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모두 죽는가? 그리고 모두가 죽는데 어째서 자신은 그 죽음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가? 안 죽는 인간이 없고 150년 전에 태어난 인간 중에 안 죽은 인간도 없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 항해를 할 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죽는다. 가깝게든 멀게든 죽음은 나의 곁에서 생과 사처럼 붙어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죽음 속에 자신은 교집합 시키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내일이라도 죽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오늘을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는 걸까. 인간은 죽을 뿐인 삶인데 새치가 나는 것에 신경을 쓰며, 헤어스타일에 울고 웃을까. 네일 손질을 하고 신발이 있는데 또 구입을 하고, 수염을 깎고, 향수를 뿌리고 더운 날 조깅을 하며 땀을 흘릴까. 왜 줄을 서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일까. 어차피 죽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인간은 왜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며 고민을 하며 지낼까. 죽고 난 다음에 죽기 전에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먹기 전에 사진을 찍고, 옷을 구입해서 입고. 이런 것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으며 그저 허공에서 팡하며 사라진다.


죽음에는 5단계, 죽음의 5단계가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쿼블러 로스가 69년에 자신의 저서에 죽음의 5단계를 구분 지어 놓았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부정한다. 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두 번째는 분노한다. 왜 하필 나인가.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세 번째는 타협이다.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운동과 이런 음식을 먹으면 되는가. 네 번째는 우울이다. 극심한 우울이 찾아온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이 죽고 난 후 남겨진 가족의 걱정과 그들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마지막으로 수용이다. 모든 감정이 지나가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일찍 죽을 뿐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보통의, 죽음을 선고받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자신을 떨어트려 놓는다. 자신의 문화적인 카테고리 안에 죽음을 빼버린다. 그건 정말 궁금하다.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 꼭 명확한 해답을 알아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수많은 영화, 소설, 시, 음악을 통해서 그런 부분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째서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 동물처럼 죽음을 멀리하는 것일까. 동물은 죽음이라는 관념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이 오는 두려움이 없다. 생과 사는 동전처럼 붙어있는 것인데 생에만 집착을 한다. 이 황망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 동물도 인간과 같은 대접을 해주자는 겁니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 같은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한다. 과학 커뮤니티 엑소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뇌가 작용하는 것으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타인에게서만 찾는다. 타인의 죽음을 접하면 뇌의 몇 구간은 그 부분이 활성화가 되지만 자신과 죽음을 연관하려고 하면 비활성화가 되어 자신은 죽음과 무관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오늘을 열심히 보낸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죽음도 없을 텐데. 탈 나지도 않고 아프지도,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텐데. 우울하지도 않을 것이고 슬퍼서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일을 위해 사는 삶이 옳은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우리는 태어났다. 무엇 때문에 태어났다기보다 태어났기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누군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 마냥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뇌는 죽음이라는 걸 삶을 보내는 동안 열심히 밀어낸다. 들어오려고 하면 자꾸 밀어낸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하며 보낸다.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또는 자신을 위해 열심히 보낸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는다. 오늘 그렇게 보내고 내일 살아있다면 또 그렇게 보낼 것이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이 세계를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겠지만, 그런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처럼 밤이 되면 잠이 들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어디서 자느냐, 무슨 음식을 먹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인간은 모두가 똑같다. 죽음은 어떤 인간에게도 공평하다. 죽음은 눈과 같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이 눈이 내리면 전부 눈을 맞는다. 죽음도 그렇다. 모두가 죽는다.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죽음을 여럿 봤다.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버렸다. 사고로 또는,,,,  자신이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사후처리도 만만찮다.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마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장례식은 며칠 할 것인지. 오는 사람 수에 따라 음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관은 뭘로 할 것인지. 수의는 어떻게. 같은 문제들이 따라온다. 그게 끝나면 화장을 할 것인지 묻을 것인지. 화장을 하고 나면 뼈를 어딘가에 뿌릴 것인지 수목장을 할 것인지. 주택이나 자동차가 죽은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다면 명의이전을 해야 한다. 법원에 갈 때도 있고 관공서에 갈 경우도 있다. 혼자서 못하면 법무사를 통하기도 한다. 사람 한 명이 죽고 나면 뒤처리가 며칠 내지는 몇 달간 죽 이어진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건 살아있는 사람과도 이어진다. 죽음을 인지하는 생물체도 있다고 한다. 개미가 그렇다고 한다. 개미는 죽고 나면 개미들이 죽은 개미를 개미무덤에 끌고 가서 거기에 놓는다. 개미에게는 페로몬이 나오는데 죽은 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은 살아있는 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개미에게 죽은 개미에서 나온 페로몬을 묻히면 살아있는 개미가 개미 무덤으로 가서 그곳에서 죽어 버린다. 죽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생물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어떤 사람, 누구도 이런 위안을 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 개미가 위안을 준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중요하다. 죽음만큼 삶도 중요하다. 생과 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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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25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코끼리도 죽음이 다가오면 특정 장소로 이동해 죽는다고 하더군요

