 이거 무슨 냄새야?라고 묻는다. 그 아이들이 커서 언젠가 모든 냄새가 인공적으로 바뀌었을 때 이 풀냄새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의 희미한 냄새도 기억한다. 엄마 아빠의 냄새는 그 기억 속에서 좋은 냄새로 남을 것이다.

저 구름 너머에는 맑은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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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스 돌의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 편집을 늘 하던 대로 내식으로 해봤다. 주연은 타카하시 잇세이와 아오이 유우다. 이 영화는 19금 영화다. 사람이 홀딱 벗고 나와서 그런 건 아니고 마네킹 즉 리얼돌이 깨알 딱 벗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상하는 것처럼 리얼돌과 함께 환상적인,, 같은 장면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저 영화 속에서 배경으로 앉아 있을 뿐이다. 주인공 테츠오가 리얼돌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소노코(아오이 유우)를 만나게 되고 연인으로,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원작 소설이 있고(당시에 소설 또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작가가 각본에 영화의 감독까지 했다.


미대를 나온 테츠오는 선배가 소개해준 공장으로 와서야 이곳이 리얼돌을 만드는 공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테츠오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리얼돌의 조형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눌러앉을 생각이 없다. 그저 돈이 없어서 공장에서 일하는 선배 조형사의 말을 듣고 일을 하게 된다. 공장에는 테츠오와 친하게 지내는 나이가 많은 조형사가 있는데 그는 30년 동안 리얼돌을 만들어 왔다. 그는 소프트 비닐부터, 실리콘까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정말 촉감이 좋은 리얼돌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선배 조형사는 아이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테츠오는 저녁이면 선술집에서 선배 조형사와 함께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리얼돌 조형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테츠오는 선배 조형사와 함께 연구를 거듭해서 사람의 피부 같은, 그리고 애인 같은 리얼돌 샘플을 만들어서 사장에게 선보인다. 사장은 공장으로 내려와 가슴을 만져보더니 이건 실패라고 한다. 가슴이 너무 인형 같다, 너무 마네킹 같으며 너무 비현실적이다. 리얼돌이라고 해서 꼭 풍만한 가슴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정말 같이 누울 수 있는 애인 같은 리얼리티 리얼돌을 만들어서 다시 오라고 한다. 테츠오는 선배 조형사에게 자신이 미대에서 누드모델을 아르바이트로 그림과 조각을 했는데 불러보자고 한다. 하지만 리얼돌을 만든다고 하면 오지 않을 테니까 유방암으로 가슴을 잃은 환자들에게 줄 인공 가슴의 형을 뜰 거라고 해서 누드모델 아르바이트를 부른다. 그렇게 해서 오게 된 사람이 소노코였다.


소노코는 테츠오 앞에서 가슴을 열고 가슴의 틀을 뜬다. 작업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선배 조형사가 소노코에게 나의 바보 같은 조수가 가슴을 한 번 만져보면 좀 더 진짜 같은 가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죄송하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테츠오는 난감해하는데 소노코는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래서 테츠오는 소노코의 가슴을 만지게 되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을 한다. 그 덕분에 테츠오는 정말 리얼한 가슴의 리얼돌을 만들고 사장은 오케이, 그래서 제품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개를 달고 4년이나 팔려나간다. 그 사이에 테츠오는 소노코와 소박한 결혼도 한다. 승승장구하는데 어느 날 선배 조형사가 출근을 하지 않아서 가보니 죽어 있었다.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연구를 도맡아야 하는 테츠오. 점점 일은 많아지고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늦어졌다. 신입직원을 뽑아서 실컷 가르쳤다. 선배 조형사가 자신에게 잘해준 것처럼 테츠오도 신입직원과 술도 마시며 실리콘 이외의 재질을 연구해서 성과가 났을 때 연구결과를 들고 도망가버리는 신입직원. 그때부터 테츠오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노코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점점 두 사람은 소원해지고. 집으로 들어가는 어느 날 길거리에 만난 젊은 여성과(드라이브 마이카에서 미사키 역) 하룻밤을 보낸다.


그렇게 집으로 들오와 보니 소노코가 쪽지를 남겼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친정이 며칠 갔다 오겠다고. 테츠오는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며 일을 하다가 소노코가 집을 나간 지 이틀 만에 소노코의 친정에서 전화를 받고 소노코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되었다. 3일째 소노코는 어떤 남자에게 부축받으며 술이 취해서 들어온다. 오늘 소노코 동창회가 있었는데 모르냐며 남자는 테츠오에게 말한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테츠오는 소노코에게 화를 낸다. 거짓말까지 하며 3일 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한다. 그때 정색한 소노코가 테츠오에게 너? 나에게 뭐 속이는 거 없어?라고 한다.


