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희는 대한민국 배우다. 공포 오컬트 영화 ‘제8일의 밤’이 재미있을 법 했지만, 인디애나 존스와 미이라와 전설의 고향과 사다코의 혼재가 영화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더니 요단강을 건너 버리고 말았다. 온통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나오는데 왜 재미가 없나? 연출 때문이다. 그나마 고서희 같은 배우가 조연으로 섬뜩함을 전달하고 있어서 무서움을 느낄 수 있어서 병맛 영화지만 그나마 볼만했다.

고서희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다 나왔다. 박하사탕에서 내가 순임이로 할게요,라며 설경구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이입되는 표정이 일품이었는데 데뷔작이라고 한다. 그 뒤에 오아시스에도 나오는데 단역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역으로는 ‘살인의 추억’에서 여경으로 라디오의 사연을 추적하여 연쇄살인범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우울한 편지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그놈을 찾아내는데 경찰서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송강호가 뭐? 뭔 편지? 하던 대사가 생각난다. 그때 고서희가 이 노래가 방송된 날이 전부 사건 터진 날이라는 말에 주먹구구식의 수사 방식에 과학적 수사가 파고 들어 나머지 형사들이 놀라는 장면도 기억난다.

지나고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이춘재의 모습이 영화 속 박해일의 사진과 닮았다는 점에서 봉 감독은 정말.

고서희는 그리고 여러 영화에 나왔는데 내가 최근에 본 ‘오마주’에서 감독으로 나오는 이정은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로도 나온다. 영화 속에서 물론 현실의 벽에 부딪혀 끝내 좌절하고 말지만. 마지막 영화의 마지막 상영을 달랑 감독과 함께 보다가 그만 울음을 터트린다.

그나저나 한국 공포물도 예전의 스승의 은혜처럼 신체 훼손이 적극적으로 나와줘야 하는 거 아님. 스승의 은혜 내용도 정말 찰졌는데. 영상참조는 유튜브 무비녀 님의 영상을 참조했다. 고서희 배우가 나오는 부분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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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7-06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우>에도 나온 분이군요. 그래도 <살인의 추억>으로 가장 기억되는 배우네요.

교관 2022-07-07 11:38   좋아요 0 | URL
네, 여러 영화에 주연으로도, 또 주연으로 나왔어요 ㅎㅎ

stella.K 2022-07-06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런 배우가 있었나요?
말씀 하시는 옛날 영화 저도 거의 다 봤는데 이런 배우가 있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최근 사진은 아니겠죠?

교관 2022-07-07 11:38   좋아요 1 | URL
다시보게 되시면 아마 눈에 쏙 들어올 거 같아요 ㅎㅎ
 


요즘 같은 날에 조깅을 하면 정강이에서도 땀이 샘솟듯 퐁퐁 나온다. 이렇게 비처럼 흘리는 땀은 경이롭다. 짜지 않다. 뚝뚝 떨어지는 땀은 수분에 가까워서 조깅을 실컷 한 다음에 물 한잔 마셔주면 또 원상태로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폭염이라고 해도 여름의 초입이라 그런지 해가 떨어지면 바람은 선선하다. 여름에 부는 바람이 선선하다니! 무슨 그런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름에 부는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지는 건 조깅을 했기 때문이다. 조깅을 하면서 심장이 굉장한 펌프질을 하여 피가 평소보다 더 빠르고 과격하게 혈관을 타고 돈다. 몸이 뜨거워지고 땀을 있는 대로 흘린다. 그런 반응에 적응을 하듯 신체의 기관들은 체온을 유지하려고 평소보다 열심히 움직인다. 이렇게 무더운 날에 조깅을 하게 되면 아마 신체의 모든 기관이 바짝 긴장을 해서 가만히 쉬는 기관은 없는 것 같다. 위장도 그에 맞춰서 뭔가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체온이 조깅으로 인해 오를 대로 올라있는 가운데 그늘에 잠시 앉아서 쉴 때 여름의 바람이 불면, 설령 바람이 덥덥하거나 시원하지 않아도 체온보다 낮기 때문에 시원하게 느껴진다. 대부분 에어컨 앞에서 시원하게 있지만 오히려 조깅을 한 후에 에어컨 바람은 너무 차갑다. 이게 개인적으로 여름의 딜레마다. 어떻든 여름이니까 해가 뜨겁고 기운이 높은데 에어컨 바람은 춥고 싫다. 그래서 잠을 잘 때 에어컨을 켜지 않고 선풍기만으로 잠이 드는데 너무 더운 날에는 새벽에 더워서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의 딜레마다.


