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 차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평소에 비해 아주 커졌다. 조깅을 하고 반환점을 돌 때 얼굴에 닿는 바람이 후덥지근하지 않았다. 조깅하며 엄청나게 흘린 땀이 빨리 식는다. 그리고 매일 저녁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볼 수 있다. 여름이 지나간다는 불안한 느낌이 와닿는 순간이다.


아직 빽빽하게 들어차지는 않았지만 일주일 동안 많이 비어 있던 주차장에 차들이 쏙쏙 들어찼다. 휴가가 대부분 끝나간다는 이야기다. 8월 15일이 되면 여름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유월부터 시작된 나만의 여름을 8월 15일까지는 온몸으로 느끼고 즐기며 지내는 것이 나의 여름 나기다.


어린 시절에는 여름이 더워서 싫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시원한 개울이 있는 외가에서 보내다가 8월 중순에 집으로 오면 여름이 거의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어린이니까 어른으로써 따라오는 고민이나 불안이 없었기에 여름이 덥. 다.라고만 느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여름에 들어가는 냉방비, 자동차나 집세 같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은 늘 더웠고 열대야가 오면 밤잠을 설쳤음에도 매년 여름이 되면 올해가 가장 덥다, 백 년 만에 오는 더워, 같은 말들이 나온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여름은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 되었다. 겨울의 추위는 견디지를 못하겠는데 여름의 더워, 특히 요즘과 같은 폭염은 이상하지만 잘 견딘다. 덥긴 덥지만 썩 덥지 않다. 올해는 작년이나 그 이전에 비해 에어컨을 거의 틀지 않고 있다. 아직 자면서 에어컨을 틀어 놓고 잠든 적이 없고, 요즘은 하루 24시간 중에 에어컨을 틀어 놓는 시간이 2시간 정도가 고작이다. 출퇴근할 때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운전을 한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렇게 막 덥지가 않다. 매년 하는 말이지만 여름이 되면 집 앞 바닷가에서 피부를 적당하게 태운다. 나무색으로 변한 피부는 어지간한 태양빛에는 그렇게 뜨겁지 않은 이유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폭염 속에서도 매일 조깅을 해서 그럴 거라 생각을 한다. 폭염 속에서 조깅을 하면 체온이 주위보다 올라가서 덥덥한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져 에어컨 바람이 나에게는 너무 차갑다. 거짓말 좀 보태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바람이 에어컨 바람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일하는 곳에도 에어컨이 없다. 로비에 건물 중앙식 냉방이 돌아가서 문을 열어 놓고 셔큘레이터를 틀어 놓으면 괜찮다.

조깅을 하다가 며칠 동안 하늘에 뜬 달을 봤다. 달은 언제나 저기 저 하늘에 외롭지만 쿨하게 떠 있다. 떨어지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저 멀리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지도 않은 채 저기에 뜬 채 내가 바라보면 고독하게 나를 바라봐준다. 달은 늘 같은 모습일 테다. 400년 전의 달도 지금의 달이었다. 300년 전의 사람도 지금 내가 보는 달을 고개를 꺾어 바라보았다. 윤동주도 감옥에서 조그맣게 난 창으로 보이는 달을 보며 ‘달을 쏘다’를 썼다. 그 달을 지금 내가 보고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삶이란 몹시도 기이하고 이상하다는 기분이다. 달은 그렇게 오래 전의 사람들과 나를 이어준다. 달은 항상 똑같은데 매일 다르게 보인다. 그건 달과 나 사이에 있는 불순물 때문이다.


가스층이 없는 맑은 날은 진하게 보이더니 습도가 높고 대기에 먼지가 많으면 달은 뿌옇게 보인다. 구름이 하늘에 많은 날은 달이 가려지기도 하고, 아주 흐리게 보인다. 저렇게 쿨하게 떠 있으려면 달은 꽤나 힘들지도 모른다. 이 말은 일큐팔사에도 나온다. 아오마메가 두 개의 달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고 든 생각을 한다. 어느 날 1984년에서 1q84년으로 와 버린 아오마메가 매일 달을 쳐다본다. 요즘 일큐팔사를 다시 읽고 있지만 참 재미있다. 읽을 맛이 난다. 그 분위기, 주위의 건물이나 사건들이 상상력으로 떠오른다. 노부인이 살고 있는 주택의 모습도, 심지어 아오마메의 얼굴도 떠오른다. 누군가의 얼굴과 겹쳐진다.