교관 2022-06-26 11:46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ㅎㅎ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가난해서 단칸방에 세 들어 산 적이 있었다. 그때 다행히 주인집을 잘 만나서 우리에게 잘해 주었다. 단칸방에 친척이 오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난처했을 텐데 주인집에서 방을 하나 내주어서 멀리서 왔는데 그냥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 다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게 사진으로 남아 있어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주인집에는 나보다 형이 두 명, 그리고 누나가 있었는데 아주 친하게 지냈다. 특히 막내 형과는 많이 붙어 다녔다. 잠을 자는 시간 빼고는 늘 같이 놀곤 했다. 가난했다지만 어린이라서 그게 불행한 것인지, 흠결인지, 불편한지도 몰랐다. 막내 형과의 기억나는 일은 주인집, 형네 집에서 자두주를 담갔는데 때가 되어서 항아리를 다 따서 자두는 빼고 술만 따로 병에 붓고 있었다. 막내형과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서 자두가 쌓여 있기에 그걸 몇 개 집어 먹고서는 둘 다 요단강을  건널뻔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형편이 좀 나아져 방에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주인집과는 계속 교류를 했다. 더 시간이 지나 큰 형이 대학교를 다닐 때 나는 과외를 받았다. 나의 영어실력에 망연자실한 큰형은 나에게 영어를 꼭 가리켜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또 태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과외비를 받으며 지치지도 않고 매일 와서 그 하기 싫은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과외를 받으며 기억나는 것은 큰형은 꼭 들어와서 양말을 벗었는데 나는 속으로 벗지 마라, 벗지 마라, 했다. 양말을 벗는 순간 기묘한 발 냄새가 콤콤하게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형은 뭐든 잘 먹었다. 가리지 않고 어머니가 주는 대로 다 잘 먹었다. 이토록 튼튼하게 보일 사람이라니, 하고 생각이 들었다. 큰형은 군대를 제대하고 자동차를 만드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바로 결혼을 했는데 대기업에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과로로 죽고 말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회사에서 압박감이 굉장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주인집 아주머니를 만나서 위로를 했다. 어려울 때 돈을 턱 주며 도와줄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한 번 맺은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졌다. 계중은 아니지만 계중처럼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은 모임을 갖고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몇십 년 동안 우정 같은 것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던 주인집 아줌마가 할머니가 되었고 어제는 치매가 걸려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와 주인집 아줌마를 보면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먼 친척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건 어떻게 정의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관계라는 건 정의할 수 없는 관념일까. 그나저나 인간은 나이가 들면 어째서 치매 같은 것에 굴복하게 되는 걸까.  