조깅을 하다가 산스장 같은 곳에서 몸을 열심히 풀어준다. 요즘은 날이 더운 것 치고는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래 봐야 전부 아버님, 어머님 또는 할아버지들의 나잇 대다. 그래도 매일 보는 어르신은 매일 나와서 정말 열심히 운동을 한다.


날이 더워지면 사람들이 덜 나올 것 같지만 러너들은 이런 날 많이 나와서 달린다.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고 숨을 슉슉 하며 일정한 보폭으로 달리는 러너들을 보면 멋지다. 가끔은 선수들이 강변에 나와서 조깅을 한다. 그 무리에 껴서 달리는 것도 재미있다. 그들 틈에 끼어서 달린다고 해서 그들이 나무라거나 빠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같이 달리는 것이다. 강에는 늘 조정경기 선수들이 조정 연습을 하고 있고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달리고 있다. 이런 폭염 속에서도.


어느 날은 달리면 저 먼 곳을 보니 마치 아파트 건너편에서 이종의 비행물체가 빛을 사방으로 발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사진으로 담았다. 영화 속에서 이런 장면은 늘, 언제나 복선을 예고한다. 외계인 침공의 영화를 보면서 늘 드는 생각은 감독들은 앞으로는 정말 공부를 많이 해서 외계 침공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종족은 인간이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전쟁을 해왔다. 침략을 하고 침투를 하고 전쟁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외계인의 우주선이 무참하게 지구를 침공해서 박살 내다가 몇 명의 과학자들이 외계인들을 때려잡는 식의 영화는 이제 식상해져 버렸다. 인간, 인류를 공격할 때에는 전투, 전술이 확실해야 인간사 내내 전쟁을 일으킨 인간을 정복할 수 있다.


이 모습도 마치 우주선이 빛을 관통해버린 것 같다. 매일 같은 곳을 나와서 달리는데 매일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보면 많이 달라져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매일 보던 가까이 있던 사람도 어제와 전혀 변함없는데 어느 날 보면 나이가 들어있다. 그렇게 우리는 야금야금 늙어간다.


평소에 다니지 않던 곳을 지나서 오다가 골목을 발견했다. 골목은 언제나 사진 메이트다. 골목만큼 사진으로 담기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없다. 골목과 가로등, 그리고 골목 속의 계단만으로도 괴담이나 추억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다.


또 다른 골목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구애를 하고 한 마리를 흥 하며 대치를 이루고 있다. 고양이는 몇 천 년 동안 정말 변함없이 자기중심적이라고 하지만 인간 품으로 파고드는 고양이 앞에서는 또 속수무책이다.


날이 너무 좋았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폭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하늘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너무 더워서 조깅 코스에 거의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 열기가 후끈하며 얼굴로 바로 닿는, 그런 날이었다.


하늘 속에 새 한 쌍이 이 넓은 하늘을 전세 내서 사랑 비행을 하고 있기에 한 컷 담았다. 두 마리는 사이가 좁혀졌다가 다시 조금 벌어지고를 반복했다. 그들의 사랑법인 것 같다. 저 새들보다 더 큰 새도 보이지 않고 저들을 방해하는 방해물은 적어도 하늘에는 없었다. 그저 활공을 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저들이 해야 할 오직 하나인 것처럼.