급 반전된 분위기 속에 테츠오는 자세를 잡고 사실 직업에 대해서 속여서 미안하다고 한다. 소노코는 더 정색하며 또? 속이는 거?라고 한다. 이 멍청한 테츠오는 속으로 두근두근하다가 딱 한 번이야, 바람을 피운 건,라고 한다. 소노코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테츠오는 아뿔싸 한다.


현실에서 대부분 똑똑한 남편들도 아내 앞에서는 헛똑똑이가 된다. 지금 밥을 먹다 아내가 정색하고 남편에게 여보, 뭐 나에게 속이는 거 없어?라고 냉정하게 물으면 속이는 게 없어도 내가 속으로 옆집 아가씨를 좋아하는 거 티가 났나? 비상금을 알았나? 사무실에서 경리 아가씨가 업무 때문에 카톡 했는데 괜히 말 안 해서 화났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그러다가 아내가 냉철하게 캐물으면 아 미안, 그게 말이야, 하면서 정말 아내가 생각지도 못한 걸 토해내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남편들은 증거가 나와도 나는 모른다, 속이는 거 없다, 당당하게 말을 해야 한다.


혹시 아내의 정색에 더 속였다간 큰일 나겠구나 해서 테츠오처럼 딱 한 번 술을 마셔서 어쩌고 하면서 바람을 폈다고 하면 결혼 생활 도로아미타불이다. 얼마 전에 곽수산 기자가 코로나에 걸려 결혼할 여자 친구에게 기분 좋게, 나 코로나 걸렸어, 2주 동안 집에 있어야 해, 미안해. 하면서 속으로 야호를 불렀는데, 여자 친구가 오빠 나도 코로나야, 같이 집에서 보내자.라고 해서 죽을 것 같았다.라는 말에 남자들 댓글이 대부분 나도 그런데, 아 정말 미치지. 같은 말이 주르르르륵이었다. 호호호 우리 남편은 안 그래요, 우리 오빠는 안 그래.라고 생각하는 아내도 있겠지만,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늘 거짓말을 한다. 어쩔 수 없지만 인간은 그렇다.


우리 오빠는 그래, 우리 아내는 그래,라고 받아들이면 세상 편한데 참 그게 안 되는 것도 인간이라 그렇다. 사랑하기 때문에 늘 속이고 늘 거짓말을 한다. 사춘기의 자기 자식을 제일 모르는 사람은 부모들이라는 말도 있다. 친구와 학원 선생님, 또는 심지어 타로카드에 가서는 진심을 다 내보이지만 부모에게는 절대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애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는 부모는 참 자기 자식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구치소에 있으면서 2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우리 애는 잘못이 없는데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런 겁니다, 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영화는 어떻게 되냐면, 소노코가 암에 걸려 3일 동안 검사받느라 집을 나간 것이고, 그걸 말하려 해도 테츠오가 너무 바쁘고 가정에 소홀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테츠오의 바람도 알았고 자신을 떠날 거라는 생각에 홀로 병원에서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테츠오가 간호를 하고, 뭐 그렇게 신파로 흘러가다가,,,


테츠오는 조형사로 리얼 돌을 리얼리티로 생명을 불어넣고 싶고, 아내는 암에 걸렸고 대충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이 가리라 본다. 2019년 영환데 우리나라에는 지금 나왔다. 아오이 유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지금보다 아주 예쁘다.  


#로망스돌#아오이유우#타카하시잇세이#RomanceDoll#あおいゆう#蒼井優#AoiYu #たかはしいっせい#高橋一生 #TakahashiIs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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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의 뇌를 잘라서 기름을 살짝 발라 따뜻할 때 혀끝으로 그 부드러움을 느끼는 맛이 가지의 속살이다.라고 '무라카미 류'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채소 중에서 몹시 야하고 야들야들한 속살을 입으로 맛보는 기분이 드는 건 가지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가지 요리 중에서 으뜸은 중국 집의 가지 튀김이다. 중국집에서 만드는 수많은 튀김요리 중에서 가지 튀김을 이길 수 있는 건 잘 없다. 씹었을 때 바삭하면서 기름이 죽 나와서 온 입안을 다 마비시킨다. 이토록 황홀한 맛일 수가 있나 할 정도다.