주인집과 우리 집은 마당에서 부추전을 그렇게 자주 만들어 먹었다. 부추는 넘치고 밀가루를 버무려 마당에서 지글지글 부추전을 구우면 두 집만의 파티였다. 그 냄새가 골목으로 퍼지면 다닥다닥 붙어있던 옆 집, 뒷 집에서도 와서 같이 부추전을 나누어 먹었다. 혼자인 게 편하고 혼자서 뭘 먹는 것이 좋지만 부추전은 다 같이 둘러앉아 죽죽 찢어 먹었던 맛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부추전을 자주 해 먹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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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22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추는 베어 먹고 열흘만 지나면 다시 그만큼 자라 있어 여름 내내 먹을 수 있죠.

교관 2022-06-23 11:10   좋아요 0 | URL
부추가 쑥쑥 자라는군요 ㅎㅎ. 부추의 엄청난 생명력을 부추전을 통해 냠냠
 


나이가 들면 날씬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노력으로 살을 빼면 마르거나 그렇지 않게 보일 뿐이다. 나이가 들면 살이 찌거나 마른다. 나이가 들었어도 날씬해 보이는 사람은 20대부터 매일 운동을 해서 60대까지 지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운동을 매일 30년 이상 한 사람들이나 나이가 들어도 날씬해 보인다.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이 거기에 속하겠다.


살이 늘 쪄 있는 상태로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아 안 되겠군, 하며 살을 뺐다고 해도, 설령 날씬해졌다고 해도 날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가끔 기사에 볼 수 있듯이 하루에 4시간씩 헬스클럽에서 근력운동을 체계적으로 한 나이 든 사람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누구나에게 다 해당하는 일이지만 모두가 다 똑같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내가 나이가 드는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다.


일단 나이가 들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결락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오래전 이런 현상을 캐치할 무렵이 되었을 때, 이런 현상이 눈에 막 들어오기 시작할 때 수명이 다 하는 시기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 정도의 나이에 죽는구나,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것대로 사람들은 움직이며 사고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먹을 때에도 과당류, 다당류, 단당류까지 다 체크해가면서 먹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일일이 따져가며 먹는 사람들이 어떻든 좀 더 나이를 덜 먹게 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매일 조깅을 하면서 늘 비슷한 체형과 체격을 유지했는데 근래에 마요네즈를 일주일에 한 통은 먹다 보니 여기저기 살이 붙는다. 그게 눈으로 보인다. 겨드랑이 밑으로 살이 붙었다. 허리도 등 쪽에 살이 붙었다. 그래서 조깅의 강도를 올리고 운동량을 늘리고, 나름대로 시간과 강도를 올리지만 예전만큼 쉽게 살이 빠지지 않는다. 더 붙지 않게 유지되는 거 같다.


하루에 나는 두 끼나 한 끼 반 정도를 먹는다. 조깅을 할 때 빼고는 누구를 만날 때나 일을 할 때에는 거의 대부분 앉아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을 신체보다 뇌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 조깅을 하기 직전까지 한 끼를 가지고 늘어뜨려서 먹는다. 쪼개서 조금씩 먹어서 허기를 잊어버리게 한다. 만약 뇌를 따라갔다면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도 금방 살이 불어났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부르다. 그러나 맛있는 것이 눈앞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배가 불러도 잘 들어간다. 그래서 많이 먹는다. 뇌는 그걸 원하고 있다. 그런 뇌의 명령과 부탁과 바람을 거부하고 조금만 먹는다. 이제 뇌가 지칠 만도 한데 눈앞에 맛있는 것이 보이면 뇌는 또 달려들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다가 조깅을 할 때에는 신나게 하는 편인데 그것도 최근에는 예전만큼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가 없다. 중간에 한두 번은 헉헉 거리며 쉬게 된다. 그러면 근력운동을 정말 팔다리가 끊어질 듯하는데 그럴 때 오는 고통이 좋아서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제대로 근육을 풀어주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날 때 온몸이 아우성을 지르는데 그 아우성을 듣는 게 좋다. 비록 몸을 으 하며 일으켜야 하지만 정말 나는 살아있다는 기분이다.