하늘에 마블링이 꼈다. 서서히 물살에 번져가는 마블링이 강이 아니라 하늘에 번졌다. 미술시간이 생각이 났다. 다른 수업시간에는 존재감이 없었지만 미술시간에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다가 안 되면 나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물에 물감과 기름을 떨어트려서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다음 도화지를 살짝 표면에 갖다 대면 이런 마블링의 아름다운 형태가 도화지에 그려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쭐해졌던 것이다. 그런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하늘을 만났다.


습도가 눈으로도 다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몸이 아주 무겁고 꿉꿉함이 대기에 가득 껴 있는 그런 날이었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날이다. 이런 날에 조깅을 하면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땀은 전부 나오는 것 같다.


집 앞 바닷가에서 오전에 책을 좀 읽으며 한 컷 담았다. 아주 맑았다. 대기에 가스층이 거둬져서 하늘은 더욱 파랗게 보이고 구름은 더더 하얗게 보이는 그런 날이다. 이렇게 평온하게 보이지만 바다에는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리고 바람은 춥다. 저어기 공사하는 건물 옆에 시지브이 극장이 생겼다. 이곳으로 여행을 온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에는 아, 우리 여행 중이었지, 하며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 내가 여행을 가면 꼭 그 도시나 그곳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그런 느낌을 잔뜩 받았었다.


구름이 맛있게 보이는 날이다. 날이 너무 덥지만 역시 에어컨 바람이 싫어서 창문을 열고 운전을 했다. 마치 열어 놓은 창문으로 구름의 맛있는 냄새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화산이 폭발을 하면 저런 구름이 형성이 되던데. 아무튼 멋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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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여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름을 사 계절 중에 가장 좋아합니다.

여름의 그 열기와 숨을 못 쉴 정도로 뜨거운 공기가 마음에 듭니다.

여름에 흘리는 땀은 온당한 것처럼 다가옵니다.

겨울에 나는 땀은 비집고 나온다는 느낌인데 여름에 땀은 흘린다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깨끗합니다.

어제는 올 들어 처음 매미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매미 소리 듣는 것 또한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제는 서서 매미들의 합창을 녹음까지 했습니다.

매년 그해 여름에 듣는 첫 매미소리에 대해서 기록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름에는 까맣게 태운 피부와 땀과 맥주와 매미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비교적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산들바람이 부는 평상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매미소리를 실컷 듣는 삶이 여름을 제대로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집 방충망에 매미가 한 마리 붙었습니다.

그때는 여름의 끝물이었는데 한 마리가 붙어서 울었습니다.

매미가 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매미를 가까이서 보기는 했지만 우는 모습은 말입니다.

매미는 음절을 끊어서 웁니다.

음절이 끊길 때 어찌나 힘이 드는지 배를 말아 올리고 공기를 서서히 뺍니다.

그 소리에 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두었더니 매미는 방충망에 삼일이나 붙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홍어가 온몸으로 소변을 배출하듯이 매미는 온몸으로 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에서 사로 가는 길목에서 매미는 생명을 위해 울었습니다.

칠 년의 결실 끝에 나온 매미는 절박한 생의 기간 중에 삼일을 방충망에 붙어서 울었습니다.

방충망을 탁 두드리면 추락하여 영롱한 생성(생의 소리)의 소멸이 두려워 두었더니 매미는 목 밑까지 차오른 말들을 매 밑으로 삼켜 소리로 뽑아냈습니다.

매미를 떼어내지 못한 나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는 매미 사이에는 ‘삶’이라는 결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갑옷 같은 몸을 열고 나온 매미는 진정으로 소리를 내고 감옥으로 들어간 저는 소리를 삼켰습니다.

세상이 잡아당기는 저 무서운 힘을 이겨내며 생을 노래하는 십오일의 삶, 세상은 시끄러운 매미가 싫어 짧은 삶을 주었지만 매미는 세상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여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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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야, 나는 지금 너무 힘들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생각나서 편지를 띄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아니 영화가 뭔지 점점 모르겠어.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나는 환갑이 지나도 영화를 찍을 거라고. 그런데 환갑은커녕 50도 못돼서 나에게는 한 뼘의 공간도 없어진 현장이 되었어.