어제는 조깅을 하면서 보니 새 한 마리가 달을 지나 날아가고 있기에 멈춰서 사진으로 담았다. 사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고 하기도 하고, 사진을 담았다고 하기도 한다. 나의 여사친과 결혼한 영국인 죠는 한국말이 너무 어렵다고 한다. 한 번은 똥을 쌌다고 말을 하기에, 그 말은 더러우니 똥을 눴다고 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니 도대체 한국말은 왜 이리 어렵나면서, 대변을 본다는 말은 뭐냐고 했다. 다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랬더니 아니 왜 지가 싼 똥을 왜 보는데?라고 했다. 자신의 아이들은 한국말, 영국 말 반반씩 하는데 주로 영국에서 생활을 하니 한국말을 하는 건 지 엄마밖에 없어서 한국말이 아무래도 서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한국말로 응가하고 왔다고 한다. 죠는 맙소사다, 도대체 응가, 똥, 대변, 본다, 싼다, 눈다, 맙소사.


달은 밝게 빛나고 있다. 저 먼 하늘에 떠서 빛난다. 고로 달은 밝다. 만약 그런 달이 정말 두 개가 떠 있다면 태양계는 더 밝았을까. 과학적으로 변하는 지구의 현상을 소거하고 달이 두 개가 뜬다면 정말 좀 더 밝아 보일까. 달이 50개가 있다면 엄청 밝을까. 역시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태블릿 기기를 광고하는 영상을 보면 500 니트, 300 니트 같은 화면 밝기입니다.라고 한다. 이게 촛불의 개수를 말한다고 한다. 500 니트라면 촛불 500개를 밝힌 것만큼 밝아서 낮에 야외에서도 시인성이 좋다고 한다. 그만큼 밝아서 화면이 잘 보인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이런 영상을 보면 500 니트니까 밝군,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촛불 500개를 밝혀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얼마나 밝은 건지 잘 모른다. 촛불 500개를 밝힌 것이 주위를 얼마나 밝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태블릿을 광고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촛불을 500개 밝힌 것이 얼마나 밝은 건지 해보고 그렇게 말해주면 더 좋을 텐데. 왜냐하면 지금은 새로운 기기가 나오면 구독자수와 상관없이 테크 튜브들이 우르르 같은 기기를 같은 방법으로 같은 말로 광고를 하고 정보를 알려 줄 뿐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촛불을 아주 많이 켜 놓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마데우스다. 음악을 할 때 순수가 되어 버리는 아마데우스. 완전한 본연의 모습이 된다. 증폭된 재능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몸과 마음을 덮어 버려 음악을 할 때에는 마치 신과 악마의 모습이 동시 존재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재능을 평탄하게 놔두지 않았다. 고립과 쾌락을 오고 가는 극단적인 삶을 사는 아마데우스. 아내도, 황제도, 음악을 하던 음악가들도 아마데우스의 재능을 실용하지 못하고 남용한 결과 살리에르의 집요함이 동정으로 변모할 때 아마데우스는 결국 술과 약에 영혼을 팔아 버리고 만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아마데우스 볼프강 모차르트와 꺼져 버릴까 두려워서 그의 곁에서 한없이 꺼지고 불붙기를 반복하는 무섭고 안타까운 살리에르의 예술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촛불이 아주 많이 나온다. 전기가 없으니까. 밤을 밝힐 수 있는 빛은 오직 촛불밖에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의 극장에서도, 집안에서도 초로 불 밝힐 수밖에 없었다. 아마데우스는 안타깝다. 귀족의 녹을 먹으며 생활해야 하니 일어나기 싫은 시간이 일어나서 쓰기 싫은 가발을 쓰고 먹기 싫은 아침을 격식을 차려 먹어야 했고, 머리가 나쁘고 음악에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귀족의 아이들에게 오전 시간은 음악을 가르쳐야 했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음악만 하며 살았으면 좋았을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가 일찍 죽음으로 간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매일 밤마다 집안 가득 불 밝혔던 촛불 때문이지 않았을까. 초를 태우며 나오는 그 연기가 몸에 안 좋은데 어마어마한 저택의 어두운 방안을 매일 밤 밝히려면 엄청난 초를 태웠을 것이다. 술과 약에 잠식되어 몸도 좋지 않은 아마데우스는 초를 태우며 나오는 많은 여기가 더 일찍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을까.