저녁에 조깅을 하다가 산스장에 가면 주로 노인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지 먼지 많고 무더운 이런 곳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돈을 들여 클럽에서 제대로운동을 하는 게 운동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보는데 가장 이상적이다.


헬스클럽에 어르신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저녁에 야외에 운동을 하러 나온다. 그래서 산스장에도 어르신들이 많은데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는 동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운동은 역효과를 부르는데, 보통 어르신들은 저녁을 먹고 집에서 나와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저녁 먹은 것만 소화가 되고 배가 출출하니까 뇌가 야식 먹기를 바란다. 그래서 또 먹게 된다. 어르신들은 야외에서 벤치에 앉아서 휴대전화만 보고 들어가도 가족한테는 나 운동하다가 들어왔어!라고 한다.


산스장에서는 재미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매일 나오는 어르신 두 분이 있다. 매일 나와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신다. 어르신임에도 불구하고 운동하는 강도나 시간은 젊은 사람들 못지않다. 두 사람 다 살이 찌지는 않았다. 한 어르신은 보기 좋을 정도이고, 한 어르신은 몸이 좋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산스장에 몇 년 동안 매일 나오기 때문에 이곳에 운동을 하러 나오는 어르신들끼리(보통 어머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안부도 묻고, 주말에는 뭐 했냐, 정치 이야기도 가끔 하고, 또 소리도 높이고, 그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백신이니 같은 이야기도 하고. 또 한 어르신은 위에서 말한 운동 동작이 엉망인 어머니들이 있으면 가서 참견을 한다. 그런 서로는 절대 인사를 하지 않는다.


동선도 교묘하게 겹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스칠 때가 있지만 서로 먼산만 보며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산스장에 다른 어르신들이 오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아 정말 알 수 없는 세계다. 막 플랭크를 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무릎을 꿇고 만다. 그 미묘한 신경전, 그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우라,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모습. 정말 재미있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두 어르신은 매일, 격하게 보일 정도로 운동을 해서 그런지 마르게 보이지 않고 살이 찌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 어르신 중에 한 아버님은 운동 후에 집으로 가서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라면도 어느 때가 가장 맛있냐 하면 지금 먹는 라면이다. 조깅 후에 라면 끓여 먹으면 그렇게나 맛있다. 정말 참을 수 없다. 두 개 끓여 먹고 싶지만 나의 뇌와 타협을 하고 하나만 끓여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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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이라는 건 정말 묘한 감정이다. 기시감이 들 때면 온 몸에 있는 힘이 죽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기시감은 찰나적이기 때문에 몸의 기운도 찰나적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때가 있다. 옅게 들 때는 괜찮은데 강하게 들 때면 그 자리에 서서 언젠가 오래전에 들었던 그 감정을 떠올리려 애써보지만 금방, 순식간에 가버리기 때문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의 감정보다 그때의 희미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의 기시감이 가리키는 그곳의 장면, 그때의 분위기가 미미하게 남아서 지금 이전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기시감이 강하게 들 때가 그렇다.  


어제 조깅을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하늘과 부는 바람이 마치 여름의 끝나갈 때의 하늘과 바람과 같았다. 내가 사는 바닷가는 내륙과는 아무래도 다른 계절의 변동을 맞이하게 된다. 여름의 시작에 여름의 끝자락의 하늘과 바람을 만났다. 매년, 거의 매일 달리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아니 없었다. 그리고 기시감이 강하게 들었다. 강하게 강타한 기시감은 꼭 제비가 물을 스치듯 훑고 그대로 사라진다. 찰나로 왔다가 가버린다. 기시감의 감각으로 그때의 장면, 그때의 장소를 떠올리려고 하면 어느 순간 다른 생각과 감각이 들어와 버린다. 기시감의 9할은 어린 시절이다. 그 미묘한 냄새와 느낌이 몹시 희미하게 코끝에 맴돌고 있다가 그때의 하늘과 바람을 만난 것일까.  알 수는 없다