그런데 집에서 가지무침을 해놓으면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무도 뜨겁게 조리해 놓으면 정말 맛있는데 차갑게 해 놓으면 젓가락이 의외로 자주 가지 않는다. 무는 고등어조림에 들어가거나, 어묵과 함께 삶기면 오히려 무만 찾아서 먹게 된다. 그러나 늘 보던 무가 밥상에 오르면 손이 가지 않는다. 가지도 그렇다. 가지는 참 맛있는데 무쳐 놓으면 막 먹게 되지는 않는다.


가지볶음이나 가지무침으로 검색을 하면 이미지가 다 비슷하다. 가지볶음과 가지무침은 반찬으로 많이 먹는다. 그러나 튀김으로 먹을 때만큼 맛있지는 않다. 요즘은 물가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상승을 해서 무서운 하루하루지만 가지 정도가 아직 먹거리 중에 저렴한 편에 속한다. 물론 조리를 해야 한다. 조리를 하려면 다른 식재료가 필요하고 불과 물의 사용도 해야 하니 따지고 보면 물가 대비 또 야호라고 할 수만은 없다.


중국집 가지 튀김을 자주 먹지 못하니 가지를 구입해서 조리하는 것도 이것저것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서 그냥 생으로 먹기도 한다. 가지는 생으로 먹는 맛이 좋다. 근래에는 가지를 그냥 생으로 먹는 맛이 제일 좋은 축에 속한다. 거기에 마요네즈를 뿌리면 야호가 절로 나오는 맛이다. 생으로 먹기 시작한 것도 최근이고 귀찮은 조리도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와작 씹어 먹으면 속살을 건드리는 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조리를 해야 하고, 무침이나 볶음은 싫다면 이렇게 해서 먹으면 가지가 아주 맛있다. 물론 나의 경우다. 집에 양배추와 피망이 있다면 같이 반쯤 조리해도 맛있다. 반쯤 조리한다는 건 덜 익힌다는 말이다. 생으로 먹는 맛과 조리가 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피망은 생으로 먹는 것보다 불에 굽고 익힌 맛이 훨씬 좋다. 개인적인 입맛이지만 그렇다. 아마 피망은 대부분 생으로 먹는 것보다 아주, 몹시, 굉장히 익혀서 먹는 맛이 더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반 정도 익혀 조리를 잔뜩 해 놓으면 맥주를 홀짝이며 아삭아삭 씹어 먹으면 된다. 맥주는 병으로 먹기 좋은 버드와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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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인데 뜨거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셨다. 순전히 감성이 나를 카푸치노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하면 거창할까. '이성'이라는 건 이 더운 날에 무슨 뜨거운 카푸치노야, 할지도 모르지만 가끔 뜨거운 날에도 뜨거운 카푸치노가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마시는 카푸치노를 감성적인 카푸치노라고 하고 싶다. 감성적인 카푸치노는 겨울에 마시는 아아와는 다르다. 차가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습관이 개입을 한 것이고, 실내에는 따뜻하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아아를 마시는 것은 감성적인 카푸치노와는 다르다. 감성적인 카푸치노를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바닷가의 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서 홀짝이면 감성에 젖어든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성은 무엇일까.


가끔 시라는 것을 적고 있으면 감성이 남다르네, 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시는 감성으로 적는 게 아니라 고통으로 써내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감성으로는, 감성만으로는 시를 적을 수 없다고 본다. 고통 없이 시를 적어내는 것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시에는 그 시인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시인의 고통으로 태어나지만, 태어나는 순간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것이 된다. 시라는 건 감성이라든가 재능이나 의지만으로 써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세포, 온몸 구석구석 끝까지 퍼져 있는 말초신경 전부가 시를 향해서 발현의 태동이 가득한 사람이 그것을 형태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학습으로 시를 적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시는 완전한 자신의 세계를 훈련으로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감성은 어디에서 발현할까. 오히려 감성은 아이러니 하지만 메탈 기기에, 기기 속에서 감성을 더 찾을 수 있다. 손에서 떨어질 수 없는 휴대폰이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최고의 과학의 산물이자 감성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특히 태블릿의 직관적인 멀티태스팅의 실행에 있어서 감성적인 모션이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드레그를 했을 때 인터페이스의 움직임이 기기적이고 딱딱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이는 애플이나 삼성 같은 기업이 사람들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엇에 미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굉장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기기가 사람들에게 많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 하찮은 것 – 즉 사람들이 어떤 감성을 가지고 이 기기를 대하는지, 그리고 그런 감성에 맞게 기기가 감성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지 회사가 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윈도우에서 창을 하나 띄우고 또 다른 하나의 창을 띄우면 밑의 창이 다 가려진다. 같은 크기의 창이라고 했을 때 밑의 창은 당연히 위의 레이어 창에 의해 가려진다. 그런데 아이패드의 이번 멀티태스팅의 팝업 창은 위의 창이 밑의 창을 가리려고 하면 ‘아아, 나 가리지 마’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가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계속 알려준다. 그러니까 기기가 주인에게 저 방금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 잊어버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다. ios 16에서 실행된다고 하니 기대해보자. 이 감성을.