모차르트가 음악을 만들며 밤에 나와서 쳐다봤던 그 달이 우리가 오늘 밤에 보는 달이다.



땀으로 다리가 전부 젖었는데 사진으로 표현이 안 되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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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비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나비가 된다면 중력에 휘둘리지 않고 날갯짓을 하며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닐 텐데 말입니다. 나비가 될 수 없다면 나비의 친구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비의 친구는 누구일까요. 그건 자연입니다.


제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비와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나비들이 자주 찾는 언덕에 올라 자연의 일부가 되려고 했습니다. 언덕으로 가서 꽃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바람을 느끼고 자연의 일부이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나비는 비가 오면 어디서 비를 피할까. 다른 곤충들은 죽고 나면 시체가 남는데 나비는 사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나비는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 제가 자연의 일부가 된다면 비가 안전하게 숨을 수 있게 나비에게 자리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나비의 친구니까요.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번져갑니다. 나비의 날갯짓은 비규정적입니다. 새처럼 도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에 날개를 걸친다는 기분이 들 정도의 날갯짓입니다. 바람이 불면 한없이 나약한 나비라서 바람에 딸려 흘러가 버릴 텐데도 자연에 몸을 맡긴 채 날갯짓을 합니다. 그 모습은 저에게 황홀한 동시에 격정적이며 안타깝게 다가왔습니다. 나비는 자유함으로 무장한 채 날갯짓을 해서 가고자 하는 곳으로 어떻게든 도달합니다.


저는, 저는 그만 나비에게 사랑을 느꼈습니다. 나비와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나비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나비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다른 나비들은 저와 거리를 두었지만 그 나비는 저의 주위에서 맴돌았습니다. 나비는 온통 푸른빛을 띠었고 날개에 금색의 띠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나비는 몹시 신비로웠습니다. 그리고 저의 온 마음을 가져가 버릴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나비는 처음 보았습니다. 푸른빛 나비의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모습에 그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비가 날아와 머리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사뿐히, 천천히, 조용하지만 도도하게 내려왔습니다. 저는 정말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푸른빛 나비가 앉았다 가고 난 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자연으로 회귀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언덕을 디디고 있는 발밑이 조금 따끔거렸습니다. 그리곤 이내 폭신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햇살이 눈꺼풀로 떨어졌습니다. 그 감촉이 오토록 행복할 줄은 몰랐습니다. 눈두덩을 마치 사랑스러운 손길로 문질러 주는 것 같았습니다. 양팔을 뻗었습니다.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팔 위로, 피부를 뚫고 꽃들이 피고 있었습니다. 살갗을 벌리고 나올 때 고통이 있었습니다. 아프고 그만하고픈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해 징그러운 애벌레에서 탈피를 합니다. 온몸을 비틀고 힘을 주어 고치 속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겪지 않으면 나비가 될 수 있으니까요.