홍일점 여 감독. 빛 좋은 개살구. 내가 그곳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가까웠다 사라져간 친구들의 추억 그리고 커피, 담배 같은 중독성 기호.

밤에는 말똥말똥 잠을 잊고 새벽이 되어서는 잠이 드는 습관.

쥐뿔도 없는 주제에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살자는 배짱.

참, 또 있지. 세상일이 꿈이나 열정이나 인내심만 가지고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깨달음.


이 편지는 최초의 여성 판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감독 홍재원(실재 감독의 이름은 홍은원)이 같이 영화를 만들었던 여성 필름 편집담당자인 옥희에게 쓴 편지다.


60년대에 최초로 여성이 영화 판에 뛰어들어 감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수많은 냉대와 편견 속에서도 오직 영화에 미쳐있던 자신의 내부에서 발발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에 대해서 겁이 났다. 감독은 62년에 ‘여판사’라는 영화를 남기고 떠났다.


시간이 흘러 영화 속 또 다른 여성 감독인 이정은은 독립영화를 만들지만 관객은 열 명도 안 되고, 가정일에도 소홀하게 되고 시나리오 적는 것 또한 힘겹기만 하다. 매일 집 앞 공용주차장에는 승용차가 내내 주차되어 있고 이정은은 사무실까지 비워줘야 하는 상황. 코로나가 겹치면서 독립영화의 관심은 더욱 멀어지고.


그러던 중 오래전 최초의 여성 판사의 이야기를 담은 ‘여판사’라는 영화를 상영을 하게 되는데 그 영화가 중간부터 녹음이 되어 있지 않고 편집이 이상하니까 좀 맡아서 영화를 완성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정은은 ‘여판사’라는 필름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 당시의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러 다니지만 대부분 죽거나 병들어 있고.


그러던 중 공용주차장에서 매일 주차되어 있던 차 안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여자의 시체는 그 안에서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모두가 알지 못했다. 이정은은 그 여자의 죽음이 마치 그림자 같았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여판사를 만든 홍재원 여성 감독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의 삶이, 마치 자신의 삶과 너무나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 겹치는 삶이 마치 죽은 지 오래되어서 발견된 그림자 같은 여자와 흡사하다는 것도 느낀다.


이 영화 속에는 ‘현실’과 ‘실재’와 ‘실제’ 그리고 ‘메타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몹시 신기한 영화이면서 잔잔한데 잔잔하지 않은 영화였다. 차 안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의 일은 현실을 말하고, 영화 ‘여판사’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화이며, 실제 여감독 홍은원의 영화 속 홍재원의 그림자는 메타포어다.


영화 ‘여판사’는 당시에 판사인 인텔리 아내를 둔 남편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고 자격지심 때문에 독살을 한 실제의 사건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쯤 되면 62년 영화 ‘여판사’도 궁금하다. 그래서 찾아보면 유튜브에 그 영화가 풀 러닝타임으로 있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한 인간은 여러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건 만만찮은 것이라는 걸, 한 인간이 예술을 접하고 그 세계에서 고독하고 외로움을 견뎌가며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정은의 덤덤한 연기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 영화사의 기록 같은 것들도 덩달아 달려 나오기 때문에 아아하며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홍재원의 편지로 시작하여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내가 잠든 사이에’의 시로 끝맺음을 한다.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침대 밑에서, 계단 아래서,

오래된 주소에서.


무의미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 찬 장롱 속을,

상자 속을, 서랍 속을 샅샅이 뒤졌다.


여행 가방 속에서 끄집어냈다,

내가 선택했던 시간들과 여행들을.


주머니를 털어 비워냈다,

시들어 말라버린 편지들과 내게 발송된 것이 아닌 나뭇잎들을.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들,

불안과 안도 사이를.


눈(雪)의 터널 속에서

망각 속에서 가라 앉아버렸다.


가시덤불 속에서,

추측 속에서 갇혀버렸다.


공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잔디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려고 몸부림쳤다,

구시대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에,

막이 내리기 전에, 정적(靜寂)이 찾아오기 전에.