그래서 오히려 감성적인 부분은 자동차나 태블릿 기기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아마도 그 시작은 직관적으로 휠을 돌리며 음악을 듣던 아이팟 때부터이지 싶다. 아이팟 클래식의 직관적인 휠을 돌리면 또가닥 소리를 내며 화면이 움직인다. 아주 감성적이다. 이 감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끌어당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한 노력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고개를 든 것은 그때부터이지 싶다. 영화로 치면 ‘월-E’가 바로 그것이다.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마우스와 깡통로봇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감성을 한 없이 건드렸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꼭 보기 바람. 흔히 말하는 죽기 전에 봐야 하는 영화이지 싶다.


그에 비해 문학은 감성보다는 그 외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경향이 많다. 게다가 요즘은 칼럼이나 비평이 문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사람들은 소설보다 인문학이나 칼럼 읽기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서 비문학이 감성을 잔뜩 장착해서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있다.


좀 다른 얘기로, 요즘 팥빙수의 계절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팥빙수가 많이 팔리고 있다. 종류가 눈이 확장될 정도로 많아졌다. 이 이게 팥빙수야? 할 정도다. 짜장 빙수부터 망고빙수, 첵스초코 딸기빙수, 그린티, 인절미까지. 정말 다양한 팥빙수, 아니 빙수가 널렸다. 그렇지만 꼭 옛날 팥빙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찬 사람들이다. 팥빙수는 기본적인 아이덴티티가 있는 그 팥빙수가 최고라고 한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팥빙수가 그 팥빙수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 감성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처음 빙수를 먹어보는 아이들은 지금 먹는 빙수가 팥빙수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맛도 옛날 맛보다 지금의 맛이 훨씬 좋다. 화려하고 가격이 비싸고 카페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팥빙수에는 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이 감성으로 팥빙수를 대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달은 그대론데 달을 대하는 사람의 감성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달


자연은 감성을 말하고 공사현장은,,,


책을 읽다가 시계를 보니 문득 색감이 깔맞춤이라


아 감성적인 하루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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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6-14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푸치노를 부르는 글이네요. 내일 카푸치노를 마셔야겠습니다.^^

교관 2022-06-15 11:34   좋아요 0 | URL
카푸치노 한 잔 마셨습니까 ㅎㅎ. 오늘도 카푸치노 처럼 부드럽고 좋은 하루 되세요!
 


초여름이었다. 지금처럼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고 낮동안은 더운 날이었다. 초여름의 새벽하늘은 저녁 하늘보다 좀 더 회화적이었다. 유리 막으로 본다면 초현실 영화에나 나올법한 하늘 같았다. 구름이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노을이 다 사라지지 않고 여운을 남겨놓고 여지를 두는 것 같았다. 새벽하늘에서 해 질 녘의 노을을 느꼈다.


초여름이지만 새벽은 긴팔을 입지 않으면 피부가 도돌도돌 반응이 올 정도로 서늘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밤을 꼴딱 새우고 새벽에 작업이 끝나서 사무실을 나섰다. 새벽 4시의 길거리는 오후 4시의 길거리와는 달랐다. 새벽 3시까지 수북이 쌓인 곳곳의 쓰레기들이 새벽 4시부터 깨끗하게 치워지고 있었다. 공기의 밀도도, 흐름도, 시야도 오후 4시와 다른 새벽 4시의 모습이었다.