발바닥이 대지에 박히고 나무뿌리의 수액을 빨아들이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리고 푸른빛 나비가 날아와 감은 눈두덩에 앉았습니다.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몸이 비로소 꽃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요. 이제 저는 푸른빛 나비와 사랑을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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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니카들, 좌측 하단 미니카를 주목


티브이를 보면 또 유행이 돌고 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아주 잘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집에 있는 티브이를 들고 다니며 볼 수 없을까, 하는 염원이 있었다. 그 바람이 고속버스에서 티브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더 작은 티브이가 있었으면 하던 바람으로 4인치 정도의 유선 티브이가 나왔다. 라디오 겸용 티브이가 유행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소형 티브이는 대형 티브이보다 비쌌으며 대부분 일본 제품이었다. 후에 삼성 제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카세트 플레이어 만해서 어디든 들고 가서 플러그만 꽂으면 티브이가 나왔다,라고 하기에는 전파 수신이 어려워서 지지직 거렸고 방송 3사밖에 없어서 생각하는 것처럼 티브이를 제대로 시청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작은 것을 원하게 되었고 일본의 소니 회사는 그 니즈를 파고들어, 미국에서 대형 제품을 만들어 놓으면 똑같은 제품을 반대로 소형으로 만들어서 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티브이가 점점 작아져 현재의 휴대전화만 한 티브이들이 각광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손 안의 티브이를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손 안의 티브이, 카시오에서 나온 포켓용 티브이가 나오기도 했는데 걸어 다니며 티브이를 막 볼 수는 없었다. 역시 전파 수신의 문제와 옛날에는 정규방송 시간을 제외하고는 낮에는 방송 송출 자체가 없었다. 한때 사람들은 티브이의 마법에 걸렸었다. 티브이가 나오기 이전에는 전쟁 중에도 어디선가 발행한 잡지나, 문고본 소설을 읽었고 6, 70년대에는 모두가 매일 아침에 나오는 신문을 찾아서 읽었다. 신문 속에는 정치, 경제뿐 아니라 재미있는 만평이나 만화, 매일 연재되는 소설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신문을 읽었다.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 소설을 한때 황석영 소설가가 썼다. 1974년 7월부터 1984년 7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를 했다. 정말 대단하다. 그때 황석영이 매일 소설을 써서 연재를 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어디 멀리서 소설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겠다,라고 하면서 도망을 쳤다. 현실도피를 한 것이다. 에잇 나 몰라라 하며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가버렸다. 신문사에서는 큰일이 난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도 장길산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즘의 우영우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심정보다 10배는 더 할 것이다. 그래서 황석영 담담 기자가 있었는데 손을 번쩍 들고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라고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대작가가 된 소설가 김훈이었다.


김훈의 소설을 몇 권 읽었는데 ‘칼의 노래’라든가, ‘공무도하’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책은 어느 정도 그대로 술술 읽힌다. 남한산성을 읽을 때였는데,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냥 휙 하고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뭐랄까 남한산성 같은 경우는 김훈이 마치 타임리프를 해서 그 당시, 남한산성 그 장소에 가서 마치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적확하게 표기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 당시에 썼던 단어들, 그러니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사전을 찾아서 일일이 각주를 달아서 읽다 보니 몇 달이 걸렸던 적이 있었다. 와 이 사람, 김훈이라는 작가는 참으로,,,, 같은 생각을 했었다. 아무튼 김훈 작가가 황석영 담당 기자였을 적에 – 휴대폰도 없을 시기에 아이구 힘들어라, 하며 내뺀 황석영을 잡으러 다녔던 말이지. 김훈의 딸은 영화제작자인데 싸이런픽쳐스 대표다. 여기서 오징어 게임을 만들었다.

남한산성은 책을 읽고 난 뒤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영화 역시 책만큼 잘 만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김상헌과 누리가 헤어지는 장면이다.

어린 누리의 눈에 비친 대감 김상헌은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연결된 끈이었다. 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와 민들레가 필 때 강가에 나가 꺾지를 잡고 놀았을 누리는 헤어져야만 하는 김상헌이 미우면서 고맙기만 하다. 민들레가 필 때면 저를 다시 데리려 오시는 겁니까.라고 울먹이며 묻는 누리의 말에 그리하겠다고 말하는 김상헌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김상헌의 눈빛에서 누리의 할아버지를 죽어야만 했던 자신의 과오를 끝끝내 밝히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음을 용서해달라, 너를 지켜주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 보다는 날쇠의 곁에 있음이 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 나를 용서해달라.