본격적인 여름 전이니까 가스층이 퍼지지 않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있지만 여름의 끝자락과는 다르다. 끝자락에서는 대기에 가득 묻어있는 뜨거움이 서서히 밀려가는 것이 색감으로 눈에 보인다. 아직 대지에 한 여름의 뜨거움이 내려앉기 전의 하늘과 바람은 끝자락과는 분명하지만 다르다. 그러나 어제의 하늘과 바람은 끝자락의 그것이었다. 어째서 시작점에서 끝자락의 하늘과 바람이 나왔을까. 그건 내 속의 알 수 없는 감각의 기관이 그 방향으로 자꾸 틀어서 그렇게 보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런 기시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365일은 아니지만 300일은 밖으로 나와서 비슷한 곳을 조깅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과학적이고 기후적으로 본다면 올해 5월은 다른 해에 비해서 무더위가 일찍 바닷가를 덮쳤다. 5월에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나왔고 서퍼들이 파도에 몸을 실었고 보트를 타고 신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5월에 이렇게 무더웠다는 건 어떻게 봐도 조금 이상한 일이다. 자연적인 현상 – 기후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도의 상승과 더불어 녹아내리는 빙하, 그리고 오존층의 파괴와 더불어 미세먼지의 침공 같은 것들 때문에 기후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 한여름에 덮쳤던 더위가 물러갈 때 보였던 하늘과 바람이 시작도 하기 전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여름이 가는 모습을 매년 안타까워하기 때문에 신이 나타나서 여름을 마치 카펫을 둘둘 말아서 가버리는 것처럼 잡을 수도 없다.


기시감이 강하게 든 것은 어쩌면 지구의 기후변화가 사람들, 나에게 알게 모르게 미친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시감이라는 건 정말 도대체 어떠한 감각일까. 기시감을 자주, 강하게 느낀다면 그건 좀 잘못된 것일까. 마음이 불안정하고 불안한 사람에게 더 강하게 자주 나타나는 것일까. 어떻든 기시감이 강하게 들면 찰나적이지만 몸의 기운이 힘 좋은 누군가에 의해 쑥 뽑혀 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이미 이전의 나는 아닌 것이다.


집에서 나오는데 화단에 노란 꽃들이 가득한데 빨간 꽃이 위로 위로 솟아올라 피어있었다. 손바닥으로 차양막을 만들어 눈썹 위에 대고 한참을 서서 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아파트 주민들은 내가 꽃들이 예뻐서 보고 있는 줄 알겠지만 기시감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 들었던 지금과 같은 그 감각, 그 기분. 알 수 없는 이 기묘함을 기시감이라 한다면 나는 기시감을 좀 더 길게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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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몇 해 전 결혼한 후배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 나의 주위에는 선배, 친구, 후배 –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들 중에서 이혼을 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다. 결혼이라는 게 헤어지기 싫어서 하게 되는데 살면서 다시 보기 싫어서 이혼하게 된다. 절대 떨어지기 싫어서 결혼했다가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이혼을 하게 되니 결혼과 이혼은 동전의 앞뒤와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후배가 이혼에 관해서 속마음을 털어놓듯 이야기를 해도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온 마음을 다해서 선후배님들과 친구님들의 이혼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제 나도 시들해졌다. 왜냐하면 이혼에 대한 상처와 앙금은 남아있을지언정 일 년 후 오늘이 되면 전부 하하호호 너무나 잘 지낸다. 그래서 나의 속에 좀 못 된 구석이 실금실금 자라나서 그런지 이혼 이야기를 하면 귀로는 듣고 눈은 상대방을 보며 손은 아, 그렇군, 하는 손짓을 하지만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덱스터처럼 그런 표정을 하고 가면을 쓴 채 완벽한 또 다른 자아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있게끔 시킨다.