나는 집으로 오는데 전통시장의 통닭집 골목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시장의 통닭집들은 전부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였다. 50년 이상 된 통닭집들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치고, 세우고, 다시 벽지를 바르고 해서 지금까지 버텼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닭을 튀기고 아직까지는 그런 맛이 그리워 사람들이 통째로 튀긴 닭을 먹으러 시장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차지한 치킨 전문점 앞에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겨우 견디고 있는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통닭집들은 지치고 힘들어 잠이 들어 보였다. 불은 다 꺼지고 정작만이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골목의 귀퉁이 부분 기둥 뒤에서 일상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신음소리는 기이했고 조금은 불안했고 어딘가 닿지 못하는 연약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벽에 부딪혀 힘을 잃고 새벽의 공간 속에서 소멸했다. 조금 겁이 났지만 나는 그 기둥 쪽으로 조용하게 다가갔다. 그 기둥 앞에는 머리가 떡 진 사내가 서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수음에 열중했다. 나는 기둥에 몸을 숨긴 채 그의 수음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호기심도 아니었고 그에게 난처함을 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그 풍광이 목가적으로 보였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아주 자연스러웠고 프로테우스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작 은 골 목 의 여 인 숙 입 간 판 이 세 워 진, 건 물 기 둥 에 서 머 리 가 떡 진 사 내 가, 서 서 수 음 하 는 장 면 은, 목. 가. 적. 이 었 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고 일그러진 것 같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수음을 하던 사내는 초등학교 나와 같은 반 친구였다. 알고 지내다가 친하게 지내게 된 녀석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혁민이다. 어릴 적 그 녀석은 탁구부였다. 작은 체구의 초등학생이 가슴께까지 오는 테이블 위에서 작은 세계의 탁구공을 재빠르게 받아넘기고 하는 장면은 우리들에게 부러움을 가지게 만들었다.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는, 물소리 같은 소리로 악악하며 작은 세계를 받아서 저쪽으로 넘겨냈다. 혁민이는 학교 내에서 탁구를 제일 잘했으며 학교 배 대회나 시대회에 나가서 학교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주역이었다. 혁민이는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와서는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초등학생이라지만 운동부라는 활동과 어머니가 안 계시고 여동생과 아버지와 살고 있던 혁민이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한 탓에 또래에 비해 훨씬 성숙했다. 아버지의 구타 때문에 혁민이의 얼굴에는 어두운 구석이 많았다. 늘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나간 이유를 혁민이에게 돌렸다. 혁민이는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나의 집을 부러워했고 놀러 와서 밥을 먹고 실컷 놀다가 나의 아머니가 싸준 반찬을 들고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억의 공백이 크고, 시간이 비행기처럼 지나가버렸다. 혁민이는 아버지를 따라 타 지역으로 간다며 마지막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눈물은 끝끝내 흘리지 않고 떠났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변찮은 사무실에 다니던 무렵 새벽의 이곳 전통시장의 통닭 골목에서 우연히 혁민이와 마주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오래전 혁민이가 아니었다. 얼굴은 조금 커버린 얼굴이었지만 노숙자 같은 모습으로 양손에는 하얀 목장갑을 끼고, 머리를 며칠 동안 감지 못했는지 머리카락은 방향성을 잃은 어린 강아지처럼 볼품없었다.


나는 다가가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혁민이가 수음을 다 할 동안 기둥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바지를 올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조용히 혁민에게 가서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나를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녀석의 눈은 처음으로 코뿔소를 대하는 모습의 눈빛이었다. 나를 적대시하면서 묘하고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백 원만”라고 말을 했다. 다른 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백 원만, 백 원만, 백 원만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오백 원짜리 하나를 건넸다. 혁민이는 목장갑을 낀 손바닥 위의 오백 원을 쳐다보더니 바닥에 버리고는 어딘가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백 원만 백 원만 하는 소리만 했다. 혁민이는 걸을 때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걸었다. 나중에 시장 상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에게 얼마나 심하게 구타를 당했던지 뇌를 다쳐서 그렇다고 했다. 압제, 강압에 뇌가 파괴당하고 나를 비롯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신의 과거를 몽땅 봉인해버렸다. 후에 시장의 통닭 골목에서는 혁민이가 행인들을 상대로 백 원만을 쫓는 앵벌이 장면을 왕왕 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이 나오는 날은 산발적이라고 상인들은 말했다.


혁민이가 통닭 골목에 나타나는 날이면 거리의 아이들이 나무 꼬챙이 같은 걸 들고 혁민이의 다리나 엉덩이를 찌르며 백 원만 백 원만 따라 하며 놀려댔다. 왼쪽 뇌가 파괴된 그 녀석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상인들에게 퍼진 소문은 허다했다. 방파제 근처에서 앵벌이를 하다가 파도가 삼켰다는 소문도 있었고, 자동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소문에는 자동차에 치여 바닥에 머리가 갈려 피를 흘리면서도 백 원만을 소리 냈다고 했다.


초여름 새벽녘의 기둥에서 수음을 진심으로 하던 그 녀석은 지극히 목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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