김상헌과 최명길의 김윤석과 이병헌은 영화인지 소설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김상헌은 톨스토이와 비교가 되었고 최명길은 도스토옙스키와 비교가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죽어가면서 글을 쓴 도스토옙스키가 우아하고 허리를 굽히지 않는 톨스토이의 멋진 글보다 와닿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영화가 말미로 갈수록 그렇게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방법이 달랐을 뿐 같은 길을 갈 뿐이었고 서로를 몹시도 경외하고 있었다. 이병헌의 백두산 고군분투기에서 에이 뭐야, 했지만 남산의 부장들과 남한산성에서의 이병헌은 정말 최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상헌이 누리를 끌어안고 보이는 눈빛은 나라를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이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너는 반드시 살아나서 아름답게 민들레 꽃을 피우거라. 그렇게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뼈를 갉아먹던 추위를 몰아내고 산과 들에 꽃을 피웠다.


영화 1917에서도 처참하고 또 처참한 전시상황 중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황폐하고 무지하고 포탄에 엉망진창이 된 곳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생명은 태동했다. 김상헌은 누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다.


영화는 그 어느 것 하나 오버하는 법이 없다. 소설에 신세를 지는 만큼 소설에게 욕을 들어먹지 않게 꾀부리지 않고 이전의 사극을 우려먹지 않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왕과 나라를 생각하는 김상언과 최명길의 연기는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김훈의 날이 바짝 선 호흡을 정공법의 영상으로 옮긴 남한산성이었다.


이번에 안중근 의사의 7일 동안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다.


김훈의 아버지가 우리나라 1세대 소설가 김광주 선생이었다. 김광주 선생은 당시 중국의 남영의학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리고 소설을 썼는데 그 당시에는 무협소설 격인 수호전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64년인가 김광주 선생은 후배 소설가들을 모아 놓고 아직 꼬꼬마였던 김훈에게 막걸리를 사 오라 심부름을 시켰다. 김훈이 이렇게 막걸리를 방에 넣어주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와 소설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우리의 밥줄이 끊겼다, 너 그 녀석 소설을 읽어봤냐? 그 녀석 소설이 한국문학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누구냐면 64년에 등장한 ‘무진기행’의 김승옥이었다.


뭐 아무튼 사람들은 그렇게 활자를 읽고 상상하는 것에 지치지 않았다. 티브이도 없고 뭐 그런 시대니까. 그러다가 영화의 붐이 일어났다. 아마 6, 70년대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들어 영화를 봤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서울이나 대도시에 한해서였다. 지방의 변두리에서는 영화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다. 일단 극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고생들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주말에 먼길을 나가서 극장이 있는 도시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오는 것에 하루를 몽땅 소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클라크 케이블, 비비안 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잉그리트 버그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러다가 티브이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한 동네에 티브이가 있는 집으면 매일 저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일이 나오는 프로레슬링이 하는 날이면 동네 축제라도 열린 것 같았다. 모두가 모여 티브이를 보니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김일 선수의 몸짓 하나에 모인 마을의 사람들, 어른이고 애고할 것 없이 탄성과 환호가 오고 갔다. 그런 시대를 거쳐 70년대 후반기부터 각 가정에 티브이가 전부 보급이 되기 시작했다. 어떤 집에는 거실에 티브이가 한 대 있고 부모님 방에 따로 티브이가 있기도 했다.


티브이는 점점 작아져서, 그 바람인지 휴대전화가 나오기 시작했고 스마트폰으로 티브이를 볼 수 있는 시대까지 왔다. 그렇게 티브이 화면을 작게 만들려고 하던 예전에서 이제는 폰의 화면이 자꾸 커지고 있다. 이제는 걸어 다니면서 폰으로 티브이를 보는 게 너무나 당연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은 화면에 만족하지 못하고 태블릿을 만들어내더니 태블릿의 화면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제는 아이폰 4만 한 작은 폰을 들고 다니면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덱스터의 마지막 시리즈를 보면 모든 건물이나 자동차 내지는 옷들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폰이 아이폰 4다. 그래서 아 벌써 그렇게 오래되었구나, 하게 된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는 돈이 많으면 뭘 하겠느냐고 묻던데, 나는 돈이 많으면 돈이 많이 드는 피겨를 구입하고 싶다. 요즘 피겨는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들이라 일반인들은 큰 마음먹고 지갑을 열지 않는 이상 피겨를 구입할 수 없다.