그럼 나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이혼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무서울 정도로 떠오르는 생각은 어제 먹은 맥주와 가자미구이다. 후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글을 볼일도 없다. 후배는 글을 너무나 싫어하고 글을 읽는 건 정말 끔찍하게 생각한다. 어제는 작은 가자미구이와 함께 시원한 버드와이저를 마셨다. 커피는 미지근해도 괜찮다. 물도 시원하지 않아도 잘 마시지만 맥주는 시원해야 한다. 맥주를 가장 맛없게 먹는 것이 큰 페트병에 든 맥주를 시간이 지나 미지근해져 있는데 쭈글 해진 종이컵에 부어서 마시는 거다. 동네 어르신들은 꼭 이렇게 드신다. 괜히 맥주 사러 나왔다가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맛도 없는 미지근한 맥주를 종이컵으로 마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맥주는 시원하게 마시는 거다. 특히 조깅을 하고 땀을 있는 대로 흘린 다음에는. 만약 생맥주 잔에 부어서 마신다면 겉면에 살얼음이 옅게 꽃처럼 피어난 생맥주 잔에 부은 맥주가 정말 맛있다. 시원한 버드와이저에 가자미구이. 작은 가자미구이는 젓가락으로 발라서 먹기보다 들고 뜯어먹는 맛이 있다. 가시도 작아서 젓가락으로 발라 먹다가는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냥 원시인이다 생각하고 와작와작 씹어 먹는 것이다. 물론 몸통의 뼈까지 그렇게 먹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와사비와 겨자를 뿌려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 정신이 나른하니 몸을 이어주는 나사가 막 풀려버리는 기분이 든다.


나사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은 아이패드나 아이폰에서 작은 나사를 잘 볼 수 없지만 아이폰4에 박힌 작은 나사는 아주 예쁘다. 그리고 안정감을 준다. 디자인적으로 그 나사 덕분에 기기보다는 어떤 작품을 손안에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사 덕에 탄탄해 보이면서 예쁜, 그 어려운 길을 아주 작은 나사가 해내고 있다. 카시오 지샥 손목 세계도 그렇다. 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계도 있지만 이 화면의 폰트 같은 작은 나사가 양 사방에 딱 박혀 있으면 시계가 아주 예뻐 보인다. 무엇보다 나사 때문에 시계가 주는 견고함이 아주 마음에 든다.


맥주와 가자미구이를 먹고 있으면 아이고 이 나사 풀린 놈아, 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후배의 넋두리는 끝이 난다. 대부분(나도 속한다) 관계에 힘들어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상처를 준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이 별거 아닌 관계라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 줄 몰랐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는 이런 경우를 겪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 김영하 소설가의 ‘작별인사’를 읽고 있는데 거기서도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소설 속에 또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영화 역시 휴머노이드와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소설 작별인사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도 인간이 정말 인간이 만든 휴머노이드보다 더 우월하고 인간적이며 모든 게 나은 존재인가 대해서 의문점을 던진다. 과연 인간이 휴머노이드와의 관계에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누가 더 우월하고 더 높고 더 나은지가 왜 중요할까. 게다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김영하 소설가도 말했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는 경우는 없다. 대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한다. 그걸 나는 구치소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이 봤다. 사기나 폭력, 강간 미수 같은 더러운 범죄를 지은 사람들은 전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너무 힘들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관계를 망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논리적이지 못하고 범우주적인 생각이 많고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혼하게 된 나의 후배, 내지는 친구가 설령 바람을 피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탓하기는 싫다. 나는 그저 팔이 안쪽으로 굽는 그런 하찮은 인간이다. 뭘 어떻게 살아도 관계는 힘들다. 관계를 쉽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또 축소하는 수밖에 없다.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많아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하게 돌처럼 콱 박혀있다. 힘들어도 내년 오늘이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그런 뻔한 소리인가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1년 동안 지내면서 보는 시선, 만나는 사람, 듣는 이야기, 의식과 구조가 조금씩 바둑판처럼 정리가 된다는 말이다. 여름이니까 시원한 맥주나 마시는 거다. 어떻든 겨울보다는 차가운 맥주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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