결국 알아내길 포기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과연 무얼 찾고 있었는지.


깨어났다,

시계를 본다.

꿈을 꾼 시간은 불과 두 시간 삼십 분 남짓.


이것은 시간에게 강요된 일종의 속임수다,

졸음에 짓눌린 머리들이

시간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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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화장실이나 세면장에 들어가면 순간 꿉꿉하고 후끈한 열기가 확 나는데 그게 뭐랄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때만큼은 아 여름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수영장에서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할 때는 못 느끼다가 찝찝하고 꿉꿉한 열기가 나는 화장실이나 세면장에서 여름을 느끼고 그 시간이 싫지 않음을 느꼈다. 그게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이었다. 그런 순간이 어른이 되어 갈수록 좀 더 확장되어 간다. 정작 행복한 순간보다 그 행복한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걸 알아서일까, 행복한 순간이 오기 직전의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힘든 일을 하고 있어서 좋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 시간을 지나면 행복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비록 금방 지나갈지라도.


사는 게 어려워졌다. 뉴스, 기사, 영상, 곳곳에서 사는 게 어렵다고 한다.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어쩌면 그 소수의 몇몇도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게 그렇게 또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꼭 사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다. 억만장자 재벌가의 막내딸이 오래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면 사는 건 누구에게나 다 힘이 드는 것 같다.


정말 힘든 순간이나 또는 몹시 행복한 순간에서 잠시 비켜간 순간에서 나를 바라보면 그 찰나의 시간이 그렇게 싫지 만은 않았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 그 순간만 지나갈 수 있다면 좋지는 않으나 고통을 느껴봤기 때문에 또 헤쳐나갈 수 있어서 싫지만은 않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운 것으로 의미를 두는데 고통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면 그건 곧 살아있다는 말이다.


김영하의 신작 ‘작별인사’를 보면 고통에 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달마’라는 휴머노이드가 철이와 선이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쉬지 않고 그들을 처리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모두 살고 싶어했습니다. 인간들이 휴머노이드에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삶을 향한 의지를 프로그래밍해두었기 때문이지요. 삶을 향한 의지라고 하면 뭔가 심오하게 들리지만 그저 그들에게도 고통이라는 감각 체계를 내장해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고통은 생물체를 보호하는 필수적 장치입니다. 고통을 느껴야 위험을 피해 자신을 지키려 할 것이고, 그래야 인간은 비싼 돈 주고 산 소유물을 보존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고통과 공포, 불안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를 계속 비활성화하는 작업이 간단할 리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그들의 고통에 공감을 하니까요]라고 달마가 말을 한다.


고통이라는 건 그렇다. 고통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마주할 고통에 대한 내성을 가지게 된다. 시시티브이를 통해 보게 된 축 늘어진 조유나 양의 영상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안 좋은 예감은 안 좋은 소식으로 전해졌다. 사는 게 힘들고 고통이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다 힘들어, 같은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사는 건 원래 그런 거라, 카니발의 그땐 그랬지를 봐도 사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미생에서 그랬듯이 그래도 전쟁이 지옥보다는 낫다. 이렇게 바닷속에서 생명이 다 한 가족의 소식은 안타깝기만 하다.


어제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암 환우들의 영화를 봤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하루를 너무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다. 그들도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고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사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행복한 건 정말 잠깐이다. 사람들의 행복은 다 엇비슷하고 추상적이다. 그러나 불행은 길고 아주 구체적이며 제각각이고 명확하다. 우리의 일생은 짤막한 행복의 순간과 그 외의 대부분은 덜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사이에 고통이 파고들어 온다. 삶이란 언제나 그렇다. 무너져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개지만 살아가야 하는 이유 한 가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다.


엄마 아빠와 여행 간다고 그 전날 들떠서 짐 싸고 했을 유나 양을 생각하면 참 슬프다. 정작 행복한 순간보다 그 전의 시간이 나쁘지 않을 시간이 되었기를 바라며. 유나 양에게 그 시간이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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