피겨도 유행이 있고 돈다. 매체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유튜브가 모든 영상을 독식하듯이 해도 또 책이, 책 속의 이야기가 모든 유행을 선도한다. 스토리텔링도 그렇다. 현재는 이[] 세계 이야기, 좀비나 히어로 물이 유행을 타고 있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가 또 유행을 타게 될지도 모른다.

두 대 빼고 이 세상에 없는 미니카들


제일 위에서 좌측 하단의 미니카가 어디에 나왔냐 하면 바로 에반게리온에서 네르프 공식 업무용 쿠페로 나온다. 이전에는 울트라맨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유행은 돌고 또 돌고 계속 돈다.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부분이 의상일 텐데 모두가 알겠지만 지구 상에 더 이상 새로운 의상이 없다. 그냥 계속 돌고 돌고 리폼하고 또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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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결착


여름은 바야흐로 색으로 물 든다. 여름은 물 드는 계절이다. 시원함으로 물 들고, 싱그러움으로 물 든다. 여름은 그렇게 결착된다. 여름은 다른 계절의 미움을 받는다. 온통 푸르고 열기가 가득하고 뜨겁고 활기에 찬 여름은 다른 계절의 질투를 부른다. 여름에는 여름만의 과일이 있다. 빨갛고, 그린그린에 씹으면 즙이 죽 나오는 복숭아와 자두 같은 여름의 과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올해 여름에는 다른 해보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 지내고 있다. 시간상으로 보면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다. 일하는 곳에는 에어컨이 없다. 로비에 건물 중앙식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데 문을 열어 놓고 서큘레이터만 틀어 놓아도 시원하다. 오전과 저녁에 출퇴근을 할 때 운전을 하면서도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본디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경향도 있지만 올여름에는 다른 해보다 더 많이 달려서 그런지 에어컨 바람을 멀리 하고 있다. 에어컨 바람은 기묘하지만 여름의 싱그러움을 퇴색시킨다. 푸석하게 만들고 코 안까지 바짝 마르게 해 버린다. 저녁에 조깅을 하고 나면 바람도 시원하게 분다. 말도 안 되는 색감을 하늘은 보여준다. 요즘 여름 과일이 조금 덜 달았으면 좋겠다. 씹었을 때 약간 신맛이 탁 하고 입안으로 퍼졌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포도를 입 안에 넣고 껍질 째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껍질에서 나오는 즙을 느끼며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신다. 이토록 여름은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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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ㅋㅋㅋ



우영우 보는 재미가 좋다. 우영우의 어떤 타이밍이 좋냐면 요컨대 주위에서 하는 말이 우영우가 듣기에 이건 아닌데?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 놓고 아니다 할 수 없을 때 짓는 표정이나, 타인과 코드가 맞아떨어졌을 때 기뻐하는 그 타이밍을 보는 게 좋다.


이번 12화에서 준호의 레이스에 우영우와 함께 모두가 놀라 자빠지는 표정들이 재미있었다. 깔깔깔. 마지막에 류재숙 변호사와 함께 모여 비빔밥을 먹을 때 시를 낭송한다. 그때 다른 두 명도 좋아하는 시인을 이야기한다.


나 역시 시를 아직까지는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 시인들에 대해서 짤막하게나마 이야기를 하고 싶다. 류재숙 변호사와 함께 한 명은 고정희 시인을 좋아했고, 또 한 명은 김수영 시인을 좋아한다. 고정희 시인은 지리산 시인으로 불릴 만큼 지리산을 자신의 몸처럼 좋아한 시인이었다.


불행하게도 지리산에 올랐다가 실족사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해남에 가면 고정희 시인의 생가를 개방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녀가 시를 쓰기 위해 얼마나 청렴하게 마음을 비우고 시에 다가갔는지 알 수 있다. 고정희 시인은 ‘오늘 하루를 생애 최고의 날처럼, 또한 마지막 날같이’를 지침으로 삼고 43년 짤막한 삶을 살다가 갔다. 그녀의 시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이번 12화에서 언급이 된 이유는 아마도 고정희 시인이 살아생전 여성운동의 길을 닦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강대 대학원 문학 박사인 김승희 시인에 의하면 [고정희에 와서 젠더를 문제의식으로 가지게 되었고 ‘여성도 민중‘이라는 역사적 발견을 외쳤으며 ‘가부장제적 유교 문화 비판’과 ‘여성적 글쓰기’의 고민을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국 여성 시는 고정희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라지는 새로운 경계를 그었다고. 황무지 같았던 한국 여성주의 문학의 개척자이자 여성운동에 마중물을 부어 ‘푸르른 봇물’을 튼 고정희.]라고 했다.


또 김수영 시인이 언급이 되는데 그는 알다시피 모든 권력과 불이익과 부조리에 대항하는 저항 시인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419 시인이라 불리는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의 625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참담함과 꺼져가는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김수영 시인을 하루하루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후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도로에는 시취가 아직 났고 부서진 건물은 복구가 되지 않아 뼈대가 다 드러나 있던 시대. 친구였던 박인환 시인은 밤이면 혼돈 속에서 어쩌지 못해 술을 마시기만 했다.


친구인 박인환 시인이 박살 난 대한민국을 몽마르트르 언덕과 숙녀와 목마로 예쁘게 덮을 때 김수영은 피가 흐르는 땅바닥에 나무를 심고 물을 흐르게 해야 했다. 시간이 걸려도 그래야 했다. ‘김수영의 연인’이라는 그의 아내(역시 문필가)가 쓴 에세이를 읽어보면 김수영의 뾰족한 날카로움에 대해서 잘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김현경 여사.


그리고 류재숙 변호사가 낭독한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이 나온다. 제 몸을 불태워 재가 되어가면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하는 연탄에 대해서 안도현만큼 쓴 작가도 없을 것이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버려질 연탄처럼 되는 게 싫어 인간은 늘 여지를 남겨두고, 배후에서 무엇인가 노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더 유명한 시는 간장게장 시로도 유명한 ‘스며드는 것’이 있다. 이미 티브이 방송부터 여러 매체에 나왔는데 해가 지는 어스름 저녁에 읽어보면 울컥하게 되는 시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 시인의 뭐랄까, 추종자 내지는 광팬, 백석 시인을 사랑하다 못해 백석이 되고픈 현시대의, 현시대의 뭔가 어울리는 말이 있을 텐데, 암튼 그렇다. 안도현 시인은 결국 ‘백석 평전’을 펴냈다. 이게 거의 500페이지나 되어서 읽는 데 식겁했다. 만약 백석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백석 평전을 권한다. 백석에 관한 모든 것이 다 있고, 더불어 안도현 시인의 그에 대한 사랑도 느껴 볼 수 있다.


또 안도현 시인은 동화 작가로도 유명한데, 고래가 나오는 동화책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남방 큰 돌고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돌고래가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돌고래 이름도 ‘체체’. 그리고 ‘밤새 콩알이 굴러다녔지’라는 시집의 표지에도 고래가 있다는 사실. 또 바다에 나간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서 주인공 강푸른이 아빠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 ‘고래가 된 아빠’의 표지에도 강푸른이 흰 수염 고래를 타고 나는 그림이 있다.


그래서 이쯤 되면 비록 짤막하게 언급되었지만 고정희 시인과 김수영 시인과 안도현 시인이 왜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우영우에서 언급이 되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우영우가 대표를 엘베에서 만나 고민을 말할 때 키스타임과 아빠가 넌지시 사귀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을 때 없습니다,라고 칼같이 말할 때 큭큭큭. 권모술수는 날이 갈수록 빙구미가 나오는 것 같고. 카체이싱 장면에서 뒷자리 표정들 ㅋㅋㅋ 커엽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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